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엔 힘도 나지 않고 절망적이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그렇게 절망스러워할 필요가 없더군요.”정화군주의 창백한 얼굴엔 무미건조한 웃음이 걸려있었다.“그래요. 다 지나갈 겁니다.” 원경릉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난처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내 발자국 소리를 듣고 고지가 자신을 구해달라고 했어요.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초왕비가 알까요?”“무슨 생각이 드셨습니까?”“고지는 내 발자국 소리만 듣고 어떻게 나라는 것을 알았을까? 정말 웃기더군요. 그때 고지의 표정이 얼마나 가련했던지…… 구해주기로 약속하고 그녀를 끌고 산꼭대기까지 올라갔어요. 살려달라니까 살려서 꼭대기로 데리고 간 것 아닙니까? 내가 한 번 구해준 목숨이니 그다음엔 내 마음대로 해도 되니까요.”“데리고 올라간 이유는……”“혼자 죽기는 싫었거든요.”“고지는 군주의 의도를 몰랐죠? 고지는 자신이 쫓기고 있으니 도와달라고 한 거 아닙니까?”“처음엔 저도 고지가 모르는 줄 알았어요. 근데 산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고지가 무릎을 꿇고 전에 자신의 목숨을 구해줘서 고맙다면, 지금 죽으려고 한다면 자신도 따르겠다고 하더라고요.”“그게 진심일까요?”“진심일 리가 있겠어요? 고지의 말에 대꾸도 안 하고 산꼭대기에 둘이 앉아있었습니다. 그녀에게서는 사향냄새가 짙게 풍겼어요. 그래서 제가 이 냄새는 어디에 쓰이는 것이냐고 물으니 아이를 지울 때 사향냄새를 맡으면 애가 떨어진다고 하더라고요. 명월암 약방에서 훔쳤다며……”“아이를 지우는 게 그녀의 목숨을 더 위험하게 할 텐데…… 고지는 무슨 생각일까요?”원경릉이 의아해했다.태후가 아무리 고지를 싫어한다고 해도, 그녀의 뱃속에 황실에 아이가 있기에 아이만 있다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것이다.“저도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왜 아이를 지우려고 하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안왕이 자객을 보내서 그녀를 죽이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남강으로 피신해야 하는데, 뱃속에 아이가 있으니 도망갈 수 없으니 아이를 떼고 가려고 한
정후가 아무리 멍청하다고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 않나? 다 늙어서 발정이 났다고 해도 위왕의 노여움을 살 게 뻔한 일을 저지르다니? 그리고 고지는 정후가 좋아할 스타일이 전혀 아닌데……원경릉은 고지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고,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지 고지의 속셈을 밝혀내야 했다.“아무튼 고지가 그렇게 말했으니, 나중에 한 번 물어보세요.”원경릉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다섯째가 태자로 책봉되었고, 원경릉은 태자비가 됐다. 태자비의 부친이 위왕의 애첩과 불미스러운 관계를 맺다니!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안왕이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설마 안왕의 큰 그림?’원경릉은 이게 사실이라면 안왕이 너무 무섭다고 생각했다.“고지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원경릉이 물었다.“명월암 곁채에 있어요. 지금 제가 살고 있는 곳입니다.”“정화군주, 제가 고지를 만나 정말로 제 부친과 관계를 맺었는지, 그 아이가 부친의 아이가 맞는지 묻고 싶습니다.”정화군주는 원경릉을 보며 “사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고지가 말하는 건 열에 한 마디만 믿으면 되니까요. 그리고 이 사실을 누가 알겠습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라고 말하며 눈썹을 치켜세웠다.“군주,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큰일 납니다!”정화군주는 가만히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그렇네요. 그럼 초왕비께서 고지를 보고 싶다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보내세요. 절대로 고지를 안왕의 손에 넘겨주면 안 되니까요. 지금 안왕을 포함한 그 누구도 제가 고지와 함께 지내고 있다는 걸 모릅니다.”“지금도 안왕이 그녀를 계속 추적하고 있다는 말이죠? 안왕은 고지가 안왕이 꾸민 계략 때문에 고의로 위왕부에 접근했다는 사실이 알려질까 그런 겁니다. 혹시 모르니 보험으로 고지를 정후와 엮은 것이고요. 안왕이 고지를 죽이라고 사람을 보냈다면…… 그 뜻은 제 부친은 이미 안왕의 손아귀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겠죠.”“태자비도 몸 조심하셔야겠습니다.”원경릉은 사식이와 서일을 불러들여 정화군주를 바래다주라고 하며 조
원경릉은 고지를 의심했다. “어쨌든 고지한테 제대로 물어봐야겠어.”“너무 신경쓰지 마. 정화군주도 말했잖아 고지가 한 말에 열에 하나만 진짜라고, 혹시 알아 고지가 일부러 널 자극하려고 그러는지도 모르잖아?”“나도 고지 말을 믿는 건 아냐. 하지만 부친께 물어보기 전에 고지한테 사실 확인을 해야겠어.”“그래, 네가 정 그렇다면 불러서 물어봐. 근데 조심해야 해. 고지는 환술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원경릉은 우문호의 어깨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었다.“예, 알겠습니다. 전하! 근데 오늘 뭐 하러 갔어? 하루종일 못 본 것 같아.”“오늘 예부(禮部)에 다녀왔어. 아이들 이름을 지어야 하는데 뭐라고 지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예부에서도 부황께서 아직 이름을 정하지 않았다고 기다리라는데. 휴, 벌써 며칠째 아이들 이름도 못 부르니까 마음이 답답해.”“이름은 부르기 쉬운 이름이 최고인 것 같아.” 원경릉은 아이들의 아명도 괜찮다고 생각했다.“그래, 그것도 좋지만…… 아냐 이름은 제대로 지어야 해.”우문호는 말을 마치고 원경릉을 침상에 눕혔다.“많이 걸어 다니지 마. 명심해 넌 갓 출산을 한 사람이라는 걸.”“알겠어!” 원경릉이 옆으로 돌아눕더니 우문호의 손을 붙잡고는 “가지 마. 옆에 있어줘.”라고 말했다.우문호는 그녀의 옆에 앉아 그녀를 살포시 안아주었다. “최근에 내가 너무 바빴지? 부중에 일도 많고, 만나야 할 사람들도 많아서 그랬어. 미안해.”원경릉은 그를 빤히 보더니 입을 삐죽거리더니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었다.“우문호 씨, 태자가 되더니 소감이 어떠십니까?”“태자가 된 후에 일도 많고, 접대도 너무 많고, 사람도 많이 만나야 하고…… 근데 은화는 많이 주니까 그거 하나 좋다. 근데 너무 밝혀도 속물이라고 생각하겠지?”“은화야 많으면 많을 수록 좋고! 우리 왕부에는 은화가 부족하니까, 어쩔 수 없지.”구두쇠 원경릉이 음흉한 미소를 띠며 부드럽게 말했다. “부족해? 큰형한테서 받아온 구만냥하고 태상황께서 주신 십 만금(金)
원경릉의 말을 듣고 우문호의 눈동자가 반짝였다.“경릉아,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왜? 별로야?”원경릉이 물었다.“아니, 좋아, 경릉아. 정말 좋은 생각이야. 비록 시간은 걸리겠지만 효과는 아주 좋을 것 같아!” 우문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는 싱글벙글 웃었다.그 모습을 본 원경릉은 자신감이 붙은 목소리로 말했다.“경중에 시범사업을 시작하자! 지금 있는 은화로 첫 의학원을 설립하고, 학생은 100명 정도 모집하면 좋겠어! 그리고 의술이 뛰어나지만 퇴직한 어의들을 초빙해 학생들을 가르치게 하는 거야. 그 방면으로는 네가 방법을 찾아봐.”“그래, 좋아! 근데, 학생이 100명이면 어의가 몇이나 필요할까?”우문호는 매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3명, 한 반에 33명 정도로 하자.”“나한테 맡겨. 내가 퇴직한 어의를 찾아볼게. 한 달이면 될 것 같아.”“근데 이 일은 많은 은화를 써야 하는데, 아깝지 않아?”원경릉이 웃으며 물었다.“아깝지 않아. 가치 있는 일에 쓰는 거니까 오히려 뿌듯해.”우문호의 말을 듣고 원경릉은 시집 한 번 잘 왔다는 생각을 했다.그는 그녀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빨리 자. 너 잠들 때까지는 여기 있을게.”라고 말했다.원경릉은 눈을 감고 미소를 머금고 잠들었다.오후까지 자고 있던 원경릉은 만아의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태자비님, 고지를 데리고 왔습니다.”“다섯째는?”원경릉은 눈을 비비며 주변을 살폈다.“냉대인께서 태자를 모시고 가셨습니다.”만아가 손을 뻗더니 “태자비님,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았으니 조심하세요.”라고 말했다.“괜찮아.”원경릉은 상처가 따끔거리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고지를 별채로 데리고 와. 나도 그리로 갈 테니.”“예!”만아는 녹주에게 원경릉 시중을 들게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녹주가 원경릉의 겉옷을 입히고는 그녀를 부축해 별채로 향했다.원경릉은 별채 입구에 서서 한참을 고지를 바라보다가 안으로 들어갔다.고지의 머리는 덥수룩했고 얼굴은 퉁퉁 부어 여
“초왕비?” 고지가 원경릉이 들어온 것을 아는 듯 옷매무새를 다듬었다.원경릉은 고지가 태자비가 아닌 초왕비라고 하자, 고지가 소식을 들을 수 없는 아주 폐쇄적인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원경릉이 자리에 앉자 만아가 다바오를 데리고 와서 고지 가까운 곳에 두고 그녀를 경계하게 했다. 문이 닫히고 다바오의 소리가 들리자 고지는 몹시 불안한 듯했다.“초왕비, 지금 뭐 하려고 그러는 겁니까?”“긴장 말고. 앉게.”고지는 두 손으로 엉덩이 뒤를 더듬거리더니 의자를 끌어 앉았다. 그녀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허리를 곧게 폈고, 뭔지 모르게 당당한 입꼬리를 보였다.“네 뱃속에 있는 아이의 부친이 누구냐?” 원경릉이 물었다.고지는 예상했다는 듯 담담하게 “정후.”라고 말했다.“고지, 네 속셈을 내가 모를 줄 알고? 빨리 진실을 말 해!” 고지는 손을 저으며 “진실을 말해도 초왕비께서 믿지 않으니 전 더이상 할 말이 없네요.”라고 말했다.“내 부친의 아이라면, 내가 하나만 더 묻겠네. 정말로 내 부친과 관계를 맺었다는 거야?”고지는 고개를 숙이더니 입꼬리 한쪽이 씩 올라갔다.“그걸 왜 나한테 묻죠? 부친께 직접 물어보시지요. 장담하건대 부친께서도 절대 부인 못할 겁니다.”“당연히 물어볼 거야. 한 가지만 묻자, 진짜 그 아이가 위왕의 아이가 아니라는 거지?” 원경릉이 분노한 얼굴로 고지를 보았다.“이제 와서 부끄러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이판사판입니다. 만약 지금 뱃속의 아이가 위왕의 씨라면 난 백방으로 이 아이를 지키려고 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아이는 위왕의 아이가 아닙니다.”“진실을 말 해!”“초왕비, 사람들이 당신의 마음씨가 곱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내게 낙태약 하나만 주면 안 되겠소? 그렇지 않으면 초왕비가 낳은 세 아이와 내 아이를 같이 키워야 할 수도 있잖습니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요?”“쓸데없는 말 말고, 빨리 사실을 고해. 사실을 말한다면 내가 어떻게 해서든 남강으로 안전하게 보내줄 테니. 그리고 배가 그만큼이나 불렀는데,
고지의 말을 듣고 난 후 원경릉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방금 한 얘기는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거야. 내가 알고 싶은 건 네 뱃속의 아이가 어떻게 내 부친의 아이냐는 말이다.”“초왕비, 역지사지 알죠? 내 입장이 되어 잘 생각해 보세요. 나한테 있어서도 가장 좋은 방법은 진짜 위왕의 아이를 갖는 것이었겠죠? 하지만 위왕은 내게 손도 대지 않지, 안왕은 다그치지, 나도 별 방법이 없었습니다. 마침 정후가 안왕에게 벼슬을 할 수 있게 뒤를 봐달라고 부탁을 하러 왔고, 안왕은 계속해서 거절하다가 결국 나와 며칠 밤을 보내주면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했어요. 정후도 동의했고요. 바로 그때 이 애가 생긴 겁니다.”원경릉은 고지의 말을 듣고도 믿을 수 없었다. 만약 고지의 말이 사실이라면 원경릉은 정후의 머리를 열어 그 안에 똥이 들었는지 된장이 들었는지 확인이라도 해보고 싶었다.“근데 웃긴 건 이제부터입니다.”“……”“안왕이 그렇게 말해놓고 정후를 도와주지 않았거든요. 하하, 이런 말하기 뭐 하지만, 초왕비의 부친은 정말 멍청합니다.”고지는 말을 하면서 배를 잡고 웃었다. 눈이 없어서 그런지 그녀의 웃음은 더 섬뜩하게 느껴졌다.원경릉은 그 모습을 보고 토를 할 뻔했다.“고지, 내가 너한테 물어볼 게 더 있으니, 여기서 하루 이틀 더 있거라. 내가 알아야 할 것들을 다 알게 되면 하인에게 널 명월암으로 데려다주라고 할게.”원경릉은 말을 마치고 바로 나왔다.밖으로 나온 그녀는 서일을 불러 정후를 데리고 오라고 했다.잠시 후, 원경릉은 서일을 시켜 정후를 고지가 있는 별채에 데리고 가게 했다. 원경릉은 별채 옆 방에서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엿들었다.서일은 정후에게 “대감, 여기서 잠시 기다리십시오. 태자비께서 곧 오실 겁니다.”라고 말했다.정후는 고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가 서일에게 알겠다고 하고 고개를 돌리자 두 눈이 없는 거지꼴을 한 여인이 앞에 보였다. “대감, 안녕하셨지요?”정후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고지를
“남자들은 이게 문제라니까? 그러니까 아랫도리 간수를 잘했어야지.” 고지는 분노했다.정후는 당장이라도 고지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그녀의 모습이 너무 흉측해서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품속에서 은표 한 장을 꺼내 고지의 손에 쥐어두고는 낮은 목소리로 화를 냈다.“빨리 나가! 그리고 다시는 본후의 딸을 찾아오지 말거라. 이 은표면 네가 도성을 떠나 어디든 가서 살기에 충분할 거야. 그리고 본후와 있었던 일은 죽을 때까지 입 밖으로 꺼낼 생각 하지 마!”“그러죠!”고지는 은표를 자신의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꿈쩍도 않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순간 원경릉이 별채 문을 열어젖혔고, 그 뒤에 사식이가 즉시 문을 닫았다. 정후는 화가 잔뜩 난 원경릉을 보자 놀라서 덜덜 떨었다. “태자비, 아직 산달인데, 바람을 쐬면 어쩝니까……”정후는 애써 태연한 척 원경릉을 걱정했다.하지만 원경릉은 대답도 하지 않고 그를 죽일 기세로 노려보았다.“너…… 괜찮아? 누가 태자비를 화나게 한 것이냐?” 정후가 몸을 잔뜩 움츠리고 말했다.“잡소리 집어치우고,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 지나 알아봐요.” 원경릉은 분노를 삭이고 최대한 이성적으로 말했다. “뭘 해결해?”정후는 끝까지 발뺌했다.“저 여자 뱃속에 당신 새끼.”원경릉은 손가락으로 고지의 배를 가리켰다.“이 여자가 누군데? 난 이 여자를 몰라!” 고지는 정후의 말을 듣고 배꼽을 잡고 웃었다.“뭘 웃어? 빨리 안 꺼져? 어디 거지 같은 게 들어와서는 간도 크지!”정후가 소리를 질렀다.“부친, 아직도 저 여자가 누구인지 모르겠습니까? 제가 직접 소개라도 해드려야 아시겠어요?”“……”“저 여자 이름은 고지, 위왕의 애첩이었죠. 그녀가 위왕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고 태후께서도 그렇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태어난 아이가 위왕을 하나도 닮지 않고 부친을 닮았다면, 일이 어떻게 될까요?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고 참 재밌죠?”정후는 원경릉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 기절할 지경이었다
“애가 떨어지지 않으니 어쩔 수 없죠. 낳자마자 목을 졸라 죽이는 수밖에.”고지는 담담하게 원경릉에게 말했다.“그래, 목 졸라 죽이면 아무도 모를 거야.” 정후도 맞장구를 쳤다. 정후의 말을 들은 원경릉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정후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화를 참지 못하고 탁자 위에 담긴 물 잔을 들어 정후의 얼굴에 뿌렸다.“어떻게 남자로서 책임감이 눈곱만큼도 없습니까? 조부께서 부친께 후작 지위를 물려주신 걸 감사하며 열심히 노력도 안 하고, 딸들을 팔아가며 기생충처럼 살다가 이제는 딸들 다 팔고, 남은 건 몸뚱이 하나뿐이라 몸도 파신 겁니까? 벌린 일에 책임을 져야지, 애를 죽여요? 지금 그게 사람 입에서 나올 말입니까?”정후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아이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원경릉이 너무 사납게 몰아세우니 그녀의 화가 풀릴 때까지만 비위를 맞춰주자는 심산이었다. 고지는 정후가 원경릉에게 찍소리도 못하자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원경릉은 고지의 섬뜩한 웃음소리에 소름이 돋았다.“지금 웃음이 나와? 솔직히 말해서 그 아이가 부친의 아이라는 것도 확실하지 않잖아. 설사 부친의 아이가 맞다고 해도 아이가 혼자서 가질 수 있는 거야? 모두 남자 탓이고 너는 잘못한 게 없어? 정화군주가 말하길 너는 명월암에 온 뒤로 계속 그 아이를 없애려고 했다면서! 사람이 어쩜 그렇게 잔인해! 백방으로 애를 가지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용가치가 없어지니까 바로 버려?”“초왕비, 고귀한 척 우쭐대는 것은 여전하시군요. 그래요, 내가 위왕을 꼬셔서 위왕비를 쫓아내려고 했습니다. 근데 그걸 초왕비가 뭐라고 하면 안 되죠. 초왕이랑 어떻게 혼인하게 됐는지 하늘을 우러러 초왕비는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습니까? 초왕비의 수작에 넘어간 초왕은 결국 초왕비를 사랑하게 됐고, 위왕은 그렇지 못했다는 걸 제외하면 우리 둘이 다를 게 뭐 있죠?”“난 사람을 해치지 않아!
잔뜩 긴장한 채로 앞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 있었던 주 지부는 우렁찬 상대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중심을 잃은 듯 비틀거렸다. 그는 이내 팔을 뻗어 망루의 기둥을 붙잡으려 했지만, 허공에서 멈추고 말았고, 그대로 몸이 앞으로 쏠려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말에서 빠르게 날아올라,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그에게 달려갔다. 상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주 지부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그를 안고 빙 돌아서 바닥에 착지했다.주 지부는 깜짝 놀라서 그만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를 구해준 사람은 반짝거리는 눈망울에, 품위 있는 모습의 젊고 잘생긴 사내였다. 주 지부는 그를 황제의 호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의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새도 없이 그에게 예를 올렸다.“대인,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그때 말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서일이 먼저 말에서 내려, 다급히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으십니까?”우문호도 매우 놀란 듯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주 지부는 정말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숨을 들이쉬었다.“괜찮다.”그러고는 주 지부를 보며 물었다.“자네는 누구요?”주 지부는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보며, 누가 황제인지 추측했다.황제는 올해 마흔에 가까운 나이로 알려져 있었기에 위엄이 넘쳐 보일 것이었다. 그는 일행 중, 냉 수보와 홍엽을 만난 적 있었기에, 거친 모습을 한 이 인물은 아마도 호위로 추측된다. “묻지 않았소? 자네는 누구요? 어찌 죽으려고 하는 것이오?”서일은 그가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자, 큰 소리로 다시 물었다.주 지부는 울 지경이었다. 냉 수보가 그를 보고 있으니, 예를 올려야 하지만, 황제도 자리에 있으니, 바로 냉 수보에게 예를 올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대체 누가 황제란 말인가?그는 황제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어, 결국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고는 그들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
원경릉의 말은 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자리에 있던 관리들은 기쁨과 동시에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 대인은 땅에 엎드려 온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그는 살아생전에 자신이 황제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평소 차분하고 신중한 주 지부도, 그도 감정이 격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했다.황후를 만난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라 생각했는데, 황제까지 오신다는 소식에 그의 마음은 흥분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원경릉은 평생을 경성에서 다섯째와 함께 있었기에, 그녀는 그저 그가 온다는 사실을 간단히 전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녀는 다들 걱정 없이 역병을 치료하고, 언제나 황제가 그들의 뒤를 든든히 지켜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을 보니, 황제가 직접 오는 것이, 지방 관리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았다.원경릉이 급히 말을 덧붙였다.“폐하게서는 그저 역병 때문에 온 것이니, 모두 각자 맡은 일에만 최선을 다하면 되네.”“예, 예, 마마의 명을 따르겠습니다.”주 지부가 눈물을 닦으며 답했다.그렇게 관아와 의서가 협력하여, 오계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원 할머니는 역병을 치료할 수 있는 처방을 몇 가지 내렸다. 경증 환자는 약차를 계속 마시고, 증상이 악화하거나 중증 환자는 그녀의 처방을 사용하도록 했다.전에 이미 근처 주부에 연락해 약을 보내라 명했고, 오계부에서 구비한 약까지 있으니, 이번 역병을 대처할 수 있었다.오계부 의서는 이번 역병을 과거의 역병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소홀히 한 것 외에는 준비가 충분했다.원경릉은 황제 일행이 저녁 무렵 오계부에 도착할 것이라 예상했다.주 지부는 원래 여러 관리와 함께 황제를 맞이할 예정이었지만, 원경릉이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녀는 황제가 미복 순행 중이니, 과하게 맞이하여 백성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다.그 말에 주 지부는 당황했다.황제가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맞이하지 않는다니, 어찌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그러나 그는 황
약을 쓰자, 주 지부의 열이 단번에 내려갔다.열이 내려가니 정신이 맑아져, 그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애써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마마에게 예를 올리겠다고 고집 피웠다.원경릉은 그에게 누워 있으라고 말한 후, 역병에 관해 이야기하며 주 지부에게 이를 중시할 것을 당부했다.주 지부는 이를 듣고 깜짝 놀라 말했다.“소신은 매일 의서에 사람을 보내, 역병의 상황을 보고받고 있사옵니다. 매일 보고된 상황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역병이 발생했지만, 작년과 비슷한 정도였고, 약재도 충분한데, 어찌 이렇게 심각해진 것입니까?”“매년 역병이 발생했으나, 대대적으로 퍼지지 않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네.”원경릉이 답했다.“의서의 이 대인을 불러, 상황을 확인하겠습니다.”주 지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어제 이미 그를 찾아가, 환자 수와 사망자 수를 조사하라 명했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것이네. 자네가 사람을 보내, 관아에 와서 상황을 보고하도록 하게.”“예!”주 지부는 곧바로 사람을 보냈다.푸른 옷을 입은 남자는 관아에서 일하는 관리였기에, 그는 반 시진도 채 되지 않아, 관아 내에서 병에 걸린 자가 얼마나 되는지 통계해냈다.관아 내에서 역병 증상을 보인 사람은 총 열여덟 명이었고, 그중 두 명은 병세가 심각하여 이미 집에서 쉬고 있는 상태였다. 주 지부는 관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병에 걸린 줄 몰랐고, 관리의 보고를 들은 후, 큰 충격을 받았다.의서의 이 대인은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바삐 움직였다. 서관 대인이 직접 오셨으니, 어떻게든 시키는 일을 완성해내야 했다.그는 사실 역병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고, 그저 작년과 비슷하다고 여겼었다.하지만 여러 지역과 의원을 돌아보고 나서야, 이번 역병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처음엔 그저 서관 대인에게 보고만 하려고 했지만, 병세가 심각해지자 그도 조급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인원수를 통계하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도, 다섯째 일행은 여전히 도착하지 않았다.그래서 원경릉과 할머니는 다른 의관을 더 둘러보기로 하고, 몇 군데 더 돌아본 뒤 관아에도 갈 계획을 했다.그런데 한 의관에 들어서자마자, 푸른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다급히 뛰어오며 말을 걸었다. “수 의원, 대인께서 병세가 위중합니다. 어서 봐주셔야 합니다.”의원은 그 말을 듣자마자, 약상자를 집어 들고 다른 환자들을 그냥 남겨둔 채, 푸른 옷의 중년 남자와 함께 나가려 했다.원경릉이 그를 막아 세우며 말했다.“의관에 있는 환자들을 돌봐야 하지 않소? 우리 할머님께서도 의원이니, 지부 대인의 병은 할머님께서 봐 드릴 것이오.”푸른 옷의 사내는 초조한 듯 원경릉을 향해 소리쳤다.“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대인의 병세가 급박한데, 혹여라도 지체되면 당신들이 책임질 수나 있겠소?”바로 그때, 원 할머니가 호패를 꺼내, 그의 눈앞에 들이밀며 단호하게 말했다.“길을 안내하거라!”조급한 표정을 짓던 푸른 옷의 사내는 호패를 보자마자 표정이 얼어붙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그는 곧장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며 말했다.“서관 대인께서 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무례를 범해 송구하옵니다.”“그만 사과하고 길 안내나 하시오.”원경릉이 말했다.“예, 예!”사내는 급히 물러서서, 예를 갖춰서 길을 가리켰다.“마차가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서관 대인, 이쪽으로 오시지요.”원경릉은 할머니를 부축해 마차에 올랐고, 곧장 관아로 향했다.지부 대인은 따로 사저가 없어 관아의 뒷마당에서 거주 중이었다. 혼자 지내는 데다 관아가 워낙 가까워 편리했기 때문이다.관아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안으로 들어갔다.주 지부는 병세가 꽤 심각해져 있었다. 그는 어지럼증과 흉통에 시달려, 침대에 누운 채 말을 꺼낼 힘도 없었다.원경릉은 직접 치료에 나섰고, 약상자를 열어 체온 측정기와 청진기를 꺼냈다.푸른 옷의 사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가씨께서도 의원이십니까?”그러자 곁에 서
이 대인이 원경릉에게 의학을 잘 모른다고 반박할 틈도 없이, 원 할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대로 하게. 하루만 줄 테니, 그 안에 역병에 관한 모든 자료를 가져오게. 사망자 수도 포함되어야 하네." 이 말까지 듣자, 이 대인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비록 조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서관 대인이 멀리서 오계부까지 왔으니, 시키는 일은 해야지 대인의 마음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을 보내 조사를 명한 후, 이 대인은 거처를 마련해 드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원경릉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의서에 의원이 많지 않으니, 대인도 바쁘실 텐데요. 저희가 직접 오계부를 돌아보겠습니다." 이 대인은 그녀가 원 할머니의 힘을 빌려 위세를 부린다고 생각해,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말에 답도 하지 않고, 원 할머니에게 예를 올렸다. "어르신께서 머무실 계획이 있으시면, 부디 저에게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밤 대인을 잘 대접하라, 명을 내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일이나 보게." 원 할머니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원경릉에게 말했다. "먼저 좀 돌아보다, 객사를 찾아 머물자꾸나." "예!" 두 사람은 역병을 조사하기 위해 다급히 이곳을 찾아왔기에, 먼저 각지의 의원을 직접 돌아보려 했다. 아마 다섯째 일행은 빨라야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할 것이었다. 두 사람이 의서를 나서자, 이 대인은 뒤따라 나오려다 원 할머니의 날카로운 눈빛에 움찔하며 발길을 멈췄다. 두 사람은 오계부의 거리로 향했다. 거리가 꽤 번화했고, 사람들도 제법 많아, 대낮에는 조금 붐볐다. 그들은 곧장 의원으로 향했다. 의원 앞에는 약차가 많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환자는 얼마 없었다. 겉보기엔 역병이 퍼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원경릉은 안으로 들어가 의원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러자 의원은 요즘 들어 약차가 잘 팔리고 있고, 하루에 천 봉지가 넘게 팔린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도 역병
늦게 출발한 원경릉은 신속하게 오계부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오계부 근처 주현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가 현지 혜민서로 가야 한다며 잠깐 멈추자고 했다. 그러고는 혜민서에 오계부로 약을 공급할 준비를 하게 했고, 명을 받으면 바로 오계부로 보낼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당부했다. 혜민서 산하의 의료기관들은 지난 몇 년간 개혁을 통해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고, 지역 간의 연결도 긴밀해졌다. 특히 역병을 상대하는 체계가 가동되면 상부에서는 전력을 다해 의원과 약을 지원해줄 수 있었다. 신신당부한 뒤에야 원경릉과 할머니는 오계부로 재빨리 향했다. 곧이어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우문호 일행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계부는 인구가 500만 명에 이르는 곳으로, 두 개의 주부가 통합된 지역이었다. 열대에 있어, 경작지가 많고 산이 많아 농업을 위주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조정은 이곳을 서부의 주요 곡창지대로 삼고 있었던 것이었다. 농업이 발달한 지역은 상대적으로 경제도 번화했고, 현지 백성들은 벼 외에도 감, 자두, 리치 등을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었다. 리치는 신선할 때 먹을 수도 있고, 말려서 건과로 만들어 팔 수도 있기에, 어느 정도 지역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었다. 오계부는 백월국과 인접해 있었는데, 백월국은 북당의 속국으로 사이가 우호적이며 경제 교류도 활발했다. 이는 양국의 번영을 촉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계부의 지부는 장씨 성을 가진 오계부 출신이었다. 장 지부는 훌륭한 관리이며 지역 백성들로부터 존경받고 있었다. 원경릉과 원 할머니는 오계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지역 혜민서를 찾았다. 할머니는 혜민서의 서관(署館) 신분을 밝혔다. 그녀는 북당 각 주부의 의서를 총괄하는 인물이고, 총책임자이기도 했다. 혜민서의 이 의원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두 사람을 안으로 청한 후, 바로 예를 올렸는데, 마치 신선이라도 본 것처럼 목소리까지 떨고 있었다. "소인은 이자옥이라 합니다. 어르신께서 친히 오신 줄도
그녀는 일단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냉 대인이 자세한 상황을 묻는 사이에 제 대인의 피를 뽑았다. 약상자는 기능이 꽤 다양하기에, 바이러스 검사도 문제없었고, 안에는 양여혜가 준 소형 현미경도 있었다. 하지만 바이러스 관찰이나 세균 배양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지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먼저 오계부로 향하고, 그녀는 이곳에 남아 제 대인을 치료하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면 바이러스든, 세균 감염이든, 결과가 나와야 제대로 된 치료 방안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미색이 말했다. "저도 이곳에 함께 남겠습니다. 제가 환자를 돌보는 것 정도는 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괜찮으니 먼저 가거라. 어쩌면 내가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으니깐." 원경릉이 말했다. 그녀는 혼자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미색까지 데리고 가는 건 무리였다. "우리가 먼저 출발하는데, 어찌 더 일찍 도착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미색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가능한 일이다. 원 선생은 늘 기적을 만들어내니." 우문호가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원경릉에게 다가가 조심하라고 몇 마디 당부했다. "알았소. 지체하지 말고, 어서 떠나시오. 오계부에 도착하면 곧바로 관아를 찾아가, 의원의 빠른 대처를 명하라 하시오. 만약 내가 먼저 도착한다면, 내가 관아를 찾아가겠소." "알겠소. 그럼, 먼저 가겠소!" 우문호는 그녀와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보는 이가 많으니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서일은 황후를 홀로 두고 가는 것이 걱정되어, 우문호를 따라나서며 계속 물었다. "정말 황후를 이곳에 혼자 남겨도 되는 것입니까?" "그럼, 네가 남을 것이냐?" 우문호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너도 원 선생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고 있지 않느냐?" 회왕 부부도 걱정은 되었지만, 다섯째의 여유로운 모습에 자신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다섯째 부부는 늘 비밀이 많은 사람들이라, 그들은 더 이상 신경
원경릉은 밖으로 나가, 오계부에 역병이 생긴 것 같다고 전했다. 오계부는 서쪽에 자리 잡고 있어, 기후가 더운 탓에 가끔 역병이 생기긴 했었지만 백성들은 고뿔 치료에 쓰이는 약초로 끓인 차를 즐겨 마시기에, 대규모로 역병이 돈 적은 없었다. 냉 대인이 말했다. "오계부에서는 이 상황을 조정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해마다 역병이 생기긴 하지만, 빠르게 통제해 왔으니, 이번에도 예전과 같은 상황이지 않겠습니까?" 원경릉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번엔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 대인의 형도 역병으로 돌아가셨고, 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도 병에 걸렸습니다. 이렇게 관아에만 역병에 걸린 자들이 많으니, 예전보다 더 심각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해마다 역병이 생겼으니, 그에 대한 대응책도 이미 있을 것입니다." 원경릉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해마다 역병이 생겼지만, 대대적으로 유행하지 않았기에, 현지 관리들이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쉽게 통제될 것이라 생각하고, 방심할 수도 있으니깐요." 우문호가 물었다. "원 선생, 역병을 어떻게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역병 상황이 안 좋을 것이라 추측할 뿐, 정말 오계부의 상황이 어떠한지는 아직 모르네. 제 대인은 여전히 고열에 시달리고 있어, 수액을 맞히고 해열제를 먹였소. 냉 대인과 함께 들어가 상황을 자세히 물어봐야겠소. 하지만 꼭 마스크를 끼고, 병을 막아야 하오." 원경릉은 유행성 독감이나 변이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일 것이라 의심하고 있었다. 그녀가 살던 세계에서는 A형 독감의 대규모 변이가 십수 년마다 한 번씩 발생했는데, 그런 변이 독감은 현대에서도 의료 체계에 큰 부담이 되곤 했다. 그러니 지금 이곳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만약 역병이 다시 시작한다면, 가능한 한 빨리 통제해야만 했다. 원경릉의 말을 우문호와 냉 대인은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도
원경릉은 청진기를 꺼내 그의 폐를 확인해 보았는데, 남녀가 가까이 접촉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제 대인은 이내 손을 뻗어 그녀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병세가 심해 아픈 데다가,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묘한 위압감을 풍기는 의원의 단호한 눈빛과 기운에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원경릉은 앞쪽을 청진한 뒤, 그에게 옆으로 돌라고 한 다음에 꼼꼼히 살피고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며칠을 아프신 것입니까?" 제 대인은 꽉 막힌 코 때문에 콧소리를 내며 천천히 몸을 돌리고 답했다. "며칠 사이의 일입니다. 오계부를 떠날 때도 멀쩡했는데, 밤새 달리고, 말을 오래 타다 보니 고뿔에 걸렸나 봅니다." "기침 말고, 가슴 통증도 있습니까?" "예. 이곳이 아픕니다!" 제 대인은 가슴 근처를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가, 숨쉬기가 어려운 듯 손바닥을 움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도 아프고, 온몸 뼈마디도 다 아픕니다." 그러자 원경릉은 더 자세히 증상을 확인한 뒤 말했다. "약을 준비할게요. 수액을 좀 맞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액이요?" 제 대인은 멍하니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예. 질문은 하지 마시고, 그저 치료에 협조만 해주십시오. 병세가 꽤 심각한 편입니다." 원경릉은 제 대인이 폐렴이라 확신했고, 중증 폐렴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 대인은 병이 심하다는 말에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다급히 말했다. "의원 나리, 제발 최선을 다해 치료해 주십시오… 저에게는 아직 모셔야 할 노모가 있습니다. 지난달 병으로 형님께서 세상을 떠난 터라, 형님의 자식들도 제가 돌봐야 하니, 절대 이대로 목숨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원경릉이 답했다.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치료에만 집중하시지요!" 제 대인은 감동을 받은 듯 감사 인사를 올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원경릉은 곧바로 약을 지어 수액을 준비했다. 수액을 맞는 동안, 제 대인은 여전히 놀란 모습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