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궁이 독을 먹었다. 그녀가 무슨 독을 먹었는지 어의는 찾아내지 못했고 방안에도 아무 흔적이 없었다. 심지어 독주를 먹은 잔이 깨끗하게 씻겨 있었다.조어의가 부랴부랴 해독 약을 만들어 그녀에게 두 알 먹였지만 약을 먹고 난 뒤에도 희상궁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힘없는 눈동자와 가는 숨소리는 그녀가 죽음에 문턱에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 광경을 본 원경릉은 몸에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우문화 조어의를 막아서는 순간 약 상자를 꺼냈다. 침상 옆에 꿇어앉은 원경릉은 청진기를 꺼내 심장박동을 확인했다. ‘박동이 너무 약해……’그녀는 긴장된 표정으로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약 상자를 뒤져 아트로피닌을 꺼냈다. 희상궁이 무슨 독을 먹었든 관계없이 원경릉은 다급한 마음에 우선 약을 넣고 보았다.그 순간 주수보가 안으로 들어왔다. 우문호가 그를 말릴 틈도 없이 그는 한 걸음에 희상궁이 누워있는 침상으로 달려왔다.그는 입이 벌어진 채 공허한 눈빛으로 희상궁을 내려다보았다.주수보가 부중에서 출발하면서 사람을 시켜 쓸만한 약은 모조리 챙겨 왕부로 오라고 명령했다.그는 축 늘어진 희상궁을 보자 온몸에 한기가 돌고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해다.우문호는 그런 주수보의 모습을 가만히 보더니 입을 열었다.“재상… 너무 늦게 오셨습니다.”주수보는 멍한 표정으로 원경릉이 희상궁에게 위를 세척하는 수액을 놓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지난날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주수보가 희상궁을 처음 만났을 때, 그때 그녀는 겨우 열다섯의 소녀였다. 그녀는 큰 눈에 웃을 때마다 쏙 들어가는 보조개가 아름다웠고 깔끔하게 빗은 쪽머리가 새침해 보였다. 고급스러운 자수가 놓인 비단 옷을 입은 그녀는 지금의 태상황, 당시 태자 옆에서 그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날은 하늘에서 구멍이 난 것처럼 거세게 비가 내렸다. 태자는 비를 맞으면서도 지금의 주수보를 상대로 무술을 연마했다. 그때 상선도 어린 태감이었는데 그와 어린 희상궁은 항상 복도에 숨어서 태상황
오랜 기억 속에서 주수보는 점차 현실로 돌아왔다.그는 앞으로 걸어가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호흡은 점점 가늘어졌고 숨이 가쁜 듯 가슴이 연신 오르내렸다.침상에 삐죽 나온 그녀의 손목은 가시나무처럼 가늘었다. 주수보는 당시에 왜 그녀의 손을 놓았을까 왜 좀 더 용기내지 않았을까 후회됐다. 주수보는 희상궁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순간 그의 마음속에선 거친 눈보라가 치는 듯 혼란스럽고 무서웠다. 그는 고개를 돌려 원경릉을 보았다.“가망이 없는 건가?”그는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심장이 미친 듯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원경릉은 고개를 들고 눈물을 닦았다. 희상궁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상황이 많이 좋지 않아요. 약을 투여해 독성을 최대한 희석시키기는 했지만 독이 이미 몸에 스며들어서…… 얼마나 독이 퍼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조어의에게 물어보시는 게 좋겠어요.”어의가 다가와 희상궁의 맥을 짚었다.“맥박이 너무 약합니다. 몸속으로 독이 많이 퍼진 것 같습니다. 해독환을 먹이고 왕비께서 약도 썼지만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그녀가 무슨 독을 먹었느냐.” 주수보는 아무런 표정 없이 조용히 물었다. 주수보는 감정을 숨기는 데 능했다. 기쁨, 슬픔, 노여움도 쉽게 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의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의 바짝 마른 입술이 그의 마음속 깊은 곳의 공포를 보여주었다.“모르겠습니다. 희상궁의 방에서는 주전자와 독약을 담았던 종이를 태운 재를 제외하고 어떠한 것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희상궁을 독살하려고 독을 종이로 싸서 왔을 것이다. 그 종이까지 태워 무슨 독인지 모르게 하다니…… 범인은 희상궁이 죽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주수보는 희상궁을 바라보며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어쩌다가… 이렇게…”주수보가 조용히 읊조렸다.우문호는 주수보와 희상궁이 단둘이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원경릉을 부축해 밖으로 나갔다.원경릉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원경릉이 뱉는 말이 칼처럼 우문호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우문호는 흐느끼는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처절하게 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파 눈을 감았다.“미안해… 미안해…원경릉” 그의 목소리는 후회로 가득했고, 원경릉의 큰 눈에는 분노와 슬픔이 가득했다.주수보의 명을 받은 하인이 많은 약들을 가져왔다.주수보는 탁자 위에 약을 쏟고는 약 뚜껑을 하나하나 열어서 확인했다. 그리고 몇 개를 골라 먼저 먹어보더니 끓인 물에 약을 갈아 넣고는 희상궁 입에 조금씩 쏟았다. 원경릉도 어의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주수보를 지켜보았다.희상궁에게 약을 먹이고 난 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으며 그의 얼굴에는 비통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이기지 못할 절망에 빠지면 저렇게 되는 것일까? 주수보의 마음엔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녀의 손을 한시도 놓치지 않았으며 마음속으로 그녀가 살아나길 간절히 빌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선과 소요공이 도착했다. 소요공은 설연(雪莲)을 한 떨기 가지고 와 사람을 시켜 물을 부어 끓이게 했다. 물이 끓자 주수보가 먼저 먹어보고는 희상궁의 입에 넣어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숨소리는 점점 더 작아졌다. 어의가 희상궁의 손목을 잡고 다시 진맥했지만 맥박은 여전히 가늘었다.“재상께서는 돌아가 보세요. 금방 돌아가시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돌아가서 처리하실 일도 있지 않습니까.”소요공이 주수보에게 말했다.“뭐가 그렇게 급하십니까?”소요공의 말을 듣고도 주수보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태상황께서 헛소문을 퍼뜨리는 자를 엄벌하라고 했습니다.” 소요공이 조용히 말했다.“엄벌?” 주수보가 담담하게 말했다.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조소를 띤 얼굴로 “다들 나가세요. 난 그녀와 함께 있고 싶어요.”라고 말했다.주수보의 진지한 표정에 모두들 자리를 떴고 안에는 다시 희상궁과 주수보 둘만 남았다.원용의는 사식이를 위
“이제 들어가서 쉬세요. 아직도 자기가 이팔청춘인 줄 아십니까?” 소요공이 주수보에게 말했다.“난 괜찮아요. 이렇게 가만히 보고 있으니 좋네요.” 그는 희상궁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전에는 흰머리도 없었는데, 언제 이렇게 세월이 흘렀는지 시간이 무정하네요.”라고 말했다.주수보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그 역시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겉으로 보이기에는 야심으로 가득 차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지만, 그렇다고 마음고생 한 번 하지 않았겠는가. 원경릉과 우문호는 하루아침에 야위어버린 주수보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원경릉 마음속에 주수보에 대한 원망과 증오가 점차 사라지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주수보는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산 것인가…… 그 긴 세월 희상궁을 얼마나 그리워했을까……’그 순간 왕부의 하인이 안으로 들어오며 우문호에게 약 한 병을 주었다.“대주의 강영후(江寧侯)께서 약을 가져오셨습니다. 용태후께서 직접 조제한 용염단(龍焰丹)이라고 합니다. 본래는 황조부께 드리려고 한 것인데… 소식을 듣고 이곳으로 오셨다고 합니다. 중독이 됐을 때 먹으면 아주 좋은 효과가 있는 약입니다.”어의는 대주의 용태후가 직접 만들었다는 얘기를 듣고 기뻐하며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약은 검은콩보다 작고 동그란 것이 윤기가 자르르 흘렀고 냄새를 맡으니 연꽃 향기가 났다. 향기가 어찌나 좋은지 무우환(無憂丸)보다도 향이 좋았다.“빨리 물을 떠오거라.”주수보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까지 침울하던 주수보의 얼굴이 용태후가 보낸 약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강영후가 보낸 약은 물에 타서 먹지 않고 혀로 꾹꾹 눌러 천천히 녹여 먹는 겁니다.”우문호가 말했다.주수보는 약을 들어 희상궁의 입을 살짝 벌리고 약을 집어넣었다. 주수보는 희상궁의 고개를 살짝 받치며 약이 녹아 기도로 들어가지 않도록 했다. 그녀 입안의 약이 천천히 녹아 흡수될 때까지 주수보는 한시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약을 먹은 후에도 희상궁
주수보는 강영후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탕양에게 강영후를 좋은 술집으로 데려가라고 부탁했다. 그가 술집으로 가기 전 희상궁의 상태를 살피려고 돌아오는데 원경릉이 대청에서 그를 막아섰다.“재상 혹시 밖으로 나가시려거든 덕화찻집으로 가서 바깥에는 어떤 소문이 도는지 확인 좀 부탁드립니다.”덕화찻집은 소문의 근원지이며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다.주수보는 빤히 그녀를 바라보더니 “예, 왕비 이번 일은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그는 소요공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그의 청색 옷은 바람에 나부꼈고 눈처럼 흰 머리카락은 아침 햇살에 반짝반짝 빛났다. 날씨가 추워진 탓에 백성들의 옷차림이 두꺼워졌다. 그는 말을 끄는 시종(侍從)과 함께 천천히 걸어가며 소요공과 몇 마디 주고받고 싶었지만 그들은 서로 말을 아꼈다. 그들은 모퉁이에 다다르자 말없이 각자 제 갈 길을 갔다.주수보의 뒤에서 걷던 시종은 그의 뒷모습에서 쓸쓸함을 느꼈다. 길게 늘어진 그의 그림자에서 왠지 모를 고독함과 허망함이 보였다. 주수보는 허리를 곧게 펴고 따스하게 비추는 햇빛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지난밤의 한기를 배출하였다.뒤에 있던 시종이 말을 재촉해 주수보를 쫓아왔다.그는 원경릉의 부탁을 듣고 시종을 불러 덕화찻집에 가보라고 했고 결과는 이미 주수보의 손에 건네졌다.그시각 주부(周府).주씨 집안의 큰 어른이 밤새 돌아오지 않자 사람들이 걱정하기 시작했다. 주수보가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답사나 업무를 보러 간 경우를 제외하고는 없다. 그는 술을 먹으러 가도 집안 식구들이 걱정하지 않게 하인을 보내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곤 했다. 그러나 어제 아침에 주부에서 말을 끌고 나간 후 종적을 감춘 것처럼 사라졌다. 그는 떠나기 전에 태상황님을 뵈러 간다는 말만 남겼을 뿐 아무 소식이 없었다.주부 사람들은 걱정되는 마음에 사람을 시켜 궁 밖에서 주수보의 행적을 물었다.왕부의 문을 지키는 수장이 주수보가 아침에 입궁하여 점심쯤에 출궁했고 그 후로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이 말을 듣고
주수보는 편액에 걸린 글자의 뜻을 그들 스스로 깨달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집사! 저기 걸린 편액을 바꿔야 하겠어! 내가 새로 쓴 게 있으니 새 거로 가져오게.”주수보는 사람들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집사가 허리를 굽히며“재상 나리께서 어떤 편액을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주수보는 몸을 돌려 집사를 바라보았다.“엊그제 내가 쓴 거 가져와.”그 말을 들은 집사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 편액을 말씀하시는 겁니까?”며칠 전 주명양이 초왕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규방에서 단식을 할 때, 이를 들은 주수보가 화가 나서 쓴 편액이다. “그래 그거!” 주수보가 화를 냈다.그의 위엄 있는 표정을 보고 집사는 온갖 의문을 애써 감추며 그의 명령에 따랐다.주씨 집안사람들은 주수보가 돌아왔다는 소리를 듣고 급히 나왔다.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나오라는 말에 말을 못하는 노부인까지 하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나왔다.주수보는 정좌에 앉아서 처첩과 자손들이 본관으로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에는 주명양도 있었는데 그녀의 싸늘한 눈빛으로 가장자리에 서있었다.주수보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근엄한 얼굴로 그들을 보았다.주수보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에 모두 놀라서 어안이 벙벙했다. 게다가 하룻밤 사이에 사람이 반쪽이 되고 머리가 하얗게 세다니, 다들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 이게 무슨일인지 너무 궁금하고 무서웠다.그의 아들은 급히 걸어 나왔다. “부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왜 이렇게 되셨어요?”이 말을 들은 주수보는 아무 말 없이 날카롭게 그의 아들 내외를 보았다.그 눈빛이 얼마나 차가운지 모두들 아무 소리도 못하고 서로 훔쳐보았다.그런데 집사가 편액을 가지고 나왔을 때 사람들은 거기에 쓰인 글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때마침 주명양도 도착했다. 제왕은 주명취 옆에서 조용히 주수보가 쓴 글자를 보고는 깜짝 놀라 멍하니 굳어있었다. “외조부,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제왕! 이
“외조부께서 어떤 소문을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바깥사람들이 하는 말은 상관하지 마세요. 그리고 방금 외조부께서 본왕에게 물으셨죠. 주씨 가문이 오만방자한지 아닌지, 본왕 생각엔 주씨 집안은 오만방자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제왕은 주씨 집안을 헐뜯는 소문이 하루 이틀 돈 것도 아니고 지금와서 유별나게 행동하는 외조부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왕도 말을 저렇게 했지만 속으로 주씨 집안은 오만방자, 안하무인이라고 생각했다. 길거리에 모르는 사람을 붙잡고 ‘주수보’라고 말만해도 사람들은 벌벌 떨었다. 주수보를 중축으로 이루어진 막강한 집안사람들이 세상에 무서울 게 뭐가 있겠는가.주수보는 제왕의 말을 무시하고는 주대부인을 바라보았다.“너는 바깥사람들이 뭐라고 떠드는지 아느냐.”“부친, 항간에 떠도는 헛소문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넘기십시오.” 주대부인의 뻔뻔함에 주수보의 눈빛이 더욱 날카롭게 주대부인에게 꽂혔다.“그래, 네 말이 맞지. 허나 소문은 독화살과 같아서 잘 못하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어.”주대부인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주수보의 눈을 피해 고개를 떨구었다.“예…… 부친 말씀이 맞습니다.”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주수보가 말하는 소문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이번 소문은 여느 때와 달리 파급력이 어마어마해서 3일 만에 온 백성들이 다 알게 되었고 평민 양반 할 것 없이 이 소문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궁금해했다.소문의 주인공이 당대의 태상황을 모시는 상궁이라니…… 당연히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주씨 집안의 노부인이 몸을 덜덜 떨며 눈을 감았다.그녀는 주수보를 잘 알고 있었다. 주수보는 다른 일은 다 참아도 희상궁이 관련된 일은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그게 가족이든 벗이든 상관하지 않고 엄하게 다스렸다. 그래서 노부인은 누누이 주씨 집안사람들에게 희상궁은 절대 건드리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주수보는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너희들은 방우(方宇)가 누구인지 아느냐.”그의 눈빛은 말끝마다 주대부인에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주대부인은 주수보가 식구가 아닌 희상궁보다 주씨 집안의 며느리인 자신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고 여겼다.“부친, 둘째 노부인께서 하신 말을 저도 들었습니다. 방우는 죽어 마땅하지요. 감히 태상황의 수석 궁녀와 내통하다니! 죽어서도 그 죄를 씻지 못할 겁니다!”방우도 죽은 마당에 이 소문의 근원을 어떻게 찾을 것이며 과거의 일을 누가 따지겠는가? 방우라는 금군이 처형당한 것은 태상황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라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태상황의 노여움을 사 처형을 당한 남자, 궁중에서 여러 해 동안 시중을 들었던 늙은 상궁의 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사건을 파헤쳐야 할 가치가 있을까.주대부인의 당돌함에 주수보는 분노했지만 담담한 목소리로 주대부인을 쳐다보았다.“방우는 16살부터 태상황을 곁에서 모셨고, 태상황이 황제에 등극한 이후로는 그는 어전 시위대장으로 임명되어 임기 동안 맡은 직무를 열심히 하였다. 태상황과 방우가 이끈 어전부대는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했으며 나와 소요공 그리고 방우는 생사를 함께한 사람들이다. 수많은 전투에서 북당이 승리를 하고 평화를 되찾은 날은 바로 28년 전의 어제이다.”사람들은 처음 듣는 얘기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수보를 보았다. 주수보가 참전해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 전쟁이 얼마나 힘겨웠는지 누구와 함께 참전을 했는지는 처음 듣는 소리였다.어전부대의 대장을 맡을 정도로 태상황의 총애를 받던 방우가 태상황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니, 그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은지 알 수 있었다.“방우는 26살로 여기 있는 너희들보다 젊은 나이에 죽었다. 당시 태상황은 등극한지 얼마 안 되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로 했었어 태상황은 그 날짜보다 일찍 답사를 나섰는데 적들이 이를 알고 태상황을 시해하려고 한 것이야. 방우는 이 소식을 듣고 태상황을 보호하려다가 죽게 되었지. 태상황은 그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를 호국후(護國侯)로 추서했다. 방우는 우리 북당의 첫 호국후이다.
잔뜩 긴장한 채로 앞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 있었던 주 지부는 우렁찬 상대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중심을 잃은 듯 비틀거렸다. 그는 이내 팔을 뻗어 망루의 기둥을 붙잡으려 했지만, 허공에서 멈추고 말았고, 그대로 몸이 앞으로 쏠려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말에서 빠르게 날아올라,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그에게 달려갔다. 상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주 지부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그를 안고 빙 돌아서 바닥에 착지했다.주 지부는 깜짝 놀라서 그만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를 구해준 사람은 반짝거리는 눈망울에, 품위 있는 모습의 젊고 잘생긴 사내였다. 주 지부는 그를 황제의 호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의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새도 없이 그에게 예를 올렸다.“대인,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그때 말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서일이 먼저 말에서 내려, 다급히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으십니까?”우문호도 매우 놀란 듯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주 지부는 정말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숨을 들이쉬었다.“괜찮다.”그러고는 주 지부를 보며 물었다.“자네는 누구요?”주 지부는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보며, 누가 황제인지 추측했다.황제는 올해 마흔에 가까운 나이로 알려져 있었기에 위엄이 넘쳐 보일 것이었다. 그는 일행 중, 냉 수보와 홍엽을 만난 적 있었기에, 거친 모습을 한 이 인물은 아마도 호위로 추측된다. “묻지 않았소? 자네는 누구요? 어찌 죽으려고 하는 것이오?”서일은 그가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자, 큰 소리로 다시 물었다.주 지부는 울 지경이었다. 냉 수보가 그를 보고 있으니, 예를 올려야 하지만, 황제도 자리에 있으니, 바로 냉 수보에게 예를 올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대체 누가 황제란 말인가?그는 황제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어, 결국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고는 그들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
원경릉의 말은 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자리에 있던 관리들은 기쁨과 동시에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 대인은 땅에 엎드려 온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그는 살아생전에 자신이 황제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평소 차분하고 신중한 주 지부도, 그도 감정이 격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했다.황후를 만난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라 생각했는데, 황제까지 오신다는 소식에 그의 마음은 흥분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원경릉은 평생을 경성에서 다섯째와 함께 있었기에, 그녀는 그저 그가 온다는 사실을 간단히 전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녀는 다들 걱정 없이 역병을 치료하고, 언제나 황제가 그들의 뒤를 든든히 지켜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을 보니, 황제가 직접 오는 것이, 지방 관리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았다.원경릉이 급히 말을 덧붙였다.“폐하게서는 그저 역병 때문에 온 것이니, 모두 각자 맡은 일에만 최선을 다하면 되네.”“예, 예, 마마의 명을 따르겠습니다.”주 지부가 눈물을 닦으며 답했다.그렇게 관아와 의서가 협력하여, 오계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원 할머니는 역병을 치료할 수 있는 처방을 몇 가지 내렸다. 경증 환자는 약차를 계속 마시고, 증상이 악화하거나 중증 환자는 그녀의 처방을 사용하도록 했다.전에 이미 근처 주부에 연락해 약을 보내라 명했고, 오계부에서 구비한 약까지 있으니, 이번 역병을 대처할 수 있었다.오계부 의서는 이번 역병을 과거의 역병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소홀히 한 것 외에는 준비가 충분했다.원경릉은 황제 일행이 저녁 무렵 오계부에 도착할 것이라 예상했다.주 지부는 원래 여러 관리와 함께 황제를 맞이할 예정이었지만, 원경릉이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녀는 황제가 미복 순행 중이니, 과하게 맞이하여 백성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다.그 말에 주 지부는 당황했다.황제가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맞이하지 않는다니, 어찌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그러나 그는 황
약을 쓰자, 주 지부의 열이 단번에 내려갔다.열이 내려가니 정신이 맑아져, 그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애써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마마에게 예를 올리겠다고 고집 피웠다.원경릉은 그에게 누워 있으라고 말한 후, 역병에 관해 이야기하며 주 지부에게 이를 중시할 것을 당부했다.주 지부는 이를 듣고 깜짝 놀라 말했다.“소신은 매일 의서에 사람을 보내, 역병의 상황을 보고받고 있사옵니다. 매일 보고된 상황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역병이 발생했지만, 작년과 비슷한 정도였고, 약재도 충분한데, 어찌 이렇게 심각해진 것입니까?”“매년 역병이 발생했으나, 대대적으로 퍼지지 않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네.”원경릉이 답했다.“의서의 이 대인을 불러, 상황을 확인하겠습니다.”주 지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어제 이미 그를 찾아가, 환자 수와 사망자 수를 조사하라 명했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것이네. 자네가 사람을 보내, 관아에 와서 상황을 보고하도록 하게.”“예!”주 지부는 곧바로 사람을 보냈다.푸른 옷을 입은 남자는 관아에서 일하는 관리였기에, 그는 반 시진도 채 되지 않아, 관아 내에서 병에 걸린 자가 얼마나 되는지 통계해냈다.관아 내에서 역병 증상을 보인 사람은 총 열여덟 명이었고, 그중 두 명은 병세가 심각하여 이미 집에서 쉬고 있는 상태였다. 주 지부는 관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병에 걸린 줄 몰랐고, 관리의 보고를 들은 후, 큰 충격을 받았다.의서의 이 대인은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바삐 움직였다. 서관 대인이 직접 오셨으니, 어떻게든 시키는 일을 완성해내야 했다.그는 사실 역병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고, 그저 작년과 비슷하다고 여겼었다.하지만 여러 지역과 의원을 돌아보고 나서야, 이번 역병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처음엔 그저 서관 대인에게 보고만 하려고 했지만, 병세가 심각해지자 그도 조급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인원수를 통계하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도, 다섯째 일행은 여전히 도착하지 않았다.그래서 원경릉과 할머니는 다른 의관을 더 둘러보기로 하고, 몇 군데 더 돌아본 뒤 관아에도 갈 계획을 했다.그런데 한 의관에 들어서자마자, 푸른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다급히 뛰어오며 말을 걸었다. “수 의원, 대인께서 병세가 위중합니다. 어서 봐주셔야 합니다.”의원은 그 말을 듣자마자, 약상자를 집어 들고 다른 환자들을 그냥 남겨둔 채, 푸른 옷의 중년 남자와 함께 나가려 했다.원경릉이 그를 막아 세우며 말했다.“의관에 있는 환자들을 돌봐야 하지 않소? 우리 할머님께서도 의원이니, 지부 대인의 병은 할머님께서 봐 드릴 것이오.”푸른 옷의 사내는 초조한 듯 원경릉을 향해 소리쳤다.“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대인의 병세가 급박한데, 혹여라도 지체되면 당신들이 책임질 수나 있겠소?”바로 그때, 원 할머니가 호패를 꺼내, 그의 눈앞에 들이밀며 단호하게 말했다.“길을 안내하거라!”조급한 표정을 짓던 푸른 옷의 사내는 호패를 보자마자 표정이 얼어붙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그는 곧장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며 말했다.“서관 대인께서 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무례를 범해 송구하옵니다.”“그만 사과하고 길 안내나 하시오.”원경릉이 말했다.“예, 예!”사내는 급히 물러서서, 예를 갖춰서 길을 가리켰다.“마차가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서관 대인, 이쪽으로 오시지요.”원경릉은 할머니를 부축해 마차에 올랐고, 곧장 관아로 향했다.지부 대인은 따로 사저가 없어 관아의 뒷마당에서 거주 중이었다. 혼자 지내는 데다 관아가 워낙 가까워 편리했기 때문이다.관아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안으로 들어갔다.주 지부는 병세가 꽤 심각해져 있었다. 그는 어지럼증과 흉통에 시달려, 침대에 누운 채 말을 꺼낼 힘도 없었다.원경릉은 직접 치료에 나섰고, 약상자를 열어 체온 측정기와 청진기를 꺼냈다.푸른 옷의 사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가씨께서도 의원이십니까?”그러자 곁에 서
이 대인이 원경릉에게 의학을 잘 모른다고 반박할 틈도 없이, 원 할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대로 하게. 하루만 줄 테니, 그 안에 역병에 관한 모든 자료를 가져오게. 사망자 수도 포함되어야 하네." 이 말까지 듣자, 이 대인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비록 조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서관 대인이 멀리서 오계부까지 왔으니, 시키는 일은 해야지 대인의 마음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을 보내 조사를 명한 후, 이 대인은 거처를 마련해 드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원경릉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의서에 의원이 많지 않으니, 대인도 바쁘실 텐데요. 저희가 직접 오계부를 돌아보겠습니다." 이 대인은 그녀가 원 할머니의 힘을 빌려 위세를 부린다고 생각해,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말에 답도 하지 않고, 원 할머니에게 예를 올렸다. "어르신께서 머무실 계획이 있으시면, 부디 저에게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밤 대인을 잘 대접하라, 명을 내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일이나 보게." 원 할머니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원경릉에게 말했다. "먼저 좀 돌아보다, 객사를 찾아 머물자꾸나." "예!" 두 사람은 역병을 조사하기 위해 다급히 이곳을 찾아왔기에, 먼저 각지의 의원을 직접 돌아보려 했다. 아마 다섯째 일행은 빨라야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할 것이었다. 두 사람이 의서를 나서자, 이 대인은 뒤따라 나오려다 원 할머니의 날카로운 눈빛에 움찔하며 발길을 멈췄다. 두 사람은 오계부의 거리로 향했다. 거리가 꽤 번화했고, 사람들도 제법 많아, 대낮에는 조금 붐볐다. 그들은 곧장 의원으로 향했다. 의원 앞에는 약차가 많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환자는 얼마 없었다. 겉보기엔 역병이 퍼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원경릉은 안으로 들어가 의원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러자 의원은 요즘 들어 약차가 잘 팔리고 있고, 하루에 천 봉지가 넘게 팔린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도 역병
늦게 출발한 원경릉은 신속하게 오계부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오계부 근처 주현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가 현지 혜민서로 가야 한다며 잠깐 멈추자고 했다. 그러고는 혜민서에 오계부로 약을 공급할 준비를 하게 했고, 명을 받으면 바로 오계부로 보낼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당부했다. 혜민서 산하의 의료기관들은 지난 몇 년간 개혁을 통해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고, 지역 간의 연결도 긴밀해졌다. 특히 역병을 상대하는 체계가 가동되면 상부에서는 전력을 다해 의원과 약을 지원해줄 수 있었다. 신신당부한 뒤에야 원경릉과 할머니는 오계부로 재빨리 향했다. 곧이어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우문호 일행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계부는 인구가 500만 명에 이르는 곳으로, 두 개의 주부가 통합된 지역이었다. 열대에 있어, 경작지가 많고 산이 많아 농업을 위주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조정은 이곳을 서부의 주요 곡창지대로 삼고 있었던 것이었다. 농업이 발달한 지역은 상대적으로 경제도 번화했고, 현지 백성들은 벼 외에도 감, 자두, 리치 등을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었다. 리치는 신선할 때 먹을 수도 있고, 말려서 건과로 만들어 팔 수도 있기에, 어느 정도 지역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었다. 오계부는 백월국과 인접해 있었는데, 백월국은 북당의 속국으로 사이가 우호적이며 경제 교류도 활발했다. 이는 양국의 번영을 촉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계부의 지부는 장씨 성을 가진 오계부 출신이었다. 장 지부는 훌륭한 관리이며 지역 백성들로부터 존경받고 있었다. 원경릉과 원 할머니는 오계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지역 혜민서를 찾았다. 할머니는 혜민서의 서관(署館) 신분을 밝혔다. 그녀는 북당 각 주부의 의서를 총괄하는 인물이고, 총책임자이기도 했다. 혜민서의 이 의원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두 사람을 안으로 청한 후, 바로 예를 올렸는데, 마치 신선이라도 본 것처럼 목소리까지 떨고 있었다. "소인은 이자옥이라 합니다. 어르신께서 친히 오신 줄도
그녀는 일단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냉 대인이 자세한 상황을 묻는 사이에 제 대인의 피를 뽑았다. 약상자는 기능이 꽤 다양하기에, 바이러스 검사도 문제없었고, 안에는 양여혜가 준 소형 현미경도 있었다. 하지만 바이러스 관찰이나 세균 배양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지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먼저 오계부로 향하고, 그녀는 이곳에 남아 제 대인을 치료하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면 바이러스든, 세균 감염이든, 결과가 나와야 제대로 된 치료 방안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미색이 말했다. "저도 이곳에 함께 남겠습니다. 제가 환자를 돌보는 것 정도는 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괜찮으니 먼저 가거라. 어쩌면 내가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으니깐." 원경릉이 말했다. 그녀는 혼자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미색까지 데리고 가는 건 무리였다. "우리가 먼저 출발하는데, 어찌 더 일찍 도착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미색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가능한 일이다. 원 선생은 늘 기적을 만들어내니." 우문호가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원경릉에게 다가가 조심하라고 몇 마디 당부했다. "알았소. 지체하지 말고, 어서 떠나시오. 오계부에 도착하면 곧바로 관아를 찾아가, 의원의 빠른 대처를 명하라 하시오. 만약 내가 먼저 도착한다면, 내가 관아를 찾아가겠소." "알겠소. 그럼, 먼저 가겠소!" 우문호는 그녀와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보는 이가 많으니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서일은 황후를 홀로 두고 가는 것이 걱정되어, 우문호를 따라나서며 계속 물었다. "정말 황후를 이곳에 혼자 남겨도 되는 것입니까?" "그럼, 네가 남을 것이냐?" 우문호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너도 원 선생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고 있지 않느냐?" 회왕 부부도 걱정은 되었지만, 다섯째의 여유로운 모습에 자신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다섯째 부부는 늘 비밀이 많은 사람들이라, 그들은 더 이상 신경
원경릉은 밖으로 나가, 오계부에 역병이 생긴 것 같다고 전했다. 오계부는 서쪽에 자리 잡고 있어, 기후가 더운 탓에 가끔 역병이 생기긴 했었지만 백성들은 고뿔 치료에 쓰이는 약초로 끓인 차를 즐겨 마시기에, 대규모로 역병이 돈 적은 없었다. 냉 대인이 말했다. "오계부에서는 이 상황을 조정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해마다 역병이 생기긴 하지만, 빠르게 통제해 왔으니, 이번에도 예전과 같은 상황이지 않겠습니까?" 원경릉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번엔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 대인의 형도 역병으로 돌아가셨고, 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도 병에 걸렸습니다. 이렇게 관아에만 역병에 걸린 자들이 많으니, 예전보다 더 심각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해마다 역병이 생겼으니, 그에 대한 대응책도 이미 있을 것입니다." 원경릉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해마다 역병이 생겼지만, 대대적으로 유행하지 않았기에, 현지 관리들이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쉽게 통제될 것이라 생각하고, 방심할 수도 있으니깐요." 우문호가 물었다. "원 선생, 역병을 어떻게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역병 상황이 안 좋을 것이라 추측할 뿐, 정말 오계부의 상황이 어떠한지는 아직 모르네. 제 대인은 여전히 고열에 시달리고 있어, 수액을 맞히고 해열제를 먹였소. 냉 대인과 함께 들어가 상황을 자세히 물어봐야겠소. 하지만 꼭 마스크를 끼고, 병을 막아야 하오." 원경릉은 유행성 독감이나 변이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일 것이라 의심하고 있었다. 그녀가 살던 세계에서는 A형 독감의 대규모 변이가 십수 년마다 한 번씩 발생했는데, 그런 변이 독감은 현대에서도 의료 체계에 큰 부담이 되곤 했다. 그러니 지금 이곳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만약 역병이 다시 시작한다면, 가능한 한 빨리 통제해야만 했다. 원경릉의 말을 우문호와 냉 대인은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도
원경릉은 청진기를 꺼내 그의 폐를 확인해 보았는데, 남녀가 가까이 접촉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제 대인은 이내 손을 뻗어 그녀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병세가 심해 아픈 데다가,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묘한 위압감을 풍기는 의원의 단호한 눈빛과 기운에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원경릉은 앞쪽을 청진한 뒤, 그에게 옆으로 돌라고 한 다음에 꼼꼼히 살피고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며칠을 아프신 것입니까?" 제 대인은 꽉 막힌 코 때문에 콧소리를 내며 천천히 몸을 돌리고 답했다. "며칠 사이의 일입니다. 오계부를 떠날 때도 멀쩡했는데, 밤새 달리고, 말을 오래 타다 보니 고뿔에 걸렸나 봅니다." "기침 말고, 가슴 통증도 있습니까?" "예. 이곳이 아픕니다!" 제 대인은 가슴 근처를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가, 숨쉬기가 어려운 듯 손바닥을 움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도 아프고, 온몸 뼈마디도 다 아픕니다." 그러자 원경릉은 더 자세히 증상을 확인한 뒤 말했다. "약을 준비할게요. 수액을 좀 맞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액이요?" 제 대인은 멍하니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예. 질문은 하지 마시고, 그저 치료에 협조만 해주십시오. 병세가 꽤 심각한 편입니다." 원경릉은 제 대인이 폐렴이라 확신했고, 중증 폐렴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 대인은 병이 심하다는 말에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다급히 말했다. "의원 나리, 제발 최선을 다해 치료해 주십시오… 저에게는 아직 모셔야 할 노모가 있습니다. 지난달 병으로 형님께서 세상을 떠난 터라, 형님의 자식들도 제가 돌봐야 하니, 절대 이대로 목숨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원경릉이 답했다.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치료에만 집중하시지요!" 제 대인은 감동을 받은 듯 감사 인사를 올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원경릉은 곧바로 약을 지어 수액을 준비했다. 수액을 맞는 동안, 제 대인은 여전히 놀란 모습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