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는 금은보화가 가득 들어있는 상자를 다시 한번 보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얼굴도 예쁘고, 집안에 돈도 좀 있는 것 같고…… 저렇게 내 아들을 사랑해주다니 저런 사람이 내 아들에게 또 나타날 수 있겠는가?’노비는 손짓으로 하인을 불렀다.“여보게, 미색을 데리고 가 옷을 갈아입히거라! 그리고 여섯째야 넌 같이 가서 운동도 할겸 미색을 데리고 왕부 여기저기를 구경시켜 주거라.”미색은 고개를 들어 노비를 바라보았다. “제 모친께서는 저를 낳다가 돌아가셨는데…… 만약 모친께서 살아계셨다면 지금 이 모습을 보고 얼마나 감격하셨을까요! 망극하옵니다 노비 마마!”미색의 아름다운 눈에서 눈물이 똑똑 떨어졌다.노비의 긍정적인 대답에 회왕의 새하얀 얼굴에도 생기가 돌았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예, 모친.”미색과 회왕이 나간 후 노비는 오씨와 조씨에게도 돌아가라고 분부했다. 두 사람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노비를 화나게 할 엄두가 나지 않아 그저 씩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저희가 있으면 방해만 되는 것 같으니 가보겠습니다. 마마님 실례가 많았습니다.”두 사람은 문밖을 나가는 순간까지 금은보화가 가득찬 상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처음 만나는 자리에 저렇게 귀한 물건을 상자에 가득담아주다니…… 만약 회왕이 미색과 혼인이라도 한다면 지참품을 얼마나 많이 가져오겠는가?’조씨는 생각만으로도 노비가 부러워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이 장면을 보고있던 원경릉은 속으로 조씨와 오씨가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미색은 출신을 제외하고는 여기에 있는 어느 부인보다 나은 금전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외모는 월등하게 빼어났으며 심지어 똑똑하고 배려심이 깊다. 조씨와 오씨는 미색보다 나은 것이 출신 뿐이니 그것만 믿고 미색을 얕보는 것이다. ‘자격지심 때문에 사람이 저렇게 흉해지기도 하는 구나……’조정에 은화 융통이 되지 않으니 이리 나리가 이백만 냥이라는 큰 금액을 기부한 게 아니겠는가? 조정에 어느 부인의 집안이 한번에 이백
“맛있습니다!”미색은 하얀 이에 노란 국화 꽃잎이 묻어있었다.아름다운 외모와 달리 미색의 엉뚱한 모습에 회왕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왕야께서는 웃는 모습이 참 예쁘십니다!”회왕은 미색의 말에 웃음을 멈추고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미색, 도대체 왜 본왕과 혼인을 하려고 합니까? 미색 정도라면 본왕보다 더 훌륭한 신랑감을 찾을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회왕의 진지한 표정에 미색은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왕야께서는 모든 면에서 훌륭하십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기 민망하지만, 왕야께서는 제가 바랐던 이상형이십니다. 만약 제가 왕야께 시집을 가게 된다면 제 평생소원을 이루는 것과 같습니다.”회왕은 미색의 진심 어린 표정과 말투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대청에는 원경릉과 노비만 남아있었다. 노비는 머쓱한 표정으로 원경릉을 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본비가 미색을 받아주려는 이유는 미색의 돈 때문이 아니라, 미색이 아들인 회왕을 끔찍하게 아끼는 것 같기 때문일세……”그러자 원경릉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노비 마마께서 굳이 설명하지 않으셔도 잘 압니다. 그나저나 마마님 만약에 회왕이 미색을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면 어떻겠습니까?원경릉이 알고 있는 미색의 성격이라면 회왕을 선택한 후에 주변 사람은 물론 가족들까지 모두 설득을 마쳤을 것이다. 노비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원경릉을 바라보았다.“태자비가 중매를 선 사람인데, 아무렴 믿을만한 사람이겠지요.”원경릉은 노비의 말을 듣고 방긋 웃었다.*회왕과 미색은 이미 정원을 몇 바퀴를 돌았다. 두 사람은 목적 없이 무작정 걸으며 대화를 나눴다. 미색은 자신이 이렇게 재잘거릴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녀는 행복에 겨워 허리를 젖히고 웃다가 잠깐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갈 뻔했다. 그 순간 회왕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고, 미색은 그의 손을 잡고 설렘에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미색은 왕부로 돌아오기 위해 사식이가 있는 곳으로 향했
노비는 회왕부에서 환궁하자마자 명원제를 찾아갔다. 명원제는 갑자기 찾아온 노비(魯妃)를 보고 당황했지만, 그또한 그녀가 얼마나 급했으면 이렇게 달려왔을까 싶었다.노비는 미색이 보낸 금은보화 중에서 몇 가지만 골라 가져왔고, 나머지는 모두 회왕부에 남겨두었다. 명원제는 주수보에게 이리 집안과 혼사를 맺게 가보라고 했다. 주수보는 이 말을 듣고 바로 직예부(直隸府)로 가서 이리 나리를 만났다.혼담을 나누기 시작하면 자연히 서로의 사주를 교환할 것을 미리 안 이리 나리는 이미 회왕의 사주를 받아 조사를 해본 적이 있었다. 이리는 관상가를 불러 회왕의 사주와 미색의 사주 그리고 그 두 사람의 관상이 잘 맞는지 확인을 마친 상태였다. 그래서 주수보가 그를 찾아와 미색의 사주를 요구했을 때 이미 관상가를 통해 알아낸 회왕과 잘 맞는 사주를 적어 그에게 주었다. ‘미색 사주에 두 살 정도 어리게 적었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고 괜찮겠지.’주수보는 미색의 사주를 받아 사주가를 찾아갔다. 사주가는 두 사람의 사주를 유심히 보더니 무릎을 탁 쳤다.“이 두 사람은 볼 필요가 없습니다! 사주가 어쩜 이리 잘 맞는 거죠?”그 말을 들은 주수보는 명원제를 찾아가 결과를 전했고, 명원제는 두 사람을 하루빨리 혼인시키라고 명했다.*미색은 회왕과 혼인을 허락한다는 명원제의 성지를 받고는 원경릉을 안고 엉엉 울었다.“태자비, 제가 드디어…… 시집을 갑니다!”원경릉은 미색의 등을 다독이며 흐르는 땀을 닦았다.‘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게 이건가? 나도 중매 사례금을 받을 수 있겠구나.’*우문호가 일을 마치고 왕부로 돌아오자 원경릉은 회왕과 미색의 혼인 소식을 그에게 알렸다. 그리고 그녀가 받게 될 중매 사례금도 얘기했다. “근데, 혼사에서 진짜 중매인은 네가 아니라 재상이야.”“왜? 내가 중매를 섰는데?”“넌 소개를 해줬을 뿐이잖아. 결과적으로는 재상이 중간에서 사주를 받아 전해주었기에 부황께서 혼사를 허락하신 거고.”“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혼사에서
아라에게 있어서 늑대파의 거절은 상상도 하지 못한 결과였다. 아라는 다른 방법을 강구했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자객들 사이에 원경릉을 암살해 주면 20만 냥을 주겠다며 포상금을 걸었다. 아라는 당장 자객들이 원경릉을 죽이지 못하더라도 원경릉에게 누군가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경계심을 심어주어 문둥산에 올라가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20만 냥이라는 큰 금액의 은화에 강호에서 칼 좀 잡아봤다는 자객 여럿이 원경릉을 암살하겠다고 아라에게 연락을 취해왔다. 암암리에 소문이 퍼졌고 소홍천 귀에도 원경릉을 암살하려는 사람이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는 급히 우문호를 찾아가 사실을 전했고, 원경릉에게 몸조심하라고 일렀다. 우문호는 부병을 파견했고, 나장군(羅將軍)과 상의해 귀영위 수를 늘려 원경릉을 보호했으며 당분간 원경릉에게 왕부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했다.갑작스러운 외출금지 소식에 원경릉은 왕부에서라도 급하게 약을 만들어 탕양을 통해 문둥산으로 약을 수송했다. 하지만 환자들이 약만 먹는다고 문둥병이 치료될 리가 없었다. 원경릉은 길어지는 외출금지 소식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바로 그때 이리 나리가 늑대파 신분으로 자객들에게 태자비를 암살하려는 자의 신원을 밝혀내는 자에게는 20만 냥을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태자비를 암살하려는 자는 늑대파가 끝까지 쫓아가서 처단할 것임을 선포했다.며칠 뒤, 이 소식을 들은 소홍천이 우문호에게 전했고 우문호는 늑대파가 머리가 참 좋다고 생각했다.“매번 소식을 전해주어 고맙네. 듣자 하니 태자비가 꽤나 값나가는 몸인가 봐. 다들 태자비의 목숨을 가지고 난리네.”우문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소홍천은 허허 웃었다. “이 바닥에서 늑대파의 미움을 살만한 간 큰 자객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태자께서 일단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그래도 혹시 모르니 당분간은 부병이며 귀영위를 줄여서는 안 돼. 참…… 북당의 황실에서 태자비 하나를 지키겠다고 이렇게 용을 쓰다니 말이야.”*아라는 늑
우문호는 명원제에게 보고하지 않고 직접 경조부에 가서 바로 공고문을 써서 여기저기 붙였다.공고문 안에 내용은 태자비가 문둥병을 치료할 수 있는 새로운 약을 연구 제작해 문둥병의 전염을 억제할 수 있으니 안심하라는 것이었다. 즉, 태자비가 문둥산에 갔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당당하게 알리는 것이다.이를 본 백성들은 하늘에서 내린 저주를 어떻게 고치겠느냐며 말도 안 된다며 더 거세게 반발했다. 적위명이 고용한 선동자들은 초왕부 뿐만아니라 경조부 앞에 가서도 시위를 했다.우문호는 이 상황을 지켜보며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시위대가 폭력성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 두거라.” 우문호는 백성들에게 태자비가 전에 태상황을 치료할 만큼 훌륭한 의학 실력이 있으며, 공고문 내용 그대로 문둥병은 고칠 수 있으며 전염성을 없애는 약도 있다고 말했다. 시간이 흐르자 백성들은 두 개의 파로 나뉘었다. 하나는 문둥병을 고칠 수 있다는 파였고, 다른 하나는 말도 안 된다는 파였다.“만약 문둥병을 고칠 수 있다면 혁명적인 일 아니야?”“그게 말이 돼? 고약한 병을 갑자기 고친다고?”백성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였지만 모두들 5년 전의 악몽 같은 시간으로 돌아가면 안 된다는 의견은 두 파 모두 같았다.경중에 백성들이 모두 태자비에게 시선이 쏠리자 원경릉은 불편해했고, 우문호는 사람들을 시켜 백성들이 더 이상 거짓 소문을 믿지 못하게 하며 질서 유지에 힘썼다.백성들뿐만 아니라 조정의 문무백관들도 이때가 기회다 싶었는지 여기저기서 원경릉을 헐뜯었다. 조정에서도 문둥병을 치료하는 데 힘써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현 상태를 유지하며 그들을 격리해야 한다고 했다. 심지어 우문호를 지지하던 문무백관들도 여럿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태자면 북당 백성들의 건강을 걱정해야지, 이렇게 단독적으로 행동해도 되는 겁니까? 태자비가 문둥산에 갔다는 게 사실이니 이제 황실에 문둥병이 퍼지는 건 시간문제 아닙니까?”“그러니까요. 5년 전의 악몽 같은 일이 또 일어
명원제는 몹시 화가 나서 이틀 동안 공무방(公務方)에 나가지 않고 대신들을 접견하지 않았으며 모든 국사를 주수보와 예친왕에게 맡기고 호비와 황실 별채로 갔다.대신들은 명원제의 부재에 발만 동동 굴렀다. 만약 문둥산 사건으로 우문호가 태자의 직위에서 내려오게 되더라도 나라의 안전과 발전을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대신들은 명원제가 해답을 내려주길 바라는 마음에 황실 별채로 찾아갔으나 경비를 맡은 구사가 입구에서 그들을 막았다.“다들 돌아가십시오.”“구사, 지금 황상께서 여기서 이러고 계시면 안 된다는 걸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그 말을 들은 구사는 한숨을 내쉬었다.“위태부(韋太傅),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태부께서는 연세가 많으니 이만 돌아가시지요.”“노부는 이대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노부는 임금님께 할 말이 많아요.”“그래요, 구사 나리, 태부만 들어가도록 해주십시오. 태부께서 중요하게 황상께 하실 얘기가 있다고 합니다.”다른 신하들이 나서서 구사를 설득하려고 했다.구사는 자신의 스승인 태부를 져버릴 수도 없었을뿐더러 황제의 명을 어길 수도 없었다.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어쩔 수 없이 태부를 보며 말했다.“그럼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황상께 한번 말씀은 드려보겠습니다.”“구사, 고생이 많네요.”위태부가 한시름 놓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자하게 미소를 지었다.구사가 들어가는 것을 본 위태부는 부축을 받아 별채 대문 옆 작은 바위 위에 앉아 쉬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주머니에 약통을 꺼내 손으로 알약을 집어 물도 없이 알약을 삼키고는 한숨을 쉬었다.“태자를 폐할 수 없다. 태자를 폐한다면 큰일이 일어날 것이다.”*명원제가 별채에 온 지 이튿날이다. 그는 그간의 복잡한 마음을 털어버리고 48시간 동안 유유자적하게 지내며 간만에 햇볕이 마당까지 들어올 때까지 잤다.‘황제가 된 후로는 이렇게 늦잠을 자본 적이 없는데 말이야…… 나 빼고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살고 있겠지?’늦잠을 실컷 자고 난 후 그는 호비와 함께 정원
위태부는 명원제를 보고 무릎을 꿇고 통곡하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구사는 즉시 자리를 피했다.명원제가 친히 태부를 일으켜 세웠다.“위태부, 왜 우십니까? 어서 일어나세요.”“황상, 망극하옵니다……”’“태부, 밖이 추웠나 봅니다. 손이 차갑군요.”명원제는 위태부 코에서 흐르는 콧물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위태부는 명원제의 손을 잡고 울먹였다.“황상, 절대로 태자를 폐할 수 없습니다.”위태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른하늘에 천둥이 치더니 비가 오려고 했다. 그 이후로 위태부는 명원제에게 우문호를 폐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고, 명원제는 계속되는 위태부의 설득에 눈이 감겼다. 위태부는 명원제가 자신의 말을 듣고 골똘히 생각하는 것이라고 여기고는 계속해서 자신의 생각을 그에게 말했다.“에헴!”명원제는 위태부의 기침 소리에 잠시 잠에서 깼다.“그러니까…… 태상황님께서는……”무슨 말을 하다가 태상황님 얘기까지 하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위태부는 끊임없이 명원제에게 말을 했고, 그는 졸음을 견뎌 내지 못하고 벌렁 나가떨어졌다.위태부는 명원제가 자신의 눈앞에서 기절하자 깜짝 놀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태부 또한 나이가 많으니 북당의 황제가 기절하는 모습을 보고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역시 두 눈을 뒤집고 기절하고 말았다.구사와 목여 태감은 밖에서 그들의 대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태감, 안에서 아무 소리가 안 나는 것 같습니다.”“그런가요? 그러게요…… 방금까지는 태부의 목소리가 어렴풋 들렸던 것 같은데.”구사는 이상하다는 듯 정원 안으로 들어갔고 두 사람이 바닥에 쓰러져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자객이다!”구사는 두 사람이 자객의 습격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허리춤에 장검을 꺼내 사방을 주시했다.명원제의 부재로 오래간만에 휴식을 취하던 어의가 별안간 별채로 불려왔다.의식을 잃은 태부는 혼미한 정신 속에서 명원제가 승하하는 꿈을 꾸었다. 잠시 후, 태부가 눈을 떴고 어의를 보고 황상의 상태가 어떤지
위태부가 초왕부 안으로 들어가자 희상궁이 나와서 그를 맞이했다.태부는 희상궁의 손을 잡고는 “태자비와 태자는 서로를 아끼며 사랑하고, 어떠한 고난도 헤쳐나가야 합니다.”라고 말했다.“태부께서는 걱정 마세요. 제가 두 분께 꼭 전하겠습니다.”희상궁은 태부의 손을 떼고 싶었지만 위태부의 끊임없는 잔소리에 손을 뗄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전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두 사람의 이해관계를 따져봐야 합니다. 문둥산에는 왜 갔으며, 정말로 그들을 고칠 수 있는지, 문둥산 사건으로 지금까지 쌓아온 태자의 덕과 공이 한순간에 무너져서는 안 됩니다!”“아, 예……”“그나저나 희상궁 나이가 몇인데 이렇게 손이 반드르르합니까? 어째서 나만 늙고 희상궁은 그대로입니까?”희상궁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손을 뒤로 당겨빼더니 한 발짝 물러서서 태부를 껄끄러운 표정으로 보았다.‘다 늙은 양반이 어디서 수작이야?’*우문호는 왕부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태부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말머리를 돌려 관아로 돌아갔다.“전하께서 태부를 상대하지 않으면 태부께서는 틀림없이 태자비를 찾아갈 겁니다!” 탕양이 그의 뒤를 쫓아오며 말했다. 하지만 탕양이 뭐라고 하든 우문호는 말을 채찍질하며 미친 듯이 달렸다.“한 둥지 살던 새도 큰 재난이 닥치면 각자 도망가는 법이야!”우문호는 말이 많은 사람을 극도로 싫어했다. 특히 위태부는 했던 말을 주야장천 계속하는 것으로 조정에서도 유명했다. 게다가 나이가 들어서인지 가끔 감정이 격해질 때면 눈물까지 흘렸다.우문호가 싫어하는 사람들의 이유를 다 모아 놓은 집합체가 바로 위태부였다.탕양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태자비 혼자 위태부를 상대하게 남겨둘 수 없다.*지금 원경릉이 문둥산에 오르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문둥산 사건 이후로는 백성들이나 문무백관 심지어 안왕부 사람들까지 문둥산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그녀가 환자를 치료하고 초왕부로 들어올 때는 미색과 함께 변장을 해서 태자비임을 숨겼다.“태자비는 죄인이다!”“태자비가
우문호는 혼인을 하사하는 조서를 내렸다. 이는 탕양의 혼사에 화룡점정을 더하는 일이었다.온 경성 사람들이 탕양이 황제를 모시는 신하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혼사에 주목했다.탕양은 왕부에서부터 황제를 지지해 온 충신이었으며, 군신 간의 정은 형제의 관계에 못지않았다.거기에 황제가 직접 혼인을 하사했으니, 이는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었다. 그래서 다들 두터운 예물을 준비해 축하하러 왔다.혼례는 초왕부에서 열렸다. 비록 초왕부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이번 경사에 많은 지원이 몰렸다. 여러 왕부에서 사람을 보내왔고, 미색은 돈에 힘까지 보태며 혼사 지출의 3할이나 부담했다.희상궁도 돌아와 모든 일을 총괄했다. 희상궁은 비록 나이가 많았지만, 여전히 일 처리 능력이 뛰어났다. 그녀는 여러 왕부에서 온 사람들을 지휘하며 완벽하게 일을 조율했다.혼례 당일, 황제와 황후도 참석했다.신부가 도착하여, 혼례를 올릴 때 우문호와 원경릉은 상석에 앉아 신랑 신부의 절을 받고는, 그 다음으로 기상궁도 절을 받았다.우문호가 원경릉의 손을 잡으며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탕 대인이 드디어 철이 들었고, 가정을 이루었으니 정말 기쁘네.”원경릉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 마음이 풀립니까? 그러니 앞으로는 더 이상 잔소리하지 마시지요.”“잔소리는 계속할 것이다. 이젠 아이를 낳으라고 해야지.”우문호는 걱정이 끝이 없다는 듯 말하자, 원경릉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아이 낳는 일은 하늘에 맡겨야 하네.”“그래도 몇 가지 비법을 전수해 줄 수는 있소.”우문호가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좀 더 크게 말해보시오. 다른 사람들이 못 들을까 봐 걱정이오?”원경릉이 그를 흘겨보았다.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들을 바라보며 부러움 섞인 표정을 지었다. 많은 사람이 첩을 두고도 황제만큼 자식을 많이 두지는 못했지만, 황제는 복도 많고 자식도 많은 사람이었다. 저녁 연회에서 우문호는 과음했지만 원경릉은 그를 막지 않았다. 이런 노부의 감격은 술로 달래야 한
탕양이 뜨거운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거짓말이라면 제 목숨을 앗아가도 됩니다.”일곱째 아가씨가 그의 시선을 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돌고 돌아 결국 대인과 함께하게 되었네요. 하지만 미리 말하자면 혼사가 너무 급작스럽게 성사되어 저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시집간 후에도 그저 명목상 부부로만 살 뿐, 당분간은 벗으로 지낼 것입니다. 이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혼사를 승낙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없던 걸로 하시지요.”그러자 탕양이 거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답했다.“받아들이겠습니다. 무엇이든 다 좋습니다. 혼사만 승낙한다면 그저 명분이라도 상관없습니다!”이로써 드디어 그의 수년간의 바람이 이루어졌다.일곱째 아가씨가 담담히 말했다.“그렇다면 어디서 지낼지 생각해 보시지요. 하지만 대인 방에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으니, 그곳에 지낼 수는 없습니다.”탕양이 다급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십시오. 황후 마마와 상의를 해보았습니다. 지금 초왕부에 아무도 살지 않으니, 우선 그곳에서 지내시지요. 전에 그 방은 저도 쓰지 않고, 바로 서일에게 줬습니다.”그러자 일곱째 아가씨가 물었다.“저택을 따로 살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전에 혼자였을 땐 그런 생각까지 하지 못 했습니다. 초왕부도 누군가 관리해야 하는 터라... 하지만 아가씨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돈을 모아 작은 집이라도 살 수 있습니다.”일곱째 아가씨는 초왕부를 둘러보았는데, 그리 호화롭지는 않았지만, 분위기가 몹시 편안했다. 하지만 황제의 옛 저택이라, 평생 이곳에서 지낼 수는 없을 것이다.“우선은 이곳에서 지내고, 나중에 땅을 사서 직접 집을 지으십시다.”땅을 사고 집을 짓는다는 것은 돈 많은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탕양은 순간 자기가 보잘 것 없게 느껴졌다.그가 쭈뼛거리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일은… 꼭 마음속에 깊이 새겨 두겠습니다.”일곱째 아가씨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땅도 제가 사고, 집도 제가 지을 것입니다. 나중에 대인이 잘못이라
노태군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안 된다. 혼인 전에는 신랑 신부가 만날 수 없어. 이건 풍습이고 규칙이니, 어길 수 없다.”그러자 일곱째 아가씨가 웃음을 터뜨렸다.“하하하. 이 혼사에 정해진 규칙이 있긴 합니까? 어머니께서는 제가 그를 만나 오히려 싸움이 나서 혼사가 그릇될까 봐 걱정되시는 것 아닙니까? 어머니께 약속했으니, 반드시 혼사를 올릴 것입니다. 이제 마음이 놓이십니까?”노태군은 이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좋다. 너도 장사하는 사람이니 신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이다. 약속했으니, 절대 번복할 수 없어. 목을 매겠다는 이 어미의 결심은 너가 반대하면 언제든 효력을 발휘할 것이다.”일곱째 아가씨가 이를 갈며 투덜댔다.“이렇게 얄미운 늙은이는 정말 처음입니다!”“나도 너처럼 고집 센 딸은 처음 본다.”노태군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웃음소리가 들려오자, 원가 사람들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일곱째 아가씨가 시집가는 것이 정말 꿈만 같게 느껴졌다.일곱째 아가씨의 혼사는 원가 사람들에게 마음의 짐과도 같았다.탕양은 일곱째 아가씨가 무사히 경성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내쉬고 나니,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은 감정이 북받쳤다. 그녀에게 아무 일도 없다는 생각에 그는 코끝이 다 시큰 거렸다.그날 밤, 일곱째 아가씨가 초왕부로 탕양을 찾아가자, 탕양은 그녀를 안으로 들인 후, 단둘이 방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탕양은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붉은색 옷차림에 머리를 단정히 올려 깔끔하고 우아한 모습이 여전히 돋보였다. 세월의 흔적이 얼굴에 남아 있었지만, 오히려 그녀의 매력을 더해 주었다.그녀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패기 넘치던 청춘 시절이었는데, 눈 깜짝할 새에 이렇게나 많이 늙어 버렸다.탕양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수많은 감정이 얽혀 있었지만, 한마디 말도 제대로 꺼낼 수가 없었다.특히 약도성에서의 일을 겪고 난 뒤라, 첫마디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
일곱째 아가씨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는 지금 헛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찌 그와 그런 일을 한다는 말입니까?”그녀의 표정을 보았는데,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 잠시 멍해졌다.노태군이 이 상황을 보고 말했다.“정말 그와... 아무 일도 없었단 말이냐?”“물론입니다! 그날 밤 그는 술에 잔뜩 취해서 정신도 없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겠습니까?”일곱째 아가씨가 퉁명스레 답했다.노태군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그런 기본적인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탕양이 정말 쓸모없는 놈이라 생각되었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우리가 어디 믿을 것 같으냐? 혼사는 이미 정해졌으니,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물릴 수 없다. 혼사를 올리지 않으면, 이 어미 시신이나 수습해야 할 거다!”노태군이 차갑게 말하자, 일곱째 아가씨는 그만 분통을 터뜨렸다.“어머니, 어찌 이렇게 억지를 부리시는 것입니까?”“이 어미는 평생 이치를 따지며 살았지만 이번 일만큼은 예외다. 본디 자식의 혼사는 부모가 결정하는 법이다. 게다가 황후까지 중매에 나섰으니, 너에겐 반대할 권리가 없다. 어서 가서 준비나 하거라. 열닷새에 식을 올려야 하니.”“열닷새요? 모레잖습니까? 말도 안 됩니다! 이리 급히 저를 시집보내면, 제 체면은 어쩌라는 말씀입니까?”일곱째 아가씨가 소리치자, 노태군이 탁자를 쾅 내리치며 화를 냈다. “체면? 지금 체면이라 한 것이냐? 이 어미는 벌써 체면 다 버렸다! 네 혼담이 계속 흐지부지 되어 여태껏 시집도 못 가고 늙은 아가씨 취급받는 게 얼마나 창피한 줄 아느냐?! 매번 연회에 나가기만 하면 사람들이 물어보는데, 이 어미의 체면을 생각한 적 있느냐?”“그래도 아무에게나 시집갈 순 없지 않습니까. 평소 늘 말이 통하시는 분이신데, 어찌 이 문제에서는 이리도 고집을 부리시는 겁니까?”노태군이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아무나? 그럼 내가 물으마. 탕양에게 아직 마음이 남아 있느냐?”그러자 일곱째 아가씨의 눈빛은 흔들렸지만, 애써 침착하게 답
혼담을 꺼낸 당일에 모든 일을 결정하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하지만 원가는 세속적인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혼수도 원하는 대로 준비하게 했고, 잔칫상만 제대로 차리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잔칫상은 일곱째 아가씨가 결코 시집을 못 가는 것이 아니라고 세상에 알리는 용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혼인 상대가 황제가 가장 신임받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자리였다.따라서 잔칫상만큼은 빠질 수 없었다.이 부분은 탕양도 문제없이 해결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나름 저축해둔 돈이 있었기 때문에, 잔칫상을 준비하는 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하객 문제에 대해서도, 탕양은 아는 사람이 정말 많았기에 문제없었다. 다른 곳은 말할 것도 없고, 경성에만 백 상 이상은 문제없이 마련할 수 있었다.황제를 곁에서 모시는 자로서, 조정의 문무백관 중 그와 친분이 없는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되겠는가?이 모든 것을 논의한 후, 탕양은 마침내 의문을 물어볼 수 있었다.“노태군, 만약 일곱째 아가씨께서 동의하지 않으면 어찌해야 합니까?”“동의할 것이다. 원가는 혼사를 치르거나 상을 치르거나 내릴 결정을 둘 뿐이니, 그렇게 알고 있거라. 다른 선택은 없다.”노태군이 단호하게 말했다.“그건...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탕양이 초조해하며 말했다. 왠지 일곱째 아가씨를 강요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혼사는 본디 두 사람이 마음이 맞아야 하는 것 아닌가.돌아가는 길에 탕양이 여전히 불안했해 하자, 원경릉이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너무 많은 생각은 하지 말고, 그저 신랑이 될 마음의 준비만 해두시게. 일곱째 아가씨는 원가 식구들이 설득할 것이오.”“그녀가 원하지 않으면 어찌합니까? 곤란하게 하거나, 억지로 결혼하게 해서 그녀가 상처받는 건 싫습니다.”“아가씨도 동의할 것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약도성에서 자네를 뿌리치고 떠났을 것이네. 하지만 곁에 남아 자네를 보살폈잖나? 그것만 봐도 자네에 대한 마음이 있는 것이오.”“정말입니까?”탕양이 놀랐는데, 얼굴에 은은하게 빛이 맴돌았
원경릉은 원가에서 이 혼사를 분명히 찬성할 것이라 생각했다. 노태군이 일곱째 아가씨를 시집보내고 싶어 안달이 난 상황에서 혼담을 꺼내는 것은 단지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원가의 유일한 문제는 일곱째 아가씨 본인이었는데, 그녀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일은 십중팔구 성공할 것이다.역시나, 다음 날 탕양과 함께 원가로 향한 원경릉은 원가에서 심지어 점쟁이까지 청해 두 사람의 사주를 확인하겠다고 하는 것을 보았다.두 사람의 사주를 본 점쟁이는 한참 확인하더니,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두 사람의 사주가 다소 상충합니다.”원 노태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어디가 상충하는가?”“한 사람은 닭띠, 한 사람은 개띠입니다. 이는 닭과 개가 편치 않은 사주라, 혼사를 치른 후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노태군은 탁자를 쾅 치며 말했다.“그럼 바꾸면 되지! 이제 보니 우리 딸은 말띠다. 방금 헷갈렸었다.”“말띠요? 말띠라면 괜찮습니다. 말띠는 올해 연분이 따르는 해 입니...”노태군은 점쟁이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괜찮다니 됐다. 이제 길일을 골라주게.”그러자 점쟁이는 다시 손을 펴고 계산하더니 말했다.“올해 좋은 날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무리 빨라도 연말쯤이어야...”“좋다. 이번 달 15일로 하지. 보름달이 뜨는 날, 사람도 오붓이 모이는 날이니, 좋지 않겠나?”점쟁이가 책자를 닫고,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예.”혼사는 원가에서 준비하니, 제시간에만 준비 된다면 안 될 것도 없었다.15일까지 남은 시간은 단 5일, 원가에서 딸을 시집보내는 일을5일 안에 끝낼 수 있을까 걱정 되었다. 준비할 시간도 아직 부족했는데, 혼례복을 만드는 일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하지만 원가는 이미 일곱째 아가씨를 위해 혼례복을 준비해 두었다. 3년마다 한 번씩 새로 만들었기에, 지금껏 서랍 속에 쌓여 있는 혼례복만 해도 7~8벌이나 되었다.혼수도 일찌감치 마련해 두고, 혼담을 꺼낼 자가 나타나기만 기다리
사식이는 다들 일곱째 고모의 안부를 걱정하지 않는 것이 이상해 의아해하며 물었다.“일곱째 고모께서 편지를 보내신 겁니까?”그러자 셋째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그래. 편지가 왔단다. 며칠 놀다가 곧 경성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구나.”사식이는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일곱째 고모께서 돌아오고 나서 혼담을 꺼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일곱째 고모가 동의하지 않으면 일이 난감해질 텐데요.”노태군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이미 모든 일을 저질렀느넫 이제 와서 동의하지 않는다니? 감히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냥 목을 매겠다!”노태군은 일곱째 고모가 열여덟 살이 되던 때부터 그녀의 혼사를 기다려 왔다. 계속 기다리다가 이미 머리카락이 다 하얘져 버렸지만, 그녀는 아직 혼인 기약조차 없었다. 이번에도 혼사를 정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는게 더 나았다.그녀 뿐만 아니라 모두가 일곱째 아가씨가 빨리 시집가기를 바라고 이씩 때문에, 이 일은 서둘러 진행하기로 했다.“사식아, 네 고모에게 편지를 보내, 내가 갑작스레 병에 걸려 거의 죽게 생겼다고 전해라!”노태군이 단호히 명령했다.딸을 집으로 불러들이기 위해서 스스로 저주까지 불사하는 그녀는 정말 독한 늙은이었다.서일은 탕양을 데리고 서둘러 궁으로 향했다. 중매인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기에, 바로 황후를 찾아가야 했다.소월궁에서 우문호 부부는 탕양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우문호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짐이 보기엔, 일찍 일곱째 아가씨에게 네 마음을 고백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이리 일을 저지를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탕양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고,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갔다. 하루라도 빨리 그녀를 만나지 못한다면 불안에 휩싸여 버릴 것 같았다. 그는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폐하,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하실 때가 아닙니다… 제발 사람을 보내 그녀가 어디 있는지
오래전의 악몽이 마음속에서 되살아나, 탕양은 너무나도 두려웠다. 그녀가 혹시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스스로 뺨을 몇 대 때리고는 다시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아무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으면 죽어도 죄를 씻을 수 없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를 따라잡으려 죽자고 달려도, 끝내 그녀를 볼 수 없었다.그렇게나 빨리 도망간 건가?그렇게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쉬지도 않고 곧장 원가로 달려갔다.마침 서일과 사식이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와 있던 참이었는데, 대문 앞에 도착하니, 탕 대인이 거지처럼 문지기 앞에 쓰러지다시피 주저앉아 먼지투성이의 얼굴에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문지기의 옷깃을 움켜쥔 채 다급히 묻고 있었다. “일곱째 아가씨는? 너희 일곱째 아가씨는 대체… 어디 있느냐?”그러자 문지기는 놀라 얼어붙고 말았다. 그는 이렇게나 사나운 탕 대인을 본 적이 없어 더듬거리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일곱... 일곱째 아가씨께서... 탕 대인과 함께 약도성에 가신 거 아니셨습니까…?”“그럼 아직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탕양이 소리쳤다.“아직... 아직 못 뵈었습니다…!”바로 그때, 서일이 다가와 문지기한테서 탕 대인을 떼어놓으며 말했다.“무슨 일이십니까?! 우선 손부터 놓으십시오. 옷이 다 찢어지겠습니다.”탕 대인은 그만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며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큰일이야… 내가 그녀를 망쳐 버렸네! 죽어도 이 죄를 씻을 수 없을 것이네…!”“무슨 일입니까? 저희 고모께서 지금 어디 계십니까?”사식이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탕 대인은 비참한 표정을 지으며, 눈물 투성이가 된 얼굴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가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모르네… 나는 돌아온 줄 알고 있었네...”바로 그때, 무거운 발소리와 함께 지팡이가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원가의 노태군이 부축을 받으며 다가오는 것이었다! 탕양이 고개를 들자, 노태군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탕
냉정언은 자기도 모르게 죄책잠이 들어 미간을 찌푸렸다.‘이번에 정말 큰일을 저지른 것인가?’그는 그저 탕양에게 술을 먹여 일곱째 아가씨에게 진심 어린 말을 꺼낼 용기를 주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동안 탕양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황제뿐만 아니라 모두가 알고 있었고, 다들 그를 안타까워했었다.탕양은 다섯째가 초왕이었을 때부터 초왕부와 다섯째, 그리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많은 일을 해왔다. 그렇게 반평생을 북당을 위해 헌신했으나, 그를 진정으로 주목한 이는 많지 않았다. 특히 과거에 자신도 용납할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탓에 평생을 스스로도 용서하지 못한채, 조정을 위해 뛰어난 공을 세우고도 관직이나 봉록을 거절하며 죄를 속죄하듯 살았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누구나 실수를 범할 수 있는 법이니까. 탕양은 이미 그 누구보다 훌륭히 잘해왔고, 게다가 정과 의리에 발목 잡힌 것은 많은 영웅이 저지르는 흔한 실수였다. 고금의 역사를 통틀어, 결코 그 혼자만이 저지른 행동이 아니었다.탕양은 일곱째 아가씨와 벗이라는 관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늘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술에 취하지 않은 이상, 맑은 정신으로는 절대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을 것이기에, 술에 취하게 하면, 경성이 아닌 변방의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몇 마디 속마음 정도는 털어놓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하지만 예상외로, 탕 대인의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쌓였던 건지... 만취 상태에서 무슨 일을 저지른 것 같았다. 대체 이 마음을 얼마나 오랫동안 품었던 것일까?상황이 아주 복잡해졌다.‘탕 대인 아주 못 쓰겠구먼! 이를 어찌 마무리 짓는단 말이냐…?!’원가의 상대하기 쉽지 않은 여장군들을 떠올리니, 냉정언은 순간 뒷골이 땡겨 머리를 쥐어뜯었다.그러고 나서 고개를 돌리니, 냉명여가 눈 앞에 서 있었다. 냉명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버지, 탕 대인은 어찌 일곱째 아가씨와 그런 일을 벌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