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공부인에 대한 처방우문호는 서두르지 않았다.기왕 돌파구를 찾았으니 늙은이가 승낙하지 않는 건 두렵지 않다.대주씨와 소주씨도 같이 따라 들어가고 주후덕과 적위명 및 다른 주씨 집안 사람들은 밖에서 우문호에게 인사했다.적위명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우문호에 대한 적의는 드러내지 않는 대신 상대도 하지 않고 주후덕과 우문호가 얘기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원경릉이 주국공, 주씨 자매와 방에 들어가니 국공부인은 아직 주무시고 곁에 시중드는 계집종이 있다.원경릉이 가서 들여다보니 국공부인이 설령 숙면을 취하고 있지만 얼굴색이 창백하고 앞머리가 푹 젖어 고통이 얼마나 사람을 괴롭혔는지 알 수 있었다.그리고 얼굴엔 가벼운 부종이 있고 손발도 그런데 살짝 눌러도 한동안 다시 튀어나오지 않았다.그런데 원경릉이 손을 뻗어 누를 때 국공부인이 깨셨다.국공부인은 잠결에 원경릉을 보고 알아보지 못해 멍하니 있자 소주씨가 얼른 나와서 “어머니, 이 분은 태자비 마마신데 어머니 병을 봐주러 오셨어요.”국공부인이 태자비라는 말을 듣고 몸부림을 치고 일어나 예를 취하려 하자 원경릉이 부인의 어깨를 누르며, “부인, 누운 채로 움직이지 마세요.”주국공이 “맞아, 당신은 누워, 방금 내가 대신 예를 갖췄어.”국공 부인이 힘없이 웃으며, “대신 예를 취해 줬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네요.”“있다면 있는 거야!” 주국공이 으름장을 놓았다.국공부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살짝 잔소리를 섞어, “난폭하게 왜 그러세요, 예의 잊으셨어요?”주국공이 고개를 흔들며 떳떳하게 큰소리로 “방금 밖에서 엎드려 절하는 예를 올렸어, 전혀 난폭하지 않았네. 못 믿겠으면 태자비 마마께 여쭤보든지.”국공부인이 빙그레 웃으며 자애롭고 따스한 얼굴빛으로 원경릉에게 “태자비 마마 언짢게 여기지 마세요, 남편이 원래 저런 성격이라 혹시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이 몸이 대신 사과 드리겠습니다.”원경릉이 미소 짓고 앉으며, “괜찮습니다 부인, 예를 취하고 사과하는데 시간 다 가겠어요. 저는 부인의 병을
결석을 치료하는 원경릉원경릉이 마음속으로 그녀가 적위명의 부인임을 알아보았으나, 오늘은 외부 사람이 많고 주씨 집안은 유전자가 강해서 서로 상당히 닮은 데다 원경릉이 오늘 자세히 볼 겨를이 없어 잘못 봤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물어본 것이다.대주씨는 “제 남편 집안은 적씨입니다.”그렇다면 틀림없다. 원경릉이 허리를 곧게 펴더니 담담하게 “대장군 부인이시군요? 원판과 어의가 와서 국공부인에게 약을 쓸 때 부인께서는 의심하고 질문하셨습니까? 부인의 태도는 어찌 이리 차이가 나는 지요?”“그건……”원경릉이 다시, “그리고, 부인은 치료할 방법이 있으십니까?”대주씨가 입을 삐죽거리며, “저에게 방법이 있었으면 벌써 했지 태자비 마마까지 번거롭게 했겠습니까?” 원경릉이 약상자를 열고 아무렇지도 않게 “방법이 없으시면 문외한이니 그저 서서 지켜 보시면 됩니다. 그렇게 물어 대면서 시간 뺏지 마시고요. 아셨어요?”대주씨가 불쾌한 어조로 차갑게 “그렇게 말하지만 마마께서 쓰는 약을 우린 본 적도 없는데 몇 마디 좀 물어보면 안됩니까? 만약 약을 잘못 쓰거나 안 맞으면 노인이 그냥도 고통으로 힘들어 하시는 것을, 딸 된 도리로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모릅니다.”원경릉이 반문하며 “물어보실 수 있죠, 하지만 의심하고 질문하지 마세요, 원판이 와서 국공부인의 병을 봤을 때는 의심하고 물어보지 않았지만 약효가 없었고, 국공부인은 여전히 고통스러우셨습니다. 그때 뭐라고 하셨나요? 제가 드린 약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 국공부인께서 제 진통제를 드신 것을 대주씨께서 직접 보지 않았습니까?”“그게 어떻게 같아요? 원판은 태의원의 수장이라 권위가 있잖아요, 그리고 진통에 대해서도 태자비 마마께서 그러지 않았나요? 잠깐일 뿐이라고. 약효가 지나면 여전히 아플 거라고요.” 대주씨가 반발하며 차갑게 말했다.원경릉이 손을 내려놓고, “그래서 제가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는 것을 반대하시나요?”대주씨는 잠시 있다가 담담한 얼굴로 “그냥 자세히 여쭤봤을 뿐입니다. 반대한다고
국공부인 치료의 대가?“예,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원경릉은 주국공이 수액이란 방식을 얘기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다시한번 강조하면서, “약물은 다릅니다. 왜냐면 병이 다르니까요.”주국공이 ‘아아’ 하더니 국공부인 곁에 앉아 가는 목소리로 “아직도 아파?”“안 아파요, 배는 좀 쑤시고 팽팽하지만.” 국공부인이 부드럽게 말하고 원경릉을 보고 감격해서 “태자비 마마 정말 감사합니다. 늙은 몸이 다시 한번 살아났습니다.”원경릉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고, “부인, 철저하게 낫게 해야 합니다. 아직 시간이 걸려요, 감사는 그때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국공부인이 주국공을 보고, “나중에 태자비 마마께 제대로 감사인사해 주세요 아셨죠?”“알았어.” 주국공이 대답하는 모습이 말 잘 듣는 아이 같다.수액 반 병 정도 떨어진 뒤 노부인이 용변을 보고 싶다고 해서 소주씨가 얼른 와서 돕는데 화장실이 밖이라 국공부인은 아직 수액을 꽂고 있다고 원경릉이 나가지 못하게 하자 요강을 들여와서 원경릉은 잠시 자리를 피했다.잠시 후 원경릉이 다시 들어와서 “어때요?”국공부인이 표정이 한결 후련하고 편안하게 원경릉에게 고맙다고 몇 번이고 얘기했다.주국공은 이 때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낙담해서 한숨을 쉬며 국공부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런데 한숨을 쉬고 나더니 주국공의 표정이 편안해 졌다.수액이 다 들어가고 원경릉이 복용할 약을 남기고 내일 다시 오겠다고 했다.주국공이 원경릉을 본관 바깥까지 배웅하니 우문호가 둘이 나오는 것을 보고 일어나 묻길 “어떠셔?”원경릉이 “잠시 통증은 멈췄어요, 전 내일 다시 오고요.”우문호가 주국공과 다른 사람들에게 예를 취하고, “그럼, 우린 먼저 가보겠습니다.”주국공이 당황해서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은 말투로, “태자 전하께서는 저와 나눌 일이 있지 않으십니까?”우문호가 놀라며, “무슨 일이지요?”주국공이 앉아서 콧방귀를 뀌며 “척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하께서 태자비 마마를 데려와 제 아내의 병을 치료하신 것은 목적이
딸을 내친 주국공과 귀신을 보는 태상황적위명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불편했다. 게다가 이 말은 주씨 집안 사람들 앞에서 한 말이라 적위명의 체면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주국공은 아직도 적위명을 그때의 애송이로 생각하는 것이다.하지만 적위명은 장인의 성격이 욱하다는 것과 지금은 정말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것을 알고 조용했으나, 대주씨는 적위명을 위한답시고, “아버지,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가 있어요? 사위는 다 아버지를 위해서 저들의 계략에 당할 까봐 걱정돼서 그런 건데. 아버지는 원래 정사에 상관하지 않고 줄도 서지 않잖아요. 그런데 만약 어머니의 병을 약점으로 잡혀서 태자 쪽에 서라고 압박을 받으면 안왕 전하는 어떻게 하시려고요?”주국공의 얼굴이 어두워지며 노기가 등등하여 눈을 부라리며 대주씨에게, “태자 전하와 안왕 전하가 대립하는 것이냐? 태자 전하는 황태자로 다음 대통을 이을 자인데 네 말 대로 안왕 전하가 태자와 적이면, 안왕이 역모를 꾀하는 역신이란 것을 암암리에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밤새 무슨 소리를 했는지 모르겠으나 입으로 똥을 쌌겠지. 이 말이 만약 밖으로 새나가는 날엔 네가 안왕을 죽이는 꼴이다. 내가 안 그래도 방금 널 욕하려고 했다. 태자비께서 야심한 밤에 와서 네 어미의 병을 치료하고 있는데 감사하단 말은 일언반구도 없이 터무니없이 못살게 굴고 방해를 해, 도대체 뭐하는 짓거리야? 무슨 짓거리냐고 어? 알고 싶지도 않다!”대주씨가 굴욕적이란 얼굴로 길길이 날뛰며 “아버지, 딸이 아버지를 위해 생각해드렸는데 뭘 그렇게 화를 내십니까? 사위와 제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세요?”주국공이 매정하게 “너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면 인성이 삐뚤어져도 한참 삐뚤어졌어. 너희는 필요 없다 돌아가거라.”말을 마치고 주국공은 자리를 떠나 나갔다.남은 대중들은 순간 난감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 주국공이 적위명에게 이렇게 대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밤 이렇게 불호령을 내리니 다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한편, 우문호 부부
태상황의 설사원경릉이 예하고 약상자를 들고 들어갔다.태후와 호상궁이 침전에서 시중을 들고 어의도 있다. 태상황은 침대에 누워 눈을 크게 뜨고 있는데, 두 눈에 초점이 없고 침대 맡을 보며 힘껏 손을 휘 저으며, “저리가, 과인에게서 떨어져, 내 목숨을 찾으러 온 거냐? 두 나라가 싸우는데 네가 죽지 않으면 과인이 죽어. 이건 만고불변의 법칙이 아니냐, 꺼져, 썩 꺼지란 말이다!”태후가 눈물을 흘리며 다급하게 “이런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사람이 어디 있다고요? 누가 죽인다고 그래요? 아이고!”우문호가 와서 태후를 부축해 일으키며 다독이길 “황조모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을 겁니다. 원 선생이 진찰하게 두죠.”태후가 눈물을 닦으며 원경릉을 흘깃 보고, “어서 와서 좀 보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니? 뭐에 씐 건 아니겠지?”원경릉이 대답하길 “황조모 서두르지 마시고, 제가 우선 좀 볼 게요.”원경릉이 가서 보니 태상황의 피부가 건조하고 눈두덩이 깊이 패인데다 입술이 말라서 갈라진 것이 확실이 탈수 증상이다.검사해보고 어의에게 몇 마디 물어보더니 일단 수액을 걸었다.태상황은 여전히 몽롱한 가운데 귀신이 어쩌고 저쩌고 웅얼거리고 있고, 원경릉은 사람을 시켜 뜨거운 물을 가져오게 해서 알약을 몇 알 먹이는데 굉장히 협조적이라 꿀꺽 삼키더니 원경릉이 전해질을 열어서 마시게 하자 다 마시고 드러눕더니 잠이 들었다.잠시 후 태상황의 눈에 점점 초점이 잡히더니 원경릉을 보고 마치 막 일어난 듯, “왔냐?”원경릉이 태상황에게, “뭘 아무거나 드신 거예요? 어쩌다 설사를 하신 건데요?”“아무것도 안 먹었어, 하루 세끼 전부 네가 얘기한 대로 담백한 음식 위주로.” 태상황이 무고한 사람을 의심한다는 눈빛이다. 설사로 살이 홀쭉해 져서 눈이 더 커 보이는데 의외로 약간 멋진 느낌도 있어, “별것도 안 먹었는데 설사를 하다니, 어떻게 그렇게 재수가 없지? 하여간 나이는 못 속인다니까.”상선이 살금살금 앞으로 나오더니 비리를 까발리는데, “그게 별 거도 안
“왜 이렇게 잔소리가 심해? 지금이 몇 시인데 이 소란이라는 말이다! 과인은 죽지 않을 것이니! 여기서 내 심기를 건드리지 말고 빨리 돌아가거라!” 태상황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사람들을 내쫓았다. 태후는 태상황의 성화에 못 이겨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걱정이 되는 표정으로 상선에게 그를 잘 돌보라고 언지를 주었다. 명원제는 태상황이 버럭 소리 지르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많이 놓였다. “두 사람은 건곤전에 있다가 내일 아침에 돌아가거라.” 명원제가 우문호와 원경릉에게 말했다.“예.” 우문호가 대답했다. 명원제가 돌아서자 주황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경릉은 나한 침상을 가리키며 우문호에게 말했다.“지금은 내가 태상황님을 볼 테니 넌 눈 좀 붙여.”“나 안 졸려. 나도 네 옆에 있을게.”태상황은 살짝 눈을 떠 그들을 보았다.“찰떡이는 좀 어떤가?”“괜찮습니다. 병도 다 나았고 요즘 살도 붙어서 통통합니다.” 원경릉이 태상황의 이불을 덮어주며 대답했다.“다행이구나. 그럼 나중에 데리고 와서 이 늙은이에게 보여주렴.”“예, 태상황님 눈 좀 붙이세요. 아직도 어지럽고 환각이 보이십니까?”“약간 어지러운데…… 환각이 아니야. 분명 귀신이었어. 듣자니 사람이 죽기 직전엔 귀신을 본다는데 짐도 머지않아 죽는다는 소리겠구나. 그렇지?”“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 태상황님은 건강하시다고요!” 원경릉이 말했다.태상황은 그녀의 말은 귓등으로 듣지 않았다. “사람은 다 죽는다. 과인의 나이도 적지 않으니 곧 죽어도 이상할게 없다. 요즘은 하루하루가 너무 빠르다.”태상황의 담담한 목소리에 원경릉과 우문호는 슬퍼졌다. “황조부, 칠순 팔순까지 살아계셔야 합니다. 그만큼 살면 염라대왕도 감히 황조부를 데리고 갈 수 없을 겁니다. 백만 년 천만 년 사셔야 하니까 그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우문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허허, 네가 지금 과인을 가지고 노는 것이냐? 그러다 과인이 귀신이 되어 백만 년 동안 이승에 돌아다니면 어쩌려고?” 태상황
태상황은 천천히 눈을 감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죽을 때가 다가오니까 시간이 너무 아까워.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하루를 값진지 모르고 살았다. 젊을 때는 시간이 넘쳐나는 줄만 알았어. 늙고나니 알게됐어. 하루에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말이야. 그 시간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시간이었어.”원경릉은 태상황의 손을 잡았다. 태상황은 천천히 눈을 치켜들고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루완(落蠻)아 잘 지냈느냐?”우문호와 원경릉은 넋 나간 표정으로 태상황을 바라보았고 상선은 온몸을 덜덜 떨며 애써 눈물을 삼켰다. 태상황의 눈도 서서히 감겼다. 태상황은 탈수가 심해서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지만 약을 복용해 잠깐 기운이 생겼던 것 같았다. 그는 약 기운이 사라지자 어느새 잠이 들어버렸다. 원경릉은 조용히 상선에게 “루완이 누구입니까?” 라고 물었다.상선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저으며 눈짓으로 태상황 쪽을 가리켰다. 아니나 다를까 태상황이 다시 눈을 뜨고 원경릉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환각을 보셨습니까?”“방금 네가 뭐라고 했는데……”“태상황님, 소인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그럼 방금 네가 들은 게 환청이라는 건가……” 태상황이 어리둥절했다. 원경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상선을 보고 눈을 찡긋했다.세 사람은 태상황의 옆을 지키다가 그가 코고는 소리가 들리자 상선이 원경릉에게 손짓을 해 나한 침상 쪽으로 가자고 했다. 우문호는 상선의 부름에 한달음에 달려갔다.‘도대체 루완이 누구인 거지? 왜 황조부께서 환각을 볼 때 그를 보았던 걸까?”상선은 두 사람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루완이라는 사람은 소요공의 사부로 사람들은 루신(落神)이라고 부르며, 태상황님께서 그녀를 처음 알았을 때는 소후부(蘇侯府)의 세 번째 아가씨였습니다.”“여자라고요? 황조부님 입에서 여자의 이름이 나온 겁니까?” 우문호가 깜짝 놀랐다. 황조부의 후궁은 매우 적었고, 실제로 봉호를 받은 사람은 황조모
“그 당시의 일은…… 부에서도 잘 몰랐습니다.” 상선이 망설였다. 우문호는 상선이 뭔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황실의 비밀이기에 말하기 어려워한다는 것을 알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것은 황실의 오래된 일일뿐 현재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인생의 절반 넘는 세월이 지났는데 이제 와서 왈가불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당시의 일은 영원히 묻혀야 한다. 다음 날 태상황은 자기가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도 못하는 듯 정신을 차리자마자 밥을 먹자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며칠 동안 고기를 먹지 않아 배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하인에게 고기를 내어오라고 하자 원경릉이 태상황에게 안된다고 말하며 지금은 죽만 먹어야 한다고 했다.“너는 정말 야박하구나!” 그는 원경릉에게 욕을 퍼부었다. 정신이 원래대로 돌아온 태상황을 보며 원경릉은 사람이 나이가 먹으면 일찍이 기억 저편에 있던 사람이나 사건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틀날 정오가 지난 시간, 원경릉은 태상황에게 링거를 두 병 놓고 궁을 나왔다. 우문호와 원경릉은 출궁을 하고 나서야 진정정 내외가 생각났다. 두 사람은 손님을 불러놓고 제대로 접대하지 못한 것 같아서 내심 진정정 내외에게 미안했다. 두 사람은 왕부에 도착하자마자 진정정 내외에게 사과를 했다. 진정정은 그 두 사람이 어젯밤에 주국공부에 갔다가 태상황이 편찮다는 말을 듣고 입궁했다가 지금 왕부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태자비, 저희는 신경 쓰지 마세요 정말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무슨 날입니까? 왜 이렇게 아픈 사람이 많습니까?” 진정정이 말했다.“누가 또 아픕니까?” 원경릉이 물었다. 옆에 있던 사식이가 “희상궁님이 아프세요.” 라고 말했다. “괜찮아지지 않으셨어? 어제도 같이 국공부에 가셨었는데?”“괜찮아졌죠. 근데 어찌 된 일인지 어젯밤부터 또 열이 나셨습니다. 아까 조어의의 해열 약을 드셨는데 그 후로는 좀 열이 떨어지신 것 같습니다.” 사식이가 말했다.“정말 열이 가신 것
원경릉은 어두운 풀숲에서 이 장면을 보고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가 정말 주문이라도 걸고 있는 걸까?능력 조종은 몸과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 처음 능력을 얻었으니, 분명 머릿속이 복잡할 것이다. 그래서 능력을 제어하지 못하고, 게다가 억제제도 조금 효과가 있기 때문에, 능력을 사용하기가 더 어려울 것이었다.그녀는 이 바보가 너무 안타까웠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믿지 않는 척했지만, 몰래 나와서 시험해 보는 그를 보니 속상했다.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밖으로 걸어갔다."다섯째!"우문호는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표정은 어쩔 줄 몰라 당황했으며, 손가락을 뒤로 숨기려 했다."아니... 언제 온 것이오?"원경릉이 답했다."호숫가에 서 있기에 온 것이오. 혹시 오늘 밤 내가 말한 걸 시도해 보려고 하는 것이오?"그녀는 뒤에서 따라갔던 것도, 그가 시도하는 것을 보았다고도 말하지 않았다.우문호는 그녀가 그의 어리석은 행동을 보지 않았다는 것을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아니네. 그저 잠이 안 왔을 뿐이오. 길주에서 벌어진 부정을 생각하느라 마음이 복잡해서, 바람을 쐬려고 나온 것이오. 당신이 말한 일은 벌써 잊은 지 오래되었네. 그런 농담을 어찌 아직까지도 마음에 담아두겠소?"원경릉은 대답한 후, 그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았다."함께 바람도 쐴 겸 호숫가 정자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떻소?""피곤하지 않소?"우문호가 물었다."괜찮소. 그냥 당신과 얘기하고 싶네."그녀의 눈빛에는 은은한 미소와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우문호가 그런 그녀에게 입맞춤하고 웃으며 말했다."좋소. 호수 가운데로 가시오."두 사람은 손을 잡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갔다. 호수 가운데에는 작은 정자가 하나 있었고 호수를 관찰하기에 아주 좋은 장소였다.그리고 정자의 처마 아래에는 하나의 풍등이 걸려 있었다. 비록 불빛은 다소 어두웠지만, 분위기는 정말 좋았다.두 사람은 자리에 앉지 않고 난간에 기대어 호수에서 반짝이는 빛을 바라보았다. 미풍이 불어와,
원경릉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능력과는 차이가 있소."우문호는 웃음을 터뜨렸다."어리석은 말 하지 말고 자시오. 참 피곤하오. 아, 그리고 이번에 서일과 이부 사람들을 길주로 보냈소. 만두도 함께 가서 배웠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오?""좋소."원경릉은 멈칫하다 말을 이었다."그럼, 다시 물을 조종하는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자면..."우문호는 일어나 또 연신 하품을 하며 말했다."아이고, 정말 힘드오. 그럴 리 없는 일로 그만 이야기하시오. 원 선생, 다들 나한테도 그런 능력이 있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하지만 이런 일은 강요할 수 없네. 더 나아지려고 노력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그것이 아니라..."원경릉도 벌떡 일어나서 그를 따라갔다."정말 사실이오. 시도를 해보는 것이 어떻소? 궁 안에 호수가 있지 않소?""피곤하니, 이만 자야겠소."우문호는 침대에 뛰어올라 이불을 휘저었다."정말 피곤하오."그러자 원경릉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녀는 우문호가 흥분에 휩싸일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피할 줄은 몰랐다. 설마 두려운 걸까?"내 말 좀 들어보시오. 이 능력은 무서울 필요가 없네. 다룰 수만 있다면...""원 선생, 그만하시오. 정말 피곤하니, 어서 자시오."우문호는 손을 내밀어 그녀를 잡아당겼고, 그녀는 그의 몸에 쓰러졌고, 그는 그녀를 감싸 안았다.원경릉은 그가 이렇게 거부할 줄은 몰랐다. 강제로 받아들이게 할 수도 없으니, 우문호가 지금 하는 일을 마친 뒤, 다시 이야기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며칠간 왔다 갔다 하느라 바빴고, 생각할 일도 많아 그녀는 정말 피곤한 상태였다. 그녀는 이내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어렴풋이 우문호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녀가 눈을 뜨기도 전, 우문호가 살짝 그녀의 목 아래에 있던 팔을 빼는 것이 느껴졌다.잠시 후,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떠났다.원경릉은 눈을 뜨자마자 마침 우문호
자시가 다 되어 갈 때, 그녀는 바로 소월궁으로 돌아갔다.궁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자마자, 다섯째가 돌아왔다. 녹주가 그의 옷을 걸어주고, 목여 태감이 차를 준비한 뒤 물러갔다. 기라는 복도 앞의 불을 하나만 남긴 채 모두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우문호는 원경릉을 안고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했다."기다리지 말고 피곤하면 먼저 자지 그랬소.""마침 연구를 확인하려 했소. 일부러 기다린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오. 피곤할 텐데 오늘은 씻지 말고 바로 쉬시오."하지만 우문호는 고개를 저었다."화가 너무 나서 잠이 오지 않소. 그건 그렇고, 아이들에 대한 얘기 좀 해주시오."그는 침대에 누워 몸을 뒤로 뉘었다. 약간 피곤해 보였지만, 그보다도 화가 난 것 같았다. 평소 아무리 바빠도 오늘처럼 피곤해 보인 적은 없었다.원경릉은 그의 허리 쪽에 부드러운 베개를 끼워주고, 반쯤 무릎을 꿇은 채 그의 눈썹과 관자놀이를 마사지했다. 우문호는 화를 낼 때면 두통이 자주 생겼다."계란이는 어떤가? 워낙 바쁘다 보니 자세히 듣지도 못했소."그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원경릉을 바라보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 마사지하지 못하게 했다.그러고는 팔을 크게 펼쳐 그녀를 품에 안았다."당신도 피곤했을 텐데 그만하시오. 조금 쉬다가, 당신의 어깨를 눌러주겠네."원경릉은 그의 품에 기대며 웃으며 말했다."계란이는 괜찮소. 아이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앞으로 혼사를 하더라도 당신이 좋아하는 자와 하겠다고 했소."다섯째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피곤함이 말끔히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정말? 정말 그렇게 말했소?!""물론이네. 당신은 그녀의 우상이오."그러자 우문호는 곧바로 기운을 차린듯 허리를 곧게 폈다."우상이라. 그렇다면 앞으로 무공을 갈고닦는 것 외에도 책을 많이 읽고 지식을 쌓아야겠군. 우상이 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네. 실력이 없으면 아이가 실망할 것 아닌가.""실력이라..."원경릉은 그의 품을 떠나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예. 태자 전하께서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뵙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런데 옷가지를 정리하고 궁으로 오시니, 전하는 이미 군영으로 떠나셨지요. 마침 마마께서도 외출하신 터라, 이곳에서 폐하를 보살피고 계신 것입니다.""그래."원경릉은 직접 어서방에 가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로하신 희 상궁에게 밤새도록 지키게 할 수 없었다.어서방에 도착하자, 목여 태감과 희 상궁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황급히 다가왔다."마마,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인 일이십니까?""다섯째가 저녁을 먹었는지 보러 왔네. 무슨 일이 생긴 것이오? 이렇게 늦도록 의논을 한다니."단단히 닫혀 있는 어서방의 문틈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고 익숙한 얼굴도 보였다. 탕양, 냉 대인, 홍엽, 이리 나리와 다른 사람들이 보였다.목여 태감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길주(吉州)에서 과거 시험 부정행위 사건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폐하께서 크게 노하셨습니다."원경릉이 미간이 찌푸렸다. 다섯째는 조정의 인재 등용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고, 재위하는 동안 부정행위에 대해서 엄격하게 처벌해 왔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감히 이런 짓을 벌였단 말인가? 돈에 눈이 멀어도 정도가 있지!길주에서 이런 일이 터졌으므로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조짐이 보일 가능성이 컸기에, 지금 바로잡지 않으면 불길 번지듯 확산할 것이었다.다섯째는 문인을 매우 중시하며, 늘 무장은 나라를 지키고, 문인은 나라를 다스린다고 말해왔다. 그런 마음 가짐으로 황제의 자리에 앉았으니, 당연히 문인의 중요성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졌을 것이다.게다가 그는 백성이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방법은 십여 년간의 힘든 공부 끝에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라 말했었다. 그런데 부정행위가 만연하면 실력 있는 자들이 탈락할 테고 그렇게 되면 문인을 중시하는 정책이 무너질 것이다.더 나아가, 억울하게 탈락한 자들은 조정에 대한 불만을 품을 것이고, 문인이 불만을 가지면 나라의 기운은 쇠퇴할 것이다."식사는
아이들과 밤새 각자 도성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원경릉은 다음 날 아침 서둘러 경성으로 돌아가기로 했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경천의 혈액과 호수 에서 채취한 얼음물에 얼음 벌레가 존재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기화가 아직 돌아가지 않았기에, 원경릉은 그를 불러내어 계란에게 그 일을 비밀로 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기화는 가슴을 두드리며 절대로 말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다.하지만 원경릉은 그의 진지한 모습을 보며 더욱 불안해져, 왠지 모르게 그가 말실수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래서 다시 한번 당부하자, 기화는 슬슬 짜증이 나는 듯했다."정말 저를 못 믿는 것입니까? 분명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원경릉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예. 꼭 비밀로 하십시오.""예. 어서 아이들과 인사나 하시지요."기화는 성가신 듯 손을 휘저으며 속으로 투덜거렸다.'나이도 어린 황후가 어쩜 이렇게 잔소리가 많지?'원경릉은 아이들과 작별을 마친 후, 바로 경성으로 떠났다.하루도 채 걸리지 않아, 그녀는 황궁으로 돌아왔다.그녀는 돌아오자마자 간단히 다섯째에게 상황을 설명한 후, 바로 실험실로 향했다.경천의 혈액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니, 역시나 얼음 벌레가 있었다. 비록 과거 다섯째의 혈액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하긴 했으나, 다섯째의 것보다 더욱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이어서 호수에서 가져온 얼음물을 현미경으로 확인해 보기도 했지만 얼음 벌레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호수 근처에서 채취한 물도 마찬가지이므로, 호수에서 감염된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얼음 벌레의 감염원을 추적할 수 없게 되자, 원경릉은 꽤 실망스러웠다.하지만 우선 경천의 혈액 속 얼음 벌레를 연구할 수 있기에, 그녀는 벌레를 분리하여 다양한 온도에서 번식력과 생존력을 실험해 보려 했다.이 일을 마무리한 뒤, 원경릉은 드디어 다섯째에게 능력에 대해 알려줄 때가 왔다는 결정을 내렸다.그저 그가 놀라서 기절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그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소월궁으로
기화가 말했다."형인 경천보다 크게 부족하지는 않지만, 아직 경천만큼의 패기는 없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경천과 대등해질 것입니다!""성격은 어떻습니까?""괜찮습니다."기화는 대부분의 사람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괜찮다"고 했으니, 정말 괜찮은 사람일 것이었다.이후 기화는 원경릉과 함께 다른 도성을 방문했다. 원경릉은 미리 능력으로 소식을 보내 그들을 한곳에 모이게 했다. 한편 기화는 계란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동행했다. 그도 어쩌다 조금 여유가 생겼다.소년들은 어머니가 오자 무척 기뻐했다. 하지만 저녁이 되자, 그들은 어머니를 데리고 방으로 향했다. 그들은 그녀가 이유 없이 이렇게 먼 곳까지 올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원경릉은 아이들에게 아버지에 대한 일을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약을 잘못 쓰고, 얼음 벌레에 감염되고 현대에서 사용한 약까지, 모든 것을 알려주었으며, 경천의 저주까지 전부 털어놓았다.경단과 찰떡은 이 말을 듣고 무척 놀랐다. 그들은 위기에 처한 아버지의 상황에 대해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반면, 환타와 칠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깊은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원경릉은 이 두 아이가 떡들보다 신비로운 일에 대해 더 잘 이해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이 능력은 정말 타고난 것 같았다.잠시 후, 칠성이 입을 열었다."사실, 경천이 감염된 얼음 벌레가 저주의 일종일 가능성이 큽니다. 비록 기화 스승께서 연관 없다고 하셨지만, 저주도 일정한 형태와 매개체를 가지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형태나 매개체가 있으니, 분명 저주를 풀 방법도 있지요. 큰 공덕을 지닌 자가 필요하다고 했으니, 어쩌면 어마마마일 수도 있습니다. 어마마마가 얼음 벌레의 저주를 없앨 방법을 연구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내가?"원경릉은 깜짝 놀랐다."아니면 아바마마일 수도 있습니다."옆에서 듣고 있던 환타가 말을 보탰다."아바마마 혈액 속 마커가 사라졌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원경릉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녀는 기화가 말한 고차원 문명이 아무리 들어도 이상하게만 느껴졌다.인류는 고차원 문명에 대해 단지 추측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심지어 그 존재 여부조차 검증할 수 없다.누군가 고차원 문명이 신계 문명과 동일하다고 주장했지만, 그녀는 신계 문명을 접할 방법조차 갖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신계의 시선으로 이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겠는가?그녀는 점점 자신이 주제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원경릉은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화제를 경천 황제에게 돌리려 했다."그를 구할 방법이 없습니까? 아직 젊은데 그냥 죽게 내버려두는 건 너무 아깝잖습니까?"아깝긴. 큰 공덕을 쌓았으니, 그는 죽고 윤회할 것입니다.""윤회라..."원경릉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미간을 문질렀다."아까는 고차원 문명 얘기를 하시더니, 이번엔 윤회라. 사고방식이 너무 빠르게 바뀌시니, 따라가기가 힘듭니다."하지만 기화는 오히려 태연하게 말했다."뭐가 어렵습니까? 과학의 끝엔 결국 신학이라 하지 않습니까? 어찌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십니까?""그럼, 고차원 문명의 관점에서 이 저주에 관해 설명해 주시지요."이렇게 특별한 이유를 과연 그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기화가 답했다."사실 이해하기엔 쉽습니다. 저주라는 건 하나의 힘이고, 그 가문은 힘을 어지럽혀 반작용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저주라는 게 바로 그런 것이지요. 하지만 가문의 기운이 달라지며 이 반작용의 힘도 점점 약해지게 되고, 이 세대에서 거의 끝이 보입니다. 그를 큰 공덕을 쌓은 사람이라고 한 이유는, 나라를 다스리고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고, 나라 발전에도 공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가 쌓은 덕이 반작용보다 커지면, 반작용의 힘도 점점 약해질 것이고, 결국 동화될 것입니다. 그럼, 윤회한다 해도 그는 복이 가득한 사람일 것입니다."원경릉은 그의 말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는데, 그때 기화가 한마디 덧붙였다."누군가는 화를 입으려 태어났고, 누군가는 운명을
"생사도 팔자에 달린 것인데 무서울 필요가 뭐 있습니까? 사람은 언젠가 죽는 법입니다. 완안 가문은 저주를 받아, 대대로 한 명씩 열여덟 살 이전에 모두 죽었지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운명이 정해져 있었고, 그래서 사원에 보내졌습니다. 이 저주를 피하려 했지만, 결국 소용이 없었지요.""추측입니까?"원경릉이 물었다."아니요. 안풍친왕의 장인이 알려준 것입니다.""그분도 여기 계십니까?""아니요. 이 대륙의 나라들, 그리고 이 근방의 연안까지, 전부 용인 그들이 관장하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 이곳에 온 이유도, 택란이 금나라 어린 황제가 혼사를 이야기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오기 전, 안풍친왕의 장인 라진이 경천을 황제가 되도록 도와주라 했습니다. 금나라의 정권을 안정시킨 후, 그의 동생을 후계자로 키우라고요. 아시다시피, 그들은 모든 나라가 큰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국사, 대사, 법사, 그리고 도사들이 갑자기 나타난 장군을 파견하여 권력을 쥐고 하지요. 역사를 공부했으니 아시잖습니까? 시대마다 등장한 엄청난 인물들은 대부분 그가 보낸 자들입니다. 각 나라에 다 있지요."원경릉은 놀라 입을 떡하고 벌렸다."용이라니요? 안풍친왕의 장인이 용이고, 여러 나라를 관장한다고요? 술을 너무 많이 드신 것 아닙니까?""아직 한 잔도 마시지 않았습니다!"기화는 다시 수염을 만지작거렸는데, 그 모습이 원경릉에게는 너무나도 어색하고 위화감이 들게 만들었다.털털하던 사람이 국사 행세를 하고 있으니, 도무지 습관 되지 않았다."어쨌든 상황은 이러합니다. 경천은 열여덟이 되기 전, 죽을 운명이지요. 하지만 죽기 전에 금나라를 안정적으로 발전하게 만들 능력이 있지요. 나라가 안정되면, 그도 죽을 것입니다."원경릉이 숨을 들이쉬었다."그 사실을 본인은 알고 있습니까?"어찌 상황이 이렇게 비현실적으로 되는 걸까?"모르지요. 알고 있다면 택란을 황후로 책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은 백 살까지 살 수도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기화는 피식 웃었
찾아온 사람은 바로 택란의 스승인 기화였다.하지만 원경릉은 그를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금나라 복장을 하고 있었으며, 넉넉한 옷자락에 얼굴도 훨씬 희고 깨끗해졌으며 수염까지 길렀기 때문이다. 그의 날카롭고 빛나는 눈빛이 아니었다면, 정말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었다."스승님, 어찌 이곳에 계십니까?"택란이 기쁘게 묻자, 기화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미소를 지었다."이곳에 온 지 좀 됐다. 금나라에서 국사를 하며, 네 사모를 잠시 피할 겸 말이다. 금나라에 무슨 일로 온 거냐?""금나라에 온 지 오래되셨습니까? 어찌 저를 찾아오지 않았습니까?"택란이 물었다."그동안 조금 바빴다."기화는 예전보다 훨씬 더 신중해진 모습이었다. 말투에서 마저도 국사의 위엄이 느껴질 정도였다. 원경릉은 문득 예전에 양여혜가 그를 이상한 사기꾼이라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이제 보니 꽤 그럴싸한 평가였다."택란아, 네 어머니와 함께 내 저택으로 가서 이야기하자꾸나."기화가 말을 이었다.택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이제 저택까지 있으세요?"기화는 여전히 태연하게 말했다."국사인데 저택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예. 스승님의 저택도 구경하고, 며칠 머물면서 스승님과 함께 한잔... 과일주 한잔해야겠습니다."택란은 너무 기쁜 나머지 실수로 '술 한잔'이라고 말할 뻔했다.기화는 눈치를 보며 원경릉을 힐끗 보았다. 원경릉에게 택란과 술을 마시는 걸 들키면 안 된다.원경릉은 못 들은 척 넘어갔다. 사실 택란이 어린 나이에 술을 즐기는 것이 신경 쓰였지만, 직접 나설 필요는 없었다. 이 문제는 양여혜에게 전해, 기화의 부인에게 귀띔하라 말하면 된다.기화의 부인 월아는 보수적인 성격이라, 택란이 술 마시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그들은 마차를 타고 국사인 기화의 저택으로 향했다.저택은 아주 컸고, 내부는 새롭게 단장되어 있었다. 고급스러운 가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금나라 황제가 기화를 상당히 신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기화는 택란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