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음 날부터 과연 여준재의 말대로, 고경영이든 심여진이든, 아니면 진시목이든 전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연회 날짜가 점점 다가오며 심해영은 매일 같이 빌라에 드나들었다. 두 손자를 보기 위함도 있었고, 주로는 고다정에게 여씨 집안의 복잡한 친인척과 지인 관계를 파악해 주기 위해서였다.고다정이 너무 복잡하여 기억하지 못할까 봐, 그녀는 특별히 그것을 프린트하여, 그중의 상호 간에 얽힌 이익 관계를 조리 있게 설명해 주었다.물론 고다정도 심해영의 속마음을 잘 알고, 그녀가 설명할 때마다 매우 열심히 듣고 새겼다.“관계망은 이 정도면 됐어. 나머지는 다 그리 중요하지 않아, 그냥 서로 체면만 유지하면 돼.”심해영은 자신이 정리한 자료를 다 설명하고 요약을 지었다.고다정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알겠어요, 잘 새길게요.”진지하게 대하는 고다정의 표정을 보고 심해영은 마음이 흐뭇해 웃으면서 말했다.“조급해할 거 없어. 나중에 이 안에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하면 자료 내용을 저절로 다 알게 될 거야. 자, 이제 우리 여씨 가문 친인척에 대해 얘기해 보자.” 그녀는 고다정한테 소화할 틈을 주기라도 하는 듯이 일부러 잠깐 말을 멈추었다.고다정은 그녀한테 따로 자료가 없는 것을 보고, 도우미를 불러 종이와 펜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도우미가 그걸 가져오자, 심해영은 여씨 집안 친척과 지인에 대해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우리 여씨 집안은 큰집과 작은 집이 있어.”“큰 집에는 네 아버지와 네가 만났던 고모네 두 아이만 있고, 다른 친척은 없어. 작은 집에도 사람은 많지 않아. 다섯 형제자매가 있는데 다 해외에서 산업을 맡고 있는데, 너도 알다시피 해외에는 좀 어지러운 곳들이 많잖니. 자리를 비우면 안 되니까, 이번에는 한 사람만 대표로 오기로 했어. 촌수를 따지면 네 큰 외삼촌이 되겠구나. 나머지는 네가 나중에 만나면 내가 다시 소개해 주마.”고다정은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말한 정보들을 노트에 자세히 기록했다.
“큰 외삼촌, 안녕하세요.”여준재가 귀띔을 해준 대로 고다정은 다가가서 인사를 드렸다.두 아이도 덩달아 앙증맞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넛할아버지, 안녕하세요.”“응, 그래, 그래. 너희들도 잘 있었니?”여건영은 매우 반가워하며 고다정과 두 아이를 향해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가방에서 세 개의 정교한 선물함을 꺼냈다.“너희들의 마음에 들지 모르겠구나. 이건 내 와이프한테 부탁해서 고르라고 한 건데,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고다정은 자연스레 여준재한테 눈길을 돌려 그의 의견을 소리 없이 물었다.“받아요. 큰외삼촌의 성의니까.”고다정의 생각을 읽은 여준재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낮게 말했다.그제야 고다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선물을 받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두 아이도 얌전하게 따라서 고맙다고 인사했다.이어 모든 사람은 거실에 앉아 잡담을 나누다가, 집사가 와서 점심 식사 준비를 마쳤다고 하자, 다시 다이닝룸으로 자리를 옮겼다.식사 분위기는 매우 훈훈하고 조화로웠다.특히 두 아이는 깜찍한 발언으로 모두를 싱글벙글 웃게 했다. 모든 사람이 두 아이에 대한 총애와 애착도 눈에 띄게 깊어졌다. 두 아이의 앞에 산처럼 쌓인 음식 접시가 바로 그 증거였다. 먹을 것을 얼마나 많이 담아주었는지 두 아이의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이다.연회는 저녁에 진행되므로, 더 좋은 컨디션으로 연회를 맞이하기 위해 식사 후 모든 사람은 각자 방으로 들어가서 휴식을 취하였다.오후 세 시쯤 되자, 저택 전체가 움직이며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여아린은 자신이 대동한 스타일리스트들을 시켜 고다정을 꾸미기 바빴다. 얼굴 마사지부터 스킨케어, 메이크업을 마치고 또 드레스, 헤어스타일까지 전체적인 스타일링을 마치는 데 거의 3시간이 걸렸다.화려하고 완벽한 여신의 자태를 드러내는 고다정을 여아린은 놀라움과 자부심 가득 찬 눈빛으로 쳐다보며 감탄을 퍼부었다.“다정아, 넌 정말 매 순간 나에게 놀라움을 주는구나. 오늘 밤 넌 분명 모든 사람의 이목을 끄
육 회장의 개입으로 여준재와 육성준의 눈빛 대결은 잠정 중단되었다.육성준은 얻어맞은 뒤통수를 감싸 쥐고 약간 불만스럽게 육 회장을 쳐다보았다.“왜 때려요, 아버지?”“난 네 아비야. 때리고 싶으면 때리는 거지.”육 회장은 육성준을 노려보고는 곧바로 웃는 얼굴로 여준재를 향해 사죄의 뜻을 표했다.“여 대표님, 제가 평소에 너무 오냐오냐해서 애가 좀 버릇이 없어요. 무례를 범했다면 양해를 바랍니다.”여준재는 육 회장의 말에 웃을락 말락 하는 표정을 짓고 육성준을 보았다. 육성준은 얄밉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화를 벌컥 냈다.“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아버지! 여 대표랑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인데 무례는 무슨 무례에요. 모르면 말하지 마시라고요.”“너, 여 대표님이랑 아는 사이야?”육 회장이 깜짝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그것보다 여준재 앞에서 창피하게 구구절절 얘기하는 게 싫은 육성준은 대충 둘러댔다.“그 얘기는 기니깐 나중에 할게요. 우리 먼저 들어가요, 아버지.”육 회장이 입을 열 틈도 주지 않고 육성준은 그를 연회장으로 끌고 들어갔다.두 사람이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보다가 여준재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시선을 거둬 다른 하객들을 계속하여 접대했다.그의 미소 짓는 표정에 하객들은 좀 의아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오늘 밤에 발표될 사안을 생각하니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이미 두 아이에 관한 일은 인터넷에서 발칵 뒤집혔는지라 그들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여 대표님, 득남하신 걸 축하드립니다.”“어디 득남뿐이에요? 공주님도 있어요. 너무 부러워요, 여 대표님. 아직 이렇게 젊으신데 아들딸 다 갖췄네요.”“그러게 말이에요. 우리 같은 늙다리들이 다 부러워 죽겠어요.”사람들은 하하 호호 웃으며 여준재를 축하해줬다.한편, 임은미는 도우미의 안내를 받고 위층으로 올라가 문 앞에 이르렀는데 방안에서 들려오는 감탄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와, 엄마, 하늘의 선녀 같아요. 너무 예뻐서 말이 안 나와
두 아이도 너무 오글거려 이상한 소리를 꽥꽥 질렀다.여준재는 여전히 그들 셋의 반응을 개의치 않고 눈썹을 치켜올리며 사르르 녹아들듯 한 부드러운 말투로 고다정한테 말했다.“괜찮아요. 뭐 남도 아닌데 어때요. 그리고 이제 다 갈 거예요.”“가요? 어딜?”고다정이 어리둥절해하자, 여준재는 고개를 살짝 까딱하고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이제 아래층에서 연회가 곧 시작되는데 할아버지가 직접 하준이와 하윤이를 소개하기로 했거든요.”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도우미의 공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 작은 사모님. 연회가 곧 시작됩니다. 어르신께서 도련님이 작은 도련님과 아가씨를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알겠어요.”여준재는 대답하고 나서 임은미한테 말했다.“아이들을 데려가서 집사한테 맡겨주시겠어요? 저랑 다정 씨는 좀 이따 내려갈게요.”눈치가 빠른 임은미는 그 두 사람을 야유하는 눈빛으로 한번 훑고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내가 애들을 데리고 내려갈게요. 근데 조심 좀 해요, 오늘 중요한 날이잖아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두 아이를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고다정은 임은미가 나간 방향을 바라보며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비로소 절친의 뜻이 뭔지 깨닫고 얼굴이 빨개지며 여준재를 나무랐다.“아, 이것 봐요. 쟤가 오해했잖아요. 나중에 날 또 뭐라고 놀려먹겠어요.”그녀는 화가 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준재를 빤히 노려봤다.여준재는 눈썹을 치켜올리고 고개를 수그리며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한테 살포시 다가갔다.“사실, 친구가 오해한 건 아닌데...”점점 가까워지는 남자의 숨결이 느껴졌다. 비록 이미 여러 번 친밀한 관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고다정은 여전히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하지 마요.”그녀는 손바닥으로 여준재의 가슴을 밀었지만, 그 정도의 힘으론 눈앞의 남자를 막을 수 없었다.환하게 비치는 불빛 아래에서 두 사람은 꼭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박수갈채가 끝난 후, 여씨 집안 큰 어르신은 손을 들어 모두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그러자 장내가 금세 조용해졌다.어르신은 얼굴에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우리 큰아들이 얘기했듯이, 오늘 연회는 이 두 아이가 우리 여씨 집안에 입적시키는 걸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하준아, 하윤아, 모두한테 인사를 드리렴.”그는 말하면서 가볍게 아이를 앞으로 밀었다.두 아이도 겁먹지 않고 각자 자기소개를 했다.“안녕하세요. 여러분께 인사 올립니다. 제 이름은 여하준이라고 합니다. 오빠고요, 올해 다섯 살 반 됐어요”“제 이름은 여하윤이고요, 동생입니다. 저도 올해 다섯 살 반입니다.”가문에 입적했기 때문에 두 아이도 이젠 여준재를 따라 여씨 성을 가지게 되었다.두 아이의 앙증맞고 귀여운 자아 소개가 무대 아래 많은 여사님의 마음을 제대로 녹여버렸다. “아이고, 귀여워라...”“여 대표님이 운도 좋으시네. 저렇게 냉랭한 남자가 어찌 저런 얌전하고 귀여운 아이들을 낳았을까요. 정말 상상도 못 할 일이에요.”“아이가 저렇게 귀여운 건 다 애 엄마 덕분 아닐까요?”화제가 여기로 몰리자 적지 않은 사람들은 두 애의 엄마한테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누군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이 두 아이의 엄마가 누군지 아는 사람 있어요?”“글쎄 그건 잘 모르겠어요.”“그동안 인터넷에도 두 아이만 노출됐을 뿐, 아이 엄마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어요.”“오늘 이렇게 중요한 날인데 아이 엄마도 왔겠죠?”이 말과 함께 많은 사람이 좌우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그들이 찾는 사람은 지금 위층에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한창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이때 어르신과 잘 알고 지내는 옛 친구들은 호기심이 나 큰 소리로 물어봤다.“이보게, 여 영감. 애들만 보여주나? 손주며느리도 좀 만나봐야 하지 않겠나?”“에라, 이 사람아. 내 손주며느리 볼 선물은 톡톡히 챙겨오고 그런 소릴 하는 거야?”큰 어르신은 웃으면서 그들을 욕했다.다만 그 시각
여준재가 결혼 소식을 알리면서 연회장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아올랐다.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여준재는 고다정의 어깨를 끌어안고 무대에서 내려와 그의 친구들을 향해 걸어가려는데, 때마침 어머니가 그를 불렀다.심해영은 다가와 고다정의 손을 끌어 잡고 말했다.“넌 애들을 데리고 가서 여러 사람한테 인사를 시키거라. 난 다정이랑 내 친구를 좀 만나고 올 테니.”여준재는 어머니가 고다정을 여자들의 사교모임에 소개하려는 걸 알고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고다정 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작게 말했다.“어머니 따라가서 인사하고 있어요. 좀 이따가 데리러 올게요.”“네, 알겠어요. 근데 술은 마시지 말고 조심해야 돼요.”고다정은 걱정이 되어 그한테 몇 마디 당부했다.심해영은 고다정이 여준재의 건강을 걱정해 주는 걸 보고, 며느릿감에 대한 만족도가 조금 더 올라갔다.이어 그녀는 고다정을 데리고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여사님들한테로 갔다.심해영이 직접 소개하는 만큼, 이들 최고 부유층의 귀부인들도 당연히 고다정을 매우 반겼다.게다가 고다정의 말투나 태도가 구김살이 없이 대범하였고, 싹싹하게 말도 잘해, 모두가 그녀에 대한 인상이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얼마 안 되는 사이에 그녀는 벌써 그 안의 일원처럼 그녀들과 담소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걸 지켜보는 주변의 많은 부잣집과 명문 집 아가씨들은 질투와 부러움이 섞인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러는 와중에 사람들은 고다정이 여씨 집안에서 이미 신분을 굳혔다는 걸 알아챘다.30분이 지나자, 여준재가 고다정을 찾으러 왔다.“어머니, 다정 씨랑 같이 가서 제 친구를 좀 만날까 해요.”“왜 벌써 왔어. 다정이와 아직 제대로 말도 못 했는데.”심해영은 약간 핀잔하는 투로 말했다.여준재는 못 알아들은 척하며 고다정을 자기 옆으로 끌어당겼다. 옆에 있던 귀부인들은 모처럼 여준재의 색다른 모습을 보고 흥미가 생겨 한마디씩 했다.“부부 사이가 이렇게 애틋한데 우리가 괜히 미움 사지 맙시다. 여 대표, 약혼녀
연회가 끝날 무렵, 고다정은 약간 취한 느낌이었다.비록 샴페인을, 그것도 매번 아주 적은 양을 마셨지만, 건배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보니 이래저래 꽤 많이 마셔버렸다.품에 안겨 약간 해롱해롱한 여자를 보며 여준재는 실소가 터져 나와 말했다.“말했잖아요. 못 마실 거 같으면 마시지 말라고요.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 없는데.”“안 돼요. 안 마시면 남들이 주는 축복을 못 받잖아요.”고다정은 혀 꼬인 말투로 말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준재를 쳐다보더니 트림까지 했다.여준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그리고 그녀한테 뭐라 말하려고 하는 그 찰나, 목덜미가 그녀의 여리여리한 팔에 휘감겼다. 그녀는 갑자기 큰소리를 치며 말했다.“앞으로 당신은 내 거. 온 세상이 다 아는 내 거.”“네. 당신 혼자 거예요.”여준재는 유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두 사람이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때, 심해영이 여진성의 팔짱을 끼고 그들 쪽으로 걸어왔다.둘이 끌어안고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며 심해영은 입꼬리가 꿈틀거리며 여준재한테 물었다.“다정이가 취한 거니?”“네. 취해서 이젠 데려가야 할 것 같아요. 애들은 오늘 여기서 묵게 하고 제가 내일 데리러 올게요.”여준재가 이렇게 뒷일을 배치하자 두 부모님은 그의 속셈을 빤히 들여다보고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가보거라. 하준이 하윤이는 나랑 네 아버지가 돌볼 테니.”여준재는 고개를 끄덕이고 고다정을 데리고 나와 차에 태워 빌라로 향했다.돌아가는 길에 고다정은 갑자기 눈을 거슴츠레 뜨고 술주정을 부리기 시작했다.“어머, 여기 잘생긴 오빠가 있네? 너무 잘생겼다. 잘생긴 오빠, 내가 뽀뽀해도 돼?”말을 마치자, 그녀는 여준재의 입술에 키스하려는 흉내를 내며 얼굴을 들이밀었다.과감하게 자기한테 들이대는 그녀의 술에 취한 모습에 여준재는 화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몰랐다.뭐? 잘생긴 오빠? 잘 생겨서 뽀뽀하고 싶다고?다시는 이 여자를 밖에서 술을 마시게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두 아이가 본가에 있으므로 큰 어르신은 요양원에 돌아가지 않았다.그는 두 아이와 함께 정원에서 놀고 있었고 여진성이 곁에서 그를 살폈다.심해영은 강말숙을 모시고 정원 옆 정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며 그들을 지켜봤다.그 시각에 여준재가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들어왔다.두 아이가 그들을 보고 기뻐하며 달려왔다.“아빠, 엄마.”“너희들 왔구나.”여씨 집안 부모님은 그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고, 큰 어르신도 두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였다.고다정과 여준재는 차례로 인사를 드리고 앉아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그러던 중 심해영이 한 가지 이야기를 꺼냈다.“다정아, 앞으로 한 달이면 새해인데, 너랑 외할머니한테 무슨 계획이 있어?”“그건... 저흰 아직 아무 계획 없는데. 혹시 어머님께서 무슨 일 있으세요?”고다정이 의문스레 그녀를 바라봤다.그러니 이번엔 심해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옆에 있던 큰 어르신이 먼저 말을 꺼냈다.“그건 말이다, 너희들이 다른 계획 없으면 우리 두 집안이 설을 같이 보내면 좋겠구나. 그러면 집안이 벅적벅적하니 설 쇨 맛도 나고, 안 그러냐?”이 말을 들은 고다정은 별다른 의견은 없었지만 그래도 우선 할머니의 생각을 물었다.“할머니 생각은 어떠세요?”“나는 다 좋아, 같이 설 쇠도 좋겠구나. 사람이 많으면 시끌벅적하기도 하고 좋을 것 같다.”외할머니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고다정도 심해영의 제안에 동의했다.“그럼 올해는 어머님께 폐 좀 끼치겠습니다.”“얘는, 한집안 식구인데, 폐 끼친다는 게 어딨어.”심해영은 서운하다는 듯이 고다정을 쳐다보았고 곁에 있던 큰 어르신은 고다정의 말에 마음이 동하여 말했다. “두 집안이 함께 명절을 보내기로 했으면 난 오늘 산에 돌아가지 않겠다. 너희들 별일 없으면 아이들을 자주 데리고 와서 나랑 놀아줘라.”“네, 할아버지.”여준재와 고다정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그 훗날부터, 두 아이는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여씨 집안에 입적된 일은 그들에게 큰 파란을 일으키진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