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모습을 본 하준과 하윤은 머쓱한 듯, 웃으며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하윤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여준재와 안색이 좋지 않은 엄마를 보고 걱정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엄마, 아저씨랑 싸우셨어요?”하준도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다정의 손을 잡고 앙탈 부렸다.“엄마, 아저씨랑 싸우지 마세요. 전 아저씨가 정말 좋단 말이에요.”준재를 감싸고 있는 아이들의 말을 들으니 다정은 씁쓸했다.‘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아이들이 모두 여준재 편에 섰어.’‘그리고 저 사람 대신 나에게 말하고 있잖아.’순간 다정은 기분이 나빴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를 지켜보는 준재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두 아이와 마주할 때는 숨길 수밖에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다정의 집을 떠났다.이틀이 지나도록 그날의 말다툼 때문인지 준재는 다정의 집을 찾아오지 않았다.다정은 이를 눈치채지 못한 채 해야 할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하지만 두 아이는 준재를 무척이나 그리워했다.이날 그들은 참지 못하고 다정에게 다가가 속삭였다.“엄마, 어제 여준재 아저씨가 치료하러 오셨어야 했는데, 안 오셨어요. 우리가 아저씨한테 전화해서 무슨 일인지 물어볼까요?”다정은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숙이고 아이들을 바라봤고, 그들이 자신과 준재 사이에 화해할 기회를 만들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챘다.그러나 그들 사이의 문제는 몇 마디 마로 해결될 수 없는 일이었다.“그럴 필요 없어. 아저씨가 어린애도 아니고, 알아서 하실 거야.”다정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이 말에 아이들은 풀이 죽었다.반면 준재의 기분도 나아지지 않았다.어제 그가 일부러 치료를 받으러 가지 않은 것도, 다정에게 괜찮아질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다.다정이 먼저 연락이 온다면, 이전의 일이 다 괜찮아진 셈이었다.그는 밤낮으로 다정의 전화를 기다렸지만, 휴대폰은 잠잠했다.“정말 너무해!”준재는 잠잠한 휴대폰을 들고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고, 기분은 더
여준재를 만나지 못한 하준과 하윤은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막 택시를 잡으려던 순간, 검은색 승용차가 그들 앞에 멈춰 섰다.“하준아, 하윤아, 왜 여기 있어?”여진성은 차창을 내리며 눈앞에 서 있는 어린 두 아이를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그를 본 두 아이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여진성 할아버지였네요. 서프라이즈로 아저씨를 만나러 왔는데, 아쉽게도 아저씨가 손님을 만나러 가셔서 못 만났어요.”하윤은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여진성에게 상황을 설명했다.이 말을 들은 여진성은 두 아이가 택시를 타고 돌아가도록 놔둘 수 없었다.게다가 그는 오랫동안 손주들을 만나지 못했기에 그들을 데리고 대저택으로 갔다.대저택에 있던 심해영은 남편의 문자를 받고 매우 기뻐했다.“집사, 집사! 셰프한테 요리를 좀 더 하라고 해요. 우리 손주들이 저녁을 먹으러 온다네요!”“이리 와서 마당에 있는 놀이터 청소 좀 해요. 나중에 우리 아이들이 놀아야 하거든요.”“그건 그렇고, 애들 방을 좀 치워야 할 것 같네요.”심해영의 들뜬 목소리가 연이어 거실에 울려 퍼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여진성은 두 손주를 데리고 대저택으로 돌아왔다.“하준아, 하윤아, 얼른 이리 오거라. 얼굴 좀 보자.”심해영은 아이들을 보자마자 한달음에 달려가 그들을 품에 안았다.한동안 여준재와 고다정 사이가 멀어져, 그들도 아이들을 만나기 어려웠기에 기쁜 이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따뜻한 환대 속에 두 아이는 점차 마음이 놓였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놀다 지친 아이들은 이내 노부부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이 상황을 모르고 있던 다정은 할머니가 방으로 들어가자, 거실에 앉은 후, 준재가 아이들을 데리고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그러나 10시가 될 때까지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다정은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아예 데려올 생각이 없는 거야?’이 생각에 다정은 얼굴이 일그러졌고,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차 키를 들고 일어나 아이들을 직접 데리러 갔다.……마운
[하준이랑 하윤이는 놀다가 지쳐 잠들었어요.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재워도 될까요?]심해영은 전화로 고다정의 동의를 구했다.하지만 이 말은 다정에게 위험하게 들렸다.“아니요, 잠시 후에 제가 데리러 갈게요.”그 말을 한 후, 그녀는 심해영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다정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여준재를 바라봤다.너무 화가 난 탓인지, 그녀의 말은 다소 거칠었다.“여 대표님의 거짓말은 날이 갈수록 뻔뻔해지네요. 아이들이 버젓이 부모님 댁에 있는데도 모른다니요? 역시 당신 말은 믿지 말았어야 했어요. 지금 아이들을 데리러 갈 거니까 막을 생각하지 마세요!”이 말을 남긴 후, 다정은 돌아서서 떠났다.이를 본 준재는 재빨리 그녀를 따라나섰다.다정은 그의 행동을 눈치채고 차가운 눈으로 말했다.“왜 못 가게 막으시려는 거예요?”“오해예요. 전 당신을 말릴 생각이 없어요. 단지 대저택으로 데려다주고 싶었을 뿐이에요.”준재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정을 바라봤다.그는 다정이 지금 자신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녀의 귀에는 안 들릴 걸 알아 최대한 말을 아꼈다.그래서 대저택으로 가는 길 내내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대저택에서는 다정이 아이들을 데리러 올 걸 알았기에 노부부는 아쉬운 마음을 무릅쓰고 아이들을 깨웠다.그랬기에 다정이 대저택에 도착했을 때, 돌아갈 준비를 마친 두 아이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두 아이는 표정이 좋지 않은 엄마를 보고 의기소침해졌다.“엄마…….”“얼른 가자.”다정은 차갑게 말한 후, 앞으로 다가가 소파에 있던 아이들을 끌어당겨 집으로 나가려 했다.심해영은 이런 다정의 무례한 행동을 보고 이내 눈살을 찌푸리며 불만을 드러냈다.하지만 그녀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이를 알아차린 준재가 심해영을 제지했다.“엄마,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지금 저 사람이 내 손주들에게 어떻게 하는 지를 보고도 아무 말을 하지 말라는 거니?”심해영은 화
하준은 고다정과 여준재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했다.이 말을 들은 임은미는 말문이 막혔다.‘무슨 애보다 더 유치해.’[걱정하지 마, 우리 강아지. 너희 엄마랑 여준재 아저씨는 그냥 질투심에 사이가 틀어진 거야. 시간 지나면 다 해결될 거야.]“그런데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요. 엄마가 아저씨랑 앞으로 안 만날까 봐 두려워요.”옆에 있던 하준도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저랑 하윤이는 엄마랑 아저씨를 화해시키고 싶었는데, 지금은 포기해야 할 것 같아요. 이모, 엄마랑 아저씨를 화해시킬 방법이 있을까요?”[방법?]은미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그럼 이렇게 하자. 이번 주 주말에 너희 엄마한테 만나자고 할게. 마침 우리 회사에서 가족들이랑 같이 가라고 리조트 티켓을 줬거든. 그때 내가 너희 엄마를 데리고 갈게. 너희는 여준재 아저씨를 리조트로 데려와. 두 사람이 만나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분명 오해가 풀릴 거야.]이 말을 들은 하준과 하윤은 일리가 있다고 느껴 동의했다.그렇게 은미는 다음 날,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다정의 집을 찾았다.“다정아, 우리 회사에서 수고했다고 리조트 티켓을 줬어. 이번 주 주말에 같이 갈래?”은미는 말과 함께 가방에서 여러 장의 티켓을 꺼내 강말숙에게 건넸다.“할머니도 같이 가요. 경치가 정말 좋대요!”다정은 은미의 말을 듣고 감동했다.그녀는 최근 집에만 있는 것이 너무 지루해서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다.“좋아.”다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은미의 제안을 승낙했다.하지만 강말숙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나는 집에 있을게. 너희들끼리 재밌게 놀다 와.”“할머니, 왜 안 가시려고 하세요. 같이 가요, 네?”은미는 강말숙의 옆에 붙어 애교를 부렸다.강말숙은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고, 허허 웃으며 말했다.“젊은 사람끼리 놀러 가는데 이 늙은이가 끼여서 쓰나.”이 말을 들은 은미는 더 이상 강말숙을 설득시키기 어려웠고, 다정과 함께 주말에 들고 갈 짐을 싸러 갔다.동시에 다정이 눈치
여준재는 이러한 고다정의 감정 변화를 알아챘다.좋은 기분은 전염되는 건지, 준재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고, 그의 기분도 좋아졌다.임은미와 하준과 하윤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서로를 바라보며 윙크하며 입을 가리고 웃었다.잠시 후, 배가 멈춰 섰다.그들은 짐을 챙겨 독특한 호텔에 가 체크인을 했다.잠시 휴식을 취한 뒤, 호텔 로비에 모인 그들은 함께 호텔을 나섰다.오래된 마을에 들리는 많은 사람의 북적북적한 소리는 매우 활기 넘쳤다.다정과 준재의 외모도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하지만 그들은 주변의 시선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게 다녔다.반면, 두 아이는 적어도 네댓 사람이 설 수 있는 거리를 띄우고 서 있는 엄마와 아저씨를 보고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이모, 엄마랑 아저씨가 서로 말을 안 해요. 그래도 화해할 수 있을까요?”하윤은 은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하준도 인상을 지었다.은미는 눈앞의 상황에 한숨이 나왔다.‘내 친구가 멍청한 거야, 아니면 여준재가 기회를 못 잡는 거야?’한동안 은미는 두 사람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번 여행의 목적을 다시 상기시켰다.“그럼 이렇게 하자. 잠시 후에 우리가 다른 곳으로 가는 거야, 그럼 두 사람도 서로 이야기하지 않을까?”은미는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두 아이도 이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곧 다정과 준재가 한눈 판 사이, 그들은 옆 골목으로 들어갔다.뒤이어 다정이 뒤를 돌아봤을 땐, 그녀의 곁엔 준재만 있을 뿐, 친구와 아이들이 모두 사라진 후였다.“어디 간 거야?”다정은 미간을 찌푸리고 걸어온 길을 주시하며 우뚝 서서 주변을 살폈다.하지만 그녀는 많은 사람 속에서 은미와 아이들을 찾을 수 없었다.준재는 이 상황을 보고 뭔가 이해한 듯 눈을 번쩍였다.그는 눈앞에 인상을 짓고 주위를 살피는 작은 여자를 바라보며 적극적으로 말했다.“친구분한테 전화해서 확인하는 게 어때요?”이 말에 다정은 그를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여준재는 고다정의 말을 무시하고 전화를 끊고 휴대폰 전원을 껐다.그의 행동을 본 다정은 극도로 화를 냈다.“지금 제정신이에요?!”그녀는 큰 소리로 화를 내며 달려가 휴대폰을 낚아챘다.하지만 이번에는 준재가 피하지 않고 다정이 휴대폰을 가져가도록 했다.휴대폰을 다시 손에 넣은 다정은 재빨리 전원을 켰다.그녀의 다급한 움직임은 준재를 오해하게 했고, 이에 그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지금 그 남자 때문에 이러는 거예요?”“뭐라고요?”다정이 준재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은 주변의 소음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그녀는 전원을 켠 후,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준재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기가 차서 숨을 삼킬 수도, 뱉어낼 수도 없어 매우 답답했다.마침내 그는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다정 씨가 다른 남자랑 이렇게 히히덕거리는 게 맞아요? 아이들의 입장은 생각해 보셨어요? 아이들한테 이 사람을 아빠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물어봤냐고요!”아무것도 모르는 남자가 자신을 비난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정은 헛웃음이 나왔다.“아이들이 받아들이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제가 좋으면 그만 아닌가요?”다정은 화가 난 상태로 준재를 바라봤다.준재의 얼굴은 삽시간에 굳어졌다.“제가 싫다면요?”“여 대표님이 무슨 능력으로 싫고 말고를 운운하세요? 아이들의 친아빠라는 걸로 지금 이러시는 거예요?”준재는 이를 악물고 다정을 바라보며 걱정 섞인 말을 건넸다.“전 아이들이 불행해지는 걸 원하지 않아요. 그리고 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아빠라고 부르는 건 더더욱 원하지 않고요!”이 말을 들은 다정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잠시 후, 그녀의 검은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한테 아빠라고 부를 일 없게 할게요. 그럼 됐죠?”그녀는 말을 마친 후, 곧바로 돌아서서 떠났다.준재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미간은 찌푸려졌고, 눈동자에는 짜증스러움은 번쩍였다.분명 그는 다정과 갈등을 일으키고 싶지 않
한참이 지난 후, 고다정은 하루 종일 범진 마을 중심을 찾기 위해 돌아다닌 탓에 온몸이 피곤하고 배가 고팠다.하지만 아직도 익숙한 건물은 찾지 못했다.먹구름이 드리우자 다정은 어쩔 수 없이 비를 피할만한 곳을 찾았다.한편, 여준재와 다른 일행들은 호텔로 돌아왔다.그들은 호텔 로비에서 만났으나, 다정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여 대표님, 다정이는 어디 갔어요?”“은미 씨랑 같이 있는 거 아니었어요?”준재도 놀라 물었다.두 사람 모두 다정이 상대와 함께 있었다고 생각했다.임은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오늘 아침에 헤어진 이후로 다정이를 만난 적 없어요.”“엄마가 길을 잃은 건 아닐까요?”하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걱정스럽게 말했다.준재도 하준의 말에 걱정이 됐다.“제가 전화해 볼게요.”그러나 그가 전화를 걸자, 전원이 꺼져있다는 안내 음성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은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뭐래요?”“다정 씨 핸드폰이 꺼져있어요.”준재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솔직하게 대답했다.은미는 그것에 대해 크게 연연해하지 않았다.“배터리가 없을 수도 있으니 잠시 기다려 봐요. 그래도 안 오면 나가서 찾아봐요.” 하지만 준재는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바깥에는 비가 많이 내리고 있어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럼 이렇게 해요. 은미 씨는 여기서 아이들이랑 다정 씨를 기다리고 계세요. 저랑 구 비서가 다정 씨를 찾으러 나가볼게요.”그는 이 말을 남기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호텔을 나섰다.그런 준재를 본 구남준은 호텔에서 준 우산을 가지고 재빨리 그를 쫓아갔다.준재는 그를 바라보며 명령했다.“구 비서는 관광지 순찰 지구대에 가서 사람을 찾는 걸 도와달라고 해.”“예.”남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지시를 받았고, 동시에 준재에게 조심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준재는 낮에 다정이 떠나간 방향을 따라 꼼꼼히 주위를 살폈다.하지만 오래된 마을에는 관광객이 없을뿐더러 주변 상점이 모두 문을 닫은
호텔에 있던 하준과 하윤은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 마음에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매우 영리하게 울지 않았다.“오빠, 아저씨가 엄마를 찾을 수 있을까?”하윤은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하준은 눈을 과장되게 깜박이며 눈물을 참았다.‘내가 우리 가족 중에 유일한 남잔데, 지금은 울면 안 돼.’그는 무뚝뚝한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아저씨는 반드시 엄마를 찾으실 거야.”임은미는 옆에 서서 다정을 걱정하는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릴 것 같으면서도 꾹 참는 것을 보고 그들이 철이 일찍 든 것 같아 안타까웠다.‘여준재 그 남자가 이렇게 미덥지 않은 사람이란 걸 알았더라면, 애초에 도와주지도 않았지!’만약 다정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면, 그녀는 평생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은미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불안해졌고, 준재만 믿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직접 나가려 했다.“하준아, 하윤아, 방에서 나오지 마. 이모가 엄마 찾아올게.”그녀는 말을 마친 후, 호텔에서 준 우산을 들고 나갈 준비를 했다.은미가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호텔로 돌아온 구남준과 마주쳤다.남준은 은미를 보더니 의아해하며 물었다.“은미 씨, 어디 가세요?”“다정이 찾으러요. 남준 씨 대표만 믿고 있자니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요.”은미는 준재에 대한 혐오감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남준은 말문이 막혔다.그러다 그는 은미가 떠나려 하자 재빨리 말렸다.“은미 씨, 이제 안 찾으셔도 돼요. 이미 대표님께서 고 선생님을 찾아 같이 오시는 길입니다. 호텔로 돌아가서 따뜻한 생강 수프 두 개를 주문하시고, 고 선생님을 위해 목욕물은 받아 놓는 게 더 그들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대표님께서 고 선생님이 비에 맞으셔서 컨디션이 안 좋다고 하셨거든요.”“왜 진작 말씀하지 않으셨어요!”은미는 화가 나 몸을 돌려 황급히 호텔로 돌아갔다.두 아이는 다시 돌아온 이모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이모, 구남준 아저씨가 뭐라 하셨어요? 엄마를 찾았대요?”“응, 엄마를 찾았는데, 지금 몸이 좋지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