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의 말을 들은 여준재는 별다른 기색 없이 여전히 차갑게 답했다.“이론적으로는 네 말이 맞지만, 나도 대답하지 않을 권리가 있어.”그 말에 유라는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준재야, 너 혹시 나한테 불만이라도 있는 거야?”그녀는 차분한 표정으로 여준재를 바라봤지만, 사실 속으로는 엄청 떨고 있었다.그 이유는 여준재가 최근 며칠 동안 본인을 대하는 태도가 차가웠다는 걸 유라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설마 전에 폭로한 것 때문에 그러는 건가?’이윽고 여준재가 차갑게 답했다.“아니, 그냥 오늘 일어난 일 때문에 기분이 별로 안 좋아서 그래. 그리고 너한테 대꾸할 힘도 없고. 사람 불러서 널 데려다주라고 할게.”말은 마친 뒤 그는 유라가 동의를 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바로 구남준을 불러 그녀를 데려가라고 했다.돌아가는 길, 유라의 얼굴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굳어있었다.그녀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듯이, 여준재가 말하려 하지 않는 일에는 반드시 그 내막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이거 몰래 조사 좀 해줘. 고다정이 건물에서 뛰어내린 진상이 무엇인지, 일단 병원 쪽부터 착수 진행하고.”병원은 사람이 많은지라 여준재가 특별히 숨기려 해도 꼭 한두 명은 그걸 누설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물론 실제로도 그렇고 말이다.그날 저녁 8시쯤, 유라 쪽 부하가 그 진실을 알아냈다. “주인님, 병원 쪽 간호사들 말에 따르면 고다정 씨가 최면에 걸렸다고 합니다. 약효가 더해져서 일반 정신과 의사는 그걸 풀 수 없었고요.”“최면에 걸렸다라…”유라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에 잠겼다.‘어쩐지 여준재가 말해주지 않는다고 했어. 결국은 날 경계하고 있었던 거잖아?’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유라는 자신의 부하를 향해 명령했다.“계속해서 몰래 조사 해봐.”…이튿날 아침, 병실.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고다정은 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한동안 상황파악이 되지 않았다.‘나 지금 살아있는 건가?’어제 의식을 잃기 전 봤던 화면이 문득 떠오른 그녀는 자신
대략 30분이 지난 뒤, 임은미가 숨을 헐떡이며 병실에 찾아왔다.그녀는 침대에 누워있는 고다정을 보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걱정스레 물었다.“어디 좀 봐봐. 진짜 괜찮은 거야?”그녀는 어제저녁 고다정이 누군가에 의해 투신 최면에 걸렸다는 소리를 듣고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다정은 걱정이 가득한 임은미를 보며 재빨리 대답해 그녀를 안심시켰다.“난 괜찮아. 비록 어제 놀라긴 했어도 제때 조치를 취해서 다친 곳도 없어.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마.”“그래, 그럼 다행이야. 나 진짜 그 소식 듣고 깜짝 놀라 죽는 줄 알았어.”임은미는 겁에 질린 듯한 얼굴로 가슴을 내리쳤다. 그러고는 몇 초 뒤,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임은미가 고다정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난 네가 건물에서 뛰어내렸다는걸 믿을 수가 없어.”“난 당연히 건물에서 뛰어내릴 리가 없지. 그러니까 이게 어찌 된 일이냐면…”고다정은 대체적인 상황을 그녀에게 설명해주었다.모든 사실에 관해 이야기를 끝마친 고다정은 의문 섞인 말투로 그녀를 향해 물었다.“어제 네 핸드폰 누구한테 줬었어?”그녀는 임은미가 자신을 해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한 가지 가능성은 누군가가 임은미의 핸드폰을 빌려 갔다는 것이다.그 말을 들은 임은미는 단번에 고다정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챘다.“다른 사람한테 핸드폰 빌려준 적은 없지만, 누군가가 내 핸드폰을 뺏어갔어.”임은미는 어제 퇴근 후 핸드폰을 소매치기당한 일에 대해 고다정에게 설명했다. 그녀는 고다정이 행여나 믿지 않을까 봐 경찰서에 해당 기록도 있다고 알려주었다.고다정은 자기 친구한테 이런 일이 생겼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걱정스러운 말투로 그녀에게 물었다.“넌 어디 다친 데 없고?”“난 괜찮아. 근데 주민등록증도 다 소매치기당해서 다시 신청해야 해.”임은미는 고개를 저으며 어이가 없다는 듯 답했다.하지만 여준재는 만약의 경우까지 생각하고 옆에 있는 구남준에게 눈빛을 보냈다.
“조금 전 다정 씨가 자리에 없었을 때 제가 전달받은 소식이 있거든요. 수년 전 다정 씨 어머님을 치료한 의사 선생님을 찾았대요.”여준재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고다정은 격동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여준재가 미안하다는 듯 이어서 말했다.“근데 일단 기뻐하긴 일러요. 그렇게 좋은 소식은 아니니까요.”“조금 전에 사람 찾았다면서요?”고다정은 그 말에 미처 반응하지 못한 채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그녀는 여준재의 어두운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이윽고 고다정이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설마 그 사람 죽은 건가요?”그 말에 여준재는 부인하지 않았다.“세 달 전 그 의사 집에 화재가 일어났대요. 그분 가족들까지도 전부 그 화재로 집에서 숨졌고요.”여준재의 말에 고다정은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세 달 전이면 내가 준재 씨더러 그 사람을 조사해보라고 한 시간이잖아?!’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그녀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여준재를 바라봤다.“설마 심여진 쪽에서 저희가 증거를 찾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미리 그 사람 가족들까지 다 죽인 거 아닐까요?”“그건 아닌 것 같아요. 세 달 전 심여진과 고다빈은 다들 자기 자신을 챙기기에 바빴어요. 그러니 해외로 사람을 보내 살인을 저지르라고 시킬 정신 같은 건 없었을 거예요.”여준재가 고개를 저으며 부인하자 고다정이 눈썹을 치켜세웠다.“만약 그 사람들이 아닌 거면, 설마 그 의사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밉보이기라도 한 걸까요?”고다정은 이렇게밖에 추측할 수 없었다.그 이유는 그 의사가 수년 전 돈을 위해 심여진 모녀의 진실을 숨기고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했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누가 뭐라고 하든 해외 생활은 그렇게 생각처럼 쉬운 것도 아니니 말이다.여준재는 고다정의 말을 들은 뒤 바로 반박하지 않고 찬성한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그럴 수도 있겠네요.”그 대답을 들은 고다정은 삽시간에 실망감으로 가득 찼다.“어떻
그날 저녁, 고다정은 여준재와 함께 별장에 돌아왔고 카주로 가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말을 꺼냈다.“아빠, 엄마. 우리도 갈래요.”두 아이가 기대 섞인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지만, 고다정은 생각지도 않고 바로 거절했다.“안돼, 너희 학교도 가야 하잖아. 그리고 우리는 해외로 놀러 가는 게 아니라 엄청 중요한 일 보러 가는거거든. 그래서 너희들과 같이 갈 수 없어.”사실 그녀는 아이들이 위험한 상황에 빠지는 걸 원치 않았다. 게다가 손 씨네 가문 일이 제대로 해결된 것도 아니고, 해외라는 환경은 언제 어디서든 쉽게 사고도 일어날 수 있는 부분이었다.하지만 그녀의 거절을 들은 하준이와 하윤이는 삐진 듯 입술을 삐죽거리며 여준재를 바라봤다.“아빠~”하윤이는 여준재더러 자기들 대신 고다정에게 말 좀 해달라고 애교를 부렸다.너무도 쉽게 아이들 속셈을 눈치챈 고다정은 화가 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아빠 불러도 소용없어. 아빠도 엄마 편이야. 내가 안 된다고 했으니까, 이건 누가 뭐래도 안 되는 거야.”말을 마친 뒤 그녀는 경고 섞인 눈빛으로 여준재도 한번 바라봤다.그 모습을 본 여준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두 아이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엄마 말이 맞아. 아빠도 엄마 말은 들어야 하거든. 그러니까 너희들도 엄마 말 들어, 알겠지?”“휴, 아빠 점점 멋없어. 예전에는 엄청 강하고 멋졌었는데. ”두 아이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는 모습을 보며 여준재는 어이가 없는 듯 웃어 보였다.‘이 귀여운 것들. 본인들 생각대로 안 되니까 이제는 나를 자극까지 하네.’“날 자극해도 소용없어. 아빠는 엄마의 말에 절대 반박하지 않을 거니까. 그러니까 너희들도 얌전히 집에 있어. 그리고 엄마 대신 할머니도 잘 보살피고, 알겠지? 엄마 아빠가 갔다 온 뒤에 우리 같이 나가서 놀자. 그때는 가고 싶은데 다 가도 돼.”여준재는 다시금 아이들을 거절한 뒤 그들에게 당근을 주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그의 당근에 두 아이는 순순히 넘어갔다.이때 그 모습을 지
이튿날 오후, 고다정과 여준재는 카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그 시각, 유라 또한 가장 일찍 그 소식에 대해 듣게 되었다.“주인님, 두 분 가셨습니다. 카주로 가는 비행기 따로 배정해 드릴까요?”도우미는 유라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유라는 그녀를 힐끗 보더니 그 말에 찬성하지 않고 차갑게 답했다.“아니. 괜히 갔다가 준재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너무 티 나잖아. 그러면 준재도 나에게 경고를 날릴 거야. 그냥 아랫사람들더러 그 둘의 상황에 대해 지켜보라고 하면 돼.”“네.”도우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한편, 고다정과 여준재는 이 모든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둘은 전용기에 타서 20시간의 비행을 거친 뒤에야 카주에 도착했다.그 시각 하늘은 이미 어둑어둑해졌고, 비행기에서 내린 그들은 한 개인 별장에 도착했다.그 현장에서는 여러 사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한 검은색 슈트를 입은 키가 크고 근육도 탄탄한 남자가 고다정과 여준재를 보더니 정중히 앞으로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대표님.”“그동안 수고 많았어.”여준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고다정에게 소개했다.“이쪽은 태산이라고 해요. 제 부하 중 가장 미행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죠. 다정 씨 어머님 일도 제가 태산이한테 전부 조사해보라고 한 거예요.”고다정은 태산을 향해 살짝 미소지어 보이며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안녕하세요, 사모님.”태산도 정중하게 그녀의 인사에 답했다.여준재는 두 사람에게 소개를 마친 뒤 고다정을 끌어당기며 말했다.“여기는 이야기 할 곳이 아니니 우리 안으로 들어가서 말하죠. ”3분 뒤, 그들 셋은 별장의 거실로 들어갔다.자리에 착석 후, 여준재가 고다정을 향해 웃어 보이며 말했다.“뭐 묻고 싶은 거 있으면 이젠 물어봐도 돼요.”여준재의 말에 고다정은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태산 씨, 혹시 여기서 조사한 모든 정보에 대해 저한테 말해주실 수 있어요?”
고다정은 일어나는 남자를 보며 사과했다.“시끄럽게 해서 미안해요.”“조금 시끄럽긴 했지만, 더욱 중요한 건 전 다정 씨가 그 일로 너무 신경 쓰지 않았으면 해요.”여준재는 부인하지 않고 그저 안쓰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고다정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살며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길을 닦지 않은 곳도 있고 시간도 너무 늦어서 운전하기에는 위험해요. 그러니 내일 가는 거로 하고 오늘 밤은 푹 쉬도록 해요.”“다정 씨도 푹 쉴 건가요?”여준재는 눈썹을 치켜올리고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말문이 막힌 고다정은 헛기침하며 얼버무렸다.“노력할게요. 얼른 자요.”그녀는 이내 이불을 덮고 잘 것처럼 흉내를 냈다.여준재의 시선에는 그녀를 향한 사랑과 편애가 가득 담겨있었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누워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여준재의 말이 효과가 있어서일까, 고다정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얼마 되지 않아 이내 잠들었다....이튿날 아침,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는 고다정은 날이 밝아오자마자 잠에서 깼다.그녀는 아직 깊은 잠에 빠져있는 여준재를 보더니 허리에 둘러있는 그의 손을 살며시 내려놓고는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금방 깬듯한 남자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어디 가요?”“일어나서 세수하려고요. 나 때문에 깼어요?”고다정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여준재는 고개를 젓더니 미간을 어루만지며 침대에서 일어났다.“잠자리를 바꾼 탓인지 잠을 설친 것 같아요. 깨어난 김에 아침 먹고 마을에 가보도록 하죠.”한 시간 정도 지난 후, 두 사람은 가령에서 출발했다.블랙 승용차가 도로에서 달리고 있었다. 차창 밖 풍경도 점차 현대적인 도심을 벗어나 외딴 교외로 변했고 나중에는 논밭으로 변했다. 하늘도 아주 푸르렀는데 보기만 해도 상쾌한 느낌을 주었다.“이런 풍경은 정말 오랜만이네요. 너무 아름다워요.”고다정은 차창 너머 풍경을 보며 감탄했다.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방에는 벽 외에 다 타버리고 틀만 남은 가구들뿐이었다.고다정은 포기하지 않고 한참 뒤적였다. 그러나 태산이 말했던 것과 같았다. 아무런 단서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녀는 핑크빛 나는 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는데 기분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그녀는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지하실도 있다고 들었는데, 지하실도 한 번 가봐요.”여준재는 그녀가 이런 결과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태산에게 눈짓했다.태산은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고다정에게 공손하게 말했다.“이쪽으로 따라오시죠.”태산이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고 고다정은 그의 뒤를 바짝 따랐다.2분 후, 세 사람은 지하실에 도착했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다.표정이 시무룩해진 고다정을 본 여준재는 그녀를 품에 안고 달랬다.“너무 속상해하지 마요. 다른 방법 생각해 보면 되죠.”“다른 방법이 더는 없어요. 이 의사가 마지막 증인이에요. 다른 증거가 있었더라면 나도 이 의사에게 모든 희망을 걸지는 않았을 거예요.”고다정은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여준재는 침착한 그녀의 모습을 더는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몰랐다.세 사람은 침묵 속에서 다시 시내로 돌아왔다.방으로 들어간 후 풀이 죽은 고다정은 소파에 앉아 자신이 너무 무능한 건 아닌지 하고 의심했다.‘몇 년 전이면 몰라도 지금은 스승님과 준재 씨의 도움도 있는데 어머니를 위해 복수할 수 없다니.’여준재는 안쓰러운 눈길로 상심해 하는 고다정을 바라보았다.고다정이 이 일로 속상해하는 걸 원치 않는 여준재는 또 다른 방법을 생각해냈다.“사실 유일한 증인이 사라졌다고 해도 어머니를 살해한 범인을 잡아 벌을 받게 할 수 있어요.”“정말이에요?”고다정은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여준재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당연하죠. 제가 왜 다정 씨에게 거짓말을 하겠어요.”방금전까지만 해도 속상해하던 고다정은 여준재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흥분해 하면서 물었다.“심여진이 우리 엄마를 죽였다는 걸 어떻게
심여진은 GS그룹을 진시목에게 팔아넘긴 후, 작은 별장을 하나를 구매하고는 진씨 저택에서 나왔다. 그 별장에서 노후 생활을 즐길 생각이었다.그녀가 금방 샤워하고 쉬려고 할 때, 별장 전체가 갑자기 어두컴컴해졌다.“아!”깜짝 놀란 심여진은 비명을 지르더니 선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얼마 후, 그녀는 진정하고 창문을 통해 비춰 들어오는 달빛을 타고 벽을 더듬으며 방에서 나와 소리쳤다.“누구 없어?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왜 갑자기 정전되고 난리야?”그녀가 여러 번 소리 쳤지만 그녀의 말에 답해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주변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만큼 아주 고요했다.“젠장, 다 어디 간 거야?”누구도 그녀의 말에 답해주지 않자 그녀는 점차 화가 치밀어 올랐다.두어 번 더 소리쳐보았지만 여전히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그녀는 욕설을 퍼부으며 방으로 돌아가 무슨 상황인지 알아보려고 경비실에 전화를 걸 생각이었다.그러나 그녀가 방에 들어선 순간, 펑하는 소리와 함께 창문 유리가 갑자기 산산조각이 나면서 거센 바람이 몰아쳐 들어왔다. 바람에 휘날리는 커튼 사이로 빨간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가 나타났다. 이윽고 소름 돋게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심여진, 내 목숨 내놔.”“귀신이야!”경황실색한 심여진은 비명을 지르더니 너무 놀란 탓에 정신을 잃고 꼬꾸라졌다.창문에 매달려 있던 여자는 눈을 가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방에 뛰어 들어갔다.그녀는 조심스레 심여진 곁으로 다가가 그녀가 진정으로 쓰러졌는지 확인했다. 그녀가 정신을 잃었다는 걸 확인한 여자는 입을 삐죽거리며 무선기 너머에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정신 잃고 쓰러졌어요. 오늘 저녁 미션은 끝내도 될 것 같아요.”“너무 조급해하지 마. 대표님이 원하는 단서나 범죄 증거가 없는지 찾아봐.”무선기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여자는 명을 받고 방을 수색하기 시작했다.그러나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여자는 어쩔 수 없이 사실대로 말했다.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