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황상께서는 저를 가둬두려고 하십니다. 다섯째는 황상께서 시키는 대로 할 것이고…… 지금 저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원경릉이 말했다.“이 일을 태상황께서는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희상궁이 말했다.희상궁의 말을 듣고 원경릉은 고개를 저었다.“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태상황님께 도움을 청할 수는 없습니다. 태상황께서는 이미 저를 여러 번 도와주셨습니다. 만약 이번에 또 저 때문에 태상황께서 황상과 대립하게 된다면…… 제가 두 분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그리고 황상께서 하신 일도 태상황께서 보시기에 잘못했다고 지적할 수는 없습니다.”“모든 일은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다릅니다.”희상궁이 말했다.원경릉은 물 잔을 들어 희상궁에게 건네었다. “이제 그만 자야겠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왕부에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외부와 차단되어 온전히 태아를 키우는 데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요. 상궁님, 내일 만아를 시켜서 회왕부에 약을 전달해달라고 해주세요. 그리고 기왕부에 가서 기왕비께 정후부로 곧장 오시라고 해주세요.”“예! 알겠습니다!” 희상궁은 물 잔을 탁자 위에 놓고 돌아와 침상 옆 장막을 내렸다.*다음날 원경릉은 날이 밝았는데도 잠을 자고 있었다. 원경병은 시녀에게서 원경릉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원경릉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오는 내내 어딘가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밤중에 돌아오다니? 게다가 후부에 며칠 더 묵는다고 하는 건…… 틀림없이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 원경병이 그녀를 깨우러 들어오자 만아도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원경릉이 눈을 뜨자마자 원경병이 수심 가득한 얼굴로 침상 옆에 서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야? 꼭두새벽부터 나타나서 나를 깜짝 놀라게 하는 이유가 뭐야!”원경릉은 침상을 손으로 짚으며 자리에 앉았다. 배가 불러오니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곤욕스러웠다.원경병은 침상에 엉덩이를 찰싹 붙이고 앉아 눈을 부라렸다.“혹시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세요. 여기서 듣겠습니다.”원경릉이 말했다.잠시 후 정후가 뒷짐을 지고 안으로 들어왔다. 정후는 검은 물고기 문양이 들어간 푸른색 두루마기를 입고 허리춤에 옥띠를 두르고 있었다. 그의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는 어딘가 모르게 아우라가 느껴졌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원경릉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후부에 온 이유가 뭐야? 여기에 금붙이라도 숨겨둔 것이냐?”“부친!”원경병이 침상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자 원경릉도 몸을 일으켜 부친에게 인사를 했다.정후는 밤새 원경릉이 왜 정후부로 왔는지 안절부절못했다. 그래서 그는 원경병이 자리에 있는 것도 개의치 않고 원경릉에게 쏘아댔다. “밤중에 정후부에 온 이유가 무엇이야 혹시 쫓겨나기라도 한 것이냐?”“부친, 딸이 왕부에서 억울함을 당해 친정에 위로를 받으려고 왔습니다. 부친께서는 딸이 온 게 그렇게 못마땅하십니까?”원경릉이 수심찬 표정으로 정후를 보았다.정후는 그녀의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잔말 말고 왜 왔는지 말해봐. 설마 쫓겨난 게냐?”원경릉은 한숨을 쉬었다. “부친께서 이혼장을 받으셨다면 이혼을 당한 거겠죠. 아직 이혼장을 못 보셨다면…… 사실 지금 상황으로는 이혼도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네요.”그녀의 말을 들은 정후는 탁자를 두드리며 화를 냈다. “이혼장? 무슨 일인지 말해 봐.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바로 쫓아낼 것이야!”“부친! 누이를 쫓아내신다니요! 누이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원경병이 원경릉 앞을 가로막았다.“네가 뭘 안다고 나서? 오밤중에 친정으로 쫓겨났으면 분명 누군가에게 미움을 사서 이리로 보내진 것 아니겠느냐! 왜 온 것이야 그 이유를 똑바로 말하거라!”“부친께서 진정하시거든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원경릉은 자리를 잡고 앉으며 정후를 보았다정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원경릉의 모습에 놀라 뒷짐을 지고 혀를 차며 욕지거리를 해대더니 결국 자리에 앉았다.“빨리 말하거라!”“제가 황상께 노여움을 샀습니다. 그래서 황상께서 저를 친정으로
정후가 정신을 차리자 눈앞에 근심에 가득 찬 원경릉 얼굴이 보였다.공포에 사로잡힌 정후는 원경릉의 손목을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정말 주명취가 황상께 그렇게 말을 했다는 것이야? 황상께서는 크게 노하셨느냐!”원경릉은 그런 정후를 연민의 눈빛으로 보았다.“부친, 만약 그 일이 아니라면 임신까지 한 저를 왜 친정으로 보냈겠습니까? 빨리 해결 방법을 강구하세요!” ‘주명취 가증스러운 계집…… 죽으려거든 혼자 죽을 것이지. 죽어서까지 정후부를 괴롭히는구나.’ 정후는 정신을 차리고 의자에 앉아 입술을 물어뜯다가 고개를 돌려 원경릉의 배를 쳐다보았다. 넉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녀의 배는 크고 둥근 것이 딱 딸을 품은 것 같아 보였다. 정후는 혀를 차며 고개를 떨구었다.정후는 원경릉이 딸을 낳는다면 앞으로 자신의 벼슬길에는 희망이 없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는 코 앞에 닥쳐온 정후부의 몰락에 머리가 지끈거리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후작으로 임명된 이후 그는 조상의 영전에서 지난날의 정후부 명성을 되찾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자신의 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알기에 온 힘을 다해 권세가 기우는 곳에 빌붙었으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다고 더 치고 올라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던 그 순간, 정후부는 몰락의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한동안 멍하니 원경릉을 바라보며 한숨만 푹푹 내쉬더니 축 처진 어깨로 밖으로 나갔다.원경릉은 그늘 진 그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문밖으로 나온 정후는 줄곧 의지해 온 둘째 노마님을 찾아 이 일을 상의했다. 원경릉이 친정으로 돌아왔기에 이 일은 정후부의 둘째 노마님이 책임을 지고 해결해야 했다.아침부터 정후가 찾아와 얘기를 하자 둘째 노마님은 깜짝 놀라 눈이 뒤집힐 뻔했다. 한참 후에 정신을 차린 그녀는 충격으로 손과 발이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온몸이 저릿저릿했다.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우리가 살기 위해서
“둘째 숙모님, 머리가 안 돌아가십니까? 경중에서는 그런 임산부를 찾기 힘들 수 있으니 저 멀리 돈 없고 힘없는 계집을 찾아야겠죠. 거지 소굴같은 곳을 잘 찾아보면 은화 몇십 냥만 주면 갓난아이뿐만 아니라 자기 며느리도 내어줍니다.”“맞네, 맞아. 이 일은 내가 잘 처리하겠습니다.” 둘째 노마님은 요즘 들어 집안의 기강을 잡는 첫째 노마님 때문에 맥을 못쓰고 있었기에 만약 이 일을 잘 처리한다면 그녀에게 기세가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정후가 떠난 후 원경병이 원경릉을 보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누이, 방금 한 말이 사실입니까?”원경릉은 빙그레 웃으며 “겁 좀 줬지.”라고 말했다.원경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왜 부친을 겁주십니까?”라고 물었다.“그래야 나를 귀찮게 할 시간이 없을 것 아니냐?”원경릉은 정후부가 소란스러워야 정후가 자신을 찾아와 귀찮게 할 확률이 적을 것이라 생각했다.“우리 조모를 뵈러 가자. 조모께 문안을 드려야지.”원경릉이 말했다.원경병은 누이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세세하게 물으려다가 조모를 뵙고 와서 다시 물어봐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이가 이른 아침부터 조모를 뵈러 가려고 하는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노마님께서도 어제저녁에 원경릉이 정후부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 일찍부터 원경릉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노마님의 정원에 들어서자 손씨 아주머니가 급히 나왔다.“아이고! 왕비님께서 오셨군요! 안 그래도 노마님께서 애타게 기다리셨습니다!”그 말을 들은 원경릉은 발걸음을 재촉해 안으로 들어갔다.노마님은 근심 가득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원경릉이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원경릉이 노마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려고 하자 손씨 아주머니가 그녀를 부축했다. “왕비, 무릎을 꿇지 마세요. 몸이 무거우시니 그냥 편하게 앉으세요.”노마님을 보기 전까지 평온했던 원경릉의 마음이 초조한 노마님의 표정을 보자마자 파도에 휩쓸리듯 흔들렸다.“조모!”“왕비,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노마님은
원경릉은 노마님의 말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감동했다.출가외인이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이 얼마나 큰 가문의 수치인가. 원경릉은 노마님께서 아무리 자신을 예뻐한다고 해도 이러한 상황에서까지 자신을 감싸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곤경에 처했을 때 내 편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더니 지금 이 상황에 딱 맞네.’노마님은 원경릉 눈에 구슬 같은 눈물이 맺힌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저 어린것이…… 얼마나 마음이 괴롭고 속상할 것인가.’“누이, 조모님 말씀대로 부중에서 아이를 잘 키우면 됩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마세요. 노마님도 말씀하셨지만 정후부로 온 이상 그 누구든 누이를 못살게 군다면 저 또한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원경병이 말했다.“다들 고맙습니다.” 원경릉이 말했다.원경릉은 왕부에 있는 사람들 중에 원경병과 노마님 빼고는 자신을 반기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물론 다들 대놓고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아 부중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가 아이를 낳으면 바로 버림받을 것이라고 떠들어댔다.둘째 노마님의 며느리인 난씨는 점심때 원경릉이 복도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쌀쌀맞게 소리쳤다.“버림받은 여자!”“걸레를 물었나! 거기 입 조심하십시오!”이 말을 듣고 사식이가 쏜살같이 튀어나왔다.난씨는 원래부터 강약약강한 성격으로 사식이가 버럭 하자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왕비한테 한 말 아닙니다.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세요?”“방금 우리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니라고요? 댁 말 따라 왕비께서 정말 버림받은 여자라면 당신들은 왕비의 손윗사람으로 감싸고 보살펴줘야 맞는 거잖아요! 하지만 당신들은 조롱의 기회라도 되는 듯 왕비를 경멸하고 있네요?”난씨는 말싸움이라면 어디서 지지 않았지만, 사식이의 거센 반발에 못 이겨 찍소리도 못하고 도망갔다.사식이는 달아나는 난씨의 뒷모습에 대고 큰 소리로 욕을 했다.원경릉은 웃으며 “됐어, 사식아 그만하면 알아들었을 것이야. 그만하거라.”라고 말했다.사식이는 진정되지 않
“가문은 중요하지 않아요. 사람이 좋으면 지금이야 별 볼 일 없더라도 나중에 반드시 두각을 나타낼 것입니다.”사식이가 말했다.“네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니 정말 뜻밖이야! 네 말이 맞다. 내가 살아보니 그렇더라고 가문은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것은 인품이야.” 원경릉은 사식이의 말에 진심으로 감탄했다.사식이는 금수저다. 설령 그녀가 정말 가난한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고 해도 평생 입고 먹는데 쓰는 것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기에 인품을 가장 중요하게 볼 수 있었다.“너는? 미래의 신랑에 대해 바라는 거 없어?”사식이는 고개를 돌려 만아를 보았다. “소인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만아가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떠돌이 신분에 밥 굶을 것이 제일 큰 걱정인 만아가 어디 여유가 있어서 혼인을 생각하겠는가.“상상도 못 해봐? 아무리 현실에 치여도 여자는 미래에 대한 꿈을 가져야 해! 특히 혼인 말이야! 어렸을 때 그런 상상 안 해봤어?”“음…… 저는 어렸을 때부터 충직하고 착한 사람과 혼인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제가 주부에서 쫓겨난 이후에는…… 삶이 퍽퍽해서 그런지 도통 연애나 혼인에 대한 생각이 안 드네요.”“쫓겨났어?”“아! 잘 못 말했네요. 쫓겨난 게 아니라 소인이 떠난 겁니다.”만아는 고개를 떨구었다. 사식이가 또 물으려고 하자 원경릉이 그녀를 막으며 “기왕비는 아직 오지 않았느냐?”라고 물었다.원경릉의 제지에 사식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직 소식이 없으시네요. 왕비님, 저는 사실 왕야께서 정후부로 오실 줄 알았습니다. 근데 왕야께서도 하물며 희상궁도 안 오시고! 왕비를 여기 두고 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겁니까?”오늘 아침에 희상궁이 왕부로 돌아왔는데 아직 후부로 오지 않았다.“희상궁께서는 분별력이 있으시니, 걱정마. 너는 나가서 기왕비가 오는 지 확인 좀 해보거라.”원경릉이 말했다.“예!”사식이가 밖으로 나갔다.사식이가 나가자마자 기왕비가 정후부 대문으로 기왕비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원경릉은 고개를 들고 기왕비를 바라보았다.“후회하십니까?”기왕비는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후회하지 않습니다. 이미 여기까지 와버린 것을 후회해봤자 뭐 합니까. 사람의 마음은 참 어렵습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최선을 다 했다고 그 사람도 나에게 최선을 다 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내가 준 만큼 받고 싶은 건 욕심입니다.”“그래서 기왕비께서는 진심으로 사랑하셨다는 겁니까?”기왕비는 원경릉의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사랑? 어쩌면 사랑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기왕의 어디가 좋습니까? 도대체 어느 부분이 기왕비의 마음을 빼앗은 겁니까?”“그 사람이 좋은 점이 있어서, 매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 남편이기에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겁니다.”“예? 그게 말이 됩니까?”“되지요. 더 필요한 게 뭐가 있습니까?” 기왕비가 의아한 표정으로 원경릉을 쳐다보았다. “그럼 기왕비께서는 아직도 기왕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기왕비 말대로 남편이잖아요.”“이제 아닙니다.” 기왕비의 눈빛이 차가웠다.“왜요?”“그가 저를 사랑하지 않아도 되지만 저를 죽일 수는 없습니다. 상대를 죽이고 싶어 한다면 그건 부부가 아니라 원수가 되는 거지요.” 기왕비의 눈빛이 한순간에 싸늘해졌다.‘사랑하던 사람이 원수가 되다니…… 이 얼마나 잔혹한 일인가!’원경릉은 기왕비의 말을 듣고 마음이 아팠다. 기왕비의 눈빛이 평정을 되찾고는 담담한 표정으로 원경릉을 보았다.“걱정 마세요. 초왕비와 다섯째는 원수가 될 일이 없을 테니까요.”“며칠 전까지만 해도 저보고 남자를 믿지 말라고 한 게 누구였지요? 기.왕.비?” 원경릉이 장난스레 물었다.“사람은 늘 경계해야 하는 게 맞아요. 아무리 사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경계는 늦추면 안 됩니다. 몰라요…… 에휴, 됐습니다. 이런 말을 해봤자 뭐 하겠습니까.”원경릉은 문득 자신이 마음이 무겁거나 힘들 때 기왕비와 함께 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녀가 분석한 기왕비는 잘해줄 때는 한없이 잘해주고 마음이 틀어지면 한없이 무서운 사람이다.
희상궁은 원경릉을 부축해서 자리에 앉혔다. “왕비, 조급해하지 마세요. 사식이가 헛소리를 하는 겁니다. 왕야께서 암실에 갇히다니 말도 안 됩니다. 성년이 된 친왕이 궁에서 밤을 보낼 수 없기는 합니다만 궁에는 다른 친왕들이 있습니다. 왕야께서는 팔황자를 찾아갔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태상황님을 찾아갔을 수도 있죠.”원경릉은 희상궁의 말을 듣고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사식이 말대로 암실로 끌려갔다면…… 생각이 거기까지 가자 원경릉은 눈앞이 아찔해졌다.원경릉은 마음속으로 부황을 원망했다. ‘왜 다섯째에게만 이렇게 엄하고 모지실까?’사식이는 손톱을 뜯고 있는 원경릉을 보고 어찌할 바를 몰라 희상궁만 바라보았다.희상궁은 한숨을 쉬며 “그럼 제가 주부 골목을 지키고 서있다가 주수보에게 물어보겠습니다.”라고 말했다.“예, 그래 주세요. 역시나 희상궁님이십니다!”“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야죠.”원경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지만 떨리는 손은 숨길 수 없었다. 우문호의 소식을 알 수 없으니 계속해서 최악의 상황이 떠올라 머리가 아팠다.희상궁은 원경릉에게 몇 마디 위로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희상궁은 주부 문 앞 골목에서 꼬박 두 시간 가까이 주수보를 기다렸다. 추운 날씨에 몸이 꽁꽁 얼었지만 우문호의 소식을 알 방도가 그밖에 없었다. 잠시 후 저 멀리서 주수모를 태운 가마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언 손을 입김으로 녹이며 가마 앞에 서서 가마를 가로막았다.가마가 바닥에 내려앉고 장막이 걷히니 그 안에는 주수보가 보였다. 주수보는 덜덜 떨고 있는 희상궁을 보고 깜짝 놀랐다.“이렇게 추운 날에 밖에서 뭐 하고 있습니까!”희상궁은 파랗게 질린 입술이 추워서 떨어지지 않는 듯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며 주수보를 보았다.“여쭤볼 게 있습니다.”“일단 들어갑시다!”주수보는 화가 난 말투였지만 겉옷을 벗어 희상궁의 어깨에 덮어주었다.희상궁은 놀라서 “됐습니다……”라고 겉옷을 돌려두었지만 주수보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