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두 사람은 아래층 거실로 내려왔다.유라는 유준재 옆자리에 앉고 싶었지만, 유준재가 거절했다."저쪽에 가서 앉아.""갑자기 왜 그래? 우리 예전에도 나란히 앉아서 술 마셨잖아."유준재가 거리를 두자 유라는 모르는 척하며 미간을 찌푸리고 불만을 표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직설적으로 말했다."너도 말했듯이 그건 예전이야. 지금은 지금이고.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어.""뭐가 달라졌는데?"유라가 단념하지 않고 여준재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내가 이미 자리에 앉았는데 설마 나더러 또 저쪽에 가서 앉으라고 하겠어?'여준재는 확실히 그녀에게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1인용 소파에 가서 앉았다.이를 본 유라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준재야, 너 요즘 나에게 너무 차갑게 구는 거 아니야?""내가 언제 따뜻하게 대해준 적이 있었어?"여준재가 냉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유라는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유라는 콧방귀를 끼며 술 병마개에 화풀이하듯이 있는 힘껏 와인을 따고는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준재 너, 약혼자가 생긴 뒤부터 예전과 많이 달라진 거 알아? 내가 어렵게 이곳에 왔는데 놀러갈 때 날 데려가지도 않고 오히려 나와 사이도 멀어졌잖아. 다정 씨만 챙기고 친구는 뒷전인 거야?"말하면서 그녀는 술을 한잔 따라 여준재에게 건네줬다.여준재는 바로 술잔을 받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사람은 언젠가 변해."이 말을 들은 유라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안해졌다.그녀는 있는 힘껏 와인잔을 움켜쥐었다가 실수로 잔을 깨뜨리고 말았다.부서진 술잔이 상 위에 널브러졌고, 빨간 와인과 함께 유라의 피도 상 위로 떨어졌다.이를 본 여준재가 미간을 찌푸리고 옆에 놓여있던 휴지를 유라에게 건네주었다.그녀는 켕기는 게 있는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나도 모르게 힘을 너무 많이 준 것 같네."그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한마디 하고는 재빠르게 상 위를 치우면서 말했다."와인 잔 하
방으로 돌아온 유라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준재가 고다정 그년 때문에 십여 년 동안 쌓아온 우리 우정을 무시하고 협력관계를 끝낼 생각도 하고 있다니. 절대 고다정 그년을 가만히 내버려 둬서는 안 되겠어!'유라는 자신이 손을 써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유라의 머릿속에 클럽에서 만났던 여자가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바로 자신의 부하에게 전화를 걸었다."고다빈이 지금까지 너에게 연락이 없었던 거 맞지?"클럽에서 나온 뒤로 그녀는 사람을 시켜 고다빈에 대해 조사하라고 지시했었다. 그래서 고다빈이 고다정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부하의 공손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네. 저에게 연락한 적이 없습니다."이 말을 들은 유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고다빈, 고다정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 아니야? 왜 지금까지 참고 있는 거지?'유라는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사실이 명령을 내리는 것에 지장을 주지는 않았다."고다빈이 널 찾지 않았다면, 네가 먼저 연락해봐. 그 여자와 합작해야 해. 그 여자가 고다정에게 손만 써준다면 무슨 요구든지 다 들어준다고 해.""네, 알겠습니다."부하는 명을 받고 전화를 끊었다.고다빈은 아직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그 시각 고다빈은 진씨 가문 별장에서 진시목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진시목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곧 새벽이 다가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고다빈은 진시목에게 전화를 걸었다."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삐 소리 이후..."전화기 너머에서 기계음이 들려오자 고다빈은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빌어먹을, 진시목이 핸드폰을 꺼놓다니!'고다빈은 포기하지 않고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지만 받는 사람이 없었다.그녀는 할 수 없이 진시목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드디어 이번에는 전화가 통했다. 그녀는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오빠 어딨어요?""... 고다빈 씨, 제가 회사에서 나올 때 대표님
깜짝 놀라는 여인을 보며 여준재는 손을 들어 그녀의 하얀 얼굴을 만지며 사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아침 일찍 왔어요. 아침을 가져다주려고 온 건데 곤히 잠들어 있는 다정 씨를 깨울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나도 어젯밤에 잠을 잘 못 자서 다정 씨를 안고 잠들었어요.""준재 씨는 왜 잠을 잘 못 잔 거예요?"고다정이 물었다.여준재는 그녀를 보며 진지하게 대답했다."다정 씨가 없어서요."간단한 대답이 없지만 고다정은 꿀을 먹은 듯 마음속이 달콤해 났다."아침 일찍 사탕 먹었어요? 이렇게 말을 잘하다니."그녀는 여준재를 놀리며 입꼬리를 올리고는 환하게 웃었다.여준재는 눈썹을 치켜뜨며 큰 손을 뻗어 고다정의 허리를 감싸 자신의 앞으로 데려오며 머리를 숙이고 말했다."사탕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키스해 보면 알 수 있잖아요."말을 마친 그는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했다.자신의 말에 여준재가 이런 식으로 반응할 줄은 몰랐다. 고다정은 금방 일어났기에 아직 칫솔을 하지 않은 상태여서 멈칫하며 남자를 밀어내려 했다.그녀의 얼굴과 눈에 담긴 감정을 본 여준재는 알아차렸다는 듯이 서서히 그녀의 입술에서 떨어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난 신경 쓰지 않아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다시 고다정의 입술을 향해 다가갔다.이번에는 고다정도 여준재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꼭 껴안고 그의 사랑을 느꼈다.그들은 여기가 집이 아닌 연구소 사무실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키스만 하고는 이성을 붙잡고 서로 떨어졌다.고다정은 흐리멍덩한 눈을 하고 맥없이 침대에 누웠다. 핑크색 입술이 조금은 부어오른 것 같았다. 그녀가 누워있는 모습은 마치 잘 익은 열매처럼 따러 오라고 유혹하는 것 같았다.여준재는 그녀를 보며 자신이 충동적인 일을 벌이지 못하게 있는 힘을 다해 통제했다.그는 자신이 충동적인 일을 벌이지 못하게 얼른 침대에서 내려와 옷매무새를 다지고는 옆에 놓여있던 도시락을 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식당에 가서 아침밥을 데워서 올게요."말을 마친 그는
고다빈이 자신을 훑어보고 있다는 것을 느낀 남자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그는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입을 열었다."고다빈 씨, 제 주인님께서는 고다빈 씨가 고다정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고다정이 제 주인님에게 미움을 샀습니다. 고다빈 씨가 고다정을 처리해 준다면 제 주인님께서 어떠한 요구든지 들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법에 어긋나는 일도 되나요?"고다빈이 미간을 찌푸리며 바라봤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한다고 생각했다.그녀는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당신 주인님이 누구예요? 나를 돕고 싶다면 왜 본인이 직접 오지 않고 뒤에 숨어서 일을 지시하는 거죠? 너무 성의가 없는 거 아니에요?"남자는 눈을 치켜뜨며 고다빈의 태도를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하지만 주인님이 지시한 일이기에 그는 화를 참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 주인님이 누군지 당신은 지금 알 자격이 없어요. 고다정을 상대하는 일을 할 건가요? 도움이 필요하다면 우리 사람들을 빌려줄 수도 있어요."그의 마지막 말이 고다정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그녀는 고다정을 너무 상대하고 싶었다. 꿈에서도 고다정이 여준재에게 버림받고 비참하게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야만 자신이 잘 지내고 있는 게 돋보이는 것 같았다.고다빈은 고다정을 상대하고 싶어도 익명의 브로커 외에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그녀의 증오가 익명의 브로커가 한 경고보다 더 컸다."고다정을 못살게 굴 수만 있다면 난 하고 싶어요. 당신들은 고다정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요? 지금은 고다정 뒤에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확신이 없는 일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네요. 잘 못 하면 나까지 위험해질 수 있어요."고다빈이 동의도 거절도 하지 않은 채 머리를 들고 남자를 바라봤다.그녀의 말을 들은 남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입을 열었다."그 여자 뒤에 있는 사람은 여준재 아니에요? 여준재는 우리 주인님께서 해결할 거예요."남자의 말을 들은 고다빈은 손가락
"뭐라고요? 우리 엄마 정상이에요. 미쳤다니요?"고다빈이 화를 내며 의사를 노려보았다.옆에 있던 간병인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지 입을 열었다."미치지 않고서야 왜 보는 사람마다 강수지 이 천한 년이라고 말하며 죽여버리겠다고 하나요? 우리 간병인들이 어머니를 제재하다가 다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에요. 못 믿겠으면 CCTV 보여드릴게요."간병인의 말을 들은 고다빈은 당황해서 말문이 막혔다. 이때, 그녀의 머릿속에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설마 고다정이 한 짓이야?'자기 어머니는 자신이 젤 잘 알았다. 강수지의 일을 이렇게 대중들에게 말하고 다닐 사람이 아녔다.여기까지 생각한 고다빈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기 어머니를 데리고 얼른 병원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우리 엄마 이 병원 오기 전까지 멀쩡했어요. 병원에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어요. 우리 엄마 퇴원 절차 밟아주세요."고다빈은 어머니를 더는 병원에 두지 않으려 했다. 고다정에게 다시 손쓸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다.의사와 간병인은 그녀가 책임을 모두 병원 탓으로 돌리는 걸 보고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병원의 명성에 손상이 가는 게 싫었던 그들은 모녀를 돌려보냈다.그러나 가기 전에 또 작은 사고가 발생했다.고다빈은 어머니를 풀어주며 자신과 함께 가자는 뜻을 내비쳤다.하지만 심여진의 입에 있던 천을 꺼내는 순간 그녀는 고다빈의 팔을 덥석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너무 아파 비명을 질렀다."엄마, 뭐 하는 거예요? 빨리 놔줘요!"고다빈은 있는 힘껏 발버둥을 쳤지만 심여진은 그녀를 꽉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결국, 의사와 간병인의 도움으로 그녀는 겨우 팔을 빼냈지만 팔에서 빨간 피가 흘렀다.옆에 있던 심여진이 표독스럽게 말했다."강수지, 널 물어 죽여버리겠어! 난 네가 무섭지 않아. 네가 사람이었을 때도 날 못 이겼는데 네가 귀신이 됐다고 해서 내가 널 무서워할 것 같아?""엄마, 미쳤어요? 난, 강수지가 아니라 엄마 딸이에요!"고다빈이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소리쳤지만, 심여진
한 시간도 안 돼서 부하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돌아왔다.“주인님, 여준재가 해도 너무하네요.”“왜 그래?”유라가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그러자 부하는 알아낸 정보를 숨김없이 그녀에게 보고했다.“우리가 함께 일궈낸 자산을 여준재가 다 가져갔고, 심지어 모든 자산을 고다정 그 여자 명의로 바꿨습니다.”“뭐라고?”유라는 깜짝 놀라며 분노를 금치 못했다.여준재가 어떻게 이럴 수 있지?고다정 그 여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무슨 자격으로 그걸 가진단 말인가!생각할수록 화가 난 유라는 여준재를 찾아가 따지기로 했다.잠시 후, 그녀는 YS그룹에 도착했다.한편, 사무실에서 유라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여준재는 미간을 찌푸렸다.“뭐 하러 왔지?”의문스러웠지만 그래도 그는 유라를 올려보내라고 했다.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달려드는 유라, 그녀는 두 손으로 책상을 짚고 여준재를 내려다보았다.“우리가 E국에서 일궈낸 자산을 왜 전부 고다정 명의로 바꿨어? 그 안에 내 몫도 있다는 걸 잊었어?”그녀는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여준재는 고개를 들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잊은 건 내가 아니라 너야.”“그게 무슨 말이야?”일시적으로 상황 파악이 안 된 유라는 어안이 벙벙해서 그를 바라보았다.“우리가 출발하기 전에 얘기를 끝냈잖아. 그 몇 개 가문에서 빼앗은 자산을 내가 전부 가지는 대신 너한테 다른 걸 주기로. 그때 너도 동의했어.”이 말을 들은 유라는 그제야 어렴풋이 기억났다.정말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다.출발 직전, 여준재는 그녀가 좋아하는 선물을 들고 특별히 찾아온 적이 있다.그때는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여준재가 안다는 것이 마냥 좋았다. 그래서 여준재가 이 요구를 제기했을 때 생각 없이 바로 받아들였다.어차피 자산을 여준재에게 줘도 결혼만 하면 다시 그녀의 손에 돌아오니까.여준재가 고다정에게 주려고 그 자산들을 달라고 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이건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
“스승님, 제 기억에 이 처방은 초급 버전이라고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요.”고다정이 두 눈을 반짝거리며 성시원을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초급 버전이 맞아. 업그레이드 버전은 M국 사람들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절대 팔지 않아. 초급 버전 특효약은 어느 정도 부작용이 있는데, 그래서 밀매가 가능했던 거야. 이 약을 개발한다고 해도 M국의 특효약 판매량과 규제에는 영향이 없으니까.”이 말을 들은 고다정은 자기 아이디어가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스승님, 이렇게 하면 어떨지 들어보세요.”그녀는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성시원을 바라보며 방금 생각난 아이디어를 말했다.“처방에 잘못된 부분이 있더라도 어쨌든 우리 손에 초급 처방이 있으니 지금 시중에서 판매되는 특효약 성분을 분석한 후 이 처방과 대조해 보는 건 어때요? 그렇게 해서 어쩌면 M국 최신 특효약 처방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죠.”그런데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귓가에 성시원과 채성휘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고다정이 의아해하며 그들을 쳐다보았다.“왜 웃어요? 제가 방금 한 말이 웃겼어요?”“웃긴 것이 아니라 고 선생님처럼 똑똑한 사람이 이렇게 초짜 같은 말을 할 때도 있구나 싶었어요.”채성휘가 웃음을 터뜨렸다.고다정은 여전히 못 알아듣고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캐물었다.“무슨 뜻이에요?”이때 성시원이 천천히 말을 이어가며 채성휘 대신 설명했다.“채 선생님의 말뜻은 너의 생각이 너무 순진하다는 거야.”“...”말문이 막힌 고다정은 저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뭐가 순진하다고?”채성휘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의학 연구를 하는 사람 중에 머리가 안 좋은 사람이 몇이나 있겠어요? 방금 말씀하신 방법은 몇 년 전에 이미 제기됐어요. 하지만 M국 사람들이 이걸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죠. 특효약은 성분 은폐가 잘 되어 있어 분석을 통해 알아낼 수 없는 성분들이 많아요.”고다정은 이 말을 듣고 나서야 스승님과 채성휘가 왜 웃었는지 알았다.그
그 후 이틀간 고다정은 연구소에서 성시원, 채성휘와 함께 초급 처방을 분석하고 약성을 연구했다.여준재도 약속한 대로 고다정에게 아침밥을 가져다주었다.이날 그는 고다정과 함께 아침밥을 먹으면서 불쑥 말했다.“심여진이 미쳐버렸어요.”“미쳤다고요?”고다정이 의아해하며 쳐다보자, 여준재가 미안해하며 말했다.“나는 그저 정신이 혼미해지는 약을 먹인 후 당신 어머님을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 자백을 받아내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 여자의 심리상태가 너무 취약해서 우리 쪽 사람들이 자백을 유도하기 전에 스스로 악몽을 꾸고 미쳐버렸어요. 사람만 보면 당신 어머님으로 착각한대요. 지금 고다빈이 교외의 작은 별장에 가두고 직접 보살피고 있어요.”“그런 상태라면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도 없겠죠. 혹시라도 심여진이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면 그녀도 끝장날 테니까.”고다정은 고다빈의 속내를 잘 알았다.사실도 확실히 그러했다.고다빈은 지금 울화통이 치밀어 죽을 지경이다.멀쩡하던 엄마가 악몽을 꾸고 놀라서 미쳐버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물론 그녀는 직감적으로 이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아무 단서도 찾지 못했다.묶여 있는 심여진을 바라보며 그녀는 기분이 엉망이 됐고, 팽개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안다.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것은 둘째 치고 심여진이 그녀의 비밀을 다 알고 있는데, 고다정의 손에 들어가면 그녀는 끝장난다.고다빈은 사악한 생각을 꾹꾹 누르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반드시 엄마를 돌볼 사람을 찾아야 해. 내가 계속 여기 있다가는 진시목이 그 여우 같은 년한테 홀려서 혼이 나갈지도 몰라. 사람을 찾으려면 반드시 소리를 못 듣고 말도 못 하는 장애인을 찾아야 해. 그러면 엄마가 미쳐서 과거의 일을 말한다 해도 그 사람은 듣지 못하겠지.”고다빈은 혼자 중얼거리며 앞으로의 계획을 세웠다.일 처리 능력이 뛰어난 그녀는 그날 오후 청각 장애인을 가사 직원으로 고용해 데려다 놓고 별장을 떠났다.그런데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