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제시간에 회의실에 모이지 않았지만, 송연아는 놀라지 않았다. 만약 모두 제시간에 모였으면 그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정경봉이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다.“다 준비했어요.”시간을 아주 딱 맞추었다.“수고했어요. 우선 여기서 쉬다가 제가 메시지를 보내면 그때 회의실로 가지고 오세요.”송연아가 말하자 정경봉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저기... 언제면 저를 용서하고 다른 일을 맡기실 거예요. 다른 일은 아무리 힘들어도 불평불만 없이 할 건데 이런 원장님의 사적인 일을 하는 조수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정경봉이 나가려다가 참지 못하고 물었고 송연아는 손에 쥔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급해하지 마요. 앞으로 많이 바빠질 거니까.”“그게 언제인데요?”정경봉이 또 물어보자, 송연아는 벽에 걸린 시계를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미팅 시간이 다 됐네요. 먼저 쉬고 있어요.”“미팅요? 방금 지나오면서 봤는데 한 사람도 없었어요. 그들은 원장님 말을 듣지 않아요. 혼자서 미팅하실 거예요?”정경봉이 냉정하게 말했다.“본인이 말이 많다는 거 알고 있죠?”송연아의 안색이 변하자 정경봉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제가 뭐 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니고, 말도 못 해요?”“그 정도면 충분해요.”송연아는 귀찮아졌다.“아무튼 잘 해보세요.”정경봉 문을 닫고 나가자, 송연아는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쉬운 거 하나도 없네.’그녀는 오래 앉아 있어서 구겨진 옷을 펴고 회의실로 갔다. 3시가 됐지만 아직 아무도 없었다. 3시 반이 되어서야 한두 명씩 차례로 들어왔는데 30분이나 늦었음에도 모두 회의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사람들은 침묵과 무관심으로 송연아에게 반항을 표하고 있었지만, 송연아는 서두르지 않고 똑같이 앉아서 물었다.“다들 이제 슬슬 배가 고플 것 같아서 준비 했어요.”송연아는 정경봉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정경봉은 메시지를 받고 회의실에 와서 송연아가 사전에 시킨대도 음식과 음료들을 나눠주었다.그는 하루 종
송연아는 다른 사람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단 커피를 좋아해요.”그러고는 앞에 놓인 블랙커피를 가리켰다.“커피를 마시면 정신을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아하는데 너무 써서 싫어요. 그래서 저는 커피에 설탕과 우유를 많이 섞어요. 그렇게 마시면 쓰지 않아서 좋거든요. 어제 저는 저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 악성 부정맥으로 앓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이 병은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수시로 목숨을 잃을 수 있어요. 저는 우리의 직업이 생명을 구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심지어 환자를 치료해 주는 의사들보다도 더 신성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우리의 연구로 인하여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신성하고 고귀한 연구센터가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요?”송연아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내 숨쉬는 소리가 달라졌다. 그녀를 반대하던 사람들도 많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그렇다, 우리의 사명은 무엇이었던가?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심장을 연구하는 게 아니었던가? 그런데 한 사람을 배척하기 위해 무슨 짓을 한 거지? 이게 진정 맞는 건가?’옥자현이 먼저 말했다.“이제부터 송 원장님을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전에는 실수로 저의 발을 밟았다는 이유로 불만을 품고 못되게 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제가 속 좁은 사람이였습니다. 사실 기존 원장님의 안목을 믿었어야 했습니다. 업무에 열중하고 이 일에 평생을 바친 원장님께서 우리 연구센터를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데 실력 없는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을 겁니다. 분명 심사숙고를 해서 송 원장님께 맡기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옥자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이 자리에서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송연아는 테이블 위에 놓인 손을 살짝 움직이며 말했다.“괜찮아요. 마음에 두지 않았어요. 그리고 고마워요.”옆에 서 있던 정경봉 역시 송연아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정말 송연아가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전 원장님이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원장 자리를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송연아의 뒤에
구애린은 자신이 무모한 짓을 한 것 같아 사과부터 했다.“죄송합니다. 저는...”구애린이 송연아를 보며 눈빛을 보내자, 송연아가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밖에서 10분만 기다려요.”구애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닫고 회의실 밖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회의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밖으로 나왔는데 송연아는 꽤 많은 서류를 품에 안은 채 마지막에 걸어 나왔다.“무슨 일 있어요?”구애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송연아가 서류를 사무실에 갖다 놓는 동안 구애린은 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송연아가 나오는 것을 보고 구애린은 앞으로 나와 반갑게 맞이하며 말했다.“오늘 원우 씨가 저보고 날짜를 잡으라고 전화했어요. 그래서 미국에 가서 아빠에게 얘기하려고요.”“그래야죠.”송연아는 어쨌든 결혼은 인생에서 거사이기 때문에 집안 어른들과 상의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일이 이렇게 바빠요? 지금이 몇 시인데 아직도 회의하고 있어요. 아직 저녁 안 먹었죠? 제가 살게요.”송연아는 집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구애린의 기분을 망치기 싫어서 동의했다.“좋아요!”“제가 탕수육을 잘하는 집을 아는데 마침 이 근처에 있어요. 거기 가요!”“단 걸 좋아해요?”송연아가 물었다.“신 걸 좋아하면 아들이고 매운 걸 좋아하면 딸이라고 들었는데 저는 단것을 좋아해요. 설마 남자도 여자도 아닌 건 아니겠죠?”“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요!”송연아가 말했다.구애린은 농담이라고 하며 웃으며 건강하고 귀여운 아기만 낳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제가 딸을 낳으면 우리 사돈 할 수 있겠네요?”“고모잖아요?”“피 한 방울도 안 섞였잖아요.”구애린이 말했다.“저는 우리 애들이 고모가 있었으면 좋겠어요.”송연아는 주요하게 친척이 없는 강세헌에게 동생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게다가 구애린은 성격도 좋고 활발해서 강세헌한테 이런 동생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아이들도 고모가 있으면 가족 또 생겨서 좋을 것 같았다.“좋아요. 고모 할게요. 여자아이를 낳아서 두 오빠의 사
키 크고 삐쩍 마른 남자가 걷어차여 바닥에 주저앉았다.자기를 걷어찬 사람을 똑똑히 보고는 물었다.“당신 누구야?”달려온 사람은 운전기사였다.그는 송연아를 보호하며 말했다.“사모님, 어서 가세요.”그는 송연아의 운전기사였을 뿐만 아니라 강세헌이 그녀를 위해 배치한 경호원이기도 했는데 송연아의 출퇴근을 책임지는 건 물론, 그녀의 안전을 책임지기도 했다.송연아가 다급하게 말했다.“애린 씨 좀 구해주세요.”“네.”운전기사가 말했다.걷어차인 남자는 분노가 끓어올랐다.사람을 잡으러 왔는데 그가 제일 먼저 쓰러 눕게 됐으니 부하들 앞에서 체면이 서지 않아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다들 뭐 하고 있어! 당장 저 사람 잡아!”그의 부하들 중에서 두 사람은 남아 구애린을 잡고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송연아와 운전기사를 향해 달려들었다.운전기사는 그들과 싸움을 벌였는데 상대가 워낙 사람이 많다 보니 아무리 싸움 실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그들에게 얽매여 잠시도 빠져나올 수 없었다.송연아는 그 틈을 타 진원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자마자 그녀는 진원우에게 주소를 알렸고, 또 재촉했다.“빨리 오세요.”“알겠어요.”전화를 끊은 송연아는 또 112에 전화를 걸었다.그들은 전혀 운전기사의 상대가 아니었다.겨우 몇 분 만에 두 사람은 의식을 잃었고, 중상을 입은 사람들도 많았다.키 크고 삐쩍 마른 남자는 불리해지자 트렁크를 열고 그 안에서 칼을 꺼내 부하들에게 나눠줬다.그 광경을 지켜보던 송연아는 마음이 다급했지만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그래서 마음속으로 진원우와 경찰이 빨리 도착하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이런 큰 싸움에 연루되면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에 주위 사람들은 그저 지켜만 볼 뿐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운전기사가 부하를 상대하는 틈을 타 남자는 뒤에서 운전기사에게 칼을 내리쳤다.송연아가 소리치며 운전기사를 일깨워줬다.“조심해요!”운전기사가 눈앞에 있는 사람을 걷어차고 다시 돌아섰을 때는 이미 늦었다. 상대는
진원우는 뛰어왔지만 구애린을 발견하지 못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애린 씨는요?”송연아는 운전기사를 부축하고 있었다.애써 침착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이미 창백하게 질렸다.“애린 씨 잡혀갔어요, 얼른 가서 찾아요!”진원우가 휴대폰을 꺼내고는 물었다.“애린 씨를 잡아간 차는 어떤 차예요? 번호판은 기억했어요?”송연아가 대답했다.“상대 차는 검은 색 미니밴이었는데 번호판이 없었어요.”그 차는 보기에 방금 구입한 것처럼 사용 흔적이 거의 없었다. 그들은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일부러 아직 번호판이 달리지 않은 차를 선택했을 것이다.“저기 CCTV 있어요.”송연아가 멀지 않은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이미 경찰에 신고했으니까 경찰이라면 저 CCTV를 입수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차량을 추적해 행방을 더 빨리 알아낼 수 있어요.”휴대폰을 너무 꽉 잡고 있어 진원우의 손에는 핏줄이 터질 정도였다.“알겠어요.”송연아가 말했다.“죄송해요, 다 저 때문에 애린 씨가 잡혀간 거예요.”진원우가 대답했다.“아니에요, 연아 씨가 어떻게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이때 진원우의 전화가 울렸고 그는 한쪽으로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송연아는 운전기사를 부축하고 먼저 자리를 떴다. 그의 몸에서는 아직 피가 흐르고 있었다.송연아가 다니고 있는 연구센터가 가장 가까웠기에 송연아가 운전해 운전기사를 연구센터로 데리고 왔다.정경봉은 마침 퇴근하려고 하는데 송연아가 돌아온 것을 보고는 인사를 건네려고 했다.하지만 곧이어 그녀가 피투성이인 남자를 부축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송연아가 말했다.“상처를 치료해야 하니까 도구 좀 준비해 줘요.”정경봉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그녀의 말대로 했다.송연아가 운전기사를 의자에 부축한 후 정경봉은 의약 상자를 하나 들고 와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송연아는 그 안에서 가위를 꺼내 운전기사가 다친 부분의 옷을 잘라냈다.그녀는 신속하고 정확하게 움직여 조금의 시간도 지체
CCTV를 통한 정보가 전해져 왔기에 진원우는 지령에 따라 차를 운전했는데 점점 더 외진 곳으로 향하게 되었다.사건이 발생한 지 어느덧 거의 세 시간이 지났다.이곳은 CCTV도 없어 더는 추적이 어려웠다!그들 모두 단서가 끊겨서 어떻게 다음 단서를 찾을지 고민하던 그때, 송연아는 풀숲에 주차된 차를 발견했다.“저기요!”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진원우는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확실히 차 한 대가 보였다.여기는 잡초가 높게 자랐기에 온전한 차가 아닌 차 지붕만 보였다.그리고 길옆에 움푹 팬 타이어 자국도 금방 생긴 것 같아 진원우는 사람을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 송연아도 따라서 내렸다.무성하게 자란 잡초는 높은 가지와 가는 잎으로 뒤덮였고, 땅에는 뒤엉키고 발을 찌르는 덩굴이 가득 있었다.그들은 타이어 자국을 따라 앞으로 걸어가서 차 옆에 도착했다.차는 제자리에 서 있었는데 주위는 아무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진원우가 ‘확’ 차 문을 열었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이 텅 비였다.그들이 일부러 여기에 차를 버려 시선을 끌려는 것일까?진원우가 말했다.“무슨 단서가 있는지 주위를 훑어봐.”...프랑스에서.강세헌은 임지훈의 안내하에 프랑스에 있는 고훈의 은신처를 찾았다.흰색 단독주택이었는데 앞뒤로 마당이 있었다.강세헌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해 너무 많은 사람을 데려가지 않았다. 이곳은 국내가 아닌 해외였기에 모든 일에 신중하게 움직이는 것이 좋았다.강세헌의 부하는 마당에서 잔디를 가꾸던 남자를 쓰러뜨리고는 자물쇠를 비틀어 열었다.고훈이 도망쳐 나온 뒤로 줄곧 이곳에서 상처를 치료했고, 거의 집 밖을 나서지 않았다.인기척을 들은 고훈은 문 쪽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말했다.“나 물 한 잔 따라줘.”그는 자기를 돌보는 하인이 들어왔다고 생각했다.강세헌이 그의 옆으로 걸어가자 고훈은 물잔을 받기 위해 손을 뻗었다.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상대가 물잔을 건네지 않아 고훈은 불만이 섞인 목소리로 몸을
그 광경을 보던 사람들도 고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임지훈이 생각했다.‘이러다가 정말 못 쓰게 되는 거 아니야?’하동훈은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그는 계속 욕을 퍼부었는데 아마 이렇게 매너가 없고 화가 난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일 것이다.송연아가 그렇게 화를 낸 것도 고훈이 그런 짓을 했기 때문이라니.“감히 나를 이용해서 그런 짓을 벌여? 젠장, 가서 죽어!”하동훈은 고훈이 송연아에게 한 짓을 알아내기 위해 고훈의 어머니를 어르고 달래서 겨우 프랑스에 있는 고훈의 주소를 알아냈다.그는 이곳에 와서 이틀 동안이나 고훈을 졸랐지만, 그는 이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방금, 그는 무심결에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서야 오랫동안의 궁금증을 풀게 되었다.“당신 그러고도 사람이야? 나까지 이용해?”하동훈이 그의 목을 조르며 말했다.“죽어!”“하동훈, 이거 놔... 미쳤어?”“내가 미쳤어도 당신 때문에 미친 거야!”고훈은 하동훈에게 맞고만 있을 수 없어 두 사람은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옆에서 지켜보던 임지훈이 말했다.“끼리끼리 싸우고 있네, 두 사람 중에 좋은 놈 하나 없어.”‘윙윙.’갑자기 강세헌의 휴대폰이 울렸다.강세헌이 전화를 꺼내 통화 버튼을 눌렀지만 전화기 너머로 아무런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그가 다시 한번 스크린을 확인해 보니 송연아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강세헌은 이쪽 소리가 들릴까 봐 휴대폰을 다시 귀에 대고는 걸어 나갔다.송연아가 먼저 그에게 연락을 하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갑자기 그녀의 전화를 받으니 기분이 좋아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왜 말을 안 해? 나 보고 싶었어?”국내의 어느 병원에서.송연아는 수술실의 구석에 앉아 가냘픈 몸을 움츠리고 부들부들 떨었다.그녀는 입을 가린 채 흐느꼈는데 참아보려고 했지만 눈물은 주체할 수 없이 흘렀다.송연아는 어떻게 진원우를 마주해야 할지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강세헌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연아야, 왜 그래?”감정을
송연아가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이미 얘기했잖아요. 그만 물어봐요...”진원우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녀의 팔을 잡았다. 하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덤덤한 척했다.“나에게 말해줘요.”진원우가 목소리를 낮췄다.송연아는 부은 두 눈을 감고 말했다.“사실 어느 정도 추측이 가지 않아요?”송연아의 팔을 잡았던 진원우의 손가락이 천천히 풀렸다.구애린을 찾았을 때 그녀는 옷이 풀어 헤쳐진 채로 차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풀밭에 누워 있었다.“그러니까 묻지 마요.”송연아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많이 속상했지만 될수록 소리 낮춰 말했다.“한 시도 떠나지 않고 애린 씨를 지킬게요. 지금 애린 씨는 원우 씨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으니 애린 씨 앞에 나타나지 마요. 애린 씨가 더 자극받을까 봐 걱정돼요.”진원우는 무슨 말을 더 하려고 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가슴이 답답하고 기분이 우울했다.속상해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송연아도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그럼 애린 씨 보러 들어갈게요. 옆에 누군가는 지키고 있어야죠.”말을 마친 송연아는 몸을 돌려 수술실 안으로 들어갔다.구애린의 수술은 그녀가 직접 했다.그래서 구애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송연아는 그녀를 자극할까 봐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병실로 갈게요.”구애린은 초점 잃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송연아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송연아는 조용히 그녀를 병실로 옮기고는 침대를 고정시켰다.그리고 의자를 하나 옮겨 침대 옆에 앉았다.구애린은 몸을 돌려 누우며 그녀를 등졌다.송연아는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끝내 입밖에 내뱉지 못했다.지금 이 순간, 모든 위로의 말은 너무 무력하게 들릴 것이다. 말로는 상처받은 그녀의 마음을 절대 치료할 수 없었다...어두운 불빛, 조용한 밤.억눌릴 대로 억눌린 구애린의 울음소리는 너무 또렷하게 들려왔다.송연아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울고 싶으면 울어요. 여기 다른 사람 없어요.”
결혼식을 마친 후 방유정 아버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떠나기 전에 임지훈에게 회사를 완벽하게 인계하려고 회사에 들어오라고 제안했다.임지훈은 송연아와 강세헌 일행과 같이 먼저 프랑스로 돌아가서 그쪽 일을 마무리했다. 비록 임지훈이 회사에 있으면 강세헌은 보다 한가하게 일을 할 수 있었지만, 그가 떠난다고 해도 그냥 조금 더 바쁠 뿐이다. 어느 회사든 누가 떠나면 절대 안 되는 건 없다. 일주일의 시간 동안 임지훈은 프랑스에서의 일들을 모두 마치고 귀국해서 방씨 가문 회사에 들어갔다.임지훈도 국내에 집이 있었지만 방유정과 같이 방씨 가문에 들어갔다. 데릴사위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방유정 아버지의 병을 알고 방유정이 부모님과 많을 시간을 보내게 하기 위해서였다. 임지훈 역시 사위로서 그럴 의무가 있었다....반년 후, 방유정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방유정 어머니는 그 충격에 순식간에 많이 늙었다. 방유정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집안 분위기는 아주 저조했는데 방유정의 대부분 시간은 어머니와 함께 보냈다. 예전의 임 비서는 이제 임 대표가 되어 그의 능력으로 방씨 가문은 아주 관리가 잘 되었고 3개월 후 방유정 어머니의 상황도 많이 좋아졌다.방유정이 드디어 임신하게 되면서 방유정 아버지가 돌아간 일도 어느 정도 잊혀가고 있었다. 임지훈은 곧 아빠가 된다는 사실이 기뻤고 방유정도 곧 엄마가 된다는 사실이 행복했고 방유정 어머니 역시 곧 외할머니가 된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정말로 모두 행복해할 만한 일이었다.방유정이 임신 6개월 때 그들은 프랑스로 갔는데 구애린은 남자아이를 낳았고 심재경의 딸은 이제 걸을 수 있게 되었는데 샛별이가 유일한 여자아이여서 모두가 예뻐했다. 샛별이는 아직 작고 어렸지만 찬이를 쫓아다니는 것을 좋아했고 찬이는 샛별이 다리가 짧다고 계속 놀려줬으며 그게 재밌다고 샛별이는 키득키득 웃었다. 찬이가 오빠라고 부르라고 하면 샛별이는 오빠라고 불렀는데 너무 귀여웠다.방유정이 말했다.“저도 딸을 낳고 싶어요.”구애린이 말했다.“그게
비록 손을 놓기 싫었지만, 방유정 아버지는 결국 방유정의 손을 임지훈에게 넘겨줬다.“앞으로 계속 사랑하며 살기를 바란다.”방유정도 아버지에게 말했다.“꼭 그렇게 할게요.”이어서 결혼식은 순서대로 일사천리로 피로연까지 모두 순리롭게 진행되었다.방유정 어머니는 결국 눈물을 참지 못했는데 딸이 그렇게도 바라던 결혼을 하니 너무 기뻤다. 그런데 결혼시키고 나니 또 잘 살 수 있을까,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세상의 부모들은 다 그런가 보다.임지훈은 방유정을 데리고 강세헌이 있는 테이블로 가서는 비록 모두 알고 있지만 다시 한번 공식적으로 소개했다. 모두 방유정을 다시 한번 소개받았는데 이번에는 심재경 친구의 사촌 동생이 아닌 임주훈의 아내로 말이다.구애린이 웃으며 말했다.“정말 너무너무 축하해요.”방유정도 웃으며 대답했다.“고마워요.”윤이도 어른들 따라 한마디 했다.“축하해요.”방유정은 윤이를 보며 말했다.“너무 귀여워요.”그녀가 손을 뻗어 윤이의 얼굴을 만지자, 윤이가 손을 내밀었다.“안아줘요.”송연아가 미간을 찌푸렸다.“윤이야, 안 돼.”방유정이 말했다.“괜찮아요.”그녀는 윤이를 안으며 말했다.“무겁지 않아요.”윤이는 그녀의 머리에 있는 금색 비녀를 보고 만지려고 했다. 방유정이 한복을 입고 있었기에 머리에 비녀를 하고 있었다. 방유정은 아주 시원하게 바로 비녀를 빼서 윤이에게 주었는데 송연아는 윤이를 제지하지 못해서 미안해했다.“이러면 안 돼요. 오늘 얼마나 중요한 날인데...”“괜찮아요. 그냥 액세서리일 뿐이에요. 윤이가 좋아하니 놀게 해요.”방유정은 정말 성격이 좋았다. 역시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것만큼 성품이 좋았다. 가끔 조금 오만하긴 하지만 작은 일에 연연하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모두 그녀처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송연아는 윤이를 안고 달래려고 했다.“윤이 착하지. 이건...”송연아는 윤이가 방유정을 어떻게 부르면 될지 생각했는데 방유정이 웃으며 말했다.“호칭일 뿐이니까 편
“지금 막 들었는데 유정 씨와 결혼한다면서요. 지금 방씨 가문에서 결혼식을 준비한다고 난리 났어요.”임지훈이 웃었다.“저 이래 봐도 능력 있는 남자예요. 여자들한테도 인기 많아요. 봐요, 결혼도 금방 하죠?”구애린이 말했다.“이제 우리 모두 짝이 있네요.”찬이도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지훈이 삼촌, 축하해요.”“고마워.”임지훈이 찬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심재경이 물었다.“그런데 데릴사위로 들어간다고 하던데요?”심재경의 말에 모두 놀라며 시선이 일제히 임지훈에게로 향했다. 확실히 놀랄만한 일이다. 임지훈의 조건에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돈도 있고 능력도 있어서 충분히 가정을 책임질 수 있는데 말이다.“하긴, 방씨 가문에 가장이 필요하긴 해요.”심재경이 그쪽 사정을 잘 알고 있기에 한마디 했다....임지훈의 결혼식으로 송연아와 강세헌도 프랑스로 돌아가는 일정을 늦췄다. 아무도 심재경의 결혼식을 보러 왔다가 임지의 결혼식까지 보게 될 줄을 생각을 못 했다. 그들뿐만 아니라 이건 임지훈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듯이 방유정과의 결혼은 정말로 찰나의 결정이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니 그 역시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임지훈이 진원우에게 말했다.“나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진원우가 말했다.“그런 배부른 소리 하지 마. 방씨 가문은 돈도 많고 유정 씨도 예쁘고 그 정도면 만족해야지.”“만족해. 다만 너무 빠른 것 같아서 그래.”귀국하기 전까지만 해도 싱글이었는데 이제 프랑스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결혼식은 방씨 가문에서 모두 준비했는데 방유정 딸 하나이고 또 사위도 너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결혼식은 아주 성대하게 치렀다. 방씨 가문의 친척들도 꽤 많이 참석해서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비록 데릴사위라고 하지만, 임지훈 측은 심재경이 준비했는데 심재경 본인도 금방 결혼식을 치렀기 때문에 익숙한지라 아주 매끄럽게 진행할 수 있었다....방유정은 정교한 메이크업을 하고 값진 웨딩드레스를 입었는
“잠도 잤는데 왜요? 모른 척하려고요?”방유정이 옷을 입더니 침대에서 꼼짝 안 하는 임지훈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왜요? 계속 그렇게 누워 있을 거예요?”임지훈이 말했다.“내 옷을 가져오지 않았잖아요. 나 입을 옷 없어요.”방유정은 그제야 임지훈이 옷이 없다는 걸 생각했다.“가져다 줄게요.”그녀는 곧바로 차에 가서 캐리어를 가지고 다시 올라갔다.“뭐 입을지는 알아서 찾아서 입고 내려와요. 아래층에서 기다릴게요.”방유정은 말을 마치고 먼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임지훈은 침대에서 내려 결혼 얘기이니만큼 격식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에 정장을 찾아서 입었다. 그가 정리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방유정은 부모님 가운데 앉아 있었는데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그녀의 부모는 그를 보자마자 더욱더 열정적이었다.임지훈이 건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저기...”“우리 딸 줄게요.”“아니에요. 지훈 씨가 저한테 시집 오는 거예요.”방유정이 정정했다.“...”“...”“...”방유정을 제외한 세 사람이 거의 동시에 물었다.“유정아,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방유정은 자신이 여자이며 이 집안에 다른 후계자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또 아버지가 중병이고 자기는 회사를 관리할 능력도 없기에 어찌 보면 자기가 남편을 찾는다기보다는 방씨 가문의 회사를 경영할 사람을 찾는 거였다. 인제야 그녀는 부모가 조급해하는 의도를 이해했고 그녀 역시 가문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에 임지훈이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이 임지훈을 각별히 마음에 들어 하는 것도 그런 것들 때문이지 않겠는가.“유정 씨,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임지훈은 뼈대가 있는 남자로서 데릴사위 할 생각은 없었다.방유정이 말했다.“후회하면 안 돼요!”“왜 안 돼요? 유정 씨가 뭘 원하든지 저 모두 만족시켜 줄 수...”“제가 원하는 게 바로 이거예요.”방유정이 외치자, 임지훈은 오히려 우스웠다. 한 여자가 나한테 시집오라고 하다니!“우리 유정이가 시집가는 거 맞아요
지금 그녀가 부모님에게 전화해서 물으면 부모님은 더 속상해할 것 같았다.‘나 이제 어떻게 해야지? 어떻게 하면 좀 더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지? 결혼, 그래 결혼해야 해.’그녀는 자기가 결혼해야만 부모님이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다. 결혼 상대도 지금 바로 방에 있지 않겠는가?‘남자 친구인 척을 해줬으니 이제 남편인 척해달라고 해야지. 진짜가 아니고 가짜라도 되니까 결혼하자고 해야겠어.’방유정은 진료 기록부를 다시 원래 위치에 넣고 비틀거리며 부모님 방에서 나와 자기 방으로 돌아갔는데 임지훈이 아직 욕실에서 나오지 않아 침대 옆에 앉아서 기다렸다. 한참 지나자, 임지훈은 가운을 두르고 욕실에서 나왔는데 침대에 자기의 옷이 보이지 않아 방유정의 옆에 서서 물었다.“내 옷은요?”그는 방유정이 잊은 것 같아서 다시 말했다.“내 옷은 지금 당신 차 트렁크에 있어요.”방유정은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지훈 씨, 우리 결혼해요.”임지훈은 어이가 없었다.“약을 잘못 먹었어요? 아니면 정신이 어떻게 됐어요?”“다 아니에요. 그냥 당신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서요.”그녀의 목소리는 다소 거칠었는데 임지훈은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녀의 이상함을 감지하고 물었다.“울었어요? 누가 괴롭혔어요? 얘기해 봐요. 제가 가서 때려줄게...”임지훈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방유정이 와락 그를 끌어안았다. 임지훈은 갑작스러운 친밀감에 몸이 굳어버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그게... 유정 씨...”그가 말하려고 할 때 방유정이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의 손이 아래로 드리는 순간 몸에 걸친 유일한 가운마저 벗겨져서 흘러내렸다.“...”방유정은 워낙 임지훈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지금 행동이 충격에 의한 도발적인 행동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웃옷의 단추를 벗겨 가슴을 드러내고는 그의 가슴에 가까이하며 말했다.“저를 좀 봐봐요.”임지훈은 참을 수 없었는지 목젖을 굴렸는데 이름 모를 불길이 아랫배에서 솟아오르더니 순식간에 딱딱해졌다.“정말 후회하지 않겠어요?”임지훈도
방유정은 어머니가 자신의 어깨를 다독이자, 화가 난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응원을 하시는 거였다.“화이팅!”방유정은 완전히 어이가 없었다.‘지금 무슨 마법에라도 걸린 건가? 도대체 왜 이렇게 변한 거지?’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만 좋다면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최근에는 갑자기 선 자리를 만들어주고 남자를 유혹하라고까지 하시다니?그녀는 어머니의 이마를 만지며 물었다.“엄마,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방유정 어머니는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우리 이제 나가야 해.”방유정의 아버지는 기사가 이미 대기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집을 나갔고 방유정은 문 앞까지 그들을 배웅했다. 차가 떠나자, 그녀는 집으로 들어갔는데 어차피 임지훈이 자고 있었기에 지루할 것 같아서 위층으로 올라가지 않았다.그녀는 가만히 있는 스타일이 아니었는지라 얼마 지나지 않아 심심했다. 그런데 집에 아무도 없었기에 밖으로 나갈 수도 없어서 임지훈을 놀려주려고 그가 곤히 자는 방으로 올라가서는 화장대에서 화장품을 가져다가 침대 옆에 앉아 임지훈에게 예쁜 화장을 해주었다. 그러고 나서도 임지훈이 깨지 않자, 옆에서 핸드폰을 보다가 눈이 아파 오니 옆에 기대서 잠이 들었다. 그녀가 일어났을 때는 임지훈은 이미 깨어나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언, 언제 깼어요?”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방유정은 참을 수 없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임지훈의 얼굴은 정말로 오페라 가수 같았는데 어찌나 웃었는지 배가 아팠다. 임지훈은 그녀의 턱을 받쳐 들고 물었다.“다 웃었어요?”방유정은 곧바로 웃음을 거두고 그의 손을 뿌리쳤다.“맘대로 제 몸에 손을 대지 말아요.”임지훈이 말했다.“유정 씨를 저에게 준다고 해도 거절이에요.”방유정은 미간을 찌푸리며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말했다.“뭐라고요? 저를 좋다고 하는 남자들이 줄을 서면 프랑스까지는 갈 거예요. 그런데 지훈 씨는 내가 싫다고요?”임지훈이 흠칫하자, 방유정이 그를 잡고 물었다.“지금 그
“방유정은 부모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알았어요. 하시고 싶은 대로 하세요.”“어서 지훈 씨 방으로 데려가.”방유정이 물었다.“어느 방에요?”방유정 어머니는 그제야 깨달은 듯 말했다.“어머, 어떡해. 게스트룸은 아직 준비가 안 돼있어. 우선 네 방으로 데려가서 휴식하게 해.”방유정은 어머니의 말에 놀라며 말했다.“아빠, 엄마, 이 정도로 오픈 마인드였어요? 어떻게 제 방에 술 취한 남자를 데려가라고 하세요?”“네 말대로 취했는데 뭐 어때?”“술김에 어떤 짓도 한다는 말 몰라요?”방유정이 묻자, 그녀의 부모님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몰라.”방유정은 철저히 말문이 막혔다. 부모님과 임지훈이 정말로 모르는 사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임지훈이 그들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을 만큼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엄마 아빠가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아무리 나를 결혼시키고 싶어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만약 진짜로 무슨 일이 있으면 책임지라고 하고 바로 결혼시킬 거야.”임지훈은 그 말을 들으며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한바탕 뿜었다. 방유정의 부모님이 너무 열정적이어서 본인이 천당에 있는 것 같았는데 정말로 귀여운 부모님들이라고 생각했다.‘방유정은 전생에 은하계를 구했나 봐. 이런 가정에서 태어나고 말이야.’방유정은 역겨워하며 말했다.“지훈 씨, 여기서 이러면 어떡해요. 화장실로 가야지.”“취했잖아.”방유정 어머니가 가정부를 불러 치우게 했다.“그만하고 불편해 보이는데 어서 방으로 데려다 쉬게 해.”방유정은 혼자서 임지훈을 옮길 수 없어서 가정부의 도움을 받아 함께 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방에 도착하자, 그녀는 임지훈을 침대에 던졌는데 임지훈은 몸이 포근한 세계에 떨어진 듯 따뜻하고 향기로웠다.“무슨 향수를 써요?”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방유정이 말했다.“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얼른 잠이나 자요.”임지훈은 취한 건 사실이지만 정신만은 여전히 말짱했다. 그는 눈을 감고 또 말했다
임지훈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알았어요. 해명하지 않아도 화는 나지 않았을 건데, 굳이 해명하니 용서해 줄게요.”방유정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삐쭉거렸다.“그렇게 잘난 척하지 말아요. 그럼 좋은 말이 안 나가니까.”“...”임지훈이 할 말을 잃었다.그때 방유정의 어머니가 열정적으로 요리를 집어 그의 앞접시에 건넸다.“이건 우리 가족이 모두 좋아하는 요리인데 맛봐요.”임지훈이 집어서 입어 넣고 먹어보더니 말했다.“맛있습니다.”방유정 어머니는 미소를 지었고 방유정 아버지는 그에게 술을 따랐다.“평소 주량이 어떻게 돼요?”임지훈이 웃으며 대답했다.“못합니다.”방유정 아버지는 호탕하게 웃었다.“잘 마실 것 같은데 너무 겸손하시네요.”임지훈이 말했다.“아니에요. 아니에요.”방유정은 보다 못해 한마디 했다.“아빠, 지훈 씨는 일이 바빠서 내일 프랑스로 돌아가야 해요. 일을 망치면 안 되니까 술을 많이 주지 마세요.”방유정 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그래.”“네. 그러니까 한 잔씩만 해요.”말하면서 방유정은 술을 가져갔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너 정말 분위기를 깬다.”방유정이 말했다.“두 분의 건강을 생각해서예요.”방유정 어머니는 술병을 들고 임지훈에게 한 잔 따르고 또 남편에게도 한 잔 따랐다.“많이 마시게 되면 우리 집에 방이 많으니 그냥 휴식하면 돼요. 비행기는 내일 타면 되는데 급해 할 거 없잖아요.”방유정은 어머니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엄마, 이 사람을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집에서 잠을 자래요? 나쁜 사람이면 어떡하려고요?”“걱정하지 마. 조사해 봤는데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야.”“...”“...”방유정과 임지훈이 순간 놀랐다. 방유정은 평생 살면서 이렇게 굴욕적인 순간을 느낀 적이 없었다. 몇 년 동안 쌓아온 체면이 한순간에 모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이런 상황을 만든 건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의 부모님이었다.방유정 아버지는 아내를 힐끗 쳐다
“지훈 씨는 취미가 뭐예요?”방유정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임지훈은 방유정의 물음에 잠시 당황하다가 자신의 생활을 떠올렸는데 일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휴가도 사용하지 않았다. 이번에 심재경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계속 일만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취미는 더구나 없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본인의 생활이 정말로 단조롭고 지루하고 재미가 없었다. 옆에서 따뜻하게 말 한마디 건네주는 사람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순간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아내를 맞이해서 함께 서로 보살펴주며 지내고 싶었는데 그런 사람만 있다면 경제적인 부분을 책임지고 고생시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방유정을 바라봤는데 본인과 전혀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방유정은 아직도 사람의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이라 다른 사람을 보살필 줄은 모를 것 같았다.“왜 그런 이상한 눈빛으로 봐요?”방유정의 물음에 임지훈이 되물었다.“어디가 이상한데요?”방유정은 좀 더 가까이 가서 그의 눈을 마주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왜요? 설마 저를 사랑하게 된 건 아니죠?”임지훈은 어이가 없었다.“당신은 성격도 안 좋고 또 엄청 잘난체하는데 내가 왜요? 점심시간이 다 되었으니 이제 들어가요.”시간을 보며 임지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굶었어요?”방유정이 그를 비웃었다.“식사 끝나면 저는 가도 되죠.”방유정은 순간 왠지 서운했다.“그렇게 가고 싶어요?”“여기는 제집이 아닌데 계속 있을 수는 없잖아요.”방유정은 그를 향해 입을 삐쭉거리자, 임지훈은 의아해했다.“왜 그래요?”“내가 뭐요?”방유정은 짜증을 냈다.“유정 씨는 정말 변덕이 많네요. 그걸 고쳐요. 남자들은 변덕이 많은 여자를 좋아하지 않아요.”방유정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바로 집안으로 걸어들어갔다.임지훈은 고개를 돌려 못에 있는 물고기들을 한 번 더 보고는 뒤따라 들어갔다. 방유정이 집에 들어서자, 그녀의 어머니가 그들을 부르러 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딸만 보였기에 그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