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가 애써 분노를 누르고 있음에도 여준재는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기를 느낄 수 있었다.이 시각 여준재는 표정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졌다.그는 서늘한 눈빛으로 유라를 바라보며 쌀쌀맞게 말했다.“유라야, 너 비뚤어진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내가 너한테 은혜를 입었어도 너를 가만두지 않아.”이 말을 들은 유라는 간신히 눌렀던 질투의 불길이 또다시 타올랐다.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여준재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안다.“내가 무슨 비뚤어진 생각을 했다고. 그저 일시적으로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지 못했을 뿐이야. 네 약혼녀는 참, 여자들 사이에 말다툼한 것을 그새 너한테 고자질했어? 이건 나에게 도와줄 남자친구가 없다고 업신여기는 거야 뭐야?”유라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완벽한 이유를 찾아냈다.여준재는 진실을 털어놓지 않으려는 유라를 바라보며 검은 눈동자에 실망한 기색이 살짝 감돌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나한테는 남자, 여자 그런 구분이 없어. 내 약혼녀의 일이 바로 내 일이야. 나를 포함해서 어떤 사람도 다정 씨에게 상처를 주면 안 돼. 이걸 기억해 뒀으면 좋겠어.”“알았어. 앞으로 주의할게. 그러니까 나를 내보내지 않으면 안 돼?”유라가 한발 물러섰다.여기서 나가면 앞으로 여준재를 만날 기회가 줄어들기에 그녀는 나가고 싶지 않았다.아쉽게도 지금까지 고다정 외에 그 누구도 여준재의 결정을 바꾼 사람은 없었다.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유라는 홧김에 소리질렀다.“그렇다면 여기서 나가지 않는 것이 나의 첫 번째 소원이야!”이 말을 들은 여준재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진짜로?”유라는 진짜가 아니라고 마음속으로 외쳤다.여준재에게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는 어려운 일이다. 세 번의 기회가 많아 보이지만 이렇게 한 번의 기회를 써버리기는 아깝다.특히 이렇게 하찮은 일에 쓴다면 말이다.하지만 아무리 아까워도 그녀는 결국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진짜 이걸 소원으로
식사 장소는 YS그룹 산하의 프라이빗 클럽에 있었다.여준재와 고다정이 도착했을 때 룸의 분위기는 괜찮았다.특히 박재경은 유라와 알고 지낸 지 오래된 친구처럼 친숙하게 웃고 떠들었다.서현규와 오현서는 옆에서 술을 마시면서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머금은 채 두 사람을 구경하고 있었다.여준재가 들어오는 것을 본 그들은 잇달아 고개를 돌려 인사했다.“준재 형, 왔어?”“형수님, 오랜만이에요.”여준재는 그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고다정의 손을 잡고 빈 좌석으로 향했다.자리에 앉은 후, 그는 상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음식을 안 시켰어?”“형과 형수님이 오면 같이 시키려고 그랬지. 형수님은 뭐 드시고 싶으세요? 준재 형이 사는 거니까 괜찮아요.”박재경이 익살을 부리며 친절하게 메뉴판을 고다정에게 건넸다.웃음을 터뜨린 고다정은 사양하지 않고 자기와 준재가 좋아하는 요리 몇 가지를 시켰다.요리가 빨리 나와 잠시 후 모든 요리가 올라왔다.그렇게 그들은 식사하면서 한담을 나누었다.박재경은 여준재가 부탁한 것이 있어서 식사하는 내내 유라를 극진하게 대했다.“준재 형한테 들었는데 유라 씨는 본국에 처음 왔기에 여기저기 돌아보려 한다면서요? 놀러 가고 싶으면 저를 찾으면 돼요. 우리 본국에 제가 안 가본 곳은 없어요.”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박재경은 잠시 멈추더니 반짝거리는 두 눈으로 유라를 바라보며 물었다.“어디 가고 싶은지 말해주면 제가 계획을 세울게요. 내일 당장 출발할 수 있어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에는 꿍꿍이가 있었다.준재가 이 여자를 데리고 떠나기만 하면 그가 가고 싶은 곳 어디나 갈 수 있고 모든 비용은 준재가 내기로 약속했다.‘헤헤. 이럴 때 준재 형을 뜯어먹지 않으면 또 언제 기회가 있겠는가.’‘게다가 나는 지금 준재 형을 위해 남성적 매력을 팔고 있다.’이런 내막을 모르는 유라는 박재경의 과도한 친절에 깜짝 놀랐다.물론 그녀는 박재경이 이렇게 친절한 것이 여준재가 시켜서임을 잘 안다.여준재의 목
고다빈도 고다정을 보고 놀라는 눈치였다.그러나 그녀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오만한 자태로 고다정을 향해 걸어오더니 증오와 혐오에 찬 표정을 지었다.“여기서 널 만나다니. 진짜 재수 없어.”“피차일반이야!”고다정은 차가운 얼굴로 맞받아치고는 고다빈에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자리를 뜨려 했다.그런데 귓가에 고다빈의 오만방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가라고 했어?”이 말과 함께 그녀는 고다정 앞을 막아섰다.고다정은 곁눈질로 슬쩍 소담과 화영이 이쪽으로 오려는 것을 확인했다.그녀는 옆으로 드리워진 손을 가볍게 흔들어 오지 말라고 지시했다.소담과 화영은 이를 보고 먼 곳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고다빈은 아무것도 모른 채 고다정의 차분한 표정을 보고 망가뜨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무슨 일이 발생해도 이년의 얼굴에서 당황하는 표정을 본 적이 없는 듯하다.고다정도 고다빈의 몸에서 악의를 느끼고 잔뜩 경계했다.“뭐 하려는 거야?”“걱정 마. 같은 실수를 세 번 반복하지는 않을 거니까. 너를 불러세운 건 단지 너에게 좋은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알려주고 싶었던 거야. 나는 네가 어떻게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재수 없는 존재가 되어 모든 사람에게 버림을 받을지 지켜볼 거야.”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고다빈은 고다정의 엉망진창인 미래를 보기라도 한 듯 얼굴에 득의양양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러나 고다정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그녀는 약간 미친 듯한 눈앞의 여인을 덤덤하게 바라보며 웃었다.“그럼 지켜봐.”말을 마친 그녀는 고다빈을 더 이상 상대하지 않고 옆으로 에돌아 가버렸다.그녀는 침착하게 걸었지만 저도 모르게 걱정이 밀려왔다.소담, 화영과 합류한 후 그녀는 화영에게 분부했다.“고다빈한테 몇 명을 붙여서 24시간 지켜보고, 이상한 점이 발견되면 즉시 저한테 보고하세요.”“네.”화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지시를 받았다.이를 본 소담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투덜거렸다.‘내가 먼저 모셨는데, 작은 사모님은 왜 일이 있으면 내가 아니라 이 여자
유라는 자기가 찾은 핑계 때문에 곤란해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급히 만회했다.“그냥 한 말이야. 내가 무슨 의견이 있겠어?”그녀는 여준재가 계속 이 문제를 얘기할까 봐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오히려 고다정이 여준재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이 클럽을 어머님이 설계하셨다고? 어머님도 다른 귀부인들과 같은 줄 알았는데.’그렇게 식사 자리는 중간에 잡음이 있긴 했지만 성공적인 편이었다.유라도 성공적으로 박재경 등 친구들과 친해졌다.그 후 며칠간 박재경은 여준재의 뜻에 따라 매일 유라를 데리고 놀러 나갔다.유라도 여준재의 친구에게 접근함으로써 여준재의 국내 상황을 알아볼 심산으로 거절하지 않았다.덕분에 고다정은 비는 시간이 많이 생겼다.이때 마지막 단계의 재활 치료를 끝낸 채성휘도 의사의 검사를 받은 후 퇴원할 준비를 했다.소식을 들은 고다정은 채성휘가 퇴원하는 날 소담과 화영 두 사람을 데리고 도우러 갔다.그녀는 자기 친구와 채성휘 사이에 감도는 달콤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녀가 며칠 오지 않은 사이에 두 사람은 많이 발전한 것 같다...조금 뒤, 그들은 짐을 챙겨서 병원을 떠났다.돌아가는 길에 임은미와 한 차를 탄 고다정은 장난스럽게 친구를 바라보았다.“야, 너 나한테 할 말이 없어?”“무슨 말?”일시적으로 반응하지 못한 임은미는 어리둥절해서 그녀를 쳐다보았다.고다정은 참지 못하고 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톡 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뭐겠어? 너는 지금 채 선생님과 어떤 상황이야? 사귀는 거야?”이 말을 들은 임은미는 얼굴이 빨개졌다.확실히 이 일을 까먹고 고다정에게 말하지 않은 듯하다.그녀는 고다정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며 인정했다.“사귀기로 한 거 맞아. 헤헤. 요즘 너무 바빠서 너한테 말하는 걸 까먹었어.”“이렇게 중요한 일을 까먹다니.”고다정은 코웃음을 쳤지만 친구의 연애사가 하도 궁금해서 물었다.“언제부터야? 누가 먼저 사귀자고 했어?”이 질문에 임은미는 뭐가 생각났
하지만 쌍둥이의 발언에 대해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특히 고다정은 설교하기는커녕 오히려 쌍둥이를 지지했다.“채 선생님, 두 분이 사귄다니 저도 기쁩니다. 하지만 쓴소리를 먼저 할게요. 은미는 저에게 절친일 뿐만 아니라 가족이에요. 그러니까 은미에게 상처를 주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이 말을 들은 임은미는 으쓱하며 채성휘를 쳐다보았다.“봤죠? 당신이 나에게 미안한 짓을 하면 저 사람들한테 혼나요.”채성휘는 우쭐대는 그녀의 모습을 사랑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미래의 일을 장담할 수는 없지만 은미 씨와 사귀는 동안 미안할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요.”채성휘는 단호한 눈빛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그러자 고다정은 합격이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뒤이어 그들은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했다.임은미와 고다정은 쌍둥이를 챙기느라 바빴고, 채성휘는 여준재와 금융 문제를 토론했다.채성휘는 연구를 하는 사람이지만 금융 쪽도 섭렵했다.잠시 후, 임은미는 쌍둥이를 데리고 키즈존에 놀러 갔다.고다정은 채성휘와 연구소 일을 상의하고 싶어서 같이 가지 않았다.“채 선생님도 이제 다 나았으니 특효약 개발을 일정에 올릴 생각이에요. 이 약을 하루빨리 개발했으면 해서요. 저의 외할머니가 뇌암 판정을 받았는데, 이 약으로 암세포 증식을 억제해야 해요.”“어떻게 그런 일이, 어르신 상태는 좀 어때요?”채성휘는 깜짝 놀라더니 걱정스레 물었다.고다정이 간단하게 설명했다.“초기여서 자극만 받지 않으면 거의 아무 증상도 없어요. 하지만 알다시피 저의 외할머니는 연세가 많으셔서 신체 기능이 젊은이보다 못하기 때문에 병세가 빨리 악화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어요.”이 말을 들은 채성휘는 고다정의 심정을 이해하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이 일을 은미 씨는 아직 모르죠?”“은미는 아직 몰라요. 그동안 은미가 채 선생님 일로 걱정이 많아서 말하지 않았어요. 이따가 채 선생님이 알려주셔도 돼요.”고다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두 사람은 특
임은미는 당연히 고다정의 말뜻을 알지만 여전히 걱정을 떨쳐낼 수 없었다.그래서 그 뒤로 며칠간 그녀는 매일 빌라에 외할머니를 뵈러 왔다.이에 대해 고다정은 별다른 말이 없었고 오히려 이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이미 채성휘와 함께 특효약 개발 준비 단계에 진입해서 할 일이 매우 많았다. 연구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점점 더 바빠질 것이며 2,3일 연구실을 지켜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그때 임은미가 매일 외할머니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산책한다면 그녀는 더 마음이 놓일 것이다.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보름이 지나갔다.이날 임은미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퇴근 후 회사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강말숙을 보러 가려 했다.그런데 그녀가 길가에 나오자마자 오토바이 한 대가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임은미가 신경을 쓰지 않고 택시가 있는지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을 때 순간 일이 발생했다.오토바이를 탄 사람이 팔을 뻗어오더니 그녀가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낚아챘다.임은미는 몇 초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소리지르면서 쫓아갔다.“강도 잡아요. 저 앞에 오토바이를 막아주세요.”이 소리를 듣고 주변에 있던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오토바이를 쫓아갔다.하지만 오토바이 운전자는 뛰어난 기술로 차가 그칠 새 없이 많이 다니는 도로에서 요리조리 피하면서 이내 사람들을 따돌리고 시선에서 사라졌다.임은미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손을 내밀어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드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그중 마음씨 좋은 어떤 사람이 귀띔했다.“아가씨, 가방에 중요한 물건이 없어요? 혹시 있다면 빨리 경찰서에 신고하고 해지할 건 해지해요. 강도가 아가씨 물건을 가지고 나쁜 짓을 하게 두지 말고.”“제 가방에는 신분증, 휴대폰, 그리고 몇 장의 은행카드가 들어 있어요. 맞네요. 경찰서에 가서 신고하고 해지할 건 해지해야겠어요.”임은미는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씨 좋은 행인에게 감사를 드리고 제일 가까운 경찰서로 향했다.그녀가 경찰서에 들어설 때쯤 가방을 훔친 강도는 그녀의 가방
소담과 화영은 눈빛을 교환한 후 각각 고다정의 한쪽 팔을 잡고 다시 물었다.“작은 사모님, 왜 이러세요?”그러나 고다정은 여전히 아무 반응도 없었고 심지어 그들이 가로막는데도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소담과 화영은 혹여 고다정이 다칠까 봐 억지로 막지는 못했다.하지만 앞에 더 이상 길이 없는데도 고다정이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자 두 사람은 바싹 긴장했다.게다가 오는 내내 고다정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최면에 걸렸을 가능성이 있다.거의 동시에 이 생각이 떠오른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제가 작은 사모님을 기절시킬 테니 화영 씨는 대표님께 통지하세요.”소담이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녀가 손을 쓰려고 하는 중요한 시각에 화영이 그의 행동을 제지시켰다.화영은 소담의 손을 잡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기절시키면 안 돼요. 내가 알아본 바로는 최면에 걸린 사람에게 외력을 가해 중단시키면 신경이 손상되고 심각할 경우 정신 이상이 올 수 있대요.”이 말을 들은 소담은 안색이 급변했다.“그렇게 심각해요?”“그럼요.”화영이 말하면서 소담의 손을 놓았다. 그녀는 자기들이 꽉 잡고 있는데도 계속 발버둥치며 옥상에 올라가려는 고다정을 힐끗 보고는 과감한 추측을 내놓았다.“아가씨는 건물에서 뛰어내리라는 명령을 받은 것 같아요. 현재로서는 아가씨가 이 명령을 완수해야 최면이 풀릴 거예요.”이 말을 들은 소담은 놀라 멍해졌다.“뭐라고요?”“지금 당장 소방구조대에 연락하고 대표님께도 통지해요.”화영이 신속히 조치했다.소담도 현재 상황에서 망설일 틈이 없다는 것을 알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작은 사모님을 잘 지키고 있어요.”말하고 나서 그녀는 고다정을 놓고 즉시 옆에 가서 전화하기 시작했다.그녀는 먼저 119에 전화한 후 여준재에게 연락했다.“대표님, 작은 사모님이 최면에 걸려 지금 연구소 옥상에서 뛰어내리려 하고 있습니다.”“뛰어내린다고?”전화기 저편에서 깜짝 놀란 여준재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여준재는 고다정에게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은 듯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을 위로하며 인파 속에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뒤늦게 반응한 구남준도 얼굴이 창백해진 여준재를 도와 인파 속을 가르며 길을 비켜 나섰다.“자, 다들 옆으로 좀 가주세요. 저희 가족이라 저희가 들어가서 봐야 해요.”구남준은 사모님인 고다정이 현재 어떠한 상황인지 얼른 확인하고 싶어 안달이 났고, 그녀가 투신했다는 사실 또한 전혀 믿겨 지지 않았다.그 말에 여준재와 구남준을 알아본 일부 사람들은 길을 비켜주기도 하였다.한편, 화영은 자기 집 아가씨가 매트에 떨어진 걸 보고는 바로 긴장하며 앞으로 다가가 확인했다.그녀는 일단 고다정의 코에 손을 가져다 대보고, 고다정이 호흡을 하는 상태인걸 확인한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옆에 있는 구조대원들이 손을 쓰기도 전에 고다정을 안으며 부하들을 향해 말했다.“얼른 차 준비하고 병원으로 가. 선생님께 알리는 것도 잊지 말고!”말을 마친 뒤 그녀가 고다정을 안은 채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때마침 인파 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여준재와 구남준을 마주했다.“서방님.”여준재를 발견한 화영은 깜짝 놀라 그를 불렀다.화영에게 있어 그 순간의 여준재 모습은 여태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런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여준재는 화영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그녀 품속에 안긴 고다정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려는 듯 빤히 응시했다.화영은 여준재의 긴장감 섞인 모습과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보며 얼른 해명했다.“서방님, 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는 현재 혼수상태일 뿐입니다. 하지만 아직 다친 곳이 있는지는 알 수가 없는 상태라, 병원에 가서 확인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그 말을 들은 여준재는 그제야 조금은 차분해지더니, 힘겹게 고다정을 자신에게로 뺏어오며 입을 열었다.“알겠으니까 병원은 일단 제가 데려갈게요. 뒤따라 오시면서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지나 말해줘요!”여준재가 말을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