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상황은 최근 2년 동안 애가 탔다. 병든 여섯째, 장님인 여덟째,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아홉째, 그리고 나머지 친왕들은 모두 아들을 낳지 못했다. 그는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조급했다. 그는 매번 명원제 앞에서 증손자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효자인 명원제도 태상황의 재촉에 덩달아 마음이 조급해졌다.그리하여 정세를 읽은 조정의 신하들은 친왕들 중에 누가 아들을 낳아서 태자가 될 것인가를 추측했다.“이리 가져오거라!” 태상황이 상선에게 말했다.상선은 뒤에 서있던 궁인에게 식합(食盒)을 가져오라고 하더니 그것을 희상궁에게 전해주었다.“이것은 태상황님께서 왕비에게 하사하는 것이니, 상궁이 왕비께 드리세요.”희상궁은 두 손으로 식합을 받아들며“왕비는 지금 먹는 대로 토하고 있어서……”라고 말했다.“가져가거라. 한 입을 먹어도 두 입을 먹어도 상관없다. 태상황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하고 받아 가거라.”상선이 말했다.희상궁은 식합을 들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더니, 잠시 후 뒷걸음질로 물러났다.희상궁이 식합을 들고 들어오자 원경릉이 “태상황님께서는 가셨어요?” 라고 물었다.“아직입니다. 지금 밖에 계시는데, 태상황님께서 식합을 주셨으니 한술이라도 드세요.”원경릉은 얼굴을 찌푸리며 “못 먹겠는데……”라고 말했다.희상궁이 식합 뚜껑을 열자 안에는 희멀건 국이 있었다. 무언가 둥둥 떠있었고, 야자 향기가 났다. 희상궁은 수저에 국을 조금 덜어 그녀의 입에 가져갔다.“설탕물인가요? 세상에, 이런 건 못 먹는데” 원경릉의 미간이 한순간에 찌푸렸다. “숟가락에 혀라도 대보세요.”“이렇게 대충 먹어도 되는 건가요?”“입이라도 댔으니 어르신의 마음은 받으신 겁니다.” 희상궁이 웃으며 말했다.원경릉은 수저를 집어 핥더니 멍한 표정으로 희상궁을 보았다.“어? 이거 달지 않네요?”그녀는 침상 가장자리에 몸을 기대고 앉아서 식합 안에 국을 들이 마셨다. 희상궁은 그녀가 토를 할까 봐 걱정되어 급히 타구(痰盂)를 들고 왔다.원경릉은 가슴을
원경릉이 가마를 타고 오는 것을 본 태상황의 미간이 찌푸려졌다.“쟤는 뭣 하러 여길 온 거야?”원경릉은 의장을 입은 태상황을 보고 놀랐다.‘나를 보러 오신다고, 저렇게 옷을 입고 온 건가?’우문호는 빠른 걸음으로 나가 원경릉을 안아들었다. 어의가 그녀의 상태를 보고 한 걸음도 땅에 발을 딛지 못하게 했기에 지금까지 목욕이든 식사를 하든 우문호가 안아서 이동했다. 원경릉은 과잉보호를 받는 느낌을 견딜 수 없어 그의 팔을 두드리며 “내려줘 내가 걸어갈게. 라고 말했다.“어의가 넌 걷는 것도 조심하랬어.” 그는 그녀를 의자 위에 앉히며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나 본데 착각하지 마. 내가 왕부에 없을 때 맘대로 걸어 다니는 거 내가 다 알고 있어.”라고 말했다.“이렇게 움직이지 않다가는 걷는 법도 까먹겠다.”원경릉이 투덜거리며 도와달라는 눈빛으로 태상황을 보며 “황조부 그렇지 않습니까?” 라고 물었다.태상황은 그녀를 슬쩍 보더니 고개를 돌려 우문호를 보았다.“나가기 전에 침상에 묶어두면 되지 않느냐? 말을 듣지 않으면 매를 들어 다스리거라.”태상황이 말했다.“예, 기억해두겠습니다.”우문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씩 웃었다.원경릉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태상황을 보았다.“임신했다고 너무 안 움직여도 태아에게 좋지 않아요. 제가 제 몸은 더 잘 압니다! 그리고 전 의사라고요!”“아무리 뛰어난 의술을 가졌더라도 자신의 병은 자신이 고치지 못하는 법이지. 맞다! 국은 잘 마셨느냐?”국 얘기가 나오자 그녀의 눈에서 빛이 났다.“예!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안에는 제비집이랑 야자가 들어있는 것 같던데, 맞습니까?”“뭐가 들었던 좋은 것만 담았습니다. 먹으면 속도 편하고, 태아에게도 좋습니다.” 상선이 웃으며 말했다.원경릉이 맛있게 먹었다는 말에 우문호는 깜짝 놀랐다.“황조부, 국에는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어떻게 만드는 겁니까?”“그 정도 먹었으면 됐다. 너무 많이 먹어서도 안 좋아. 그럼 이만 난 셋째 얼굴 좀 보러 가야겠다.” 태상황이 느
“응, 확실히 좋아졌어. 토할 것 같지도 않고, 야자가 들어있는 것 같던데. 여기서도 야자를 구할 수 있나? 아무튼 속이 아주 편해.”경도는 북쪽에 위치해 있고, 지금은 가을이라 야자가 생산되는 곳이 없을 텐데…… 혹시 야자를 어디에 숨겨두고 있는 건가?“궁에는 없는 게 없다. 남방에서 생산되는 야자를 받기만 하면 되는걸? 태상황의 귀영위는 대단하다.”“귀영위?”“응 귀영위는 태상황 재위 때 성립된 곳으로 민간과 백관 사이를 살피며 소식을 캐거나 전했는데, 부황이 재위하자 귀영위는 태상황의 심부름꾼으로 전락하게 됐지.”원경릉은 건곤전에서 봤던 검은 옷을 입은 시위들이 생각이 났다. “말이 심부름꾼이지, 내 생각엔 태상황님이 소식에 밝은 것을 보니 귀영위들이 아직도 세상의 모든 소식을 캐고 있는 것 같아.” 원경릉이 말했다.“그렇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지, 어차피 조정에는 태상황님을 수 없어.” 우문호가 답했다.원경릉은 방금 우문호가 한 말은 희상궁에게도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희상궁은 태상황의 곁에서 여러 해 시중을 들었으니, 아마도 그녀는 귀영위 중에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내가 줄곧 너한테 숨기고 있었던 일이 있는데…….” 우문호가 원경릉을 보며 말했다.“말해! 나 오늘 기분 좋으니까, 첩을 얻거나 여자에 관한 일 빼고는 다 용서해 줄게.”“첩을 얻는 일은 아니지만, 여자에 관한 일은 맞다.”“주명취?” 원경릉이 우문호를 노려보았다.“주명취가 누구야? 모르는 사람이다.” 우문호가 어깨를 으쓱했다.원경릉은 그의 팔짱을 끼며 “잘 빠져나가는군”이라고 말했다.“주명취가 누구더라? 아! 제왕비를 말하는 거구나? 그 여자에 관한 일은 아니고, 기왕비에 관한 일이다.”“왜? 무슨 일 있어?”“그저께 기왕비가 관음보살을 선물로 보냈잖아.”“어. 예쁘던데? 귀한 물건이라고 휘상궁이 잘 보관한다고 가져갔어.”“그 조각상 등 쪽에 금이 가 있었어.” 우문호는 말을 하다가 화가 치밀었다.“금 갔어? 아까워라…….”원경릉을 실망한 목
우문호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낀 원경릉은 “기왕비하고 무슨 일 있었어?” 라고 물었다.우문호는 기왕부에서 있었던 일을 낱낱이 털어놓았다. 그는 기왕비의 마지막 말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원경릉에게 당부했다.“기왕비 혹은 그 주위 사람이 우리 관계를 해하려는 말을 할 수도 있으니 어떤 말도 믿지 마.”원경릉은 웃으며 “내가 바보도 아니고, 그거 하나 구분 못하게?”라고 말했다.우문호는 속으로 그녀가 자신을 오해하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이 둘의 관계가 좋아진 것은 원경릉이 태상황을 치료한 다음인데, 혹시 그녀가 속으로 우문호가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이용한다고 생각하면 어쩌나 걱정했다.그는 원경릉의 속마음을 듣고 싶었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이 생길까 묻지 않았다.태상황이 보내준 국 때문에, 원경릉은 이틀 동안 편안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속이 안 좋을 때도 있었지만 전처럼 심하게 토를 하지 않았다.또한 어의가 가벼운 걷기는 된다고 해서 그녀는 매일 정원에 나와 산책도 할 수 있게 되었다.기왕비 사건 이후 우문호는 매번 집을 나서기 전에 그녀에게 주위를 잘 살피고 항상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했고, 서일과 어의에게 그녀가 어디를 갈 때마다 놓치지 말고 뒤를 잘 따르라고 경고했다.이틀 후, 원경병이 싱글벙글 웃으며 짐을 싸 들고 왔다.“부친께서 언니를 잘 돌보라고 하셨습니다!”“돌보라고?” 원경릉은 천방지축 원경병이 자신을 돌볼 생각에 웃음이 터졌다.“예! 명령하는 말투긴 했지만, 부친께서는 많이 나긋나긋해졌습니다.”원경병이 없는 정후부는 조용했다.원경병은 지금까지 정후부에 있던 일들을 원경릉에게 전했다.“조모는 최근 들어 밥도, 약도 알아서 잘 챙겨드시고, 운동도 하십니다. 원륜문은 호부(戶部)로 근무지를 옮겼습니다. 아 맞다 누이! 어느 날 둘째 노마님은 집사를 훈계하는데, 그날따라 조모가 이를 막아 집사를 도와주었어요! 그때 둘째 노마님 표정이 얼마나 웃기던지 놀랐는지 눈은 휘둥그레지고, 딱 봐도 기분 나쁜
“오빠는 더 좋을 것을 사주고 싶었지만, 오빠가 봉록도 모두 공금으로 받아서 은화가 없대요. 그리고 둘째 노마님이 경제권을 쥐고 있으니 매달 손에 들어오는 것도 얼마 없나 봐요.” 원경병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알겠어.” 원경릉은 오빠가 준 북을 희상궁에게 주며 “잘 보관해 놓으세요.”라고 말했다.원경병은 두 벌의 작은 옷을 꺼냈다. 청색에 은은한 구름무늬의 부드러워 보이는 옷이었다.“이건 내가 만들었는데……”원경릉은 냉큼 옷을 집어 들었다.“이걸 네가 만들었다고? 너무 예쁘다!”“이모니까 더 좋은 걸 해주고 싶은데, 당장 줄 게 없으니 정성껏 옷을 만들어 봤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또 만들어 주겠습니다.” 원경병은 부끄러운 듯 얼굴이 빨개졌다.원경병은이 평소 덤벙거리고 대장부 같은 성격이어서 바느질 솜씨가 이렇게 좋을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구사가 이런 여자를 놓치면 안 될 텐데’구사 생각이 나자 원경릉은 사람들을 내보내고 원경병에게 혼사에 관한 일을 물었다.“혼사 관련 소식은? 뭐 없어?”“아 방금까지 기분 좋았는데, 왜 그런 거 물어봐요?” 원경병은 씩씩거렸다.“내가 네 형부한테 알아보라고 했는데……” “됐어요! 왕야가 이 일에 신경이라도 쓰겠습니까? 나를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라면 그만하세요. 이제는 늙은이든 못생겼든 내 목숨만 해치지 않는다면 아무나 상관없습니다.” “왜 그렇게 비관적이야?” 원경릉은 앞길 창창한 어린 동생이 걱정됐다.“비관적이라뇨? 누이, 샤오란 기억나요? 걔가 누구한테 시집간 줄 알아요? 올해 62살인 오대학사한테 시집갔어요! 걔는 16살도 안됐는데!”이 말을 들은 원경릉은 샤오란의 천진난만한 동그란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의 아버지는 경조부에서 일을 했으며 소녀는 웃을 때 보조개가 예쁘고, 제기차기와 나비 잡기를 좋아하며 바느질도 잘했다. 원경릉은 그런 꽃다운 소녀가 늙은이에게 시집을 갔다고 생각하니 구역질이 났다. “언제? 언제 그런 일이 있었어?” 원경릉은 벌레를 삼킨 듯 속이 답답해졌다.
정후부의 상황은 원경릉도 잘 알고 있었다.후부는 몇 년 동안 줄곧 힘을 못썼다. 부친은 시랑이라는 관직을 지키기 위해 적지 않은 돈을 썼으며, 시랑 관직을 유지하기 위한 심사를 거칠 때마다 윗사람들에게 아부를 하기 위해 돈을 찔러줬다.황제는 금년 초부터 부정부패를 저지른 관원들의 이름을 집어 비판하며 올해부터는 시험을 치러 썩은 가지는 잘라내겠다고 밝혔다.정후는 황제가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았다.그는 매번 자신에게 기회가 오지 않는다며 불평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자신의 실력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생각해도 자신에게는 탁월한 능력이 없었다.그는 굳이 굳이 여식을 이용해 조정에 지위를 굳히려고 했으며, 늘 상서(尚書) 자리에 오르겠다고 말만 하고 실은 시랑 지위에 안주했다. 이는 정후 자신도, 관아의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때문에 원경병이 구사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은 자신의 실력이 부족해 여식의 혼인이 전부 엎어진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나약함을 대외적으로 들키고 싶지 않았다.원경릉은 한숨을 내쉬며 “됐어. 이 일은 그때 가서 다시 얘기하자.”라고 말했다.“누이, 나 때문에 너무 신경 쓰지 마요. 난 이미 마음의 준비를 다 했어요.” 원경병이 빙그레 웃으며 “사실, 샤오란도 그렇게 나쁜 조건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부러워한다고요. 샤오란 가문에서 대학사 집안으로 시집을 가는 것은 조상이 도와야만 가능한 일이거든요.”라고 말을 이었다. 원경병의 말에는 후부에 대한 풍자가 느껴졌다. 원경릉은 갑자기 속이 꽉 막히는 기분이 들어서 참지 못하고 타구 앞으로 달려가 토를 했다.깜짝 놀란 원경병은 재빨리 문을 열어 사람을 부르고는 원경릉의 등을 두드렸다.“괜찮아 괜찮아 이건 아무것도 아냐.” 원경릉은 창백한 얼굴로 동생을 보았다.그 둘의 대화를 듣던 희상궁이 조용히 원경병을 한쪽으로 끌어당겼다.“만약 샤오란이 오면, 왕비님을 만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원경병은 고
희상궁이 매실탕을 들고 들어오자 원경릉은 목이 말랐는지 단숨에 그릇에 담겨있던 시큼한 매실탕을 들이켰다. “난 어쩜 이렇게 신 걸 잘 먹지?” 원경릉이 웃으며 말했다.희상궁은 웃으며 “매운 것을 잘 먹으면 여자아이, 신 걸 잘 먹으며 남자아이라고 했습니다. 분명 뱃속에 세자가 들어 계신 겁니다.” 라고 말했다.원경릉은 빙그레 웃으며 “성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건강하게만 나와줬으면 좋겠네요.”라고 말했다.“맞습니다. 건강하게 나오는 게 가장 중요하죠.” 희상궁이 말했다.잠시 후, 원경병이 동그란 얼굴이 귀여운 샤오란을 데리고 들어왔다.샤오란은 겁에 질린 눈으로 원경병 뒤에 졸졸 쫓아오며 살짝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피다 원경릉과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라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 모습이 마치 겁에 질린 토끼 같았다.“소인 왕비를 뵈어 영광입니다!” 샤오란이 앞으로 나와 절을 했다.“샤오란! 나하고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빨리 일어나서 앉아라.” 원경릉이 웃으며 말했다.원경릉은 샤오란에게서 좋은 감정이 느껴졌다.‘원주도 이 소녀를 좋아했나 보군.’환하게 이를 드러내며 웃는 샤오란이 그녀를 쳐다보고는 “언니!” 라고 소리쳤다. 원경릉은 해맑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마음이 슬퍼졌다. ‘이렇게 아름답고 순수한 소녀가 늙은이에게 시집을 간다니……’원경릉은 원경병과 샤오란과 몇 마디를 대화를 나눈 후 속이 또 좋지 않아, 원경병에게 샤오란을 데리고 나가라고 했다. 그러나 샤오란은 밖으로 나가자마자 다시 들어왔다.“언니, 혹시 저 왕부에서 하루 묵어도 되겠습니까? 딱 하루 만요! 절대 막 돌아다니지 않을게요!”원경병은 놀란 얼굴로 “그건 안 돼. 형부가 외부인이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어. 너는 후부 가서 자고 가.”라고 말했다.샤오란은 실망한 표정이었다.“그럼 하루만 머물러. 오랜만에 오순도순 얘기나 하자.” 원경릉은 샤오란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언니! 고맙습니다!” 샤오란은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원경릉은 녹주에게 샤오
원경릉이 힘없이 그의 어깨에 기대며 “가지 마, 여기 있어.” 라고 말했다.“애교도 부릴 줄 알아?” 우문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의 볼에 뽀뽀를 했다.원경릉은 눈을 감았다. 그러자 문득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다시 머리에 떠올랐다.“나는 줄곧 우리 둘만의 세상을 보내고 싶었는데, 한 명이 더 생긴다니.”“둘만의 세상? 둘만의 세상이 뭔데?”“아이가 없는 너와 나를 말하는 거야.”“왕부에도 너랑 나만 있는 건 아니잖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원경릉은 눈을 치켜트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됐다. 설명해 봤자 내 입만 아프다.’저녁밥은 도저히 넘어가지 않았다. 다행히도 상선이 직접 국을 담아 보내주었다. 한 입 먹어보니 지난번과 똑같았다. 답답했던 속이 국을 들이 켜고 나니 속이 시원해졌다.우문호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상선을 보고 “도대체 이게 뭐죠? 제발 어떻게 만드는지 알려주세요.”라고 말했다.“절대 안 됩니다. 효과가 좋은 것에는 일정한 해로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태상황님은 왕비님이 아무것도 못 드시는 게 안타까워 이것을 보내시는 겁니다. 만약 밥을 잘 먹고 잘 지낸다면, 이걸 먹을 이유가 없습니다.”“안에는 야자 제비집이 들어있는 게 아닌가요? 해로운 게 하나도 없는데?”제비집이 별다른 좋은 점이 없다는 것은 그녀도 알지만 인체에 해로울 것까지는 없었다.“왕비께서는 고작 두 가지만 알아내신 겁니까?” 상선이 웃으며 물었다.“그리고 약간 감초 맛도 나고, 아닌가? 해열에 좋은 시호가 들어있나?”원경릉이 고개를 갸우뚱했다.우문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감초, 시후, 야자 즙, 제비집 이런 게 다 한 번에 들어갔다고? 맛없을 것 같은데?”라고 말했다.“아냐 진짜 맛있어! 근데 먹고 나면 위가 아파.”원경릉이 답했다.“왕비님, 구토가 멈추면 저에게 꼭 알려주세요.” 상선이 웃으며 말했다.그는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건곤전으로 돌아갔다.원경릉은 미간을 찌푸리고 “분명히 아주 이상한
이리봉청에게 있어 모든 건 지나가지 않았고, 36년 전 일은 여전히 어제 일 같이 느껴졌다.“어머니, 그를 어떻게 처분하시겠어요?” 이리 나리는 이리봉청의 마음을 넘겨짚을 수 없어 함께 걷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생각은 어떠니?” 이리봉청이 다시 되묻자 이리 나리가 원한에 사무친 눈빛으로 말했다. “제게 처분하라고 하면 전 그를 죽여 버릴 겁니다.”이리봉청은 알았다며 대답만 했다가, 다시 30분쯤 걷다가 정자에 앉아 을 때 말을 덧붙였다. “난 안 죽일 거야.”이리 나리가 약간 놀라서 물었다. “어머니, 또 마음이 약해지신 겁니까?”이리봉청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 반대야. 그 인간을 죽이는 게 마음이 약해진 거지. 사실 며칠 동안 이전의 원한을 내려놓을 수 있을지 생각해 봤는데,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 인간을 백번이라도 죽이겠지만, 난 그럴 수 없더구나. 아들아, 게다가 오늘 천문 세가 대문을 들어서는 그 순간, 더욱 마음을 굳혔단다.”이리봉청이 일어나 집안을 둘러봤다. 이곳은 그녀의 가족들이 살아 원래 온통 사람 소리로 가득한 곳이였다. 그들의 웃던 광경이 눈앞에 비치는가 하더니, 눈 깜박할 사이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천문 세가는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없는데 멸문지화를 당했고, 가엾게도 그 중엔 아이들이 많아서 제일 어린아이는 이제 태어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었다.이리봉청의 얼굴에 눈물이 타고 흐르며 가슴이 미어졌다. “그자와 소여쌍을 밖에 내버리고 사람을 시켜 지켜보도록 해. 죽게 두지 말고 계속 살려둬. 36년은 더 살면서 이 세상의 고생을 모두 겪어야, 내 마음에 맺힌 한이 풀리고 억울한 망자들도 안식에 들지!”이리 나리는 온몸으로 그 마음이 느껴져, 어머니가 눈물 흘리는 것을 더는 볼 수 없었다. “네, 전부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대로 할게요.”안지여와 소여쌍은 버려졌다. 짧은 며칠 사이에 안지여는 의기양양하던 성주에서 시궁창 쥐로 변해, 사람들이
안지여는 풍도성 지하감옥에 갇혔다. 빛 한 줄기 없는 지하감옥에서 사방에 끝없는 어둠과 절망만이 안지여를 삼키고 있었다.훼천의 형벌은 12 시진 후면 사라져서, 앞으로 안지여는 그저 한 명의 폐인일 뿐이었다.안지여의 결사대가 성으로 공격해 들어오기 전에, 이리봉청은 오 선생을 찾아내 안지여가 저지른 모든 죄를 고백하게 하고 안풍 친왕이 친필로 받아 적었다. 안지여가 당시 천문 세가를 해친 경위를 소상히 써 내려간 뒤, 오 선생과 안풍 친왕의 직인을 찍고 인쇄해서 대중에게 공개했다.안지여의 죄악은 하늘을 찔러 백성들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안지여의 결사대의 옛 부하들이 본래 성을 공격해 들어가 안지여를 구출할 계획을 세워놓았으나, 안지여의 죄상이 공포된 뒤로 많은 사람들이 해산하였다. 유일하게 무대장군만이 수천 명을 데리고 성으로 쳐들어왔지만, 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가 이미 대비해둔 덕분에, 경성에서 굴러온 돌이 무대장군의 박힌 돌을 빼내는 전투를 벌였다.풍도성에 온 지 7일째, 안풍 친왕은 풍도성을 접수하고 성에 살던 사람을 쫓아내며 서민으로 강등시켰다.안지여와 소여쌍에 대한 처분은 이리봉청에게 넘겼다.안지여는 캄캄한 지하감옥에서 6일을 지내는 동안, 처음엔 침착한 척 가장했으나 사흘째가 되자 울부짖으며 악독한 저주의 말을 내뱉더니, 나흘째가 되자 용서해달라고 애원하며 참회했다.손발의 힘줄이 끊어진 안지여는 일어나 걸을 수도 없고 심지어 스스로 몫숨을 끊을 힘도 없었다.그 와중에 매일 누군가가 먹고 마시도록 해주고, 상처도 치료해 주어 살 수 있다는 부질없는 희망을 품게 했다.훼천의 말에 따르면, 진정한 절망은 살아도 죽느니만 못하고,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것으로, 온 마음으로 죽기를 바라지만 살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가, 안간힘을 쓴 뒤 다시 절망에 빠지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으로, 사람을 한없이 죽였다 살렸다 괴롭힌다고 했다.결국 안지여를 죽일지 말지 여부는 이리봉청에게 달렸는데, 그녀는 안지여를 단번에 죽여 천문 세가
안지여의 이마에 파란 힘줄이 불끈불끈했으나 냉정을 가장했다. “내가 두려워할 줄 알았나 보지? 죽음도 두렵지 않은데 뭘 더 두려워하겠어?”“넌 두려울 것이야!” 이리봉청이 고개를 돌려 이리 나리를 보고 살짝 그의 팔을 잡았다. “내가 오는 길에 늑대파 사람이 그러던데, 천하에서 제일 잔혹한 형벌을 아는 사람이 늑대파에 있다고. 그게 사실인 것이냐?”이리 나리가 가볍게 답했다. “물론 사실이죠. 훼천이라고 합니다. 늑대골 출신이에요.”“안지여가 버틸 수 있는지 어디 한 번 보고 싶구나.” 이리봉청이 말했다.이리 나리가 엄숙한 태도로 명을 내렸다. “훼천!”그러자 훼천이 급히 나왔다. “이리 나리, 분부하시지요!”이리 나리는 그가 짐짓 냉정한 척하고 있으나 눈빛이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몸까지 부들부들 떠는 것이 아주 만족스러워 훼천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시작해!”안지여가 갑자기 큰 소리로 욕했다. “난 네 아버지거늘, 감히 나에게 손을 대다니, 천벌을 받아 마땅한 놈 같으니라고!”이리봉청이 이 말을 듣고 잠시 주저하는 눈빛으로 이리 나리를 바라봤다.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제 아버지는 오직 저를 키워주신 안풍 친왕뿐이십니다.”이리봉청이 살짝 안도했다. “저 인간이 단지 나만 해쳤으면 네 체면을 봐서 놔줬겠지만 천문 세가의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니 난 용서할 수 없구나.”“이리봉청, 너 언제 이렇게 악랄하게 변했어? 죽이려거든 그냥 죽여. 난 천문 세가 사람을 죽이긴 했어도 그들을 괴롭히진 않았어. 네가 날 죽이려거든 깨끗하게 단번에 죽여!”안지여가 크게 노해 몇 번 몸부림을 치다가 상처가 벌어지는 바람에 배에서 선혈이 흘러나오고, 훼천이 가까이 다가가자, 눈에 두려움이 깊어졌는데, 늑대골 출신 훼천은 온몸에서 피비린내가 뿜어져 나와 안지여를 덜덜 떨게 했다.“이리율!” 안풍 친왕비는 시ㅈ가하기 전에 이리 나리를 불렀다. “내가 여기서 네 엄마와 같이 있을 테니 넌 먼저 나가 있거라!”이리 나리가 안풍 친왕비에게
안지여에게 구원 병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리 나리 일행이 성을 제압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대오가 경성에서 출발하기 전에, 안풍 친왕비가 미리 사람을 풍도성으로 보내 각처, 특히 성 수비군과 군대에 잠입시켜, 음식에 효과가 천천히 나타나는 독을 풀어, 오늘 중독 증상이 나타나도록 독의 분량을 조절했다.적어도 내일까지는 안지여를 도우러 올 사람은 없었다. 독성은 적어도 이틀이 지나야 깨끗해지기 때문에 이틀 동안 그들은 설사와 전신 무기력으로 성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아도 와서 도울 수 없었다.그리고 그들이 기력을 회복할 때쯤이면, 안지여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는 성을 통제하고, 안지여 부부를 제압해 두 사람을 줄로 묶고 지혈시켜 주었다.안지여는 요 몇 년 동안 자신이 상당히 대단하다고 여겼다. 이는 풍도성이 부유하기 때문으로, 돈으로 많은 사람을 살 수 있었으며, 여러 곳에서 추켜세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절하게 패배한 적이 없었던 이유는 진정한 적이 없기 때문으로, 주변의 떠돌이 비적은 작은 마을 규모로 너무 작아서 소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코 그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적이 너무 약해서였다.조정 사람과 비교했을 때, 그는 제대로 훈련받은 적 없는 비적었기에 일격도 감당할 깜냥이 못됐다.이리 나리는 둘을 중정에 묶어 두었다. 온 바닥에 남은 음식과 깨진 기와가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본 안지여는 마음속 깊이 분노가 일었다. 자신의 생일날, 그를 다치게 한 것이 바로 그의 친자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욱이 오늘 이렇게 많은 고수가 현장에 있었는데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런 결말을 맞다니 너무 불쾌했다. 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을 부축하고 안지여 부부 앞으로 가서, 그녀가 안지여 부부를 내려다보자, 그들은 낭패에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으로, 이리봉청은 분노하는 마음과 함께 서글픈 마음도 들었다. 그들을 죽이면 커다란 복수는 이뤄 천문 세가 망자의 원혼은 달랠 수 있었다.하지만 저들을 이렇게 쉽게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이리 나리가 검을 휘두르며 안지여를 겨누자, 안지여가 공중으로 뛰어올라 후퇴했다.공자들은 돕고 싶었으나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에게 바로 제압당했다. 안지여는 이리율 것으로 그들은 주변 사람을 제압하기만 할 뿐 옆에 서서 전투를 관전하고 있었다.이리율의 무공이 얼마나 뛰어난지 그를 가르친 안풍 친왕 부부를 제외하고, 사실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이리율의 검법은 신속하고 맹렬해서 안지여는 상대하느라 쩔쩔매고 구석으로 몰리고 있었다. 성안의 호위들은 늑대 무리와 늑대파, 홍매문 사람들에게 막히는 바람에 안지여는 홀로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그래도 아직은 버틸 수 있었다.하지만 30분을 못 가서 안지여는 질게 틀림없었다.놀란 나머지 계속 실성해 있던 소여쌍이 갑자기 이리봉청을 향해 바싹 마른 손을 뻗어, 그녀의 목을 조르며 광적인 집착과 분노에 사로잡혀 성질을 부렸다. “멈춰, 다들 멈추라고. 안 그러면 내가 이년을 죽여버릴 것이니까!”소여쌍은 무공을 할 줄 알았지만 잘하지 못한 것이 어릴 때부터 계속 중병을 앓아 무공 연습에 소홀했고 성주 부인이 된 뒤로는 더욱 병기에 가까이할 일이 없었지만, 공력만큼은 아직 약간 있었다.소여쌍은 증오의 힘으로 이리봉청의 목을 졸랐는데, 소여쌍이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이리봉청의 목을 부러뜨릴 것만 같았다.안풍 친왕이 차가운 눈빛으로 나서려 하자, 안풍 친왕비가 말리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는데, 그럴 필요 없다는 뜻으로 뒤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참으라는 눈짓을 하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모두가 이리봉청이 제압당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손가락으로 뭔가를 쥐고 있어 소여쌍의 어깨 위를 휘감고 팔을 눌러 소여쌍이 머리를 돌리게 했다. 이리봉청 손에 쥔 것은 바늘로, 그대로 소여쌍의 오른쪽 눈을 찌르고 들어갔다.소여쌍이 절규하며 이리봉청을 놔주고 선혈이 흐르는 눈을 움켜쥔 채 비틀거리다 바닥에 쓰러져 데굴데굴 구르며 새된 소리를 지르는데, 원망과 저주의 말을 끊임없이 쏟아
풍도성 중정에는 안지여의 아들들과 사위가 그의 곁에 남았는데,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점점 공포에 질려가고 있었다.‘이 사람들, 아주 대단하구나!’안지여는 이리봉청을 보고 비록 조금 냉정해 보였지만, 여전히 놀라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갑자기 소여쌍이 큰 소리로 웃으며, 몸을 앞뒤로 흔들며 눈물을 찔끔거리더니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이리봉청을 가리키며 원망했다. “뜻밖에 네가 안 죽었단 말이지? 게다가 아들까지 있고. 참으로 황당하구나. 정말 너무 황당해. 원래 죽어야 했을 인간은 죽지 않고, 잘 살아야 할 사람은 36년간 괴로움을 당했어. 이리봉청 네가 날 비참하게 만들었으니 넌 이제 지옥에 떨어져야 해.”이리봉청은 소여쌍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했는데, 그녀 눈에는 지금 안지여만 들어왔다.안지여는 36년을 살아왔지만, 이리봉청에게 있어 36년은 마치 사라진 시간처럼 멸문지화의 원한이 어제 일 같았다.안지여도 이리봉청의 눈에서 분노와 악랄함을 보고, 처음으로 마음속에 두려움을 느꼈다.안지여는 억지로 감정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네 사람을 데리고 가. 지난 일을 묻지 않을 테니. 그렇지 않으면 풍도성에서 곧바로 10만 대군이 올 것으로, 살아서 도망갈 생각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아.”이리봉청의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우리는 이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바로 네 성으로 쳐들어갈 수 있어. 넌 이미 졌어.”안지여가 웃었다. “졌다고? 그래?”안지여는 수하의 대장군이 믿음직해서, 그들을 당하게 놔줄 수도 있다고 여겼다. 대장군의 부대는 분명 치밀하게 준비되어 있을 것으로, 아마 지금쯤이면 궁수들이 이미 배치를 마치고 그들을 전부 쏴 죽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의 손을 잡고 말했다. “어머니, 저자와 말 섞으실 필요 없어요. 앉아서 지켜보시기만 하면 됩니다!”말을 마치고 의자를 올리더니 이리봉청을 부축해서 앉혔다.안지여가 이리 나리를 보는데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안지여가 퍼뜩 눈을 돌려 이리 나리를 보았다.‘이리봉청이 저자를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건러니까?이리 나리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안 성주와 좀 오래된 원한을 따져야 하는데, 관련되기 싫으신 분은 자리를 피해 주시지요!”그때 한 사람이 검을 짚고 일어나 호통을 쳤다. “넌 도대체 어떤 놈이냐? 무슨 자격으로 자리를 피해라 마라야? 안 성주를 귀찮게 할 생각이면 일단 나부터 통과해 보시지!”그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장검을 뽑아 파죽지세로 이리 나리를 향해 휘둘렀다.이리 나리는 손을 살짝 움직여 손바닥으로 칼자루를 밀자, 검이 날아가며 그 사람의 귀를 베어 한 줄기 피가 공중에 뿌려지더니, 방금까지 기고만장하던 자가 비명을 지르고 귀는 바닥에 떨어졌다.검이 다시 이리 나리 수중으로 정확히 돌아왔다.이 모든 게 3초 안에 벌어진 일이었다.“회선검?” 검법을 아는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현장은, 숨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다.회선검은 검마의 검법으로, 그렇다는 건 저 사람이 검마의 계승자?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무리에서 검마를 찾았다. 과연 두 손으로 검을 안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도 차가운 안광이 느껴졌다.과연 진짜 검마구나, 사람들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검마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리 나리를 흘끔 보더니 속으로 의아해했다. ‘이 자식, 언제 내 비장의 검법을 배운 거야?’이리 나리의 검 끝에선 아직 선혈이 떨어지는데, 여전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말했다. “이 아수라장에 끼고 싶은 거라면, 제가 무례하다고 원망할 생각 마세요.”“무엄하도다!” 안지여가 몹시 놀랐다가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눈을 치켜뜨며 이리 나리를 노려봤다. “너는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내가 네 아버지다!”이리 나리가 코웃음을 쳤다!안지여의 몇몇 아들이 달려 나와 소리쳤다. “아버지, 저희가 지켜드리겠습니다.”안풍 친왕이 젓가락을 던지고 일어나 차갑게 명을 내렸다
오늘은 성주의 생일이기에 경사라 섣불리 피를 볼 수는 없으므로 칼은 빼 들었지만 먼저 나서서 늑대를 죽이는 사람은 없었다.안지여는 어두운 눈빛으로 ‘늑대 무리라고? 척후병의 보고로는 안풍 친왕이 늑대 무리를 끌고 온다고 했는데, 저들이 의외로 성으로 직접 쳐들어 왔다 이거지?’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안지여는 잔을 들고 꿈적도 하지 않은 채, 무너지기 직전까지 미동도 없는 태산처럼 냉정하고 침착했다. 늑대 무리는 안으로 들어온 뒤로 두 패로 나뉘어 서서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호시탐탐 엿보며 으르렁거렸다.“성주님, 성주님, 저들이 기어코 쳐들어오겠다고….” 문지기가 외치는 소리는 들렸으나 사람은 보이지 않더니, 그보다 조정에서 보낸 사람들이 먼저 들이닥쳤다.앞에 걸어들어오는 두 사람을 안지여는 본 적이 있었는데, 바로 안풍 친왕 부부로 예전에 그들이 천문 세가 사람들을 조사하러 왔을 때 그에게 속은 적이 있었다. 비록 당시 일면식 뿐이었으나 천문 세가 일을 캐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탓에 그들의 얼굴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어째서 별로 변한 게 없는 거지?’안풍 친왕 부부 뒤에 따라오는 10여 명의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은 그들의 호위 무사일 것으로, 주인인 안풍 친왕 부부는 별 표정이 없었으나,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와 고개를 들자 괴팍하고 악랄한 얼굴이 안지여 마음에 들지 않았다.안지여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았고, 미소는 띠고 있었지만 매서운 눈빛으로 저들이 돌계단을 오르면 그때 일어나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게 그의 태도였다.하지만 안풍 친왕 부부는 돌계단을 오르지 않았고, 손님 중 건배를 권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람들 의자에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이 차지하고 앉아, 그들을 대놓고 밀치더니 품에서 자기 젓가락을 꺼내 옆 사람 상관하지 않고 먹기 시작해 사람들이 다 경악했다.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뒤따라 들어오는 사람들이 보였다.두 사람이 사람들에 둘러싸여 천천히 걸어들어오고 있었
풍도성 안은 술잔을 주고받고 건배하며 흥겨운 잔치가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안지여는 오늘 황금색 예복을 입었는데 예복에 거대한 이무기를 수놓았으며, 황실의 밝은 황색과는 약간 구별되었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진짜 곤룡포로 착각할 만큼 거대한 이무기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이 구름을 뚫고 솟아오르는 용과 매우 흡사했다.안지여는 자신의 야심을 이미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당연히 안지여는 오늘도 야심을 감출 생각 없이 손님들에게 보란 듯이 자세를 잡았다. 심지어 인근 지역 조정 관리들이 손님으로 왔어도 안지여는 전부터 맺어온 관계였기에, 그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매우 두터워 산 넘고 물 건너 저 멀리 있는 황제가 그들을 시시콜콜 관리할 수 없었다.그 자리 있던 사람들은 모두 오늘 황실에서 파견한 일행이 온다는 것을 알고, 연회석에서 큰 소리로 물었다. “성주님, 듣자하니 안풍 친왕 전하와 이리 부마께서 오늘 오신다던데 어째서 안 보입니까?”안지여가 잔을 들고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진심으로 생일을 축하한다면 결국 오겠지요.”“여정을 듣기론 오늘 분명 풍도성에 도착한다고 했는데, 어째서 밤이 되도록 아직 안 보입니까? 설마 성주님이 직접 나가서 맞이하셔야 하는 건 아니겠지요?”“성주님이 가서 맞이하셔야 한다고? 아주 허세가 대단한데? 퉤!”“누가 아니랍니까? 진심으로 생신을 축하하는 거였으면 며칠 전에 풍도성에 도착해 성의를 보여야지, 오늘까지 늑장을 부리다가 늦게서야 와서, 아직도 잔치에 오지 않은 건 분명 성주님의 체면을 안중에도 두지 않은 행태입니다. 제가 보기에 못 들어오게 막고 돌려보내시지요, 마음만 받은 셈 치고요. ”“맞습니다. 그동안 조정에서는 풍도성에서 받은 공물이 적지 않았으니, 만족한 줄도 알아야죠.”“풍도성은 더 이상 조공을 바칠 필요 없어요. 뭐 때문에 그럽니까? 수백 년 전에 풍도성은 원래 북당의 영토가 아니었어요. 선을 긋고 나와 독립해야 합니다.”모두 안지여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서, 몇 잔 들어가자, 비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