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찬아, 왜 그래?”강윤아의 다급한 물음에 은찬은 배를 끌어안으며 불쌍하게 대답했다.“엄마, 저 배 아파요…….”그 옆에서 권은우는 차가운 눈빛으로 은찬을 바라봤다. 은찬이가 꾀병을 부린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 상황에 끼어들어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반면 강윤아는 더 이상 권은우를 신경 쓸 새 없이 오직 은찬을 데리고 얼른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따문에 하는 수없이 권은우를 향해 다시 한번 사과했다.“죄송해요. 은찬이가 갑자기 몸이 안 좋대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식사는 먼저 혼자 하셔야 할 것 같네요.”권은우가 대답하기도 전에 강윤아가 먼저 계산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하지만 레스토랑 밖에 나와 갓길에서 택시를 잡으려 할 때 은찬이가 강윤아를 잡아당겼다.“엄마, 저 병원 안 갈래요.”강윤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다급하게 물었다.“너 배 아프다면서 병원 안 가면 어떡해?”“이제 안 아파요.”은찬은 입을 삐죽 내밀며 중얼거렸다.의심의 눈초리로 찬찬히 살펴보니 은찬의 얼굴에는 고통의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은찬이가 자기를 속이고 있다는 걸 발견한 강윤아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 급기야 레스토랑에 혼자 버려진 은인을 생각하니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은찬아, 너 아까 그 아저씨를 왜 그렇게 싫어해?”“아무튼 싫어요!”은찬은 입을 삐죽거리며 실속있게 말했다.“싫다면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이유를 대라고 하니 은찬은 오히려 입을 꾹 다물고 말뚝처럼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은찬의 이런 모습에 강윤아는 어이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권은우는 큰 도움을 준 은인인데 은찬이가 그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결국은 은찬이가 성깔을 부린다는 생각에 가는 길 내내 은찬을 설교했다.“은찬아, 그 아저씨는 우리를 도와주신 분이야. 그런 고마운 분한테 왜 그렇게 버릇없이 굴어? 네가 계속 이러면 앞으로 누가 또 너를 도와주겠어?”인내심 있게 처음부터 가르친다는 심정으로 강윤아는 차근차근 설명했다.
이른 아침, 권재민은 방에서 나오기 바쁘게 거실로 가서 가사도우미를 불렀다.“은찬이가 아직 어리니 앞으로 매일 아침 우유를 준비해 줘요.”권재민의 당부에 가사도우미는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얼른 주방으로 가 준비하기 시작했다.그러던 그때,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권재민이 눈살을 살짝 찌푸리는 사이 이미 메이드 한 명이 달려가 문을 열었다.그리고 다음 순간 문밖에서 웬 젊은 미모의 여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저 권재민보다 몇 살 많아 보이는 정도에 분위기 있는 여성을 보는 순간 메이드는 바로 알아차렸다. 그 여자가 권재민의 고모라는 걸.“아가씨, 안으로 들어오세요.”권지윤은 권재민의 고모지만 권재민과 몇 살 차이 나지 않는다. 서열로 따지면 권재민 아버지의 형제 중 막내다.“고모, 여긴 무슨 일로 왔어요?”권재민은 의외라는 듯 물으며 자연스럽게 권지윤 손에 들린 가방을 받아 들었다.이에 권지윤은 피식 웃으며 살짝 삐진 듯한 말투로 쏘아붙였다.“왜? 내가 오는 게 싫어? 그럼 갈까?”“고모, 그런 뜻 아니라는 거 알잖아요.”권재민이 다급히 말했다.“그래, 됐다.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할게. 사실은 나 요즘 한동안은 여기서 지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지?”권지윤은 권재민을 보며 진지하게 물었다.‘갑자기 무슨 일이지?’권재민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하지만 권진윤은 어찌 됐든 고모이기에 결국은 동의했다.“고모가 지나고 싶다면 저야 오히려 영광이죠.”이에 권지윤은 재밌는 듯 권재민을 슬쩍 보더니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농담조로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 하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 되도록 적게 머물다 갔으면 하고 있지?”솔직히 권재민은 자기 고모를 좋아하지도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는다. 때문에 인사치레로 싱긋 웃으며 바로 부인했다.“그럴 리가요. 고모도 참, 저 그렇게 놀리지 마세요.”그런데 그때, 갓 깨어난 강윤아는 권지윤이 왔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하품을 하며 2층에서 걸어 내려왔다. 심지어 이 집을 마
식사를 마친 뒤 권지윤은 젓가락을 바닥에 휙 집어 던졌다.“나 이따가 나가 봐야 해. 참, 내가 우리 강아지도 데려왔으니 강윤아 씨가 잘 돌봐줘.”말을 하는 동시에 권지윤은 메이드더러 자기의 강아지를 데리고 오라고 명령했다.권지윤의 그런 행동은 강윤아를 하인 취급 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강윤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심지어 강아지라기도 무색할 만큼 덩치가 큰 대형견을 보자 겁이 덜컥 났지만 결국은 울며 겨자 먹기로 목줄을 손에 잡았다.하지만 대형견은 낯선 환경이 익숙하지 않은지 이리저리 맴돌아 강윤아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강윤아의 겁먹은 모습에 권지윤은 피식 웃으며 경멸하는 투로 말했다.“이런 것도 무서워하다니 뭘 제대로 하겠어?”“아…… 아니에요.”강윤아가 낮은 소리로 반박하자 권지윤은 강윤아를 가볍게 슥 흘겨보며 말했다.“아니면 다행이고. 얘 물 건너온 애야. 길에서 고생했으니 목욕 좀 시켜.”결국 대형견을 화장실로 끌고 간 강윤아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대형견은 진상을 부려댔다. 심지어 샤워기를 갖다 대자 “월월” 큰 소리로 짖으며 강윤아를 뛰어넘어 밖으로 도망치려고 했다.“아!”강윤아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대형견의 힘을 당해내지 못하고 휘청거리자 보다 못한 메이드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제가 도와드릴게요.”“돕긴 뭘 도와? 내가 언제 도와주라고 했어? 이렇게 간단한 일도 못 하면 무슨 쓸모가 있어? 나 이미 말했어. 누구도 거들지 마, 혼자 하게 해!”권지윤은 위엄 가득한 말투로 경고를 날렸다.상황이 이렇게 되자 메이드가 강윤아를 돕고 싶어도 권지윤의 명령을 어길 수 없어 묵묵히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결국 강윤아는 두려움과 불안을 꾹꾹 눌러 참으며 몸을 웅크려 대형견을 목욕시켜 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형견이 계속 마구 움직여 대고 가만있지 않는 바람에 강윤아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그러다가 반쯤 씻겼을 때, 대형견은 끝내 강윤아가 한눈을 파는 사이 화장실을
그때, 밖에서 갑자기 부슬부슬 빗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내리는 비에 밖을 내다본 권재민의 마음은 더욱 초조해졌다.강윤아는 여전히 연락이 닿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는데 강윤아는 분명히 우산을 가져가지 않았을 것이다. 강윤아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권재민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권재민이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한 부하가 급히 그를 가로막았다. “대표님, 이런 일은 저희를 시키시면 됩니다. 지금 밖에 비가 오고 있으니, 가만히 별장에 계시는 게 좋겠어요. 밖으로 나가지 말고요.”“안 돼.”권재민은 말없이 그의 제의를 거절하고 우산을 들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갑자기 쏟아진 빗줄기에 강윤아의 머리카락과 옷은 흠뻑 젖어있었다. 하지만 권지윤이 반려견을 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강윤아는 비를 맞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젖은 머리를 옆으로 넘기고, 계속 반려견을 찾아다녔다. 빗물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어 길도 잘 보이지 않았다.그런데 바로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윤아 씨, 윤아 씨.”그 소리에 강윤아가 어리둥절해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들어보니 권재민이 멀지 않은 곳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윤아 씨.”강윤아를 찾으려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권재민도 마침 강윤아를 발견했다.그녀를 본 순간, 권재민은 황급히 그녀에게로 달려왔다. 비에 홀딱 젖은 그녀의 모습에 강윤아는 얼굴을 찡그리며 우산을 씌워주고는 자신의 외투를 벗어 강윤아에게 입혀주었다.“왜 이렇게 늦었어?”권재민은 정색하며 물었다.“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하려고 그래? 전화라도 받으면 모를까, 내가 전화해도 받지 않아서 내가 얼마나 조급했는지 알아?”“그게••••••.”강윤아는 권재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 권재민은 강윤아의 손목을 잡고 그녀를 집으로 데려
권지윤은 권재민이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당연히 알고 있다. 자신이 여기에 살고 있는 것이 강윤아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그녀는 조용히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강윤아를 더욱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강윤아는 여우 같은 존재라고 확신했다.권지윤은 권재민이 이성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분노를 강윤아에게 쏟아냈다. 그녀는 분명 강윤아가 권재민을 현혹시켰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권재민이 이런 무례한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권재민이 이미 그렇게 분명하게 말했기 때문에 권지윤도 뻔뻔하게 여기에서 계속 살 수 없어 오후에는 원치 않는 짐을 싸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마침 방을 지나가던 강윤아는 짐을 싸는 소리를 듣고 잠시 마음이 착잡해졌다.비록 권지윤이 그녀에게 심한 짓을 많이 한 것은 사실이지만, 권지윤은 어쨌든 권재민의 고모이다. 그런데 권재민은 자신의 고모가 아니라 강윤아 편을 든 것이다.강윤아의 마음은 갑자기 따듯해졌다. 전에 권재민에게 화가 났던 것도 머릿속에서 잊혀졌다.“강윤아.”강윤아가 잠시 넋을 놓고 생각에 빠졌는데, 뒤에서 갑자기 권지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언제 방에서 나왔는지, 권지윤이 그녀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지금 엄청 우쭐하지?”권지윤이 냉소했다.‘우쭐하다고?’강윤아는 어리둥절했다. 그녀는 권지윤이 이사를 간다는 사실에 조금 기뻐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우쭐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제가 우쭐해할 게 뭐가 있어요?”“참나.”권지윤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의 두 눈에는 응어리로 가득 차 있었다.“내 앞에서까지 연기할 필요는 없어. 강윤아. 자신의 신분을 똑바로 아는 것이 좋을 거야. 네가 정말 재벌가로 시집갈 수 있다고 생각해? 경고하는 데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권지윤은 강윤아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눈시울을 붉혔다.“지금 내가 비록 이 집을
권재민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더니 그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저 팔찌 좀 이리 가져와 봐.”직원은 권재민이 강윤아 옆에 서서 그녀를 위해 나서는 모습을 보고 마음속으로 두 사람이 아마 연인 사이일 것이라고 확신했다.하지만 강윤아는 한눈에 봐도 초라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직원은 국내 의류 브랜드에는 익숙하지만 해외 유명 브랜드에 대해서는 생소했다. 게다가 권재민은 오늘 해외 유명 디자이너에게 맞춤 제작을 의뢰한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직원은 더더욱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강윤아 옆에 있는 남자도 부자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권재민이 틀림없이 짝퉁을 입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저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것도 전부 자신의 여자 친구 앞에서 자신의 위엄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했을 것이다.이렇게 생각한 직원은 그의 말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권재민은 자신의 말을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직원의 모습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내가 지금 말하잖아. 안 들려? 저 팔찌를 꺼내보라니까?”직원의 마음은 여전히 내키지 않았지만, 어쨌든 고객이기 때문에 아무리 그들이 살 수 없을 것 같아도 그녀는 할 수 없이 팔찌를 꺼내 권재민에게 건넸다.권재민은 팔찌를 받아 들고 두말없이 강윤아의 손목에 끼웠다. 그러더니 자기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예쁘네요. 역시 당신은 보는 안목이 있어요.”그 말에 강윤아는 부끄러워서 팔찌를 빼려고 했지만, 권재민은 그런 그녀의 행동을 제지했다.“예쁜데 그냥 끼고 있어요.”한편, 직원은 무표정하게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분명히 살 능력도 없으면서 연기하는 것일 거야. 이따가 계산할 때 어떻게 하는지 한 번 두고 봐야지.’그러자 직원은 아예 카드 결제기를 가져와 권재민에게 건넸다.“계산은 카드로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현금으로 하시겠습니까?”권재민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대답 대신 다른 팔찌를 돌아보더니 육백 만 원짜리 팔찌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깊은 밤, 강윤아는 근심거리를 감추고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엎치락뒤치락하며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그녀는 손목에 찬 팔찌를 잠시 멍하니 보고 있다가, 문득 팔찌의 가격을 생각하자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느꼈다.강윤아에게 이 팔찌는 매우 귀중한 물건이었다. 비록 권재민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녀에게 사 주었지만, 그녀는 나중에 팔찌를 착용할 때 분명 실수로 팔찌를 깨뜨리지 않을까 걱정에 휩싸일 것이다. 그녀는 이 팔찌를 정말 좋아하지만, 계속 차고 있으면 정말 마음이 놓이지 않을 것만 같았다. 만약 실수로 부서진다면 그녀는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잠시 생각한 뒤 강윤아는 팔찌를 손목에서 빼고 캐비닛 상자에 팔찌를 넣었다. 그 상자 안에는 그녀가 호텔에서 주운 옥패도 함께 놓여 있었다.얼마 전까지 강은찬이 보관해 왔지만, 강은찬은 거의 매일 게임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에 아마 이 일을 이미 잊어버렸을 것이다. 이사할 때 강윤아는 직접 손에 상자를 고이 쥐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보관하는 것이 비교적 안심된다고 느꼈었다.이 옥패의 주인은, 아마도 강은찬의 아빠일 것이다. 이번 생에 그 남자를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지 없을지, 그가 강은찬을 책임지고 싶어 할지 않할지도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강은찬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속으로 얼마나 슬퍼할까? 그렇게 아빠를 원했는데 말이다.한편, 강윤아는 몸을 뒤척이며 다시 권재민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지내면서 그녀도 권재민이 진심으로 강은찬을 잘 대해주고 그를 자신의 친아들처럼 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만약 권재민이 강은찬에게 항상 이렇게 잘 대해준다면, 그를 강은찬의 아버지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문득 이런 생각이 강윤아의 머릿속에서 막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빠르게 단념했다.‘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그는 은찬이를 좋아하긴 하지만, 친자식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거야.’권재민처럼 훌륭한 남자가 아이를 갖고 싶다면, 아마 많은 여자들이 앞다퉈 그의
권은우는 강윤아가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여자는 자립해야 남에게 누를 끼치지 않고 살 수 있어요. 직업을 갖는 것이 그 첫걸음입니다. 윤아 씨, 함부로 자신을 비하하지 마세요. 전 사람을 보는 눈이 정확해요. 윤아 씨가 원한다면 분명히 사업에서 빛을 발할 수 있을 거예요.”권은우의 확신에 찬 표정은 강윤아를 감동시켰다. 때문에 그녀는 더 이상 권은우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좋아요. 한 번 도전해 보죠.”강윤아가 말했다.강윤아의 긍정적인 대답에 권은우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강윤아는 그의 눈에서 번쩍이는 무언의 빛을 알아차리지 못했다.“윤아 씨께서 언제 시간이 날지 모르겠어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오늘 한 번 가보는 게 어때요? 어쨌든 일찍 취직할수록 좋은 거니까 말이에요. 그렇죠?”권은우는 꽤 절박해 보였다.지난번 송해나가 그녀에게 일자리를 소개해 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불명확하게 해고된 이후로 강윤아는 취직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겨버렸었다. 조금 전도 차마 거절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승낙한 것이다. 지금 권은우가 당장 회사로 데리고 가겠다고 하자,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다고 느낀 강윤아는 순식간에 걱정이 함께 몰려왔다. 게다가, 밖으로 나오기 전에 권재민이 밖에 오래 있으면 안 된다고 하기도 했었다.권재민이 아침에 키스를 퍼부었던 것을 생각하자, 강윤아는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괜히 얼굴이 빨개진 강윤아를 보며 권은우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윤아 씨, 왜 그래요? 왜 갑자기 얼굴이 이렇게 빨개진 거예요?”그러자 강윤아는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가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마 여기가 조금 더워서 그런 것 같아요. 참, 은우 씨. 제가 일이 있어서 지금 급히 돌아가야 해요. 아니면 다음에 다시 약속을 잡는 건 어때요?”“좋아요. 그럼 내일 어때요?”권은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말했다.그러자 강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내일도 시간이 있을 것 같다고 생각
강윤아라는 말에 권재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윤아가 우리 집에 온 이후로 힘든 일을 많이 겪었고 늘 다른 사람의 타깃이 되었어요. 재민이가 너무 다른 사람의 호감을 사 그녀를 연루시킨 거죠.”“재아 씨가 지금 걱정해도 소용없어요, 재아 씨부터 잘 챙겨요.”윌은 재아의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자, 재아 씨 기분 전환하러 갔다가 나중에 우리 집에 가요.”그 말을 들은 권재아는 얼굴이 빨개졌다.“얼굴이 왜 빨개지는 거예요? 내가 옆에 있었으면 재아 씨가 좀 더 편하게 잠들 거예요.”윌은 웃으며 농담했다.재아는 얼굴이 빨갛게 상기 된 채 그를 한 대 때렸지만 거절하지 않았다.날이 저물자 바다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고 이따금 파도가 아련하게 일기도 했다. 해변의 모래사장에는 간간이 등불이 있는데, 등불은 그다지 밝지 않고 군데군데 있어서 밤하늘의 별과 서로 잘 어울렸다.재아는 부드러운 모래를 밟으며 앞으로 한 걸음씩 폴짝폴짝 뛰어갔다. 귓가에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아득하고도 고요했다.윌은 재아의 뒤에서 몇 걸음 걷다가 재아가 전혀 알아채지 못하자 성큼성큼 몇 걸음 앞으로 나가 그녀의 손을 잡고 손바닥으로 감쌌다.재아는 어리둥절해 하더니 이내 두 눈이 반달 모양으로 변했다.“손잡고 싶은 거면 얘기하지 그랬어요.”재아의 표정이 너무 도도해서 윌은 눈살을 찌푸리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코끝을 긁었다.“그러게 누가 재아 씨더러 아무것도 모르래요?”술도 밥도 배불리 먹었으나 그 뒤로 딴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재아는 윌 덕분에 배불리 먹었고 지금은 기분이 너무 좋았다. 윌의 손을 잡고 있자니 따뜻한 손바닥에서 전해오는 힘에 말할 수 없는 안정감을 느꼈다.백사장을 따라 한참을 걸은 후에야 마침내 윌이 말한 그 ‘재미있는 곳’에 이르렀다.재아는 어두컴컴한 불빛 속 나무 밑에 숨어 있는 해먹에 하마터면 눈살을 찌푸릴 뻔했다.“여기가 재밌는 곳이에요?”“재미있는 곳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올 거잖아요?”윌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올라탄
회의가 끝난 후, 권재아는 권현우가 그녀를 쉽게 보지 못하게 하려고 여전히 당당하게 걸어 나갔지만, 사무실로 돌아온 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초조하고 어쩔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재아는 매우 낭패한 모습이었다.재아는 권재민에게 이 일을 알리려 문자를 보냈지만, 그쪽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재아는 윤기태에게도 이 일을 말했다. 기태도 분노했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재아가 풀이 죽은 모습을 보며 화가 났지만 재아를 먼저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대표님, 이런 결과는 대표님도 원하지 않겠지만, 정말 방법이 없잖아요. 자책하지 마세요, 권재민 대표님이 돌아오시면 분명히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재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기태의 위로가 전혀 소용이 없었고 재아는 여전히 괴로웠다.재아의 이런 모습을 본 기태는 더는 방해하지 않고 그녀에게 인사한 후 자리를 떴다.늦은 시간, 재아는 여전히 회사에서 일을 처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무실 문이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권재아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만 했다.갑자기 넓은 손이 재아 앞에 다가오더니 그녀의 머리를 강제로 들어 올렸다.재아는 화를 내려다가 윌임을 발견했다. 순간 화가 난 얼굴이 미리 설정된 듯 활짝 웃는 얼굴로 바뀌었다.“아, 윌, 여긴 어쩐 일이에요? 귀국하지 않았어요? 돌아왔으면 나한테 말해주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내가 공항으로 데리러 갔을 텐데.”윌은 재아의 머리를 받치고 있던 손을 풀고 책상을 돌아 재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러는 내내 눈빛은 재아에게서 떠나지 않았다.“보고 싶어서 돌아왔어요. 알려줬으면 어떻게 서프라이즈를 해줬겠어요. 왜 이렇게 피곤한 얼굴이죠? 날 봤을 땐 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어요.”윌이 그녀 앞에 서자 재아는 윌의 허리를 끌어안고 머리를 살짝 윌의 몸에 기대며 풀이 죽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윌은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은 듯해 보여 더는 강요하지 않고 빨리 나가자고 재촉했다.“주차장에서 오래 기다렸는데도 안 내려와서 야근하는 거 아닌가
권재민은 강윤아의 움직임을 추적한 뒤 곧바로 현진성과 합류해 구출 계획을 논의하고 애스릭이 숨어 있는 곳으로 쳐들어가려 했다.하지만 이번에도 그들은 변장하고 다가갔다. 애스릭은 분명 그들을 경계할 것이고, 외딴 섬에서의 일을 겪었으니 애스릭의 경계와 의심이 더 강해지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들은 반드시 만반의 계획을 세워야만 윤아를 구해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같은 시간, 국내에 있던 김소혜와 서만옥은 출국할 예정이었다.그날 기슭에 도착한 후 재민은 아이를 안배하고 나서 소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혜는 발신자가 실종된 지 오래된 자기 아들이라는 것을 보고 매우 흥분했다.“재민아, 드디어 엄마한테 전화했구나. 그동안 네가 나한테 전화 안 해서 우리도 방해할 엄두가 안 났는데 너는 지금 어때? 윤아는 행방불명이야? 윤아를 구해낸 거 아니었어?”소혜는 재민의 전화가 희소식을 전하러 걸려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재민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민의 전화를 받은 후 마음이 매우 흥분되고 기뻤기 때문이기도 했다.재민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소혜의 이렇게 흥분한 말투를 들으며 차마 그녀에게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급박해서 아이를 돌볼 가족이 있어야 했다. 비록 의사가 있지만 그는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다.그는 이를 악물고 실정을 소혜에게 말했다.“엄마, 내 말 좀 들어봐요. 마음을 다잡고 들어요, 일이 이렇게 됐어요…… 엄마가얘기한 거랑 상황이 좀 달라요. 윤아가 처음에 구출되긴 했는데 다시 잡혀갔어요. 그동안 연락이 없었던 건 내가 계속 그 사람의 경계에 잠복해있었기 때문이에요.”재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혜가 말을 끊었다.“뭐? 구출되긴 했는데 또 잡혀갔다는 건 뭐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엄마, 내 말끝까지 들어봐요.”재민이 이마를 어루만졌다.“이 일은 당분간 자세히 말하기 어려워요. 제가 윤아를 데려가고 나서 자세히 말해줄게요.”
고승혁 교수가 협조를 거부했기 때문에 애스릭은 더 심하게 때렸다. 거의 몇 시간마다 가서 괴롭혔는데 매번 때리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말로 욕했지만 고승혁 교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강윤아는 고승혁 교수가 돌아올 때마다 얼굴에 약간의 상처가 생기는 것을 보고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사실, 애스릭이 매번 고승혁 교수를 데려갈 때마다 그가 입을 열어 경험을 전수해주도록 했을 뿐 매번 그를 때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승혁 교수는 돌아올 때마다 애스릭의 부하들에게 얻어맞았다.고승혁 교수는 베티를 치료해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배신하기까지 했기 때문에 그들은 매우 원망스러웠다.“고승혁 교수님, 저 때문에 교수님이 억울한 일을 당했으니 협조하고 절 그냥 내버려 둬요.”“괜찮아요, 때리고 싶으면 때리고 욕하고 싶으면 하라고 해요. 나는 견딜 수 있어요. 나는 오히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어디까지인 보고 싶어요. 언젠가 내가 정말 견딜 수 없게 되면 자연히 그들에게 항복할 거예요. 그때 가서 윤아 씨가 나를 원망하지 말아주세요.”고승혁 교수는 손을 내저으며 개의치 않는 듯 윤아를 향해 농담까지 했다.“교수님은 이미 내 목숨을 구해줬고 내 아이를 지켜줬어요. 이것만으로도 저는 이미 교수님에게 감사해요. 교수님이 앞으로 나를 어떻게 대하든 나는 받아들일 수 있어요.”윤아는 고승혁 교수의 이런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정말 내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이건 내 인생 경험의 일부일 뿐이에요.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 밑지는 장사는 아니에요. 굴복해 연명할 수 있지만 내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고승혁 교수는 윤아가 미안한 표정을 짓자 그녀를 안심시켰다.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우리가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 교수님의 연구원에 많이 투자할게요.”“그럼 먼저 윤아 씨에게 감사해야겠어요.”“고승혁 교수님, 우리는 함께 목숨 걸고 싸운 사이이니 그냥 저를 윤아라고 부르세요, 윤아 씨는 너무 서먹서먹해요.”윤아가 고승혁을
메리는 인큐베이터 옆에 있는 의사가 멍하니 있는 것을 보고 그를 한 번 쿡 찌르며 낮은 소리로 주의를 시키었다.“존, 사람들이 묻고 있잖아요.”“네?”존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권재민은 옆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다시 물었다.“내 아이의 상태가 어떤지 물었어요.”“아기는 지금 상태가 안정돼 있고 아까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놀라지 않았어요. 달이 차지 않아 태어났기 때문에 면역력이 좋지 않아 인큐베이터에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요.”존은 마침내 반응을 보였고 무서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재민은 가볍게 알았다고 대답하고 고개를 숙이고 인큐베이터 안의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갑자기 생명이 정말 완강하다고 느꼈다.강윤아에게 그렇게 많은 위험이 닥쳤는데도 이 아이는 이렇게 안전하고 무사하게 태어났고, 게다가 아무런 문제도 없으니 앞으로도 꿋꿋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눈앞의 작은 아이가 이렇게 많은 일을 겪으면서도 건강할 수 있다면, 아이의 엄마 윤아는 분명 더 완강할 것이다. 그동안 많은 일을 겪었지만 윤아는 아슬아슬하게 돌아왔으니 이번에도 반드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재민은 보면 볼수록 더 반가웠고 윤아가 출산할 때 옆에 없었지만 수술실 밖에 있었으니 좀 멀지만 어떻게 보면 윤아 옆에 있은 셈이다. 다음번에는, 다음번에는 윤아 옆에 꼭 있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재민의 부드러운 표정을 보고 현진성과 한기현도 옆으로 다가가서 아기를 바라보았다.“윤아 씨를 많이 닮아서 참 예뻐. 앞으로 윤아 씨처럼 예쁘게 자랄 거야.”기현은 한참을 쳐다보았다.옆에 있던 진성은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말했다.“태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어떻게 윤아 씨와 닮은 줄 알아요? 갓난아이는 이목구비도 다 비슷비슷하고 쭈글쭈글한 모습이 늙은이 같다는 생각만 들어요. 게다가 머리카락이나 눈썹도 다 나지 않았잖아요.”“진성 씨…… 왜 그래요? 분명 윤아 씨를 닮았잖아요?”핀잔을 들은 기현은 얼굴이 빨개졌다.“재민아. 진성 씨 봐, 너의 아이가
한기현은 다시 권재민에게 전화를 걸어 그들이 숨은 곳을 알려줬지만 강윤아가 끌려갔다는 사실은 알려주지 않았다.재민은 재빨리 이곳으로 달려와 둘러보았으나 윤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미간을 찌푸린 채 의심스러운 얼굴로 기현과 현진성을 힐끗 쳐다보았다.“기현아, 현진성 씨, 윤아 씨는요? 윤아 씨가 왜 여기에 없죠?”두 사람은 안절부절못했다. 평소 대단한 사람들이었지만 지금 재민 앞에서 감히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기현은 슬며시 진성을 쳐다보고 몰래 진성을 쿡 찔렀다. 진성은 방심하다 밀려났고 뒤를 돌아보며 기현을 노려보았지만 기현은 고개를 숙이고 더는 두 사람을 쳐다보지 않았다.“묻고 있잖아요! 윤아 씨는요? 내 아내 어디 갔어요? 당신들 윤아 씨를 어디로 데려갔어요?”재민은 두 사람의 행동을 보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소리쳤다.진성은 미안한 표정으로 재민을 바라보며 재민에게 그가 떠난 후의 일을 대충 말했다.“권재민 대표님, 죄송합니다, 제가 윤아 씨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애스릭에게 빼앗겼어요. 제가 부주의했어요. 그 방에 숨으면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는데, 애스릭이 이렇게 교활하게 두 가지 계략을 쓸 줄은 몰랐어요.”“권재민 대표님, 지금 저를 때리고 욕해도 저 할 말이 없어요.”이 말을 들은 재민은 온몸에 살기가 피어올랐고 두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진성을 노려보며 허리에서 총을 꺼내려 했다. 기현이 황급히 그런 재민을 말렸다.“재민아, 일단 흥분하지 마, 방법이 있을 거야. 같은 편이니 우릴 도울 수 있어. 게다가 인터폴이야. 너 인터폴을 죽이는 건 큰 문제가 아니지만, 윤아 씨부터 찾아야지. 지금 우리는 진성 씨가 필요해.”기현은 재민의 허리춤의 총을 쥔 손을 힘껏 눌렀다.진성도 황급히 위로했다.“권재민 대표님,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밖에 비도 오고 바람도 심해서 빨리 갈 수 없으니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거예요.”“게다가, 우리 배에는 위치추적 장치가 있어요. 아주 은밀한 곳에 두었으니, 그들은 분명히 찾을 수 없
한기현은 사람과 함께 현진성의 사람들을 따라 수술실의 암도 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길을 따라가다가 애스릭의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기현은 그들 모두가 깨끗이 떠난 줄 알고 있었는데 애스릭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사람을 남겨 그들을 몰살시킬 준비를 했을 줄은 몰랐다.기현의 눈에 갑자기 핏빛이 솟구쳐오르더니 몸을 돌볼 겨를도 없이 맨주먹으로 몇 사랑을 해치웠다.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독살스러운 모습까지 보여 상대방을 놀라게 했다.그 사람들은 애스릭을 보낸 후 매우 내키지 않았다. 한바탕 뒤지고 나서 도망갈 계획이었는데, 결국 절반 정도 뒤지다가 기현 일행을 만났다. 특히 기현은 어두운 얼굴을 한 채 그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듯 보였다.그들은 원래 기현 일당과 대충 싸우려고 일부러 그들을 놓아주려 했는데 기현이 달려들어 그들 몇 사람을 쓰러 눕히자 분노가 치밀어 올라 기현 일행과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기현이 상대방의 생각을 알면 지금쯤 후회해 죽을지도 모른다. 몇 분 동안 아무렇게나 싸우면 될 일을 이렇게 충동적으로 또 한 번 미뤘다.몇 분 동안 싸운 후, 쌍방은 모두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기현의 왼팔이 그 무리의 두목을 누르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총을 쥐고 그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고 있어 쌍방이 모두 시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기현은 그들의 타협을 기다렸고, 그 사람은 반격의 기회를 기다렸다.이 팀장은 원래 타협하려 했지만, 지금 이 지경에 이르니 승리욕이 자극되었고 지금은 고개를 숙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머리를 숙이면 부하들이 그를 무시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라도 그는 승부를 내려고 했다.이때 폭발음이 드디어 또렷하게 들렸고 그 사람은 이때 갑자기 손을 썼다.기현은 그가 성급히 달려들 것을 예상한 듯 손을 빼 권총을 내던지고 날쌔게 상대방의 손을 잡아 그의 등 뒤로 돌렸다. 두 발은 날렵하게 그의 허리와 배를 걷어찼고 곧 사납게 그의 몸을 비틀어 앞을 가
현진성은 애스릭의 부하들이 베티를 데려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애스릭이 아직도 단념하지 않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애스릭이 베티를 포기하거나 그들과 함께 죽으려고 이 보이지 않는 장치를 작동시켰다고 생각했다.애스릭이 여전히 단념하지 않고 베티를 데려가서 부활을 꿈꾸고 있을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애스릭은 고승혁 교수와 강윤아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진성은 갑자기 눈꺼풀이 미친 듯이 뛰며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 윤아와 고승혁 교수가 숨어 있던 방에서 총소리가 났다.그는 급히 아까의 그 방으로 돌아갔다. 들어가 보니 그가 배치한 사람 중 몇 명은 상처를 입었고, 또 몇 명은 이미 의식을 잃었으며 그중 한 명은 이미 죽었는데 의사였다. 그 의사는 아기의 인큐베이터를 필사적으로 안고 있었다.진성은 그 의사의 시체를 땅에 부축하려고 했지만, 그 사람의 손이 인큐베이터 가장자리를 필사적으로 잡고 있어서 아주 많은 힘을 써서야 그 손을 쪼갰다. 진성은 겨우 옆 깨끗한 곳으로 메고 가서 그를 살며시 내려놓았다.의사를 내려놓은 진성은 돌아서서 인큐베이터 안의 아기를 살펴보았다. 아기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매우 달콤하게 자고 있었기에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모두가 엎드려 있어서 진성은 한동안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하나하나 뒤집어 보았다. 애스릭의 사람들이 그냥 들어와서 그들을 다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고승혁 교수를 데려갔을 줄은 몰랐다.진성은 갑자기 윤아가 떠올랐다. 총소리가 그렇게 컸으니 윤아가 정신을 차리지 않았을 리 없다. 진성은 급히 모퉁이의 병상 옆으로 달려갔다.이불 속이 울퉁불퉁했다. 그는 처음에는 고승혁 교수 등이 윤아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고 생각했지만 열어보니 안에 베개가 있었다. 진성은 멍해졌다.“이 방은 밀폐되어 있는데 그들은 어디에 잡혀간 거지? 게다가 방금 내가 문 앞에서 지키고 있었으니 문으로 나갔을 리가 없어.”진성은 조급했다.갑자기
고승혁 교수는 숨을 헐떡이며 말하고는 바다 위를 바라보았다. 바다 위에 배가 한 척 있었는데 애스릭이 그 배에 있었고 많은 사람이 그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고승혁 교수는 깜짝 놀라 몇 발짝 뒤로 물러서며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현진성은 그에게 대답할 방법이 없어서 그를 붙잡고 비밀 통로로 갔다.권재민도 급히 한기현에게 연락해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했다.그러나 신호를 받자마자 재민은 기현 쪽에서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기현아, 무슨 일이야?”재민은 노심초사하여 급히 물었다.“방금 그 사람들이 들이닥쳐 시스템을 파괴했어. 최선을 다해 구조했으니 지금은 30분 정도 지연될 수 있어.”“시스템 복구가 시급한데 지금 그들과 싸우는 중이라……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어.”기현은 시스템 감시실에서 애스릭의 부하들과 싸우며 관제탑에 다시 접근하지 못하게 막으면서 권재민과 이쪽의 상태를 보고했다.보고하는 과정에서 재민은 기현의 끙끙거리는 소리까지 듣고는 더욱 마음이 급해졌다.“기아현, 너는 어때? 버틸 수 있겠어? 시스템 쪽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지금은 복구할 방법이 없어. 이젠 네가 나설 차례야. 우리가 살아나갈 수 있는 시간은 안 남았어요, 재민아.”“상대편은 사람이 너무 많은데 우리 사람은 이 몇 명밖에 없어. 버티기 힘들 것 같아, 재민아, 빨리 와.”기현이 헐떡이며 소리쳤다.재민은 이 소식을 듣고 마음이 급했지만 윤아가 이쪽에 있었기에 결정하기 어려웠다. 윤아가 힘없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서 매우 걱정했다.진성은 재민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내 부하들이 애스릭의 부하들에게 습격당했고, 그자들이 통제실의 시스템을 파괴했대요. 지금 우리 부하들이 그들과 싸우고 있는데 기현이도 그들에게 얽매여 시스템을 고칠 기회가 전혀 없어요…… 나는 윤아 씨가 마음에 걸려요.”재민은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가요, 여기 내가 있을게요. 기지 안에 내 사람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