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명양은 우문호의 무시하는 태도에 모욕감을 느껴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왕야, 어린 소녀가 무례한 짓을 한 것은 사실이나. 그 이유가 있으니 왕야께서 듣고 판단하십시오.”주수보는 차가운 눈빛으로 주명양을 보았다. 주명양은 조부가 화를 낼 것임을 알았지만, 우문호가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는 참을 수 없었다.“왕야, 초왕비께서 먼저 제 언니를 모욕하는 말을 했고, 소녀가 이를 참지 못해서 언니를 대신해 몇 마디 한 것입니다. 잘못은 했지만, 먼저 모욕을 한 것은 초왕비입니다.”그녀는 자신의 언니가 먼저 변심하여 초왕에게 시집가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주명양은 초왕이 어리석고 단순하기에 지금도 주명취를 매우 사랑하고 있을 테니, 그가 이 말을 듣고 분노해 원경릉을 꾸짖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우문호는 이 말을 듣고 기가 막혀 즉시 밖을 보며 소리쳤다.“희상궁을 들라 하라!”주수보는 주명양을 꾸짖으려고 했지만, 우문호가 희상궁을 부르는 바람에 입을 다물고 천천히 차를 마셨다. 잠시 후 희상궁이 들어왔다.주수보가 고개를 들어 희상궁을 바라보니 얼굴이 수척하고 광채가 나지 않았다. 그가 잠시 일어나 그녀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자 희상궁도 예의를 차려 그에게 인사를 한 후 천천히 앉았다.주명양은 조부가 희상궁에게 깍듯이 예의를 차리는 것을 보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희상궁, 오늘 현장에 있었지요? 초왕비가 어떤 언행으로 제왕비를 모욕했는지 말해보세요.”우문호가 희상궁을 보고 말했다.그러자 희상궁은 주명양을 차갑게 노려보며 “태후 전 밖에서 기다리던 때, 둘째 아가씨가 이미 초왕비를 모욕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원 후궁(袁侧妃)께서 훈계를 몇 마디 하고 말을 멈추었는데, 그 후에 함께 궁을 나오다가 제왕비와 둘째 아가씨를 만났습니다. 제왕비는 둘째 아가씨를 대신해 왕비에게 사과를 했고, 동서 두 사람이 상투적인 말을 몇 마디 했습니다. 하지만 누가 누구를 모욕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옆에 있던 둘째 아가씨가 갑자기 더러운 수단으
우문호는 주수보를 바라보며 진심으로 이렇게 말했다.“재상 노여움을 가라앉히십시오. 본왕이 이 일로 더 이상 추궁하지 않겠습니다.”얼굴에 크게 상처가 났고 거기에 물에 젖었으니 그 고운 피부는 틀림없이 붉은 물집이 생길 것이다. 물집이 생기면 적어도 1년에서 2년은 흉터가 사라지지 않을 테니.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여자에게 이만한 벌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까짓것 용서하지’주수보는 고개를 끄덕이며 “왕야께 폐를 끼쳤습니다.”라고 말했다.우문호는 그를 보며 “어느 집이든 배은망덕한 자손 하나씩은 다 있습니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주수보는 고개를 돌려 희상궁을 보며 “왕비는 어떠십니까?”라고 물었다.희상궁은 “어의에게 치료를 받았으며 며칠 동안은 침상에만 누워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큰 문제는 없습니다.”라고 답했다.“그럼 됐습니다!” 주수보가 손을 들어 시녀를 불렀다. 그녀의 두 손에 비단으로 덮인 무언가가 있었다. 그는 시녀에게 비단을 걷고 안에 상자를 꺼내게 했다. “여기에는 약이 있습니다. 이것은 여성들이 자손을 낳을 때 먹는 것입니다. 왕야께서 받아주십시오.”희상궁이 상자를 열자 안에 들어 있는 거북이로 만들어진 상자가 들어 있었다. 그 상자마저 열어보니 집안에 맑은 향기가 가득해졌다. “태아를 지키는 환?” 희상궁이 놀라서 물었다.“뭐라고요?” 우문호도 약 냄새를 맡고 물었다.“이것은 태아를 보호하는 약으로 부정방(傅淸芳)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먹으면 태기가 잡히고 안정이 되며, 출산을 할 때도 어려움을 겪지 않고 순산할 수 있는 약입니다.” 희상궁이 설명했다.희상궁은 주수보를 보며 “이 약을 구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라고 말했다.“황후께서 임신을 하셨을 때, 몇 알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한 알을 왕비에게 드립니다. 세자가 무사히 태어나길 기원하겠습니다.” 주수보가 말했다.우문호는 이 약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몰랐지만, 희상궁의 감동한 표정을 보고는 분명 좋은 약이 맞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이 약을
탕양은 상자의 약을 받아들고는 자세히 보았다.“소인 잘 모르겠습니다. 소인은 무우환(无忧丸)을 듣기만 했지 실제로 본 적은 없습니다.”우문호는 탕양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원판 어른과 조어의를 불러서 물어봐야겠군.”원판과 조어의가 함께 와서 무우환을 보며 자세히 분석했다.원판은 뜨거운 물을 한 사발 가져와 칼로 무우환을 조금 긁은 후 물에 고루 섞은 후 천천히 한 모금 마신 후 조어의에게 주었다. 조어의도 입에 머금고 천천히 약의 맛을 분별했다.잠시후 두 사람이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무우환!”이라고 말했다.지켜보던 우문호와 희상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왕야! 이 약을 당장 왕비께 드시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원판이 말했다.우문호는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을 받았다.“좋습니다. 그럼 왕비에게 주세요.”원경릉은 주수보가 보내온 약이라는 말을 듣고 먹지 않으려고 했지만 원판과 조어의 그리고 희상궁까지 강력하게 추천하는 무우환이라 먹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우문호는 매우 긴장하며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녀가 약을 삼키고 난 후 우문호는 그녀에게 무슨 느낌이 있는지 물었다. 원경릉은 약을 복용한 후, 가슴의 답답함이 완전히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외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정신이 맑아지네 우울한 기분도 사라지는 것 같고.”원경릉이 말했다.우문호는 황급히 어의를 불러 진맥했다.어의는 웃으며 “왕야, 이 약이 만병통치약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복용하자마자 효과가 바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좋은 약이니 기회가 된다면 하나 더 비축해두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말했다.“이 약이 대주의 용태후에게만 있는 것인가?” 우문호가 물었다.“예. 이 약은 대량으로 정제하지 않습니다. 아마 태보환(太保丸)은 여분은 충분히 있겠지만, 용태후의 무우환은 분명 소량만이 남았을 겁니다.” 조어의가 말했다.우문호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탕양. 지금 문방사보를 준비해 주시오. 본왕이 정정(靖廷)에게 편지를 보내 두세
우문호는 기뻐하며 원경릉을 보았다.“어때? 잘 썼어?”원경릉은 그를 보며 “둘이 이전에 주고받았던 편지들은 그대로 있어?”라고 물었다.“다 있지.”“그럼 보여줘.”우문호는 탕양을 시켜 이전의 편지들을 가져오라고 했다. 원경릉은 그들의 편지를 보기 전에는 혹시 우문호의 일방적인 착각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읽어보니 이 두 사람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이 느껴졌다.“대장군 장가는 갔어?” 원경릉이 물었다.“응.”“애는 낳았어?”“아직 장가든지 얼마 안 됐어.”“그의 부인이 너희 둘의 편지를 보면 억장이 무너지겠네.” 원경릉은 편지를 내려놓았다.우문호는 눈을 부릅뜨고 “뭐라는 거야? 우리는 친구야!”라고 말했다.원경릉은 깔깔 웃으며 “대단한 사랑 납셨다.”라고 말했다.두 사람의 편지를 보고 나니 우문호가 대장군이 무우환을 줄 것이라고 확신한 이유를 알게 됐다.약을 먹고 난 이틀 후, 어의가 원경릉을 진맥하더니 뱃속의 태아가 안정되었다고 진단했다.우문호는 어의를 문밖으로 데리고 나가며 엄숙하게 말했다.“안정이 됐다는 게 무슨 뜻이죠?”조어의는 무슨 그의 물음의 의미를 몰라 눈을 깜빡거리며 “그냥 안정이 됐다는 건데…….”라고 말했다.“그럼 적당한 운동은 해도 된다는 겁니까? 예를 들어 산책이나……뭐 다른 운동 같은……”조어의는 웃으며 “왕야 안절부절 마시고, 한 달만 더 기다리세요. 소인이 때가 되면 다시 답을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우문호는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잡았던 어의의 소매를 뿌리치고 들어갔다.원경릉의 태아가 안정됐다는 소식과 동시에 주명양이 기왕의 후궁으로 시집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이 소식을 들은 원경릉은 “기왕? 우여곡절이 많겠네……”라고 말했다.우문호는 무관심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그 여자가 누구랑 혼인을 하든 내 알바는 아니다.”라고 말했다.“그런데 기왕의 후궁이 죽은 지 얼마 안 됐는데, 바로 후궁을 맞아도 되는 거야?” 원경릉이 물었다.“안 될 건 또 뭐야. 이
원경릉은 심리적 그림자라는 것이 낙관적인 사람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원경릉은 우문호의 말에 괜히 수치스러워졌다. 희상궁은 손님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분주하게 음식을 준비했다. 매번 궁안에서 쓰고 남은 고기가 많다는 사실을 안 희상궁은 고기 말고 다른 야채들을 구비해 몇 가지 요리를 더 추가하라고 했다.이튿날 아침 원경릉은 단정하게 차려입고 원부인과 원후궁을 기다렸다. 원경릉은 그 둘이 점심때쯤 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분주하게 아침을 먹으려고 했다. 아침을 다 먹었을 때 하인이 찾아왔다.“왕비님 워후궁이 원대장군부의 사람들을 데리고 찾아왔습니다.”“이렇게나 빨리? 그럼 편청으로 모시거라 나도 채비를 해 금방 편청으로 가겠다.”본관은 비교적 딱딱하고 엄숙한 느낌이기에 우문호가 사람을 접견할 때 많이 썼고, 부녀자들은 대부분 편청에서 화담을 나눴다. 원경릉의 말을 듣고 하인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편청에 자리가 부족할 것 같습니다만……”하인의 말을 듣고 원경릉은 깜짝 놀랐다. “몇 명이나 왔는데?”그러자 하인은 “적어도 스무 명에서 서른 명은 온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고요.”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원경릉은 아연실색했다.원후궁은 원부인만 데리고 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데리고 온 이유가 뭐야?희상궁은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란 목소리로 “당장 사람을 시켜 음식을 더 준비하라고 하거라! 고기도 사야 하고! 내가 적어주는 것을 모두 준비하거라!”라고 말했다.원경릉은 전상궁과 녹주를 데리고 그들을 맞이하러 갔다.복도에 막 다다르자 본관에서 몇 차례 큰 웃음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외에 다른 시끄러운 소리는 없었다.그녀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이렇게 조용하다고?라고 생각했다.“초왕비 언니!” 어디선가 갑자기 그림자가 휙 다가왔다. 한 손으로 원경릉의 팔을 잡은 여인은 아름다운 얼굴에 붉은 입술 긴 속눈썹이 매력적이었으며 맑고 큰 눈으로 원경릉을 바라보며 기쁜 듯한 표정을 지었다.원
한 부인이 일어나 원경릉에게 절을 하였다. “소첩은 왕비께서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원경릉은 그날 손에 화상을 입은 부인이 생각이 났다. “부인, 은혜라니요. 너무 과합니다. 그나저나 손은 괜찮으십니까?”“괜찮습니다.” 원부인은 다소 격동된 목소리로 말했다. 둘의 대화가 끝나자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한번에 소개를 하자 원경릉은 얼굴이 뻐근할 정도로 미소를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너무 많아서 몇 사람 기억하지 못했다. 여하튼 원부인과 워후궁 그리고 외사촌 아가씨, 외사촌 이모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만 대충 기억했다.원경릉은 사람들이 걸을 때 기세가 충만하고 발걸음이 씩씩한 것이 모두 무공을 했던 사람 같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옆에 있던 전상궁에게 “원가의 여성들은 모두 무예를 익힙니까?”라고 물었다. “다들 무예 고수입니다.” 전상궁이 조용히 속삭였다.이 말을 들은 원경릉은 순간 경건해졌다. 원경릉은 무리 안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았다. 적으면 일곱 여덟 살부터 많으면 열다섯 안팎의 아이들이었다. 그들 모두 비슷하게 생긴 것이 귀여웠다.자기소개가 끝난 후, 그들은 준비한 선물을 꺼냈다. 각양각색의 선물을 보니 원경릉은 놀라 혀를 내둘렀다.본관 중앙에 큰 무기와 장검, 화살, 대도, 도끼 등이 꺼내졌다. “이 검은 소인이 사람을 시켜 서역에서 제조한 것입니다. 순 강철로 만든 것인데 쇳덩어리를 잘라도 진흙처럼 산산조각이 납니다! 왕비께서도 한번 휘둘러 보시지요!” 노부인이 보물을 내놓으며 말했다.“조모, 왕비님은 임신해서 큰 동작을 하면 안됩니다.” 원용의가 말했다.노부인은 “오! 늙은이가 결례를 범했구먼.” 이라며 원경릉에게 사과를 했다.원경릉은 손을 저으며 어색하게 웃었다.“제가 몸이 이래서 다음에 한번 휘둘러보겠습니다.”“그럼 내가 해볼게요!” 원가의 작은 소녀가 단상에 올라왔다. 소녀는 한 손에는 검을 한 손에 검을 쥔 채 눈을 가늘게 뜨고 진지한
노부인은 빙그레 웃으며 “임신을 하면 화장실에 자주 갑니다.”라고 말했다.원경릉은 녹주와 기라를 보고 손짓했다.“이리 와서 부축해 줘. 내가 다리가 후들거려서… 아니 오래 앉아있었더니 혈이 돌지 않아 저린 것 같다.”녹주와 기라는 그녀를 부축해 화장실로 향했다. 원경릉은 문 앞을 나온 뒤 재빨리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그녀는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심호흡을 했다.“깜짝 놀랐네 진짜!”하마터면 화살이 그녀의 머리를 관통했을 생각을 하니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녀는 마침내 우문호가 주명취와 원용의가 싸우면 주명취가 이길 수 없다고 한지 알게 되었다. 제왕이 원용의를 업신여긴다면 방금 같은 무공 고수들이 나서서 제왕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다.‘제왕 참 불쌍하다.’원경릉은 마음을 가다듬고 머리를 다시 빗어 올리자 본관 안에 있던 소녀가 비녀를 들고 왔다.“왕비님 여기 비녀요!”원경릉은 웃으며 “너 줄게.”라고 했다.소녀는 감동받은 눈빛으로 “정말요?”라고 물었다.“응. 마음에 드니?” 원경릉이 물었다. 그녀는 비녀를 받을 수 없었다. 만약에 이 비녀를 가지고 있다면 볼 때마다 화살 꽂힌 비녀가 생각나 몸에 소름이 돋을 것 같았다.“네! 정말 마음에 듭니다!” 소녀는 비녀를 가슴에 품고 울먹였다.원경릉은 그녀를 보며 왜 자신처럼 타락한 왕비를 이렇게 소중하게 아끼고 좋아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심지어 온 집안사람들이 원경릉을 보러 오다니? 그리고 무공을 하는 집안에서 아끼는 무기들을 내어주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본관으로 돌아가자 원노부인은 안색을 가다듬고 원경릉을 바라보았다.“왕비님, 늙은이가 무리한 부탁을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노부인은 화살을 쏘는 소녀를 보며 탄식하듯 입을 열었다.“우리 원씨 집안의 아가씨들이 난폭하고 괴팍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런 망나니 같은 아이들을 도대체 어떻게 교육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같이 예쁘장하게는 생겼지만 성격이 우악스럽고 제멋대로라 이 아이들의 혼사만 생각하면 앞이 캄
화살을 가지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작은 소녀가 무릎을 꿇고 말했다.“왕비님 저를 거두어주십시오! 사식이는 왕비의 가르침을 따르고, 왕비를 보호하겠습니다!”그 말을 들은 원경릉은 마음이 흔들렸다.현재 우문호가 서일을 그녀의 옆에 배치했지만, 서일은 남자여서 그녀와 같이 이동할 수 있는 공간에 제한이 있었다. 예를 들어 여자들 모임 같은 것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사식이는 달랐다. 사식이는 아무 데나 데리고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사식이는 원씨 집안의 처녀인데 무슨 명목으로 왕실에 남게 할 수 있을까? 밖에 사람들이 사식이를 보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지 않을까?“왕비님은 임신 중이시니 고민되는 일은 일체 생각도 마십시오. 만약 사식이가 필요하다면 쓰시면 됩니다. 몇 개월 정도 왕부에 머물게 하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희상궁이 말했다.희상궁의 말을 듣고 원경릉은 고개를 끄덕였다.“사식아 이렇게 된 마당에 내 옆에서 지내거라. 가끔 이야기도 하고 내 기분에 장단도 맞춰주거라.”“예! 왕비님 감사합니다.” 사식이는 감동해서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사식이는 원씨 집안의 다른 소녀들의 부러움과 시기의 눈빛을 받으면 한쪽으로 물러섰다. 이른 본 원용의는 사식이를 보고 머리가 아팠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이렇게 빨리 시집을 가지 않았을 텐데……’모두들 앉아서 한참을 떠들다 보니 시간이 정말 빨리 지나가서 점심을 먹을 때가 되었다.원경릉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으니 통제가 안 되고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들려주는 시대의 재미있는 이야기와 생동감 넘치는 표현력에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마지막으로 그녀는 그들이 너무 부러웠다. 서로 존중하고 아끼는 막연한 사이가 정말 행복해 보였다.그녀는 이들과 있으니 마치 현대의 자신의 집으로 온 기분이 들었다. 현대에서 설날이 되면 그녀는 삼삼오오 가족들과 맛있는 것도 먹고 즐겁게 대화도 나누었다.식사 후, 원노부인이 가족들과 작별을 고할 때, 뜻밖에도 원경릉은 아쉬워 눈물이 났다.“
위왕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혹시 복수하려는 것이냐?”“복수가 아니라, 그저 사실을 말할 뿐입니다.”안왕은 그에게 책임을 떠넘겨 혼자 감당하게 한 위왕을 보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위왕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어찌 다섯째에게 설명할지 생각해 보거라. 보책은 아직 네 손안에 있잖냐.”안왕은 여전히 두꺼운 보책을 손에 쥐고 있었다. 잃어버릴 수 없는 귀한 것이지만, 가만히 들고 있기도 거슬렸다.이렇게 골치 아픈 상황이 생길 줄 알았다면 차라리 꾀병을 부리고 위왕 혼자 오게 한 것이 더 나았을 텐데 말이다. 그렇게 각자 방으로 돌아가 목욕을 한 후, 막 침대에 누웠을 때 택란이 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두 사람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고, 바로 택란을 만나러 나갔다.안왕은 보책을 가지려 했으나, 택란에게 넘겨받으면 곧 금나라 황후임을 인정하는 셈이 되므로, 절대 넘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적어도 어린 황제는 아직 그들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택란은 두 분 큰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린 후 자리에 앉아 말했다.“큰아버지, 오늘 일은 아바마마께 절대 말하지 마십시오.”안왕도 원하던 바였기에 다급히 답했다.“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먼저 네 아버지한테 숨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예. 저도 그것이 걱정입니다.”택란의 가장 큰 걱정은 바로 아버지였다.“어린 황제도 참, 어린 시절의 약속마저 진지하게 받아들이다니… 설령 너와 혼사를 약속했다 해도, 네가 승낙하지 않을 것 아니더냐.”안왕이 말하자 택란은 잠시 머뭇거리며 말했다.“그때 이미 동의했었습니다.”다만 그때는 그저 그를 달래, 그의 상처가 심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 뿐이었다.“승낙했다니?”안왕과 위왕은 서로 놀란 표정으로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면 이 일은 전적으로 어린 황제의 탓도 아니다.“하지만 넌 그때 겨우 여덟, 아홉 살이었다. 그저 아이들의 장난일 뿐일 테니, 동의했다고 해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도 된다.”위왕이 재빨
“폐하, 공주께서 폐하가 드리신 선물을 받지 않으신 것입니까?”언제 올라온 건지, 진이는 어느새 그의 곁에 서 있었다.“응.”경천은 뒤돌아 상자와 두 개의 옥패를 바라보았다. 그가 오랜 시간 동안 배우며 수많은 옥을 망친 끝에 겨우 지금과 같은 모습을 조각해 낸 것이었다.하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속상해하지 마십시오. 공주께서 아직 어리셔서 폐하의 노고를 다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깐요.”진이가 위로하자 경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어서 받지 않는 것이다.”진이가 잠시 멈칫했다.“너무 잘 안다니요? 그런 것 같진 않아 보였는데요.”경천은 이미 실망한 기분을 떨쳐버렸고, 대신 굳건한 의지를 다졌다.“진아, 나는 그녀의 뜻을 완전히 이해했다. 그녀는 먼저 좋은 황제가 되어주기를 바란단다. 이곳을 떠나기 전, 나에게 한 나라의 군주라 하지 않았냐? 황제로서 역할을 다하기를 바라는 것이다.”“아... 그런 것입니까!”진이는 비록 이해하지 못했지만, 황제가 속상해하지 않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택란 일행은 궁을 나섰다. 냉명여가 그녀에게 물었다.“누나, 어찌 황제가 주신 옥패를 받지 않으시나요? 그를 싫어하시는 것입니까?”택란은 웃으며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는 절대 그를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강단 있는 황제이고, 뛰어난 통치로 금나라가 정권 이양 위기를 넘길 수 있도록 했다. 게다가 그는 두 나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두 나라에 평화를 가져왔다.”“그럼, 어찌 그의 선물을 받지 않으셨습니까?”냉명여는 다른 사람의 선의를 함부로 거절하면 안 된다고 배웠기에, 그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택란이 답했다.“그 옥패가 약속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명여야, ‘약속’이라는 말은 무거운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약 네가 그것을 이행할 능력이 없다면, 함부로 약속하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하지만 그도 누나와 혼사를 올리겠다고 한 말에 대한 약속을 지키려는 것 아닙니까?”“그래. 하지만 나
경천은 그녀의 말을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택란이 말했다."어쩌면 5년 후에는 오늘 한 모든 일이 어리석고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좋아하는 여인을 만나게 될 때, 그 감정이 단순한 사모인지 은혜 때문인지 알게 되실 것이고, 오늘의 행동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경천은 단 한 마디만 응한 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태도가 이렇게나 분명하니, 절대 그런 말로 그녀를 얽매여 부담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늘 한 모든 일은 그의 결정이며 그의 태도였다. 그녀는 몰라도 되고,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긴 하지만, 그는 언제나 그녀를 기다릴 것이었다.그리고 그녀의 인정을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택란은 한숨 놓은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해한다니 다행입니다.""알고 있다."경천의 얼굴은 약간 창백했지만, 애써 미소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삼 태감이 책자를 가져왔다. 경천은 그것을 택란에게 건넸고, 택란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았다. 그가 제시한 조건은 매우 공정했으며, 심지어 약도성에 이익을 양보한 정도였다.책자를 접은 후, 그녀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약도성을 생각해 줘서 고맙습니다. 두 나라의 원한을 풀기 위해 애써줘서, 그리고 약도성의 백성과 조정이 화해할 수 있도록 도와줘서 고맙습니다.""알고 있었던 것이냐?"경천이 다소 놀라며 묻자, 택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예. 알아봤습니다.""오해하지 마라. 그저 너를 위하여 한 일이 아니니, 부담 갖지 않아도 된다."그는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해명했다.택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오해하지 마시지요. 저는 정말 부담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를 위해 이렇게 많은 일을 해줘서 고마울 뿐입니다. 오늘도 사실 많이 감동했습니다. 다만, 저는 아직 혼사에 대해 논할 나이가 아니고, 사적인 감정보다는 다른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 어리고, 앞으로 혼사를 하더라도 반드시 아바마마
손에 쥐니, 차가운 촉감이 느껴졌다. 그 옥의 차가운 느낌이 서서히 스며들자,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놀라운 표정을 지었을 때, 그는 미세하게 안도하며, 그녀가 좋아할 것이라 믿었다."직접 만든 것입니까?"택란은 마음에 든 듯 손에 꼭 쥐고 있었다. 그녀의 밝은 눈동자에는 존경이 가득했다."응!"그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마음에 드냐?""예. 정말 마음에 듭니다!"택란도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빛나는 미소를 지었다.그러자 그가 약간 흥분된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이걸 직접 나에게 선물해 줄 수 있느냐?""예?"택란이 잠시 멈칫하며, 놀라 물었다."저에게 준 선물이 아닙니까?"그가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으로 소매 주머니에서 또 다른 옥 조각을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으며, 진지하게 말했다."이건 내가 네게 직접 주고 싶은 것이다."택란은 그가 손에 든 것을 바라보았다. 옥질도 동일하게 맑고 투명했고, 손바닥의 선도 보일 정도였는데, 그 조각에는 경천의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옥에는 미소를 짓고 있는 준수한 그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고,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입고 있던 옷이 새겨져 있었다. 비록 색은 알 수 없었지만, 자수가 명확하게 새겨져 있었다.그녀는 기억력이 매우 좋았기에, 그때의 기억이 선명히 떠올랐다.그녀는 두 개의 옥을 손바닥에 놓았다. 그제야 그녀는 옥에 3년 전 그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가 시간을 되돌려 3년 전 만남을 담은 것이었다!경천은 택란을 바라보며, 애써 차분함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심장은 거의 목구멍까지 올라올 듯했다.택란이 두 개의 옥을 서둘러 상자에 다시 넣으며 말했다."두 개 모두 오라버니께서 먼저 가지고 있으세요."경천은 눈시울을 붉히며 다시 건네받은 상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내리깔며, 애써 실망이 드리운 눈빛을 숨겼다.삼 태감이 정교한 음식을 올려놓았고, 모두 택란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알 수 없는 작은 흥분을 억누르고, 표정을 고쳐서 천천히 돌아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북당 백성인 란이 언니와의 혼사는 다 거짓인 겁니까?"경천의 동공이 흔들렸다."혹시... 화가 난 것이냐?""아닙니다."택란이 고개를 젓자, 밝은 빛이 그녀의 깨끗한 얼굴에 비쳤고, 고르게 정리된 이마 밑의 눈동자는 다시 차분해졌다."그런데 어찌 사람을 시켜 저를 찾고 있다고 직접 저게 소식을 전하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편지를 보냈다면, 저도 오라버니를 만나러 왔을 것입니다. 심지어 혼사에 하객까지 청하며 일을 이렇게나 크게 벌였는데, 대체 어떻게 수습하려고 하십니까?"그는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천천히 그녀 앞에 섰다. 그러고는 그녀의 까만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수습할 필요 없다. 나는 이미 천하에 나의 황후가 우문택란이라고 선언했다. 나는 그녀가 어서 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택란은 순간 놀라하며, 굳어진 얼굴로 물었다.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경천은 그녀가 화가 난 것 같아, 마음이 내려앉았다. 그의 눈동자엔 어두운 그림자가 깔렸고, 이내 조심스레 물었다."응할 수... 있겠느냐?"택란은 잠시 망설였다. 기억 속의 그 소년이 지금 별빛을 받으며 그녀 곁으로 돌아왔다. 이전의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10년 후 그가 죽지 않으면 돌아와서 그녀를 부인으로 맞겠다고 열정적으로 말했었다. 그 열정이 가득한 목소리는 지금도 그녀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런 과거와 현재가 얽혀 버리자,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저는..."경천은 그녀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반응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얼굴을 조금 숙이며 말했다."지금 바로 대답할 필요 없다. 몇 년 후라도, 10년, 아니 20년 후라도 괜찮다.""하지만...""아니, 말하지 말거라."그는 방금까지만해도 가득찼던 자신감을 더 이상 보여줄 수 없
냉명유는 팔짱을 낀 채 검을 가슴 앞으로 옮기며, 차갑게 말했다."누님께서 어디로 가든, 저도 무조건 함께 갈 것입니다."“하… 하지만."삼 태감이 무척 난감해했다."그래. 함께 가자. 이 거월통천각이 정말 달을 딸 수 있는지 어디 가서 보자꾸나!"그러자 택란이 웃으며 말했다.주 아가씨는 조금 의심스러웠다. 정말 공주가 만나고 싶다면, 어찌 공주한테 이렇게 높은 계단을 오르게 할 수 있는가?그러고는 계단 위에 새겨진 난초꽃을 힐끗 보고는 순간 멈칫했다. 시선을 위로 올려보니, 계단의 각 층마다 난초꽃이 새겨져 있었다.황제가 자신의 그리움을 돌계단에 새긴 것이었다!택란도 계단을 오르며, 이 사실을 눈치챘다.게다가 각 난초의 형태와 크기는 매우 똑같았다. 처음에는 선이 조금 거칠게 느껴지긴 했지만, 후에는 점점 더 섬세하고 부드러워 보였다.이건 분명 같은 사람이 새긴 것 같았다. 그가 직접 조각한 것일까? 금나라가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지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잠시 후, 그들은 거월통천각의 가장 높은 층에 도착했다. 다행히 냉명여는 문 앞에서 멈추고 안까지 들어가지 않았다.택란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는데, 안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네개의 용 모양 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네 모서리에는 각각 올라가 쉴 수 있는 정자가 있었다. 정자에는 난간이 둘러져 있었으며, 가운데에는 탁자와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떠힌. 네 면에 걸려져 있는 대나무 커튼이 걷혀 있어, 사방에서 밖을 볼 수 있었다.그 사이에서 청색 비단옷 차림의 남자가 통천각 옆 난간에 기대어 택란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매우 긴장한 듯 손과 발을 살짝 떨고 있었다. 별빛처럼 맑은 눈동자에 약간 숨이 가쁜 듯 보였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녀를 보자마자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재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며 가장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에,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이 만남을 특별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반짝이는 별들도 그중 하나였다.하지만
손님들이 하나둘씩 떠나자, 경천 황제는 서둘러 궁으로 돌아가 푸른 비단옷으로 갈아입었다.옅은 청색 옷자락에, 소매 끝에는 난초꽃이 수놓아져 있었고, 나머지 부분은 어두운 구름 문양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이 옷감은 북당에서 온 것이었다."폐하, 꼬마 은인께서 궁문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삼 태감이 와서 보고했다."좋소."그는 거울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깊은숨을 내쉬었다."택수운천으로 가겠네."택수운천은 그가 즉위한 후, 궁궐 안에 지은 새 궁전으로, 세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궁전 옆에는 거월통천각이 있었는데, 이는 량주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거월통천각 안에 있으면 마치 손바닥에 달을 담을 수 있을정도로 웅장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거월통천각에서 멀게는 약도성과 량주가 인접한 산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녀가 생각날 때면, 늘 거월통천각의 가장 높은 층으로 올라가 풍경을 멀리 바라보곤 했다."진이야, 너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해 본 적이 있느냐?"그가 준수한 옷차림으로 난간에 기대어 먼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바람이 서서히 불며 청색 옷자락이 휘날리자, 옷자락의 네 끝에 박힌 고급스러운 야명주가 그의 선명하고 잘생긴 얼굴을 비추었다.그때, 저 멀리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궁 시위를 따라, 아치과 복도를 지나 거월통천각으로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젊은 금군 통령 진이가 그의 모습을 보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런 적 없습니다.""사모의 마음을 품어보거라. 떨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느낌만큼 좋은 것이 없다."그는 그녀를 멍하니 보며 말했다. 천천히 다가오는 탓에 그녀의 얼굴이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13세 전까지의 그의 인생에는 나라와 백성들 뿐이었지만, 13세 이후 그의 인새은 온통 그녀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금 그녀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진이는 황제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다가오는 세 명을 보며
안왕은 보책을 받아 든 순간, 갑자기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정확히 어떤 점이 이상한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일이 다 이상하게 느껴졌다.보책을 펼쳐 안에 적힌 이름을 본 순간 그는 드디어 이상한 점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게 되었다.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굳어진 표정으로 경천 황제를 바라보았다.경천 황제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조사를 통해 드디어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소. 그녀의 이름은 우문택란이오. 금나라 황후의 이름은 우문택란이네. 난 반드시 그녀를 찾아낼 것이오. 만약 그녀가 황후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황후의 자리는 그녀를 위해 계속 비워둘 것이네.”위왕은 온몸에 식은땀을 흐르는 탓에 두 손을 급히 움켜잡았다. 방금 황제가 보책을 그의 손에 올리지 않아, 그가 받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정말 다섯째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안왕은 어두워진 안색으로 자리에서 물러나 이를 악물고 낮은 소리로 위왕에게 말했다.“방금까지도 어린 황제에게 어리석다고 했건만. 이렇게 계책에 능하고 이따위 교묘한 계책으로 우리 형제를 그와 같은 편에 서게 만들다니...!”위왕은 또 한 걸음 물러서며 아무런 표정 없이 말했다.“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방금 술을 두 잔 마셔 조금 취한 터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아니, 지금 들고 있는 그건 무엇이냐?”안왕은 단단한 그의 팔을 비틀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다.하지만 이 상황 속에서 연회는 계속되었고, 사람들의 감정은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북당 황제의 작은 공주도 우문택란이라는 말을 꺼냈다.그 말에 다들 그 당시 금나라 황제를 구한 사람이 북당의 작은 공주가 맞는지 추측하기 시작했다.정말 북당 공주가 맞는다면, 금나라 황제도 참 배짱이 큰 것이다. 사실상 북당 황실이 금나라 황제를 구했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만약
경천은 위왕의 말을 듣자, 마치 마음속 큰 돌덩이가 내려간 듯 후련해 보였다. 그는 그러고는 궁인에게 술을 올리게 해 술잔을 여러 차례 돌린 후, 아래를 둘러보며 말했다.“오늘 여러분께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소.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오늘 정혼연이 어찌 열리게 되었는지 알게 될 것이오.”그러자 모두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말에 당황을 금치 못하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정혼연이든 혼례든, 이런 자리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이때, 위왕이 안왕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섯째에게 서신을 보내야겠다. 금나라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자가 황제가 아닐 수도 있다. 진국왕이 아직 살아 있고, 이 황제가 꼭두각시일지도 모른다.”“맞소. 확실히 조금 병신같아 보이네.”안왕도 동의했다.참고로 ‘병신같다’는 표현은 안왕이 조카에게서 배운 단어였다.“이 이야기는 3년 전쯤에 있었던 일이오.”이내 경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담겨져 있었다.“당시 금나라는 진국왕이 집권하고 있었는데, 그는 나를 대신해 금나라의 군주가 되려 했소. 이 사실은 여러분도 알고 있을 것이오. 그때 난 진국왕과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소. 진국왕이 왕위를 빼앗으려 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하기에, 나도 어쩔 수 없이 반격에 나섰는데, 그 과정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소. 그때 나를 구해준 이가 바로 란이라는 소녀이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난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오. 그 당시 나는 란이의 정체도 몰랐고, 그저 약도성 사람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소. 상처를 치료하며 그녀와 며칠을 함께 보냈고, 황권을 되찾으면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했네. 하지만 그녀가 나를 구했다는 사실이 진국왕에게 알려졌고, 진국왕이 사람을 보내 그녀의 집에 불을 질렀소. 그리고 그곳에서 시신이 발견되었소.”모두가 진국왕이 불을 질렀다는 말에 멈칫했다.금나라 황제가 이렇게 비극적인 황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