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엥? 왜 아무도 없지? 서재에 있나?송연아는 눈을 깜빡이다가 문을 닫고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서재 문을 열고 보니 임지훈이 책상 앞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그녀는 미간이 저절로 구겨졌다.“임 비서님? 세헌 씨는요?”“아까는 제가 채 말하지 못했어요. 도련님이 오신 게 아니라 임 비서님이 오셨어요.”오은화가 말했다.송연아는 순간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임지훈은 서류 한 뭉치를 안고 안에서 걸어 나왔다.그는 문 앞에 서 있는 송연아를 보더니 친절하게 한마디 건넸다.“안 바쁘실 때 대표님께 연락 한번 드리세요.”말을 마친 임지훈은 서류를 챙기고 떠나갔다.송연아가 강세헌과 함께 출국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 그 날부터 강세헌의 안색은 줄곧 어두웠고 기분도 가라앉았다.그는 휴대폰만 자꾸 들여다보며 자존심 때문에 먼저 송연아에게 전화를 걸지 못하고 그녀가 연락하기만을 기다렸다.하지만 송연아는 전화 한 통 없었다.그녀는 강세헌을 깜빡 잊은 게 아니라 종일 한가할 새가 없었다.송연아가 재빨리 임지훈을 쫓아갔다.“임 비서님.”임지훈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에게 물었다.“네?”송연아가 다가오며 말했다.“세헌 씨 이번에 회사 일로 출국했나요?”임지훈이 머리를 내저었다.“아니요.”“그럼 뭔데요?”송연아가 캐물었다.임지훈은 망설이다가 결국 말을 아꼈다.“이번 일은 대표님께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사실 연아 씨도 함께 따라갔어야 했는데...”“대체 무슨 일이냐고요?”송연아가 간절하게 물었다.“이 일은 대표님께 직접 들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는 볼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임지훈이 차 문을 열고 안에 탔다.송연아는 한걸음 나서며 그에게 물었다.“그럼 세헌 씨는 언제쯤 돌아와요?”“당분간은 못 돌아올 겁니다.”임지훈이 대답했다.“뉴스에서 장진희 씨 재판 결과가 곧 나온다던데 과연 어떤 결말을 얻을지 보러 안 온대요? 그 여자는 세헌 씨 부모님을 해친 원수잖아요.”송연아는 임지훈을 바라보며 제발 말해주길 바랐다
사진 속 사람은 그녀도 본 적이 있었다.주석민이 예전에 그녀에게 한 특별한 환자의 진찰 기록을 정리하라고 했는데 그때 그 환자가 강세헌의 어머니와 너무 비슷해서 몇 번 더 봤었다. 그런데...강세헌이 왜 이 사진을 갖고 있는 걸까?이번에 출국한 이유가 이 사진과 연관이 있을까?그녀가 생각에 잠겨있을 때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고개 들어 보니 오은화가 문 앞에 서 있었다.“주무신 거 아니었어요? 저는 또 깜빡하고 서재 등을 안 끈 줄 알았어요.”송연아는 손에 쥔 사진을 봉투에 넣어서 원래 자리에 놓았다.“잠이 안 와서 책 좀 보려고 왔어요.”“네.”오은화는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송연아가 웃으며 말했다.“아주머니, 제 말 진짜예요.”오은화도 웃었다.“저는 또 도련님이 안 계셔서 사모님이 못 주무시는 줄 알았어요.”송연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오은화는 역시 눈썰미가 예리했다!“일찍 쉬세요, 저도 이젠 자야겠어요.”그녀는 아무 책이나 한 권 집어 들고 서재를 나갔다.오은화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괜찮아요, 사모님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방해 안 할게요.”송연아는 실소를 터트렸다.오은화는 지금 그녀가 강세헌의 물건을 보며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고 여긴 걸까?송연아는 솔직히 아직 그 정도까진 아니다.강세헌이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그녀는 병원 일에 최지현 일까지 더해 남편을 그리워할 시간은 잠잘 때뿐이다.송연아는 책을 들고 방에 돌아가서 고작 두 페이지를 읽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들어버렸다.고요한 밤, 그녀도 깊은 잠에 빠졌다.깨나 보니 어느덧 다음 날 아침이었다.주석민에게 전화하려고 할 때 휴대폰을 아직도 서재에서 충전하고 있다는 게 생각났다.그녀는 휴대폰을 가져와 전원을 켰지만 부재중 전화가 한 통도 없었다.실망스럽기도 하고 살짝 화가 나 강세헌에게 전화하지 않고 바로 주석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저 오늘 일이 있어서 조금 늦게 갈게요.”주석민은 그녀가 최지현 일 때문에
송연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차갑게 물었다.“무슨 말이요?”장진희는 어차피 이제 곧 죽을 사람이라 남들이 들을까 봐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맞아, 내가 세헌의 부모를 해쳤어. 이번에 세헌이가 법원에 증거를 제출하고 뒤에서 수단을 쓴 탓에 나도 이렇게 어이없이 사형을 선고받았어. 게다가 바로 집행한다지. 난 내가 한 모든 일에 후회는 없어. 그저 이 말만 묻고 싶어. 내가 죽는다고 세헌의 부모가 살아 돌아올 것 같아? 네가 대신 물어봐 줘.”“이게 바로 당신의 가장 가증스러운 점이야.”송연아가 담담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사람을 해칠 때 알았어야지,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야.”장진희가 하찮다는 표정에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저지른 일이 얼만데. 세헌이를 해치는 일만 해도 한 두 번이 아니야. 그래도 수년간 자유롭게 살았어! 강세헌이 지금 날 죽여도 달라질 건 없어. 걔는 어릴 때부터 부모 없이 자라온 아이야! 나보다 더 가엽다고, 하하하...”송연아는 이토록 흉악하고 잔인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죽어버려.”송연아는 주먹을 불끈 쥐고 그녀를 노려봤다.“당신은 죽으면 그만이겠지만 당신 아들은 어떨 것 같아? 지금도 충분히 고통스럽게 살거든.”장진희가 아무리 사악하고 매정해도 그녀는 결국 한 아이의 엄마였다.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건 아마 아들뿐이겠지.“세헌 씨가 놓아주지 않는 한 강세욱이 편하게 살 것 같아? 당신 아들이 세헌 씨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해? 이점은 당신한테 고마워해야겠어. 당신 덕분에 세헌 씨는 어릴 때부터 조심스럽게 지냈고 차갑고 매정한 사람으로 변했으며 머릿속에 온통 계략으로 가득 찼어. 당신은 세헌 씨를 해쳤지만 도와주기도 했지. 만약 세헌 씨가 행복한 가정에서 자랐다면 지금 같은 수단과 박력이 없었을 거야. 한편 당신 아들은 줄곧 당신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는데 인제 당신이 떠나면 뭘 할 수 있을까?”송연아가 웃으며 말했다.“세헌 씨를 대신해서 당신에게 감사해야겠네. 당신의
“더 묻지 말고 열심히 출근해. 그건 그렇고 너한테 또 수술 하나 안배했으니까 얼른 가서 준비해. 이따가 나랑 같이 환자 보러 가.”주석민이 말했다.송연아는 여전히 일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궁금해서 따져 물었다.“그래서 이번 일은 대체 어떻게 해결했어요?”“내가 말하지 않는 건 너한테 알려주기 싫다는 뜻이니까 더 묻지 마. 나도 널 믿고 원장님도 널 믿으셔. 이젠 다 해결됐으니 안심하고 나만 따라오면 돼.”주석민이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그녀도 더는 따져 물을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네, 지금 바로 가서 준비할게요.”주석민이 웃으며 말했다.“그래, 가봐.”점심에 고훈이 송연아를 찾아왔다.“어떻게 된 거예요? 최지현은 왜 가버렸어요?”그가 성급하게 물었다.“이미 다 해결했어요.”송연아가 말했다.“어떻게요?”고훈이 캐묻자 그녀는 어깨를 들썩거렸다.“나도 몰라요.”고훈은 말을 잇지 못했다.“연아 씨네 병원이 대단하긴 하네요. 내게 실력 발휘할 기회도 안 주고 말이에요.”고훈이 투덜거렸다.“원래 위증인을 찾아서 연아 씨가 밀지 않았다고 말하라고 시키려 했거든요. 어차피 계단 입구에 CCTV도 없고 최지현이 한사코 연아 씨가 밀었다고 잡아떼니 그럼 나도 사람을 찾아서 연아 씨가 밀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면 되잖아요. 어차피 다들 증거가 없으니 최지현은 연아 씨가 밀었다는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또한 위증인이 계단 입구에 가지 않았다는 증거도 못 내놔요. 이렇게 되면 연아 씨는 누명을 벗을 수 있어요.”송연아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이게 바로 고훈 씨가 생각해낸 방법이에요?”“네, 별로예요?”고훈은 나름 자신 있게 물었다.“너무 별로예요. 고훈 씨 어머님은 오늘 중환자실에서 나올 거예요. 아까 봤는데 회복이 잘 되셨더라고요. 그런데 추후 관리도 중요하니 어머님을 잘 보살펴드리세요.”고훈은 감격에 겨웠다.“네, 알고 있어요. 이번 일은 정말 너무 고마워요.”“저번에도 말했듯이 난 의사의 의무를 다한 거니까 이러실 필요 없어
“언니!”송연아는 살짝 미안해하며 말했다.“예걸이한테 언니가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만나러 가려고 했는데 일이 너무 많아서 연락하는 걸 깜빡했어요.”안이슬은 두 눈이 퀭하고 빨갛게 부어오르기까지 했다. 그녀는 심하게 잠긴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연아야...”송연아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을 졸였다.“무슨 일이에요?”“재경이가... 날 배신했어.”안이슬은 또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송연아는 얼른 그녀를 안아주었다.“우리 딴 데 가서 얘기해요.”고훈은 이때다 싶어 친절하게 말했다.“내가 아는 곳 하나 있는데 조용해서 아무도 방해 안 할 거예요. 두 분 술 한 잔 기울여도 돼요.”송연아는 안이슬이 걱정돼 고훈을 힐긋 쳐다보며 말했다.“길 안내해요.”“네, 알겠습니다.”고훈은 재빨리 차를 가져왔다.송연아는 안이슬을 부축하며 차에 탔다.잠시 후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했다.이곳은 사설 클럽이라 고훈은 자기만의 고정 룸을 갖고 있었다.송연아는 안이슬의 팔짱을 끼고 안으로 걸어갔다. 고훈이 따라가려 하자 그녀는 날카롭게 째려봤다.“왜 따라와요? 우리끼리 할 얘기가 있는데 고훈 씨도 들으려고요?”고훈은 말을 잇지 못했다.줄곧 시중만 들었는데 문전박대를 당하다니?“알았어요. 얼른 들어가요. 저는 밖에서 기다릴게요.”고훈은 두어 걸음 물러섰다.송연아는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고훈은 비록 짜증 나게 굴지만 이번 일은 확실히 그의 도움을 받았으니까.고훈이 웃으며 말했다.“고맙긴요, 내가 더 고맙죠. 연아 씨가 우리 엄마 수술을 성공적으로 해서 나을 수 있게 됐어요...”“후!”순간 방문이 확 닫혔다.송연아는 더는 그의 잡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고훈은 문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그의 마음에 찬바람이 윙윙 휘몰아쳤다!“어떻게 된 거예요?”자리에 앉자마자 송연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재경 선배가 언니한테 얼마나 일편단심인데, 배신이라니요?”안이슬은 입술을 깨물고 저 자신을 비웃었다.“일편단심?”그녀는 나지막이 고함을
안이슬이 되물었다.“그건 이젠 중요하지 않아!”“왜 안 중요해요? 재경 선배 어머니가 무슨 수를 써서 선배랑 그 여자가 관계를 갖게 했다면 적어도 선배가 원해서 한 일이 아니란 걸 설명하죠. 그럼 그건 선배가 일부러 언니를 배신한 것도 아니에요.”안이슬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다 부질없어.”그녀는 송연아를 지그시 바라봤다.“본의가 아니어도 상대가 이미 재경의 애를 가졌는데, 설마 싫다고 하겠어?”송연아는 침묵했다.그랬다.상대는 이미 임신했고 심재경의 엄마가 콕 집은 며느릿감이니 반드시 이 결혼을 성사시킬 것이다.“하지만 언니는...”안이슬은 초점 없이 흐려진 눈길로 한곳을 바라보며 한참 침묵했다.“우린 인연이 아닌가 봐. 만남과 이별을 끊임없이 반복하더니, 결국 운명의 장난에 무릎 꿇고 말았어. 나랑 재경이는... 이젠 정말 끝이야.”송연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연아야, 나랑 한잔해. 오늘 밤이 지나면 새 출발을 할 거야. 더는 재경이 때문에 눈물 흘릴 일도 없고 가슴 아파하지도 않을 거야.”그녀는 힘껏 얼굴을 닦았다.송연아도 알겠다며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고훈이 여전히 문밖에 서 있자 송연아는 바로 그에게 술을 가져오라고 했다.고훈은 냉큼 사람을 시켜 술을 가져오더니 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술 한 잔 기울이면서 스트레스 풀려고요?”송연아가 대답했다.“먼저 가세요. 나랑 언니는 좀 더 있다가 갈 테니 언제까지 여기 있을 필요 없어요.”고훈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여자 둘이서 술에 취해 나쁜 놈이라도 만나면 어떡해요? 시름 놓고 마셔요. 만약 두 사람 다 취하면 나 여기 방 있으니까 그리로 가서 쉬면 돼요.”송연아는 문에 기대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왜 고훈 씨가 꼭 나쁜 놈 같죠?”고훈은 말문이 막혔다.“난 인물이 훤칠하고 성품이 바른 정인군자인데 나쁜 놈 같다니요?”고훈은 가슴을 치며 장담했다.“난 절대 취한 사람 건드리는 비겁한 짓은 안 해요.”송연아가 웃으며 물었다.
“보긴 뭘 봐요?”고훈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술도 잘하지 못하면서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마셔요?”송연아는 실망스러웠다.“그 입 좀 다물래요? 난 또 세헌 씨인 줄 알았잖아.”고훈은 말문이 막혔다.“왜요? 내가 말없이 서 있으니까 세헌이 같아 보였어요?”고훈은 화나서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나랑 강세헌은 닮은 곳도 없는데.”“그럼요. 고훈 씨는 세헌 씨보다 못생겼잖아요...”고훈은 어이가 없었다.“연아 씨, 세헌이가 아무리 좋아도 지금 당신을 챙겨주는 건 나예요. 강세헌 좀 그만 언급하면 안 돼요?”“그 사람은 내 남편인데 왜 언급하면 안 되죠? 난 세헌 씨가 보고 싶어서 계속 세헌 씨만 언급할래요.”송연아는 술에 취해서 과감하게 말을 내뱉었다.평소에 못 하던 말도 쉽게 내뱉었다.고훈은 입이 쩍 벌어졌다.‘나한테 너무한 거 아니냐고?’“남편 자랑 하고 싶으면 집에 돌아가서 해요.”고훈이 차갑게 쏘아붙였다.말끝마다 강세헌이니 화나지 않을 수 없었다.송연아는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가려고 했는데 조심하지 않아 술병을 넘어뜨렸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술병이 산산조각이 났다.그녀는 흠칫 놀라면서 몸을 기울이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이때 고훈이 잽싸게 달려가 그녀를 꼭 붙잡고 품에 끌어안았다.송연아는 미간을 찌푸렸다.“이거 놔요.”고훈은 어이가 없었다.“이봐요, 연아 씨, 방금 나 아니면 당신 그대로 넘어졌다고요. 도움을 받았으면 감사하다고 해도 모자랄망정!”고훈은 하마터면 양심도 없냐고 욕할 뻔했다.송연아는 그를 밀쳤다.술에 취해도 남녀 사이에 지나친 스킨쉽은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 듯싶었다.고훈은 그녀를 부축해서 똑바로 세우며 물었다.“제대로 설 수 있겠어요?”송연아가 머리를 끄덕였다.“네.”그녀는 대답하자마자 트림을 했더니 술 냄새가 정면으로 풍겨왔다.고훈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연아야, 우리 계속 마셔야지.”안이슬이 술잔을 들었다.송연아도 화장실에 다녀온 뒤 잔을 들고 그
‘오지 말란 말이야!’고훈이 속으로 외쳤지만 송연아는 결국 그의 얼굴에 토해버렸다.고훈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송연아는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역겨워 재빨리 화장실에 뛰쳐가 계속 토했다.밖에 있는 고훈은 지금 심정을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었다.얼굴에 토해버리다니.고훈은 난생처음 겪는 일이었다.아니, 세상에 또 이런 짜릿한 경험을 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그는 울화가 치밀었지만 만취한 여자와 따지고 들 순 없었다!이미 취해서 인사불성인데 따지고 들면 그만 쪼잔해 보일 테니까!다행히 고훈은 여기에 개인 방이 있어 샤워하러 갔고 웨이터에게 깨끗한 옷 한 벌 사 오라고 했다.그가 깨끗하게 정리하고 룸에 돌아왔을 때 송연아는 소파에 엎드려 잠들었다.시계를 보니 어느덧 12시가 다 돼갔다.고훈은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를 안고 방에 갔다.침대에 눕히고 이불까지 덮어준 뒤 옆에 서서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는데 조용히 있는 모습이 실로 아름다웠다.그녀는 민낯이 예쁜 미인이라 화장을 안 해도 고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고훈은 사악한 미소를 날렸다.“연아 씨가 지금 나랑 한 방에서 인사불성이 된 채 내 침대에 누워있는 걸 세헌이가 알면 화나서 돌아버리겠죠?”그는 지금 이 장면을 사진 찍어 강세헌에게 보내고 싶었다.“나 그렇게 해? 말아?”고훈이 자신에게 물었다.송연아는 지금 대답할 리가 없으니까!그는 사진을 찍을지 말지 엄청 고민했다.강세헌이 전에 그에게 했던 일을 떠올리자 이번엔 그도 속 좁고 교활한 이 남자를 약 올려보기로 했다!...공항.강세헌이 차에 타고 진원우가 짐을 내려놓았다.“이번엔 진짜 운이 안 따라주네요. 딜레이가 이렇게 많이 되다니.”그가 궁시렁댔다.강세헌은 줄곧 무표정한 얼굴이었고 심지어 약간 차갑기까지 했다.진원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이제 감정 결과만 나오면 그분 신원을 확인할 수 있어요. 이번 일정은 꽤 보람차네요.”강세헌이 갑자기 출국한 이유는 강의건이 그에게 사진 한 장 주었기 때문이다.사진
결혼식을 마친 후 방유정 아버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떠나기 전에 임지훈에게 회사를 완벽하게 인계하려고 회사에 들어오라고 제안했다.임지훈은 송연아와 강세헌 일행과 같이 먼저 프랑스로 돌아가서 그쪽 일을 마무리했다. 비록 임지훈이 회사에 있으면 강세헌은 보다 한가하게 일을 할 수 있었지만, 그가 떠난다고 해도 그냥 조금 더 바쁠 뿐이다. 어느 회사든 누가 떠나면 절대 안 되는 건 없다. 일주일의 시간 동안 임지훈은 프랑스에서의 일들을 모두 마치고 귀국해서 방씨 가문 회사에 들어갔다.임지훈도 국내에 집이 있었지만 방유정과 같이 방씨 가문에 들어갔다. 데릴사위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방유정 아버지의 병을 알고 방유정이 부모님과 많을 시간을 보내게 하기 위해서였다. 임지훈 역시 사위로서 그럴 의무가 있었다....반년 후, 방유정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방유정 어머니는 그 충격에 순식간에 많이 늙었다. 방유정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집안 분위기는 아주 저조했는데 방유정의 대부분 시간은 어머니와 함께 보냈다. 예전의 임 비서는 이제 임 대표가 되어 그의 능력으로 방씨 가문은 아주 관리가 잘 되었고 3개월 후 방유정 어머니의 상황도 많이 좋아졌다.방유정이 드디어 임신하게 되면서 방유정 아버지가 돌아간 일도 어느 정도 잊혀가고 있었다. 임지훈은 곧 아빠가 된다는 사실이 기뻤고 방유정도 곧 엄마가 된다는 사실이 행복했고 방유정 어머니 역시 곧 외할머니가 된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정말로 모두 행복해할 만한 일이었다.방유정이 임신 6개월 때 그들은 프랑스로 갔는데 구애린은 남자아이를 낳았고 심재경의 딸은 이제 걸을 수 있게 되었는데 샛별이가 유일한 여자아이여서 모두가 예뻐했다. 샛별이는 아직 작고 어렸지만 찬이를 쫓아다니는 것을 좋아했고 찬이는 샛별이 다리가 짧다고 계속 놀려줬으며 그게 재밌다고 샛별이는 키득키득 웃었다. 찬이가 오빠라고 부르라고 하면 샛별이는 오빠라고 불렀는데 너무 귀여웠다.방유정이 말했다.“저도 딸을 낳고 싶어요.”구애린이 말했다.“그게
비록 손을 놓기 싫었지만, 방유정 아버지는 결국 방유정의 손을 임지훈에게 넘겨줬다.“앞으로 계속 사랑하며 살기를 바란다.”방유정도 아버지에게 말했다.“꼭 그렇게 할게요.”이어서 결혼식은 순서대로 일사천리로 피로연까지 모두 순리롭게 진행되었다.방유정 어머니는 결국 눈물을 참지 못했는데 딸이 그렇게도 바라던 결혼을 하니 너무 기뻤다. 그런데 결혼시키고 나니 또 잘 살 수 있을까,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세상의 부모들은 다 그런가 보다.임지훈은 방유정을 데리고 강세헌이 있는 테이블로 가서는 비록 모두 알고 있지만 다시 한번 공식적으로 소개했다. 모두 방유정을 다시 한번 소개받았는데 이번에는 심재경 친구의 사촌 동생이 아닌 임주훈의 아내로 말이다.구애린이 웃으며 말했다.“정말 너무너무 축하해요.”방유정도 웃으며 대답했다.“고마워요.”윤이도 어른들 따라 한마디 했다.“축하해요.”방유정은 윤이를 보며 말했다.“너무 귀여워요.”그녀가 손을 뻗어 윤이의 얼굴을 만지자, 윤이가 손을 내밀었다.“안아줘요.”송연아가 미간을 찌푸렸다.“윤이야, 안 돼.”방유정이 말했다.“괜찮아요.”그녀는 윤이를 안으며 말했다.“무겁지 않아요.”윤이는 그녀의 머리에 있는 금색 비녀를 보고 만지려고 했다. 방유정이 한복을 입고 있었기에 머리에 비녀를 하고 있었다. 방유정은 아주 시원하게 바로 비녀를 빼서 윤이에게 주었는데 송연아는 윤이를 제지하지 못해서 미안해했다.“이러면 안 돼요. 오늘 얼마나 중요한 날인데...”“괜찮아요. 그냥 액세서리일 뿐이에요. 윤이가 좋아하니 놀게 해요.”방유정은 정말 성격이 좋았다. 역시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것만큼 성품이 좋았다. 가끔 조금 오만하긴 하지만 작은 일에 연연하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모두 그녀처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송연아는 윤이를 안고 달래려고 했다.“윤이 착하지. 이건...”송연아는 윤이가 방유정을 어떻게 부르면 될지 생각했는데 방유정이 웃으며 말했다.“호칭일 뿐이니까 편
“지금 막 들었는데 유정 씨와 결혼한다면서요. 지금 방씨 가문에서 결혼식을 준비한다고 난리 났어요.”임지훈이 웃었다.“저 이래 봐도 능력 있는 남자예요. 여자들한테도 인기 많아요. 봐요, 결혼도 금방 하죠?”구애린이 말했다.“이제 우리 모두 짝이 있네요.”찬이도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지훈이 삼촌, 축하해요.”“고마워.”임지훈이 찬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심재경이 물었다.“그런데 데릴사위로 들어간다고 하던데요?”심재경의 말에 모두 놀라며 시선이 일제히 임지훈에게로 향했다. 확실히 놀랄만한 일이다. 임지훈의 조건에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돈도 있고 능력도 있어서 충분히 가정을 책임질 수 있는데 말이다.“하긴, 방씨 가문에 가장이 필요하긴 해요.”심재경이 그쪽 사정을 잘 알고 있기에 한마디 했다....임지훈의 결혼식으로 송연아와 강세헌도 프랑스로 돌아가는 일정을 늦췄다. 아무도 심재경의 결혼식을 보러 왔다가 임지의 결혼식까지 보게 될 줄을 생각을 못 했다. 그들뿐만 아니라 이건 임지훈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듯이 방유정과의 결혼은 정말로 찰나의 결정이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니 그 역시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임지훈이 진원우에게 말했다.“나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진원우가 말했다.“그런 배부른 소리 하지 마. 방씨 가문은 돈도 많고 유정 씨도 예쁘고 그 정도면 만족해야지.”“만족해. 다만 너무 빠른 것 같아서 그래.”귀국하기 전까지만 해도 싱글이었는데 이제 프랑스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결혼식은 방씨 가문에서 모두 준비했는데 방유정 딸 하나이고 또 사위도 너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결혼식은 아주 성대하게 치렀다. 방씨 가문의 친척들도 꽤 많이 참석해서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비록 데릴사위라고 하지만, 임지훈 측은 심재경이 준비했는데 심재경 본인도 금방 결혼식을 치렀기 때문에 익숙한지라 아주 매끄럽게 진행할 수 있었다....방유정은 정교한 메이크업을 하고 값진 웨딩드레스를 입었는
“잠도 잤는데 왜요? 모른 척하려고요?”방유정이 옷을 입더니 침대에서 꼼짝 안 하는 임지훈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왜요? 계속 그렇게 누워 있을 거예요?”임지훈이 말했다.“내 옷을 가져오지 않았잖아요. 나 입을 옷 없어요.”방유정은 그제야 임지훈이 옷이 없다는 걸 생각했다.“가져다 줄게요.”그녀는 곧바로 차에 가서 캐리어를 가지고 다시 올라갔다.“뭐 입을지는 알아서 찾아서 입고 내려와요. 아래층에서 기다릴게요.”방유정은 말을 마치고 먼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임지훈은 침대에서 내려 결혼 얘기이니만큼 격식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에 정장을 찾아서 입었다. 그가 정리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방유정은 부모님 가운데 앉아 있었는데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그녀의 부모는 그를 보자마자 더욱더 열정적이었다.임지훈이 건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저기...”“우리 딸 줄게요.”“아니에요. 지훈 씨가 저한테 시집 오는 거예요.”방유정이 정정했다.“...”“...”“...”방유정을 제외한 세 사람이 거의 동시에 물었다.“유정아,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방유정은 자신이 여자이며 이 집안에 다른 후계자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또 아버지가 중병이고 자기는 회사를 관리할 능력도 없기에 어찌 보면 자기가 남편을 찾는다기보다는 방씨 가문의 회사를 경영할 사람을 찾는 거였다. 인제야 그녀는 부모가 조급해하는 의도를 이해했고 그녀 역시 가문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에 임지훈이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이 임지훈을 각별히 마음에 들어 하는 것도 그런 것들 때문이지 않겠는가.“유정 씨,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임지훈은 뼈대가 있는 남자로서 데릴사위 할 생각은 없었다.방유정이 말했다.“후회하면 안 돼요!”“왜 안 돼요? 유정 씨가 뭘 원하든지 저 모두 만족시켜 줄 수...”“제가 원하는 게 바로 이거예요.”방유정이 외치자, 임지훈은 오히려 우스웠다. 한 여자가 나한테 시집오라고 하다니!“우리 유정이가 시집가는 거 맞아요
지금 그녀가 부모님에게 전화해서 물으면 부모님은 더 속상해할 것 같았다.‘나 이제 어떻게 해야지? 어떻게 하면 좀 더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지? 결혼, 그래 결혼해야 해.’그녀는 자기가 결혼해야만 부모님이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다. 결혼 상대도 지금 바로 방에 있지 않겠는가?‘남자 친구인 척을 해줬으니 이제 남편인 척해달라고 해야지. 진짜가 아니고 가짜라도 되니까 결혼하자고 해야겠어.’방유정은 진료 기록부를 다시 원래 위치에 넣고 비틀거리며 부모님 방에서 나와 자기 방으로 돌아갔는데 임지훈이 아직 욕실에서 나오지 않아 침대 옆에 앉아서 기다렸다. 한참 지나자, 임지훈은 가운을 두르고 욕실에서 나왔는데 침대에 자기의 옷이 보이지 않아 방유정의 옆에 서서 물었다.“내 옷은요?”그는 방유정이 잊은 것 같아서 다시 말했다.“내 옷은 지금 당신 차 트렁크에 있어요.”방유정은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지훈 씨, 우리 결혼해요.”임지훈은 어이가 없었다.“약을 잘못 먹었어요? 아니면 정신이 어떻게 됐어요?”“다 아니에요. 그냥 당신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서요.”그녀의 목소리는 다소 거칠었는데 임지훈은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녀의 이상함을 감지하고 물었다.“울었어요? 누가 괴롭혔어요? 얘기해 봐요. 제가 가서 때려줄게...”임지훈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방유정이 와락 그를 끌어안았다. 임지훈은 갑작스러운 친밀감에 몸이 굳어버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그게... 유정 씨...”그가 말하려고 할 때 방유정이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의 손이 아래로 드리는 순간 몸에 걸친 유일한 가운마저 벗겨져서 흘러내렸다.“...”방유정은 워낙 임지훈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지금 행동이 충격에 의한 도발적인 행동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웃옷의 단추를 벗겨 가슴을 드러내고는 그의 가슴에 가까이하며 말했다.“저를 좀 봐봐요.”임지훈은 참을 수 없었는지 목젖을 굴렸는데 이름 모를 불길이 아랫배에서 솟아오르더니 순식간에 딱딱해졌다.“정말 후회하지 않겠어요?”임지훈도
방유정은 어머니가 자신의 어깨를 다독이자, 화가 난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응원을 하시는 거였다.“화이팅!”방유정은 완전히 어이가 없었다.‘지금 무슨 마법에라도 걸린 건가? 도대체 왜 이렇게 변한 거지?’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만 좋다면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최근에는 갑자기 선 자리를 만들어주고 남자를 유혹하라고까지 하시다니?그녀는 어머니의 이마를 만지며 물었다.“엄마,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방유정 어머니는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우리 이제 나가야 해.”방유정의 아버지는 기사가 이미 대기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집을 나갔고 방유정은 문 앞까지 그들을 배웅했다. 차가 떠나자, 그녀는 집으로 들어갔는데 어차피 임지훈이 자고 있었기에 지루할 것 같아서 위층으로 올라가지 않았다.그녀는 가만히 있는 스타일이 아니었는지라 얼마 지나지 않아 심심했다. 그런데 집에 아무도 없었기에 밖으로 나갈 수도 없어서 임지훈을 놀려주려고 그가 곤히 자는 방으로 올라가서는 화장대에서 화장품을 가져다가 침대 옆에 앉아 임지훈에게 예쁜 화장을 해주었다. 그러고 나서도 임지훈이 깨지 않자, 옆에서 핸드폰을 보다가 눈이 아파 오니 옆에 기대서 잠이 들었다. 그녀가 일어났을 때는 임지훈은 이미 깨어나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언, 언제 깼어요?”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방유정은 참을 수 없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임지훈의 얼굴은 정말로 오페라 가수 같았는데 어찌나 웃었는지 배가 아팠다. 임지훈은 그녀의 턱을 받쳐 들고 물었다.“다 웃었어요?”방유정은 곧바로 웃음을 거두고 그의 손을 뿌리쳤다.“맘대로 제 몸에 손을 대지 말아요.”임지훈이 말했다.“유정 씨를 저에게 준다고 해도 거절이에요.”방유정은 미간을 찌푸리며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말했다.“뭐라고요? 저를 좋다고 하는 남자들이 줄을 서면 프랑스까지는 갈 거예요. 그런데 지훈 씨는 내가 싫다고요?”임지훈이 흠칫하자, 방유정이 그를 잡고 물었다.“지금 그
“방유정은 부모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알았어요. 하시고 싶은 대로 하세요.”“어서 지훈 씨 방으로 데려가.”방유정이 물었다.“어느 방에요?”방유정 어머니는 그제야 깨달은 듯 말했다.“어머, 어떡해. 게스트룸은 아직 준비가 안 돼있어. 우선 네 방으로 데려가서 휴식하게 해.”방유정은 어머니의 말에 놀라며 말했다.“아빠, 엄마, 이 정도로 오픈 마인드였어요? 어떻게 제 방에 술 취한 남자를 데려가라고 하세요?”“네 말대로 취했는데 뭐 어때?”“술김에 어떤 짓도 한다는 말 몰라요?”방유정이 묻자, 그녀의 부모님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몰라.”방유정은 철저히 말문이 막혔다. 부모님과 임지훈이 정말로 모르는 사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임지훈이 그들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을 만큼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엄마 아빠가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아무리 나를 결혼시키고 싶어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만약 진짜로 무슨 일이 있으면 책임지라고 하고 바로 결혼시킬 거야.”임지훈은 그 말을 들으며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한바탕 뿜었다. 방유정의 부모님이 너무 열정적이어서 본인이 천당에 있는 것 같았는데 정말로 귀여운 부모님들이라고 생각했다.‘방유정은 전생에 은하계를 구했나 봐. 이런 가정에서 태어나고 말이야.’방유정은 역겨워하며 말했다.“지훈 씨, 여기서 이러면 어떡해요. 화장실로 가야지.”“취했잖아.”방유정 어머니가 가정부를 불러 치우게 했다.“그만하고 불편해 보이는데 어서 방으로 데려다 쉬게 해.”방유정은 혼자서 임지훈을 옮길 수 없어서 가정부의 도움을 받아 함께 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방에 도착하자, 그녀는 임지훈을 침대에 던졌는데 임지훈은 몸이 포근한 세계에 떨어진 듯 따뜻하고 향기로웠다.“무슨 향수를 써요?”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방유정이 말했다.“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얼른 잠이나 자요.”임지훈은 취한 건 사실이지만 정신만은 여전히 말짱했다. 그는 눈을 감고 또 말했다
임지훈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알았어요. 해명하지 않아도 화는 나지 않았을 건데, 굳이 해명하니 용서해 줄게요.”방유정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삐쭉거렸다.“그렇게 잘난 척하지 말아요. 그럼 좋은 말이 안 나가니까.”“...”임지훈이 할 말을 잃었다.그때 방유정의 어머니가 열정적으로 요리를 집어 그의 앞접시에 건넸다.“이건 우리 가족이 모두 좋아하는 요리인데 맛봐요.”임지훈이 집어서 입어 넣고 먹어보더니 말했다.“맛있습니다.”방유정 어머니는 미소를 지었고 방유정 아버지는 그에게 술을 따랐다.“평소 주량이 어떻게 돼요?”임지훈이 웃으며 대답했다.“못합니다.”방유정 아버지는 호탕하게 웃었다.“잘 마실 것 같은데 너무 겸손하시네요.”임지훈이 말했다.“아니에요. 아니에요.”방유정은 보다 못해 한마디 했다.“아빠, 지훈 씨는 일이 바빠서 내일 프랑스로 돌아가야 해요. 일을 망치면 안 되니까 술을 많이 주지 마세요.”방유정 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그래.”“네. 그러니까 한 잔씩만 해요.”말하면서 방유정은 술을 가져갔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너 정말 분위기를 깬다.”방유정이 말했다.“두 분의 건강을 생각해서예요.”방유정 어머니는 술병을 들고 임지훈에게 한 잔 따르고 또 남편에게도 한 잔 따랐다.“많이 마시게 되면 우리 집에 방이 많으니 그냥 휴식하면 돼요. 비행기는 내일 타면 되는데 급해 할 거 없잖아요.”방유정은 어머니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엄마, 이 사람을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집에서 잠을 자래요? 나쁜 사람이면 어떡하려고요?”“걱정하지 마. 조사해 봤는데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야.”“...”“...”방유정과 임지훈이 순간 놀랐다. 방유정은 평생 살면서 이렇게 굴욕적인 순간을 느낀 적이 없었다. 몇 년 동안 쌓아온 체면이 한순간에 모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이런 상황을 만든 건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의 부모님이었다.방유정 아버지는 아내를 힐끗 쳐다
“지훈 씨는 취미가 뭐예요?”방유정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임지훈은 방유정의 물음에 잠시 당황하다가 자신의 생활을 떠올렸는데 일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휴가도 사용하지 않았다. 이번에 심재경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계속 일만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취미는 더구나 없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본인의 생활이 정말로 단조롭고 지루하고 재미가 없었다. 옆에서 따뜻하게 말 한마디 건네주는 사람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순간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아내를 맞이해서 함께 서로 보살펴주며 지내고 싶었는데 그런 사람만 있다면 경제적인 부분을 책임지고 고생시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방유정을 바라봤는데 본인과 전혀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방유정은 아직도 사람의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이라 다른 사람을 보살필 줄은 모를 것 같았다.“왜 그런 이상한 눈빛으로 봐요?”방유정의 물음에 임지훈이 되물었다.“어디가 이상한데요?”방유정은 좀 더 가까이 가서 그의 눈을 마주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왜요? 설마 저를 사랑하게 된 건 아니죠?”임지훈은 어이가 없었다.“당신은 성격도 안 좋고 또 엄청 잘난체하는데 내가 왜요? 점심시간이 다 되었으니 이제 들어가요.”시간을 보며 임지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굶었어요?”방유정이 그를 비웃었다.“식사 끝나면 저는 가도 되죠.”방유정은 순간 왠지 서운했다.“그렇게 가고 싶어요?”“여기는 제집이 아닌데 계속 있을 수는 없잖아요.”방유정은 그를 향해 입을 삐쭉거리자, 임지훈은 의아해했다.“왜 그래요?”“내가 뭐요?”방유정은 짜증을 냈다.“유정 씨는 정말 변덕이 많네요. 그걸 고쳐요. 남자들은 변덕이 많은 여자를 좋아하지 않아요.”방유정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바로 집안으로 걸어들어갔다.임지훈은 고개를 돌려 못에 있는 물고기들을 한 번 더 보고는 뒤따라 들어갔다. 방유정이 집에 들어서자, 그녀의 어머니가 그들을 부르러 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딸만 보였기에 그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