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상황은 최근 2년 동안 애가 탔다. 병든 여섯째, 장님인 여덟째,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아홉째, 그리고 나머지 친왕들은 모두 아들을 낳지 못했다. 그는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조급했다. 그는 매번 명원제 앞에서 증손자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효자인 명원제도 태상황의 재촉에 덩달아 마음이 조급해졌다.그리하여 정세를 읽은 조정의 신하들은 친왕들 중에 누가 아들을 낳아서 태자가 될 것인가를 추측했다.“이리 가져오거라!” 태상황이 상선에게 말했다.상선은 뒤에 서있던 궁인에게 식합(食盒)을 가져오라고 하더니 그것을 희상궁에게 전해주었다.“이것은 태상황님께서 왕비에게 하사하는 것이니, 상궁이 왕비께 드리세요.”희상궁은 두 손으로 식합을 받아들며“왕비는 지금 먹는 대로 토하고 있어서……”라고 말했다.“가져가거라. 한 입을 먹어도 두 입을 먹어도 상관없다. 태상황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하고 받아 가거라.”상선이 말했다.희상궁은 식합을 들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더니, 잠시 후 뒷걸음질로 물러났다.희상궁이 식합을 들고 들어오자 원경릉이 “태상황님께서는 가셨어요?” 라고 물었다.“아직입니다. 지금 밖에 계시는데, 태상황님께서 식합을 주셨으니 한술이라도 드세요.”원경릉은 얼굴을 찌푸리며 “못 먹겠는데……”라고 말했다.희상궁이 식합 뚜껑을 열자 안에는 희멀건 국이 있었다. 무언가 둥둥 떠있었고, 야자 향기가 났다. 희상궁은 수저에 국을 조금 덜어 그녀의 입에 가져갔다.“설탕물인가요? 세상에, 이런 건 못 먹는데” 원경릉의 미간이 한순간에 찌푸렸다. “숟가락에 혀라도 대보세요.”“이렇게 대충 먹어도 되는 건가요?”“입이라도 댔으니 어르신의 마음은 받으신 겁니다.” 희상궁이 웃으며 말했다.원경릉은 수저를 집어 핥더니 멍한 표정으로 희상궁을 보았다.“어? 이거 달지 않네요?”그녀는 침상 가장자리에 몸을 기대고 앉아서 식합 안에 국을 들이 마셨다. 희상궁은 그녀가 토를 할까 봐 걱정되어 급히 타구(痰盂)를 들고 왔다.원경릉은 가슴을
원경릉이 가마를 타고 오는 것을 본 태상황의 미간이 찌푸려졌다.“쟤는 뭣 하러 여길 온 거야?”원경릉은 의장을 입은 태상황을 보고 놀랐다.‘나를 보러 오신다고, 저렇게 옷을 입고 온 건가?’우문호는 빠른 걸음으로 나가 원경릉을 안아들었다. 어의가 그녀의 상태를 보고 한 걸음도 땅에 발을 딛지 못하게 했기에 지금까지 목욕이든 식사를 하든 우문호가 안아서 이동했다. 원경릉은 과잉보호를 받는 느낌을 견딜 수 없어 그의 팔을 두드리며 “내려줘 내가 걸어갈게. 라고 말했다.“어의가 넌 걷는 것도 조심하랬어.” 그는 그녀를 의자 위에 앉히며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나 본데 착각하지 마. 내가 왕부에 없을 때 맘대로 걸어 다니는 거 내가 다 알고 있어.”라고 말했다.“이렇게 움직이지 않다가는 걷는 법도 까먹겠다.”원경릉이 투덜거리며 도와달라는 눈빛으로 태상황을 보며 “황조부 그렇지 않습니까?” 라고 물었다.태상황은 그녀를 슬쩍 보더니 고개를 돌려 우문호를 보았다.“나가기 전에 침상에 묶어두면 되지 않느냐? 말을 듣지 않으면 매를 들어 다스리거라.”태상황이 말했다.“예, 기억해두겠습니다.”우문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씩 웃었다.원경릉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태상황을 보았다.“임신했다고 너무 안 움직여도 태아에게 좋지 않아요. 제가 제 몸은 더 잘 압니다! 그리고 전 의사라고요!”“아무리 뛰어난 의술을 가졌더라도 자신의 병은 자신이 고치지 못하는 법이지. 맞다! 국은 잘 마셨느냐?”국 얘기가 나오자 그녀의 눈에서 빛이 났다.“예!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안에는 제비집이랑 야자가 들어있는 것 같던데, 맞습니까?”“뭐가 들었던 좋은 것만 담았습니다. 먹으면 속도 편하고, 태아에게도 좋습니다.” 상선이 웃으며 말했다.원경릉이 맛있게 먹었다는 말에 우문호는 깜짝 놀랐다.“황조부, 국에는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어떻게 만드는 겁니까?”“그 정도 먹었으면 됐다. 너무 많이 먹어서도 안 좋아. 그럼 이만 난 셋째 얼굴 좀 보러 가야겠다.” 태상황이 느
“응, 확실히 좋아졌어. 토할 것 같지도 않고, 야자가 들어있는 것 같던데. 여기서도 야자를 구할 수 있나? 아무튼 속이 아주 편해.”경도는 북쪽에 위치해 있고, 지금은 가을이라 야자가 생산되는 곳이 없을 텐데…… 혹시 야자를 어디에 숨겨두고 있는 건가?“궁에는 없는 게 없다. 남방에서 생산되는 야자를 받기만 하면 되는걸? 태상황의 귀영위는 대단하다.”“귀영위?”“응 귀영위는 태상황 재위 때 성립된 곳으로 민간과 백관 사이를 살피며 소식을 캐거나 전했는데, 부황이 재위하자 귀영위는 태상황의 심부름꾼으로 전락하게 됐지.”원경릉은 건곤전에서 봤던 검은 옷을 입은 시위들이 생각이 났다. “말이 심부름꾼이지, 내 생각엔 태상황님이 소식에 밝은 것을 보니 귀영위들이 아직도 세상의 모든 소식을 캐고 있는 것 같아.” 원경릉이 말했다.“그렇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지, 어차피 조정에는 태상황님을 수 없어.” 우문호가 답했다.원경릉은 방금 우문호가 한 말은 희상궁에게도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희상궁은 태상황의 곁에서 여러 해 시중을 들었으니, 아마도 그녀는 귀영위 중에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내가 줄곧 너한테 숨기고 있었던 일이 있는데…….” 우문호가 원경릉을 보며 말했다.“말해! 나 오늘 기분 좋으니까, 첩을 얻거나 여자에 관한 일 빼고는 다 용서해 줄게.”“첩을 얻는 일은 아니지만, 여자에 관한 일은 맞다.”“주명취?” 원경릉이 우문호를 노려보았다.“주명취가 누구야? 모르는 사람이다.” 우문호가 어깨를 으쓱했다.원경릉은 그의 팔짱을 끼며 “잘 빠져나가는군”이라고 말했다.“주명취가 누구더라? 아! 제왕비를 말하는 거구나? 그 여자에 관한 일은 아니고, 기왕비에 관한 일이다.”“왜? 무슨 일 있어?”“그저께 기왕비가 관음보살을 선물로 보냈잖아.”“어. 예쁘던데? 귀한 물건이라고 휘상궁이 잘 보관한다고 가져갔어.”“그 조각상 등 쪽에 금이 가 있었어.” 우문호는 말을 하다가 화가 치밀었다.“금 갔어? 아까워라…….”원경릉을 실망한 목
우문호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낀 원경릉은 “기왕비하고 무슨 일 있었어?” 라고 물었다.우문호는 기왕부에서 있었던 일을 낱낱이 털어놓았다. 그는 기왕비의 마지막 말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원경릉에게 당부했다.“기왕비 혹은 그 주위 사람이 우리 관계를 해하려는 말을 할 수도 있으니 어떤 말도 믿지 마.”원경릉은 웃으며 “내가 바보도 아니고, 그거 하나 구분 못하게?”라고 말했다.우문호는 속으로 그녀가 자신을 오해하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이 둘의 관계가 좋아진 것은 원경릉이 태상황을 치료한 다음인데, 혹시 그녀가 속으로 우문호가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이용한다고 생각하면 어쩌나 걱정했다.그는 원경릉의 속마음을 듣고 싶었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이 생길까 묻지 않았다.태상황이 보내준 국 때문에, 원경릉은 이틀 동안 편안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속이 안 좋을 때도 있었지만 전처럼 심하게 토를 하지 않았다.또한 어의가 가벼운 걷기는 된다고 해서 그녀는 매일 정원에 나와 산책도 할 수 있게 되었다.기왕비 사건 이후 우문호는 매번 집을 나서기 전에 그녀에게 주위를 잘 살피고 항상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했고, 서일과 어의에게 그녀가 어디를 갈 때마다 놓치지 말고 뒤를 잘 따르라고 경고했다.이틀 후, 원경병이 싱글벙글 웃으며 짐을 싸 들고 왔다.“부친께서 언니를 잘 돌보라고 하셨습니다!”“돌보라고?” 원경릉은 천방지축 원경병이 자신을 돌볼 생각에 웃음이 터졌다.“예! 명령하는 말투긴 했지만, 부친께서는 많이 나긋나긋해졌습니다.”원경병이 없는 정후부는 조용했다.원경병은 지금까지 정후부에 있던 일들을 원경릉에게 전했다.“조모는 최근 들어 밥도, 약도 알아서 잘 챙겨드시고, 운동도 하십니다. 원륜문은 호부(戶部)로 근무지를 옮겼습니다. 아 맞다 누이! 어느 날 둘째 노마님은 집사를 훈계하는데, 그날따라 조모가 이를 막아 집사를 도와주었어요! 그때 둘째 노마님 표정이 얼마나 웃기던지 놀랐는지 눈은 휘둥그레지고, 딱 봐도 기분 나쁜
“오빠는 더 좋을 것을 사주고 싶었지만, 오빠가 봉록도 모두 공금으로 받아서 은화가 없대요. 그리고 둘째 노마님이 경제권을 쥐고 있으니 매달 손에 들어오는 것도 얼마 없나 봐요.” 원경병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알겠어.” 원경릉은 오빠가 준 북을 희상궁에게 주며 “잘 보관해 놓으세요.”라고 말했다.원경병은 두 벌의 작은 옷을 꺼냈다. 청색에 은은한 구름무늬의 부드러워 보이는 옷이었다.“이건 내가 만들었는데……”원경릉은 냉큼 옷을 집어 들었다.“이걸 네가 만들었다고? 너무 예쁘다!”“이모니까 더 좋은 걸 해주고 싶은데, 당장 줄 게 없으니 정성껏 옷을 만들어 봤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또 만들어 주겠습니다.” 원경병은 부끄러운 듯 얼굴이 빨개졌다.원경병은이 평소 덤벙거리고 대장부 같은 성격이어서 바느질 솜씨가 이렇게 좋을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구사가 이런 여자를 놓치면 안 될 텐데’구사 생각이 나자 원경릉은 사람들을 내보내고 원경병에게 혼사에 관한 일을 물었다.“혼사 관련 소식은? 뭐 없어?”“아 방금까지 기분 좋았는데, 왜 그런 거 물어봐요?” 원경병은 씩씩거렸다.“내가 네 형부한테 알아보라고 했는데……” “됐어요! 왕야가 이 일에 신경이라도 쓰겠습니까? 나를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라면 그만하세요. 이제는 늙은이든 못생겼든 내 목숨만 해치지 않는다면 아무나 상관없습니다.” “왜 그렇게 비관적이야?” 원경릉은 앞길 창창한 어린 동생이 걱정됐다.“비관적이라뇨? 누이, 샤오란 기억나요? 걔가 누구한테 시집간 줄 알아요? 올해 62살인 오대학사한테 시집갔어요! 걔는 16살도 안됐는데!”이 말을 들은 원경릉은 샤오란의 천진난만한 동그란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의 아버지는 경조부에서 일을 했으며 소녀는 웃을 때 보조개가 예쁘고, 제기차기와 나비 잡기를 좋아하며 바느질도 잘했다. 원경릉은 그런 꽃다운 소녀가 늙은이에게 시집을 갔다고 생각하니 구역질이 났다. “언제? 언제 그런 일이 있었어?” 원경릉은 벌레를 삼킨 듯 속이 답답해졌다.
정후부의 상황은 원경릉도 잘 알고 있었다.후부는 몇 년 동안 줄곧 힘을 못썼다. 부친은 시랑이라는 관직을 지키기 위해 적지 않은 돈을 썼으며, 시랑 관직을 유지하기 위한 심사를 거칠 때마다 윗사람들에게 아부를 하기 위해 돈을 찔러줬다.황제는 금년 초부터 부정부패를 저지른 관원들의 이름을 집어 비판하며 올해부터는 시험을 치러 썩은 가지는 잘라내겠다고 밝혔다.정후는 황제가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았다.그는 매번 자신에게 기회가 오지 않는다며 불평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자신의 실력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생각해도 자신에게는 탁월한 능력이 없었다.그는 굳이 굳이 여식을 이용해 조정에 지위를 굳히려고 했으며, 늘 상서(尚書) 자리에 오르겠다고 말만 하고 실은 시랑 지위에 안주했다. 이는 정후 자신도, 관아의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때문에 원경병이 구사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은 자신의 실력이 부족해 여식의 혼인이 전부 엎어진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나약함을 대외적으로 들키고 싶지 않았다.원경릉은 한숨을 내쉬며 “됐어. 이 일은 그때 가서 다시 얘기하자.”라고 말했다.“누이, 나 때문에 너무 신경 쓰지 마요. 난 이미 마음의 준비를 다 했어요.” 원경병이 빙그레 웃으며 “사실, 샤오란도 그렇게 나쁜 조건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부러워한다고요. 샤오란 가문에서 대학사 집안으로 시집을 가는 것은 조상이 도와야만 가능한 일이거든요.”라고 말을 이었다. 원경병의 말에는 후부에 대한 풍자가 느껴졌다. 원경릉은 갑자기 속이 꽉 막히는 기분이 들어서 참지 못하고 타구 앞으로 달려가 토를 했다.깜짝 놀란 원경병은 재빨리 문을 열어 사람을 부르고는 원경릉의 등을 두드렸다.“괜찮아 괜찮아 이건 아무것도 아냐.” 원경릉은 창백한 얼굴로 동생을 보았다.그 둘의 대화를 듣던 희상궁이 조용히 원경병을 한쪽으로 끌어당겼다.“만약 샤오란이 오면, 왕비님을 만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원경병은 고
희상궁이 매실탕을 들고 들어오자 원경릉은 목이 말랐는지 단숨에 그릇에 담겨있던 시큼한 매실탕을 들이켰다. “난 어쩜 이렇게 신 걸 잘 먹지?” 원경릉이 웃으며 말했다.희상궁은 웃으며 “매운 것을 잘 먹으면 여자아이, 신 걸 잘 먹으며 남자아이라고 했습니다. 분명 뱃속에 세자가 들어 계신 겁니다.” 라고 말했다.원경릉은 빙그레 웃으며 “성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건강하게만 나와줬으면 좋겠네요.”라고 말했다.“맞습니다. 건강하게 나오는 게 가장 중요하죠.” 희상궁이 말했다.잠시 후, 원경병이 동그란 얼굴이 귀여운 샤오란을 데리고 들어왔다.샤오란은 겁에 질린 눈으로 원경병 뒤에 졸졸 쫓아오며 살짝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피다 원경릉과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라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 모습이 마치 겁에 질린 토끼 같았다.“소인 왕비를 뵈어 영광입니다!” 샤오란이 앞으로 나와 절을 했다.“샤오란! 나하고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빨리 일어나서 앉아라.” 원경릉이 웃으며 말했다.원경릉은 샤오란에게서 좋은 감정이 느껴졌다.‘원주도 이 소녀를 좋아했나 보군.’환하게 이를 드러내며 웃는 샤오란이 그녀를 쳐다보고는 “언니!” 라고 소리쳤다. 원경릉은 해맑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마음이 슬퍼졌다. ‘이렇게 아름답고 순수한 소녀가 늙은이에게 시집을 간다니……’원경릉은 원경병과 샤오란과 몇 마디를 대화를 나눈 후 속이 또 좋지 않아, 원경병에게 샤오란을 데리고 나가라고 했다. 그러나 샤오란은 밖으로 나가자마자 다시 들어왔다.“언니, 혹시 저 왕부에서 하루 묵어도 되겠습니까? 딱 하루 만요! 절대 막 돌아다니지 않을게요!”원경병은 놀란 얼굴로 “그건 안 돼. 형부가 외부인이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어. 너는 후부 가서 자고 가.”라고 말했다.샤오란은 실망한 표정이었다.“그럼 하루만 머물러. 오랜만에 오순도순 얘기나 하자.” 원경릉은 샤오란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언니! 고맙습니다!” 샤오란은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원경릉은 녹주에게 샤오
원경릉이 힘없이 그의 어깨에 기대며 “가지 마, 여기 있어.” 라고 말했다.“애교도 부릴 줄 알아?” 우문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의 볼에 뽀뽀를 했다.원경릉은 눈을 감았다. 그러자 문득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다시 머리에 떠올랐다.“나는 줄곧 우리 둘만의 세상을 보내고 싶었는데, 한 명이 더 생긴다니.”“둘만의 세상? 둘만의 세상이 뭔데?”“아이가 없는 너와 나를 말하는 거야.”“왕부에도 너랑 나만 있는 건 아니잖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원경릉은 눈을 치켜트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됐다. 설명해 봤자 내 입만 아프다.’저녁밥은 도저히 넘어가지 않았다. 다행히도 상선이 직접 국을 담아 보내주었다. 한 입 먹어보니 지난번과 똑같았다. 답답했던 속이 국을 들이 켜고 나니 속이 시원해졌다.우문호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상선을 보고 “도대체 이게 뭐죠? 제발 어떻게 만드는지 알려주세요.”라고 말했다.“절대 안 됩니다. 효과가 좋은 것에는 일정한 해로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태상황님은 왕비님이 아무것도 못 드시는 게 안타까워 이것을 보내시는 겁니다. 만약 밥을 잘 먹고 잘 지낸다면, 이걸 먹을 이유가 없습니다.”“안에는 야자 제비집이 들어있는 게 아닌가요? 해로운 게 하나도 없는데?”제비집이 별다른 좋은 점이 없다는 것은 그녀도 알지만 인체에 해로울 것까지는 없었다.“왕비께서는 고작 두 가지만 알아내신 겁니까?” 상선이 웃으며 물었다.“그리고 약간 감초 맛도 나고, 아닌가? 해열에 좋은 시호가 들어있나?”원경릉이 고개를 갸우뚱했다.우문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감초, 시후, 야자 즙, 제비집 이런 게 다 한 번에 들어갔다고? 맛없을 것 같은데?”라고 말했다.“아냐 진짜 맛있어! 근데 먹고 나면 위가 아파.”원경릉이 답했다.“왕비님, 구토가 멈추면 저에게 꼭 알려주세요.” 상선이 웃으며 말했다.그는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건곤전으로 돌아갔다.원경릉은 미간을 찌푸리고 “분명히 아주 이상한
원경릉은 추 할머니와 함께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뒤, 이리 나리를 몰래 끌고 나가 조용히 물었다.“왕비께 자녀가 있습니까?”그러자 이리 나리가 되물었다. “예이와 진이를 말하는 것이냐?”원경릉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네, 예이와 진이입니다. 그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북당에는 없다. 하지만 스승님께서 이미 추 마마를 보러 오라고 하셨다는구나.”추 할머니와 왕비가 같은 세대 사람이였기 때문에 이리 나리는 항상 추 할머니를 마마라고 불렀다.“그들이 돌아온다니… 정말입니까?”원경릉은 순간 이유 모를 흥분을 느꼈다. 그들에게 자녀가 있다는 것을 몰랐을 때, 북당이 그들을 제대로 대우해 주지 않아,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한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그들에게 자녀가 있다는 말을 들으니 정말 기뻤다.“그래. 돌아올지 말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돌아올 것 같다고 생각한다. 사부님이 명을 내렸으니, 감히 거역하지 못할 것이다.”“한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아마 다섯째도 만나고 싶을 것입니다. 어찌 그들은 친왕과 왕비의 곁에서 지내지 않는 것입니까?”“상황을 대충 알고 있지 않느냐? 사부님께서 한때 황태자가 될 뻔하셨다. 그래서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무상황도 장인어른께서도 황위에서 물러나 다섯째가 황제가 되었다. 상황이 변했으니, 그들도 이제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혹시 그들이 너무 조심스러웠던 건 아닙니까? 굳이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될 것입니다.”원경릉이 답했다.이리 나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주 작은 위험이라도 있을 수 없다. 작은 일이 큰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니 조정에 폐를 끼칠 수 있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동안 일이 참 많지 않았냐?”원경릉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에 수많은 문제가 쌓여 있어 몇십 년 동안도 해결되지 않았으니, 굳이 더 많은 문제를 만들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자세히 생각하니, 북당이 그들에게 빚진 것이 참 많은
하지만 원경릉은 거절했다. 모두가 시중을 들지 않는데, 그녀만 시중을 데리고 오면 괜히 특별한 척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황후라는 신분도 숙왕부 사람들 눈에는 단지 어린아이처럼 보일 뿐이었다.그녀는 짐을 다 챙긴 후, 계란에게 아버지를 잘 돌보라고 당부하곤, 서일의 보호를 받으며 궁을 나섰다.그러자 사식이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 막 궁에 왔는데, 원경릉이 다시 나가버리니 앞으로 심심한 나날을 보내야 할 자신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원경릉이 숙왕부에 도착했을 때, 이리 나리 부부도 추선을 방문하기 위해 와 있었다.이리 나리도 추선과 정이 깊은 사이었다. 공주는 원경릉에게 이리 나리가 어렸을 때부터 왕비가 키웠다고 말해 주었다. 처음에는 왕비가 아이를 키우는 법을 모르기에 대부분 추할머니가 그를 돌보았는데, 나중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도 추할머니 덕분에 엄한 왕비 곁에서 고생을 조금 덜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원경릉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군요. 왕비께서 아이를 낳지 않으셨으니, 아이를 키우는 게 익숙하지 않으셨겠지요.""듣자 하니, 왕비께서 아들과 딸을 한 명씩 낳으셨다고 하네. 열몇 살에 어디론가 보내셨다네.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리도 그들을 몇 번 보지 못했다고 하더군.""왕비께서 아이를 낳으셨다니요?"원경릉이 살짝 놀란듯 물었다."저는 아이를 데려다 키웠다고 들었습니다. 예전에 보친왕..."공주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아니네. 정말 아니네. 왕비께서 직접 낳으신 아들딸이네. 쌍둥이고, 나리보다 훨씬 나이가 많네.""그렇습니까?"원경릉은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과거 왕비 부부가 은거하고 지낸 탓에 자녀를 보지 못한 것이 이해는 되었지만, 최근 몇 년간 그들은 경성에 머물러 있었고, 자녀들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관계가 아무리 나빠도 몇 년 동안 부모를 찾아오지 않을 수는 없을 텐데. 혹시나 부모와 자식 간에 어떤 갈등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 되었다. "그렇네. 나리가
추선의 방에서 나온 원경릉은 청우헌으로 가서 세 거두와 이야기를 나누고 혈압까지 재주었다.그녀는 그들의 말에서 추선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추선으로, 왕비의 옛 시녀였다. 그러나 가장 힘든 시절에 추선은 왕비와 왕부를 떠나지 않았고, 줄곧 평남왕 우문극을 돌봐왔다고 했다.그리고 그 두 명의 첩인 운 마마와 몽 마마는 실제로 왕비의 첩이라고 했다. 대체 왜 왕비의 첩이 되었는지 명확히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두 사람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그녀들은 이미 왕비의 첩으로 불렸다.세 거두는 추선의 병세를 물었다. 원경릉이 악성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자 충격을 받았다.현대에 다녀온 경험이 있는 그들은 ‘악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들의 얼굴에 한순간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아, 원경릉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왕비의 시녀라 하셨는데, 잘 아시는 것입니까?”무상황이 말했다.“숙왕부에서는 누구의 시녀인지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매미도 시녀를 그만두고, 모두와 함께 고생했다. 평생 혼인도 하지 않고.”“매미요?”“네가 말하는 추선이다.”원경릉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추선의 이름을 매미로 부르는 것도 어찌 보면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추선이 큰 병에 걸렸다는 소식은 숙왕부 전체에 퍼졌고, 많은 사람이 원경릉에게 그녀의 병세를 물었다.원경릉은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이 그렇게 침통한 표정을 짓는 것도, 누군가를 이렇게 걱정하는 모습도 처음 보았다. 평소 그들은 늘 차가운 태도를 보였고, 유일하게 열정을 보일 때는 식사 시간뿐이었으니 말이다.그날, 원경릉은 숙왕부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숙왕부의 식사 방식은 한 사람이 큰 사발 하나씩 받는 것이었다. 이날 집안사람들은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아, 남긴 음식이 가득했다.이런 일은 전례가 없었다.원경릉은 이로부터 추선이 그들 마음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알게 되었다. 소요공에 따르면, 과거 추선은 적성루에서 음식을 배분하는 일을 맡았다고 했다. 고기를 얼마나 줄
“이전에 무슨 큰 병을 앓았습니까?”원경릉이 물었다.“폐결핵이었네. 의원을 불러 치료했지만, 몇 년 동안 건강이 계속 좋지 않았네.”왕비가 대답했다.“치료했던 의원의 능력이 뛰어났겠습니다. 누구였습니까?”“주진이요.”왕비가 말했다.주진의 이름을 들으니, 원경릉은 그녀가 왕비와 오랜 세월을 함께해온 자라는 것을 확신했다.원경릉은 초능력을 사용해 노파의 폐 상태를 감지했다. 결절과 섬유화가 있었고, 심지어 종양으로 의심되는 덩어리도 발견했다. 나이가 많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았고, 우선 약물을 통해 상태를 지켜보기로 했다.그저 악성이 아니길 바라며 기도할 뿐이었다.우선 링거를 놓고 산소를 공급하며, 스테로이드를 사용해 기관지를 확장해 그녀가 조금 더 편하게 호흡할 수 있도록 했다.약물을 사용하자 노파의 안색이 서서히 나아졌고, 호흡도 훨씬 수월해졌다.그러자 노파가 감사의 말을 전했다.“이렇게 숨을 쉬어본 게 정말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치료가 진행되는 동안, 두 명의 나이 든 여성이 방을 드나들었다. 다들 원경릉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왕비가 그녀들을 소개해주었다.“모두 수년간 나와 함께해온 사람들이네.”그러고는 잠시 망설이더니 말을 덧붙였다.“내 첩들이네.”그러자 원경릉은 자신이 잘못 들은건 아닌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의 첩인지 아니면 왕의 첩인지 궁금했지만, 차마 질문하기엔 입이 쉽게 열어지지가 않았다.잠시 후, 원경릉이 침대에 누워 있는 환자를 가리키며 물었다.“그럼, 이분은요?”“날 처음 모신 사람이네. 이름은 추선이야. 수십 년 동안 대부분 평남왕부에서 평남왕을 돌보며 지냈네.”왕비가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원경릉은 이해했다. 그들은 정말 이곳에 정착하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예전에 함께 지내던 사람들을 하나씩 데려와 함께 여생을 보내려는 것이었다.젊은 시절 함께 했던 사람들이니, 나이가 들어도 서로 곁에 머물고 싶어 했다.왕비는 원경릉과 함께 밖으로 나와 진지하게 말했다.“심각하다는 건
다섯째는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졌다.아이가 혼인을 올리지 않고 곁에 머무는 건 분명 기쁜 일이었고 효심이 있는 일이었지만 평생 결혼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외로울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만약 자기와 원경릉이 저세상으로 떠난다면, 그녀가 혼자 어떻게 지낼 수 있을까 싶었다.그렇다고 해서 혼사를 허락하자니, 세상에 과연 걸맞은 사내가 있을지 걱정되었다.택란을 그녀보다 못 한 사내에게 보내는 건 그녀에게 너무 큰 희생이다.다섯째가 갈등하는 것 같자 원경릉이 웃으며 그를 다독였다.“택란은 이제 여덟 살이네. 너무 앞서 생각하지 마오.”다섯째가 그녀를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자네는 모르네. 시간이 정말 순식간에 흘러가네. 벌써 여덟 살이니, 7년만 지나면 성인이 되오.”그는 시간이 조금만 천천히 흘렀으면 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두는 게 좋소. 너무 멀리 내다봐도 소용없네.”원경릉은 그의 손을 잡고 살며시 깍지를 꼈다.“아이도 운명과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오. 만약 언젠가 자네만큼 훌륭한 남자를 만난다면, 그와 혼사를 해도 나쁠 게 없지 않겠소?”“그런 남자는 있을 리 없소!”우문호는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이런 칭찬해도 우문호는 여전히 복잡해 보였기에, 원경릉은 자신이 그를 걱정하게 만든 것 같아 후회했다. 하지만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그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리 없었다.택란이 태어난 날부터 우문호에게는 새로운 적이 생겼다. 바로 택란과 혼인할 상대였다.그 적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몰랐지만, 그는 여전히 미워하고 있었다.더구나 금나라의 어린 황제가 혼사를 직접 언급했으니, 이제 그 적은 실체가 생겼고, 이에 따라 그는 한동안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었다.그 후 며칠간 택란은 매우 순진하고 착하게 행동했다. 아버지가 시간이 날 때마다 곁에 머물며 대화를 나누고, 놀고, 책을 읽고, 글씨를 쓰며 시간을 보냈다.어린 나이임에도 이미 아부하는 법을 터득해, 다섯째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 더 이상 화낼 수 없게 했다.다
”이제 화가 풀린 것이오?”원경릉이 웃으며 물었다.“화 풀렸네. 하지만 금나라의 어린 황제는 조심해야 하오. 어린 자식이, 정말 너무하오!”우문호는 선물을 하나 열었다. 안에는 알록달록한 도자기로 만든 정교한 인형이 있었는데, 머리카락까지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그는 미소를 멈출 수 없었다.“이 도자기 인형, 정말 우리 딸을 닮았구나. 예쁘오!”“내가 산 것이오!”원경릉이 질투라도 난듯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가 산 것이니 더 좋소. 아주 좋아!”우문호는 선물을 하나씩 열어보며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몇 개를 연 후에야 그는 약도성의 상황을 묻기 시작했다.원경릉은 자리에 앉아 약도성에서 있었던 상황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특히 택란이 약도성에서 보여준 대처 방법에 대해 상세히 말했다.그러자 우문호가 매우 놀라며 말했다.“택란이 지진을 예측하고 백성들을 대피시켰다니.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오. 정말 대단하네. 원 선생, 난 택란이 약도성에서 놀기만 했을 줄 알았네. 몰래 이런 큰일을 해내다니.”“택란과 경단은 모두 자네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오. 자네가 걱정하지 않도록 말이네. 그래서 자네한테 말하지 않았던 거고. 이게 택란이 자네를 더 사랑한다는 이유요. 자네를 평생 아끼며 짐을 덜어주고 싶어 하오.”우문호는 그녀의 손을 놓고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원 선생,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소.”원경릉은 그의 팔을 감싸 안으며 웃으며 말했다.“그래, 우시오. 우리 큰 아기 울어도 괜찮네!”우문호는 답답한 표정으로 말했다.“자네가 날 ‘큰 아기’라고 부르니 눈물이 갑자기 멈추네요.”“그럼 울지 말고 어서 앉으시오. 약도성 백성들이 택란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말해주겠소.”원경릉이 그의 팔을 잡아 의자에 앉히고는, 약도성에서 한 달 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우문호는 그녀의 이야기에 몰입하며 감동하였다. 특히 약도성 백성들이 택란을 존경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믿기 어려워했
우문호는 이 말을 듣고 얼굴빛이 확 어두워지며 깜짝 놀랐다.“청혼? 누가 청혼을 한 것이오? 미친 것이오? 겨우 여덟 살인데!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이런 짓을……”그는 너무 충격을 받아 분노가 치밀었다. 겨우 여덟 살인 딸을 누군가 눈독을 들이고, 심지어 청혼까지 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는 그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반드시 혼쭐을 내겠다고 마음먹었다.원경릉이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이미 택란의 비밀을 다 털어놨으니, 이제 더 이상 나한테 화내면 안 되오.”“말하시오. 용서할 테니 더 말하시오!”우문호는 더 이상 원경릉에게 화를 낼 힘도 없었다. 사실 처음부터 그렇게 심하게 화가 난 것도 아니었고, 복잡한 감정만이 뒤섞여 답답할 뿐이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들도 모두 사라지고, 이 터무니없는 사건이 더 중요해졌다.원경릉은 택란이 금나라에 가서 10만 냥을 얻은 전말을 설명했다. 특히 금나라의 어린 황제가 그녀에게 청혼했다는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고 전부 털어놓았다. 단 한 글자도 숨기지 않고 진실만 말했다.우문호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그건 너무 대담하잖소! 금나라에서 10만 냥을 빼앗았다니? 어찌 이야기가 이렇게 익숙한 것이오? 그래, 기화요! 어찌 스승이 이런 짓을 가르친 것이오? 그리고 그 금나라의 어린 황제는 이제 몇 살이오? 듣자 하니 겨우 열 살이라고……”“열셋이오. 금나라의 진국왕이 그의 권력을 누르려, 일부러 열 살이라고 소문낸 것이오.”우문호는 벌떡 일어나 뒷짐을 지고 방을 빙빙 돌며 어쩔줄 몰라했다. “열다섯이라도 안 되네! 금나라가 북당의 경성에서 얼마나 먼지 알고 있소? 아이가 그곳에 시집가면 1년에 한 번도 못 돌아올 것이네. 북당의 진국 공주를 부인으로 삼겠다니? 허망 된 꿈이요! 꿈!”“아이들의 농일 뿐이요.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안 되네.”원경릉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농담이라도 안 되네. 황위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우리 귀한 딸을 부인으로 삼겠다니? 이런 녀석은 앞
목여 태감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우문호에게 말했다.“폐하, 공주를 너무 꾸짖지 마십시오. 공주께서는 단지 세상을 경험하고 싶어 한 것 뿐입니다. 큰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안왕과 위왕도 그곳에 있었고,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았잖습니까?”우문호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택란이 자네에게는 과자 한 조각을 주었지만, 나한테는 안 주더군.”택란은 그 말을 듣고 재빨리 과자 한 조각을 가져와 아버지의 입가에 가져다 대며 환심을 사려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 드셔 보세요. 이건 그렇게 달지 않은 생강 과자인데, 정말 맛있습니다!”생강 과자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딸의 귀엽고 앙증맞은 얼굴을 보니 어떻게 밀쳐낼 수 있겠는가? 화가 난 상태였지만 결국 한입 물었고 생강과 설탕의 맛이 입안에 퍼졌고, 딸의 사랑스러운 미소를 보니 얼굴에 굳었던 표정이 풀어졌다.“나도 먹고 싶은데.”원경릉이 가볍게 웃으며 그의 옆에 앉아 턱을 괴고 물었다.“다섯째야, 맛있느냐?”우문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무시했다. 그녀가 스스로 만든 규정을 어겼으니, 좋은 표정을 지을 마음이 없었다.원경릉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택란아, 나한테도 한 조각 줘 보거라!”택란은 다시 과자 한 조각을 가져와 엄마의 입가에 가져다주며 더 큰 죄책감을 느꼈다. 이번엔 자신의 엄마까지 곤란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원경릉은 과자를 먹고 나서 웃으며 말했다.“정말 맛있구나. 다 먹었으니 나가서 좀 자거라. 돌아오는 길에 제대로 못 잤으니.”“예!”택란은 얌전히 대답하고 나머지 과자를 빨리 먹어 치운 뒤 아버지에게 다가가 그를 한 번 안아주었다.“아바마마, 저 먼저 자러 가겠습니다. 깨고 나면 다리 주물러 드릴게요!”우문호는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그래, 어서 가거라.”택란은 목여 태감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엄마를 한 번 돌아보며 아버지가 너무 오래 화를 내지 않기를 바랐다.원경릉은 문을 닫고 탁자 옆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택란이 드디어 경성으로 돌아왔다. 우문호는 소월궁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옆에서 목여 태감이 계속해서 설득했다. 그는 공주가 아직 어리니, 노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며, 그저 택란이 다른 어린아이들이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을 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목여 태감은 혹시라도 황제가 공주를 꾸짖을까 봐 걱정되어 공주를 감쌌다. 그의 약한 마음은 그런 걸 감당하지 못했다.마침내 택란과 원경릉이 도착했다.우문호는 작은딸이 원경릉의 뒤에 숨어 겁먹은 얼굴로 머리를 살짝 내밀고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았다.원경릉이 딸의 손을 꽉 잡고 말했다.“가봐라, 아버지께서 기다리신다.”택란은 고개를 숙이고 아버지 앞으로 다가갔다. 우문호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자기 손을 그의 손 위에 올려놓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바마마, 저 돌아왔습니다.”그러자 우문호는 딸의 손을 잡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뿌리치지도 않았다.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보는 눈빛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약도성에 얼마나 있었느냐?”택란은 거짓말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솔직히 대답했다.“지난번 여름방학 때 집에 돌아온 후 바로 약도성으로 갔어요.”우문호는 큰 충격을 받았다.“모두가 알고 있었으면서, 나만 속였단 말이냐?”택란은 미안한 마음에 아버지를 껴안으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안 그러겠습니다!”우문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원경릉이 다가가 말했다.“아이가 자네 선물을 많이 샀소. 한번 보시게.”“필요 없소!”우문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딸을 뿌리칠 마음은 없지만, 그는 여전히 속았다는 사실에 너무 힘들었다.원경릉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텐데,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다. 서로 비밀이 없기로 약속했건만, 그 약속이 깨진 것 같아 화가 났다.원경릉은 그의 표정을 보고 더 걱정해야 할 사람이 자기라는 것을 깨달았다.오는 길 내내 택란만 걱정하며 우문호에게 딸을 변호해 주려 했지만, 정작 자신이 그를 속인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