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릉이 생각보다 쉽게 부탁을 들어주자 주명취는 의심이 들었다.“희상궁을 초왕부 밖으로 못 나가게 명을 내릴 것이지?”원경릉은 이 상황에서도 의심을 하는 주명취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네 모친이 죽는다는데 여기서도 나를 의심하는 거냐?”주명취는 차가운 얼굴로 사식이에게 “앞장서.”라고 말했다.사식이는 코웃음을 치며 “나를 하인으로 부리지 마, 어디서 감히 명령을 해?”라고 말했다.주명취는 몹시 화가 났지만 화를 누르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길을 안내해 주시지요. 고맙습니다.”사식이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주명취를 희상궁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희상궁이 있는 방 안에서 약 냄새가 진동을 했으며 하얀 얼굴의 희상궁이 침상에 누워있었다.“아니… 희상궁?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주명취는 당황해서 말을 버벅거렸다. 주명취는 문득 하루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새어버린 조부가 생각이 났다.‘그래… 조부가 이상했어. 아무리 화가 나도 그토록 화를 낸 적은 오늘이 처음이다.’주명취는 누워있는 희상궁을 보고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다.그녀는 원래 희상궁에게 울며불며 감정으로 호소해 희상궁을 주수보 앞에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희상궁을 데리고 갈 수 있다면 가세요. 희상궁이 깨어난다면 우리 초왕부에서 쌍수 들고 희상궁을 주씨 집안으로 보내줄 수 있으니.” 사식이가 말했다.“이 일은 나의 모친과 관련이 없다. 그저 희상궁이 스스로 납득할 수 없어서 내 모친을 걸고넘어지는 것이지.”“제왕비,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만 돌아가세요.” 사식이가 말했다.주명취의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이를 어떻게 해야 좋을까? 의식도 없는 상궁을……’주명취는 순간 황후가 생각났지만 이미 영패를 회수당했기에 궁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조부가 두 시간밖에 주지 않는다고 하였기에 그 안에 입궁을 했다 나올 수는 없을 것이다.*제왕은 주씨 집안에서 나온 뒤 착잡한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 구사를 불러 술을 마셨다.구사는 원래 초왕부로 가려고 했는데
주명취와 제왕의 싸움, 그리고 원용의“당신……”주명취가 목소리를 낮추어 눈물을 삼키며, “당신 일부러 사람을 괴롭히는 거 아녜요?”“그래!” 제왕이 주명취를 냉정하고도 분노에 찬 얼굴로 바라보며, 마음 속의 울화가 한꺼번에 터져 나와, “내가 널 괴롭히면 좀 어떠냐? 너희 주씨 집안이 어디 괴롭힘 당하는 걸 겁내기나 했어? 너희들이 하지 못하는 일이 있기나 해? 어디 내가 요패(腰牌) 꺼낼 필요도 없더군, 이 천하는 전부 너희 주씨 집안 것이지 않느냐.”주명취는 열 받아서 눈가가 벌게지고 입술이 떨리는데, “당신은 이렇게 외부 사람들 앞에서 나와 싸우는 모습을 꼭 보여야 하는 겁니까?”구사가 상당히 난처한 것이 진퇴는 고사하고 보아하니 이 술에 독이 들어 있는게 분명하다.잠시 생각하던 구사는 역시 잽싸게 나가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해, 급한 일이 있다고 얼버무리며 즉시 도망쳤다.제왕이 싸늘하게: “네 눈에는 나도 외부인 인데 외부인 앞에서 싸우는 게 뭐가 문제지? 난 체면 따위 전혀 필요 없어.”주명취는 화도 나도 억울하기도 해서 주먹을 주고 바르르 떨며: “정말 시집을 잘못 왔어요.”이 말은 철저하게 제왕의 역린을 건드리 고야 말았다.제왕이 벌떡 일어나서 눈에서 불꽃이 일며,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 구나, 처음부터 넌 날 좋아한 적 없이 시집을 왔지, 단지 내가 아바마마의 적자라는 이유로! 더욱이 주재상이 내 외조부시기도 하고 넌 태자비 혹은 황후란 지위를 탐했던 거야. 높으신 분께서 아랫것에게 머리를 숙이고 시집을 오셨지, 너희 주씨 집안의 큰딸 신분에 이 몸에게 시집을 와 주셨으니, 이제서야 후회가 되는가!”주명취는 가슴이 싸늘하게 식으면서 제왕이 감히 이런 말을 자신에게 할 줄이야,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주명취가 분개함을 참지 못하고, “당신에게 앞서라고 하고, 분투하라고 한 게 뭐가 잘못인가요? 당신은 왜 반드시 평범하기만 하려고 하죠? 당신은 분명히 더 나은 성취를 이룰 수 있는데, 왜 나를 위해 그럴 수 없어요, 나를 위해서
주대부인을 살리려 증조마님 등장주명취는 지치고 힘없는 발걸음으로 주부로 돌아오다가 증조모의 가마가 문 앞에 서있는 것을 보고, 억울했던 마음이 자혜로운 증조모의 얼굴을 대하는 순간 와르르 무너지면서 증조 마님 앞에 주저 앉아 울며: “증조 할머니, 억울함을 풀어 주시려고 돌아오셨군요. 만약 조금 더 늦으셨으면 큰일날 뻔 했습니다.”주부 저택 입구라 비록 일반인은 들어올 수 없다 해도 증조마님은 주명취가 이런 실태를 보이는 것이 싫어서 자혜로운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으며 위엄 있는 목소리로: “일어나거라, 안으로 들어가자.”말을 마치고 한 늙은 상궁이 부축하여 바로 들어갔다.주명취도 자신의 실태를 자각하고 일어나 눈물을 훔치고 쫓겨난 아버지가 뒤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낭패감이 들었다.주명취는 슬픔에 복받쳐 목이 매인 채: “아버지.”주씨 집안 가장이 작은 목소리로: “울지 말고 들어가자, 네 증조할머니가 우리 억울함을 풀어 주실 게다.”주재상은 증조마님이 오시길 기다리고 있었다.증조마님의 가마가 바깥에 도착하자 이미 누군가 와서 알린 것이다.주재상은 천천히 눈을 뜨고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방안의 사람들을 보고 지친 눈가를 풀며 차게 식어버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집사가 나지막이: “어르신, 드시지 마세요, 뜨거운 차를 내오겠습니다.”“식은 차에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는 구나.” 주재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느릿느릿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때 증조마님이 통상궁(佟嬤嬤)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주재상이 천천히 일어나 증조마님을 부축하러 나가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모시고 들어와 자리에 앉으시게 하고 자신도 자리에 앉았다.증조마님이 자리를 잡은 후 중후한 눈빛으로 주변의 사람들을 쓱 둘러 보고, “전부 꿇어 앉아 뭐하는 게야? 일어나!”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던 주대부인이, 증조마님이 돌아오신 것을 보고 그제서야 차분해지며 울며 무릎걸음으로 나와, “노마님, 손주 며느리의 억울함을 풀어주세요, 시아버지께서
주대부인에게 처분을 내리는 주재상주대부인은 오늘 어차피 시아버지에게 밉보인 김에, 노마님이 계실 때 이 일로 노마님이 명을 내리시면 다시는 누구도 주대부인을 괴롭힐 수 없도록 노마님이 다시 그녀에게 숨통을 틔워 주길, 그래서 희상궁을 죽여주면 제일 좋을 텐데 생각했다.희상궁이 죽지 않으면 언젠가는 화근이 된다.증조마님의 눈이 잔혹한 빛으로 방금 입구에서의 자애로운 눈매는 완전히 사라지고 음침하게: “이 일은 나도 알았네, 입을 함부로 놀린 것을 내가 직접 혼을 낼 것이야. 네가 여기서 이래저래 얘기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주재상이 그제서야 천천히 묻길, “어머님, 누구를 혼내신다는 말씀이십니까? 희상궁입니까?”증조마님이 이 말을 듣고 주재상을 보고 상당히 불만스런 안색으로, “왜? 내가 혼내면 안되는가?”주재상이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잠시 생각하더니: “무슨 자격으로? 죽을 날이 가까운 노인 자격으로? 지금 누가 감히 저를 넘어 혼을 내겠습니까?”증조마님이 거의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날카로운 목소리로: “뭐라고? 어디 한 번 다시 말해 보거라.”“좋습니다.” 주재상이 집안 사람들을 보고 분명하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내 말 잘 들어, 만약 누구든 감히 희상궁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건드리거나 희상궁 앞에서 무례한 말을 한 마디라도 뱉으면 상대가 누구든지 목이 떨어질 거라고 장담하지.”이 나지막한 목소리에 놀라 좌중의 심장이 오그라들고, 이제…… 노마님은 더이상 주재상을 통제하지 못하는 걸까?증조마님마저 잠시 정신이 아득해서 어안이 벙벙한 채로 주재상을 바라봤다.“집사, 준비하라고 분부한 독주는?” 주재상이 찻잔을 들고 느긋하게 말했다.집사는 놀라고 두려워하는 안색으로, “그게……”“목아(穆婭)!” 주재상이 노하여, “집사를 내보내라, 이 집에서 내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목아는 큰 몸짐으로 안쪽 대청으로 들어가 직접 집사를 달랑달랑 들고 나왔다.집사는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가 입
주대부인의 마지막이 말이 떨어지자 현장은 쥐 죽은 듯 적막하고, 울며 애원하는 소리마저 잠시 사라졌다.증조마님은 노해서 일어나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 말은 네 늙은 어미도 내 쫓겠다는 것이냐? 오늘 네가 감히 이 집안의 누구라도 해하는 날엔 내가 네 눈 앞에서 죽어주마, 너는 불효자란 죄명을 지고 살아야 할 것이다.”주재상이 노모를 보고 차갑게: “저는 사람을 시켜 어머니를 월미암에 바로 보내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지켜 보시지요, 우리 주씨 집안 사람을 좀 보세요. 어머니가 눈감아 줘서 어떤 꼴이 됐는지, 이 사람들을 좀 보세요, 쓸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어머니도 죽고, 나도 죽습니다. 이 사람들 너나 할 것 없이 전부 고깃덩어리에 불과해요, 하지만 그때까진 어머니도 저도 살아서 볼 수는 없지요.”증조마님이 화를 내며: “그래서 내가 늘 네게 권한 것이, 네가 아직 힘이 있을 때 집안 사람을 발탁하라는 것이야. 우리 주씨 가문이 큰 나무로 장성하면, 뿌리는 땅으로 뻗어 천리에 이어질 것이니 누가 감히 우리를 건드린다는 말이냐? 지금 아직 일이 터지지도 않았는데 먼저 자기 사람에게 칼을 대다니 무슨 약해 빠진 짓이냐? 너는 진정한 영웅이니 주씨 집안의 만고의 가업을 위해 필사적을 싸워야지 벌벌 떨어서야 되겠느냐.”주재상이 냉소를 지으며, “노모는 역모를 꾀하십니까? 나이만 많으면 뭐합니까, 옛 것을 배워 적용을 하질 못하니 조만간 우리 주씨 가문의 큰 우환이 될 것입니다. 만약 아버지께서 살아 계셨으면 죽기를 각오하고 어머니를 쫓아내시라고 간언해 주씨 가문 자손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았을 텐데.”이 말에 모든 사람이 놀랐다, 이 말이 대역무도하다 뿐인가? 가히 인륜에 어긋난 말이다.증조마님은 눈을 깜박이고 거의 그 자리에서 까무러치기 직전이다.이 순간 주재상이 이미 목아에게 손짓을 하고 눈짓으로 독주를 가리켰다.목아는 큰 걸음으로 다가와 독주를 받쳐 들고 주대부인의 앞까지 갔다.주대부인이 절규하고 있는 힘을 다해 뒤로 숨으며
주씨 집안을 살리는 길주재상도 사실 주대부인을 감싸는 쪽이었다. 예를 들어 혜정후 때도 여전히 혜정후에게 살길을 마련해 주고자 했던 것처럼 말이다.하지만 그때도 혜정후가 저지른 짓거리를 일일이 알고 나서 주재상은 까무러치게 놀랐다.이게 주씨 집안 사람이 저지른 짓이란 말인가?누가 그들의 간이 배 밖으로 나오게 했지? 그들이 어찌 제멋대로 악행을 일삼으며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가장 중요한 건 혜정후가 그때 납치한 게 초왕비 였다는 점으로 혜정후도 뒤에 그 사실을 알았지만 여전히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는 점이다.그러니까 이들은 이미 황실이 안중에도 없다는 뜻이며, 그들 마음 속에 주씨 집안이 황실보다 높다는 뜻이다.오늘 이 대청에서 그들이 한 말도 전부 이 점을 증명한다. 그들은 심지어 제왕이 현장에 있다는 사실조차 신경 쓰지 않고 그런 역모성 발언을 서슴지 않았고 행동으로 옮겼다.주씨 집안은 기고만장한 게 아니라 신하로 조정에 반란을 일으키고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려는 것이다.모든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이런 속내가 감춰져 있고, 황위도 못 얻을 게 뭐 있냐, 가져오고자 하는지 아닌지 두고 볼 뿐이다.태상황이 성지를 내려 소문을 퍼트린 사람을 엄중히 징벌하라고 해서 사형을 받은 것은 주부 사람 하나지만 태상황은 이번 일로 주재상에게 삼엄한 경고를 한 것이다.“천한 년 하나때문에 아주 미쳤구나!” 증조마님이 분에 못 이겨 찻잔을 집어 던지자 큰소리가 나며 깨졌다. 나이든 군주의 반듯한 태도는 온데 간데 없고, “그때 내가 죽였 어야 했는데, 만약 네가 다시는 그리워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으면 내가 그년을 왜 살려 뒀겠느냐? 이 참사의 화근은 다 그년 때문이야, 늙고 죽어도 우리 주씨 가문을 해치려 들다니.”주재상이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그때 당신은 구름과 비를 마음대로 부릴 만한 권세였지요, 그녀를 죽이는 것쯤 이야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웠습니다. 만약 제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면 희야는 벌써 죽었겠죠, 저는 쭉 봐왔습니다. 당신이 죽
주재상의 명령과 깨어난 희상궁증조마님이 깨어나 성지 내용을 듣고 오랫동안 입술을 떨고 공포로 눈동자가 오그라들며, “어찌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이냐? 주씨 집안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른 게야?”“군주마마,” 친정에서부터 따라와 그녀를 오랫동안 모신 통상궁이, “아마도 어르신도 잘못하신 것 같지 않습니다. 주씨 집안이 몇 년간 참으로 지나친 점이 있었지요.”“그건 우리에겐 당연한 것이야.” 증조마님이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망연자실하게 애간장이 타는듯: “우리는 주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야, 내 딸이 궁중에 시집가 황후가 되었고, 내 손녀도 궁중에 시집가 황후가 되었으니 우리 주씨 집안이 이 북당에서 제일 큰 가문이란 말이다. 태후의 소씨 집안(蘇家)은 우리집 신발을 들 자격도 못 되는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어? 태상황은 고작 죽은 호국공 한 명때문에, 천한 년 하나 때문에, 성지를 내려 우리 주씨 집안의 안방마님을 죽여? 나는 모르겠네, 나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어, 넌…… 넌 어서 날 부축해서 나가자, 입궁해서 태상황을 만나야겠다.“군주마마, 그러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 일은 여기서 끝내시지요, 대부인도 죄로 돌아가셨으니 저흰 월미암으로 돌아가요.” 통상궁이 권했다.“쫓아내는게 마땅해, 그것을 쫓아내는 것이 마땅해.” 증조마님이 천천히 이어나 후들거리는 걸음으로, “그것을 쫓아내라, 그 아이는 우리 주씨 집안 사람이 아니니 우리 주씨 집안이 어전에서 만조백관들 앞에서 황제의 훈계를 들을 필요 없어. 이 무슨 체면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야.”증조마님은 눈앞이 캄캄해 지더니 ‘꽈당’ 소리가 나고 다시 바닥에 쓰러지셨다.주재상은 결코 이렇게 끝낼 생각이 없으므로, 밀어붙이며 일제 정리에 들어갔다. 주씨 집안 자제가 소유한 산업과 재산을 조사한 뒤 일률적으로 전부 회수하고, 모든 사람을 공개적으로 선포한 월례 은자만으로 살게 했다.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주재상은 특명을 내려 수많은 사복 시위를 양성해 몰래 주씨 집안 자제의 일거수일투
주재상과 희상궁의 재회원경릉이 예를 취했다.주재상이 들어가 문을 닫았다.희상궁이 침대에 앉아 주재상 머리의 백발을 보고 흠칫하다가 마음이 아려 와서, “당신……”주재상이 옷자락을 날리며 침대 옆 걸상에 앉아 조용히 그녀와 마주 보고 있다.주재상이 웃으며 손을 뻗어 희상궁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여기 앉아서 당신을 볼 수 있다니 이거 기분 진짜 좋은데.”희상궁이 낮게 쉰 목소리로, “그러게요, 살아있어 정말 좋네요.”“당신도 나도 늙었어, 살 날도 얼마 없는데 이렇게 낭비하면 안돼.” 주재상이 말을 하며 품에서 물건을 하나 꺼내더니 희상궁 앞에 슬쩍 놓는다.희상궁이 뭔가 들여다보니, 뜻밖에도 곰팡이 슨 흔적이 있는 자수 쌈지다.그녀가 웃으며, “당신 아직 가지고 있었어요?”“그럼, 실이 빠지고 곰팡이도 좀 폈어, 빨아도 안 지워지더라고. 어쨌든 소년 시절의 물건은 특별하니까 몸에 간직하고 있었지. 생각해보니 나중에 순장품으로 관에 들어갈 때도 같이 가져 가게 될 것 같은데.”희상궁이 웃는데 눈가가 발그레하게 풋풋해졌다.“날 미워했어요?” 희상궁이 물었다.주재상이 잠시 생각하더니, “미워해? 당신 마음을 짓밟아 죽이기까지 했지만 난 억지로 강행할 수 없었어, 나중에 당신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알았지, 이렇게 한 것도 나쁘지 않구나 하고. 만약 당신이 시집을 왔으면 1년이 못 돼서 죽었을 게 틀림없어. 이 세상엔 그렇게 모질고 독한 사람이 있더군.”희상궁이 고개를 끄덕이며, “전 그때 죽는 게 두려웠어요.”주재상이: “죽는 걸 무서워해 주길 잘 했어. 너와 결혼하지 못했지만 하여튼 난 네가 궁에 있다는 것을 알고, 네가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 봐, 이생도 다 끝나가잖아, 우리 둘이 각자 잘 지내온 것만으로도 행운이었어.”주재상은 넋을 놓고 희상궁을 쳐다보다가 살살 고개를 흔들며, “있잖아, 당신은 이렇게 늙었는데 내가 당신을 보면 왜 항상 예전 얼굴로 보이지?” “그래요, 못 봐줄 거예요. 내 한창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