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불산을 오르며우문호가 갑자기, “맞다, 당신 원래 어떤 모습이었어?”원경릉이 자기 얼굴을 만지며, “비슷했어, 지금보다 약간 키가 컸고 좀더 나이가 들었지만 IQ는 좀 좋았던 편이야.”“아이큐는 또 뭐야?” 우문호가 원경릉의 손을 바꿔 잡는데, 솔솔 불어오는 바람에 추석의 서늘함이 느껴지는 것이 한껏 상쾌하다.“그러니까 고상해 보이고 아는 게 많은 거야.” 원경릉이 말했다.“아, 왕선생같이.” 우문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하지만 왕선생은 눈에 띄게 못 생겼잖아, 아이큐란 게 긍정적인 단어는 아니구나.”원경릉이 ‘어’하더니, “왕선생이 못 생겼다고? 적어도 전진장군보다는 훨씬 잘 생겼는데.”그런데 이 사람들 얘기를 꺼내자 ‘사촌 소형이 제일 잘 생겼다.’ ‘위아래 흰옷을 입고 태도에 품위가 있는 게 약간 영락한 초류향(楚留香)같은 느낌이다.’ 품평이 연달아 나왔다.우문호는 수탉처럼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외모로 따지면 날 따라올 자가 없지.”원경릉은 오늘은 얌전히 시비 걸지 않기로 하고, “그러게, 우리 태자 전하 외모는 독보적이지.” 원경릉이 이 말을 하며 고개를 돌려 우문호를 보니, 확실히 안구가 정화된다.어두운 구름무늬 바탕의 푸른 비단옷을 위아래로 빼 입고 별처럼 찬란한 눈동자, 다문 입술에 초승달처럼 가볍게 떠오르는 미소, 금관을 단정하게 쓰고 있으니 한층 잘 생기고 귀티가 난다. 황실의 기품이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다.완벽한 낭군이다.원경릉이 눈 호강을 하는 중에 자기도 모르게 존경하는 마음이 드는데, 우문호는 갈수록 뻔뻔해 져서 주변에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바람같이 다가와 발그레해 진 원경릉의 볼에 입을 맞췄다.“아효!” 서일이 멀리서 보고 기분 나쁜 걸 못 참고 비명을 질렀다.“너 잡히기만 해봐!” 우문호가 고개를 돌려 씹어 먹을 듯이 서일을 노려봤다.서일은 의식적으로 눈을 가렸는데 어젯밤 두들겨 맞은 얼굴에 아직 멍이 들어 있으므로 안 맞으려면 당분간 조신하게 지내야 겠다고 생
신선에게 빌기를우문호가 원경릉의 말을 듣고 웃으며, “걱정 마, 당신은 마음이 착한 사람이니 신불이 반드시 마음의 소리를 들어 주실 거야, 나로 말 할 것 같으면, 북당의 태평성대와 원경릉과 아이들의 평안, 그리고 우리가 일평생 함께 있길 빌 거야.”서일이 참다못해, “나리, 이런 얘기는 발설하시면 안됩니다. 신선 앞에서 빌어야 지요, 묵념으로.”신선에 참배하는 것도 규칙이 있는데 나리는 모르시나?우문호가 뾰로통하게,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마음에 원하는 걸 큰 소리로 말해야 한다고. 안 그러면 이렇게 많은 사람이 소원을 비는데 신선이 하나하나 사람들의 마음을 추측하다가 피곤해서 죽을 걸? 우리라도 명쾌하게 빌어주면 안돼? 신선들이 일 좀 편하게 하게.”서일이 들어보니 이게 또 일리가 있다. 하지만 일리는 어디까지나 일리일 뿐, 규칙은 규칙이지, 좌우간 여기는 이치를 따지는 곳이 아니니까.하지만 서일은 슬쩍 우문호의 주먹을 보며 생각했다. 나리와는 이치고 규칙이고 다 안 통하고, 그냥 입다무는 게 최고다.산을 오르며 끝없이 펼쳐지는 풍광도 일품이지만, 한 쌍의 그림 같은 부부도 참배객과 문인묵객의 이목을 끄는데, 어떤 사람들은 슬쩍 훑어보고, 어떤 사람들은 대놓고 뚫어지게 보고, 심지어 어떤 여자들은 일부러 우문호의 몸에 쓰러지며 약한 척 우문호가 부축해 주길 기다렸다.하지만 우문호는 여색의 참 맛을 1도 모르는지, 분명 이제 겨우 20대 초반의 나이에 눈살을 찌푸리며, “아주머니, 길을 잘 보고 다니셔야죠, 저랑 부딪힌 건 괜찮지만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은 제 아내한테 부딪히시면 안돼요.”미인은 당황해서 마음이 유리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진 채 얼굴을 가리고 울면서 산을 내려갔다.원경릉은 배꼽을 잡고 웃는다.깔깔 웃고 떠들며 엄청 지쳤지만 정상에 올랐다.정상엔 신전이 한 채 지어져 있는데 모셔진 것이 옥청 신선이다.여기는 참배객이 가장 몰리는 장소로, 빽빽해서 거의 들어갈 틈이 없는데 어떻게 서일이 향을 사와서 불을 붙이더니 손에
경호의 신비원경릉은 옆에 우문호를 보더니 눈물이 났다.우문호도 원경릉을 보고, “좌우간 당신은 이 생에 날 못 떠나.”우문호의 크고 따스한 손이 원경릉의 손을 꽉 감싸주는 것을 느끼며, 따듯하고 단단해서 가슴속이 행복으로 가득차는 느낌이 들었다. “난 자기를 절대 떠나지 않아.”“거래 성립!” 우문호가 갑자기 원경릉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졸지에 부부 두 사람이 초점의 대상이 되었고, 사람들은 부러움과 온정의 눈길로 바라보며 자기들끼리 두런두런 속삭였다. ‘이 부부는 얼마나 다정해’, ‘얼마나 행복해’, ‘얼마나 보기 좋아.’기도하고 나와서 신전 밖을 몇 바퀴 도는데 풍경은 수려하지만 사람이 너무 많다. 어디도 차분한 곳이 없어 우문호가, “옥청전(玉清殿) 뒤에 경호(鏡湖)가 있다 던데 우리 가 보자.”원경릉이 좋아하며, “좋아, 나 산 속에 있는 호수 좋아하는데, 그게 그렇게 그윽하고 아름답더라.”우문호가, “하지만 꼭 볼 수 있는 건 아니야, 거기엔 일년 내내 운무가 자욱해서 본 사람이 극소수 중에 극소수라고.”“그럼 천지(天池)랑 같은 거 아닌가?”“천지? 천지가 뭔데?” 우문호가 원경릉의 손을 잡고 앞으로 가며 물었다.“응, 천지는 천지지. 자기는 가 본적 없어.”“그럼 나중에 나 데리고 가.” 우문호가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막상 말하고 나니 정말 가보고 싶어 졌다. 사실 원경릉이 자신이 모르는 일이나 장소를 언급하면 우문호는 무조건 한 마디를 추가하는데 바로 ‘같이 가자’이다.경호는 신전의 뒤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걸어서 대략 30분 정도로 샛길을 따라 단풍나무 숲을 지나니 이윽고 다다랐다.경치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좋은데, 호수 좌우 90~120평 전체가 단풍나무로 둘러쳐져 있어 지금 마침 가을이라 단풍잎이 붉게 물들었고, 호수는 자욱한 운무에 가려져 있는데 운무는 마치 한덩어리로 움직이는 흰색 화전옥(和田玉) 덩어리처럼 어려서 경호를 감싸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선경인양 느껴지게 했다. 저 운무가 자욱한 곳을
경호가 시공의 입구?서일은 도인이 그들을 가지 말라고 하자 화가 나서, “뭘 잘못 봤다는 거예요? 우리가 분명히 호수에 작은 배가 떠 있는 걸 봤어요, 나중에 가운데로 가는 거까지, 그땐 아마도 아직 뭍에 올라오지 않은 모양이지만 못 믿겠으면 저랑 같이 가서 보시던 가요.”도인이 손을 내젓고 웃으며, “불가능합니다. 모두 분명 잘못 보신 거예요, 저희가 배를 못 타게 하는게 아니라, 아무도 못 띄우는 거예요, 오래 전에 어떤 사람이 경호에 배를 띄웠는데 호수에 들어가긴 했지만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죠.”만아가 겁을 먹고, “어? 물에 빠진 거예요?”도인이 고개를 저으며, “아닌 게 확실합니다. 경호는 1년에 두 번 열리는데 제가 직접 호수에 가서 시체와 배를 찾아봤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산 위에는 배가 없어요, 배를 띄우려 해도 할 수 없지요. 여러분들은 잘못 보신 게 확실합니다.”원경릉이 의심에 차서 눈썹을 치켜 뜨고, “도사님, 우리 네 사람이면 눈이 8개인데 결코 잘못 볼 수가 없습니다. 정말 누가 호수에서 배를 타고 있었어요. 누가 호수에 내려가거나 배를 가지고 왔는데 모르셨던 게 아닐까요?”도인이 웃으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습니까? 경호를 계속 지키고 있는 걸요, 일부 담대한 참배객이 목숨이 아까운 줄도 모르고 기이함에 이끌려 물에 들어가서 노는 것을 막기 위해서지요. 제가 여기서 이미 30여년 있었으나 물에 들어간 사람은 딱 두 명 봤습니다. 이 두사람도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지요, 배도 없어졌습니다. 그 이후로 더는 없었어요. 그래서 경호는 아주 위험하기 때문에 실제로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도인은 사람을 보는 눈이 있어 앞에 이 부부의 신분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상당히 공손한 태도로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경호의 위험을 그들에게 얘기했으며, 그들이 물에 들어가 목숨을 잃을 까봐 걱정했다.원경릉은 도인이 말을 돌리거나 속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방금 작은 배를 본 건 네 명이 동시에 집단적 환각을 본 걸까?
사라진 나뭇잎우문호가,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어, 도사님이 말씀하신 거 못 들었어? 1년에 2번 개인다잖아.”우문호는 화전옥 같은 경호를 보며 마음이 갈수록 혼란스러워져서, “시간 늦었다, 우리 내려가자, 안 그러면 밥 시간 놓치겠어.”원경릉은 마치 여기가 정말 그녀의 고향으로 통할 수 있기라도 하듯 떠나는 것을 아쉬워했다.하지만 우문호는 한사코 원경릉은 발길이 떨어지지 않지만 끌려 가며 작은 오솔길을 지나 모퉁이를 도는데, 딱 한번 더 뒤를 돌아 보는데 운무가 거의 걷혀가고 있었다.얼른 우문호의 손을 꼭 누르며, “자기야 봐, 운무가 곧 사라지는 거 아냐?”우문호가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과연 산바람이 홀연히 불어오며 운무가 점점 걷히고 이미 경호의 한쪽이 드러났다.원경릉은 우문호의 손을 뿌리치고 돌아가는데 우문호가, “그렇게 빨리 뛰지 마.” 소리친다.우문호가 바로 쫓아가서 원경릉의 손을 잡은 건 원경릉이 갑자기 뛰어들 까봐 두려워서 였다.운무가 점점 많이 걷히고 원경릉은 호수가에 서서 짙푸른 경호를 바라보는데 한 조각의 벽옥처럼 아름답다. 정말 너무 아름다워서 순간 넋을 놓고 쳐다봤다.관광객들이 점점 몰리며 경호가 개이는 것에 환호작약했다.우문호가 보기엔 여긴 이상하기 그지없는 곳이라며 투덜대는데,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창공의 흰 구름이 수면 위에 비치지 않는 거야? 아무것도 안 보이네 뭐.”원경릉은 흥분해서 그 점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우문호의 말을 듣고 자세히 보니 과연 짙푸른 물만 보이고 호수가의 어떤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다. 분명 경호 주변엔 수많은 단풍나무가 있고 심지어 푸른 하늘의 흰 구름조차 조금도 호수에 비치지 않는 것이다.하지만 호수는 맑고 투명했다. 적어도 사람이 느끼기엔 그런데 왜 안에 아무런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 걸까?그리고 호수 물결은 거울처럼 산바람이 저렇게 강하게 불어와도 호수 표면엔 한 가닥 작은 물결조차 일지 않았다. 원경릉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손에 단풍잎을 한 장 따서 호수에 던졌다.
경호가 시공간의 입구?모두 놀라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눈이 동그랗게 뜨고 봤는데 단풍잎은 가라앉는 게 아니라 사라졌다.거리가 다소 멀었거나 의식 못한 것도 아니고, 원경릉과 일행은 1m만 앞으로 나가면 호수에 닿을 위치라 똑똑히 봤는데 단풍잎은 가라앉은 게 아니라 바로 사라졌다. 우문호는 한 손으로 원경릉의 손목을 잡고 예리한 눈으로 원경릉의 환희를 보더니 준엄하고 엄숙하게, “만약 겁도 없이 뛰어들 거면 내가 이자리에서 바로 죽어버릴 거야.”원경릉이 황당해 하며 세상 진지한 우문호 얼굴을 보고 실소를 터트리며, “내가 미쳤어? 뛰어들게.”여기가 시공의 입구인지 정확하지도 않고 정말 그래도 뛰어내린다고 자신의 시공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어떻게 알아? 만약 석기시대로 돌아가면 죽도 밥도 아니 게, 북당의 집에도 현대의 집에도 다 못 돌아가는 거잖아.원경릉이 신난 건 ‘SF덕후’로 전에 상당히 많은 시공을 넘나드는 SF소설과 SF영화를 봐서, 지금 정말 시공의 입구가 있다고 밝혀진 거면 완전 대 발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하지만 원경릉도 기대하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은 마음속에 한줄기 희망을 싹틔웠다.원경릉 마음에 유일한 아쉬움은 의약을 연구하는 자이고, 후배도 거의 생물 엔지니어로 그들의 전문 분야가 이쪽이 아니라 두사람이 경호에 대해 더 깊이 연구하지 못한다는 점이다.하지만 중요하지 않지. 원경릉은 지금 모든 것이 가장 좋은 상태로 진행됨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사실 정말 경호에 뛰어내리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원경릉은 다시 돌아올 확신이 없으면 뛰어내릴 리가 없다.만약 우문호 뿐이면 행여 뛰어내릴 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이들이 있고 부모 된 입장에서 제아무리 큰 일도 아이를 떼어놓고는 불가능하다.우문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원경릉에게, “그럼 당신 왜 이렇게 좋아하는데?”“왜냐면 우리가 신기한 걸 발견했잖아, 아니 자기는 안 좋다는 말이야?” 원경릉이 반문했다.우문호는 기쁘지 않은 게 지금
지폐 도둑과 서일의 착각도인이 경악하며 그를 보는데 그 사람도 경악하며 도인을 보더니, 두사람이 서로 마주보며 몇 바퀴를 돌았다.“옥허(玉虛)?”“사숙조?” “너 왜 이렇게 늙었어?”“사숙조께서는 어째서 아직 그렇게 젊으십니까?”원경릉은 우문호와 만나서 천천히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원경릉은 방금 지폐를 꺼내다가 염낭 안에 지폐들이 엉클어져서 꺼내서 정리하는데, 백 냥 짜리 한 장이 없고 대신 원래 신불에 기부하려던 열 냥 짜리는 그대로 있는 걸 발견했다.순간 얼굴이 하얘지며 ‘이런 젠장’ 잘못 기부했네.“왜 그래?” 원경릉이 염낭을 꺼내 지폐를 차곡차곡 접어 넣다가 영혼이 가출하는 모습을 보고 우문호가 물었다.원경릉이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겉으로만 웃는 척, “별 일 아니야, 은자 잃어버린 거 아닌가 봤어.” 우문호가 가져가더니 원경릉 대신 몇 번을 세보는 동안 잽싼 동작으로 한 장을 소매속에 감추고 나머지는 전부 염낭에 쑤셔 넣더니, “다 넣었어, 잘 둬.”원경릉은 여전히 속이 쓰린데 우문호의 은밀한 동작을 봤을 리가 있나? 다행히 원경릉은 안에 은자가 얼마 있었는지 모른 채 받자마자 넣어두었다.우문호는 다시 원경릉의 손을 잡자 서일과 만아가 놀라서 쳐다보는데 우문호는 싸늘한 눈빛과 말투로, “뭘 봐? 어서 빨리 안 가고? 태자비가 배가 고프면 어떻게 할 거야?”말을 마치고 원경릉의 손을 끌고 갔다.서일이 만아와 눈을 마주치더니, “염치 있는 군자께서 도적질이 웬 말인가?”만아도 피식 웃으며, “전하께서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추락하신 걸까요”서일이 한숨을 쉬며, “그러니까, 아내를 얻을 땐 신중해야 한다니까.”왕비처럼 이렇게 인색한 수전노와 결혼하면 나날이 비참하다.만아가 즉시 위로하며, “안심 하세요, 사식 아가씨는 통이 크시거든요.”서일이 만아를 보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앞으로 사식 아가씨와 결혼하면 자연히 상관있어지잖아요.” 만아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서일이 만아의 머리에 꿀밤을 때리며, “너
이세계로 가지마산을 내려가 마차로 휴가지로 돌아가는 동안 우문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서일만 밖에서 경호가 정말 신기하다며 쫑알쫑알 거렸다.원경릉도 아무 말이 없는 게 열광 뒤 깊은 사색이 찾아왔다.원경릉은 여기 온 이래 가족을 그리워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지만 경호의 출현으로 겨우 눌러 놓았던 그리움이 다시금 일어났다.원경릉도 경호에 뛰어내릴 만큼 무모하게 비이성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대다수의 일은 합리적인 방향을 향해 흐르고, 이 말은 반드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 일례로 갔다가 쉽게 돌아오지 못한 사숙조 같은 사람이 있다고 말이다.이런 사람이 존재하고, 경호라는 장소가 존재하기에 틀림없이 집에 돌아가는 일이 완전 꿈이 아니라 미래의 어느 날 실현 가능할 수도 있다는 희망이 점점 커지고 있다.우문호가 한동안 침묵하며 벼르다가 원경릉에게, “다시는 환혼(還魂)하기 전에 일 생각도 하지 마.”원경릉이 우문호에게 기대서, “생각 안 해.”“그 시공은 도대체 뭐야? 저승 입구 아냐?” 우문호가 도저히 모르겠고 모르기 때문에 두렵기도 했다.원경릉이 이렇게 즐거운 건 아마도 경호와 환혼이 관련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원경릉이 웃으며, “왜 그렇게 생각해?”우문호가 울적하게, “내 입장에선 그건 지옥의 입구 같다고.”원경릉은 더욱 우문호에게 찰싹 기대며 가타부타 하지 않은 게, 결국 경호가 시공의 입구인지 확실하지 않고 도인의 말을 다 믿을 수도 없을 뿐더러, 설사 그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어도 사숙조가 스스로 하산했는데 사람들이 사숙조가 경호에 들어갔다고 오해하는 바람에 마지막에 나타났을 때 그가 경호에서 나타났다고 착각한 것이다. 그리고 사숙조가 이세계나 시공의 입구를 언급한 것은 다른 곳에서 주워 들은 것일 가능성이 있으며, 어쩌면 사숙조는 후배와 알고 있을 가능성도 있어서, 후배가 사숙조에게 이세계 시공에 대한 얘기를 했을 수도 있다.이렇게 지금 냉정하게 따져보니 생각이 이성적으로 돌아간다.휴가지에 돌아와서 사식이
혼담을 꺼낸 당일에 모든 일을 결정하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하지만 원가는 세속적인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혼수도 원하는 대로 준비하게 했고, 잔칫상만 제대로 차리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잔칫상은 일곱째 아가씨가 결코 시집을 못 가는 것이 아니라고 세상에 알리는 용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혼인 상대가 황제가 가장 신임받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자리였다.따라서 잔칫상만큼은 빠질 수 없었다.이 부분은 탕양도 문제없이 해결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나름 저축해둔 돈이 있었기 때문에, 잔칫상을 준비하는 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하객 문제에 대해서도, 탕양은 아는 사람이 정말 많았기에 문제없었다. 다른 곳은 말할 것도 없고, 경성에만 백 상 이상은 문제없이 마련할 수 있었다.황제를 곁에서 모시는 자로서, 조정의 문무백관 중 그와 친분이 없는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되겠는가?이 모든 것을 논의한 후, 탕양은 마침내 의문을 물어볼 수 있었다.“노태군, 만약 일곱째 아가씨께서 동의하지 않으면 어찌해야 합니까?”“동의할 것이다. 원가는 혼사를 치르거나 상을 치르거나 내릴 결정을 둘 뿐이니, 그렇게 알고 있거라. 다른 선택은 없다.”노태군이 단호하게 말했다.“그건...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탕양이 초조해하며 말했다. 왠지 일곱째 아가씨를 강요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혼사는 본디 두 사람이 마음이 맞아야 하는 것 아닌가.돌아가는 길에 탕양이 여전히 불안했해 하자, 원경릉이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너무 많은 생각은 하지 말고, 그저 신랑이 될 마음의 준비만 해두시게. 일곱째 아가씨는 원가 식구들이 설득할 것이오.”“그녀가 원하지 않으면 어찌합니까? 곤란하게 하거나, 억지로 결혼하게 해서 그녀가 상처받는 건 싫습니다.”“아가씨도 동의할 것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약도성에서 자네를 뿌리치고 떠났을 것이네. 하지만 곁에 남아 자네를 보살폈잖나? 그것만 봐도 자네에 대한 마음이 있는 것이오.”“정말입니까?”탕양이 놀랐는데, 얼굴에 은은하게 빛이 맴돌았
원경릉은 원가에서 이 혼사를 분명히 찬성할 것이라 생각했다. 노태군이 일곱째 아가씨를 시집보내고 싶어 안달이 난 상황에서 혼담을 꺼내는 것은 단지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원가의 유일한 문제는 일곱째 아가씨 본인이었는데, 그녀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일은 십중팔구 성공할 것이다.역시나, 다음 날 탕양과 함께 원가로 향한 원경릉은 원가에서 심지어 점쟁이까지 청해 두 사람의 사주를 확인하겠다고 하는 것을 보았다.두 사람의 사주를 본 점쟁이는 한참 확인하더니,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두 사람의 사주가 다소 상충합니다.”원 노태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어디가 상충하는가?”“한 사람은 닭띠, 한 사람은 개띠입니다. 이는 닭과 개가 편치 않은 사주라, 혼사를 치른 후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노태군은 탁자를 쾅 치며 말했다.“그럼 바꾸면 되지! 이제 보니 우리 딸은 말띠다. 방금 헷갈렸었다.”“말띠요? 말띠라면 괜찮습니다. 말띠는 올해 연분이 따르는 해 입니...”노태군은 점쟁이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괜찮다니 됐다. 이제 길일을 골라주게.”그러자 점쟁이는 다시 손을 펴고 계산하더니 말했다.“올해 좋은 날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무리 빨라도 연말쯤이어야...”“좋다. 이번 달 15일로 하지. 보름달이 뜨는 날, 사람도 오붓이 모이는 날이니, 좋지 않겠나?”점쟁이가 책자를 닫고,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예.”혼사는 원가에서 준비하니, 제시간에만 준비 된다면 안 될 것도 없었다.15일까지 남은 시간은 단 5일, 원가에서 딸을 시집보내는 일을5일 안에 끝낼 수 있을까 걱정 되었다. 준비할 시간도 아직 부족했는데, 혼례복을 만드는 일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하지만 원가는 이미 일곱째 아가씨를 위해 혼례복을 준비해 두었다. 3년마다 한 번씩 새로 만들었기에, 지금껏 서랍 속에 쌓여 있는 혼례복만 해도 7~8벌이나 되었다.혼수도 일찌감치 마련해 두고, 혼담을 꺼낼 자가 나타나기만 기다리
사식이는 다들 일곱째 고모의 안부를 걱정하지 않는 것이 이상해 의아해하며 물었다.“일곱째 고모께서 편지를 보내신 겁니까?”그러자 셋째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그래. 편지가 왔단다. 며칠 놀다가 곧 경성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구나.”사식이는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일곱째 고모께서 돌아오고 나서 혼담을 꺼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일곱째 고모가 동의하지 않으면 일이 난감해질 텐데요.”노태군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이미 모든 일을 저질렀느넫 이제 와서 동의하지 않는다니? 감히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냥 목을 매겠다!”노태군은 일곱째 고모가 열여덟 살이 되던 때부터 그녀의 혼사를 기다려 왔다. 계속 기다리다가 이미 머리카락이 다 하얘져 버렸지만, 그녀는 아직 혼인 기약조차 없었다. 이번에도 혼사를 정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는게 더 나았다.그녀 뿐만 아니라 모두가 일곱째 아가씨가 빨리 시집가기를 바라고 이씩 때문에, 이 일은 서둘러 진행하기로 했다.“사식아, 네 고모에게 편지를 보내, 내가 갑작스레 병에 걸려 거의 죽게 생겼다고 전해라!”노태군이 단호히 명령했다.딸을 집으로 불러들이기 위해서 스스로 저주까지 불사하는 그녀는 정말 독한 늙은이었다.서일은 탕양을 데리고 서둘러 궁으로 향했다. 중매인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기에, 바로 황후를 찾아가야 했다.소월궁에서 우문호 부부는 탕양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우문호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짐이 보기엔, 일찍 일곱째 아가씨에게 네 마음을 고백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이리 일을 저지를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탕양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고,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갔다. 하루라도 빨리 그녀를 만나지 못한다면 불안에 휩싸여 버릴 것 같았다. 그는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폐하,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하실 때가 아닙니다… 제발 사람을 보내 그녀가 어디 있는지
오래전의 악몽이 마음속에서 되살아나, 탕양은 너무나도 두려웠다. 그녀가 혹시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스스로 뺨을 몇 대 때리고는 다시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아무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으면 죽어도 죄를 씻을 수 없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를 따라잡으려 죽자고 달려도, 끝내 그녀를 볼 수 없었다.그렇게나 빨리 도망간 건가?그렇게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쉬지도 않고 곧장 원가로 달려갔다.마침 서일과 사식이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와 있던 참이었는데, 대문 앞에 도착하니, 탕 대인이 거지처럼 문지기 앞에 쓰러지다시피 주저앉아 먼지투성이의 얼굴에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문지기의 옷깃을 움켜쥔 채 다급히 묻고 있었다. “일곱째 아가씨는? 너희 일곱째 아가씨는 대체… 어디 있느냐?”그러자 문지기는 놀라 얼어붙고 말았다. 그는 이렇게나 사나운 탕 대인을 본 적이 없어 더듬거리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일곱... 일곱째 아가씨께서... 탕 대인과 함께 약도성에 가신 거 아니셨습니까…?”“그럼 아직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탕양이 소리쳤다.“아직... 아직 못 뵈었습니다…!”바로 그때, 서일이 다가와 문지기한테서 탕 대인을 떼어놓으며 말했다.“무슨 일이십니까?! 우선 손부터 놓으십시오. 옷이 다 찢어지겠습니다.”탕 대인은 그만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며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큰일이야… 내가 그녀를 망쳐 버렸네! 죽어도 이 죄를 씻을 수 없을 것이네…!”“무슨 일입니까? 저희 고모께서 지금 어디 계십니까?”사식이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탕 대인은 비참한 표정을 지으며, 눈물 투성이가 된 얼굴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가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모르네… 나는 돌아온 줄 알고 있었네...”바로 그때, 무거운 발소리와 함께 지팡이가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원가의 노태군이 부축을 받으며 다가오는 것이었다! 탕양이 고개를 들자, 노태군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탕
냉정언은 자기도 모르게 죄책잠이 들어 미간을 찌푸렸다.‘이번에 정말 큰일을 저지른 것인가?’그는 그저 탕양에게 술을 먹여 일곱째 아가씨에게 진심 어린 말을 꺼낼 용기를 주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동안 탕양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황제뿐만 아니라 모두가 알고 있었고, 다들 그를 안타까워했었다.탕양은 다섯째가 초왕이었을 때부터 초왕부와 다섯째, 그리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많은 일을 해왔다. 그렇게 반평생을 북당을 위해 헌신했으나, 그를 진정으로 주목한 이는 많지 않았다. 특히 과거에 자신도 용납할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탓에 평생을 스스로도 용서하지 못한채, 조정을 위해 뛰어난 공을 세우고도 관직이나 봉록을 거절하며 죄를 속죄하듯 살았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누구나 실수를 범할 수 있는 법이니까. 탕양은 이미 그 누구보다 훌륭히 잘해왔고, 게다가 정과 의리에 발목 잡힌 것은 많은 영웅이 저지르는 흔한 실수였다. 고금의 역사를 통틀어, 결코 그 혼자만이 저지른 행동이 아니었다.탕양은 일곱째 아가씨와 벗이라는 관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늘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술에 취하지 않은 이상, 맑은 정신으로는 절대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을 것이기에, 술에 취하게 하면, 경성이 아닌 변방의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몇 마디 속마음 정도는 털어놓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하지만 예상외로, 탕 대인의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쌓였던 건지... 만취 상태에서 무슨 일을 저지른 것 같았다. 대체 이 마음을 얼마나 오랫동안 품었던 것일까?상황이 아주 복잡해졌다.‘탕 대인 아주 못 쓰겠구먼! 이를 어찌 마무리 짓는단 말이냐…?!’원가의 상대하기 쉽지 않은 여장군들을 떠올리니, 냉정언은 순간 뒷골이 땡겨 머리를 쥐어뜯었다.그러고 나서 고개를 돌리니, 냉명여가 눈 앞에 서 있었다. 냉명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버지, 탕 대인은 어찌 일곱째 아가씨와 그런 일을 벌인
탕양은 지금까지 살면서 술에 취해 저지른 잘못이 단 하나뿐이었다. 비록 그 일도 나중에 사실이 아니었음이 밝혀졌지만, 그 일로 그는 술에 취하면 정말로 이성과 기억을 잃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렇기에 그 후로 술을 마시더라도 되도록이면 취하지 않게 애썼다. 하지만 어젯밤은 예외였다. 그는 이곳 사람 모두를 믿고 있었기에 경계를 풀었던 것이다.남녀 간의 일도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가 되어서 어젯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의부님! 의부님!"바로 그때, 문밖에서 호명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탕양은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호통쳤다."일단 들어오지 말거라!"그는 급히 이불을 걷어내고, 바닥에서 옷을 찾아 황급히 입은 후, 이마를 문지르며 정신을 가다듬은 뒤에야 문을 열어 주었다.문밖에서 호명이 물었다."이제 막 일어나신 겁니까? 아직도 취기로 힘드십니까?"탕양은 머릿속이 어지럽고 복잡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답했다."괜찮다. 무슨 일이더냐?""식사하시라고 부르러 왔습니다. 아! 일곱째 아가씨께서 경성으로 돌아간 것을 알고 계십니까? 같이 가실 줄 알았는데 먼저 떠나셨더군요.""… 돌아갔다고?!"탕양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예!"호명이 그의 얼굴을 보다가 잠시 멈칫하며 말했다."의부님… 혹시 어젯밤 누구에게 맞으셨습니까?"탕양은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만져 보았는데, 그제야 얼굴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황급히 동경을 찾아 얼굴을 비춰보았는데, 왼쪽 뺨에 여러 개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누군가에게 뺨을 맞은 것 같았다.그러자 어렴풋이 한 여인이 세게 뺨을 때리며 욕설을 퍼붓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떠올랐다.하지만 여전히 머릿속이 텅 비어 있어 창백해진 안색으로 생각에 잠겼다.‘설마 내가 취기를 빌어... 그래서 떠난 것이었구나...’이번 사건은 목숨을 내놓고 속죄해도 부족할 정도였다."말을 준비하거라! 어서!"탕양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소리
연회는 계속 진행되었고, 냉정언은 술잔을 들고 계속 탕양에게 술을 권했다. 잔을 몇 번이나 주고 받자, 탕양은 머리가 머리가 어지러워져 말조차 똑바로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연회가 끝난 후, 냉정언이 일곱째 아가씨에게 말했다."술을 꽤 마셨다 보니, 탕양이 좀 취한 것 같네. 정원에 나가 산책을 조금 하면서 술기운을 가시는 것이 어떻소?"일곱째 아가씨도 약간 취한 상태였기에, 바람을 쐬며 땀을 내면 술이 깰 것 같다며 동의했다."예. 그럼 다들 돌아가서 쉬시지요. 제가 호명과 함께 탕 대인을 돌보겠습니다.""좋소. 수고하시게나!"냉정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자, 어서 돌아가시게!"그렇게 사람들은 모두 새가 흩어지는 것 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일곱째 아가씨는 호명과도 함께 산책할 생각이었는데, 빠르게 사라지는 그들의 모습이 어이가 없는듯 웃음을 터뜨렸다.그러고는 탕양의 붉게 상기된 얼굴을 보고 물었다."괜찮습니까? 걸을 수 있겠습니까?"그러자 탕양이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났는데, 술에 많이 취한듯 몸을 심하게 휘청거렸다."어찌 못 걷겠습니까? 취하지 않았습니다!""예. 그럼, 몇 걸음 더 걸어보시지요. 정말 못 걸으시겠으면 방으로 돌아가 쉬시고요. 취기를 덜어줄 탕을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그러자 탕양은 허리에 손을 얹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나갔다. 곧게 뻗은 직선을 그리며 터벅터벅 걷고는 뒤돌아 일곱째 아가씨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보시지요. 얼마나 똑바로 걷는지! 안 취했습니다. 이제 믿을 수 있습니까?"일곱째 아가씨는 그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하하하. 예, 안 취하셨네요. 그럼 이만 나가서 함께 산책하시지요."그녀는 그가 오래 걷지 못할거라고 생각해, 방으로 데려가 쉬게 하기로 했다.역시나 문을 나서자마자 탕양은 난간을 붙잡고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하도 휘청거리는 탓에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기에, 일곱째 아가씨는 결국 어쩔 수 없이 그를 부축했다.그러자
"탕 대인이 저를 예쁘다고 말해 주셔서 정말 기쁩니다. 그러니 일곱째 아가씨께도 예쁘다고 말해 보십시오. 분명히 기뻐하실 것입니다!"하지만 탕 대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다를 겁니다. 일곱째 아가씨는 이제 그런거에 좋아할 나이를 지났습니다. 지금 그녀에게 예쁘다고 말하면, 그저 무미건조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어찌 그럴 리 있습니까? 누구나 칭찬받는 것을 좋아하는 법입니다. 탕 대인, 대인께서 정말 재능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십니까?"탕 대인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예? 하하하. 그렇습니까?""예! 모두가 그렇게 말했습니다!"탕 대인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미소를 지었다."과찬입니다.""기분 좋으십니까?"택란이 묻자 탕 대인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뜻을 알아차리고 멈칫하며 말했다."이 녀석!"택란은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탕 아저씨도 누군가에게 꼭 사랑받으시길 바랍니다."탕 대인은 이 말에 크게 감동해서 택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예. 고맙습니다."저녁엔 계약이 성공한 기념으로 연회가 열렸다.소박한 술자리긴 했지만, 커다란 술통들이 준비되어 있어 모두 마음껏 마시며 즐길수 있었다.택란은 술을 마시지 않기에, 주 아가씨가 매실청을 대신 준비해 주었다. 새콤달콤한 맛이 택란의 마음에 쏙 들었다.술잔을 주고받으며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모두 패기 있게 약도성을 북당에서 제일가는 도성으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다.일곱째 아가씨는 벌써 독산을 어떻게 개발할지부터 고민하고 있었는데, 독산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막막했기에 사람들에게 의견을 구하기 시작했다.각자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지만 대부분이 경치를 개발하자는 내용이었다.반면, 택란은 새로운 생각을 제안했다. 독산에 온천이 있으니 오두막을 지어 온천을 끌어들여 돈을 받고 여러 개의 탕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냐며, 온천수가 몸에 좋다는 점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자고 제의하였다.택란의 생각은 이 시절
탕양은 자신이 여자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고 자부했었다. 특히 일곱째 아가씨처럼 강인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삶을 더 선호하기에 굳이 자신과 인연을 맺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는 그의 큰 착각이었다.여인의 마음은 늘 갈대처럼 변덕스럽고, 아무리 강인한 사람이라도 다정함이 필요한 순간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일곱째 아가씨는 오랫동안 혼자 외롭게 지내왔는데, 중년에 접어들며 그 외로움이 더욱 깊어진 것이다.누군가 곁에 있다면, 삶의 방식도 달라질 수 있지만, 물론 잘못된 연으로 나빠질 가능성도 있었다.원가의 가훈은 항상 군주에게 충실하며, 엄청난 용기도 있었다. 심지어는 원가에서 키운 닭조차 남의 집의 닭보다 더욱 용감할 정도였다.하지만 한 번의 좌절로 인해 사랑을 믿지 않겠다는 것이 과연 용기있는 행동 일까?물론 그녀가 반드시 탕양을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 다시 한번 용기를 내볼 수도 있었다.하지만 탕양이 먼저 용기를 내어 말한다면, 그녀 역시 그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여태껏 그녀의 마음에 들어온 사람은 오직 탕양뿐이었다.그리고 어쩌면 시도해 봐야만 서로 맞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탕양과 잘 맞는다고 느끼는 건 그녀가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아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착각일지도 모르니 말이다.경성으로 돌아간 후에도 탕양이 말을 꺼내지 않는다면, 그녀는 공개적으로 구혼에 나설 생각이었다. 한편, 택란이 주 아가씨와 함께 밖으로 나가며 물었다."탕 대인이 왜 나쁜 사람인 것이오?""여인을 훔쳐봤습니다.""탕 대인이 아가씨를 좋아하지 않소? 어찌 못 보는 것이오?"주 아가씨는 택란이 이런 부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공주에게 가르쳐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사내가 여인을 사모하면 상대의 시선을 바라보지, 다른 곳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그러니 탕 대인은 일곱째 아가씨를 사모하는 것이 아닙니다.""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