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왕비 소식안타깝게도 황씨가 원경릉 부부 쪽까지 가기도 전에 우문호가 원경릉을 이끌고 돌아 가버렸다.황씨는 걸음을 멈추고 심하게 실망했다.아니 황씨가 가고 있었던 걸 못 본 거야? 몸집도 이렇게 크고 눈에 띄는 색 옷을 입었는데 안 보이는게 더 어려운 거 아닌가? 진짜 눈이 멀었네.황씨는 씩씩거리며 원경릉 부부의 뒷모습을 보며 순간 쫓아가야 할지 말지 고민했다.그때 빠른 걸음으로 부부가 다시 오더니 원경릉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작은 목소리: “따라 오시겠어요? 뒤를 밟으신 거예요?”“발자국 소리를 못 들었으니 뒤를 밟으신 건 아닐 거야.” 우문호가 저음으로 말했다.원경릉이 ‘어머’하더니, “요즘 제가 귀가 어두워졌지 뭐예요, 진짜 임신하면 삼 년은 바보가 된다더니.”우문호가 느긋하게: “약간 바보스러우니까 얼마나 좋아, 넌 좀 더 바보스러워야 해. 너무 똑똑하면 다루기 힘들다니까.”“아직도 나를 다루려고?” 원경릉이 눈을 흘겼다.우문호가 얼른: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입버릇이 튀어나와 버렸네요, 아내님 고정하세요.”“맞다, 진북후는 도착했나?” 원경릉이 갑자기 그 일을 떠올렸다.우문호가: “모레일걸. 나도 들은 거야. 신경 안 써서.”진북후의 입성을 계속 주목하고 있으라고 사람을 시켰을 뿐이다.큰 적을 앞에 두고 있을 때처럼.원경릉이: “그래, 나귀빈 사건은 재상께서 어서 해결하셨으면 좋겠다.”나귀빈 얘기를 꺼내자 우문호는 여전히 좀 갑갑한 기분이 들며, “지금 난 아무 쓸모없는 쓰레기같아.”원경릉이 돌아서 우문호를 껴안고, “불쌍한 왕야, 나때문에. 원래 경조부에서 처리하면 될 일인데, 만약 내가 후궁 건을 반대하지 않았으면 왕야가 아바마마께 쫓겨날 일도 없었을 텐데.”“너랑 무슨 상관인이야? 원래 정직상태로 조사하는 거였어.” 우문호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원경릉이 측은하게 여기는 게 기뻐서 억울한 표정을 짓는다.두사람이 잠시 서로 끌어안고 있을 때 조어의의 목소리가 저쪽에서, “왕야, 절제하세요, 절제!”원경
위왕비 진찰손왕비가 열 받아서 말했다. “아니, 위왕비는 어쩜 그렇게 바보 같아요? 어휴, 셋째도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나 봐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고지(故知)가 미끄러져서 유산기운이 있다며, 어젯밤에 셋째는 계속 고지 곁을 지키느라, 세상에 위왕비 생사에는 신경도 안 쓰고 보러 가지도 않았다고 해요. 위왕비 혼자 고통을 참고 있어요.”다리가 부러진 고통을 생각하니 마음의 빗장이 풀어졌다.게다가 의원들도 마땅히 효과가 좋은 진통제가 없고, 한약의 진통 효과는 조금씩 천천히 들기 때문에, 다리가 부러진 사람 입장에선 확실히 힘들고 고통스럽다.손왕비가 원경릉에게 간절한 목소리로: “통증을 멈추게 할 수 있죠? 가서 좀 봐줘요.”원경릉이 고개를 끄덕이며, “네, 그럼 같이 가요.”기왕비가 원경릉을 흘겨보더니, “초왕비는 어쩜 쓸데없는 일도 그렇게 잘 해요? 그건 다른 집 부부 사이 일이예요.”원경릉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집 부부 사정을 물어보러 가는게 아니라 위왕비 다리 상처를 보고 통증을 멎게 해주고 싶을 뿐이예요.”기왕비가 구시렁거리며 “그때 나를 치료해 달라고 할 때는 그렇게 애를 쓰게 만들더니, 이번엔 아주 알아서 찾아가네요.”원경릉이 웃으며 말했다. “위왕비는 저를 해친 적이 없거든요.”기왕비는 씩씩거릴 뿐 아무 말이 없다.정오를 알리는 종이 울리자 우문호는 사람을 시켜 원경릉에게 오늘은 못 온다고 알렸다. 황제폐하께서 기왕이 만조백관을 이끌고 성문에서 진북후가 입성하는 것을 맞이하라는 어명을 내리셨기 때문이다.원경릉은 약상자를 들고 손왕비와 마차에 오르는데 기왕비가 의외로 같이 가자고 해서 손왕비는 뜻밖이라며 놀랐다.손왕비가 담담하게 답했다. “가도 좋은데, 기왕비는 가서 가급적 입을 다물고, 위왕비에게는 말 걸지 마세요.”기왕비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내가 밥 먹고 할 짓이 없어서 헛소리 할까 봐요? 전 원래 좋은 사람이예요.”그런데 사실이 그렇다.기왕비는 원래 표면적으로 아주 좋은 사람으로, 좋은 말도 상
누가 위왕비를 밀었나?다리는 이미 싸매서 고정돼 있었지만 골절이 있어 아마 골절통때문에 아픈 것일 것이다.손도 상처가 있는데 위왕비 말이 뛰어 내릴 때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감쌌지만 충격이 너무 커서 이마에 상처가 났다고 했다.원경릉이 위왕비에게 진통주사를 놓고 복용할 약을 몇 알 처방해주었는데, 주사를 놓을 때 원경릉이 전에 줬던 약을 베개 밑에 두고 안 먹은 걸 발견했다.위왕비 자신도 들킨 걸 알고 곁눈질 하더니 난감해 하며: “그게…… 나중에 어의가 처방한 신경안정제를 복용해서, 서로 상충될 까봐 지어 주신 약은 안 먹었어요.”원경릉이 미소를 지으며: “괜찮아요, 가지고 계세요.”진통주사를 놓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위왕비가 의아하게 여기며: “진짜 별로 아프지 않네요.”방금 위왕비는 주사를 맞는 것에 상당한 거부감이 있었던 것이, 위왕비는 침이나 뜸을 싫어했다.게다가 이 침은 크고 안에 물도 있다.손왕비는 그제서야 안도하며 잔소리하길: “이거 봐요, 아직도 사람을 못 믿는 다니까요.”손왕비는 잔소리를 하다가 갑자기 눈가가 붉어지더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손목 긋는 거로도 모자라서 다락집에서 뛰어 내린 거예요? 절 놀라게 해서 죽일 작정인 건가요?”위왕비가 멍하게, “최근 환각을 자꾸 봐요, 저도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원래는 그냥 나가서 바람을 쐬며 정신을 차리려고 했을 뿐인데, 어떻게 된 건지, 환각이 생기더니 뒤에 누가 미는 게 느껴지고 내가 아래로 뛰어내렸지 뭐예요.”손왕비가 대경실색하며 연달아 묻는데: “누가 위왕비를 밀었어요? 누구죠? 본 사람 있어요? 위왕비는 스스로 다락에 올라간 거예요? 어디 다락이에요? 다락에서 어떻게 뛰어내릴 수가 있었죠?”위왕비가 고개를 저으며, “진짜 누가 민 게 아니라, 환각이었어요, 사실 저 매번 손목을 그을 때마다 환각을 보곤 하거든요. 그 뒤로 저도 제가 뭘 하지는 모르겠더니 깨나고 보니 이미 자살시도를 했더라고요.”손왕비가 이상하게 여기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죠? 어젯밤
위왕비가 떨어진 다락“초왕비도 누가 민 거 같아요?”초왕비가 말이 없는 것을 보고 손왕비가 흠칫하며 물었다.원경릉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음, 저는 기왕비의 의견에 찬성해요. 제가 그 다락에 가봐도 되나요?”“그럼요, 그런데 초왕비는 조심하셔야 해요.” 위왕비의 얼굴이 갈수록 창백해 지며 시녀 하나를 불러 원경릉을 네모칸 다락으로 모셔가라고 했다.왕비 셋이 모두 가고 만아와 사식이도 자연스럽게 따라갔다.네모칸 다락은 높은 편은 아니어서 눈대중으로 높아봐야 두 장(6m, 1丈이 약 3m)남짓으로 일반 1층보다 한 층 정도 더 있는 높이다.네모칸 아래는 사실 일종의 정자로 남북 양면에 벽돌로 담이 쳐져 있으며 동쪽과 서쪽엔 두 개의 큰 대들보가 서있어 이층을 받치고 있다.계단은 안에서 올라가게 되어 있고 휘장이 양쪽으로 갈라지는 방식으로 목재로 된 계단은 견고하고 중후해서 걸을 때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2층으로 올라가니 그곳은 다락으로 안에 방이 하나 있기 때문에 현대의 건축 구조로 봤을 땐 다락 바깥에 발코니를 설치한 모습으로 발코니에 앉아 바깥 경치를 볼 수 있다.난간은 낮아서 대략 8cm 정도로 위험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원경릉은 밖을 쓱 한 번 보고 안으로 다시 돌아가 보니 팔선교자상에 의자 몇 개가 놓여 있다.원경릉은 발코니 반대쪽 의자 팔걸이에 손을 내려 놓았다. 이 의자 삐뚤어졌다.모든 물건이 꽤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는데 유독 이 의자만 삐뚤어져 있다.마치 누군가 부딪혀서 의자가 비뚤어졌는데 급하게 자리를 뜨느라 바로 잡아 놓지 못한 것 같다.원경릉이 갑자기 손왕비에게, “듣자 하니 고지가 어젯밤 유산기가 있었다 던데 떨어져서 그런 건아이고요?”“모르겠어요.” 손왕비가 한탄하듯 말했다.원경릉이 미소를 지으며, “어쨌든 고지가 위왕 전하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데, 유산기라면 우리가 병문안을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손왕비가 눈을 부릅뜨고, “아직도 고지한테 문병을 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나는 고지가 차
고지를 찾아간 왕비들온고각 안에서 시중 드는 사람은 어림잡아도 열 몇명은 돼 보이는 게 왕비의 방과 비교하니, 비슷한 수준은 커녕 한참 더 많다.원경릉 등 사람이 들어가자 누가 바로 안으로 들어가 보고하려 했다.원경릉이 가는 길을 막고: “첩이 유산기가 있다니 맞으러 나올 필요 없이 우리가 들어가면 돼.”한 어멈이: “왕비마마, 고지부인은 첩이 아니십니다.”“부인?” 손왕비가 차갑게 비웃으며, “언제 부인이 되셨나 그래? 셋째도 참 너무 하네, 첩을 들이는 큰 일에 형수인 나와 상의 한마디 없을 수가 있나. 그리고 부인과 첩이 무슨 차이야? 후궁도 아내 축에 못 드는데.”손왕비의 말을 듣고 어멈이 나서서 방자하게 굴지는 못해도 눈을 흘기며: “왕야는 어쩌면 고지부인과의 사적인 관계를 외부 사람에게 알릴 필요 못 느끼셨나 봅니다.”“너……” 손왕비가 열 받아 손부터 올라가며, “네 이 년, 어디서 함부로 입을 놀리느냐.”기왕비가 덤덤하게 손왕비를 막으며, “손왕비마마 역정 내실 게 뭐 있습니까? 어멈 말이 맞네요, 고지 부인이던 첩이던 어차피 외부사람인 것을, 우리 황실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어멈이 고개를 들어 기왕비를 째려보려다 기왕비의 안색은 창백하나 냉정하고 엄숙한 태도를 보고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한다.어멈이 다시 원경릉을 보니 배가 불렀는데도 귀티가 흐르고 초왕비라는 사실도 알고 있어 이 사람은 인상이 좋다는 생각에: “초왕비 마마, 고지부인 몸이 약하셔서 왕비마마께서 좀 봐 주시기를 청합니다.”어라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원경릉이 차갑게: “내가 왜 봐줘야 하지? 외부 사람에 불과한데.”어멈이 당황해서 원경릉의 냉정한 얼굴을 보고 다시 말을 꺼내지 못한 채, 세 사람을 데리고 들어갔다.고지는 이미 침대에서 일어나 침대 곁에 점잖게 서서 예를 갖추며, “고지, 왕비마마를 뵙습니다.”고지는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배는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에 발엔 흰색 실내화를 신고 폭이 넓은 옷으로 편하게 몸을 감싸고 있어 한층 약하게 보였다
위왕비 추락 사건의 진실“어떻게 유산기가 있는 거예요?” 원경릉이 물었다.고지는 입꼬리에 경련을 일으키며 억지 웃음을 웃으려 했으나 마음 같지 않게 굳어버렸다.“덜렁거리며 걷다가 넘어져서 왕비마마를 심려케 했네요.”원경릉이말했다. “당신 걱정 안 해요, 나한테 복부 좀 보여 줄 수 있어요?”고지는 고개를 들고 경악스런 표정으로, “뭐라고요?”“배를 부딪힌 게 아닌지 알고 싶어서요.” 원경릉이 말했다.고지가 난감해 하며, “그렇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죠? 왕비마마 이건 신첩을 모욕하는 겁니다.”“모욕이라니요, 위왕비가 사람에게 떠밀려서 다락에서 떨어졌고, 전 당신이 범인인지 아닌지 알고 싶은 겁니다. 한 번 보여줘요. 만약 당신이 아니면 당신에게 사과하죠” 원경릉이 말했다.고지가 버럭 화를 내며, “왕비마마 이건 아니죠. 증거가 있어야 조사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만약 아무 근거도 없이 신첩이 왕비마마를 밀었다고 하신 것도 모자라 신첩의 배를 검사하시겠다니, 이게 무슨 행패입니까?”원경릉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맞아 이건 이런 행패야. 사식아, 만아야, 가서 그녀의 복부나 옆구리 부분에 멍이 들었는지 확인해 보아라.”“너무 하십니다.” 어멈이 막무가내로 막아 서고 뒤에는 분노가 끓어올라 눈물을 떨구는 고지가 보인다. 어멈이 원경릉에게 말했다. “왕야께서 누구도 고지 부인이 가만히 요양하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왕비마마 나가주세요.”사식이가 한 손으로 어멈을 밀치고 쩌렁쩌렁한 소리로 소리쳤다. “네가 뭔 데 감히 왕비마마의 명령을 가로막아? 목숨이 몇 개나 되는 줄 알아?”만아가 바로 고지에게 걸어가자 원경릉은 고지의 멍을 확인하고 싶다는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만아야, 조심해. 그녀는 무술도 할 줄 알고, 심지어 네 환술도 알고 있어.”만아가 듣고 한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가리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팔목을 잡고 그대로 침대에 눕혔다.사식이가 얼른 앞으로 다가왔다. 느슨한 옷 매무새를 하고 앙탈부리는 고지의
죄를 시인한 고지고지는 울며 몸부림을 치고 힘껏 몸을 뒤로 빼며, “초왕비마마, 절 놔주세요. 마마께서 잡아당긴 손목이 너무 아파요, 아야, 너무 아파.”고지가 하도 구슬프게 울어서 밖에 있는 사람이 모르고 들으면 원경릉이 고지를 때린 줄 알겠다. 몸종들이 안달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원경릉을 말리려 하자 사식이와 만아가 원경릉 앞에 서서 소리쳤다. “누구든 감히 왕비마마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그년의 손모가지를 분질러 놓을 테다.”고지가 울며 말했다. “초왕비마마, 귀하신 신분으로 어찌 신첩과 다투십니까? 신첩이 잘못했습니다. 마마께서 신첩이 위왕비마마를 밀었다고 하니 신첩이 그런 것이겠지요. 신첩은 변명하지 않겠습니다.”기왕비가 얼굴색도 변하지 않고 앉아 있고, 반대로 손왕비는 나와서 한 대 칠 기세다. 이 거짓말쟁이 년.원경릉이 고지를 노려보며 울어서 콧물이 나올 지경이 되자 비로소 천천히 고지를 놓아주더니 만아에게: “청동거울을 가져오너라.”만아는 원경릉의 의도를 모르지만 하여간 가서 큰 청동거울을 가져왔다. 원경릉이 물러나 느긋하게 옷 매무새를 고치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에게 자기 모습을 보여줘라.”만아가 큰 청동거울을 고지 얼굴 앞으로 밀자, 고지는 순간 울음을 멈추고 난감하다는 듯 뒤로 물러났지만 청동거울이 상당히 커서 고지가 뒤로 갔어도 거울에 비친 눈가가 벌겋고 콧물이 흐르고 머리를 산발한 여인을 볼 수 있었다.고지는 숨고 싶지만 숨을 데가 없고 분노의 눈빛으로 원경릉을 쏘아보며, “초왕비마마는 제가 자신의 용모가 사람 같지 않다는 것을 알기를 바라셨습니까? 그저 외모만 보다니 정말 천박하네요.”원경릉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거울에서 본 모습은 네 외모가 아니라 오히려 네 마음이야. 추하지? 네 스스로도 보기 싫지? 고지야, 네가 한 짓을 가지고, 널 짐승이라고 욕하면 짐승한테 모욕이야.”고지가 주먹을 꼭 쥐고 눈 밑이 바르르 떨리는데 억울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왜 절 괴롭히세요? 위왕비에게 불공평
위왕비 사건, 손왕비가 나서라고지는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배를 만지고 고개를 들어 어멈을 보더니 붉어진 눈으로, “어멈, 사실대로 말해봐, 내가 왕비한테 미안한 거 맞지?”어멈은 고지가 지금 총애를 받는 줄 알고 비위를 맞추는 것만 생각해서: “부인, 미안하고 아니고 하는 게 어디 있겠어요? 왕야 같은 멋진 남자를 어느 여자가 보고 안 반하겠습니까? 게다가 왕야도 정말 부인을 좋아하시고요.”어멈은 고지가 말이 없는 것을 보고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왕비 자신도 잘 모르나 본데 사실 왕비는 정비니 부인이 아들을 낳는다고 해도 왕비를 어머니라고 부르게 되지요. 명분상 같은 위왕 전하의 아들이나, 왕비 자신이 임신하고 유산한 아이보다 살아있는 부인 아기가 훨씬 낫지요.”고지는 이 말을 듣고 몸서리를 치며: “내가 낳은 아들을 어떻게 다른 사람을 엄마로 알게 할 수가 있어?”어멈이 당황해서, “부인, 이것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고지는 잠자코 있는데 속이 쓰렸다.그래, 고지가 또 총애를 입는다 해도 경국 명분이 없잖아.앞으로 아이가 태어나면 왕비를 어머니라고 불러야 한다.고지는 잠시 수심에 잠겼다가 다시 원경릉의 말을 떠올리고 더욱 마음이 힘들어졌다.원경릉과 왕비들이 나가자 손왕비가물었다 “내일 진짜 입궁해서 태후마마께 이 일을 보고할거야?”원경릉이 웃으며 답했다 “제가 입궁하는 건 아니고, 둘째 형님 당신이요.”“내가?” 손왕비 놀랐다.“맞아요, 전 지금 입궁할 수 없으니 내일 궁에 가셔서 태후마마께 말씀해 주세요. 위왕이 강제로 일반 백성의 딸을 위왕부에 남게 했는데 그 여자는 원래 원하지 않았다고 말이예요. 태후마마께서 어찌 하시는 지 보세요.”손왕비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년이 안 원하긴요? 내가 보긴 아주 여기 있고 싶어 안달이던데.”“고지 마음 속에 희망 여부는 신경 쓰지 말자구요. 오늘 자기 입으로 원하지 않았다고 했잖아요. 이 말은 우리 셋과 사식이가 안에서 같이 직접 들었으니 고지도 발뺌하기 힘들 겁니다.”
위왕이 거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저는 돕지 않습니다. 택란이 폐하를 사모한다고 말하거나, 혼인을 하고 싶다고 하지 않는 한, 꿈도 꾸지 마십시오!”“그럼 난 기다리겠소!”경천이 답했다.위왕은 그의 눈빛에서 보이는 익숙하고도 강한 결단력을 보며 말했다.“정말 고집이 세시군요. 대체 어찌 말해야 할까요? 세상엔 수많은 여인이 있습니다. 택란보다 더 뛰어난 여인도 있을 텐데, 어찌 택란만 붙잡고 이러십니까?”경천의 목소리는 매우 부드러웠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확고하게 느껴졌다.“나는 오로지 하나만 바라볼 뿐이네. 내 생애 다른 여인을 얻을 생각도, 후궁을 들일 생각도 없소. 택란만 있으면, 나는 그 누구도 마음속에 두지 않네.”위왕과 안왕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경천의 말에 다소 감동하였다.그러나 약속을 하는 것은 쉽지만,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스무살, 서른이 되어서도 오늘 한 말을 기억하길 바랍니다.”위왕이 말했다.그러자 경천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택란이 돌아오자, 다시 입을 열었다.“어제 내가 한 일은 조금 어처구니없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말고, 전부 없던 일로 생각해라.”“예!”택란은 조금 어리둥절했다. 그는 여전히 시선을 마주하기도 힘들 정도로 뜨거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우리는 이제 좋은 벗이 될 수도 있지 않느냐? 나를 벗으로 생각해 줄 것이냐?”경천이 미소를 지으며 택란을 바라보자, 그녀가 웃으며 대답했다.“그럼요. 저희는 벗이니깐요.”위왕은 그제야 경천이 그렇게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는 택란에게 계속 압박을 가하지 않았다. 두 나라가 협력하는 상황이니, 요구를 제기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그들이 궁을 떠나려 하자, 경천은 말리지 않고 두둑한 선물을 준비해 그들을 궁 밖으로 모시도록 했다.그들이 떠난 후, 경천은 통천각에 올라가 그들이 멀어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찌푸리고 있던 미간을 천천
“이득을 취할 수는 있지만, 약속은 해줄 수 없다.”위왕이 웃으며 말하자, 택란또한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하하하. 참 현명하십니다!”“그럼! 국사는 국사, 개인적인 일과 섞여서는 안 된다.”택란도 동의했다.“그럼 저도 오늘 밤 장관에 머물겠습니다. 내일 저와 함께 궁으로 들어가시지요.”“그래, 걱정하지 마라. 내가 함께 가마.”안왕이 말했다.택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고 물러나, 주 아가씨와 냉명여를 데리고 나갔다.다음 날 그녀는 두 친왕과 함께 동행하였고, 궁에 도착하자마자 삼 태감이 직접 그들을 어서방으로 모셨다.경천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듯, 안색이 다소 어두워 보였다. 하지만 택란을 보자 눈동자, 그의 눈망울은 여전히 빛이 났다.협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러 왔기에, 안왕과 위왕도 편견을 내려놓았다. 경천이 택란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며, 두사람은 못내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그들 역시 젊었었고 사랑에 빠졌던 적이 있었기에, 그 사람을 위해 유치하고 때로는 무서운 짓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경천이 한 일도 그저 좋아하는 사람을 얻기 위해 노력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비록 책략이 다소 대담하긴 했지만, 혈기 왕성한 나이니 이해할 만했다.경천은 상석에서 내려와 직접 두 친왕에게 사과를 올렸다.“어젯밤 내내 생각해 보니, 어제 일로 두 분께 큰 불편을 가져다주었을 것이오. 부디 용서해 주시오!”위왕은 급히 일어나 예를 올리며 말했다. “폐하, 그렇게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어젯밤 일은 저희도 이해합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앞으로 두 나라가 자주 오갈 것이라는 점입니다. 작은 일이니,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경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는 말이오. 앞으로도 자주 오가며 지낼 것이네.”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택란을 힐끗 쳐다보았다. 택란은 계획서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뜨거운 시선을 느낀듯 고개를 들었다.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미소를 지었고, 하얀 볼도 살짝 불그스레해졌다.두 나라 모두 광물 채굴
위왕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혹시 복수하려는 것이냐?”“복수가 아니라, 그저 사실을 말할 뿐입니다.”안왕은 그에게 책임을 떠넘겨 혼자 감당하게 한 위왕을 보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위왕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어찌 다섯째에게 설명할지 생각해 보거라. 보책은 아직 네 손안에 있잖냐.”안왕은 여전히 두꺼운 보책을 손에 쥐고 있었다. 잃어버릴 수 없는 귀한 것이지만, 가만히 들고 있기도 거슬렸다.이렇게 골치 아픈 상황이 생길 줄 알았다면 차라리 꾀병을 부리고 위왕 혼자 오게 한 것이 더 나았을 텐데 말이다. 그렇게 각자 방으로 돌아가 목욕을 한 후, 막 침대에 누웠을 때 택란이 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두 사람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고, 바로 택란을 만나러 나갔다.안왕은 보책을 가지려 했으나, 택란에게 넘겨받으면 곧 금나라 황후임을 인정하는 셈이 되므로, 절대 넘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적어도 어린 황제는 아직 그들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택란은 두 분 큰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린 후 자리에 앉아 말했다.“큰아버지, 오늘 일은 아바마마께 절대 말하지 마십시오.”안왕도 원하던 바였기에 다급히 답했다.“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먼저 네 아버지한테 숨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예. 저도 그것이 걱정입니다.”택란의 가장 큰 걱정은 바로 아버지였다.“어린 황제도 참, 어린 시절의 약속마저 진지하게 받아들이다니… 설령 너와 혼사를 약속했다 해도, 네가 승낙하지 않을 것 아니더냐.”안왕이 말하자 택란은 잠시 머뭇거리며 말했다.“그때 이미 동의했었습니다.”다만 그때는 그저 그를 달래, 그의 상처가 심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 뿐이었다.“승낙했다니?”안왕과 위왕은 서로 놀란 표정으로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면 이 일은 전적으로 어린 황제의 탓도 아니다.“하지만 넌 그때 겨우 여덟, 아홉 살이었다. 그저 아이들의 장난일 뿐일 테니, 동의했다고 해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도 된다.”위왕이 재빨
“폐하, 공주께서 폐하가 드리신 선물을 받지 않으신 것입니까?”언제 올라온 건지, 진이는 어느새 그의 곁에 서 있었다.“응.”경천은 뒤돌아 상자와 두 개의 옥패를 바라보았다. 그가 오랜 시간 동안 배우며 수많은 옥을 망친 끝에 겨우 지금과 같은 모습을 조각해 낸 것이었다.하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속상해하지 마십시오. 공주께서 아직 어리셔서 폐하의 노고를 다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깐요.”진이가 위로하자 경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어서 받지 않는 것이다.”진이가 잠시 멈칫했다.“너무 잘 안다니요? 그런 것 같진 않아 보였는데요.”경천은 이미 실망한 기분을 떨쳐버렸고, 대신 굳건한 의지를 다졌다.“진아, 나는 그녀의 뜻을 완전히 이해했다. 그녀는 먼저 좋은 황제가 되어주기를 바란단다. 이곳을 떠나기 전, 나에게 한 나라의 군주라 하지 않았냐? 황제로서 역할을 다하기를 바라는 것이다.”“아... 그런 것입니까!”진이는 비록 이해하지 못했지만, 황제가 속상해하지 않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택란 일행은 궁을 나섰다. 냉명여가 그녀에게 물었다.“누나, 어찌 황제가 주신 옥패를 받지 않으시나요? 그를 싫어하시는 것입니까?”택란은 웃으며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는 절대 그를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강단 있는 황제이고, 뛰어난 통치로 금나라가 정권 이양 위기를 넘길 수 있도록 했다. 게다가 그는 두 나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두 나라에 평화를 가져왔다.”“그럼, 어찌 그의 선물을 받지 않으셨습니까?”냉명여는 다른 사람의 선의를 함부로 거절하면 안 된다고 배웠기에, 그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택란이 답했다.“그 옥패가 약속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명여야, ‘약속’이라는 말은 무거운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약 네가 그것을 이행할 능력이 없다면, 함부로 약속하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하지만 그도 누나와 혼사를 올리겠다고 한 말에 대한 약속을 지키려는 것 아닙니까?”“그래. 하지만 나
경천은 그녀의 말을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택란이 말했다."어쩌면 5년 후에는 오늘 한 모든 일이 어리석고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좋아하는 여인을 만나게 될 때, 그 감정이 단순한 사모인지 은혜 때문인지 알게 되실 것이고, 오늘의 행동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경천은 단 한 마디만 응한 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태도가 이렇게나 분명하니, 절대 그런 말로 그녀를 얽매여 부담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늘 한 모든 일은 그의 결정이며 그의 태도였다. 그녀는 몰라도 되고,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긴 하지만, 그는 언제나 그녀를 기다릴 것이었다.그리고 그녀의 인정을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택란은 한숨 놓은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해한다니 다행입니다.""알고 있다."경천의 얼굴은 약간 창백했지만, 애써 미소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삼 태감이 책자를 가져왔다. 경천은 그것을 택란에게 건넸고, 택란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았다. 그가 제시한 조건은 매우 공정했으며, 심지어 약도성에 이익을 양보한 정도였다.책자를 접은 후, 그녀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약도성을 생각해 줘서 고맙습니다. 두 나라의 원한을 풀기 위해 애써줘서, 그리고 약도성의 백성과 조정이 화해할 수 있도록 도와줘서 고맙습니다.""알고 있었던 것이냐?"경천이 다소 놀라며 묻자, 택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예. 알아봤습니다.""오해하지 마라. 그저 너를 위하여 한 일이 아니니, 부담 갖지 않아도 된다."그는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해명했다.택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오해하지 마시지요. 저는 정말 부담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를 위해 이렇게 많은 일을 해줘서 고마울 뿐입니다. 오늘도 사실 많이 감동했습니다. 다만, 저는 아직 혼사에 대해 논할 나이가 아니고, 사적인 감정보다는 다른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 어리고, 앞으로 혼사를 하더라도 반드시 아바마마
손에 쥐니, 차가운 촉감이 느껴졌다. 그 옥의 차가운 느낌이 서서히 스며들자,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놀라운 표정을 지었을 때, 그는 미세하게 안도하며, 그녀가 좋아할 것이라 믿었다."직접 만든 것입니까?"택란은 마음에 든 듯 손에 꼭 쥐고 있었다. 그녀의 밝은 눈동자에는 존경이 가득했다."응!"그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마음에 드냐?""예. 정말 마음에 듭니다!"택란도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빛나는 미소를 지었다.그러자 그가 약간 흥분된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이걸 직접 나에게 선물해 줄 수 있느냐?""예?"택란이 잠시 멈칫하며, 놀라 물었다."저에게 준 선물이 아닙니까?"그가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으로 소매 주머니에서 또 다른 옥 조각을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으며, 진지하게 말했다."이건 내가 네게 직접 주고 싶은 것이다."택란은 그가 손에 든 것을 바라보았다. 옥질도 동일하게 맑고 투명했고, 손바닥의 선도 보일 정도였는데, 그 조각에는 경천의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옥에는 미소를 짓고 있는 준수한 그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고,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입고 있던 옷이 새겨져 있었다. 비록 색은 알 수 없었지만, 자수가 명확하게 새겨져 있었다.그녀는 기억력이 매우 좋았기에, 그때의 기억이 선명히 떠올랐다.그녀는 두 개의 옥을 손바닥에 놓았다. 그제야 그녀는 옥에 3년 전 그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가 시간을 되돌려 3년 전 만남을 담은 것이었다!경천은 택란을 바라보며, 애써 차분함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심장은 거의 목구멍까지 올라올 듯했다.택란이 두 개의 옥을 서둘러 상자에 다시 넣으며 말했다."두 개 모두 오라버니께서 먼저 가지고 있으세요."경천은 눈시울을 붉히며 다시 건네받은 상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내리깔며, 애써 실망이 드리운 눈빛을 숨겼다.삼 태감이 정교한 음식을 올려놓았고, 모두 택란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알 수 없는 작은 흥분을 억누르고, 표정을 고쳐서 천천히 돌아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북당 백성인 란이 언니와의 혼사는 다 거짓인 겁니까?"경천의 동공이 흔들렸다."혹시... 화가 난 것이냐?""아닙니다."택란이 고개를 젓자, 밝은 빛이 그녀의 깨끗한 얼굴에 비쳤고, 고르게 정리된 이마 밑의 눈동자는 다시 차분해졌다."그런데 어찌 사람을 시켜 저를 찾고 있다고 직접 저게 소식을 전하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편지를 보냈다면, 저도 오라버니를 만나러 왔을 것입니다. 심지어 혼사에 하객까지 청하며 일을 이렇게나 크게 벌였는데, 대체 어떻게 수습하려고 하십니까?"그는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천천히 그녀 앞에 섰다. 그러고는 그녀의 까만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수습할 필요 없다. 나는 이미 천하에 나의 황후가 우문택란이라고 선언했다. 나는 그녀가 어서 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택란은 순간 놀라하며, 굳어진 얼굴로 물었다.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경천은 그녀가 화가 난 것 같아, 마음이 내려앉았다. 그의 눈동자엔 어두운 그림자가 깔렸고, 이내 조심스레 물었다."응할 수... 있겠느냐?"택란은 잠시 망설였다. 기억 속의 그 소년이 지금 별빛을 받으며 그녀 곁으로 돌아왔다. 이전의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10년 후 그가 죽지 않으면 돌아와서 그녀를 부인으로 맞겠다고 열정적으로 말했었다. 그 열정이 가득한 목소리는 지금도 그녀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런 과거와 현재가 얽혀 버리자,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저는..."경천은 그녀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반응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얼굴을 조금 숙이며 말했다."지금 바로 대답할 필요 없다. 몇 년 후라도, 10년, 아니 20년 후라도 괜찮다.""하지만...""아니, 말하지 말거라."그는 방금까지만해도 가득찼던 자신감을 더 이상 보여줄 수 없
냉명유는 팔짱을 낀 채 검을 가슴 앞으로 옮기며, 차갑게 말했다."누님께서 어디로 가든, 저도 무조건 함께 갈 것입니다."“하… 하지만."삼 태감이 무척 난감해했다."그래. 함께 가자. 이 거월통천각이 정말 달을 딸 수 있는지 어디 가서 보자꾸나!"그러자 택란이 웃으며 말했다.주 아가씨는 조금 의심스러웠다. 정말 공주가 만나고 싶다면, 어찌 공주한테 이렇게 높은 계단을 오르게 할 수 있는가?그러고는 계단 위에 새겨진 난초꽃을 힐끗 보고는 순간 멈칫했다. 시선을 위로 올려보니, 계단의 각 층마다 난초꽃이 새겨져 있었다.황제가 자신의 그리움을 돌계단에 새긴 것이었다!택란도 계단을 오르며, 이 사실을 눈치챘다.게다가 각 난초의 형태와 크기는 매우 똑같았다. 처음에는 선이 조금 거칠게 느껴지긴 했지만, 후에는 점점 더 섬세하고 부드러워 보였다.이건 분명 같은 사람이 새긴 것 같았다. 그가 직접 조각한 것일까? 금나라가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지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잠시 후, 그들은 거월통천각의 가장 높은 층에 도착했다. 다행히 냉명여는 문 앞에서 멈추고 안까지 들어가지 않았다.택란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는데, 안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네개의 용 모양 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네 모서리에는 각각 올라가 쉴 수 있는 정자가 있었다. 정자에는 난간이 둘러져 있었으며, 가운데에는 탁자와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떠힌. 네 면에 걸려져 있는 대나무 커튼이 걷혀 있어, 사방에서 밖을 볼 수 있었다.그 사이에서 청색 비단옷 차림의 남자가 통천각 옆 난간에 기대어 택란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매우 긴장한 듯 손과 발을 살짝 떨고 있었다. 별빛처럼 맑은 눈동자에 약간 숨이 가쁜 듯 보였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녀를 보자마자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재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며 가장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에,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이 만남을 특별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반짝이는 별들도 그중 하나였다.하지만
손님들이 하나둘씩 떠나자, 경천 황제는 서둘러 궁으로 돌아가 푸른 비단옷으로 갈아입었다.옅은 청색 옷자락에, 소매 끝에는 난초꽃이 수놓아져 있었고, 나머지 부분은 어두운 구름 문양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이 옷감은 북당에서 온 것이었다."폐하, 꼬마 은인께서 궁문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삼 태감이 와서 보고했다."좋소."그는 거울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깊은숨을 내쉬었다."택수운천으로 가겠네."택수운천은 그가 즉위한 후, 궁궐 안에 지은 새 궁전으로, 세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궁전 옆에는 거월통천각이 있었는데, 이는 량주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거월통천각 안에 있으면 마치 손바닥에 달을 담을 수 있을정도로 웅장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거월통천각에서 멀게는 약도성과 량주가 인접한 산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녀가 생각날 때면, 늘 거월통천각의 가장 높은 층으로 올라가 풍경을 멀리 바라보곤 했다."진이야, 너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해 본 적이 있느냐?"그가 준수한 옷차림으로 난간에 기대어 먼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바람이 서서히 불며 청색 옷자락이 휘날리자, 옷자락의 네 끝에 박힌 고급스러운 야명주가 그의 선명하고 잘생긴 얼굴을 비추었다.그때, 저 멀리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궁 시위를 따라, 아치과 복도를 지나 거월통천각으로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젊은 금군 통령 진이가 그의 모습을 보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런 적 없습니다.""사모의 마음을 품어보거라. 떨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느낌만큼 좋은 것이 없다."그는 그녀를 멍하니 보며 말했다. 천천히 다가오는 탓에 그녀의 얼굴이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13세 전까지의 그의 인생에는 나라와 백성들 뿐이었지만, 13세 이후 그의 인새은 온통 그녀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금 그녀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진이는 황제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다가오는 세 명을 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