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정이 성시원과 함께 윗사람들을 만나러 갔을 때 그들이 귀국했다는 소식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다.그들이 공항을 빠져나갈 때 연예인을 찍으려고 기다리던 파파라치의 카메라에 포착된 것이다.한순간 인터넷에서 고다정이 속한 팀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다.[성시원 교수 팀은 너무 겸손해. 이렇게 조용히 귀국하다니!][그러게. 성시원 교수님 일행이 귀국할 때 공항에 마중 가려고 했는데!][공항에 마중 가지는 못했지만 YS그룹 주식과 고다정 회사 제품을 많이 샀으니 그들의 과학연구를 지원했다고 볼 수 있겠지!][나도 많이 샀어. 앞으로 성시원 교수 팀이 더 많은 불치병 약품을 개발해 환우들의 부담을 덜어줬으면 좋겠어.]누리꾼들의 성원에 힘입어 그날 저녁 고다정 회사 제품과 YS그룹 주식은 열기가 뜨거웠다.고다정 일행은 해외 실험 상황을 보고한 후 각자 귀가했다.“엄마, 아빠, 드디어 돌아왔네요.”고다정과 여준재가 돌아온 것을 본 쌍둥이는 대뜸 소파에서 뛰어내리더니 팔을 벌리고 두 사람을 향해 뛰어왔다.그들은 각각 아빠, 엄마를 끌어안고 올려다보며 물었다.“엄마, 아빠, 다치지 않으셨죠?”“걱정하지 마. 안 다쳤어.”고다정과 여준재는 다정하게 쌍둥이를 끌어안았고, 뒤이어 그들의 손을 잡고 거실로 들어갔다.심해영이 소파에 앉아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애들이 너희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 오자고 졸랐어. 그런데 너희가 돌아오지 않아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 오후에 어디 갔었어?”“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 바로 돌아오지 못했어요.”여준재는 길게 말할 생각이 없는 듯 간결하게 대답했다.이를 눈치챈 심해영은 더 묻지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너희가 돌아왔으니 나는 좀 쉬어야겠다. 너희를 밤새 기다렸더니 졸려 죽겠어.”“어머니가 그동안 수고하셨어요. 애들은 저희가 돌볼 테니 들어가 쉬세요.”여준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고다정도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그날 저녁 쌍둥이는 고다정과 여준재의 방에 머물렀다.두 아이는 침대에 누워 호기심 어린 눈
빨간색 실크 캐미솔 잠옷을 입은 중년 여성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다름 아닌 채성휘의 어머니 하지유였다.그녀의 뒤에는 군청색 잠옷을 입은 그의 아버지 채은호가 따라 들어왔다.“아버지, 어머니, 왜 여기 계셔요?”채성휘가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이때 전화기 너머로 임은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오셨으니 무슨 문제 있으면 두 분한테 물어봐요. 저는 너무 졸려서 먼저 잘게요.”말하고 나서 임은미는 직접 전화를 끊었다.채성휘는 끊긴 휴대폰을 보며 임은미가 떠난 것이 부모님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데, 입을 열기도 전에 하지유가 선수를 쳤다.“너 은미한테 전화하는 거 맞지? 은미는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우리가 돌려보냈어. 너희 둘이 아직 명분이 없는데 은미가 여기 사는 건 아니잖아. 조신한 여자애가 결혼 전에 남자 집에 사는 게 어디 있어?”하지유는 상황을 설명하는 척하면서 실은 임은미의 험담을 하고 있었다.바보가 아닌 이상 어머니의 말에 숨은 뜻을 모를 리 없는 채성휘는 워낙 잔뜩 구겨진 미간이 펴진 적이 없었고, 눈에는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어머니, 은미 씨를 괴롭히지 않겠다고 저한테 약속하셨잖아요?”“내가 괴롭혔어? 뭘 보고 내가 괴롭혔다고 말하는 거야?”하지유는 얼굴을 찌푸리며 언짢은 표정으로 그를 흘겨보았다.채성휘는 말문이 막혔다. 그가 반박할 말을 찾기 전에 하지유가 말을 이었다.“너는 내가 은미가 싫어서 돌려보냈다고 생각하니? 이게 다 너희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 너희 둘이 아직 결혼하지 않았는데 혼전 임신한 것도 말이 안 돼. 이 소식이 고향에 전해지면 네 큰 고모랑 친척들이 은미를 어떻게 생각하겠어?”“성휘야, 네 엄마는 정말 은미를 생각해서 돌려보낸 거야. 그리고 은미를 돌보는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할 필요 없어. 우리가 사용인을 딸려 보냈으니까.”하지유가 눈짓하자 채은호도 말을 거들었다.이를 지켜보던 채성휘는 더욱 대책이 없다는 표정을
쌍둥이가 나간 후 고다정은 친구를 바라보며 걱정스레 물었다.“말해 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임은미도 원래 상의하려고 친구를 찾아온 것이기 때문에 숨기지 않았다.“성휘 씨 부모님이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어떻게 된 거야?”고다정이 즉시 미간을 찌푸리며 캐물었다.임은미는 자기가 돌아온 후 발생한 일을 털어놓았다.“내가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성휘 씨 부모님이 오셨는데, 나랑 성휘 씨가 결혼 전에 같이 살면 소문이 안 좋게 날 수 있다며 일단 집에 돌아가라고 하셨어. 나를 돌보는 사용인을 보내긴 했지만 어쩐지 나를 못마땅해하시는 것 같아.”이 말을 들은 고다정도 깊은 생각에 잠겼다.“그때 구체적으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말해 봐.”“그때...”임은미는 채성휘 부모님이 했던 말을 그대로 전했다.이 말들은 얼핏 들으면 임은미를 위하는 것 같지만 말에 담긴 깊은 뜻을 따져보면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친구와 채성휘의 신분을 구분하고 있었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녀는 친구를 바라보며 물었다.“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노력해 보고 싶어. 다정아, 나를 좀 도와줘. 어떻게 하면 될까?”임은미가 간절한 눈빛으로 친구를 바라보았다.친구의 마음을 이해하는 고다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우선 채성휘 씨 부모님이 왜 너를 싫어하는지 알아내야 해. 너 요 며칠 두 분을 뵈러 간 적이 있어?”“두 분을 모시고 운산을 한 번 둘러볼 생각으로 연락했다가 거절당했어. 내가 임신 중이라 돌아다니면 안 된대.”임은미는 요 며칠 채성휘 부모님과 접촉한 상황을 말하면서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자기가 뭘 잘못해서 채성휘 부모님이 이렇게 싫어하는지 알 수 없었다.고다정도 이 말을 듣고 뭐라 해야 할지 몰랐다.상대방의 행동이 지나치다고 하기에는 이치에 맞고 근거가 있어 흠잡을 데가 없었다.고다정이 생각하다 물었다.“채성휘 씨에게 이 얘기를 한 적이 있어?”“아니, 내가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임은미가 고개를 젓자, 고다정은
하지만 임은미는 대답할 겨를도 없이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더니 재빨리 맞은편으로 향했다.고다정은 그녀가 무작정 달려가는 것을 보고 손에 땀을 쥐었다.이 시각 도로는 오가는 차들로 붐비고 있기 때문이다.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정말 비극이다.“은미야, 천천히 가. 차 조심해!”고다정은 임은미를 향해 소리치고는 쌍둥이에게 얌전히 차에 있으라고 당부한 후 그녀를 쫓아갔다.소담과 화영도 걱정되어 뒤차에서 내렸다.그들이 고다정의 뒤를 쫓아 맞은편 길가에 도착해 보니 임은미가 표정을 구긴 채 채성휘 앞을 막고 있었다.채성휘 옆에는 예쁘장하게 생긴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이 있었다.“이분은 누구예요?”임은미가 차가운 얼굴로 채성휘 옆의 여인을 가리키며 캐물었다.채성휘는 한순간 당황했지만 당당하게 소개했다.“이쪽은 어머니 친구분 따님 한시영 씨. 제가 약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찾아왔어요. 이쪽은 제 약혼녀 임은미 씨.”그는 또 임은미에게 상황을 설명했다.“한시영 씨가 오늘 막 도착했거든요. 그래서 어머니가 저한테 여기저기 구경시키라고 하셨어요. 저녁에 은미 씨를 불러 같이 식사하려 했는데,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요.”이 말을 들은 임은미는 채성휘를 힐끗 쳐다보고는 한시영에게 시선을 고정했다.여자의 직감으로 그녀는 한시영이라는 여자가 자기한테 적대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한시영이 무슨 목적으로 나타났든지 그녀는 기세 싸움에서 질 수 없었다.“안녕하세요, 한시영 씨. 저와 성휘 씨의 약혼식에 참석하려고 멀리서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침 제가 친구랑 쇼핑 중인데 같이 하실래요? 성휘 씨는 남자여서 여자들이 뭘 좋아하는지 몰라요.”임은미는 말하면서 채성휘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채성휘는 질투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빙그레 웃으며 호응했다.“그래도 되죠. 여자들끼리 말도 더 잘 통할 거예요. 마침 저는 연구소에 못다 처리한 일이 있어서.”이 말과 함께 채성휘는 한시영에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돌아서서 가버렸다.내키지 않
“이모, 이 치마 입어봐요. 예쁠 것 같아요.”“이거, 이것도 입어봐요. 이모는 다리가 이렇게 길고 예쁜데, 치마를 입지 않으면 낭비예요.”쌍둥이는 부지런한 꿀벌처럼 브랜드 매장에서 끊임없이 임은미에게 예쁜 옷을 골라주었다.달콤한 말도 끊인 적이 없다. 이를 지켜보던 고객과 점원들이 잇달아 웃음을 지었다.“어머, 얘네 너무 귀여워!”“또 둘째를 낳고 싶게 만드네!”“정말 너무 귀엽다!”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고다정은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이렇게 훌륭한 아이들이 내 아이다!’임은미는 웃지도 울지도 못 할 노릇이다.특히 쌍둥이가 매장의 옷을 싹쓸이하려는 기세로 나오자 그녀는 급히 말렸다.“그만, 이제 그만 가져와. 이것만 입어보려고 해도 한참 걸릴 거야. 그리고 내 옷만 고르지 말고 너희 엄마 옷도 몇 벌 골라봐. 아니면 너희 엄마가 질투할지도 몰라.”그녀는 쌍둥이가 고다정에게로 시선을 돌리도록 유도하려 했다.그녀의 속내를 모를 리 없는 고다정은 즉시 눈썹을 치켜뜨며 웃었다.“질투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 준, 윤, 이모에게 예쁜 옷을 많이 골라줘.”“네, 엄마!”쌍둥이는 큰 소리로 대답한 후 계속해서 임은미를 위한 예쁜 옷을 골랐다.그들의 분주한 모습을 지켜보던 고다정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친구 곁에 다가와서는 두 손을 그녀의 어깨에 올려놓고 그녀를 탈의실로 떠밀었다.“빨리 이 옷들을 입어봐.”임은미는 어쩔 수 없이 옷을 한 아름 가득 안고 탈의실에 들어갔다.역시 쌍둥이의 안목은 굉장히 높았다.그들이 임은미를 위해 고른 옷들은 모두 임은미의 분위기에 잘 맞았다.“이모 너무 예뻐요!”“이 옷들이 이모가 입으니 모델보다 더 분위기 있어요!”쌍둥이는 오버하며 꿀 발린 말을 했고, 점원들도 각종 찬사를 보냈다.그들의 칭찬에 황홀해진 임은미는 그제야 얼굴에 억지웃음이 아닌 유쾌한 웃음이 번졌다.그녀는 치맛자락을 잡고 피팅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돌아보며 자신의 미모를 감상하더니 이렇게 예쁜 옷
이 말이 끝나자마자 고다정은 친구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고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하하, 장난이야.”그녀는 아직 진동 중인 휴대폰을 다시 집어들고 웃으며 말했다.“어디 보자. 채 교수님이 무슨 말씀 하시려는지?”임은미가 이를 보고 씩씩거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고다정이 전화하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지, 그녀는 입을 삐죽 내밀고 쌍둥이에게 불평했다.“너희 엄마가 너무 나빠. 날 괴롭혀!”“엄마가 나쁘긴 한데, 방금 이모 표정이 너무 웃겼어요.”쌍둥이가 눈을 깜박거리며 입가에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임은미는 잠깐 멍해졌다가 일부러 사나운 척하며 그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좋아, 너희들도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내 손맛 볼래?”“아, 이모 살려줘요!”미처 피하지 못한 하윤이 임은미에게 잡혀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용서를 빌었다.고다정은 그들이 장난치는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이때 전화기에서 채성휘의 목소리가 흘러나와 그녀의 귓가를 때렸다.“다정 씨, 은미 씨는요?”“은미는 애들이랑 놀고 있어요. 무슨 일이 있으면 저한테 얘기하셔도 돼요. 이따 전해드릴게요.”고다정은 임은미가 지금 전화 받기 싫어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채성휘도 옆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듣고 임은미가 정말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저녁에 부모님이 한시영을 환영하는 의미로 식사 자리를 마련했는데 은미 씨도 같이 오래요. 제가 데리러 갈 테니 볼일이 끝나면 저한테 메시지를 보내라고 은미 씨한테 전해주세요.”이 말을 들은 고다정은 실눈을 뜬 채 대답하지 않고 반문했다.“부모님이 은미를 데려오라고 하신 거예요? 아니면 채 선생님이 은미를 데리고 가고 싶은 거예요?”그녀가 괜히 이렇게 묻는 게 아니다. 시내 구경을 핑계로 친구 딸을 채성휘한테 떠민 것을 보면, 채성휘 부모님은 두 청년을 이어주고 싶어 한다. 그리고 두 분은 저녁이 만남의 좋은 기회라는 것을 모를 리 없다.채성휘는 고다정이 문제를 알아챈 줄도 모르고
그날 저녁 채성휘가 임은미를 데리러 왔을 때 고다정과 여준재가 같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살짝 놀랐다.고다정도 그의 표정 변화를 보고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채 교수님, 우리 친정 쪽에서 한 사람이 더 가도 괜찮죠?”“그럼요. 괜찮아요.”고다정이 이렇게 예의를 차려서 말하는데 어찌 감히 안 된다고 말하겠는가.고다정이 그제야 만족한 듯 콧노래를 불렀다.여준재는 그녀가 친구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일부러 부른 것이다.쌍둥이는 이미 집으로 보냈다. 오늘 저녁 식사 자리에서 불쾌한 일이라도 생기면 두 아이에게 안 좋은 영향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은미 씨, 차에 타요. 부모님은 이미 레스토랑에 도착하셨어요.”채성휘가 임은미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임은미는 그를 흘겨보고는 거절하지 않고 조수석으로 향했다.채성휘는 극진하게 차 문을 열고 젠틀하고 자상하게 그녀를 부축해 차에 태운 후 문을 닫았다.이 모든 것이 끝난 후에야 그는 고다정과 여준재에게 시선을 돌렸다.그가 입을 열기 전에 고다정이 먼저 말했다.“우리는 차를 가지고 왔어요. 앞에서 가시면 저희가 뒤에서 따라갈게요.”“그래요. 그럼 저 먼저 출발할게요.”채성휘가 말하면서 운전석에 올라탔다.앞차에 시동이 걸리자, 고다정과 여준재도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랐다.가는 길에 여준재가 채성휘의 승용차를 보면서 탄식했다.“일할 때 그렇게 결단력 있는 사람이 집안일은 엉망이네요.”“저도 채성휘 씨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어요. 걱정돼서 기어이 이번 가족 식사에 참석하겠다고 했어요.”고다정도 한숨을 지었다.“은미가 지난 몇 년 저를 많이 도와줬어요. 아저씨와 아주머니도 한때 저한테 많은 도움을 주셨고요. 지금 제가 능력이 되니까 당연히 은미가 다른 사람에게 구박당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요. 내 사람을 누구도 괴롭혀서는 안 돼요.”여준재는 친구 역성을 드는 아내를 보며 빙그레 웃었지만 좀 질투도 났다.고다정과 함께 지낸 지 이렇게 오래됐지만 이런 대우는 한 번도 받아본 적
“그 역겨운 눈 치워요. 더 보면 사람 시켜서 눈알 파냅니다.”여준재는 서늘한 눈빛과 위압적인 존재감으로 한시영을 바라봤다.한시영도 온화했던 남자가 갑자기 표정이 바뀌자 순식간에 호감에서 공포로 바뀌었다.이 모습을 본 고다정은 만족스러운 듯 입술을 말아 올리며 한시영에게 차갑게 말했다.“나는 은미 친구이긴 하지만 친구를 넘어 친정 식구이기도 해요. 은미 미래 시댁 식구들이 운산에 왔는데 어떻게 친정 사람인 제가 대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러다 남들에게 알려져서 우리 집에서 몰상식하게 대했다고 말이라도 나오면 어쩌려고.”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한시영의 표정이 바뀌었다.‘친정 식구? 안돼, 절대 이 여자를 들여보낼 수 없어. 안 그러면 오늘 밤의 계략은 물거품이 될 것이 분명하다.’그녀가 미처 말리기도 전에 고다정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고, 눈에 예리한 빛이 번뜩이며 옆에 있던 채성휘를 재촉했다.“저희 안으로 안내해 주세요. 아주머니, 아저씨 오래 기다리게 하시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채성휘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식당으로 안내할 준비를 했다.하지만 그들이 움직이자마자 한시영은 그들의 길을 막으며 다급하게 말했다.“들어가면 안 돼요.”한시영이 고다정과 여준재에게 한 말이었다.이를 본 두 사람은 다소 흥미로운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올렸다.누군가 그들의 앞을 막아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특히 고다정은 여준재를 만나면서 어머니의 반대를 마주한 이후 이런 상황이 오랜만이었다.길을 막고 있는 앞의 여자를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은 옆에 있던 채성휘를 향하며 차갑게 말했다.“채 선생님, 무슨 일인지 설명해 주시겠어요?”“그래요. 나도 왜 우리 친정 식구가 안에 못 들어가는지 알고 싶네요. 왜요, 오늘 채씨 가문에서 오래된 친구 따님 대접하느라 여기까지 인사하러 온 제 친정 식구는 환영받지 못하는 건가요?”임은미 역시 채성휘의 손을 뿌리치고 아니꼬운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비록 채씨 가문에서 오늘 모임에 친정 식구들을 초대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