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우가 입을 다물었다.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던 나상준이 사주 궁합 같은 것을 믿을 줄 몰랐다.궁합이 잘 맞다는데, 하성우가 거기서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나상준은 이미 궁합을 굳게 믿고 있었다.하성우는 누군가에게 농락당한 것 같았다. 불쾌했다.휴대폰을 들고 돌아가는 나상준에게 하성우가 말했다. "기뻐하기엔 아직 일러. 심나연이 헛소리를 한 모양이야. 우미 씨가 어젯밤 일어났던 일을 모두 알았다고 하더라. 그런데 오늘 보니까, 우미 씨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던데, 어쩌면 널 마음에 두지 않아 그런 반응을 보일 수도 있잖아? 조심 좀 해."나상준은 천천히 자리로 돌아갔다.하성우의 오른쪽 눈썹이 올라갔다.'뭐야, 신경 쓰지 않는 거야?'나상준이 돌아갔을 때, 차우미는 한창 문자를 하고 있었다.그가 옆에 와서 앉을 때까지 차우미의 시선은 여전히 휴대폰에 꽂혀 있다.스크린 위로 발신자 정보가 표시되었다.발신자의 이름은 온이샘이다.순간,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 나상준은 시선을 돌렸다. 그는 컵을 들어 물 한 모금을 마셨다.차우미는 나상준이 돌아온 줄도 모르고 온이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안평시는 요즘 계속 비가 와. 회성은 어때?]차우미가 고개를 돌려 밖을 내다보았다. 맑은 하늘이다. 날씨가 좋았다.밤에 비가 조금 왔지만, 낮에는 오지 않았다.차우미가 답장했다. [여긴 비 안 와. 하늘도 맑고 날씨도 좋아.]온이샘은 친구들과 회식 중이다. 그는 며칠 동안 매우 바빴다. 그래서 차우미에게 연락할 수 있는 시간은 오후와 저녁뿐이었다. 그녀에게 문자를 자주 하고 싶었지만, 혹시나 방해될까 봐 하지 않았다.오늘 친구가 안평시에 와서 함께 식사하던 중, 마침 점심시간 때라 차우미에게 연락했던 것이다.그녀가 답장한 것을 본 온이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친구들이 얘기하던 중, 온이샘의 얼굴이 밝아진 것을 본 사람들은 말없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온이샘이 문자를 끝내고 물 한 모금을 마시자, 사람들이 온이샘을 바라
"그래, 온이샘! 너 농담하지 마.""그래, 이렇게 멋지고 훌륭한 남자가 짝사랑한다고? 그럼 우린 뭐가 되냐?""설마 상대가 천사 같은 여자야? 사진 있어?" "얼른 보여 줘!""빨리 보여줘! 어떤 여자가 우리 학교에서 제일 잘생긴 애를 매혹했는지!"사람들은 온이샘에게 휴대폰을 보여달라고 몰려들었다. 온이샘이 황급히 화면을 거꾸로 덮으며 웃었다. "짝사랑 성공하면 나중에 같이 밥 한 끼 먹자."그들은 온이샘이 얼마나 훌륭하고 성격 좋은지 잘 알고 있다. 잘생긴 애가, 집안도 빵빵하고 자기 일도 똑 부러지게 잘했다. 온이샘은 결점을 찾을 수 없는 사람이다.이런 사람이 짝사랑한다고 하자, 그들은 차우미에 대한 환상만 커졌다.게다가 온이샘은 그녀와 연애할 것 같은 확신도 없어 보였다.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 친구들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이 태도 뭐야?""네가 이렇게 자신감 없는 거 처음 봐.""그러니까, 그 여자 조건이 엄청나게 좋아? 너 정도면 네가 만나고 싶은 여자는 전부 만나잖아. 그런데도 짝사랑을 한다고? 어떤 사람이야?"그들은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온이샘을 짝사랑하게 한 여자의 정체에 대해 궁금했다. 얼마나 대단한 여자이기에 온이샘이 짝사랑하는지...온이샘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그는 확실히 자신감이 없었다. "다른 여자랑 다르거든.""달라? 어떻게 다른데?""음... 여자는 몸매나 얼굴, 집안 이런 조건 보고 사귀는 거 아니야?"그들은 나이가 어느 정도 찼고, 이제는 현실적인 생각을 할 때다. 심장 떨리는 사랑은 그들 나이에 너무 비현실적이다.그래서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온이샘이 눈을 살짝 늘어뜨리더니,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그 모습에 친구들은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온이샘이 그 여자에게 매우 진지하고 진심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방 안이 조용해졌다, 분위기가 가라앉았다.온이샘은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눈치채고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어떤 사람은 한눈에 봐도
차우미 일행은 식사를 끝내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그러나 여전히 회강 강변 근처다. 작은 박물관이다. 회강 강변 일대의 유물들과 문화, 자료 그리고 수백 년 동안 발생했던 대사가 기록된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하성우가 가슴을 치며 오늘은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했다. 그들은 하성우를 뒤따라 그의 소개를 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하성우는 자기의 전문성을 충분히 표출했다.하 교수가 매우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가 올라가게 웃었다.6시에 그들은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이동했고 7시가 되어서야 식사 자리가 끝났다.하성우는 차 앞에 서서 모두를 배웅했다. 곧 차들이 줄지어 떠났고 그곳에는 나상준, 차우미와 하성우만 남았다.하성우가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더니 두 손을 맞잡고 몸을 돌려 빙그레 웃었다. "이제 일도 끝났겠다, 두 분을 위해 준비한 게 있는 게 지금 이동할까요?"하성우가 그들을 위해 다른 놀거리를 준비한 모양이다.바쁜 일정을 소화했으니 여유를 가지며 휴식하는 것도 좋았다.하지만 차우미는 나가서 노는 것보다 돌아가서 업무를 정리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게다가 주혜민도 이곳에 온 마당에, 나상준은 그녀와 시간을 보내는 게 더 합리했다.특히 어젯밤, 심나연이 말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나상준이 좋아하는 사람은 주혜민이다.하성우만 곤란해진 것이다. 차우미는 하성우가 아직 둘의 이혼사실을 모른다고 여겼다. 주혜민을 나상준의 불륜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여겼다.어젯밤 나상준은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나갔다.그녀와 나상준 사이를 오해해 말썽을 피웠고 그녀를 달래기 위해 나상준이 나갔다고 생각한다.고민하던 차우미가 입을 열었다. "둘이서 가, 난 호텔로 돌아가서 오늘 업무 정리하려고. 참, 성우 씨, 이젠 말 편하게 해."하성우가 눈을 깜빡이며 차우미를 바라보았다. 차우미는 어떤 표정 변화도 없었다. 정말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하성우가 미소를 지었다.활짝 웃으면서 나상준을 바라보았다. 재미난 구경을 하려는 것 같았다
하성우가 나상준을 가리키며 흥분해서 말했다. "너한테도 이런 날이 있구나, 하하하!"나상준더러 나가서 재밌게 놀라고 말한 차우미의 단호한 행동에 하성우가 웃음을 터트렸다.차우미가 나상준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나상준은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그가 시선을 돌려 가로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 아주 기뻐 보인다.""어?"하성우가 담담한 나상준의 반응에 멈칫하더니 재빨리 말했다. "당연하지! 네가 얼마나 부러운지 몰라, 이렇게 자유롭고 행복하게 놀 수 있다니! 아내가 남편한테 나가서 재밌게 놀라고 하잖아, 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일 거야. 너무 부럽다."하성우의 말에는 나상준에 대한 조롱만 있었다. 나상준은 말없이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성우는 나상준의 행동에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상준이 아무런 표정 없이 덤덤하게 있자, 자기가 한 말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거로 보였기 때문이다.하지만, 예상 밖의 결과가 초래되었다."나연아."나상준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하성우가 뻣뻣하게 굳더니 황급히 나상준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끊어버렸다.하지만 휴대폰을 빼앗아 황급히 스크린을 눌렀을 땐, 잠금 화면만 보였다. 통화를 하지 않은 것이다. 하성우가 농락당했다.나상준은 허겁지겁 휴대폰을 빼앗아간 하성우의 손에서 다시 휴대폰을 낚아 챈 뒤, 차에 올랐다.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하성우가 내적 비명을 질렀다.'저, 저 괘씸한 인간! 자기 기분 안 좋으니까 내 기분까지 망치려 든 거지?' "나상준, 너무 한 거 아니야?"하성우가 오른쪽으로 달려가 차에 올라타며 말했다.나상준이 손가락으로 휴대폰을 두드리며 말했다. "진짜 나연이한테 전화하는 수가 있다."순간, 하성우가 입을 꾹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괜히 건드렸어!'운전기사는 차우미를 방으로 데려다 준 뒤 나왔다. 차우미가 휠체어에서 천천히 일어나 책상으로 향했다.
"내가 어떻게 대처하든 주혜민한테 애정 표현으로 인식될 텐데, 그런 여자 입에서 나온 말이 어떨지 예상 안 되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하성우가 입을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너... 그렇게 자신있냐?"하성우가 시선을 양훈에게 돌렸다.양훈은 나상준보다 말수가 더 적었다.두 사람이 얘기하는 동안 양훈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하성우도 양훈이 과묵하지만, 머리가 좋은 것은 알고 있다.하성우와 나상준의 속셈을 가장 잘 알아맞히는 사람도 양훈일 것이다."어떻게 할 생각이야?"양훈이 처음으로 꺼낸 질문이다. 모처럼 질문을 하며 나상준을 바라보고 있다.하성우도 얼른 나상준을 바라보았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나상준이 앞으로 어떻게 할지 누구보다 궁금했다.주혜민은 평범한 여자가 아니다. 절대 다스리기 쉬운 여자가 아니다. 오랜 세월, 좋아했던 나상준을 포기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골치 아팠다.나상준은 컵을 든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빛이 그의 손끝에 떨어지며 잔에 담긴 술을 감았다. 흐르는 빛이 은은하게 차갑게 빛났다."서두르지 마."양훈은 바로 나상준의 말뜻을 알아차렸다.그는 시선을 거두고 다시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하성우는 멍한 눈빛으로 나상준을 바라보았다.'서두르지 말라니, 무슨 소리야?'시간을 맞춰뒀던 탓에 알림이 9시 반에 정확히 울렸다. 고요하던 방안에 알림 소리가 울리면서 적막감을 깼다. 차우미가 시선을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어두운 하늘은 검게 물들었다. 가로등이 밝게 밤을 밝혀주었다. 고요한 적막감이 소리 없이 퍼져 나갔다.차우미는 물건을 정리하고 천천히 파우더룸으로 가 옷가지를 가진 뒤 욕실로 향했다.머지않아,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다리가 불편해 씻는 것이 평소보다 오래 걸렸지만, 차우미는 평소 성미가 급하지 않았기에 참을만했다. 욕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 방문이 철컥하고 열렸다.차우미가 문쪽을 바라보았다.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나상준이다.
나상준은 자기 품에 안긴 차우미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시선을 피한 차우미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감돌았다.자기 셔츠를 잡고 있는 차우미의 손에 힘이 들어간 게 느껴졌다.황급히 눈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린 차우미를 안고 침대로 갔다.그녀를 침대에 눕히자 셔츠를 움켜쥔 차우미의 손이 스르르 풀렸다. 몸을 잔뜩 움츠린 차우미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나상준은 자기 품에서 벗어나는 차우미를 바라보았다. 붉어진 귀를 감추지 못하는 차우미를 침대 앞에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이불을 끌어당겨 덮은 차우미가 나상준을 등지고 옆으로 누웠다.그녀는 창문을 마주해 눈을 감았다.예전이었다면 차우미도 분명 술을 많이 마신 나상준을 걱정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상황이 달랐다.그녀는 나상준과 아무 사이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했다.그녀는 자기 일만 잘하기로 했다.베개 위에 흩뿌려진 머리카락이 펼쳐졌다. 눈을 감은 차우미를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나상준이다. 이혼을 한 그들은 각자의 행복을 빌어줘야 할 사이가 되었다.어두운 눈빛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게 만들었다.나상준은 몸을 돌려 욕실로 향했다.차우미는 멀어지는 나상준의 발소리, 욕실 문이 닫히는 소리, 안에서 들리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그제야 긴장의 끈을 놓았다.차우미는 비록 눈을 감고 있었지만, 나상준의 모든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침대 옆에 서서 자기를 바라보는 시선, 그녀를 품에 안아 바라보던 그 시선은 그녀를 긴장하게 하였다.차우미는 나상준에게 위험한 감정을 느껴 겁을 먹었다.그래서 그와 거리를 두는 것이다.차우미가 눈썹을 찌푸렸다.전에는 느낀 적 없는 감정이다. 그래서 지금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물소리가 멈추지 않고 들려왔다. 방안에서 술 냄새가 은은하게 났다. 고요하고 평온하던 적막감이 깨지고 사람을 묘한 긴장감으로 들뜨게 했다.차우미가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순간 주혜민의 눈에서 한 줄기 빛이 스쳐 지났다. 주혜민이 침대에서 바로 일어났다.어젯밤 투여받은 약으로 많이 좋아졌다. 하지만 다쳐 이틀간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내일 검사해서 아무 문제가 없으면 퇴원할 수 있었다.컨디션이 괜찮았던 주혜민은 행동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노크 소리에 주혜민의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상준 씨 왔나?'나상준이 여태 주혜민의 앞에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주혜민은 알 것 같았다. 그가 자기에게 화가 나서 오지 않은 것이라고 여겼다.하마터면 낯선 남자와 안 좋은 일에 엮일 뻔했다. 분명 나상준이 화를 낼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상준을 이해하기로 했다.나상준이 병원에 오지 않더라도 주혜민은 서운하지 않았다. 되려 자기에게 화를 내줘서 좋았다.나상준이 자기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주혜민은 충분했다.갑자기 들려오는 노크소리에 주혜민은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차올랐다.참다못한 나상준이 병실로 찾아온 줄 알았다.주혜민은 버선발로 문을 열기 위해 가려다가, 다시 침대 가장자리에 돌아가 앉았다.침대에 앉아 그의 걱정을 받는 게 좋을 것 같았다.주혜민은 침대에 침착하게 앉았다.간병인은 노크 소리에 문을 열기 위해 일어나려다, 벌떡 일어서는 주혜민을 발견하고 그녀를 부축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그러다가 갑자기 자리에 다시 앉는 주혜민을 멀뚱멀뚱해서 쳐다보았다.간병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래요?"주혜민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병실 문을 바라보았다. 노크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서 문 열어줘요."간병인은 의아한 얼굴로 방문을 열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간병인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네."간병인이 문을 열자, 휴대폰을 들어 일하는 척하는 주혜민이다."누구..."간병인은 병실 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물었다.간병인의 목소리에 주혜민도 고개를 들고 밖을 내다보았다.병실 밖에 서 있는 인물을 확인한 주혜민의 몸이 굳었다
휴대폰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이미 욕실로 들어가 물을 틀고 씻기 시작한 나상준은 벨 소리를 인식하지 못했다.설사 들었다고 해서 씻다가 나올 사람도 아니었다.차우미는 작업 가방을 챙겨 들고 책상에 앉아 일을 시작했다.출발 시간 전까지 일하기 충분했다.나상준이 씻고 나왔을 땐, 휴대폰도 울리지 않았다. 그는 창문 앞에 앉아 일하는 차우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촘촘하게 내리는 빗소리가 들려왔다. 안개가 하얗게 뒤덮인 도시는 흐릿한 형체만 보일 뿐이다.방 안의 불을 켰다. 차우미는 의자에 앉자 펜으로 자료를 넘기며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었다.침착한 모습은 마치 궂은 날씨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것 같았다. 나상준이 파우더룸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두 사람의 옷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셔츠를 입은 나상준은 옆에 있는 거울을 바라보며 단추를 잠갔다.가늘게 들리던 빗소리가 파우더룸에서는 들리지 않았다.고요한 적막 속에 그녀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가끔 들렸다.옷을 챙겨입은 나상준은 시계를 착용하고 다시 한 번 거울을 확인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빈틈없는 남자가 서 있었다.밖으로 나간 나상준이 휴대폰을 들었다.스크린이 밝아 지면서 부재중 전화와 읽지 않은 메시지가 표시되었다.발신자에 선명히 찍혀 있었다. 진현이다.부재중 전화와 메시지는 전부 진현이 보낸 것이다.미간을 살짝 찌푸린 나상준이 내용을 확인했다.[나 회성이야. 시간 될 때 보자.]가벼운 호흡으로 가다듬던 나상준이 휴대폰을 두드렸다. 진현에게 답장을 한 뒤, 다시 시선을 차우미에게 돌렸다.일에 몰두한 차우미는 분리된 공간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나상준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침 먹으러 가자."평소처럼 섹시하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차우미가 행동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고개를 들어 단정하게 차려입고 다가오는 나상준을 바라보았다.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물건을 챙긴 뒤, 나상준은 그녀의 휠체어를 밀고 밖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