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우문호가 돌아오자 원경릉은 오늘 일을 그에게 전했다.“전혀 이상할 것 없지. 기왕비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알고 있지 않느냐. 병을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면 동가(佟家)에서 의심하지 않겠지. 동가와 기왕부는 어쨌든 연이 있기에 끝까지 기왕이 태자가 되는 것을 지지해줄 것이고.” 우문호가 담담하게 말했다.“기왕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구나.”“기왕이나 기왕비나 똑같아. 둘 다 야망으로 가득 차 있어.”우문호는 그들의 지독한 인연의 끝은 절연이라고 생각했다.“맞다, 기왕비의 태도는 어땠어?”우문호가 물었다.“오늘 일이 어쩌면 그녀에게 모욕적으로 느껴졌겠지만 그래도 잘 참더라고.”“기왕비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야. 내일 기왕비한테 말해. 정강부(亭江府) 사건은 내가 그녀에게 퇴로를 남겨두었다고 그러나 막문이 경중과 접촉한 것은 내가 먼저 나서야 해.”“그럼 부황께는 어떻게 말씀드릴 거야?”“부황께서도 큰형님을 연루시키는 것을 원치 않아.” “그럼 뭐라고 해?”“내각은 이 사건을 서둘러 처리하고 정강부 사건 관련자들을 모두 면직시키라는 공문을 내렸어.”“그 뜻이 뭔지 알겠어?”원경릉은 공문의 의미가 사건 처리를 빨리하라는 재촉이라고 생각했다.“내각의 뜻은 먼저 관련자들을 면직한 후 형부나 이부에 넘겨서 처리하라는 건데 어쨌거나 이 일은 경조부와는 관련 없어. 내각 공문에는 경조부 관원이나 경중의 권세가에 대한 얘기는 한마디도 없었어.”“그래서 네 생각엔 부황이 여전히 기왕비와 기왕을 감싸려고 한다는 거야?”“목여태감이 오늘 직접 경조부로 오셔서는 나를 칭찬하라는 부황의 계시를 전하셨어. 내가 사건을 빨리 처리한다고 하면서 말이야. 부황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 사건을 빨리 종결하라고 하면 할 수 있지만 난 아직 이 사건을 종결하지 않았어.”“확실하네. 부황께서는 확실히 그들을 감싸주려고 하는 거야.”“괜찮아. 내가 증거를 가지고 있으니 부황의 뜻이 무엇이든 상관없어. 우리 손에 쥐고 있는 것만 잘 관리하면 내가 기왕비를 휘
원경릉이 회왕부에 도착하자 노비가 빠르게 나와 원경릉을 붙잡았다.“기왕비를 치료한다고요?”원경릉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습니다.”라고 말했다.노비는 원경릉이 기왕비의 병을 왜 치료하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왜? 그 여자가 초왕비를 해치려고 했잖아요?”원경릉도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노비는 씩씩 거리며 “나는 적어도 당신이 사리는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라고 말하며 차갑게 돌아서서 갔다.원경릉이 부중으로 들어오자 그 안에는 손왕비가 보였다.손왕비는 직접적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조심하라고 경고를 했다.“기왕비 같은 사람은 언제든 등 뒤에 칼을 꽂을 수 있으니 늘 조심해야 합니다.”원경릉도 자신이 기왕비를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노비께는 제가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만 작은 형님께는 숨길 이유가 없겠네요. 저도 많이 심사숙고했고 제 결론은 딱 하나입니다. 기왕비가 죽고 나면 주씨 집안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왕비보다 주씨 후손들이 더 싫거든요.”손왕비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왕비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압니다. 주명취도 주명양도 모두 다섯째를 좋아하잖아요.”“주명양……?” 원경릉이 잠시 멍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손왕비는 그녀를 보고 “그래요. 주명양은 사실 주명취 모두 초왕을 사랑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원경릉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주명양이 초왕을 사랑하고 있다고요?”“몰랐습니까?”“주명취가 아니라요?”“왜 그렇게 순진한 겁니까? 주명양 역시 그를 마음에 두고 있어요.”손왕비가 원경릉을 보며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저는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원경릉은 주명양이 자신을 싫어하고 괴롭히는 이유가 우문호를 좋아하기 때문인가 싶었다.손왕비는 순진한 표정의 원경릉을 보고 웃기 시작했다.“예전에 다섯째가 밥 먹듯 주씨 가문에 드나들었어요. 그
원경릉은 지금 제왕비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제왕비의 소식은 사식이가 간간이 전해주었다.원경릉은 처음에 주명취의 야망과 그녀의 실력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실력은 야망을 따라가지 못하였으며 허구한 날 제왕부에서 원후궁과 싸움을 했다.“듣자하니 일곱째와 원후궁이 아직 합방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손왕비가 말했다.원경릉은 제왕부의 소식은 별 관심이 없어서 화제를 돌려 손왕비와 궁중의 일들을 이야기했고, 조금 후에 손왕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녀가 떠난 후 손왕비의 말이 귀에 맴돌았다.‘주명양이 우문호를 마음에 두고 있다니……’우문호가 일을 마치고 저녁에 돌아오자 원경릉이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주명양이 널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우문호는 밥을 먹으려고 들었던 수저를 내려두더니 그녀를 쳐다보았다.“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 왔어?”“당황하지 않은 척 해도 지금 머리 엄청 굴리고 있지?”“얼토당토않은 소리야. 네가 임신해서 생각이 많아진 거야.”우문호는 그릇을 들고 계속 밥을 먹으며 누가 원경릉에게 헛소리를 했는지 생각했다.“손왕비가 다 실토했어. 주씨 집안 하인들도 다 알고 있었다는데?”원경릉은 그의 담담한 태도에 마음은 불안하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릇을 내리며 “사실이라고 해도 너한테 뭐라고 하지 않아. 나는 네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궁금했던 것뿐이야.”라고 말했다.“내 탓을 할 수가 엇지. 나는 주씨 여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아.”“그래서 주명양이 널 좋아하는 건 사실이라는 거지?”“듣자 하니 그렇다고 하더라.” 우문호가 말했다.“누가 너한테 얘기했어?” 원경릉이 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그건…… 주명양이 스스로 말했어.”원경릉이 젓가락을 과격하게 내려놓으며 버럭 했다.“그 여자가 너한테 고백을 했다고?”우문호는 조용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억울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내 탓은 아니잖아!”“그걸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원
원경릉은 궁 안의 많은 여인들이 자신의 남자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앞으로 신경을 써야 할 일이 생길 것 같자 원경릉의 기분이 안 좋아졌다.우문호는 복숭아처럼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억울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호소했다.“왜 화가 났어? 나는 그 여자들한테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어! 그리고 네 남자가 얼마나 잘났으면 많은 여인들이 좋아하겠어? 기분 나빠할 일이 아니라 자랑스러울 일이지.”“나는 다른 것보다 네가 나한테 말하지 않아서 화가 난 거야. 됐어 그렇게 억울해 할 필요 없어. 어쨌든 그녀는 기왕의 후궁으로 시집가겠지.”말을 마치고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이제야 기왕비가 주명양이 후궁으로 들어오든 말든 병풍 보듯 하는 거구나? 주명양의 마음은 너한테 있으니까?”말을 꺼내자 갑자기 이전의 기억이 떠올랐다.“최근에 너네 둘 만난 적 없어? 얘기나 쪽지를 주고받거나? 없어?”“상상력이 대단하구나. 무슨 쪽지를 주고받아?” 우문호가 웃었다.서일은 문 앞에서 원경릉을 향해 윙크를 했다.원경릉은 황당한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뜬 채 우문호를 쳐다봤다.“절대 아니라고!” 우문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단호하게 말했다.”원경릉은 슬픈 표정으로 천천히 일어났다.“여태까지 나를 속이다니. 나를 뭘로 아는 거야? 됐다 됐어! 앞으로 맘대로 하고 살아!” 그녀의 목이 메었다.우문호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그녀를 끌어안았다.“화내지 마! 내가 일부러 그런것도 아니잖아. 나는 네가 기분 나빠할까 봐 그런 거야.”원경릉은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치며 눈시울을 붉혔다.“말할 필요 없어! 그냥 거짓말하고 살아! 나중에 그 여자가 내 뒤통수를 치겠지.”“그 여자가 감히?” 우문호가 눈을 부라리며 “그럼 내가 그 여자의 다리를 부러뜨릴 것이야.”라고 말했다.이 말을 들은 원경릉은 자신도 모르게 풀이 확 죽었다.“나가서 다바오 산책 좀 하고 올 테니까 밥이나 먹어.”그녀가 일어나 문으로 걸어가자 서일이 따라나서며 “왕비님 같이
“서일 방금 왕비님께 말한 게 사실이야?” 사식이는 참지 못하고 서일에게 물었다.“물론이죠.” 서일이 장담했다.“방금 한 말은 함부로 하고 다니면 안 된다. 그럼 어제 너는 왕야께서 화난 모습을 봤어?”사식이가 물었다.“아뇨 왕야께서는 전혀 화가 난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게 이상해서 이 사실을 왕비님께 전하려고 하다가 먼저 탕어른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탕어른께서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하셔서…… 그래서 저도 당일에 왕비께 말씀 드리지 못했습니다. 근데 마침 오늘 손왕비께서 왕비에게 얘기를 하셨길래 이를 숨기면 안 될 것 같아서 말씀드렸습니다.”서일은 왕비가 울먹이자 마음이 불편하고 괴로웠다.사식이는 서일을 보고 탄식하며 “왕야께서 널 죽일 거야.”라고 말했다.“왜요? 제가 주씨 아가씨를 왕야 앞으로 대령한 것도 아니고.”원경릉은 서일을 보았다.“서일 당장 관아로 가서 어제 주명양에 경조부에 간 것을 본 사람을 찾아와. 그 여자가 아무 이유 없이 경조부에 갈 일이 없을 테니 무슨 이유로 경조부에 왔는지도 알아보고.”“아가씨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남자 같은 옷을 입은 할머니도 있었어요.” 서일이 말했다.“그 작은 할머님?”원경릉이 놀랐다. “그 할머님을 전에 본 적이 있어?”“아뇨. 처음입니다. 그래도 그 옷이 귀하고 낯이 익은 것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서일은 눈을 감고 잠시 생각했다.“고민할 필요 없어. 네 머리로는 내년도 생각해 내지 못할 것이야. 빨리 경조부로 가봐.”“지금요?”“빨리 가. 나는 1초도 더 기다릴 수 없어.” 그녀는 화가 나서 폭발할 것 같았다. 어젯밤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왕부로 돌아온 우문호가 가소롭게 느껴졌다.“왜 이렇게 안 들어와?”우문호는 원경릉이 안들어오자 걱정이 되는 듯 밖으로 나왔다.원경릉은 가만히 그를 지켜보았다.“왜 그래?”걸어오던 우문호는 원경릉의 불꽃 눈빛을 보고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잘 왔네. 내가 물어볼 게 있어. 어제 주명양이 관아로 너를 만나러
원경릉은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 느낌이 들었다.처음에는 그녀는 우문호가 거짓말하는 것에 화가 났다. 하지만 우문호의 태도를 보자 원경릉은 점차 그와 주명양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어제 관아에서 무슨 일이 있던 게 분명하다.원경릉은 눈을 내리깔고 다바오를 보며 “가자!”라고 말하고는 다바오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우문호는 서일을 무섭게 노려볼 뿐 그녀를 따라가지 못했다.그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왜냐하면 그는 어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어제 점심을 먹고 매일 하던 대로 관아 구석의 방에 잠깐 눈을 붙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고 문틈으로 주수보가 보였다. 문을 열어보니 주수보 옆에는 주명양이 서있었고 그 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난 후 부승을 만났는데 부승이 얼굴에 입술 자국이 있다고 해서 그는 손으로 그 입술 자국을 지웠다.우문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문지기를 불렀다. 경조부의 점심시간에는 문지기만 밖에 서있고 관원들도 순찰을 돌지 않는다. 문지기는 주수보가 문을 두드렸고 그와 주명양이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우문호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원경릉이 화난 것을 보고도 변명할 방법도 없었고 화가 잔뜩 난 그녀를 감히 건드릴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화를 가라앉히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대화를 나누는 방법뿐 없었다. 하지만 우문호가 사실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얘기를 하면 원경릉은 틀림없이 그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우문호는 사식이를 보고 “사식아 가서 왕비를 보살피거라.”라고 말했다.사식이는 씩씩거리며 그를 노려보며 “왕야께서 그런 사람일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남겨진 것은 서일과 우문호 둘뿐. 우문호는 고개를 돌려 서일을 노려보았다.“나랑 한 번 해보자는 거지? 두 발로 걷는 게 지겨워
원경릉이 무표정한 표정으로 돌아서자 우문호가 쫓아와서 원경릉의 손을 잡아당겼다.“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냐!”“그래서 뭐? 말해 봐 네가 말하는 대로 그냥 믿을게.” 원경릉은 진정하고 그의 말을 들어보기로 결심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이 남자는 그런 황당한 일을 저지를 사람은 아니다. 그녀는 화를 억누르며 그가 왜 거짓말을 하는지를 알고 싶었다.우문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주명양이 왔어. 근데 그 이후로는 걔랑 무슨 말을 했는지 뭘 했는지 기억이 안 나. 그리고 걔 혼자 온 게 아니야 주수보도 같이 왔었어.”“서일은 주수보를 못 봤다고 하던데? 작은 할머니를 봤다고 했어.”우문호는 서일을 보며 “주수보를 보지 못했다고? 작은 할머니?”라고 물었다.서일은 머리를 긁다가 무엇이 생각이 난 듯 눈을 크게 떴다.“소인 기억이 났습니다! 확실히 주수보는 아니었…… 주수보의 옷! 학이 수놓인 그의 옷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걸 입은 사람이 주수보인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남장을 한 작은 할머님 같았는데 얼굴에 주름이 아주 많았습니다.”우문호는 고개를 저었다.“그럴 리가 없어. 본왕이 문지기를 불러 물었더니 문지기는 주수보와 주명양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고 했어.”“방에 들어간 후에는?” 원경릉이 물었다.우문호는 고개를 저으며 “문지기도 그냥 지나쳤다고 하더라고. 나도 아무 것도 기억 나지 않아……” 라고 말하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본왕 얼굴에 입술 자국이 있었다고 하는데…… 난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 정말이야.”원경릉은 그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 그들이 방에 들어가서 얼마나 후에 나온 거야?”“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라고 문지기가 말했어.”“나갈 때 문지기가 주수보를 보았대 아니면 할머니를 봤대?”우문호는 고개를 저으며 “문지기는 나가는 사람을 똑바로 보지 못해. 고개를 숙이고 배웅하거든.”이라고 말했다.“그럼 너는 주수보랑 주명양이 들어오는 것은 기억이
깊은 밤이 되자 우문호는 침실을 맴돌다 솜이불 하나를 들고 침실 밖의 회랑(回廊)에서 잠을 잤다. 우문호는 이불을 꼭 끌어안고 생각을 했다. 그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억울하고 분했다.바닥은 딱딱하고 뒤척일 때마다 허리가 시큰거리고 등이 아팠다. 그는 한밤중에 살금살금 침실로 들어갔다. 쓱 목을 빼서 보니 원경릉은 깊게 잠이 든 것 같았다. 그는 살포시 발을 들어 침상으로 올라갔다. 그가 등을 대고 눕자 원경릉이 바로 발로 그를 걷어찼다. 그는 침상 아래로 떨어졌고 아픈 엉덩이를 손으로 문지르며 다시 회랑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원경릉은 그가 회랑으로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참을 인을 새겼다. 그녀는 사실 우문호를 믿고 있었다. 그가 정신이 멀쩡했으면 절대로 주명양과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없다. 우문호는 주명양을 증오했고, 그 사실은 원경릉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주명양은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한 것일까? 우문호 몰래 들어가서 무슨 짓을 했다면 그녀는 분명 목적이 있을 것이다. 이튿날 아침 우문호는 동이 트자마자 아침식사를 준비해서 원경릉 앞에 대령했다. 원경릉은 그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더니 “얼굴 몇 번 닦았어?”라고 물었다.“삼백 번! 삼백 번은 닦았어! 봐봐 얼마나 박박 닦았는지 뼈가 보인다니까?”우문호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원경릉은 능청을 떠는 우문호가 꼴 보기 싫었다. 때마침 사식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왕비! 탕양 어른이 찾아오셨습니다!”사식이는 우문호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우문후는 사식이의 말을 듣고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사건의 진상이 밝혀졌나 보구나! 들어오라고 하여라!”탕양은 소월각에 도착하자마자 서일에게 잡혀 어제 왕부에서 벌어진 일을 들었다. 서일은 우문호가 원경릉에게 뺨을 맞았다고 말했다. 탕양이 들어오자 제일 먼저 우문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하룻밤 사이에 얼굴이 많이 야윈 것 같았다. “조사가 끝났느냐?” 우문호가 그에게 인사도 생략하고 다급히 물었다.“예.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