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엥? 왜 아무도 없지? 서재에 있나?송연아는 눈을 깜빡이다가 문을 닫고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서재 문을 열고 보니 임지훈이 책상 앞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그녀는 미간이 저절로 구겨졌다.“임 비서님? 세헌 씨는요?”“아까는 제가 채 말하지 못했어요. 도련님이 오신 게 아니라 임 비서님이 오셨어요.”오은화가 말했다.송연아는 순간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임지훈은 서류 한 뭉치를 안고 안에서 걸어 나왔다.그는 문 앞에 서 있는 송연아를 보더니 친절하게 한마디 건넸다.“안 바쁘실 때 대표님께 연락 한번 드리세요.”말을 마친 임지훈은 서류를 챙기고 떠나갔다.송연아가 강세헌과 함께 출국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 그 날부터 강세헌의 안색은 줄곧 어두웠고 기분도 가라앉았다.그는 휴대폰만 자꾸 들여다보며 자존심 때문에 먼저 송연아에게 전화를 걸지 못하고 그녀가 연락하기만을 기다렸다.하지만 송연아는 전화 한 통 없었다.그녀는 강세헌을 깜빡 잊은 게 아니라 종일 한가할 새가 없었다.송연아가 재빨리 임지훈을 쫓아갔다.“임 비서님.”임지훈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에게 물었다.“네?”송연아가 다가오며 말했다.“세헌 씨 이번에 회사 일로 출국했나요?”임지훈이 머리를 내저었다.“아니요.”“그럼 뭔데요?”송연아가 캐물었다.임지훈은 망설이다가 결국 말을 아꼈다.“이번 일은 대표님께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사실 연아 씨도 함께 따라갔어야 했는데...”“대체 무슨 일이냐고요?”송연아가 간절하게 물었다.“이 일은 대표님께 직접 들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는 볼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임지훈이 차 문을 열고 안에 탔다.송연아는 한걸음 나서며 그에게 물었다.“그럼 세헌 씨는 언제쯤 돌아와요?”“당분간은 못 돌아올 겁니다.”임지훈이 대답했다.“뉴스에서 장진희 씨 재판 결과가 곧 나온다던데 과연 어떤 결말을 얻을지 보러 안 온대요? 그 여자는 세헌 씨 부모님을 해친 원수잖아요.”송연아는 임지훈을 바라보며 제발 말해주길 바랐다
사진 속 사람은 그녀도 본 적이 있었다.주석민이 예전에 그녀에게 한 특별한 환자의 진찰 기록을 정리하라고 했는데 그때 그 환자가 강세헌의 어머니와 너무 비슷해서 몇 번 더 봤었다. 그런데...강세헌이 왜 이 사진을 갖고 있는 걸까?이번에 출국한 이유가 이 사진과 연관이 있을까?그녀가 생각에 잠겨있을 때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고개 들어 보니 오은화가 문 앞에 서 있었다.“주무신 거 아니었어요? 저는 또 깜빡하고 서재 등을 안 끈 줄 알았어요.”송연아는 손에 쥔 사진을 봉투에 넣어서 원래 자리에 놓았다.“잠이 안 와서 책 좀 보려고 왔어요.”“네.”오은화는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송연아가 웃으며 말했다.“아주머니, 제 말 진짜예요.”오은화도 웃었다.“저는 또 도련님이 안 계셔서 사모님이 못 주무시는 줄 알았어요.”송연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오은화는 역시 눈썰미가 예리했다!“일찍 쉬세요, 저도 이젠 자야겠어요.”그녀는 아무 책이나 한 권 집어 들고 서재를 나갔다.오은화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괜찮아요, 사모님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방해 안 할게요.”송연아는 실소를 터트렸다.오은화는 지금 그녀가 강세헌의 물건을 보며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고 여긴 걸까?송연아는 솔직히 아직 그 정도까진 아니다.강세헌이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그녀는 병원 일에 최지현 일까지 더해 남편을 그리워할 시간은 잠잘 때뿐이다.송연아는 책을 들고 방에 돌아가서 고작 두 페이지를 읽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들어버렸다.고요한 밤, 그녀도 깊은 잠에 빠졌다.깨나 보니 어느덧 다음 날 아침이었다.주석민에게 전화하려고 할 때 휴대폰을 아직도 서재에서 충전하고 있다는 게 생각났다.그녀는 휴대폰을 가져와 전원을 켰지만 부재중 전화가 한 통도 없었다.실망스럽기도 하고 살짝 화가 나 강세헌에게 전화하지 않고 바로 주석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저 오늘 일이 있어서 조금 늦게 갈게요.”주석민은 그녀가 최지현 일 때문에
송연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차갑게 물었다.“무슨 말이요?”장진희는 어차피 이제 곧 죽을 사람이라 남들이 들을까 봐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맞아, 내가 세헌의 부모를 해쳤어. 이번에 세헌이가 법원에 증거를 제출하고 뒤에서 수단을 쓴 탓에 나도 이렇게 어이없이 사형을 선고받았어. 게다가 바로 집행한다지. 난 내가 한 모든 일에 후회는 없어. 그저 이 말만 묻고 싶어. 내가 죽는다고 세헌의 부모가 살아 돌아올 것 같아? 네가 대신 물어봐 줘.”“이게 바로 당신의 가장 가증스러운 점이야.”송연아가 담담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사람을 해칠 때 알았어야지,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야.”장진희가 하찮다는 표정에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저지른 일이 얼만데. 세헌이를 해치는 일만 해도 한 두 번이 아니야. 그래도 수년간 자유롭게 살았어! 강세헌이 지금 날 죽여도 달라질 건 없어. 걔는 어릴 때부터 부모 없이 자라온 아이야! 나보다 더 가엽다고, 하하하...”송연아는 이토록 흉악하고 잔인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죽어버려.”송연아는 주먹을 불끈 쥐고 그녀를 노려봤다.“당신은 죽으면 그만이겠지만 당신 아들은 어떨 것 같아? 지금도 충분히 고통스럽게 살거든.”장진희가 아무리 사악하고 매정해도 그녀는 결국 한 아이의 엄마였다.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건 아마 아들뿐이겠지.“세헌 씨가 놓아주지 않는 한 강세욱이 편하게 살 것 같아? 당신 아들이 세헌 씨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해? 이점은 당신한테 고마워해야겠어. 당신 덕분에 세헌 씨는 어릴 때부터 조심스럽게 지냈고 차갑고 매정한 사람으로 변했으며 머릿속에 온통 계략으로 가득 찼어. 당신은 세헌 씨를 해쳤지만 도와주기도 했지. 만약 세헌 씨가 행복한 가정에서 자랐다면 지금 같은 수단과 박력이 없었을 거야. 한편 당신 아들은 줄곧 당신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는데 인제 당신이 떠나면 뭘 할 수 있을까?”송연아가 웃으며 말했다.“세헌 씨를 대신해서 당신에게 감사해야겠네. 당신의
“더 묻지 말고 열심히 출근해. 그건 그렇고 너한테 또 수술 하나 안배했으니까 얼른 가서 준비해. 이따가 나랑 같이 환자 보러 가.”주석민이 말했다.송연아는 여전히 일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궁금해서 따져 물었다.“그래서 이번 일은 대체 어떻게 해결했어요?”“내가 말하지 않는 건 너한테 알려주기 싫다는 뜻이니까 더 묻지 마. 나도 널 믿고 원장님도 널 믿으셔. 이젠 다 해결됐으니 안심하고 나만 따라오면 돼.”주석민이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그녀도 더는 따져 물을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네, 지금 바로 가서 준비할게요.”주석민이 웃으며 말했다.“그래, 가봐.”점심에 고훈이 송연아를 찾아왔다.“어떻게 된 거예요? 최지현은 왜 가버렸어요?”그가 성급하게 물었다.“이미 다 해결했어요.”송연아가 말했다.“어떻게요?”고훈이 캐묻자 그녀는 어깨를 들썩거렸다.“나도 몰라요.”고훈은 말을 잇지 못했다.“연아 씨네 병원이 대단하긴 하네요. 내게 실력 발휘할 기회도 안 주고 말이에요.”고훈이 투덜거렸다.“원래 위증인을 찾아서 연아 씨가 밀지 않았다고 말하라고 시키려 했거든요. 어차피 계단 입구에 CCTV도 없고 최지현이 한사코 연아 씨가 밀었다고 잡아떼니 그럼 나도 사람을 찾아서 연아 씨가 밀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면 되잖아요. 어차피 다들 증거가 없으니 최지현은 연아 씨가 밀었다는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또한 위증인이 계단 입구에 가지 않았다는 증거도 못 내놔요. 이렇게 되면 연아 씨는 누명을 벗을 수 있어요.”송연아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이게 바로 고훈 씨가 생각해낸 방법이에요?”“네, 별로예요?”고훈은 나름 자신 있게 물었다.“너무 별로예요. 고훈 씨 어머님은 오늘 중환자실에서 나올 거예요. 아까 봤는데 회복이 잘 되셨더라고요. 그런데 추후 관리도 중요하니 어머님을 잘 보살펴드리세요.”고훈은 감격에 겨웠다.“네, 알고 있어요. 이번 일은 정말 너무 고마워요.”“저번에도 말했듯이 난 의사의 의무를 다한 거니까 이러실 필요 없어
“언니!”송연아는 살짝 미안해하며 말했다.“예걸이한테 언니가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만나러 가려고 했는데 일이 너무 많아서 연락하는 걸 깜빡했어요.”안이슬은 두 눈이 퀭하고 빨갛게 부어오르기까지 했다. 그녀는 심하게 잠긴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연아야...”송연아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을 졸였다.“무슨 일이에요?”“재경이가... 날 배신했어.”안이슬은 또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송연아는 얼른 그녀를 안아주었다.“우리 딴 데 가서 얘기해요.”고훈은 이때다 싶어 친절하게 말했다.“내가 아는 곳 하나 있는데 조용해서 아무도 방해 안 할 거예요. 두 분 술 한 잔 기울여도 돼요.”송연아는 안이슬이 걱정돼 고훈을 힐긋 쳐다보며 말했다.“길 안내해요.”“네, 알겠습니다.”고훈은 재빨리 차를 가져왔다.송연아는 안이슬을 부축하며 차에 탔다.잠시 후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했다.이곳은 사설 클럽이라 고훈은 자기만의 고정 룸을 갖고 있었다.송연아는 안이슬의 팔짱을 끼고 안으로 걸어갔다. 고훈이 따라가려 하자 그녀는 날카롭게 째려봤다.“왜 따라와요? 우리끼리 할 얘기가 있는데 고훈 씨도 들으려고요?”고훈은 말을 잇지 못했다.줄곧 시중만 들었는데 문전박대를 당하다니?“알았어요. 얼른 들어가요. 저는 밖에서 기다릴게요.”고훈은 두어 걸음 물러섰다.송연아는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고훈은 비록 짜증 나게 굴지만 이번 일은 확실히 그의 도움을 받았으니까.고훈이 웃으며 말했다.“고맙긴요, 내가 더 고맙죠. 연아 씨가 우리 엄마 수술을 성공적으로 해서 나을 수 있게 됐어요...”“후!”순간 방문이 확 닫혔다.송연아는 더는 그의 잡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고훈은 문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그의 마음에 찬바람이 윙윙 휘몰아쳤다!“어떻게 된 거예요?”자리에 앉자마자 송연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재경 선배가 언니한테 얼마나 일편단심인데, 배신이라니요?”안이슬은 입술을 깨물고 저 자신을 비웃었다.“일편단심?”그녀는 나지막이 고함을
안이슬이 되물었다.“그건 이젠 중요하지 않아!”“왜 안 중요해요? 재경 선배 어머니가 무슨 수를 써서 선배랑 그 여자가 관계를 갖게 했다면 적어도 선배가 원해서 한 일이 아니란 걸 설명하죠. 그럼 그건 선배가 일부러 언니를 배신한 것도 아니에요.”안이슬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다 부질없어.”그녀는 송연아를 지그시 바라봤다.“본의가 아니어도 상대가 이미 재경의 애를 가졌는데, 설마 싫다고 하겠어?”송연아는 침묵했다.그랬다.상대는 이미 임신했고 심재경의 엄마가 콕 집은 며느릿감이니 반드시 이 결혼을 성사시킬 것이다.“하지만 언니는...”안이슬은 초점 없이 흐려진 눈길로 한곳을 바라보며 한참 침묵했다.“우린 인연이 아닌가 봐. 만남과 이별을 끊임없이 반복하더니, 결국 운명의 장난에 무릎 꿇고 말았어. 나랑 재경이는... 이젠 정말 끝이야.”송연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연아야, 나랑 한잔해. 오늘 밤이 지나면 새 출발을 할 거야. 더는 재경이 때문에 눈물 흘릴 일도 없고 가슴 아파하지도 않을 거야.”그녀는 힘껏 얼굴을 닦았다.송연아도 알겠다며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고훈이 여전히 문밖에 서 있자 송연아는 바로 그에게 술을 가져오라고 했다.고훈은 냉큼 사람을 시켜 술을 가져오더니 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술 한 잔 기울이면서 스트레스 풀려고요?”송연아가 대답했다.“먼저 가세요. 나랑 언니는 좀 더 있다가 갈 테니 언제까지 여기 있을 필요 없어요.”고훈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여자 둘이서 술에 취해 나쁜 놈이라도 만나면 어떡해요? 시름 놓고 마셔요. 만약 두 사람 다 취하면 나 여기 방 있으니까 그리로 가서 쉬면 돼요.”송연아는 문에 기대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왜 고훈 씨가 꼭 나쁜 놈 같죠?”고훈은 말문이 막혔다.“난 인물이 훤칠하고 성품이 바른 정인군자인데 나쁜 놈 같다니요?”고훈은 가슴을 치며 장담했다.“난 절대 취한 사람 건드리는 비겁한 짓은 안 해요.”송연아가 웃으며 물었다.
“보긴 뭘 봐요?”고훈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술도 잘하지 못하면서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마셔요?”송연아는 실망스러웠다.“그 입 좀 다물래요? 난 또 세헌 씨인 줄 알았잖아.”고훈은 말문이 막혔다.“왜요? 내가 말없이 서 있으니까 세헌이 같아 보였어요?”고훈은 화나서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나랑 강세헌은 닮은 곳도 없는데.”“그럼요. 고훈 씨는 세헌 씨보다 못생겼잖아요...”고훈은 어이가 없었다.“연아 씨, 세헌이가 아무리 좋아도 지금 당신을 챙겨주는 건 나예요. 강세헌 좀 그만 언급하면 안 돼요?”“그 사람은 내 남편인데 왜 언급하면 안 되죠? 난 세헌 씨가 보고 싶어서 계속 세헌 씨만 언급할래요.”송연아는 술에 취해서 과감하게 말을 내뱉었다.평소에 못 하던 말도 쉽게 내뱉었다.고훈은 입이 쩍 벌어졌다.‘나한테 너무한 거 아니냐고?’“남편 자랑 하고 싶으면 집에 돌아가서 해요.”고훈이 차갑게 쏘아붙였다.말끝마다 강세헌이니 화나지 않을 수 없었다.송연아는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가려고 했는데 조심하지 않아 술병을 넘어뜨렸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술병이 산산조각이 났다.그녀는 흠칫 놀라면서 몸을 기울이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이때 고훈이 잽싸게 달려가 그녀를 꼭 붙잡고 품에 끌어안았다.송연아는 미간을 찌푸렸다.“이거 놔요.”고훈은 어이가 없었다.“이봐요, 연아 씨, 방금 나 아니면 당신 그대로 넘어졌다고요. 도움을 받았으면 감사하다고 해도 모자랄망정!”고훈은 하마터면 양심도 없냐고 욕할 뻔했다.송연아는 그를 밀쳤다.술에 취해도 남녀 사이에 지나친 스킨쉽은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 듯싶었다.고훈은 그녀를 부축해서 똑바로 세우며 물었다.“제대로 설 수 있겠어요?”송연아가 머리를 끄덕였다.“네.”그녀는 대답하자마자 트림을 했더니 술 냄새가 정면으로 풍겨왔다.고훈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연아야, 우리 계속 마셔야지.”안이슬이 술잔을 들었다.송연아도 화장실에 다녀온 뒤 잔을 들고 그
‘오지 말란 말이야!’고훈이 속으로 외쳤지만 송연아는 결국 그의 얼굴에 토해버렸다.고훈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송연아는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역겨워 재빨리 화장실에 뛰쳐가 계속 토했다.밖에 있는 고훈은 지금 심정을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었다.얼굴에 토해버리다니.고훈은 난생처음 겪는 일이었다.아니, 세상에 또 이런 짜릿한 경험을 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그는 울화가 치밀었지만 만취한 여자와 따지고 들 순 없었다!이미 취해서 인사불성인데 따지고 들면 그만 쪼잔해 보일 테니까!다행히 고훈은 여기에 개인 방이 있어 샤워하러 갔고 웨이터에게 깨끗한 옷 한 벌 사 오라고 했다.그가 깨끗하게 정리하고 룸에 돌아왔을 때 송연아는 소파에 엎드려 잠들었다.시계를 보니 어느덧 12시가 다 돼갔다.고훈은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를 안고 방에 갔다.침대에 눕히고 이불까지 덮어준 뒤 옆에 서서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는데 조용히 있는 모습이 실로 아름다웠다.그녀는 민낯이 예쁜 미인이라 화장을 안 해도 고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고훈은 사악한 미소를 날렸다.“연아 씨가 지금 나랑 한 방에서 인사불성이 된 채 내 침대에 누워있는 걸 세헌이가 알면 화나서 돌아버리겠죠?”그는 지금 이 장면을 사진 찍어 강세헌에게 보내고 싶었다.“나 그렇게 해? 말아?”고훈이 자신에게 물었다.송연아는 지금 대답할 리가 없으니까!그는 사진을 찍을지 말지 엄청 고민했다.강세헌이 전에 그에게 했던 일을 떠올리자 이번엔 그도 속 좁고 교활한 이 남자를 약 올려보기로 했다!...공항.강세헌이 차에 타고 진원우가 짐을 내려놓았다.“이번엔 진짜 운이 안 따라주네요. 딜레이가 이렇게 많이 되다니.”그가 궁시렁댔다.강세헌은 줄곧 무표정한 얼굴이었고 심지어 약간 차갑기까지 했다.진원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이제 감정 결과만 나오면 그분 신원을 확인할 수 있어요. 이번 일정은 꽤 보람차네요.”강세헌이 갑자기 출국한 이유는 강의건이 그에게 사진 한 장 주었기 때문이다.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