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주 누나가 장난치는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저도 모르게 기대하고 싶어졌다.[누나가 온다면 저야 너무 좋죠.][그럼 나랑 호텔 갈래?][누나가 원한다면 언제든지요.][그럼 일은 어떡해?][일이 쉽고 자유로워 괜찮아요.]그 말을 하고 나니 남주 누나가 정말 찾아올 것만 같다는 생각에 나는 갑자기 설레고 기대됐다.[그럼 누나가 갈 테니까 딱 기다려.][거짓말 마요. 안 믿어요.][거짓말 아니야. 약속할게.]한편, 애교의 집.남주는 애교의 핸드폰을 들고 답장하면서 히죽히죽 웃으며 중얼거렸다.“난 거짓말 안 했어. 하지만 난 내 핸드폰으로 대화한 게 아니니까 지금 대화하는 사람은 애교지 내가 아니야. 속여도 애교가 속인 거라고.”그때 마침 애교가 화장실에서 걸어 나왔다.“너 지금 내 핸드폰으로 뭐해?”“별거 아니야. 네 핸드폰으로 수호 씨랑 대화 중이었어.”“네 핸드폰으로 대화할 것이지 왜 남의 핸드폰으로 대화해?”애교는 뭐가 켕기는 거라도 있는 듯 다급히 말했다.남주가 뭔가 발견하고 제 핸드폰으로 수호한테 뭔가를 캐내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수호 씨가 나 삭제해서 할 수 없이 네 핸드폰 좀 빌린 거야.”애교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런데 수호 씨가 왜 널 삭제해?”“왜긴 왜겠어? 내가 자기를 속였다고 그러지. 푸들 같아가지고 아주 쪼잔하다니까. 그것 외에 큰 게 하나도 없어.”애교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이제 핸드폰 돌려줄 수 있지?”남주는 헤실 웃으며 얼른 핸드폰을 건넸다.“그래. 그런데 수호가 나랑 무슨 대화했는지 봐 봐.”“싫어, 누가 본대? 야한 얘기했겠지, 말 안 해도 알아.”“아니거든, 잘 봐. 내가 어떤 걸 건졌는지. 수호 씨의 비밀을 캐냈는데, 알고 싶지 않아?”그 말에 애교는 이내 호기심이 발동했다.“그렇게 말하니 보고 싶네.”애교는 얼른 핸드폰을 확인했다.그리고 다음 순간.“아! 최남주, 너 죽을래? 또 나 속이는 거야?”화면에 나타난 건 다름 아닌 커다
내가 남주 누나의 말에 답장하려고 할 때, 윤 쌤이라 불리던 그 여의사가 나타나 나는 다급히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렸다.특히 어제의 일을 생각하니 너무 두려웠다.하지만 그 여자는 의외로 나를 발견하지 못한 채 옆을 쓱 지나가 버렸다.그래도 나는 여전히 불안해 식판을 들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칠 준비를 했다.그때, 내 핸드폰이 갑자기 진동했다.당연히 남주 누나가 또 장난 문자를 한 거라고 생각해 확인해 봤더니 의외로 그 여의사가 보낸 문자였다.내가 그 여자를 저장했던 이름은 윤미영이라는 가짜 이름이다.[지금 뭐 해요?]‘뭐지? 나를 못 알아봤나?’그 순간 내 머릿속에 대담한 생각이 떠올랐다. 다시 돌아가 확인해 보자는 생각.만약 그 여자가 어제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 연기하느라 고생할 필요 없어 너무 좋은 일이다.어쨌든 같은 직장에서 일하면 언젠간 만날 수 있기에.나는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 일부러 그 여자의 맞은편에 앉았다.심지어 여자가 고개만 들면 나를 볼 수 있었다.그러고서 한참을 생각한 뒤 여자에게 답장했다.[점심 먹고 있어요. 그쪽은요?][나도요.]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그 여자를 흘긋 확인했다. 하지만 입맛이 없는지 앞에 놓인 음식이 거의 줄지 않은 듯해 보였다.그걸 확인한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어젯밤... 동영상 녹화하겠다고 했는데 녹화했어요?][했어요. 하지만 제대로 녹화 안 됐더라고요. 핸드폰이 넘어져서 천장만 찍혔어요.]“앗싸!”나는 참지 못하고 작은 소리로 환호했다.역시 내 생각대로 여자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눈치였다.하지만 한 가지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이에 나는 계속 질문했다.[그럼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아요?]이 여자가 나보다 더 빨리 깨어났으니 내 얼굴을 봤을까 봐 걱정됐으니까.[내가 그쪽 얼굴 볼까 봐 무서워하는 눈치인데, 대체 뭘 그렇게 걱정해요?][이건 비밀이라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말 안 해도 되죠?][그래요. 그럼 저도 방금 전 물
나는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무슨 뜻이지? 내가 무슨 약점을 잡혔다고 그러지?’[애교 누나, 무슨 뜻이에요?]내 말에 애교 누나는 곧바로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그리고 그 사진을 본 순간 나는 너무 놀라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다른 사람이 그 사진을 보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으니까.주위를 둘러보니 다행히 아무도 내 쪽을 보는 사람이 없었다.하지만 두려움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그도 그럴 게, 애교 누나가 보낸 사진은 다름 아닌 내가 남주 누나한테 보냈던 사진이니까. ‘난 분명 사진 지웠는데? 남주 누나가 그사이에 저장했나?’나는 순간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남주 누나가 보낸 사진은 보지도 못하고 내 사진은 상대방이 저장까지 하게 하다니.그렇다면 앞으로 남주 누나가 이 사진으로 계속 나를 협박할 수도 있는 상황 아닌가?나는 잔뜩 긴장해서 애교 누나에게 답장을 보냈다.[애교 누나, 이 사진은 어디서 난 거예요?][남주가 이걸 내 핸드폰 액정 화면으로 해두고 사진첩에도 저장해뒀어요. 게다가 본인한테도 한 장 보냈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나는 얼른 남주 누나의 카톡을 다시 추가했다.그랬더니 남주 누나는 바로 통과하자마자 문자를 보냈다.[미쳤어요? 왜 그 사진을 저장했어요?][저장하지 말란 법 있어? 나더러 저장하지 말라고 안 했잖아.][그래요, 그건 그렇다 쳐요. 그런데 그걸 왜 애교 누나한테 보여줘요? 저더러 앞으로 애교 누나를 어떻게 보라고 그래요?][일부러 보여준 거야. 그래야 둘의 관계도 발전할 거 아니야. 애교가 네 사진 보고 어떤 반응이었는지 안 궁금해?]‘궁금하긴 무슨!’‘나랑 애교 누나가 누나보다 더 친하거든요? 우리는 서로 모두 오픈한 사이이라고요.’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화제 돌리지 마요. 그리고 당장 제 사진 삭제해요. 애교 누나 핸드폰에 있는 사진도 삭제하고요.][너 지금 나를 명령했어? 난 네 약점을 쥐고 있어. 그런데 감히 나를 명령해?]이 문자
잠시 뒤, 남주 누나는 나에게 앨범을 캡쳐해 보내왔다.확인했더니 역시나 안에 그 사진은 없었다.그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답장했다.[역시 남주 누나밖에 없어요. 아까는 잘못했으니 사과할게요.][입으로만? 행동으로 보여줘 봐, 저녁에 나 밥 사줘.][그래요. 애교 누나와 우리 형수도 불러요. 제가 한턱 거하게 쏠게요.]남주 누나와의 대화는 후반부에 비교적 즐겁게 끝났다.그와 동시에 남주 누나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남주 누나는 사람 자체가 짓궂은 게 아니라 그냥 나를 놀리는 걸 좋아하는 것뿐이었다.남주 누나의 문제를 처리하고 나니 나는 얼른 애교 누나에게 남주 누나가 사진을 지웠다고 답장했다.[수호 씨, 난 안 지우면 안 돼요?]나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당연히 되죠. 혹시 남겨 뒀다가 저녁에 혼자 감상하려고 그래요? 그렇다면 저야 당연히 오케이죠.]내 대답에 애교 누나는 얼른 부끄러워하는 이모티콘을 보내오더니 조심스럽게 답장했다.[나 이러는 거 나빠 보이죠?][그럴 리가요? 전 누나가 이러는 모습 좋아요.][그런데 난 정말 좋은 여자 아니에요. 아직 이혼도 안 했으면서 수호 씨랑 이러잖아요.][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마요. 누나 남편은 누나한테 그런 짓 하고도 미안해하지 않는데 누나가 왜 미안해해요?][됐어요. 이 이야기는 그만하고 남주한테서 들었는데 오늘 우리한테 밥 사겠다고 했다면서요?][네, 계속 얻어먹기만 했으니 한 번쯤은 제가 사야죠.][그럼 기대하고 있을게요.]애교 누나와 대화를 마친 뒤 나는 다시 업무하러 복귀했다.오전에 홍보 책자를 나눴던 게 효과를 본 모양인지 오후에는 어쩌다가 우리 과에 와 진료받는 사림이 생겨났다.그러자 마동국은 나더러 홍보 책자를 그만 나눠주고 진찰을 하라고 명령했다. 본인은 계속 핸드폰을 보고 있으면서.나는 마동국을 무시한 채 환자를 진찰하기 시작했다.“의사 선생님, 전 다른 병은 없는데 류머티즘 관절염입니다. 그게 너무 괴로워서 그동안 여러 병원을 다녀봤고 약도 많이
딱 봐도 크게 시름 놓지 못해 옆에서 지켜보려고 남은 듯했다.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열심히 치료에 전념했다.예전에 할아버지께서 그러셨는데, 본인이 실력만 있으면 무서울 게 없다고 했으니까.난 그 실력이 있기에 나를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시선 따위 개의치 않았다.내 침술을 지켜보던 마동국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며 어르신께 말했다.“어르신, 걱정하지 마세요. 이분 의술이 엄청 뛰어나니까.”그 말에 어르신은 허허 웃음을 지었다.“저도 느꼈습니다. 제가 의사가 아니라 침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이 의사 선생님이 침을 놓는 순간 다리의 통증이 줄어든 것 같았거든요.”어르신의 신임을 얻을 수 있어 나는 내심 기뻤다.침과 뜸을 하는 시간은 꽤 오래 걸렸다.약 2시간에 걸쳐 나는 겨우 어르신을 위해 모든 절차를 완성했다.“어르신, 일주일 뒤 다시 오세요. 이따가 약처방 드릴 테니까 돌아가서 탕약 드시고, 발도 담그세요. 그러면 증상도 완화될 겁니다.”어르신은 어찌나 입담이 좋으신지 그사이 나와 친해졌다고 여자 친구를 소개해 주기까지 했다.“네, 정 선생님, 하라는 대로 할게요. 그리고 제가 방금 말씀드린 일은 어때요?”“무슨 일이요?”내가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되묻자 어르신은 다시 입을 열었다.“우리 손녀를 소개해 주겠다고 한 일이요. 제 손녀라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예뻐요. 정 선생님도 마음에 드실 겁니다.”그저 농담으로 한 말인 줄 알았는데 이토록 진심으로 소개해 주니 나는 다급히 말했다.“어르신, 저 이제 막 일 시작했고 아직 안정되지도 않아 연애할 마음이 없어요.”“그게 뭐가 어때서요? 일하면서 연애하면 되지, 일이 안정되고 연애도 할 만큼 했으면 결혼도 하는 거 아니겠어요?”그 말에 나는 어찌할 줄 몰랐다.어르신이 벌써 결혼까지 생각했을 줄은 생각지 못했으니까.결국 나는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르신, 호의는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 정말 연애할 마음 없어요.”사실 난 한 마디를 채 하지 않
“우선 보고 얘기해요. 왜 아직 보지도 않고 거절해요?”나는 어르신의 고집을 꺾지 못해 사진을 확인했다.그런데 어르신의 손녀는 의외로 아주 예쁘장했다.아주 밝고 귀여우며 젊음의 아름다움이 느껴졌다.솔직히 애교 누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고민도 없이 이 여자를 만나봤을지도 모른다.나와 나이도 비슷하고, 얼굴도 예뻐 연애하기 적합했으니까.하지만 아쉽게도 젊은 유부녀의 매력을 느낀 나로서는 이토록 풋풋한 여자에게 별로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이런 여자애는 신경을 써서 속마음을 헤아려줘야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맞혀야 하니까.하지만 애교 누나와는 그렇게 많은 걸 생각할 필요 없이 진심만 내보이면 그만이다.그렇게 비교하니 역시 젊은 유부녀 쪽이 내 취향에 가까워 나는 결국 어르신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어르신, 정말 죄송해요.”“이런데도 마음에 안 들어요? 하, 두 사람 정말 인연이 없나 보네.”어르신은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자 고개를 저으며 아쉬움을 표했다.나는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르신을 배웅한 뒤 기지개를 켰다.연속 2시간 동안 침과 뜸을 하니 몸은 확실히 힘들었다.하지만 속으로는 성취감도 생기며 만족스러웠다.남은 시간 동안 나는 홍보 책자를 나눠주는 대신 의학 서적을 읽고 인터넷에서 맛집 정보를 알아봤다.그러다 우리가 사는 동네에 있는 맛집을 예약하고 애교 누나, 남주 누나 그리고 형수한테 5시 반에 그 레스토랑 앞에서 만나자고 문자를 보냈다.나는 퇴근하자마자 운전해 약속 장소로 바로 가면 되니까.애교 누나와 남주 누나는 곧바로 나한테 답장을 보냈다.하지만 마지막으로 받은 형수 문자를 본 순간 나는 가슴이 콕콕 찔렸다.[수호야, 네 형수한테만 밥 사주고, 나한테는 안 사?]이건 분명 형의 말투였다.형이 형수의 핸드폰으로 답장을 보낸 거였다.솔직히 형한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무서운 것보다는 형이 나와 형수의 대화 내용을 볼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그런데 그동안 형수랑 카톡으로 야릇한 말을 주고받은 적이
나는 다급히 영상을 클릭했지만 마음이 아팠다.형이 나한테 이런 영상을 보낸 게 무슨 뜻인지 생각하는 한편, 또 영상 속 형수가 형과 몸을 섞을 때 어떤 반응인지 궁금하기도 했다.하지만 영상을 다 본 나는 마치 찬물을 맞은 느낌이었다.형이 보낸 동영상은 야릇하고 수위 높은 동영상이 아니라 내가 하루빨리 성공하여 훌륭한 의사가 되라고 축복해 주는 축하 영상이었으니까.순간 내 마음은 매우 복잡해졌다. 약간의 실망감과 함께 기쁨 그리고 의심이 생겨났다.하지만 가장 많은 건 걱정이었다.내가 뭘 걱정할 게 있겠냐 하겠지만, 형이 다시 되면 형수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거고, 그러면 앞으로 형수와는 아무런 기회도 없을 터였다.형수의 육덕진 몸매를 생각하니 나는 매우 아쉬웠다.하지만 그래도 형수 아닌가? 우리 형 진동성의 아내인데,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모순되는 심정과 함께 내 마음도 점점 가라앉았다.심지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형은 내가 한참 동안 답장하지 않으니 퇴근 시간이라 짐 정리를 한다고 생각했는지 이따 보자는 말과 함께 대화를 끝냈다.나는 가라앉은 기분으로 멍하니 의자에 앉아 부단히 나에게 암시했다.‘동성 형은 내 형이잖아, 형이 잘되면 좋아해 줘야지. 형수랑은 절대 불가능해, 차라리 이 기회에 두 사람이 원하던 생활 얻을 수 있기를 축복해 주자.’그렇게 위로하다 보니 내 마음도 점차 나아졌다.게다가 나는 앞으로 절대 형수와 그런 짓을 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 최면했다.‘형수는 형수로 대해야 해.’나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 나는 심지어 속으로 형수에게 불경한 마음을 품으면 개로 변할 거라고 맹세까지 했다.그러다 퇴근 시간이 되자 나는 짐을 챙겨 마동국과 작별 인사를 한 뒤 병원을 나섰다.그때까지 나는 민규가 몰래 나를 따라붙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내가 형수의 차를 끌고 약속 장소로 향하는 동안 민규는 계속 나를 따라왔다.민규가 이렇게까지 하는 건 복수하기 위해서일 거다.전에 내가 남주 누나와 했던
민규는 볼수록 샘나고 부러웠다.전까지만 해도 본인 여자 친구가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내 옆에 앉은 여자들과 비교하면 천지 차이였으니.“정수호와 야릇한 농담을 했던 여자는 대체 누구야?”민규는 목을 빼 들고 두리번댔다.민규의 목적은 그날 나와 통화했던 여자였다. 그 정도로 밝히는 여자면 본인도 공략하기 쉬울 거라고 생각했으니.하지만 나의 일행과 안면도 없는 사이었기에, 민규는 쉽게 분별할 수 없어 자리를 잡아 묵묵히 관찰하는 수밖에 없었다.나는 온 신경이 형과 형수한테 쏠려 아직도 민규가 나를 미행했다는 걸 발견하지 못했다.오늘 형수는 예전과 많이 달랐다. 아주 기뻐하고 행복해하며 눈에 생기가 돌았다.보아하니 형이 다시 되는 게 틀림없었다.그동안 받지 못한 사랑을 듬뿍 받았으니 기분이 좋았을 테지.오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이 모습을 보니 나는 마음이 아팠다.형수와 남주 누나는 화기애애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심지어 남주 누나는 거리낌도 없이 직설적으로 말했다.“고태연, 너 오늘 달라 보이네, 어젯밤 남편 사랑 듬뿍 받았나 봐?”형수는 조금도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당연하지, 오늘 내 혈색이 좋아진 거 안 보여?”“당연히 보이지. 아주 행복해 보이네, 그런데 티 적당히 내. 우리처럼 굶주린 유부녀들은 너무 부러우니까.”애교 누나는 그 말에 부끄러운 듯 끼어들었다.“누가 굶주렸다는 거야? 난 아니거든.”“아니야? 반년 동안 남편 사랑 못 받았으며 굶주리지 않았다고? 너 불감증이야?”“쉿, 목소리 좀 낮춰. 공공장소에서 좀 자제할 수 없어?”애교 누나의 말에 형수가 피식 웃었다.“얘가 자제하는 것보다 돼지가 하늘을 나는 게 더 가능성 있겠어.”“얼씨구, 네가 나를 제일 잘 아네. 몰라봤어.”“흥, 그러니까 얌전히 굴어. 내 앞에서 수작 부렸다가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세 사람이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떠드는 사이, 동성 형은 내 기분을 눈치챘는지 먼저 물어봤다.“수호야, 왜 그래? 기분 안 좋아 보이는데, 무
민우는 우리 셋 중에서 인내심이 가장 부족했다. 그도 그럴 게, 민우는 가장 돈에 쪼들렸기에 가게가 망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들어가.”나는 민우를 강제로 밀며 약재 정리를 시켰다.건너편 약방은 여전히 가격 전쟁을 하고 있었으며 고객 유입도 점점 많아졌다.나도 정 사장님처럼 여유로운 자세를 유지하고 싶었지만, 사실 나도 더 이상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서윤기는 나를 괴롭히는 게 목적일 테니, 이렇게 쉽게 맞은편 가게의 가격 전쟁을 끝내지 않을 거다.만약 이대로 간다면 우리 가게는 버티지 못한다.때문에 무조건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가게로 돌아온 나는 현성을 내 사무실로 끌어들였다.“잠깐 와 봐. 너랑 할 얘기 있어.”“뭔데 이렇게 비밀스럽게 얘기해? 민우는 왜 안 부르고?”“민우는 성격이 불같아서 말하면 못 참을 것 같아. 그리고 이 일이 조금 위험한 거라 우리 셋이 한꺼번에 무슨 일을 당하면 안 돼. 한 명은 가게에 남아야지.”현성은 내가 큰일을 벌일 거라는 걸 눈치채고 곧장 물었다.“무슨 계획 있어?”“맞은편 가게 뒤에 누군가가 있어. 우리 가게를 일부러 우리를 겨냥하는 거야. 우리도 이대로 있을 수 없어.”“혹시 상대가 가짜 약 쓴다는 거 까발리려고?”현성이 잔뜩 흥분해서 물었다.이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그건 너무 번거로워. 나는 간단하지만 거친 방법을 사용할 생각이야.”현성은 더 흥분했다.“무슨 방법인데? 얼른 말해 봐.”나는 현성의 귓가에 대고 내 계획을 말했다. 그러자 현성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정말 이렇게 일 크게 벌이려고?”“일 크게 벌이지 않고 그 사람들 어떻게 혼내?”사람이 독하지 않으면 제대로 설 수 없다.이 바닥에서 지내려면 그만큼 수단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현성은 조금 걱정하는 듯 말했다.“그러다가 잡히면 형벌 받아.”“무서워?”나는 현성을 보며 물었다.현성은 머리를 긁적였다. 솔직히 현성은 조금 무
고수연이 나간 뒤 나는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려고 했다.그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리더니 서윤기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나는 전화를 받지 않고 그대로 꺼버렸다. 하지만 서윤기는 끈질기게 전화를 걸었다.결국 참다못한 나는 서윤기의 연락처를 차단했다.그러자 서윤기는 이번에 내 카톡으로 문자를 보냈다.[정수호, 아주 대단하던데. 언제 또 필사본을 만들었더라. 내 손에 있는 책은 필요 없어 보이니 망가뜨릴게.]그 아래에 영상 하나도 도착했다.서윤기는 할아버지가 나에게 남겨준 의서를 화로에 넣었고, 불길은 순식간에 의서를 집어삼키며 활활 타올랐다.비록 내 손에 필사본이 있다지만 할아버지의 심혈이 이대로 망가지니 마음이 안 좋았다.나는 그 아래에 바로 답장했다.[그런다고 당신한테 뭐가 도움이 돼?]서윤기의 답장이 곧바로 도착했다.[아무 도움도 안 돼. 하지만 네 기분 불쾌하게 만들 수 있잖아.]‘진짜 미친놈이네.’나는 결국 서윤기의 카톡까지 지워버렸다.그날 오후, 나는 화인당에 들러 정 사장님한테 서윤기와 있었던 일을 말했다.정 사장님도 내 말을 듣더니 미간을 찌푸렸다.“서윤기가 지금 이규진과 전광진과 손을 잡고 가짜 약재를 강북 시장에 유통하고 있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약방에 가짜 약재가 흘러들었는지 몰라.”“경찰에 신고하면 되지 않아요?”이게 바로 내가 떠올린 생각이었다.하지만 정 사장님은 고개를 저었다.“서윤기의 구매 루트가 기밀이라 증거가 없거든. 경찰들도 사건 접수 안 해줄 거야.”“그럼 어떡해요? 그냥 이렇게 내버려둬요? 아니면 가짜 약재를 얻어다가 검사 맡겨 볼까요?”나는 다시 건의했다.그러자 정 사장님이 고개를 저었다.“그 약재들이 진짜 가짜 약재인 건 아니야. 그저 날짜가 지난 약재를 특수처리하거나 약효가 그리 뛰어나지 않는 약재들이야.”“아무리 특수 기관에 의뢰해도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거야. 그래서 가짜 약재를 만드는 사람들이 교활하다고 하는 거고.”나는 순간 무기력해졌다. 분명 상대가 가짜 약을 만
나는 내 대답에 매우 흡족했다. 두 사람의 장점과 특징을 각자 잘 얘기했다고 생각했으니까.하지만 이태웅과 윤해철은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수호 군, 한 명을 선택하라고 했지, 다항선택을 하라고 한 건 아닌데.”이태웅도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한 명을 선택하라고 하면 한 명을 선택해야지.”“선택을 왜 해요? 전 안 해요. 두 사람 모두 좋아요.”‘성인이면 왜 선택을 하지? 둘 다 좋은데, 난 다 갖고 싶어.’물론 이 말까지 내뱉을 순 없었기에 나는 속으로 삼켰다.말을 마친 나는 곧바로 도망쳤다. 이런 위험한 곳에 나는 1초도 더 있고 싶지 않았다.다는 두 사람이 또 나를 부를까 봐 단숨에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윤지은의 부모님도 왔으니 내가 계속 이곳에 남아 있을 필요는 없었기에 그대로 병원을 떠났다.그 길로 나는 천수당으로 향했다.민우는 나를 보자 아침에 왜 안 왔냐며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봤다. 하지만 두 사람을 걱정하게 하기 싫어 나는 경찰서에 잡혔던 일은 함구했다.이제 막 물 한 모금 마셨을 때 고수연이 찾아왔다.“사장님, 연재혁 변호사님 말로는 모레가 재판일이래요. 그런데 너무 걱정되는데 어떡하죠?”“마음 편하게 먹어요. 연재혁 변호사님 대단한 분이에요. 그분을 믿어야 해요.”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겨우 위로밖에 없었다.그때 고수연이 갑자기 내 옆에 털썩 앉았다.“만약 재판에서 지면 어떡하죠? 다른 건 다 빼앗겨도 상관없는데, 아이들은 절대 안 돼요. 아이들은 내 정신적 지주예요.”“지금 일자리도 있잖아요. 법원에서 아이를 그놈한테 두 아이를 주지 않을 거예요.”“그런데 난 한 명도 주고 싶지 않아요. 진용진은 책임감 없는 쓰레기예요. 아이들이 그런 인간을 따라가면 인생 망쳐요.”사실 나는 고수연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혼자 지내는 것도 여유롭지 못한데, 아이들의 양육권을 모두 자기가 가져오겠다고 하다니. 굳이 그렇게 자신을 혹사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예전에 우리 마을에 있던 한 여자가
이건 꼭 무슨 성공한 여자의 발언 같았다.애교 누나는 항상 연약하고 다정한 이웃집 누나 같은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바뀌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나는 누나의 이런 변화에 매우 기뻤다.“누나 주변에 빛이 한 층 생긴 것 같아요. 더 멋있고 매력 있어졌어요.”나는 애교 누나의 또 하나의 빛나는 점을 발견했다.누나는 내 말이 재밌었는지 피식 웃었다.“말은 참 잘한다니까요. 또 나 기쁘라고 하는 말이죠?”“아니요. 진심이에요.”나는 복도 쪽을 흘겨봤다. 그곳에서 이태웅은 아직도 윤해철과 말다툼하고 있었다.그 모습에 나는 의아해서 물었다.“그런데 아버님은 어떻게 된 거예요? 그동안 저 마음에 안 들어 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윤 회장님한테 와서 저를 빼앗아요?”“그게 어디 수호 씨를 빼앗는 거예요? 우리 아빠 원래 아저씨랑 말싸움하는 거 좋아해요.”‘어쩐지.’난 또 애교 누나뿐만 아니라 이태웅도 변한 줄 알았는데, 그건 너무 기상천외한 생각이었다.하지만 성공한 두 어르신이 말다툼하는 걸 보는 게 꽤 재밌었다.욕설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데, 상대를 할 말 없게 만들고 있었으니까.역시 배운 사람들은 말다툼에도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다.“애교 누나, 누나는 언제 집에 돌아가요?”두 사람이 언제까지 싸울지 몰라 나는 조심히 애교 누나 손을 잡았다.그러자 애교 누나는 얼굴을 붉히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내가 요즘 부모님 설득 중이라 아마 얼마 안 걸릴 거예요. 왜 내가 집에 빨리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무슨 나쁜 짓을 하려고?”나는 애교 누나의 다른 손을 꼭 잡았다.“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누나가 보고 싶고 안고 싶어서 그래요.”“그럼 지금 안아요. 안 갈게요.”“정말요? 그럼 진짜 안아요?”나는 정말 단지 누나를 꼭 안아주고 싶었다.그때 나에게 장난치려던 애교 누나는 내가 정말 저를 안으려 하자 깜짝 놀라며 뒤로 피했다.“안 돼요. 아빠한테 들키면 끝장나요.”“누나가 지금 안아도 된다고 했잖아요.”“장난친 건데 수호 씨 진짜 대담하
“지은이가 그동안 나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데, 나도 도움이 돼야지. 지은이한테 돈은 부족하지 않은 거 알아. 수호 씨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이건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거야.”하정현은 요즘 막 취직하여 이곳에 남아 윤지은을 돌봐 줄 수 없기에, 미력하나마 자기 최선을 다할 생각인 듯했다.나도 더 이상 하정현과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결국 카드를 받았다. 나중에 그걸 쓸지 말지는 나중에 결정할 일이다.“지은이한테 절대 말하지 마.”하정현은 또다시 당부했다. 그러다 내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안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그로부터 얼마 뒤, 윤해철과 하정현도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은 이미 사람으로 가득 찼다. 내가 병실에서 나온 건 정확한 결정이었다.하지만 사람들은 한 명도 남지 않고 결국 하나둘씩 떠나갔다.윤해철도 나에게 당부했다.“수호 군. 수호 군이 그래도 우리 지은이 마음 쓰는 게 보여. 이번 기회에 서로 좀 잘해 봐. 난 두 사람 응원해.”이영미도 따라서 맞장구쳤다.“나도 두 사람 응원해. 내가 볼 때 두 사람 아주 천생연분이야.”“두 사람이 천생연분이면, 내 딸은 뭐지?”이게 무슨 상황인지, 애교 누나가 아버지인 이태웅과 함께 나타났다.순식간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윤해철은 여전히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자네 딸과 수호 군의 결혼 반대한 거 아니었어? 자네는 수호 군을 싫어하겠지만, 난 좋아해.”이태웅은 냉담한 얼굴로 걸어왔다. 그 강력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나는 순식간에 찬 숨을 들이켰다.하지만 이건 가장 무서운 게 아니었다. 이보다 더 무서운 건, 내가 애교 누나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였다.나는 내가 윤지은한테 마음이 흔들린 게 애교 누나한테 미안했다.그때 애교 누나가 나에게 먼저 다가왔다.“수호 씨, 우리 저쪽에서 얘기 좀 할래요?”나와 애교 누나는 사람이 없는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애교 누나, 제 말 좀 들어봐요...”나는 애교 누나에게 설명하고 싶었다.하지만 애교 누나는 웃으
나는 머리를 문질렀다.“백 쌤, 너무 세게 때렸잖아요. 머리통 날아갈 뻔했어요.”“흥. 그러게 누가 지은이 노리래? 감히 지은이까지 넘봐?”젠장.좋은 분위기가 그대로 망해버렸다. 만약 다음번에 또 물어보려면 이런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윤지은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웃는 얼굴로 백연우와 임유미를 바라봤다.“연우야, 유미야, 왔어?”유미 사모님은 창가에 앉아 다정하게 윤지은의 손을 잡았다.“어쩌다 이렇게 됐어?”“실수로 데였는데 큰 문제 없어.”“내가 들은 건 아예 달랐는데? 네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다던데.”백연우는 히죽거리며 물었다.그 말에 윤지은은 마음이 찔려 시선을 피했다.“누구한테서 들었는데?”“강한나지. 네 그 교통경찰 하는 친구. 오는 길에 마침 만났는데 말해주더라고.”“걔가 헛소리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윤지은이 해명했다.하지만 백연우는 마치 신대륙을 만난 사람처럼 신기해했다.“오호라. 이거 봐. 네 말투가 이미 너를 배신했어.”화들짝 놀라는 백연우의 모습에 윤지은이 오히려 멍한 얼굴을 했다.“내 말투가 어때서?”백연우는 마치 윤미화에게 빙의 된 것처럼 탐정놀이를 시작했다.“너 평소 얼음장처럼 싸늘하고 남이 말하면 몇 배 욕해주잖아. 그런데 네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내가 놀려댔는데 나를 욕하지도 않았잖아. 이거 이상해.”‘헐.’백연우의 관찰력은 확실히 대단했다.사실 방금 윤지은이 말할 때 나도 그 점을 눈치채 백연우와 유미 사모님한테 들킬까 봐 걱정했다.그런데 정말 이런 식으로 들킬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무엇보다 백연우는 사실 나와 윤지은의 사이를 진작 알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모른 척하고 있다는 거다.아마 연기했으면 오스카상 감이다.나는 더 이상 이곳에 있었다가 나한테까지 불똥이 튈까 봐 슬금슬금 도망칠 각을 쟀다.물론 서둘러 떠나지는 않았다.백연우와 유미 사모님은 윤지은의 병문안을 온 거라 이따가 떠날 텐데, 침대도 내리지 못하는 윤지은을 돌봐 줄 사람은 필요하다.윤
윤지은은 부족함 없지 자랐다. 부잣집 외동딸인 데다, 아버지는 강북에서 유명한 대기업 회장이라 주변에 구애자가 끊이지 않았다. 그중에는 부잣집 도련님도 있고, 실력 좋은 보디가드들도 있었다.그렇게 우수한 남자들을 많이 봐왔기에 윤지은은 나한테 이성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게 맞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나한테만은 자꾸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윤지은은 마음이 복잡해 갑자기 짜증이 솟구쳤다.“정수호, 내려줘.”얌전히 안겨 있던 윤지은이 갑자기 또 이러자 나는 순간 어리둥절했다.“왜요? 아프게 했어요?”“그런 거 아니야!”윤지은은 또 쌀쌀맞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더니 차갑게 쏘아붙였다.“네 돌봄 따위 필요 없어. 나가.”“왜요?”“이유 없어. 그냥 나가.”“요즘 지은 씨 무척 이상한 거 알아요?”나는 해답을 찾으려고 일부러 떠나지 않았다.하지만 윤지은은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이에 나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윤지은이 그동안 보인 이상 행동을 열거했다.“갑자기 연락처를 삭제했다가, 아예 차단해 버리고. 이제는 또 뜬금없이 쫓아내기까지. 설마 나 좋아해요?”나는 이 기회에 윤미화의 말이 진짜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말을 내뱉은 순간 내 마음도 무척 두근거렸다.이런 일은 진지한 태도로 얘기할 수 없기에 나는 결국 농담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리고 마침 분위기가 무르익어 무심코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그 말을 들은 순간 윤지은은 심장이 벌렁거려 극구 부인했다.“무슨 헛소리야? 내가 왜 너를 좋아하겠어?”“그럼 왜 뜬금없이 나한테만 화내요? 합당한 설명을 해줘요.”나는 포기하지 않고 캐물었다.결국 윤지은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말머리를 돌렸다.“내가 왜 설명해야 하는데? 네가 뭔데?”“전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지은 씨가 자기 목숨도 돌보지 않고 나를 몇 번이나 구해줬잖아요.”“저한테 아무 마음도 없으면 계속 도와줄 리 없잖아요. 본인이 다친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와주는 건 더더욱 불가능하고요. 나를 좋아한다고
얼마 뒤 윤미화도 떠나는 바람에 병실에는 나와 윤지은 둘뿐이었다.윤지은은 눈을 감고 있었는데 자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그런 윤지은의 마음을 읽을 수도 꿰뚫어 볼 수도 없어, 나는 결국 사과를 깎아 건넸다.“사과 좀 먹어요.”“안 먹어.”“그럼 귤은요?”“안 먹어.”“포도는요?”“좀 조용히 할 수 없어?”나는 윤지은이 말하는 틈에 포도 한 알을 그녀의 입에 넣고는 씩 웃으며 말했다.“아플 때 많이 먹어야 빨리 나아요.”“미친놈.”윤지은은 나를 욕하면서도 순순히 포도를 씹어 먹었다.심지어 하나를 다 먹고 난 뒤 또 하나를 요구했고. 그걸 먹고 나니 또 요구했다.윤지은은 늘 이렇듯 말은 누구보다 날카롭게 하면서 마음은 항상 여리다.이번에 윤지은의 도움이 컸기에 나는 윤지은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곁에서 세심하게 돌봐 주었다.사람을 돌보는 건 나한테 어려울 게 없었다. 딱 한 가지만 빼면 말이다. 그건 바로 화장실 문제였다.윤지은도 부끄러워 화장실을 가고 싶으면서 계속 참았다.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나니 한계에 다다랐다.“나, 나 좀 화장실로 부축해 줘.”윤지은은 끝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하지만 방광이 터질 것 같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나는 서둘러 윤지은을 부축한 채 화장실로 향했다.윤지은이 입원한 병실은 1인실이었기에 안에 화장실도 딸려 있었다.화장실 문 앞까지 부축한 나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자 윤지은은 벽을 짚으며 조심스럽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한 발에만 힘을 줘야 했기에 변기에 앉는 것도 어려웠다. 어렵사리 변기에 앉으니 또 바지를 벗는 게 문제였다.나도 윤지은이 불편할 걸 알았기에 밖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도움 필요해요?”“필요 없어. 훔쳐보지 마.”‘그럴 필요 있나? 우리 사이에 안 본 곳이 어디 있다고.’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밖에서 기다렸다. 그때 갑자기 안에서 ‘아’하는 비명이 나더니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보아하니 윤지은이 넘어진 모양이었
나는 윤지은이 그동안 나를 미워하고 싫어한다고만 생각했다. 가끔 외로울 때 나를 찾아 외로움을 달래는 것 외에는 아무 감정이 없다고 여겼다.때문에 윤지은이 나를 좋아하고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그래서인지 이 순간 나는 모든 게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현실적인 느낌과 비현실적인 느낌이 한데 섞여 나는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그때 윤미화가 팔꿈치로 나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거 봐. 내 말 맞지? 지은 씨가 수호 씨를 좋아한다니까.”“윤 사장님도, 지은 씨가 저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나는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아 되물었다.그러자 윤미화는 화가 난 듯 나를 째려봤다.“더 사람이 하는 대화 못 들었어? 또 어떻게 해야 믿을 건데?”“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믿기지 않아서요. 제가 전에 지은 씨한테 고백했는데 아주 대차게 차였거든요.”“우리 평소에 만나면 항상 다투기만 해요. 누구도 서로 양보하지 않아요. 게다가 연인끼리 하는 달콤한 말은 한 번도 한 적 없고, 서로 좋아한다는 고백을 한 적도 없어요.”“너무 사랑하면 미워지고 너무 미워하면 사랑한다는 거 몰라?”윤미화는 아주 철학적인 말을 했다.나는 그 말을 한참 곱씹었다.“확실히 일리가 있네요.”만약 정말 그렇다면 나는 너무 기쁘다. 그러면 윤지은의 마음속에 내가 있다는 뜻이니까.하지만 한편으로 골치 아팠다. 나한테 이미 애교 누나가 있기에 나는 윤지은을 책임질 수 없고 사랑을 받아줄 수도 없다.윤미화는 마치 내 뱃속에 들어왔다 나온 것처럼 농담조로 말했다.“평생 결혼하지 마. 그러면 부담 없잖아.”“어떻게 그래요?”“안 될 거 뭐 있어? 결혼은 종잇장으로 한 약속에 불과해. 누구한테 잘해주고 싶으면 그런 게 없이도 잘해줄 수 있잖아. 요즘 연애만 하고 결혼하지 않는 사람 많아. 난 그것도 괜찮다고 봐.”‘대체 뭐라는 거지?’나는 그 정도로 개방적이진 않다.나는 우선 마음을 가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