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못드는 원경릉과 희상궁정후도 자기가 왜 이리 재수에 옴이 붙었는지 알다 가도 모를 지경이다.예상대로 잘 해왔다. 딸을 초왕부에 시집 보내려고 계획을 세웠을 땐 주명취란 귀인이 나타나 도와줘서 성공했다.혜정후와 혼사도 합당하게 매듭지어가고 있었기에, 정후는 초왕의 장인이자, 혜정후의 장인으로 주씨 집안과 인척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는데 어쩌다가 지금 아무것도 건진 거 없게 됐을까. 딸은 퇴물이 돼서 반품됐으니 앞으로 다시 누구에게 시집을 보낼 수 있기나 할까? 어느 대가집에서 원경릉을 원할거야? 애비 팔자가 세상에 불쌍하기도 하지!정후는 씩씩거리며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고 내일 원경릉이 혼자가 되면 꼬치꼬치 캐물을 생각이었다.원경릉도 거의 밤새 잠이 들지 못했다.전에는 누가 곁에서 자는 것이 불편했는데, 지금은 왕야가 곁에 없는 것이 낯설게 느껴 지다니 습관이란 무섭다.왕야 성격이면 어젯밤에도 궁에서 무슨 짓을 벌였는지도 모를 일이다.우문호는 원경릉이 이런 결정을 한 것을 원망할까? 분명 그럴 것이다. 우문호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모르니까. 이 사람은 존재 자체가 결점투성이다. 원경릉 외에 누가 그를 참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호 아가씨는 변경에서 자라 성격이 아주 부드럽지는 않을 게 틀림없다. 만약 정말 그녀와 혼인한다면 하하, 몸의 원래 주인인 원경릉을 만났을 때가 떠올랐고 우문호는 그녀를 매정하게 대했었다.하지만 둘의 성질은 자못 다르다. 그때 몸의 원래 주인인 원경릉은 분명 우문호를 비참하게 만들었기에, 원경릉에 대한 우문호의 태도는 아내에 대한 태도가 아니라 원수에 대한 태도였다. 당연히 매정할 수 밖에 없었다.하지만 호 아가씨는 비록 강요된 혼인이지만 주도적으로 우문호를 해친 게 아니고 둘 사이에 치열하게 싸울 만한 일이 전혀 없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원경릉은 오히려 잠을 들 수 없었다.사실 마음 속으로 우문호가 호 아가씨와 혼인할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지금 상황과 옛날의 양상이 서로 다르지만
“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황상께서는 저를 가둬두려고 하십니다. 다섯째는 황상께서 시키는 대로 할 것이고…… 지금 저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원경릉이 말했다.“이 일을 태상황께서는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희상궁이 말했다.희상궁의 말을 듣고 원경릉은 고개를 저었다.“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태상황님께 도움을 청할 수는 없습니다. 태상황께서는 이미 저를 여러 번 도와주셨습니다. 만약 이번에 또 저 때문에 태상황께서 황상과 대립하게 된다면…… 제가 두 분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그리고 황상께서 하신 일도 태상황께서 보시기에 잘못했다고 지적할 수는 없습니다.”“모든 일은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다릅니다.”희상궁이 말했다.원경릉은 물 잔을 들어 희상궁에게 건네었다. “이제 그만 자야겠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왕부에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외부와 차단되어 온전히 태아를 키우는 데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요. 상궁님, 내일 만아를 시켜서 회왕부에 약을 전달해달라고 해주세요. 그리고 기왕부에 가서 기왕비께 정후부로 곧장 오시라고 해주세요.”“예! 알겠습니다!” 희상궁은 물 잔을 탁자 위에 놓고 돌아와 침상 옆 장막을 내렸다.*다음날 원경릉은 날이 밝았는데도 잠을 자고 있었다. 원경병은 시녀에게서 원경릉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원경릉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오는 내내 어딘가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밤중에 돌아오다니? 게다가 후부에 며칠 더 묵는다고 하는 건…… 틀림없이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 원경병이 그녀를 깨우러 들어오자 만아도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원경릉이 눈을 뜨자마자 원경병이 수심 가득한 얼굴로 침상 옆에 서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야? 꼭두새벽부터 나타나서 나를 깜짝 놀라게 하는 이유가 뭐야!”원경릉은 침상을 손으로 짚으며 자리에 앉았다. 배가 불러오니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곤욕스러웠다.원경병은 침상에 엉덩이를 찰싹 붙이고 앉아 눈을 부라렸다.“혹시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세요. 여기서 듣겠습니다.”원경릉이 말했다.잠시 후 정후가 뒷짐을 지고 안으로 들어왔다. 정후는 검은 물고기 문양이 들어간 푸른색 두루마기를 입고 허리춤에 옥띠를 두르고 있었다. 그의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는 어딘가 모르게 아우라가 느껴졌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원경릉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후부에 온 이유가 뭐야? 여기에 금붙이라도 숨겨둔 것이냐?”“부친!”원경병이 침상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자 원경릉도 몸을 일으켜 부친에게 인사를 했다.정후는 밤새 원경릉이 왜 정후부로 왔는지 안절부절못했다. 그래서 그는 원경병이 자리에 있는 것도 개의치 않고 원경릉에게 쏘아댔다. “밤중에 정후부에 온 이유가 무엇이야 혹시 쫓겨나기라도 한 것이냐?”“부친, 딸이 왕부에서 억울함을 당해 친정에 위로를 받으려고 왔습니다. 부친께서는 딸이 온 게 그렇게 못마땅하십니까?”원경릉이 수심찬 표정으로 정후를 보았다.정후는 그녀의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잔말 말고 왜 왔는지 말해봐. 설마 쫓겨난 게냐?”원경릉은 한숨을 쉬었다. “부친께서 이혼장을 받으셨다면 이혼을 당한 거겠죠. 아직 이혼장을 못 보셨다면…… 사실 지금 상황으로는 이혼도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네요.”그녀의 말을 들은 정후는 탁자를 두드리며 화를 냈다. “이혼장? 무슨 일인지 말해 봐.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바로 쫓아낼 것이야!”“부친! 누이를 쫓아내신다니요! 누이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원경병이 원경릉 앞을 가로막았다.“네가 뭘 안다고 나서? 오밤중에 친정으로 쫓겨났으면 분명 누군가에게 미움을 사서 이리로 보내진 것 아니겠느냐! 왜 온 것이야 그 이유를 똑바로 말하거라!”“부친께서 진정하시거든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원경릉은 자리를 잡고 앉으며 정후를 보았다정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원경릉의 모습에 놀라 뒷짐을 지고 혀를 차며 욕지거리를 해대더니 결국 자리에 앉았다.“빨리 말하거라!”“제가 황상께 노여움을 샀습니다. 그래서 황상께서 저를 친정으로
정후가 정신을 차리자 눈앞에 근심에 가득 찬 원경릉 얼굴이 보였다.공포에 사로잡힌 정후는 원경릉의 손목을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정말 주명취가 황상께 그렇게 말을 했다는 것이야? 황상께서는 크게 노하셨느냐!”원경릉은 그런 정후를 연민의 눈빛으로 보았다.“부친, 만약 그 일이 아니라면 임신까지 한 저를 왜 친정으로 보냈겠습니까? 빨리 해결 방법을 강구하세요!” ‘주명취 가증스러운 계집…… 죽으려거든 혼자 죽을 것이지. 죽어서까지 정후부를 괴롭히는구나.’ 정후는 정신을 차리고 의자에 앉아 입술을 물어뜯다가 고개를 돌려 원경릉의 배를 쳐다보았다. 넉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녀의 배는 크고 둥근 것이 딱 딸을 품은 것 같아 보였다. 정후는 혀를 차며 고개를 떨구었다.정후는 원경릉이 딸을 낳는다면 앞으로 자신의 벼슬길에는 희망이 없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는 코 앞에 닥쳐온 정후부의 몰락에 머리가 지끈거리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후작으로 임명된 이후 그는 조상의 영전에서 지난날의 정후부 명성을 되찾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자신의 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알기에 온 힘을 다해 권세가 기우는 곳에 빌붙었으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다고 더 치고 올라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던 그 순간, 정후부는 몰락의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한동안 멍하니 원경릉을 바라보며 한숨만 푹푹 내쉬더니 축 처진 어깨로 밖으로 나갔다.원경릉은 그늘 진 그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문밖으로 나온 정후는 줄곧 의지해 온 둘째 노마님을 찾아 이 일을 상의했다. 원경릉이 친정으로 돌아왔기에 이 일은 정후부의 둘째 노마님이 책임을 지고 해결해야 했다.아침부터 정후가 찾아와 얘기를 하자 둘째 노마님은 깜짝 놀라 눈이 뒤집힐 뻔했다. 한참 후에 정신을 차린 그녀는 충격으로 손과 발이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온몸이 저릿저릿했다.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우리가 살기 위해서
“둘째 숙모님, 머리가 안 돌아가십니까? 경중에서는 그런 임산부를 찾기 힘들 수 있으니 저 멀리 돈 없고 힘없는 계집을 찾아야겠죠. 거지 소굴같은 곳을 잘 찾아보면 은화 몇십 냥만 주면 갓난아이뿐만 아니라 자기 며느리도 내어줍니다.”“맞네, 맞아. 이 일은 내가 잘 처리하겠습니다.” 둘째 노마님은 요즘 들어 집안의 기강을 잡는 첫째 노마님 때문에 맥을 못쓰고 있었기에 만약 이 일을 잘 처리한다면 그녀에게 기세가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정후가 떠난 후 원경병이 원경릉을 보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누이, 방금 한 말이 사실입니까?”원경릉은 빙그레 웃으며 “겁 좀 줬지.”라고 말했다.원경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왜 부친을 겁주십니까?”라고 물었다.“그래야 나를 귀찮게 할 시간이 없을 것 아니냐?”원경릉은 정후부가 소란스러워야 정후가 자신을 찾아와 귀찮게 할 확률이 적을 것이라 생각했다.“우리 조모를 뵈러 가자. 조모께 문안을 드려야지.”원경릉이 말했다.원경병은 누이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세세하게 물으려다가 조모를 뵙고 와서 다시 물어봐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이가 이른 아침부터 조모를 뵈러 가려고 하는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노마님께서도 어제저녁에 원경릉이 정후부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 일찍부터 원경릉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노마님의 정원에 들어서자 손씨 아주머니가 급히 나왔다.“아이고! 왕비님께서 오셨군요! 안 그래도 노마님께서 애타게 기다리셨습니다!”그 말을 들은 원경릉은 발걸음을 재촉해 안으로 들어갔다.노마님은 근심 가득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원경릉이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원경릉이 노마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려고 하자 손씨 아주머니가 그녀를 부축했다. “왕비, 무릎을 꿇지 마세요. 몸이 무거우시니 그냥 편하게 앉으세요.”노마님을 보기 전까지 평온했던 원경릉의 마음이 초조한 노마님의 표정을 보자마자 파도에 휩쓸리듯 흔들렸다.“조모!”“왕비,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노마님은
원경릉은 노마님의 말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감동했다.출가외인이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이 얼마나 큰 가문의 수치인가. 원경릉은 노마님께서 아무리 자신을 예뻐한다고 해도 이러한 상황에서까지 자신을 감싸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곤경에 처했을 때 내 편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더니 지금 이 상황에 딱 맞네.’노마님은 원경릉 눈에 구슬 같은 눈물이 맺힌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저 어린것이…… 얼마나 마음이 괴롭고 속상할 것인가.’“누이, 조모님 말씀대로 부중에서 아이를 잘 키우면 됩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마세요. 노마님도 말씀하셨지만 정후부로 온 이상 그 누구든 누이를 못살게 군다면 저 또한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원경병이 말했다.“다들 고맙습니다.” 원경릉이 말했다.원경릉은 왕부에 있는 사람들 중에 원경병과 노마님 빼고는 자신을 반기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물론 다들 대놓고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아 부중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가 아이를 낳으면 바로 버림받을 것이라고 떠들어댔다.둘째 노마님의 며느리인 난씨는 점심때 원경릉이 복도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쌀쌀맞게 소리쳤다.“버림받은 여자!”“걸레를 물었나! 거기 입 조심하십시오!”이 말을 듣고 사식이가 쏜살같이 튀어나왔다.난씨는 원래부터 강약약강한 성격으로 사식이가 버럭 하자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왕비한테 한 말 아닙니다.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세요?”“방금 우리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니라고요? 댁 말 따라 왕비께서 정말 버림받은 여자라면 당신들은 왕비의 손윗사람으로 감싸고 보살펴줘야 맞는 거잖아요! 하지만 당신들은 조롱의 기회라도 되는 듯 왕비를 경멸하고 있네요?”난씨는 말싸움이라면 어디서 지지 않았지만, 사식이의 거센 반발에 못 이겨 찍소리도 못하고 도망갔다.사식이는 달아나는 난씨의 뒷모습에 대고 큰 소리로 욕을 했다.원경릉은 웃으며 “됐어, 사식아 그만하면 알아들었을 것이야. 그만하거라.”라고 말했다.사식이는 진정되지 않
“가문은 중요하지 않아요. 사람이 좋으면 지금이야 별 볼 일 없더라도 나중에 반드시 두각을 나타낼 것입니다.”사식이가 말했다.“네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니 정말 뜻밖이야! 네 말이 맞다. 내가 살아보니 그렇더라고 가문은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것은 인품이야.” 원경릉은 사식이의 말에 진심으로 감탄했다.사식이는 금수저다. 설령 그녀가 정말 가난한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고 해도 평생 입고 먹는데 쓰는 것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기에 인품을 가장 중요하게 볼 수 있었다.“너는? 미래의 신랑에 대해 바라는 거 없어?”사식이는 고개를 돌려 만아를 보았다. “소인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만아가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떠돌이 신분에 밥 굶을 것이 제일 큰 걱정인 만아가 어디 여유가 있어서 혼인을 생각하겠는가.“상상도 못 해봐? 아무리 현실에 치여도 여자는 미래에 대한 꿈을 가져야 해! 특히 혼인 말이야! 어렸을 때 그런 상상 안 해봤어?”“음…… 저는 어렸을 때부터 충직하고 착한 사람과 혼인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제가 주부에서 쫓겨난 이후에는…… 삶이 퍽퍽해서 그런지 도통 연애나 혼인에 대한 생각이 안 드네요.”“쫓겨났어?”“아! 잘 못 말했네요. 쫓겨난 게 아니라 소인이 떠난 겁니다.”만아는 고개를 떨구었다. 사식이가 또 물으려고 하자 원경릉이 그녀를 막으며 “기왕비는 아직 오지 않았느냐?”라고 물었다.원경릉의 제지에 사식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직 소식이 없으시네요. 왕비님, 저는 사실 왕야께서 정후부로 오실 줄 알았습니다. 근데 왕야께서도 하물며 희상궁도 안 오시고! 왕비를 여기 두고 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겁니까?”오늘 아침에 희상궁이 왕부로 돌아왔는데 아직 후부로 오지 않았다.“희상궁께서는 분별력이 있으시니, 걱정마. 너는 나가서 기왕비가 오는 지 확인 좀 해보거라.”원경릉이 말했다.“예!”사식이가 밖으로 나갔다.사식이가 나가자마자 기왕비가 정후부 대문으로 기왕비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원경릉은 고개를 들고 기왕비를 바라보았다.“후회하십니까?”기왕비는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후회하지 않습니다. 이미 여기까지 와버린 것을 후회해봤자 뭐 합니까. 사람의 마음은 참 어렵습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최선을 다 했다고 그 사람도 나에게 최선을 다 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내가 준 만큼 받고 싶은 건 욕심입니다.”“그래서 기왕비께서는 진심으로 사랑하셨다는 겁니까?”기왕비는 원경릉의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사랑? 어쩌면 사랑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기왕의 어디가 좋습니까? 도대체 어느 부분이 기왕비의 마음을 빼앗은 겁니까?”“그 사람이 좋은 점이 있어서, 매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 남편이기에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겁니다.”“예? 그게 말이 됩니까?”“되지요. 더 필요한 게 뭐가 있습니까?” 기왕비가 의아한 표정으로 원경릉을 쳐다보았다. “그럼 기왕비께서는 아직도 기왕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기왕비 말대로 남편이잖아요.”“이제 아닙니다.” 기왕비의 눈빛이 차가웠다.“왜요?”“그가 저를 사랑하지 않아도 되지만 저를 죽일 수는 없습니다. 상대를 죽이고 싶어 한다면 그건 부부가 아니라 원수가 되는 거지요.” 기왕비의 눈빛이 한순간에 싸늘해졌다.‘사랑하던 사람이 원수가 되다니…… 이 얼마나 잔혹한 일인가!’원경릉은 기왕비의 말을 듣고 마음이 아팠다. 기왕비의 눈빛이 평정을 되찾고는 담담한 표정으로 원경릉을 보았다.“걱정 마세요. 초왕비와 다섯째는 원수가 될 일이 없을 테니까요.”“며칠 전까지만 해도 저보고 남자를 믿지 말라고 한 게 누구였지요? 기.왕.비?” 원경릉이 장난스레 물었다.“사람은 늘 경계해야 하는 게 맞아요. 아무리 사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경계는 늦추면 안 됩니다. 몰라요…… 에휴, 됐습니다. 이런 말을 해봤자 뭐 하겠습니까.”원경릉은 문득 자신이 마음이 무겁거나 힘들 때 기왕비와 함께 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녀가 분석한 기왕비는 잘해줄 때는 한없이 잘해주고 마음이 틀어지면 한없이 무서운 사람이다.
대오가 경성으로 돌아올 때 홍엽도 원숭이와 같이 돌아왔는데, 그도 풍도성에서 힘을 보탰다. 사실 홍엽이 안 가도 안풍 친왕이 모든 걸 다 준비해 둬서, 안풍 친왕 능력이면 안지여 정도 상대하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이리 나리 일행은 경성에 도착해, 우선 집으로 돌아가 공주와 천행이를 보고 가족이 함께 밥을 먹은 뒤 입궁해서 경과를 보고했다.사적인 원한은 한두 마디로,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은 지금 받아야 할 벌을 받고 있으며 아직 죽이지 않았다고 했다남은 건 정사를 논하는 것이었다.“어머니와 같이 풍도성에서 보름 정도 지내며 기본적인 민심을 파악했는데, 천문 세가는 백성들 사이에서 아직 명망이 높아 보입니다. 풍도성 백성들은 사실 세금이 너무 많고 경제가 번영한 성과가 전부 안지여 수중에 떨어지는 구조로 되어 있어 안지여의 통치에 불만이 있었다고 합니다. 조정에서 풍도성을 접수한 것에 백성들 대부분은 찬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천하태평이냐 하면 그럴 순 없는 것이, 일부는 성주가 자기들의 황제라 여기고, 조정이 풍도성을 접수한 것이 풍도성이 침략당했다고 여겨 나중에 약간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부를 임명하실 때 신중하셔야 할 것입니다.”우문호가 말했다. “흠, 큰할아버지께서 천거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박원이라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그러자 이리 나리의 눈빛이 빛났다. “제 아버지가 추천한 사람이니 전 찬성입니다!”“아버지?” 우문호가 의아해하며 이리 나리를 쳐다봤다. ‘안풍 친왕비가 사부님이면 안풍 친왕은 사부의 남편 아닌가? 어떻게 아버지가 되지? 사부님의 배우자니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게 더 맞지 않나?’“흠, 안풍 친왕은 제 아버지십니다!” 이리 나리는 더 설명할 생각이 없는지 어쨌든 그렇다고 주장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한 번도 그를 아버지라 부른 적 없지만, 마음속에서만큼은 진정한 아버지였다.“하하하!” 우문호도 그저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다.이리 나리가 퇴청할 때 우문호가 이리 나리를 부르자 고개를 돌렸다. “무
“우선 박원이랑 소홍천 의사부터 물어보자. 억지로 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동안 그들이 날 많이 도와줬으니 전부 원하는 대로 하자고.” 우문호가 말했다.“그러자!” 원경릉이 일어서며 말했다. “오늘 저녁 애들 데리고 어머님께 가서 수라를 들려면 빨리움직여야 해. 꾸물대면 늦을거야.”그러자 우문호도 계란이를 안고 일어섰다. “그래, 우리 황조모한테 가서 맘마 먹자.”우문호가 나가서 부르자 아이들이 달려와, 같이 왁자지껄하게 수라를 들러 황태후 전으로 갔다.황태후는 원래 우문호에게 할 말이 있었지만, 식사 자리에 아이들이 있어서 기다렸다가 저녁을 다 먹은 뒤 우문호와 아이들이 나가서 놀고, 원경릉이 황태후와 얘기를 나눌 때 말을 꺼냈다.“천행이가 태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부마를 풍도성으로 보낼 수가 있지.. 공주가 얼마나 괴로웠을까.”원경릉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공주는 사정을 훤히 알고 있어서, 이리 나리께서 풍도성에 가는 걸 지지하셨는걸요.”“말은 그렇게 해도, 출산 후에 여자 곁엔 남편이 있어야 하는 법이야. 하지만 이것도 단지 우리 가족끼리 하는 얘기일 뿐이고, 조정 일을 내가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없는 노릇이지.”황태후는 이리 나리가 풍도성으로 간 진정한 목적을 전혀 몰랐으며, 단순히 어지러운 형국을 정리하러 갔다고만 알았기 때문에 순수하게 공주를 아끼는 마음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어마마마, 걱정하지 마세요. 이리 나리는 이미 돌아오는 중이래요.” 원경릉이 위로하자 황태후가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거 잘됐네!”온 가족이 별빛을 받으며 천천히 소월궁을 거닐었다.계란이는 아빠 품에서 잠이 들었고, 아이들은 놀다 지쳐서 아빠 엄마를 따라 천천히 걷고 있었으며, 목여 태감이 궁인 둘을 데리고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는 가운데, 궁 안은 인적이 드물어 밤이 되자 상당히 고요했다.“어마마마께서 공주를 아끼셔서, 이리 나리가 하필 이때 풍도성에 보냈냐고 하셨어.” 원경릉이 말했다.“날 원망하셨어?” 우문호는 품에 있는 아이가 깰
늑대파 사람이 안지여와 소여쌍을 질질 끌고 나가는데, 소여쌍은 여전히 미친사람처럼 웃어대기만 했다.이리봉청은 그들이 끌려 나가는 것을 보자, 눈앞에 안지여가 자신을 데리고 소여쌍의 침대 앞으로 가서 소여쌍의 그 악랄한 말을 듣던 순간이 떠올랐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여리여리하고 아름답던 그녀가 이렇게 변해 버린 게 꿈처럼 느껴졌다.풍도성을 접수한 뒤 안풍 친왕은 관리들을 새롭게 임명했고, 더 이상 성주 같은 것을 두지 않고 조정과 이부에 적합한 인사를 선발해 풍도성 지부로 앉힐 것을 요청했다. 풍도성은 더 이상 이전의 독립 자치 지역이 아닌, 다른 주나 현과 마찬가지로 조정에 귀속되어 통일서 있게 다스리게 되었다.더불어 안풍 친왕은 별도로 서신을 써서 황제인 우문호에게 보냈는데, 풍도성을 추천하지만, 이건어디까지나 건의와 추천이니 황제가 생각하는 마땅한 사람이 있으면 안풍 친왕의 추천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동시에 안지여의 잔당들이 계속 나타났다.안풍 친왕이 이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데려오고, 호랑이와 눈 늑대, 회색 늑대까지 출동시킨 건 바로 모든 세력을 강화하고, 신속하게 진압해 풍도성을 조정에 복귀시키고 보름 만에 비적을 토벌하며 기본적인 숙청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박원은 잔당의 남은 불씨가 다시 타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안풍 친왕의 영패를 가지고 부근에 5천 명의 군사를 파견시켜 풍도성을 지켰다. 이리 나리는 자금을 지원해 천문 세가의 묘를 이장하였는데, 이전 무덤은 안지여가 고른 곳으로 폐허에 가까워, 그는 천문 세가 사람들이 그런 곳에서 안식을 취하기를 원하지 않았다.풍도성에 온지 거의 한 달가량 될 때쯤, 대군은 경성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돌아가기 전에 미색이 안지여와 소여쌍을 보러 갔다가, 돼지우리에서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사는 것을 보고 그제야 비로소 맺혀 있던 한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미색은 이리 나리와 어머님에게 알리지 않은 것이, 두 사람은 이미 안지여가 누군지 잊은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리봉청에게 있어 모든 건 지나가지 않았고, 36년 전 일은 여전히 어제 일 같이 느껴졌다.“어머니, 그를 어떻게 처분하시겠어요?” 이리 나리는 이리봉청의 마음을 넘겨짚을 수 없어 함께 걷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생각은 어떠니?” 이리봉청이 다시 되묻자 이리 나리가 원한에 사무친 눈빛으로 말했다. “제게 처분하라고 하면 전 그를 죽여 버릴 겁니다.”이리봉청은 알았다며 대답만 했다가, 다시 30분쯤 걷다가 정자에 앉아 을 때 말을 덧붙였다. “난 안 죽일 거야.”이리 나리가 약간 놀라서 물었다. “어머니, 또 마음이 약해지신 겁니까?”이리봉청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 반대야. 그 인간을 죽이는 게 마음이 약해진 거지. 사실 며칠 동안 이전의 원한을 내려놓을 수 있을지 생각해 봤는데,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 인간을 백번이라도 죽이겠지만, 난 그럴 수 없더구나. 아들아, 게다가 오늘 천문 세가 대문을 들어서는 그 순간, 더욱 마음을 굳혔단다.”이리봉청이 일어나 집안을 둘러봤다. 이곳은 그녀의 가족들이 살아 원래 온통 사람 소리로 가득한 곳이였다. 그들의 웃던 광경이 눈앞에 비치는가 하더니, 눈 깜박할 사이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천문 세가는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없는데 멸문지화를 당했고, 가엾게도 그 중엔 아이들이 많아서 제일 어린아이는 이제 태어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었다.이리봉청의 얼굴에 눈물이 타고 흐르며 가슴이 미어졌다. “그자와 소여쌍을 밖에 내버리고 사람을 시켜 지켜보도록 해. 죽게 두지 말고 계속 살려둬. 36년은 더 살면서 이 세상의 고생을 모두 겪어야, 내 마음에 맺힌 한이 풀리고 억울한 망자들도 안식에 들지!”이리 나리는 온몸으로 그 마음이 느껴져, 어머니가 눈물 흘리는 것을 더는 볼 수 없었다. “네, 전부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대로 할게요.”안지여와 소여쌍은 버려졌다. 짧은 며칠 사이에 안지여는 의기양양하던 성주에서 시궁창 쥐로 변해, 사람들이
안지여는 풍도성 지하감옥에 갇혔다. 빛 한 줄기 없는 지하감옥에서 사방에 끝없는 어둠과 절망만이 안지여를 삼키고 있었다.훼천의 형벌은 12 시진 후면 사라져서, 앞으로 안지여는 그저 한 명의 폐인일 뿐이었다.안지여의 결사대가 성으로 공격해 들어오기 전에, 이리봉청은 오 선생을 찾아내 안지여가 저지른 모든 죄를 고백하게 하고 안풍 친왕이 친필로 받아 적었다. 안지여가 당시 천문 세가를 해친 경위를 소상히 써 내려간 뒤, 오 선생과 안풍 친왕의 직인을 찍고 인쇄해서 대중에게 공개했다.안지여의 죄악은 하늘을 찔러 백성들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안지여의 결사대의 옛 부하들이 본래 성을 공격해 들어가 안지여를 구출할 계획을 세워놓았으나, 안지여의 죄상이 공포된 뒤로 많은 사람들이 해산하였다. 유일하게 무대장군만이 수천 명을 데리고 성으로 쳐들어왔지만, 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가 이미 대비해둔 덕분에, 경성에서 굴러온 돌이 무대장군의 박힌 돌을 빼내는 전투를 벌였다.풍도성에 온 지 7일째, 안풍 친왕은 풍도성을 접수하고 성에 살던 사람을 쫓아내며 서민으로 강등시켰다.안지여와 소여쌍에 대한 처분은 이리봉청에게 넘겼다.안지여는 캄캄한 지하감옥에서 6일을 지내는 동안, 처음엔 침착한 척 가장했으나 사흘째가 되자 울부짖으며 악독한 저주의 말을 내뱉더니, 나흘째가 되자 용서해달라고 애원하며 참회했다.손발의 힘줄이 끊어진 안지여는 일어나 걸을 수도 없고 심지어 스스로 몫숨을 끊을 힘도 없었다.그 와중에 매일 누군가가 먹고 마시도록 해주고, 상처도 치료해 주어 살 수 있다는 부질없는 희망을 품게 했다.훼천의 말에 따르면, 진정한 절망은 살아도 죽느니만 못하고,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것으로, 온 마음으로 죽기를 바라지만 살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가, 안간힘을 쓴 뒤 다시 절망에 빠지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으로, 사람을 한없이 죽였다 살렸다 괴롭힌다고 했다.결국 안지여를 죽일지 말지 여부는 이리봉청에게 달렸는데, 그녀는 안지여를 단번에 죽여 천문 세가
안지여의 이마에 파란 힘줄이 불끈불끈했으나 냉정을 가장했다. “내가 두려워할 줄 알았나 보지? 죽음도 두렵지 않은데 뭘 더 두려워하겠어?”“넌 두려울 것이야!” 이리봉청이 고개를 돌려 이리 나리를 보고 살짝 그의 팔을 잡았다. “내가 오는 길에 늑대파 사람이 그러던데, 천하에서 제일 잔혹한 형벌을 아는 사람이 늑대파에 있다고. 그게 사실인 것이냐?”이리 나리가 가볍게 답했다. “물론 사실이죠. 훼천이라고 합니다. 늑대골 출신이에요.”“안지여가 버틸 수 있는지 어디 한 번 보고 싶구나.” 이리봉청이 말했다.이리 나리가 엄숙한 태도로 명을 내렸다. “훼천!”그러자 훼천이 급히 나왔다. “이리 나리, 분부하시지요!”이리 나리는 그가 짐짓 냉정한 척하고 있으나 눈빛이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몸까지 부들부들 떠는 것이 아주 만족스러워 훼천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시작해!”안지여가 갑자기 큰 소리로 욕했다. “난 네 아버지거늘, 감히 나에게 손을 대다니, 천벌을 받아 마땅한 놈 같으니라고!”이리봉청이 이 말을 듣고 잠시 주저하는 눈빛으로 이리 나리를 바라봤다.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제 아버지는 오직 저를 키워주신 안풍 친왕뿐이십니다.”이리봉청이 살짝 안도했다. “저 인간이 단지 나만 해쳤으면 네 체면을 봐서 놔줬겠지만 천문 세가의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니 난 용서할 수 없구나.”“이리봉청, 너 언제 이렇게 악랄하게 변했어? 죽이려거든 그냥 죽여. 난 천문 세가 사람을 죽이긴 했어도 그들을 괴롭히진 않았어. 네가 날 죽이려거든 깨끗하게 단번에 죽여!”안지여가 크게 노해 몇 번 몸부림을 치다가 상처가 벌어지는 바람에 배에서 선혈이 흘러나오고, 훼천이 가까이 다가가자, 눈에 두려움이 깊어졌는데, 늑대골 출신 훼천은 온몸에서 피비린내가 뿜어져 나와 안지여를 덜덜 떨게 했다.“이리율!” 안풍 친왕비는 시ㅈ가하기 전에 이리 나리를 불렀다. “내가 여기서 네 엄마와 같이 있을 테니 넌 먼저 나가 있거라!”이리 나리가 안풍 친왕비에게
안지여에게 구원 병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리 나리 일행이 성을 제압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대오가 경성에서 출발하기 전에, 안풍 친왕비가 미리 사람을 풍도성으로 보내 각처, 특히 성 수비군과 군대에 잠입시켜, 음식에 효과가 천천히 나타나는 독을 풀어, 오늘 중독 증상이 나타나도록 독의 분량을 조절했다.적어도 내일까지는 안지여를 도우러 올 사람은 없었다. 독성은 적어도 이틀이 지나야 깨끗해지기 때문에 이틀 동안 그들은 설사와 전신 무기력으로 성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아도 와서 도울 수 없었다.그리고 그들이 기력을 회복할 때쯤이면, 안지여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는 성을 통제하고, 안지여 부부를 제압해 두 사람을 줄로 묶고 지혈시켜 주었다.안지여는 요 몇 년 동안 자신이 상당히 대단하다고 여겼다. 이는 풍도성이 부유하기 때문으로, 돈으로 많은 사람을 살 수 있었으며, 여러 곳에서 추켜세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절하게 패배한 적이 없었던 이유는 진정한 적이 없기 때문으로, 주변의 떠돌이 비적은 작은 마을 규모로 너무 작아서 소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코 그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적이 너무 약해서였다.조정 사람과 비교했을 때, 그는 제대로 훈련받은 적 없는 비적었기에 일격도 감당할 깜냥이 못됐다.이리 나리는 둘을 중정에 묶어 두었다. 온 바닥에 남은 음식과 깨진 기와가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본 안지여는 마음속 깊이 분노가 일었다. 자신의 생일날, 그를 다치게 한 것이 바로 그의 친자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욱이 오늘 이렇게 많은 고수가 현장에 있었는데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런 결말을 맞다니 너무 불쾌했다. 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을 부축하고 안지여 부부 앞으로 가서, 그녀가 안지여 부부를 내려다보자, 그들은 낭패에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으로, 이리봉청은 분노하는 마음과 함께 서글픈 마음도 들었다. 그들을 죽이면 커다란 복수는 이뤄 천문 세가 망자의 원혼은 달랠 수 있었다.하지만 저들을 이렇게 쉽게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이리 나리가 검을 휘두르며 안지여를 겨누자, 안지여가 공중으로 뛰어올라 후퇴했다.공자들은 돕고 싶었으나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에게 바로 제압당했다. 안지여는 이리율 것으로 그들은 주변 사람을 제압하기만 할 뿐 옆에 서서 전투를 관전하고 있었다.이리율의 무공이 얼마나 뛰어난지 그를 가르친 안풍 친왕 부부를 제외하고, 사실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이리율의 검법은 신속하고 맹렬해서 안지여는 상대하느라 쩔쩔매고 구석으로 몰리고 있었다. 성안의 호위들은 늑대 무리와 늑대파, 홍매문 사람들에게 막히는 바람에 안지여는 홀로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그래도 아직은 버틸 수 있었다.하지만 30분을 못 가서 안지여는 질게 틀림없었다.놀란 나머지 계속 실성해 있던 소여쌍이 갑자기 이리봉청을 향해 바싹 마른 손을 뻗어, 그녀의 목을 조르며 광적인 집착과 분노에 사로잡혀 성질을 부렸다. “멈춰, 다들 멈추라고. 안 그러면 내가 이년을 죽여버릴 것이니까!”소여쌍은 무공을 할 줄 알았지만 잘하지 못한 것이 어릴 때부터 계속 중병을 앓아 무공 연습에 소홀했고 성주 부인이 된 뒤로는 더욱 병기에 가까이할 일이 없었지만, 공력만큼은 아직 약간 있었다.소여쌍은 증오의 힘으로 이리봉청의 목을 졸랐는데, 소여쌍이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이리봉청의 목을 부러뜨릴 것만 같았다.안풍 친왕이 차가운 눈빛으로 나서려 하자, 안풍 친왕비가 말리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는데, 그럴 필요 없다는 뜻으로 뒤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참으라는 눈짓을 하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모두가 이리봉청이 제압당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손가락으로 뭔가를 쥐고 있어 소여쌍의 어깨 위를 휘감고 팔을 눌러 소여쌍이 머리를 돌리게 했다. 이리봉청 손에 쥔 것은 바늘로, 그대로 소여쌍의 오른쪽 눈을 찌르고 들어갔다.소여쌍이 절규하며 이리봉청을 놔주고 선혈이 흐르는 눈을 움켜쥔 채 비틀거리다 바닥에 쓰러져 데굴데굴 구르며 새된 소리를 지르는데, 원망과 저주의 말을 끊임없이 쏟아
풍도성 중정에는 안지여의 아들들과 사위가 그의 곁에 남았는데,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점점 공포에 질려가고 있었다.‘이 사람들, 아주 대단하구나!’안지여는 이리봉청을 보고 비록 조금 냉정해 보였지만, 여전히 놀라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갑자기 소여쌍이 큰 소리로 웃으며, 몸을 앞뒤로 흔들며 눈물을 찔끔거리더니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이리봉청을 가리키며 원망했다. “뜻밖에 네가 안 죽었단 말이지? 게다가 아들까지 있고. 참으로 황당하구나. 정말 너무 황당해. 원래 죽어야 했을 인간은 죽지 않고, 잘 살아야 할 사람은 36년간 괴로움을 당했어. 이리봉청 네가 날 비참하게 만들었으니 넌 이제 지옥에 떨어져야 해.”이리봉청은 소여쌍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했는데, 그녀 눈에는 지금 안지여만 들어왔다.안지여는 36년을 살아왔지만, 이리봉청에게 있어 36년은 마치 사라진 시간처럼 멸문지화의 원한이 어제 일 같았다.안지여도 이리봉청의 눈에서 분노와 악랄함을 보고, 처음으로 마음속에 두려움을 느꼈다.안지여는 억지로 감정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네 사람을 데리고 가. 지난 일을 묻지 않을 테니. 그렇지 않으면 풍도성에서 곧바로 10만 대군이 올 것으로, 살아서 도망갈 생각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아.”이리봉청의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우리는 이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바로 네 성으로 쳐들어갈 수 있어. 넌 이미 졌어.”안지여가 웃었다. “졌다고? 그래?”안지여는 수하의 대장군이 믿음직해서, 그들을 당하게 놔줄 수도 있다고 여겼다. 대장군의 부대는 분명 치밀하게 준비되어 있을 것으로, 아마 지금쯤이면 궁수들이 이미 배치를 마치고 그들을 전부 쏴 죽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의 손을 잡고 말했다. “어머니, 저자와 말 섞으실 필요 없어요. 앉아서 지켜보시기만 하면 됩니다!”말을 마치고 의자를 올리더니 이리봉청을 부축해서 앉혔다.안지여가 이리 나리를 보는데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