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식이의 생각과 우문호의 생각원경릉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하자, 만약 네가 나라면 넌 기왕비를 구할 거야?”사식이가 잠시 생각하더니: “구할 거예요!”원경릉이 의아해서, “왜?”사식이가 헤헤 웃으며, “기왕비가 죽으면 그 주명양이 정비잖아요. 기왕비랑 비하면 전 주명양이 더 싫어요.”“나도 주명양이 싫어, 하지만 주명양은 기왕비처럼 대놓고 내 생명을 위협한 적은 없거든.”그러니까 이 선택은 기호에 따라 선택하는 건가?“주명양이 앞으로 만약 기왕비가 된다면, 주명양도 지금의 기왕비처럼 같은 짓을 할 게 틀림없어요. 그리고 주명양은 더 겁이 없겠죠. 지금 기왕비의 계략이 깊고 독사처럼 공포스럽다고 해도 주명양은 미친 승냥이 같아서 승냥이에게 물리면 죽지만, 독사는 그래도 해독을 할 수 있잖아요.”원경릉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점은 원경릉도 생각했던 것으로 기왕비가 주명양에 비해 나을 게 하나도 없지만, 주명양은 반드시 더 직접적이고 더 잔혹할 게 분명하다.어쩌면 이것이 원경릉의 잠재의식 속에서 기왕비를 구하고자 하는 원인일지도 모른다.동시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원경릉은 이 원인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했다.기왕비가 그날 와서 원경릉에게 한 바로 그 말 때문이다.기왕비는 다섯째를 태자의 보위에 올리는 것을 도울 수 있다고 말했고 원경릉은 기왕비의 도움이 필요 없지만, 만약 기왕비의 오라비 동안 문하의 사람이 모두 기왕을 지지하지 않으면 기왕의 양팔을 자르는 것과 같고 어쩌면 더 심각할 수도 있다.기왕의 세력이 꺾인 데다가 이번에 황제로부터 처벌을 받으면 자연스럽게 발톱을 숨기고 조용히 은거하며 암암리에 힘을 모아야 하는데 이 과정에는 시간이 걸린다.다시 말해, 이것은 세력 재편과 같다.“사식아, 네 말대로면 주명양이 더 싫고 더 사납고 흉악한 사람인데, 기왕비가 살아있다고 반드시 주명취의 적수가 될 거란 보장은 없잖아.”사식이가 웃으며, “아뇨, 왕비마마는 사람이세요, 승냥이가 사람을 무는 건 쉽지만, 독사를 물기는 어
주지스님과 우문호의 의미심장한 대화우문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사님 혜안이 밝으시군요, 사실 저도 왕비가 많은 일을 저에게 감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오늘 왕비께서 소승에게 대략적으로 말씀을 하셨는데 기왕비의 병을 고치는 일임이 틀림없습니다.” 주지가 말했다.“그 점에 대해선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기왕비의 병을 치료하러 가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고요, 대사님 지금 큰형이 여기 있으니 부처님 앞에서라면 틀림없이 감출 수 없을 겁니다. 큰형은 늑대예요. 늑대가 자기 사람을 염려하고 구할 리가 있겠습니까? 아니요, 형을 구해준 사람까지 먹어 치워서 배를 불리겠지요.”주지가 미소 지으며, “왕야, 걱정하시는 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개를 궁지에 몰아넣어도 극렬하게 반항하는데 사악한 늑대는 말할 것도 없지요.”“제가 그들을 궁지로 몰아넣은 것도 아니고요.” 우문호가 불만스럽게 말했다.주지가: “맞습니다. 왕야께서 그러신 게 아니지요. 하지만 기왕비는 왕비마마가 자신을 구할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아는데 수수방관 하시면, 사악한 늑대는 은혜를 원수로 갚을 게 틀림없지 않습니까?”“스님 말씀 대로라면 기왕비를 구해도 물리고, 구하지 않아도 물리는데 괜히 힘을 낭비할 필요가 있습니까?” 바로 죽이면 된다.이 말은 대사님 면전에서 하기엔 마땅하지 않은 게, 출가한 사람들은 모두 자비심을 품고 있다.주지가 바둑판을 꺼내 놓으면서: “인생이 말이지요, 바둑을 두는 것 같아서 호적수를 만나면 다음이 되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만약 지는게 두려워서 직접 부딪히지 않는다면 재미가 없지 않겠습니까?”우문호의 태도는 굳건해서, “대사님이 말씀하시는 뜻은 다 알아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모험을 할 수 없습니다.”주지가 우문호를 보고 의미심장하게: “기왕전하가 여기서 며칠 계셨는데, 기왕비께서는 사람을 시켜 생필품을 보내신 적이 없습니다.”“네? 그건 또 무슨 일이죠?” 우문호가 바둑판을 놓는 것을 도우며 말했다.“왕야의 가장 큰 위협은 기왕비가 아니라 기
이튿날 우문호와 원경릉이 길을 떠날 때 바로 하산하지 않고 스님의 분부대로 뒷산에 있는 작은 절에서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저 멀리서 마차가 보였고 그 마차가 뒷산 평지에 도착하자 안에서 사람들이 하나 둘 내리기 시작했다.“이대감? 오대감? 손장군(孫將軍)? 조군왕(曹郡王)?” 서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우문호는 낯빛이 어두워졌다. 모두가 알고 있듯 부황은 어명을 내려 이곳에 누구도 면회를 오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그 어명을 무시하고 면회를 왔다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혜사부(慧師父)가 우문호를 보며 “왕야, 이 대감들이 날마다 뒷산으로 와서 기왕전하와 일을 상의하옵니다.”라고 말했다.우문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에 올랐다.“본왕 잘 알겠습니다. 스님께는 본왕이 떠났다고 전해 주십시오.” 혜사부는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두 분 조심히 가십시오.”라고 말해다.산길이지만 황실의 사원으로 통하는 길이기에 내려가는 길이 많이 험하지 않았다. 우문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경성에 도착할 때가 돼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기왕비를 치료할 약이 충분한가?”“응!” 원경릉은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얼른 대꾸했다.“네가 기왕비를 치료하는 것이 밖으로 세어 나가면 안 돼. 그리고 네 손에 기왕비의 명줄이 쥐어졌다는 것을 명심하거라. 나도 이 사건을 지켜보고 있겠다.”원경릉은 갑자기 그가 생각을 바꾸는 것이 이상했다.“방금 그 사람들 다 기왕 세력인 거야?”“다 그렇지는 않아.”그것이야말로 우문호가 걱정하던 것이었다. 그는 전까지 큰형이 한동안 자신의 분수를 지키며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리사욕을 꾀하고 기복 기간에 관리들을 부르다니. 게다가 조군왕과 손장군은 독선적이기로 유명한 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언제부터 큰형과 함께 하기로 했을까?“경릉!” 우문호가 갑자기 그녀를 보며 손을 잡았다.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열심히 듣고 네 생각을 말해줘.”그의 말을 들은 원경릉은 약간 긴장이 됐다. “살인이나 방화만 아니
“진심이다!”“내가 전에 물었을 때는 태자가 되는데 희생해야 하는 게 많다면서 그럴 가치 없다며?” 원경릉은 우문호의 마음이 왜 갑자기 변했는지 알 수 없었다.“그럴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 예전과 같아.”“그럼 왜 태자가 되겠다고 하는 거야?”우문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왜냐하면 이것은 가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전에 본왕은 부황께서 아직 젊으시고, 태자 자리가 워낙 시기 질투가 많고 위험한 자리니까…… 태자가 된다면 너도 위험할 수 있으니 그런 도전은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호국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본왕은 목숨을 걸고 참전해 공을 세웠고 내 수하에 많은 사람들이 나를 따르고 있으며 군에서 쌓은 인맥도 결코 큰형님보다 적지 않아. 그리고 큰형님의 성격이나 처세술을 보면 그는 이 나라를 다스릴 그릇이 아니다. 그의 악독함은 백성을 고통받게 할 것이고, 이는 내가 두 눈을 뜨고 있는 한 그 꼴은 볼 수가 없을 것 같아.”우문호의 말을 들은 원경릉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목적은 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기왕이 태자가 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야.”우문호는 잠시 침묵하더니 “그건 아니야.태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하겠지만 그래도 내 운명은 내가 쥐고 있는 게 맞지.”라고 말했다.“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스님이 뭐라고 하셨어?”“스님이 말하길 황조부께서 나를 아끼신다고 하더라고.”마차가 흔들리자 우문호가 마차 안쪽에 팔을 거치고 원경릉을 끌어당겼다.“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야 마음을 바꾼 건 오늘 일 때문이다. 부황의 어명을 어기고 호국사로 찾아온 병부(兵部), 형부(刑部), 이부(吏部), 호부(户部)의 관리들 특히 군왕과 장군…… 이 둘이 모두 형님의 사람이 되었다니. 형님이 태자가 된다면 이 네 개의 부서들 모두 형님의 편에 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언젠간 그들이 나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도 있어. 그렇게 되기 전에 손을 쓰지 않으면 안 돼.”원경릉은 그의 품에 안겨 조용히 말했다.“네 결정을 항상 지지
사식이가 기왕부에 도착했다.기왕부는 후궁을 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부중에 주모(主母)가 중병에 걸린 것을 잊어버렸는지 성대하고 떠들썩했으며 왕부가 호화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부중의 모든 하인들이 후궁을 맞을 준비에 힘을 쓰는 바람에 병든 정비는 쓸쓸하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사식이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기왕비를 찾아갔다.기왕비는 좌우로 긴 의자에 누워서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리더니 게슴츠레하게 사식이를 보았다.“용건이 무엇이냐.”“초왕비의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내일부터 약을 제조할 예정이라 병세가 얼마나 심각한지 봐야 하니 내일 초왕부로 오시라고 합니다.” 기왕비는 냉소를 지으며 “그래? 무서운가 봐? 아니면 내가 말한 조건에 동의를 한건가?”라고 말했다.사식이는 단호한 목소리로 “왕비께서 제가 하신 말을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초왕비께서는 병을 고치고 싶지 않으시다면 오지 않으셔도 된다고 하셨습니다.”라고 말하고는 휙 몸을 돌려 나갔다.“저 계집 말하는 거 봐! 기왕비님 저 계집 정말 재수 없습니다!” 기왕비의 옆에 있던 시녀가 화를 냈다.사식이의 말을 들은 기왕비는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한 채 눈을 감고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도 별 수 없다. 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다.“내 목숨만 살려준다면 너도 저렇게 방자하게 굴어도 된다.” 기왕비가 차갑게 말했다.“쇤네 어찌 감히 왕비님께 방자하게 굴겠습니까.” 시녀가 눈썹을 치켜뜨며 고개를 숙였다.기왕비는 속으로 화를 삭였다. 생각할수록 분노가 올라왔지만 그녀는 꾹꾹 분노를 눌러 삼켰다. 그녀는 자신이 죽으면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질 딸을 생각했다. 주명양이 정비가 되면 기왕은 주씨 가문의 비위를 맞추느라 딸은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원경릉은 그녀의 약점을 잘 알고 있고 그녀가 애써 살아야만 하는 이유도 알고 있다. 기왕비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이승에 남고 싶었다. 죽지만 않는다면 살아만 있다면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될지 누가 장담하겠는가. 병만 나으면 다시
기왕비는 굽힐 줄도 알고 펼 줄도 알았다.사실 이런 사람들이 더 무섭다. 굴욕을 당해낼 수 있는 사람은 못할 짓이 없다.“미리 말씀드리지요. 지금 왕비의 병은 금방 나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제가 일부러 시간을 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알겠어요.” 기왕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깜빡였다.원경릉은 사식이에게 마스크를 건네며 “기왕비께 드려라.”라고 말했다.사식이는 그것을 받아 기왕비에게 전해주었다. “여기요 기왕비.”기왕비는 마스크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렸다. ‘이것은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초왕비가 준 마스크를 쓰니 궁중에서 만들어 준 것보다 숨쉬기가 편했다. 원경릉이 다가오자 기왕비는 손을 내밀어 진맥을 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녀는 진맥을 하지 않고 청진기를 목에 걸어 그녀의 폐부의 소리를 듣고 맥박과 심장박동을 확인하더니 표정이 굳었다.“제가 듣기로는 당신이 병에 걸린 초반부터 약을 복용했지만 점점 심해졌다고 하던데 맞습니까?”“무슨 뜻입니까?”“발병한지 얼마 안 되어 각혈을 시작했것을 보고도 의심이 안 드십니까?” 원경릉이 물었다.기왕비의 표정이 빠르게 변했다.“약은 매일 시간 맞춰 제때 먹었는데……”“병의 진행 속도가 매우 빠릅니다. 폐부의 감염이 심하거나 혹은 기관지를 타고 다른 곳으로 전이됐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쩌면 심장과 폐 합병증일 수도 있겠네요. 제가 조사해 보겠습니다. 어느 쪽이든 약을 먹었다면 이 정도까지 빠르게 진행되지는 않았을 텐데…… 약이 이상한가? 그래도 희망이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기왕비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었다.“그럴 리가 없는데…… 내 약은 모두 나의 심복인 시녀가 달인 것이라서 다른 사람의 손을 거칠 일이 없어요.”“원인을 잘 찾아보세요.” 원경릉이 탁자 위에 올려진 약 상자를 열었다.“기침을 멈추게 하는 것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처음 치료를 시작하고는 매일 수액도 맞아야 합니다. 만약 각혈을 하거든 사람을 보내 저를 부르십시오. 각혈을 시작하
저녁에 우문호가 돌아오자 원경릉은 오늘 일을 그에게 전했다.“전혀 이상할 것 없지. 기왕비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알고 있지 않느냐. 병을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면 동가(佟家)에서 의심하지 않겠지. 동가와 기왕부는 어쨌든 연이 있기에 끝까지 기왕이 태자가 되는 것을 지지해줄 것이고.” 우문호가 담담하게 말했다.“기왕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구나.”“기왕이나 기왕비나 똑같아. 둘 다 야망으로 가득 차 있어.”우문호는 그들의 지독한 인연의 끝은 절연이라고 생각했다.“맞다, 기왕비의 태도는 어땠어?”우문호가 물었다.“오늘 일이 어쩌면 그녀에게 모욕적으로 느껴졌겠지만 그래도 잘 참더라고.”“기왕비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야. 내일 기왕비한테 말해. 정강부(亭江府) 사건은 내가 그녀에게 퇴로를 남겨두었다고 그러나 막문이 경중과 접촉한 것은 내가 먼저 나서야 해.”“그럼 부황께는 어떻게 말씀드릴 거야?”“부황께서도 큰형님을 연루시키는 것을 원치 않아.” “그럼 뭐라고 해?”“내각은 이 사건을 서둘러 처리하고 정강부 사건 관련자들을 모두 면직시키라는 공문을 내렸어.”“그 뜻이 뭔지 알겠어?”원경릉은 공문의 의미가 사건 처리를 빨리하라는 재촉이라고 생각했다.“내각의 뜻은 먼저 관련자들을 면직한 후 형부나 이부에 넘겨서 처리하라는 건데 어쨌거나 이 일은 경조부와는 관련 없어. 내각 공문에는 경조부 관원이나 경중의 권세가에 대한 얘기는 한마디도 없었어.”“그래서 네 생각엔 부황이 여전히 기왕비와 기왕을 감싸려고 한다는 거야?”“목여태감이 오늘 직접 경조부로 오셔서는 나를 칭찬하라는 부황의 계시를 전하셨어. 내가 사건을 빨리 처리한다고 하면서 말이야. 부황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 사건을 빨리 종결하라고 하면 할 수 있지만 난 아직 이 사건을 종결하지 않았어.”“확실하네. 부황께서는 확실히 그들을 감싸주려고 하는 거야.”“괜찮아. 내가 증거를 가지고 있으니 부황의 뜻이 무엇이든 상관없어. 우리 손에 쥐고 있는 것만 잘 관리하면 내가 기왕비를 휘
원경릉이 회왕부에 도착하자 노비가 빠르게 나와 원경릉을 붙잡았다.“기왕비를 치료한다고요?”원경릉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습니다.”라고 말했다.노비는 원경릉이 기왕비의 병을 왜 치료하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왜? 그 여자가 초왕비를 해치려고 했잖아요?”원경릉도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노비는 씩씩 거리며 “나는 적어도 당신이 사리는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라고 말하며 차갑게 돌아서서 갔다.원경릉이 부중으로 들어오자 그 안에는 손왕비가 보였다.손왕비는 직접적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조심하라고 경고를 했다.“기왕비 같은 사람은 언제든 등 뒤에 칼을 꽂을 수 있으니 늘 조심해야 합니다.”원경릉도 자신이 기왕비를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노비께는 제가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만 작은 형님께는 숨길 이유가 없겠네요. 저도 많이 심사숙고했고 제 결론은 딱 하나입니다. 기왕비가 죽고 나면 주씨 집안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왕비보다 주씨 후손들이 더 싫거든요.”손왕비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왕비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압니다. 주명취도 주명양도 모두 다섯째를 좋아하잖아요.”“주명양……?” 원경릉이 잠시 멍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손왕비는 그녀를 보고 “그래요. 주명양은 사실 주명취 모두 초왕을 사랑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원경릉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주명양이 초왕을 사랑하고 있다고요?”“몰랐습니까?”“주명취가 아니라요?”“왜 그렇게 순진한 겁니까? 주명양 역시 그를 마음에 두고 있어요.”손왕비가 원경릉을 보며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저는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원경릉은 주명양이 자신을 싫어하고 괴롭히는 이유가 우문호를 좋아하기 때문인가 싶었다.손왕비는 순진한 표정의 원경릉을 보고 웃기 시작했다.“예전에 다섯째가 밥 먹듯 주씨 가문에 드나들었어요. 그
늑대파 사람이 안지여와 소여쌍을 질질 끌고 나가는데, 소여쌍은 여전히 미친사람처럼 웃어대기만 했다.이리봉청은 그들이 끌려 나가는 것을 보자, 눈앞에 안지여가 자신을 데리고 소여쌍의 침대 앞으로 가서 소여쌍의 그 악랄한 말을 듣던 순간이 떠올랐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여리여리하고 아름답던 그녀가 이렇게 변해 버린 게 꿈처럼 느껴졌다.풍도성을 접수한 뒤 안풍 친왕은 관리들을 새롭게 임명했고, 더 이상 성주 같은 것을 두지 않고 조정과 이부에 적합한 인사를 선발해 풍도성 지부로 앉힐 것을 요청했다. 풍도성은 더 이상 이전의 독립 자치 지역이 아닌, 다른 주나 현과 마찬가지로 조정에 귀속되어 통일서 있게 다스리게 되었다.더불어 안풍 친왕은 별도로 서신을 써서 황제인 우문호에게 보냈는데, 풍도성을 추천하지만, 이건어디까지나 건의와 추천이니 황제가 생각하는 마땅한 사람이 있으면 안풍 친왕의 추천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동시에 안지여의 잔당들이 계속 나타났다.안풍 친왕이 이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데려오고, 호랑이와 눈 늑대, 회색 늑대까지 출동시킨 건 바로 모든 세력을 강화하고, 신속하게 진압해 풍도성을 조정에 복귀시키고 보름 만에 비적을 토벌하며 기본적인 숙청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박원은 잔당의 남은 불씨가 다시 타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안풍 친왕의 영패를 가지고 부근에 5천 명의 군사를 파견시켜 풍도성을 지켰다. 이리 나리는 자금을 지원해 천문 세가의 묘를 이장하였는데, 이전 무덤은 안지여가 고른 곳으로 폐허에 가까워, 그는 천문 세가 사람들이 그런 곳에서 안식을 취하기를 원하지 않았다.풍도성에 온지 거의 한 달가량 될 때쯤, 대군은 경성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돌아가기 전에 미색이 안지여와 소여쌍을 보러 갔다가, 돼지우리에서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사는 것을 보고 그제야 비로소 맺혀 있던 한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미색은 이리 나리와 어머님에게 알리지 않은 것이, 두 사람은 이미 안지여가 누군지 잊은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리봉청에게 있어 모든 건 지나가지 않았고, 36년 전 일은 여전히 어제 일 같이 느껴졌다.“어머니, 그를 어떻게 처분하시겠어요?” 이리 나리는 이리봉청의 마음을 넘겨짚을 수 없어 함께 걷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생각은 어떠니?” 이리봉청이 다시 되묻자 이리 나리가 원한에 사무친 눈빛으로 말했다. “제게 처분하라고 하면 전 그를 죽여 버릴 겁니다.”이리봉청은 알았다며 대답만 했다가, 다시 30분쯤 걷다가 정자에 앉아 을 때 말을 덧붙였다. “난 안 죽일 거야.”이리 나리가 약간 놀라서 물었다. “어머니, 또 마음이 약해지신 겁니까?”이리봉청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 반대야. 그 인간을 죽이는 게 마음이 약해진 거지. 사실 며칠 동안 이전의 원한을 내려놓을 수 있을지 생각해 봤는데,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 인간을 백번이라도 죽이겠지만, 난 그럴 수 없더구나. 아들아, 게다가 오늘 천문 세가 대문을 들어서는 그 순간, 더욱 마음을 굳혔단다.”이리봉청이 일어나 집안을 둘러봤다. 이곳은 그녀의 가족들이 살아 원래 온통 사람 소리로 가득한 곳이였다. 그들의 웃던 광경이 눈앞에 비치는가 하더니, 눈 깜박할 사이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천문 세가는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없는데 멸문지화를 당했고, 가엾게도 그 중엔 아이들이 많아서 제일 어린아이는 이제 태어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었다.이리봉청의 얼굴에 눈물이 타고 흐르며 가슴이 미어졌다. “그자와 소여쌍을 밖에 내버리고 사람을 시켜 지켜보도록 해. 죽게 두지 말고 계속 살려둬. 36년은 더 살면서 이 세상의 고생을 모두 겪어야, 내 마음에 맺힌 한이 풀리고 억울한 망자들도 안식에 들지!”이리 나리는 온몸으로 그 마음이 느껴져, 어머니가 눈물 흘리는 것을 더는 볼 수 없었다. “네, 전부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대로 할게요.”안지여와 소여쌍은 버려졌다. 짧은 며칠 사이에 안지여는 의기양양하던 성주에서 시궁창 쥐로 변해, 사람들이
안지여는 풍도성 지하감옥에 갇혔다. 빛 한 줄기 없는 지하감옥에서 사방에 끝없는 어둠과 절망만이 안지여를 삼키고 있었다.훼천의 형벌은 12 시진 후면 사라져서, 앞으로 안지여는 그저 한 명의 폐인일 뿐이었다.안지여의 결사대가 성으로 공격해 들어오기 전에, 이리봉청은 오 선생을 찾아내 안지여가 저지른 모든 죄를 고백하게 하고 안풍 친왕이 친필로 받아 적었다. 안지여가 당시 천문 세가를 해친 경위를 소상히 써 내려간 뒤, 오 선생과 안풍 친왕의 직인을 찍고 인쇄해서 대중에게 공개했다.안지여의 죄악은 하늘을 찔러 백성들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안지여의 결사대의 옛 부하들이 본래 성을 공격해 들어가 안지여를 구출할 계획을 세워놓았으나, 안지여의 죄상이 공포된 뒤로 많은 사람들이 해산하였다. 유일하게 무대장군만이 수천 명을 데리고 성으로 쳐들어왔지만, 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가 이미 대비해둔 덕분에, 경성에서 굴러온 돌이 무대장군의 박힌 돌을 빼내는 전투를 벌였다.풍도성에 온 지 7일째, 안풍 친왕은 풍도성을 접수하고 성에 살던 사람을 쫓아내며 서민으로 강등시켰다.안지여와 소여쌍에 대한 처분은 이리봉청에게 넘겼다.안지여는 캄캄한 지하감옥에서 6일을 지내는 동안, 처음엔 침착한 척 가장했으나 사흘째가 되자 울부짖으며 악독한 저주의 말을 내뱉더니, 나흘째가 되자 용서해달라고 애원하며 참회했다.손발의 힘줄이 끊어진 안지여는 일어나 걸을 수도 없고 심지어 스스로 몫숨을 끊을 힘도 없었다.그 와중에 매일 누군가가 먹고 마시도록 해주고, 상처도 치료해 주어 살 수 있다는 부질없는 희망을 품게 했다.훼천의 말에 따르면, 진정한 절망은 살아도 죽느니만 못하고,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것으로, 온 마음으로 죽기를 바라지만 살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가, 안간힘을 쓴 뒤 다시 절망에 빠지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으로, 사람을 한없이 죽였다 살렸다 괴롭힌다고 했다.결국 안지여를 죽일지 말지 여부는 이리봉청에게 달렸는데, 그녀는 안지여를 단번에 죽여 천문 세가
안지여의 이마에 파란 힘줄이 불끈불끈했으나 냉정을 가장했다. “내가 두려워할 줄 알았나 보지? 죽음도 두렵지 않은데 뭘 더 두려워하겠어?”“넌 두려울 것이야!” 이리봉청이 고개를 돌려 이리 나리를 보고 살짝 그의 팔을 잡았다. “내가 오는 길에 늑대파 사람이 그러던데, 천하에서 제일 잔혹한 형벌을 아는 사람이 늑대파에 있다고. 그게 사실인 것이냐?”이리 나리가 가볍게 답했다. “물론 사실이죠. 훼천이라고 합니다. 늑대골 출신이에요.”“안지여가 버틸 수 있는지 어디 한 번 보고 싶구나.” 이리봉청이 말했다.이리 나리가 엄숙한 태도로 명을 내렸다. “훼천!”그러자 훼천이 급히 나왔다. “이리 나리, 분부하시지요!”이리 나리는 그가 짐짓 냉정한 척하고 있으나 눈빛이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몸까지 부들부들 떠는 것이 아주 만족스러워 훼천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시작해!”안지여가 갑자기 큰 소리로 욕했다. “난 네 아버지거늘, 감히 나에게 손을 대다니, 천벌을 받아 마땅한 놈 같으니라고!”이리봉청이 이 말을 듣고 잠시 주저하는 눈빛으로 이리 나리를 바라봤다.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제 아버지는 오직 저를 키워주신 안풍 친왕뿐이십니다.”이리봉청이 살짝 안도했다. “저 인간이 단지 나만 해쳤으면 네 체면을 봐서 놔줬겠지만 천문 세가의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니 난 용서할 수 없구나.”“이리봉청, 너 언제 이렇게 악랄하게 변했어? 죽이려거든 그냥 죽여. 난 천문 세가 사람을 죽이긴 했어도 그들을 괴롭히진 않았어. 네가 날 죽이려거든 깨끗하게 단번에 죽여!”안지여가 크게 노해 몇 번 몸부림을 치다가 상처가 벌어지는 바람에 배에서 선혈이 흘러나오고, 훼천이 가까이 다가가자, 눈에 두려움이 깊어졌는데, 늑대골 출신 훼천은 온몸에서 피비린내가 뿜어져 나와 안지여를 덜덜 떨게 했다.“이리율!” 안풍 친왕비는 시ㅈ가하기 전에 이리 나리를 불렀다. “내가 여기서 네 엄마와 같이 있을 테니 넌 먼저 나가 있거라!”이리 나리가 안풍 친왕비에게
안지여에게 구원 병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리 나리 일행이 성을 제압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대오가 경성에서 출발하기 전에, 안풍 친왕비가 미리 사람을 풍도성으로 보내 각처, 특히 성 수비군과 군대에 잠입시켜, 음식에 효과가 천천히 나타나는 독을 풀어, 오늘 중독 증상이 나타나도록 독의 분량을 조절했다.적어도 내일까지는 안지여를 도우러 올 사람은 없었다. 독성은 적어도 이틀이 지나야 깨끗해지기 때문에 이틀 동안 그들은 설사와 전신 무기력으로 성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아도 와서 도울 수 없었다.그리고 그들이 기력을 회복할 때쯤이면, 안지여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는 성을 통제하고, 안지여 부부를 제압해 두 사람을 줄로 묶고 지혈시켜 주었다.안지여는 요 몇 년 동안 자신이 상당히 대단하다고 여겼다. 이는 풍도성이 부유하기 때문으로, 돈으로 많은 사람을 살 수 있었으며, 여러 곳에서 추켜세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절하게 패배한 적이 없었던 이유는 진정한 적이 없기 때문으로, 주변의 떠돌이 비적은 작은 마을 규모로 너무 작아서 소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코 그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적이 너무 약해서였다.조정 사람과 비교했을 때, 그는 제대로 훈련받은 적 없는 비적었기에 일격도 감당할 깜냥이 못됐다.이리 나리는 둘을 중정에 묶어 두었다. 온 바닥에 남은 음식과 깨진 기와가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본 안지여는 마음속 깊이 분노가 일었다. 자신의 생일날, 그를 다치게 한 것이 바로 그의 친자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욱이 오늘 이렇게 많은 고수가 현장에 있었는데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런 결말을 맞다니 너무 불쾌했다. 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을 부축하고 안지여 부부 앞으로 가서, 그녀가 안지여 부부를 내려다보자, 그들은 낭패에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으로, 이리봉청은 분노하는 마음과 함께 서글픈 마음도 들었다. 그들을 죽이면 커다란 복수는 이뤄 천문 세가 망자의 원혼은 달랠 수 있었다.하지만 저들을 이렇게 쉽게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이리 나리가 검을 휘두르며 안지여를 겨누자, 안지여가 공중으로 뛰어올라 후퇴했다.공자들은 돕고 싶었으나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에게 바로 제압당했다. 안지여는 이리율 것으로 그들은 주변 사람을 제압하기만 할 뿐 옆에 서서 전투를 관전하고 있었다.이리율의 무공이 얼마나 뛰어난지 그를 가르친 안풍 친왕 부부를 제외하고, 사실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이리율의 검법은 신속하고 맹렬해서 안지여는 상대하느라 쩔쩔매고 구석으로 몰리고 있었다. 성안의 호위들은 늑대 무리와 늑대파, 홍매문 사람들에게 막히는 바람에 안지여는 홀로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그래도 아직은 버틸 수 있었다.하지만 30분을 못 가서 안지여는 질게 틀림없었다.놀란 나머지 계속 실성해 있던 소여쌍이 갑자기 이리봉청을 향해 바싹 마른 손을 뻗어, 그녀의 목을 조르며 광적인 집착과 분노에 사로잡혀 성질을 부렸다. “멈춰, 다들 멈추라고. 안 그러면 내가 이년을 죽여버릴 것이니까!”소여쌍은 무공을 할 줄 알았지만 잘하지 못한 것이 어릴 때부터 계속 중병을 앓아 무공 연습에 소홀했고 성주 부인이 된 뒤로는 더욱 병기에 가까이할 일이 없었지만, 공력만큼은 아직 약간 있었다.소여쌍은 증오의 힘으로 이리봉청의 목을 졸랐는데, 소여쌍이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이리봉청의 목을 부러뜨릴 것만 같았다.안풍 친왕이 차가운 눈빛으로 나서려 하자, 안풍 친왕비가 말리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는데, 그럴 필요 없다는 뜻으로 뒤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참으라는 눈짓을 하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모두가 이리봉청이 제압당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손가락으로 뭔가를 쥐고 있어 소여쌍의 어깨 위를 휘감고 팔을 눌러 소여쌍이 머리를 돌리게 했다. 이리봉청 손에 쥔 것은 바늘로, 그대로 소여쌍의 오른쪽 눈을 찌르고 들어갔다.소여쌍이 절규하며 이리봉청을 놔주고 선혈이 흐르는 눈을 움켜쥔 채 비틀거리다 바닥에 쓰러져 데굴데굴 구르며 새된 소리를 지르는데, 원망과 저주의 말을 끊임없이 쏟아
풍도성 중정에는 안지여의 아들들과 사위가 그의 곁에 남았는데,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점점 공포에 질려가고 있었다.‘이 사람들, 아주 대단하구나!’안지여는 이리봉청을 보고 비록 조금 냉정해 보였지만, 여전히 놀라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갑자기 소여쌍이 큰 소리로 웃으며, 몸을 앞뒤로 흔들며 눈물을 찔끔거리더니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이리봉청을 가리키며 원망했다. “뜻밖에 네가 안 죽었단 말이지? 게다가 아들까지 있고. 참으로 황당하구나. 정말 너무 황당해. 원래 죽어야 했을 인간은 죽지 않고, 잘 살아야 할 사람은 36년간 괴로움을 당했어. 이리봉청 네가 날 비참하게 만들었으니 넌 이제 지옥에 떨어져야 해.”이리봉청은 소여쌍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했는데, 그녀 눈에는 지금 안지여만 들어왔다.안지여는 36년을 살아왔지만, 이리봉청에게 있어 36년은 마치 사라진 시간처럼 멸문지화의 원한이 어제 일 같았다.안지여도 이리봉청의 눈에서 분노와 악랄함을 보고, 처음으로 마음속에 두려움을 느꼈다.안지여는 억지로 감정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네 사람을 데리고 가. 지난 일을 묻지 않을 테니. 그렇지 않으면 풍도성에서 곧바로 10만 대군이 올 것으로, 살아서 도망갈 생각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아.”이리봉청의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우리는 이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바로 네 성으로 쳐들어갈 수 있어. 넌 이미 졌어.”안지여가 웃었다. “졌다고? 그래?”안지여는 수하의 대장군이 믿음직해서, 그들을 당하게 놔줄 수도 있다고 여겼다. 대장군의 부대는 분명 치밀하게 준비되어 있을 것으로, 아마 지금쯤이면 궁수들이 이미 배치를 마치고 그들을 전부 쏴 죽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의 손을 잡고 말했다. “어머니, 저자와 말 섞으실 필요 없어요. 앉아서 지켜보시기만 하면 됩니다!”말을 마치고 의자를 올리더니 이리봉청을 부축해서 앉혔다.안지여가 이리 나리를 보는데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안지여가 퍼뜩 눈을 돌려 이리 나리를 보았다.‘이리봉청이 저자를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건러니까?이리 나리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안 성주와 좀 오래된 원한을 따져야 하는데, 관련되기 싫으신 분은 자리를 피해 주시지요!”그때 한 사람이 검을 짚고 일어나 호통을 쳤다. “넌 도대체 어떤 놈이냐? 무슨 자격으로 자리를 피해라 마라야? 안 성주를 귀찮게 할 생각이면 일단 나부터 통과해 보시지!”그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장검을 뽑아 파죽지세로 이리 나리를 향해 휘둘렀다.이리 나리는 손을 살짝 움직여 손바닥으로 칼자루를 밀자, 검이 날아가며 그 사람의 귀를 베어 한 줄기 피가 공중에 뿌려지더니, 방금까지 기고만장하던 자가 비명을 지르고 귀는 바닥에 떨어졌다.검이 다시 이리 나리 수중으로 정확히 돌아왔다.이 모든 게 3초 안에 벌어진 일이었다.“회선검?” 검법을 아는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현장은, 숨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다.회선검은 검마의 검법으로, 그렇다는 건 저 사람이 검마의 계승자?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무리에서 검마를 찾았다. 과연 두 손으로 검을 안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도 차가운 안광이 느껴졌다.과연 진짜 검마구나, 사람들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검마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리 나리를 흘끔 보더니 속으로 의아해했다. ‘이 자식, 언제 내 비장의 검법을 배운 거야?’이리 나리의 검 끝에선 아직 선혈이 떨어지는데, 여전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말했다. “이 아수라장에 끼고 싶은 거라면, 제가 무례하다고 원망할 생각 마세요.”“무엄하도다!” 안지여가 몹시 놀랐다가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눈을 치켜뜨며 이리 나리를 노려봤다. “너는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내가 네 아버지다!”이리 나리가 코웃음을 쳤다!안지여의 몇몇 아들이 달려 나와 소리쳤다. “아버지, 저희가 지켜드리겠습니다.”안풍 친왕이 젓가락을 던지고 일어나 차갑게 명을 내렸다
오늘은 성주의 생일이기에 경사라 섣불리 피를 볼 수는 없으므로 칼은 빼 들었지만 먼저 나서서 늑대를 죽이는 사람은 없었다.안지여는 어두운 눈빛으로 ‘늑대 무리라고? 척후병의 보고로는 안풍 친왕이 늑대 무리를 끌고 온다고 했는데, 저들이 의외로 성으로 직접 쳐들어 왔다 이거지?’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안지여는 잔을 들고 꿈적도 하지 않은 채, 무너지기 직전까지 미동도 없는 태산처럼 냉정하고 침착했다. 늑대 무리는 안으로 들어온 뒤로 두 패로 나뉘어 서서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호시탐탐 엿보며 으르렁거렸다.“성주님, 성주님, 저들이 기어코 쳐들어오겠다고….” 문지기가 외치는 소리는 들렸으나 사람은 보이지 않더니, 그보다 조정에서 보낸 사람들이 먼저 들이닥쳤다.앞에 걸어들어오는 두 사람을 안지여는 본 적이 있었는데, 바로 안풍 친왕 부부로 예전에 그들이 천문 세가 사람들을 조사하러 왔을 때 그에게 속은 적이 있었다. 비록 당시 일면식 뿐이었으나 천문 세가 일을 캐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탓에 그들의 얼굴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어째서 별로 변한 게 없는 거지?’안풍 친왕 부부 뒤에 따라오는 10여 명의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은 그들의 호위 무사일 것으로, 주인인 안풍 친왕 부부는 별 표정이 없었으나,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와 고개를 들자 괴팍하고 악랄한 얼굴이 안지여 마음에 들지 않았다.안지여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았고, 미소는 띠고 있었지만 매서운 눈빛으로 저들이 돌계단을 오르면 그때 일어나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게 그의 태도였다.하지만 안풍 친왕 부부는 돌계단을 오르지 않았고, 손님 중 건배를 권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람들 의자에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이 차지하고 앉아, 그들을 대놓고 밀치더니 품에서 자기 젓가락을 꺼내 옆 사람 상관하지 않고 먹기 시작해 사람들이 다 경악했다.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뒤따라 들어오는 사람들이 보였다.두 사람이 사람들에 둘러싸여 천천히 걸어들어오고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