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우문호와 원경릉이 길을 떠날 때 바로 하산하지 않고 스님의 분부대로 뒷산에 있는 작은 절에서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저 멀리서 마차가 보였고 그 마차가 뒷산 평지에 도착하자 안에서 사람들이 하나 둘 내리기 시작했다.“이대감? 오대감? 손장군(孫將軍)? 조군왕(曹郡王)?” 서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우문호는 낯빛이 어두워졌다. 모두가 알고 있듯 부황은 어명을 내려 이곳에 누구도 면회를 오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그 어명을 무시하고 면회를 왔다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혜사부(慧師父)가 우문호를 보며 “왕야, 이 대감들이 날마다 뒷산으로 와서 기왕전하와 일을 상의하옵니다.”라고 말했다.우문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에 올랐다.“본왕 잘 알겠습니다. 스님께는 본왕이 떠났다고 전해 주십시오.” 혜사부는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두 분 조심히 가십시오.”라고 말해다.산길이지만 황실의 사원으로 통하는 길이기에 내려가는 길이 많이 험하지 않았다. 우문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경성에 도착할 때가 돼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기왕비를 치료할 약이 충분한가?”“응!” 원경릉은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얼른 대꾸했다.“네가 기왕비를 치료하는 것이 밖으로 세어 나가면 안 돼. 그리고 네 손에 기왕비의 명줄이 쥐어졌다는 것을 명심하거라. 나도 이 사건을 지켜보고 있겠다.”원경릉은 갑자기 그가 생각을 바꾸는 것이 이상했다.“방금 그 사람들 다 기왕 세력인 거야?”“다 그렇지는 않아.”그것이야말로 우문호가 걱정하던 것이었다. 그는 전까지 큰형이 한동안 자신의 분수를 지키며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리사욕을 꾀하고 기복 기간에 관리들을 부르다니. 게다가 조군왕과 손장군은 독선적이기로 유명한 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언제부터 큰형과 함께 하기로 했을까?“경릉!” 우문호가 갑자기 그녀를 보며 손을 잡았다.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열심히 듣고 네 생각을 말해줘.”그의 말을 들은 원경릉은 약간 긴장이 됐다. “살인이나 방화만 아니
“진심이다!”“내가 전에 물었을 때는 태자가 되는데 희생해야 하는 게 많다면서 그럴 가치 없다며?” 원경릉은 우문호의 마음이 왜 갑자기 변했는지 알 수 없었다.“그럴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 예전과 같아.”“그럼 왜 태자가 되겠다고 하는 거야?”우문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왜냐하면 이것은 가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전에 본왕은 부황께서 아직 젊으시고, 태자 자리가 워낙 시기 질투가 많고 위험한 자리니까…… 태자가 된다면 너도 위험할 수 있으니 그런 도전은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호국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본왕은 목숨을 걸고 참전해 공을 세웠고 내 수하에 많은 사람들이 나를 따르고 있으며 군에서 쌓은 인맥도 결코 큰형님보다 적지 않아. 그리고 큰형님의 성격이나 처세술을 보면 그는 이 나라를 다스릴 그릇이 아니다. 그의 악독함은 백성을 고통받게 할 것이고, 이는 내가 두 눈을 뜨고 있는 한 그 꼴은 볼 수가 없을 것 같아.”우문호의 말을 들은 원경릉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목적은 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기왕이 태자가 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야.”우문호는 잠시 침묵하더니 “그건 아니야.태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하겠지만 그래도 내 운명은 내가 쥐고 있는 게 맞지.”라고 말했다.“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스님이 뭐라고 하셨어?”“스님이 말하길 황조부께서 나를 아끼신다고 하더라고.”마차가 흔들리자 우문호가 마차 안쪽에 팔을 거치고 원경릉을 끌어당겼다.“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야 마음을 바꾼 건 오늘 일 때문이다. 부황의 어명을 어기고 호국사로 찾아온 병부(兵部), 형부(刑部), 이부(吏部), 호부(户部)의 관리들 특히 군왕과 장군…… 이 둘이 모두 형님의 사람이 되었다니. 형님이 태자가 된다면 이 네 개의 부서들 모두 형님의 편에 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언젠간 그들이 나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도 있어. 그렇게 되기 전에 손을 쓰지 않으면 안 돼.”원경릉은 그의 품에 안겨 조용히 말했다.“네 결정을 항상 지지
사식이가 기왕부에 도착했다.기왕부는 후궁을 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부중에 주모(主母)가 중병에 걸린 것을 잊어버렸는지 성대하고 떠들썩했으며 왕부가 호화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부중의 모든 하인들이 후궁을 맞을 준비에 힘을 쓰는 바람에 병든 정비는 쓸쓸하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사식이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기왕비를 찾아갔다.기왕비는 좌우로 긴 의자에 누워서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리더니 게슴츠레하게 사식이를 보았다.“용건이 무엇이냐.”“초왕비의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내일부터 약을 제조할 예정이라 병세가 얼마나 심각한지 봐야 하니 내일 초왕부로 오시라고 합니다.” 기왕비는 냉소를 지으며 “그래? 무서운가 봐? 아니면 내가 말한 조건에 동의를 한건가?”라고 말했다.사식이는 단호한 목소리로 “왕비께서 제가 하신 말을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초왕비께서는 병을 고치고 싶지 않으시다면 오지 않으셔도 된다고 하셨습니다.”라고 말하고는 휙 몸을 돌려 나갔다.“저 계집 말하는 거 봐! 기왕비님 저 계집 정말 재수 없습니다!” 기왕비의 옆에 있던 시녀가 화를 냈다.사식이의 말을 들은 기왕비는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한 채 눈을 감고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도 별 수 없다. 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다.“내 목숨만 살려준다면 너도 저렇게 방자하게 굴어도 된다.” 기왕비가 차갑게 말했다.“쇤네 어찌 감히 왕비님께 방자하게 굴겠습니까.” 시녀가 눈썹을 치켜뜨며 고개를 숙였다.기왕비는 속으로 화를 삭였다. 생각할수록 분노가 올라왔지만 그녀는 꾹꾹 분노를 눌러 삼켰다. 그녀는 자신이 죽으면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질 딸을 생각했다. 주명양이 정비가 되면 기왕은 주씨 가문의 비위를 맞추느라 딸은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원경릉은 그녀의 약점을 잘 알고 있고 그녀가 애써 살아야만 하는 이유도 알고 있다. 기왕비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이승에 남고 싶었다. 죽지만 않는다면 살아만 있다면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될지 누가 장담하겠는가. 병만 나으면 다시
기왕비는 굽힐 줄도 알고 펼 줄도 알았다.사실 이런 사람들이 더 무섭다. 굴욕을 당해낼 수 있는 사람은 못할 짓이 없다.“미리 말씀드리지요. 지금 왕비의 병은 금방 나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제가 일부러 시간을 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알겠어요.” 기왕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깜빡였다.원경릉은 사식이에게 마스크를 건네며 “기왕비께 드려라.”라고 말했다.사식이는 그것을 받아 기왕비에게 전해주었다. “여기요 기왕비.”기왕비는 마스크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렸다. ‘이것은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초왕비가 준 마스크를 쓰니 궁중에서 만들어 준 것보다 숨쉬기가 편했다. 원경릉이 다가오자 기왕비는 손을 내밀어 진맥을 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녀는 진맥을 하지 않고 청진기를 목에 걸어 그녀의 폐부의 소리를 듣고 맥박과 심장박동을 확인하더니 표정이 굳었다.“제가 듣기로는 당신이 병에 걸린 초반부터 약을 복용했지만 점점 심해졌다고 하던데 맞습니까?”“무슨 뜻입니까?”“발병한지 얼마 안 되어 각혈을 시작했것을 보고도 의심이 안 드십니까?” 원경릉이 물었다.기왕비의 표정이 빠르게 변했다.“약은 매일 시간 맞춰 제때 먹었는데……”“병의 진행 속도가 매우 빠릅니다. 폐부의 감염이 심하거나 혹은 기관지를 타고 다른 곳으로 전이됐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쩌면 심장과 폐 합병증일 수도 있겠네요. 제가 조사해 보겠습니다. 어느 쪽이든 약을 먹었다면 이 정도까지 빠르게 진행되지는 않았을 텐데…… 약이 이상한가? 그래도 희망이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기왕비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었다.“그럴 리가 없는데…… 내 약은 모두 나의 심복인 시녀가 달인 것이라서 다른 사람의 손을 거칠 일이 없어요.”“원인을 잘 찾아보세요.” 원경릉이 탁자 위에 올려진 약 상자를 열었다.“기침을 멈추게 하는 것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처음 치료를 시작하고는 매일 수액도 맞아야 합니다. 만약 각혈을 하거든 사람을 보내 저를 부르십시오. 각혈을 시작하
저녁에 우문호가 돌아오자 원경릉은 오늘 일을 그에게 전했다.“전혀 이상할 것 없지. 기왕비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알고 있지 않느냐. 병을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면 동가(佟家)에서 의심하지 않겠지. 동가와 기왕부는 어쨌든 연이 있기에 끝까지 기왕이 태자가 되는 것을 지지해줄 것이고.” 우문호가 담담하게 말했다.“기왕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구나.”“기왕이나 기왕비나 똑같아. 둘 다 야망으로 가득 차 있어.”우문호는 그들의 지독한 인연의 끝은 절연이라고 생각했다.“맞다, 기왕비의 태도는 어땠어?”우문호가 물었다.“오늘 일이 어쩌면 그녀에게 모욕적으로 느껴졌겠지만 그래도 잘 참더라고.”“기왕비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야. 내일 기왕비한테 말해. 정강부(亭江府) 사건은 내가 그녀에게 퇴로를 남겨두었다고 그러나 막문이 경중과 접촉한 것은 내가 먼저 나서야 해.”“그럼 부황께는 어떻게 말씀드릴 거야?”“부황께서도 큰형님을 연루시키는 것을 원치 않아.” “그럼 뭐라고 해?”“내각은 이 사건을 서둘러 처리하고 정강부 사건 관련자들을 모두 면직시키라는 공문을 내렸어.”“그 뜻이 뭔지 알겠어?”원경릉은 공문의 의미가 사건 처리를 빨리하라는 재촉이라고 생각했다.“내각의 뜻은 먼저 관련자들을 면직한 후 형부나 이부에 넘겨서 처리하라는 건데 어쨌거나 이 일은 경조부와는 관련 없어. 내각 공문에는 경조부 관원이나 경중의 권세가에 대한 얘기는 한마디도 없었어.”“그래서 네 생각엔 부황이 여전히 기왕비와 기왕을 감싸려고 한다는 거야?”“목여태감이 오늘 직접 경조부로 오셔서는 나를 칭찬하라는 부황의 계시를 전하셨어. 내가 사건을 빨리 처리한다고 하면서 말이야. 부황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 사건을 빨리 종결하라고 하면 할 수 있지만 난 아직 이 사건을 종결하지 않았어.”“확실하네. 부황께서는 확실히 그들을 감싸주려고 하는 거야.”“괜찮아. 내가 증거를 가지고 있으니 부황의 뜻이 무엇이든 상관없어. 우리 손에 쥐고 있는 것만 잘 관리하면 내가 기왕비를 휘
원경릉이 회왕부에 도착하자 노비가 빠르게 나와 원경릉을 붙잡았다.“기왕비를 치료한다고요?”원경릉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습니다.”라고 말했다.노비는 원경릉이 기왕비의 병을 왜 치료하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왜? 그 여자가 초왕비를 해치려고 했잖아요?”원경릉도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노비는 씩씩 거리며 “나는 적어도 당신이 사리는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라고 말하며 차갑게 돌아서서 갔다.원경릉이 부중으로 들어오자 그 안에는 손왕비가 보였다.손왕비는 직접적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조심하라고 경고를 했다.“기왕비 같은 사람은 언제든 등 뒤에 칼을 꽂을 수 있으니 늘 조심해야 합니다.”원경릉도 자신이 기왕비를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노비께는 제가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만 작은 형님께는 숨길 이유가 없겠네요. 저도 많이 심사숙고했고 제 결론은 딱 하나입니다. 기왕비가 죽고 나면 주씨 집안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왕비보다 주씨 후손들이 더 싫거든요.”손왕비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왕비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압니다. 주명취도 주명양도 모두 다섯째를 좋아하잖아요.”“주명양……?” 원경릉이 잠시 멍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손왕비는 그녀를 보고 “그래요. 주명양은 사실 주명취 모두 초왕을 사랑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원경릉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주명양이 초왕을 사랑하고 있다고요?”“몰랐습니까?”“주명취가 아니라요?”“왜 그렇게 순진한 겁니까? 주명양 역시 그를 마음에 두고 있어요.”손왕비가 원경릉을 보며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저는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원경릉은 주명양이 자신을 싫어하고 괴롭히는 이유가 우문호를 좋아하기 때문인가 싶었다.손왕비는 순진한 표정의 원경릉을 보고 웃기 시작했다.“예전에 다섯째가 밥 먹듯 주씨 가문에 드나들었어요. 그
원경릉은 지금 제왕비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제왕비의 소식은 사식이가 간간이 전해주었다.원경릉은 처음에 주명취의 야망과 그녀의 실력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실력은 야망을 따라가지 못하였으며 허구한 날 제왕부에서 원후궁과 싸움을 했다.“듣자하니 일곱째와 원후궁이 아직 합방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손왕비가 말했다.원경릉은 제왕부의 소식은 별 관심이 없어서 화제를 돌려 손왕비와 궁중의 일들을 이야기했고, 조금 후에 손왕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녀가 떠난 후 손왕비의 말이 귀에 맴돌았다.‘주명양이 우문호를 마음에 두고 있다니……’우문호가 일을 마치고 저녁에 돌아오자 원경릉이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주명양이 널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우문호는 밥을 먹으려고 들었던 수저를 내려두더니 그녀를 쳐다보았다.“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 왔어?”“당황하지 않은 척 해도 지금 머리 엄청 굴리고 있지?”“얼토당토않은 소리야. 네가 임신해서 생각이 많아진 거야.”우문호는 그릇을 들고 계속 밥을 먹으며 누가 원경릉에게 헛소리를 했는지 생각했다.“손왕비가 다 실토했어. 주씨 집안 하인들도 다 알고 있었다는데?”원경릉은 그의 담담한 태도에 마음은 불안하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릇을 내리며 “사실이라고 해도 너한테 뭐라고 하지 않아. 나는 네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궁금했던 것뿐이야.”라고 말했다.“내 탓을 할 수가 엇지. 나는 주씨 여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아.”“그래서 주명양이 널 좋아하는 건 사실이라는 거지?”“듣자 하니 그렇다고 하더라.” 우문호가 말했다.“누가 너한테 얘기했어?” 원경릉이 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그건…… 주명양이 스스로 말했어.”원경릉이 젓가락을 과격하게 내려놓으며 버럭 했다.“그 여자가 너한테 고백을 했다고?”우문호는 조용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억울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내 탓은 아니잖아!”“그걸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원
원경릉은 궁 안의 많은 여인들이 자신의 남자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앞으로 신경을 써야 할 일이 생길 것 같자 원경릉의 기분이 안 좋아졌다.우문호는 복숭아처럼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억울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호소했다.“왜 화가 났어? 나는 그 여자들한테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어! 그리고 네 남자가 얼마나 잘났으면 많은 여인들이 좋아하겠어? 기분 나빠할 일이 아니라 자랑스러울 일이지.”“나는 다른 것보다 네가 나한테 말하지 않아서 화가 난 거야. 됐어 그렇게 억울해 할 필요 없어. 어쨌든 그녀는 기왕의 후궁으로 시집가겠지.”말을 마치고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이제야 기왕비가 주명양이 후궁으로 들어오든 말든 병풍 보듯 하는 거구나? 주명양의 마음은 너한테 있으니까?”말을 꺼내자 갑자기 이전의 기억이 떠올랐다.“최근에 너네 둘 만난 적 없어? 얘기나 쪽지를 주고받거나? 없어?”“상상력이 대단하구나. 무슨 쪽지를 주고받아?” 우문호가 웃었다.서일은 문 앞에서 원경릉을 향해 윙크를 했다.원경릉은 황당한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뜬 채 우문호를 쳐다봤다.“절대 아니라고!” 우문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단호하게 말했다.”원경릉은 슬픈 표정으로 천천히 일어났다.“여태까지 나를 속이다니. 나를 뭘로 아는 거야? 됐다 됐어! 앞으로 맘대로 하고 살아!” 그녀의 목이 메었다.우문호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그녀를 끌어안았다.“화내지 마! 내가 일부러 그런것도 아니잖아. 나는 네가 기분 나빠할까 봐 그런 거야.”원경릉은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치며 눈시울을 붉혔다.“말할 필요 없어! 그냥 거짓말하고 살아! 나중에 그 여자가 내 뒤통수를 치겠지.”“그 여자가 감히?” 우문호가 눈을 부라리며 “그럼 내가 그 여자의 다리를 부러뜨릴 것이야.”라고 말했다.이 말을 들은 원경릉은 자신도 모르게 풀이 확 죽었다.“나가서 다바오 산책 좀 하고 올 테니까 밥이나 먹어.”그녀가 일어나 문으로 걸어가자 서일이 따라나서며 “왕비님 같이
위왕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혹시 복수하려는 것이냐?”“복수가 아니라, 그저 사실을 말할 뿐입니다.”안왕은 그에게 책임을 떠넘겨 혼자 감당하게 한 위왕을 보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위왕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어찌 다섯째에게 설명할지 생각해 보거라. 보책은 아직 네 손안에 있잖냐.”안왕은 여전히 두꺼운 보책을 손에 쥐고 있었다. 잃어버릴 수 없는 귀한 것이지만, 가만히 들고 있기도 거슬렸다.이렇게 골치 아픈 상황이 생길 줄 알았다면 차라리 꾀병을 부리고 위왕 혼자 오게 한 것이 더 나았을 텐데 말이다. 그렇게 각자 방으로 돌아가 목욕을 한 후, 막 침대에 누웠을 때 택란이 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두 사람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고, 바로 택란을 만나러 나갔다.안왕은 보책을 가지려 했으나, 택란에게 넘겨받으면 곧 금나라 황후임을 인정하는 셈이 되므로, 절대 넘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적어도 어린 황제는 아직 그들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택란은 두 분 큰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린 후 자리에 앉아 말했다.“큰아버지, 오늘 일은 아바마마께 절대 말하지 마십시오.”안왕도 원하던 바였기에 다급히 답했다.“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먼저 네 아버지한테 숨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예. 저도 그것이 걱정입니다.”택란의 가장 큰 걱정은 바로 아버지였다.“어린 황제도 참, 어린 시절의 약속마저 진지하게 받아들이다니… 설령 너와 혼사를 약속했다 해도, 네가 승낙하지 않을 것 아니더냐.”안왕이 말하자 택란은 잠시 머뭇거리며 말했다.“그때 이미 동의했었습니다.”다만 그때는 그저 그를 달래, 그의 상처가 심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 뿐이었다.“승낙했다니?”안왕과 위왕은 서로 놀란 표정으로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면 이 일은 전적으로 어린 황제의 탓도 아니다.“하지만 넌 그때 겨우 여덟, 아홉 살이었다. 그저 아이들의 장난일 뿐일 테니, 동의했다고 해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도 된다.”위왕이 재빨
“폐하, 공주께서 폐하가 드리신 선물을 받지 않으신 것입니까?”언제 올라온 건지, 진이는 어느새 그의 곁에 서 있었다.“응.”경천은 뒤돌아 상자와 두 개의 옥패를 바라보았다. 그가 오랜 시간 동안 배우며 수많은 옥을 망친 끝에 겨우 지금과 같은 모습을 조각해 낸 것이었다.하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속상해하지 마십시오. 공주께서 아직 어리셔서 폐하의 노고를 다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깐요.”진이가 위로하자 경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어서 받지 않는 것이다.”진이가 잠시 멈칫했다.“너무 잘 안다니요? 그런 것 같진 않아 보였는데요.”경천은 이미 실망한 기분을 떨쳐버렸고, 대신 굳건한 의지를 다졌다.“진아, 나는 그녀의 뜻을 완전히 이해했다. 그녀는 먼저 좋은 황제가 되어주기를 바란단다. 이곳을 떠나기 전, 나에게 한 나라의 군주라 하지 않았냐? 황제로서 역할을 다하기를 바라는 것이다.”“아... 그런 것입니까!”진이는 비록 이해하지 못했지만, 황제가 속상해하지 않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택란 일행은 궁을 나섰다. 냉명여가 그녀에게 물었다.“누나, 어찌 황제가 주신 옥패를 받지 않으시나요? 그를 싫어하시는 것입니까?”택란은 웃으며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는 절대 그를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강단 있는 황제이고, 뛰어난 통치로 금나라가 정권 이양 위기를 넘길 수 있도록 했다. 게다가 그는 두 나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두 나라에 평화를 가져왔다.”“그럼, 어찌 그의 선물을 받지 않으셨습니까?”냉명여는 다른 사람의 선의를 함부로 거절하면 안 된다고 배웠기에, 그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택란이 답했다.“그 옥패가 약속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명여야, ‘약속’이라는 말은 무거운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약 네가 그것을 이행할 능력이 없다면, 함부로 약속하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하지만 그도 누나와 혼사를 올리겠다고 한 말에 대한 약속을 지키려는 것 아닙니까?”“그래. 하지만 나
경천은 그녀의 말을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택란이 말했다."어쩌면 5년 후에는 오늘 한 모든 일이 어리석고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좋아하는 여인을 만나게 될 때, 그 감정이 단순한 사모인지 은혜 때문인지 알게 되실 것이고, 오늘의 행동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경천은 단 한 마디만 응한 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태도가 이렇게나 분명하니, 절대 그런 말로 그녀를 얽매여 부담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늘 한 모든 일은 그의 결정이며 그의 태도였다. 그녀는 몰라도 되고,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긴 하지만, 그는 언제나 그녀를 기다릴 것이었다.그리고 그녀의 인정을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택란은 한숨 놓은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해한다니 다행입니다.""알고 있다."경천의 얼굴은 약간 창백했지만, 애써 미소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삼 태감이 책자를 가져왔다. 경천은 그것을 택란에게 건넸고, 택란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았다. 그가 제시한 조건은 매우 공정했으며, 심지어 약도성에 이익을 양보한 정도였다.책자를 접은 후, 그녀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약도성을 생각해 줘서 고맙습니다. 두 나라의 원한을 풀기 위해 애써줘서, 그리고 약도성의 백성과 조정이 화해할 수 있도록 도와줘서 고맙습니다.""알고 있었던 것이냐?"경천이 다소 놀라며 묻자, 택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예. 알아봤습니다.""오해하지 마라. 그저 너를 위하여 한 일이 아니니, 부담 갖지 않아도 된다."그는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해명했다.택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오해하지 마시지요. 저는 정말 부담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를 위해 이렇게 많은 일을 해줘서 고마울 뿐입니다. 오늘도 사실 많이 감동했습니다. 다만, 저는 아직 혼사에 대해 논할 나이가 아니고, 사적인 감정보다는 다른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 어리고, 앞으로 혼사를 하더라도 반드시 아바마마
손에 쥐니, 차가운 촉감이 느껴졌다. 그 옥의 차가운 느낌이 서서히 스며들자,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놀라운 표정을 지었을 때, 그는 미세하게 안도하며, 그녀가 좋아할 것이라 믿었다."직접 만든 것입니까?"택란은 마음에 든 듯 손에 꼭 쥐고 있었다. 그녀의 밝은 눈동자에는 존경이 가득했다."응!"그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마음에 드냐?""예. 정말 마음에 듭니다!"택란도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빛나는 미소를 지었다.그러자 그가 약간 흥분된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이걸 직접 나에게 선물해 줄 수 있느냐?""예?"택란이 잠시 멈칫하며, 놀라 물었다."저에게 준 선물이 아닙니까?"그가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으로 소매 주머니에서 또 다른 옥 조각을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으며, 진지하게 말했다."이건 내가 네게 직접 주고 싶은 것이다."택란은 그가 손에 든 것을 바라보았다. 옥질도 동일하게 맑고 투명했고, 손바닥의 선도 보일 정도였는데, 그 조각에는 경천의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옥에는 미소를 짓고 있는 준수한 그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고,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입고 있던 옷이 새겨져 있었다. 비록 색은 알 수 없었지만, 자수가 명확하게 새겨져 있었다.그녀는 기억력이 매우 좋았기에, 그때의 기억이 선명히 떠올랐다.그녀는 두 개의 옥을 손바닥에 놓았다. 그제야 그녀는 옥에 3년 전 그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가 시간을 되돌려 3년 전 만남을 담은 것이었다!경천은 택란을 바라보며, 애써 차분함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심장은 거의 목구멍까지 올라올 듯했다.택란이 두 개의 옥을 서둘러 상자에 다시 넣으며 말했다."두 개 모두 오라버니께서 먼저 가지고 있으세요."경천은 눈시울을 붉히며 다시 건네받은 상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내리깔며, 애써 실망이 드리운 눈빛을 숨겼다.삼 태감이 정교한 음식을 올려놓았고, 모두 택란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알 수 없는 작은 흥분을 억누르고, 표정을 고쳐서 천천히 돌아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북당 백성인 란이 언니와의 혼사는 다 거짓인 겁니까?"경천의 동공이 흔들렸다."혹시... 화가 난 것이냐?""아닙니다."택란이 고개를 젓자, 밝은 빛이 그녀의 깨끗한 얼굴에 비쳤고, 고르게 정리된 이마 밑의 눈동자는 다시 차분해졌다."그런데 어찌 사람을 시켜 저를 찾고 있다고 직접 저게 소식을 전하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편지를 보냈다면, 저도 오라버니를 만나러 왔을 것입니다. 심지어 혼사에 하객까지 청하며 일을 이렇게나 크게 벌였는데, 대체 어떻게 수습하려고 하십니까?"그는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천천히 그녀 앞에 섰다. 그러고는 그녀의 까만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수습할 필요 없다. 나는 이미 천하에 나의 황후가 우문택란이라고 선언했다. 나는 그녀가 어서 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택란은 순간 놀라하며, 굳어진 얼굴로 물었다.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경천은 그녀가 화가 난 것 같아, 마음이 내려앉았다. 그의 눈동자엔 어두운 그림자가 깔렸고, 이내 조심스레 물었다."응할 수... 있겠느냐?"택란은 잠시 망설였다. 기억 속의 그 소년이 지금 별빛을 받으며 그녀 곁으로 돌아왔다. 이전의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10년 후 그가 죽지 않으면 돌아와서 그녀를 부인으로 맞겠다고 열정적으로 말했었다. 그 열정이 가득한 목소리는 지금도 그녀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런 과거와 현재가 얽혀 버리자,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저는..."경천은 그녀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반응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얼굴을 조금 숙이며 말했다."지금 바로 대답할 필요 없다. 몇 년 후라도, 10년, 아니 20년 후라도 괜찮다.""하지만...""아니, 말하지 말거라."그는 방금까지만해도 가득찼던 자신감을 더 이상 보여줄 수 없
냉명유는 팔짱을 낀 채 검을 가슴 앞으로 옮기며, 차갑게 말했다."누님께서 어디로 가든, 저도 무조건 함께 갈 것입니다."“하… 하지만."삼 태감이 무척 난감해했다."그래. 함께 가자. 이 거월통천각이 정말 달을 딸 수 있는지 어디 가서 보자꾸나!"그러자 택란이 웃으며 말했다.주 아가씨는 조금 의심스러웠다. 정말 공주가 만나고 싶다면, 어찌 공주한테 이렇게 높은 계단을 오르게 할 수 있는가?그러고는 계단 위에 새겨진 난초꽃을 힐끗 보고는 순간 멈칫했다. 시선을 위로 올려보니, 계단의 각 층마다 난초꽃이 새겨져 있었다.황제가 자신의 그리움을 돌계단에 새긴 것이었다!택란도 계단을 오르며, 이 사실을 눈치챘다.게다가 각 난초의 형태와 크기는 매우 똑같았다. 처음에는 선이 조금 거칠게 느껴지긴 했지만, 후에는 점점 더 섬세하고 부드러워 보였다.이건 분명 같은 사람이 새긴 것 같았다. 그가 직접 조각한 것일까? 금나라가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지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잠시 후, 그들은 거월통천각의 가장 높은 층에 도착했다. 다행히 냉명여는 문 앞에서 멈추고 안까지 들어가지 않았다.택란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는데, 안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네개의 용 모양 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네 모서리에는 각각 올라가 쉴 수 있는 정자가 있었다. 정자에는 난간이 둘러져 있었으며, 가운데에는 탁자와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떠힌. 네 면에 걸려져 있는 대나무 커튼이 걷혀 있어, 사방에서 밖을 볼 수 있었다.그 사이에서 청색 비단옷 차림의 남자가 통천각 옆 난간에 기대어 택란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매우 긴장한 듯 손과 발을 살짝 떨고 있었다. 별빛처럼 맑은 눈동자에 약간 숨이 가쁜 듯 보였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녀를 보자마자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재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며 가장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에,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이 만남을 특별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반짝이는 별들도 그중 하나였다.하지만
손님들이 하나둘씩 떠나자, 경천 황제는 서둘러 궁으로 돌아가 푸른 비단옷으로 갈아입었다.옅은 청색 옷자락에, 소매 끝에는 난초꽃이 수놓아져 있었고, 나머지 부분은 어두운 구름 문양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이 옷감은 북당에서 온 것이었다."폐하, 꼬마 은인께서 궁문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삼 태감이 와서 보고했다."좋소."그는 거울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깊은숨을 내쉬었다."택수운천으로 가겠네."택수운천은 그가 즉위한 후, 궁궐 안에 지은 새 궁전으로, 세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궁전 옆에는 거월통천각이 있었는데, 이는 량주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거월통천각 안에 있으면 마치 손바닥에 달을 담을 수 있을정도로 웅장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거월통천각에서 멀게는 약도성과 량주가 인접한 산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녀가 생각날 때면, 늘 거월통천각의 가장 높은 층으로 올라가 풍경을 멀리 바라보곤 했다."진이야, 너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해 본 적이 있느냐?"그가 준수한 옷차림으로 난간에 기대어 먼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바람이 서서히 불며 청색 옷자락이 휘날리자, 옷자락의 네 끝에 박힌 고급스러운 야명주가 그의 선명하고 잘생긴 얼굴을 비추었다.그때, 저 멀리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궁 시위를 따라, 아치과 복도를 지나 거월통천각으로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젊은 금군 통령 진이가 그의 모습을 보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런 적 없습니다.""사모의 마음을 품어보거라. 떨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느낌만큼 좋은 것이 없다."그는 그녀를 멍하니 보며 말했다. 천천히 다가오는 탓에 그녀의 얼굴이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13세 전까지의 그의 인생에는 나라와 백성들 뿐이었지만, 13세 이후 그의 인새은 온통 그녀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금 그녀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진이는 황제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다가오는 세 명을 보며
안왕은 보책을 받아 든 순간, 갑자기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정확히 어떤 점이 이상한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일이 다 이상하게 느껴졌다.보책을 펼쳐 안에 적힌 이름을 본 순간 그는 드디어 이상한 점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게 되었다.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굳어진 표정으로 경천 황제를 바라보았다.경천 황제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조사를 통해 드디어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소. 그녀의 이름은 우문택란이오. 금나라 황후의 이름은 우문택란이네. 난 반드시 그녀를 찾아낼 것이오. 만약 그녀가 황후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황후의 자리는 그녀를 위해 계속 비워둘 것이네.”위왕은 온몸에 식은땀을 흐르는 탓에 두 손을 급히 움켜잡았다. 방금 황제가 보책을 그의 손에 올리지 않아, 그가 받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정말 다섯째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안왕은 어두워진 안색으로 자리에서 물러나 이를 악물고 낮은 소리로 위왕에게 말했다.“방금까지도 어린 황제에게 어리석다고 했건만. 이렇게 계책에 능하고 이따위 교묘한 계책으로 우리 형제를 그와 같은 편에 서게 만들다니...!”위왕은 또 한 걸음 물러서며 아무런 표정 없이 말했다.“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방금 술을 두 잔 마셔 조금 취한 터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아니, 지금 들고 있는 그건 무엇이냐?”안왕은 단단한 그의 팔을 비틀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다.하지만 이 상황 속에서 연회는 계속되었고, 사람들의 감정은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북당 황제의 작은 공주도 우문택란이라는 말을 꺼냈다.그 말에 다들 그 당시 금나라 황제를 구한 사람이 북당의 작은 공주가 맞는지 추측하기 시작했다.정말 북당 공주가 맞는다면, 금나라 황제도 참 배짱이 큰 것이다. 사실상 북당 황실이 금나라 황제를 구했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만약
경천은 위왕의 말을 듣자, 마치 마음속 큰 돌덩이가 내려간 듯 후련해 보였다. 그는 그러고는 궁인에게 술을 올리게 해 술잔을 여러 차례 돌린 후, 아래를 둘러보며 말했다.“오늘 여러분께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소.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오늘 정혼연이 어찌 열리게 되었는지 알게 될 것이오.”그러자 모두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말에 당황을 금치 못하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정혼연이든 혼례든, 이런 자리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이때, 위왕이 안왕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섯째에게 서신을 보내야겠다. 금나라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자가 황제가 아닐 수도 있다. 진국왕이 아직 살아 있고, 이 황제가 꼭두각시일지도 모른다.”“맞소. 확실히 조금 병신같아 보이네.”안왕도 동의했다.참고로 ‘병신같다’는 표현은 안왕이 조카에게서 배운 단어였다.“이 이야기는 3년 전쯤에 있었던 일이오.”이내 경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담겨져 있었다.“당시 금나라는 진국왕이 집권하고 있었는데, 그는 나를 대신해 금나라의 군주가 되려 했소. 이 사실은 여러분도 알고 있을 것이오. 그때 난 진국왕과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소. 진국왕이 왕위를 빼앗으려 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하기에, 나도 어쩔 수 없이 반격에 나섰는데, 그 과정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소. 그때 나를 구해준 이가 바로 란이라는 소녀이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난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오. 그 당시 나는 란이의 정체도 몰랐고, 그저 약도성 사람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소. 상처를 치료하며 그녀와 며칠을 함께 보냈고, 황권을 되찾으면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했네. 하지만 그녀가 나를 구했다는 사실이 진국왕에게 알려졌고, 진국왕이 사람을 보내 그녀의 집에 불을 질렀소. 그리고 그곳에서 시신이 발견되었소.”모두가 진국왕이 불을 질렀다는 말에 멈칫했다.금나라 황제가 이렇게 비극적인 황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