순간 주혜민의 눈에서 한 줄기 빛이 스쳐 지났다. 주혜민이 침대에서 바로 일어났다.어젯밤 투여받은 약으로 많이 좋아졌다. 하지만 다쳐 이틀간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내일 검사해서 아무 문제가 없으면 퇴원할 수 있었다.컨디션이 괜찮았던 주혜민은 행동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노크 소리에 주혜민의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상준 씨 왔나?'나상준이 여태 주혜민의 앞에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주혜민은 알 것 같았다. 그가 자기에게 화가 나서 오지 않은 것이라고 여겼다.하마터면 낯선 남자와 안 좋은 일에 엮일 뻔했다. 분명 나상준이 화를 낼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상준을 이해하기로 했다.나상준이 병원에 오지 않더라도 주혜민은 서운하지 않았다. 되려 자기에게 화를 내줘서 좋았다.나상준이 자기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주혜민은 충분했다.갑자기 들려오는 노크소리에 주혜민은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차올랐다.참다못한 나상준이 병실로 찾아온 줄 알았다.주혜민은 버선발로 문을 열기 위해 가려다가, 다시 침대 가장자리에 돌아가 앉았다.침대에 앉아 그의 걱정을 받는 게 좋을 것 같았다.주혜민은 침대에 침착하게 앉았다.간병인은 노크 소리에 문을 열기 위해 일어나려다, 벌떡 일어서는 주혜민을 발견하고 그녀를 부축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그러다가 갑자기 자리에 다시 앉는 주혜민을 멀뚱멀뚱해서 쳐다보았다.간병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래요?"주혜민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병실 문을 바라보았다. 노크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서 문 열어줘요."간병인은 의아한 얼굴로 방문을 열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간병인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네."간병인이 문을 열자, 휴대폰을 들어 일하는 척하는 주혜민이다."누구..."간병인은 병실 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물었다.간병인의 목소리에 주혜민도 고개를 들고 밖을 내다보았다.병실 밖에 서 있는 인물을 확인한 주혜민의 몸이 굳었다
휴대폰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이미 욕실로 들어가 물을 틀고 씻기 시작한 나상준은 벨 소리를 인식하지 못했다.설사 들었다고 해서 씻다가 나올 사람도 아니었다.차우미는 작업 가방을 챙겨 들고 책상에 앉아 일을 시작했다.출발 시간 전까지 일하기 충분했다.나상준이 씻고 나왔을 땐, 휴대폰도 울리지 않았다. 그는 창문 앞에 앉아 일하는 차우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촘촘하게 내리는 빗소리가 들려왔다. 안개가 하얗게 뒤덮인 도시는 흐릿한 형체만 보일 뿐이다.방 안의 불을 켰다. 차우미는 의자에 앉자 펜으로 자료를 넘기며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었다.침착한 모습은 마치 궂은 날씨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것 같았다. 나상준이 파우더룸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두 사람의 옷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셔츠를 입은 나상준은 옆에 있는 거울을 바라보며 단추를 잠갔다.가늘게 들리던 빗소리가 파우더룸에서는 들리지 않았다.고요한 적막 속에 그녀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가끔 들렸다.옷을 챙겨입은 나상준은 시계를 착용하고 다시 한 번 거울을 확인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빈틈없는 남자가 서 있었다.밖으로 나간 나상준이 휴대폰을 들었다.스크린이 밝아 지면서 부재중 전화와 읽지 않은 메시지가 표시되었다.발신자에 선명히 찍혀 있었다. 진현이다.부재중 전화와 메시지는 전부 진현이 보낸 것이다.미간을 살짝 찌푸린 나상준이 내용을 확인했다.[나 회성이야. 시간 될 때 보자.]가벼운 호흡으로 가다듬던 나상준이 휴대폰을 두드렸다. 진현에게 답장을 한 뒤, 다시 시선을 차우미에게 돌렸다.일에 몰두한 차우미는 분리된 공간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나상준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침 먹으러 가자."평소처럼 섹시하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차우미가 행동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고개를 들어 단정하게 차려입고 다가오는 나상준을 바라보았다.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물건을 챙긴 뒤, 나상준은 그녀의 휠체어를 밀고 밖으
주혜민의 얼굴이 차가워졌다.주혜민은 진현의 속셈을 단번에 알아차렸다.진현이 그녀의 눈빛에 고개를 푹 숙이고 피식 웃었다.주혜민이 얼굴을 찡그리며 불쾌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진현이 웃으면서 말했다. "거짓말이야."진현이 고개를 들고 주혜민을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주혜민의 얼굴이 차갑게 변한 것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주혜민이 잠시 벙쪄 있더니 이내 미간을 폈다. "진현 씨, 변했어.""음?"뜬금없는 주혜민의 말에 진현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주혜민이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나빠졌어.""전에는 이렇게 나 놀리지 않았잖아.""전에는..."진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입속으로 말을 삼켰다.그의 뇌리로 많은 추억이 스쳐 지났다.전에 진현은 주혜민이 하는 말은 무조건 들었다. 그녀가 말한 대로 진현은 여태껏 한 번도 주혜민을 속이거나 농락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주혜민에게 진심이었고 진지했다.하지만 진현이 다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항상 자신감에 차 있는 주혜민을 바라보며 진현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혜민 씨 말처럼 그건 예전이었잖아."주혜민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녀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당황스러움, 미안함,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시선을 돌린 주혜민이 입술을 살짝 깨문 채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며 애써 웃었다. "시간 정했어? 어디서 만나?"주혜민이 평소처럼 물었다.진현이 여전히 미소를 유지한 채 대답했다. "아직." ...차우미가 나상준과 아침을 먹고 약속 장소로 이동했다. 아침보다 빗줄기가 거세졌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물주기가 회성을 흠뻑 적셨다.공기 속에 차가운 빗물 내음이 가득 찼다. 맡아본 적 없는 냄새다.하성우도 오늘 참석했다. 어제 말했던 것처럼, 앞으로 일정에 하성우도 함께 참석한다. 그는 말한 대로 하는 성격이다.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씨였지만, 쾌활한 하성우덕에 모두 분위기가 좋았다. 그들은 함께 차를 타고 작은 마을로 향했다.목적지는 도시에서 떨어진 곳에 있다. 회성의 남쪽에
하성우가 차우미에게 시선을 돌렸다. 환하게 웃으며 질문하는 하성우는 마치 어젯밤 자기가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물었다.차우미가 순간 멈칫했다. 그녀의 눈에 약간의 당황스러움이 묻어 있었다.소파에서 잔 것과 바닥에서 잔 것은 별반 다를 게 없었다.정확히 말하면 나상준은 바닥이 아니라 소파에서 잤다.차우미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녀는 뭐라고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하성우는 차우미가 당황한 모습을 바라보며 즐거운 듯 미소를 지었다."정말 그랬나 보네..."그의 시선이 다시 나상준에게 향했다. 꽤 고소해하는 듯한 얼굴이다.말없이 듣고 있던 나상준이 눈을 떴다.나상준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하성우을 빤히 쳐다보았다.순간, 하성우도 긴장했다.나상준의 끝이 보이지 않는 눈빛에 하성우는 몸이 바짝 긴장되었다. 주먹을 입술에 대고 가볍게 기침한 나상준이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 날씨 진짜 좋네. 난 이렇게 비 오는 날이 낭만적이더라."차우미는 뜬금없는 하성우의 말에 반응하지 못했지만, 긴장감은 풀렸다.차우미는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이다. 만약 하성우가 끝까지 캐묻는다면 차우미는 정말 난감했을 것이다.그러나 뜬금없이 낭만 타령을 해대는 하성우를 차우미는 따라갈 수 없었다.그녀는 낭만에 대해 알지 못했다.입술을 살짝 오므린 차우미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시선을 다시 자료로 돌렸다. 대꾸를 못하면 안 하면 되는 거다, 굳이 자기를 난처하게 만들 필요가 없었다.하성우가 이내 입을 열었다. "형수, 회성에 온 지도 며칠 됐는데 여기 어떤 것 같아?" 시선을 자료로 옮긴 차우미에게 질문하는 하성우다. 차우미는 고개를 살짝 들어 창밖의 자욱한 안개를 바라보았다. 안개 사이로 언뜻 보이는 고층 빌딩은 몽롱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좋아.""좋다고? 어떻게 좋은데? 아주 좋은 거야, 나쁘지 않은 거야, 별로인 거야?"말꼬리를 잡는 하성우에게 차우미가 잠시 고민했다. "음...""너 한가하냐?"
하성우의 해설과 함께 박물관 일정이 끝났다. 점심에 간단히 밥을 먹고 나오자 빗줄기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하 교수가 비도 잦아졌으니 밖을 돌아다니자고 제안했다.모두 찬성했고 그들은 우산을 들고 걸음을 옮겼다.차우미는 발목이 완전히 낫지 않은 탓에 거동이 불편해 식당에 남아 있기로 했다.마침 식당의 위치가 좋았던 탓에 작은 마을을 전반적으로 둘러볼 수 있었다.비가 많이 잦아들자, 하늘도 맑아졌다. 비록 빗줄기가 가늘게 떨어지고 있었지만, 마을 전체를 뚜렷하게 볼 정도는 되었다.푸른 기왓집들이 들쑥날쑥하게 자리 잡은 마을이다. 수양버들이 가볍게 흩날리고 부스러진 빗방울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 같았다.차우미는 붉은 끈을 동여맨 백 년 된 나무를 바라보았다.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청석판길을 따라 부슬부슬 흘러내렸다.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말로 형용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을 하였다.모든 생명체가 집결된 것처럼 이곳은 활기찼다.나상준은 박물관 뒤에 서서 휠체어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의 시선은 줄곧 차우미에게 향했다.차우미도 밖에서 거닐고 있는 무리에 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결국, 이 아름다운 정경을 멀리서 눈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대표님, 여기요."운전기사가 우산을 들고 나타났다."음."나상준이 짧게 대답을 한 뒤, 허리를 굽혀 차우미를 안아 올렸다.당황한 차우미는 고개를 들어 나상준을 빤히 쳐다보았다.평소처럼 담담한 나상준이라 무슨 생각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차우미가 다급히 물었다."어디 가려고?"여기서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기로 했는데 돌아온 사람들이 그들이 이곳에 없는 것을 알면 놀랄 것이다. "나가서 좀 걷자."차우미가 당황했다.'나가서 걷자고?'차우미는 나상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의아한 얼굴로 나상준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상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말없이 그녀를 안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운전기사가 휠체어를 거둔 뒤, 따라 내려갔다.아래
빗줄기가 점점 거세졌다. 나상준의 셔츠를 포함해 밖에 있는 모든 것을 적셨다.나상준이 마침내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차우미는 고개를 돌렸지만, 전처럼 평온하지 않았다.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나상준의 행동을 달가워하지 않았다.이렇게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를 밀고 밖으로 나오는 그의 행동이 불편했다.농염한 속눈썹을 움직이며 말하는 차우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나상준이 감기 들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다만 나상준과 너무 가까이 있는 것이 부담스러울 뿐이다.눈을 치켜들자 시선이 앞쪽으로 떨어졌다. 나상준은 그녀를 밀고 앞으로 나아갔다. 동굴같은 저음이 차우미의 귓가에 들려왔다."괜찮아."차우미가 눈살을 찌푸렸다.나상준은 차우미의 말을 듣지 않았고 차우미도 더는 말하기 싫어 입술을 굳게 다물고 다시 말하지 않았다.비는 오후 내내 내리다가 4시가 되어서야 멎었다. 5시에 하성우는 나상준에게 연락해 식사 장소를 알려주었다.시내로 돌아가서 밥을 먹자면 두 시간이 더 소요되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저녁까지 먹은 뒤 돌아가기로 했다. 나상준은 차우미를 데리고 하성우가 말한 장소로 향했다. 모두 모이자 함께 저녁을 먹었다.늘 그래 왔던 것처럼.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차우미의 신경이 나상준에게 향한 것이다. 그녀는 식사 내내 나상준을 주의 깊게 여겨보았다.그녀를 휠체어에 앉힌 채 오후 내내 작은 마을에서 한참이나 돌아다녔다. 그의 옷은 충분히 젖어 있었다. 그러나 나상준은 전혀 개의치 않고 그녀를 밀고 앞으로 나아갔다.그녀가 몇 번이나 돌아가자고 제안했지만, 그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차우미도 어쩔 수 없었다. 가능한 최대한 빨리 호텔로 돌아가 나상준에게 휴식할 시간을 주는 수밖에 없었다.하성우는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웃음꽃을 피웠다. 하성우도 차우미과 나상준 사이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챘다. 특히 차우미의 행동이 달라진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매번 다른 사
하성우가 둘을 부부로 여기고 있기에 차우미도 굳이 나상준과 거리감을 두지 않았다."아... 그랬구나."하성우가 나상준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며 차우미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형수, 걱정하지 마. 상준이 건강해. 비 좀 맞았다고 아프지 않아."하성우가 대답하기도 전에 하성우가 계속해서 말했다. "여기서 약국 못 봤어. 다른 분들 호텔로 모셔간 뒤에 약국 찾는 게 어때?"하성우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도 매우 난처해하는 눈치였다.차우미가 무의식적으로 앞의 차를 바라보았다. 몇 대의 차가 앞에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녀는 다시 옆에 앉아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나상준은 줄곧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차우미가 고민하더니 물었다. "어디 불편한 곳 없어?""몸 안 좋으면 말해."그는 줄곧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운 상대였다. 얼굴에 티를 내지 않아 그의 상태를 알아차리기도 어려웠다.결국 차우미는 안 좋은 곳이 있으면 말하라고 귀띔하는 수밖에 없었다.하성우가 안전벨트를 매고 운전기사가 시동을 걸고 앞차를 따라갔다.하성우는 뒷좌석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실룩거렸다.'무슨 짓을 했길래... 역시 머리가 좋다니까.'나상준을 걱정하는 차우미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관심 어린 눈빛으로 나상준을 걱정했다. "아직 멀쩡해."순간, 차우미의 눈썹이 팽팽하게 당겨졌다.'아직은 멀쩡하다니? 그럼 나중에는 안 좋아질거라는 거야?'회성까지 돌아가려면 두 시간이 소요되었다. 가는 도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정말 난감해진다.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이따가 불편한 곳이 있으면 말해. 가까운 곳을 찾아서 약부터 사자.""음."두 사람 사이에 지극히 평범한 대화가 오갔지만, 이 대화를 듣고 있는 하성우는 이 상황이 웃겼다.일부러 차우미의 관심을 받으려고 저런 대답을 하는 나상준이 웃겼다.'저 능구렁이 같은 게.'하성우가 앞에 앉아서 애써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차우미의 몸이 굳었다.하성우가 돌발 행동을 할 줄 몰랐던 차우미는 그대로 하성우에게 끌려 나상준의 이마에 손을 올려놓았다.손바닥으로 나상준의 온기가 전해졌다. 비바람처럼 갑자기 그녀의 피부로 전해와, 그녀의 혈관을 타고 몸속 깊숙이 뜨겁게 달궜다.빠르게 뛰는 심장에 차우미가 다급히 손을 뺐다. 기름에 덴 것처럼 다급히 손을 뺀 차우미는 옆으로 살짝 옮겨 앉았다.하성우가 여유롭게 자기 손을 거둬들였다.그는 아주 즐거워 보였다.둘이 스킨십하게 하기 위해 나상준 대신 자기가 나서기로 했다.하성우는 나상준이 만족스러워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차우미를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나상준이 안타까워 하성우가 나선 것이다.건치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 하성우다.하지만 하성우의 얼굴이 이내 굳어버렸다.차우미가 대뜸 나상준과 거리를 두고 앉아버리는 바람에 하성우가 여간 당황한 것이 아니다.'무슨 상황이야?'두 사람은 3년간 부부였다. 그런데 이마 하나를 만졌다고 저렇게 소스라치게 놀라는 차우미의 행동이 하성우는 되려 이상했다.하성우는 시선을 돌려 나상준과 차우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차우미가 자신의 양손을 맞잡고 꼼작도 하지 않고 굳어버렸다.그녀의 얼굴과 귀가 눈에 띄게 붉어졌다.결혼한 여자가 보일만 한 반응이 아니다. 마치 학창시절 처음으로 남학생과 가벼운 스킨십을 한 여학생의 반응 같았다.하성우의 얼굴이 멍해졌다.'3년간, 도대체 뭘 한 거야?'평소의 하성우라면 분명 마음속 궁금증을 입 밖으로 내뱉었을 것이다.하지만 민감하게 반응하는 차우미 때문에 하성우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두 사람을 쳐다보는 하성우의 머리가 복잡해졌다.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안의 분위기가 급격히 고요해졌다.차 문에 기대앉은 차우미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빠르게 뛰었다. 아까보다 훨씬 빠르게 뛰어댔다.그녀는 나상준과 하성우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잔뜩 긴
하선주는 이제 차우미 옆자리에는 온이샘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게다가 온이샘은 하선주에게 특히 좋은 인상을 남겨서 온이샘에 대해 매우 만족하고 좋아했다.차우미는 워낙 하선주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기에 하선주가 눈치채자, 그냥 자연스럽게 대답하려고 했다.그런데 하선주가 갑자기 온이샘을 얘기할 줄은 몰랐다.차우미가 웃으며 말했다.“선배가 아니라 상준 씨랑 같이 가.”“나상준?”하선주의 미간이 순식간에 찌푸려졌고 얼굴도 일그러졌다. 마치 눈 깜짝할 사이에 맑은 하늘에 먹장구름이 낀 것 같았다.“나상준은 왜 너와 같이 있어? 둘이 뭘 하는 거야? 그런데 왜 안평으로 오는 거야? 나씨 가문에 무슨 일 있어?”하선주의 불만이 섞인 말투와 함께 질문들이 쏟아졌다.나상준과 온이샘에 대한 하선주의 태도는 하늘과 땅이었다.이런 하선주의 반응을 차우미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할아버지와 할머니 뵈러 오는 거야.”“...”표정이 굳어진 하선주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차우미의 말 한 마디에 무슨 일인지 알아챘다.분명 나씨 가문의 이혜정이 나상준에게 직접 가서 사과하라고 명령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나씨 가문 이혜정의 일 처리는 오늘날 젊은이들은 비교할 수도 없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선주는 마음이 불쾌했다.차우미는 하선주가 비록 말하지 않지만 듣고 있다는 걸 알고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나씨 가문과 차씨 가문의 관계 때문이라도 상준 씨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뵈러 오는 건 정상적인 일이야. 그러니 화내지 마.”“내가 왜 화를 내? 그리고 화를 낼 필요도 없어. 그냥 안 보면 되지.”하선주가 불쾌함을 직설적으로 얘기하는 걸 듣고 차우미는 웃었다.“엄마, 이제 다 지난 일이야. 우리 이혼한 지도 벌써 몇 달 지났잖아. 상준 씨도 나도 이제 모두 각자의 삶이 있으니 두 가문은 예전대로 서로 왕래하면서 지내면 돼.”차우미의 아무렇지 않아하는 말을 듣고 있던 하선주는 순간 바늘에 찔린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어렸을 때부터 말도 잘
“짐은 저 주세요.”나상준의 아무런 감정도, 온도도 없는 목소리가 두 사람의 귓가에 들렸는데 봄날 같은 분위기가 순식간에 깨졌다.온이샘은 시선을 살짝 돌려 나상준을 보았는데 나상준도 아무런 흔들림 없는 깊은 눈동자 온이샘을 보고 있었다.나상준은 지금 아주 담담하게 온이샘이 반드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차우미의 캐리어는 이제 나상준에게 넘겨줘야 했기에 온이샘은 캐리어를 잡았던 손에 힘을 꽉 주었다가 바로 풀고 나상준에게 넘겼다.차우미가 말했다.“내가 하면 돼.”그녀가 말하면서 손을 내밀었지만 이미 늦었다.차우미가 손을 뻗었을 때 골격이 분명한 손이 이미 캐리어를 잡고 자기 앞으로 가져갔다.나상준이 차우미를 바라보며 말했다.“가자.”차우미는 허공에 있는 손을 거두며 캐리어를 잡은 나상준의 손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온이샘을 향해 말했다.“선배, 우리 안평에서 봐.”온이샘도 부드러운 미소로 대답했다.“그래, 안평에서 보자.”그리고 차우미는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온이샘은 그 자리에 서서 가냘픈 몸매가 자신의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키 크고 분위기가 차가운 남자도 보이자,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차우미가 다른 남자와 함께 가는 모습을 보니 마치 다른 남자와 함께 그를 멀리 떠나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온이샘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억지로 이성을 회복했다.그는 온평에 가서 차우미를 만나면 마음속의 말을 모두 할 건데 그녀만 좋다면 온이샘은 두려운 것이 없었다.차우미와 나상준은 대기실을 떠나 VIP 라운지로 갔는데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서둘러 비행기를 탈 필요가 없었다.때문에 두 사람은 라운지의 휴식 구에 가서 앉았다.그러자 직원이 차와 디저트를 가져왔고 차우미는 휴대폰을 꺼내서 시간을 확인하더니 소파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는 나상준을 보며 말했다.“나가서 전화하고 올게.”나상준은 여전히 간단하게 알았다고 했다.차우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들
하얀 셔츠, 연한 캐주얼 바지, 뼛속에서부터 뿜어 나오는 좋은 가정 교양과 준수하고 우아한 얼굴은 대기실의 밝은 조명을 받아 더욱더 환하고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나상준은 눈동자를 살짝 움직이더니 서두르지 않고 평온한 속도로 걸어갔다.“다 됐어?”모두가 한곳에 모여 발걸음을 멈추자마자 온이샘이 먼저 말했다.차우미는 고개를 끄덕이고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응. 선배 이제 캐리어는 나 줘.”온이샘이 뭔지 몰라 흠칫하더니 말했다.“괜찮아. 내가 들게.”“그게 아니라, 선배, 우리 탑승구가 달라.”온이샘 얼굴에 있던 부드러운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탑승구가 다르다고?’그는 머릿속으로 차우미가 나타나던 방향을 생각하더니 그제야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를 깨달았다.사실 온이샘은 비행기 탈 때 보통 퍼스트 클래스가 아닌 이코노미석을 타고 다녔다.가끔 중요하거나 급한 일이 있을 때만 퍼스트 클래스를 선택할 뿐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코노미석이 익숙했기에 오늘도 습관적으로 티켓팅을 할 때 이코노미석을 예약한 것이다.하지만 나상준은 달랐다. 그는 지위와 신분 때문에 매번 퍼스트 클래스를 타야 했는데 따라서 차우미도 그와 함께 다닐 때마다 자연스럽게 퍼스트 클래스를 탔다.그런데 온이샘은 오늘 티켓을 예매할 때 이 부분을 놓친 것이다.온이샘은 잠깐 생각하더니 곧바로 말했다.“잠깐만, 나도 좌석 업그레이드하면 돼.”말을 마치고 그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서 좌석 업그레이드를 시도했다.온이샘은 차우미가 이코노미석인 줄 알고 있었는데 만약 차우미가 퍼스트 클래스인 줄 알았다면 진작에 퍼스트 클래스를 샀을 것이다.조금 전에 차우미는 온이샘의 표정을 보고 있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온이샘이 먼저 말을 하는 바람에 차우미는 하려던 말을 하지 못했다.지금 온이샘의 행동을 보며 차우미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온이샘의 선택을 간섭할 권리가 없다는 생각에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상준은 차우미 옆
여가현과 통화를 마친 온이샘의 눈에는 미소가 가득했고 거기에는 굳은 의지도 담겨 있었다.여가현의 말을 듣고 그는 마음이 많이 안정되었다. 원래 차우미가 자신을 선택하지 않을까 봐 두려웠었는데 지금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나상준이 차우미 옆에 있다고 해도 이제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을 것이다.그 순간 가슴속으로부터 무한한 힘이 솟구쳤는데 온이샘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차우미가 자신을 인정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기 때문이다.같은 시각, 공항 로비에서 나상준은 곧장 VIP 게이트로 향했는데 차우미는 처음에 아무 생각 없이 따라 가다가 가는 방향이 VIP 게이트인 것을 보고 무언가 떠올렸다.온이샘이 구매한 항공권은 퍼스트 클래스가 아닌 이코노미석이어서 그녀에게 보낸 사진도 일반 대기실이지 VIP 라운지가 아니었다.차우미는 그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멈추고 옆에 있는 나상준을 불렀다.“상준 씨.”나상준은 키가 크고 다리가 길어서 발 폭이 차우미보다 컸지만, 앞에서 걷지 않고 차우미의 속도를 맞춰서 나란히 걷고 있었다.차우미가 발걸음을 멈추는 것을 보고 그도 멈추고 대답했다.“응.”차우미가 말했다.“선배는 이코노미석이어서 일반 대기실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조금 전에 보내온 사진에서 봤는데 일반 탑승구였어. 상준 씨는 먼저 VIP 라운지에 가 있어. 나는 선배한테 가서 캐리어를 가지고 갈게.”VIP 라운지와 일반 탑승구가 다르기에 나상준은 그녀와 같이 갈 필요가 없었다.“그럴 필요 없어.”“응?”“같이 가자.”말을 마치고 나상준은 먼저 출발했다.차우미는 깜짝 놀랐다가 서둘러 그를 쫓아가며 말했다.“같이 안 가도 돼. 먼저 라운지에 가서 휴식도 하고 일도 해. 나랑 다니며 시간 낭비하지 말고.”나상준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그러자 차우미도 따라서 발걸음을 멈추고 나상준을 바라봤다.나상준은 차우미를 바라보며 말했다.“나도 같이 가면 안 돼?”차우미는 당황하며 말했다.“아니, 그런 건 아닌데. 나는 그냥...”“
온이샘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알았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서흔이에게 전화해.”“그래.”그들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여가현이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강서흔에게 건네자, 강서흔이 곧바로 물었다.“어때? 잘 된 거야?”여가현은 강서흔의 금방이라도 신랑이 되고 싶어 하는 간절한 표정을 보고 물 한 컵을 가져다 마시며 말했다.“뭐가 돼?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강서흔의 흥분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왜 아직이야? 너무 느린 거 아니야? 나였다면 진작에...”말이 끝나기 전에 강서흔은 즉시 멈추고 조심스럽게 여가현을 바라보았다.여가현은 물컵을 내려놓고 그를 바라보며 헛기침을 두 번 하고 물었다.“진작에 뭐?”여가현의 헛기침 소리에 강서흔은 순간 가슴이 섬뜩했는데 그녀의 웃는 듯 웃지 않는 듯한 표정은 너무 무서웠다.강서흔은 무의식적으로 장난이라는 듯 웃으며 주제를 바꾸려고 했지만 여가현이 꼼짝하지 않고 자기를 바라보는 눈빛에 즉시 생각을 접고 몸을 움츠리며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속삭였다.“나였다면 진작에 덮쳤을 거라고. 나는 네가 동의를 하든 안 하든 무조건 너와 함께할 거야.”여가현은 웃었다.“우미가 나인 줄 알아? 미리 말하는데 우미는 절대 나처럼 양보하고 굽히지 않을 거야. 나상준 씨 어머니도 비록 좋은 사이는 아니었지만 우미를 괴롭히지는 못했어. 우미와 나상준의 이혼도 나상준 씨 어머니와는 아무 관련이 없이 오로지 우미의 뜻이었어. 우미가 한 번 결정하면 아무도 말릴 수 없는 거야. 마찬가지로 우미는 한 번 이혼한 사람을 절대 다시 돌아보지 않는다는 거야. 때문에 절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에게 어울리는 사람을 선택할 거야.”강서흔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두 사람이 다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여가현의 기분은 늘 변덕스러웠다.예를 들어 조금 전에 온이샘과 통화할 때는 태도가 좋더니 지금 강서흔을 대하는 태도는 확연히 달랐다.사실 여가현의 마음에 여전히 불만이 있었는데 수년간 쌓인
그들은 모두 성인이고 몇 년간의 사회 경험도 있기에 어떤 일은 상세하게 말하지 않고 몇 마디 간단한 말로도 충분히 이해한다.온이샘은 조금 전에 여가현의 말을 듣는 순간 따뜻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얼어붙었었는데 지금 여가현의 말을 듣더니 다시 따뜻해지더니 심지어 뜨거워졌다.그는 눈에 불을 켜고 휴대폰을 꼭 잡으며 마음속의 희열을 억누르며 물었다.“그러니까 우미는 나와 함께 하고 싶어 한다는 거지?”여가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맞아. 우미도 선배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잘 알기에 함께하고 싶어 해. 우미가 눈이 멀지 않은 한 당연히 선배를 선택하지 않겠어?”그렇다, 눈이 멀지 않은 한 누군들 마음이 움직이지 않겠는가.17살 어린 소녀도 아니고 사회생활도 해봤고 또 결혼 생활도 해봤기에 차우미는 모든 방면에서 충분히 성숙하였다.온이샘과 같은 훌륭한 남자가 좋아한다고 하는데 싫어하면 그게 이상한 거다.온이샘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웃었다. 그는 초승달 같은 눈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얼굴에 기쁨과 만족이 가득했다.공항의 불빛은 줄곧 온이샘을 감싸고 있었는데 그가 웃는 순간 검은 구름이 사라지고 달빛이 내리쬐듯 눈부셨다.온이샘의 미모는 나상준과 완전히 달랐다.한 명은 빙산에서 사는 것 같고 다른 한 명은 계곡에서 사는 것 같았다.그들은 각자 모두 훌륭했다.여가현은 온이샘이 웃음소리를 듣고는 같이 웃으며 긴장을 풀었다.“선배, 너무 일찍 기뻐하지는 마. 우미가 선배를 선택했다고 해도 결혼까지 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야.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우미가 선배를 선택한 것은 지극히 정상이겠지만 마찬가지로 함께 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 역시 정상인 거야. 그러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온이샘이 웃기 전에 여가현은 두 사람 때문에 엄청나게 긴장하고 걱정했는데 온이샘의 웃음소리를 듣고는 갑자기 홀가분해졌다.한 사람은 선택하려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녀의 선택만을 기다리고 있기에 어찌 됐든 여가현은 두 사람에게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
여가현은 나상준에 대한 인상이 줄곧 좋지 않았다.하지만 예전에 두 사람이 부부로 사는 동안 그녀는 그들의 생활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그런데 차우미가 결혼 3년 동안 나상준과 한 번도 제대로 된 부부생활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말을 듣고 폭발했다.여가현은 그럴 거면 혼자 살지 왜 결혼했냐고 엄청나게 화를 냈었다.결혼해서 와이프로 맞이해 놓고 3년 동안 장식처럼 둘 거면 왜 젊은 여인의 청춘 시절을 짓밟은 건지 정말 화가 났다.만약 조용하게 이혼하고 다시 시작하기를 바라는 차우미만 아니었다면 여가현은 반드시 나상준을 따끔하게 혼을 내줬을 것이다.어찌 됐든 차우미가 이제라도 이혼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차우미는 나상준을 떠나도 충분히 잘 살 수 있었다.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도 잘 살고 있기 때문이다.결국 여가현은 아무리 나상준에 대해 불만이 많아도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그런데 이혼 후에도 나상준이 계속 차우미 주변에 얼씬할 줄을 몰랐다.아이를 내세워서 함께 하려고 하더니 이젠 또 차우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만나러 간다는 핑계까지 어이가 없었다.‘할 일이 없는 거야? 아니면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그것도 아니면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려는 건가?’어떤 이유로든 여가현은 나상준이 차우미의 옆에 있다는 말에 불쾌해서 욕을 퍼붓고 싶었다.그렇지 않아도 며칠 동안 나상준을 조사해 봤지만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아 불만이고 화가 치밀어 올라 있었다.온이샘은 휴대폰으로 여가현의 분노와 불만을 들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나상준이 차우미 옆에 자주 나타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이유를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온이샘도 남자이기에 당사자인 차우미는 몰라도 나상준이 차우미에 대한 마음을 그는 모를 리가 없었다.다만 차우미가 나상준을 대할 때 일정한 거리감을 두고 아무런 남녀 사이의 감정이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만약 차우미가 나상준이 자신에게 감정이 있는 줄 안다면 절대 조금 전처럼 침착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여가현은 아침에 차우미와의 전화를 끊은 다음 바로 온이샘에게 전화해서 차우미의 생각을 알리고 싶었지만 참았다.왜냐하면 차우미의 말이 맞고 또 그녀의 지금 상황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차우미를 원하면 그녀의 과거도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온이샘이 아무리 훌륭해도 많은 일들을 상대로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차우미가 했던 말은 현재 두 사람 앞에 있는 강이고 시험이다. 두 사람이 그 강을 건널 수 있는지가 이제 결과를 결정할 것이다.만약 무난하게 강을 건널 수 있다면 아무 문제 없이 잘 된 것이고 그럴 수 없다면 지금 시작하기 전에 멈추는 것도 나쁘지 않은 거라고 생각했다.때문에 여가현은 전화하지 않고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도전에 직면하여 그 험난한 도전을 이겨냈으면 했다.그래야 결과가 어떻든지 모두 후회가 없을 것이다.다만 반나절이 지났는데 차우미의 전화가 없고 또 온이샘도 강서흔에게 전화하지 않으니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강서흔이 점심 먹으러 가자고 조를 때 바로 동의했다.식당에 도착해서 여가현은 모든 것을 강서흔에게 알려주어 온이샘에게 전화해서 현재 상황을 물어보도록 유도했다.여가현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신중한 표정으로 온이샘에게 물었다.사실 여가현은 마음속으로 온이샘이 모든 걸 이겨내고 차우미와 함께 할 것을 바랐고 또 그렇게 될 거라고 온이샘을 믿었다.그리고 차우미가 온이샘과 함께라면 행복할 수 있다는 것도 굳게 믿었다.온이샘은 휴대폰에서 들려오는 여가현의 신중한 목소리를 듣고 손에 힘을 주었다.“나 지금 공항에 있어.”“공항? 안평으로 돌아가는 거야? 우미는 안 만났어?”여가현은 온이샘이 공항에 있다는 말을 듣고 뭔가 상황이 안 좋아졌다고 생각했다.‘설마 선배가 포기한 건가?’순간 여가현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온이샘은 여가현의 말에서 무언가 어렴풋이 짐작하며 가슴을 조였고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하지만 그는 침착한 표정과 말투를 유지하며 말했다.
아침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더니 온이샘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야, 너 웬일이야? 괜찮은 거야? 별일 없어?”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무슨 큰 일이라도 생긴 듯한 강서흔의 다급한 목소리에 온이샘은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온이샘은 비록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뭐가? 별일이라니? 무슨 소리야?”강서흔의 목소리는 아침보다 더 다급하고 또 걱정과 긴장감이 섞여 있었다.분명 작지 않은 일이 있는 것 같았다.강서흔은 온이샘의 말투가 지극히 평온한 걸 느끼고는 계속해서 말했다.“무슨 일이야? 설마 우미가 너에게 아직 얘기하지 않았어?”차우미라는 말에 온이샘은 가슴을 조이며 휴대폰을 꼭 잡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우미가 뭘 말해야 하는데?”“뭘 말하냐고?”온이샘의 질문에 강서흔은 입을 벌리고 옆에 있는 여가현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서흔은 지금 여가현과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여가현이 오전에 줄곧 바빠서 지금에야 점심을 먹게 되었다.워낙 여가현은 모든 일을 끝내고 식사하려고 했지만 강서흔이 일을 못 하게 하고 먼저 식사를 하자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일을 잠시 멈추었다.강서흔은 늘 여가현을 상대로 떼를 잘 썼지만 통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시작하자마자 여기현이 항복해서 그는 깜짝 놀랐다.사실 여가현에게 혼날 각오까지 했었는데 너무 쉽게 통과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하여 그는 여가현이 또 마음을 바꾸기 전에 서둘러 그녀를 데리고 식사하러 나갔고 좋은 말들만 골라서 했다.하지만 여기현은 안색이 좋지 않고 무언가를 생각하며 계속 미간을 찌푸렸는데 무슨 일이 있는 것이 확실했다.강서흔은 여가현이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줄 알고 기쁘게 해주려고 애를 썼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가현은 강서흔을 보는 체도 하지 않고 제지하지도 않고 그렇게 식당으로 가서 주문만 하고는 계속 생각에 잠겼다.강서흔은 여가현이 기쁜 마음으로 식사하도록 노력했다.그가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