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두 사람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두어 마디 나눈 후 바로 헤어졌다.손보미는 계속 도아린을 따라다녔다. 도아린이 분수 쪽으로 걸어가자 빠른 걸음으로 따라갔다.“도아린.”도아린이 발걸음을 멈추자 손보미는 그녀 앞으로 다가가 조롱과 도발 섞인 웃음을 짓더니 돌아서서 가짜 바위에 쾅 부딪혔다.“으악!”부딪힌 순간 손보미는 본능적으로 잡으려다가 네일이 끊어졌고 팔도 긁히고 말았다. 하얀 드레스에 피와 물이 가득 묻어 꼴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종업원이 비명을 듣고 달려오더니 바로 다른 사람에게 알리러 갔다.나영옥은 손보미를 가볍게 지나치고 도아린의 손을 잡았다.“손 괜찮아?”“괜찮아요.”손보미는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저 할망구 눈이 삐었나? 넘어진 건 난데 도아린한테 무슨 일이 있겠어.’사람들이 거의 모여들자 손보미는 눈가가 그렁그렁해지더니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아린 씨, 인터넷에 떠도는 기사 같은 거 믿지 마. 나랑 건후 씨는 진짜 그냥 친구야... 여러분, 내가 실수로 넘어진 거지, 아린 씨가 민 거 아니에요.”이해 능력을 테스트하는 때가 왔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지만 또 말한 듯했다.손보미가 울먹거리면서 가여운 척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그녀가 도아린을 무서워해서 일부러 거짓말을 한 거라고 생각했다.구경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이 모여들었다. 배지유는 손보미가 넘어진 걸 보자마자 불같이 화를 내더니 인파 속을 뚫고 뛰어 들어갔다.“도아린 씨! 하루라도 보미 언니를 괴롭히지 않으면 어디 덧나기라도 해요?”“지유야, 그런 말 하지 마...”“오빠가 당신이랑 이혼하겠다고 했길래 망정이지, 이러다가 나한테까지 손을 대겠어요. 당장 보미 언니한테 사과해요!”배건후와 손보미, 그리고 도아린의 복잡한 관계는 재벌들 사이에서 부풀릴 대로 부풀려졌다.어떤 사람은 도아린이 파렴치한 수단으로 배건후에게 매달리고 있기에 인과응보라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배건후와 도아린이 부부인데 끼어든 손보미가 내연녀라면서 내연녀를 가만두면 안 된다고
배건후는 눈살을 찌푸리고 도아린을 쳐다보았다. 잘생긴 얼굴이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도아린의 행동에 대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지유 씨, 자기 주제부터 알고 나대든지 말든지 해요.”도아린이 손을 툭툭 털었다.‘어우, 속 시원해.’“오빠!”배지유는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지난번에는 엄마에게 뺨을 맞았는데 오늘에는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도아린에게 맞았다.앞으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닌단 말인가!“입 다물어.”배건후가 그녀에게 호통쳤다. 그는 한 손에 배지유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손보미를 끌어당기고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구경하던 손님들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육민재가 걱정스럽게 말했다.“너희들 그동안...”도아린이 손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그녀와 배건후 사이에 이혼 얘기가 오갔다는 걸 육민재가 분명 들었을 것이다.“그때 민재 씨한테 물어보고 결혼할 걸 그랬어요.”어쨌거나 오랜 친구이니 배건후를 더 잘 알 것이다.도아린이 배건후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은 후 육민재는 사적으로 그녀를 찾아가 다시 한번 고려해보라고 했었다.친구들은 배건후의 마음속에 다른 여자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무턱대고 결혼하면 좋은 결과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아린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배건후와 결혼하지 않으면 남동생을 살릴 수 없었다.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육민재가 오늘 같은 결과를 예상하고 그녀를 말린 것 같았다.“나랑 결혼하면서 누구한테 의견 묻는다는 거야?”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도아린이 화들짝 놀랐다. 배건후가 다시 왔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손보미가 다쳐서 속상한지 배건후의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어두웠다.“어디 외국 가서 장기라도 팔라고 하면 팔 거야?”육민재가 입술을 적셨다.‘이건 나 들으라고 한 소리야?’“건후야, 그 뜻이 아니라...”배건후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아래턱을 들었다.“손님들이 널 기다리고 있어.”육민재는 이 자리에 더는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아 연회장으로 들어갔다.도아린도 그만
다른 사람들의 인맥 관리는 술이었지만 나영옥과 함께하는 인맥 관리는 선물이었다.“내 성의니까 받아줘.”“급히 나오느라 좋은 건 준비 못 했어.”두 어르신이 하고 있던 팔찌와 목걸이를 벗어서 도아린에게 건넸다. 뒤에서 도아린을 욕하던 사람들은 질투가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도아린 아주 고단수야. 남자를 홀린 건 물론이고 할머니들까지 제대로 구워삶았어. 어르신의 친구들이 최고 재벌까진 아니더라도 그래도 실력 있는 자들인데. 선물 하나도 일반 직장인들이 몇 년은 살 수 있는 정도야.’도아린에게 쏠린 이목이 더 많아지자 배건후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남들한테는 저렇게 순진하게 웃으면서 왜 나한테만 날을 세우는 건데?’도아린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말하기도 전에 나영옥이 먼저 가로챘다.“주는 건 받아. 다들 네가 올 줄 모르고 미리 준비 못 했어. 나중에 보상해줄게.”이렇게까지 얘기한 이상 도아린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배건후와 이혼하면 돈이 많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이 주얼리들이 딱 봐도 값어치가 어마어마할 것 같았다.“예쁜 할머니들 감사합니다.”도아린은 달콤한 말로 어르신들의 기분을 즐겁게 해주었다. 연회가 끝났는데도 도아린을 보내기 아쉬워했다.“시간 되면 운진에 놀러와.”“영산도 오고.”“할머니가 해남에서 기다릴게.”도아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방에서 펜던트를 꺼냈다.“저도 미처 선물을 준비하지 못해서요. 어르신들 아프지 마시고 하는 일마다 잘되길 바랄게요.”펜던트 여러 개를 한데 모으면 작은 공이 만들어졌다. 정교하긴 했지만 그리 비싼 물건은 아니었다.하지만 도아린을 예뻐했던 할머니들은 값어치에 상관없이 아주 마음에 들어 하며 받았다.가기 전 나영옥은 선물 카트에서 선물 몇 개를 꺼내 도아린에게 주었다. 도아린이 한 아름 안고 차에 타자 성대호가 화들짝 놀랐다.“아린 씨, 뭘 또 이렇게 챙겨가기까지 해요?”성대호가 혀를 끌끌 차면서 고개를 내저었다.“아린 씨처럼 알뜰한 여자를 찾았더라면 우리 어머니도 날 뭐라 욕하지
도아린이 미간을 찌푸렸다.‘배지유가 어르신께 준 선물이라고? 내 물건으로 인심을 썼어? 그나저나 나 왜 화를 내지? 금고 안의 주얼리도 다 필요 없으니까 건후 씨더러 마음대로 처리하라고 했으면서. 이 물건이 어떻게 이곳에 나타났든 나랑은 아무 상관이 없어. 화내지 말자, 화내지 말자. 나만 몸 상해. 근데... 왜 하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비취 팔찌란 말이야! 배건후 이 자식 일부러 그런 게 틀림없어!’도아린은 뒷좌석에 놓인 선물들을 전부 일일이 열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안에 손보미가 선물한 배추 모양 옥도 있었다.손바닥만 한 크기였고 너무 맑고 투명하진 않았지만 일부러 영수증을 안에 넣었다. 가격은 60억이 넘었고 배건후의 카드로 산 것이었다.‘대박!’도아린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건후 씨, 이혼하면 900억 달라고 했죠? 이 배추 모양 옥이랑 이 비취 팔찌 먼저 줄게요. 아마 백억 정도는 할 거예요. 나머지는 이혼 절차 마친 후에 줄게요.”배건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미쳤어?”“미쳤다니요? 아주 멀쩡해요.”도아린은 다른 선물들도 다시 박스에 넣었다.“너무 기뻐서 그러나 봐요. 곧 이혼할 수 있으니까.”배건후가 담배를 꽉 쥐었다.“네가 싫다고 한 거 지유가 그걸로 인맥 관리하는데 무슨 문제 있어?”도아린이 그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어르신이 준 건데 빚을 갚는 데 쓰면 무슨 문제 있나요?”배건후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화가 나서 담배를 꽉 쥐자 세 조각으로 부러졌다.“너 오늘 지유 때렸어.”도아린이 아래턱을 들었다.“유언비어 퍼뜨리면 감옥 가야 한다면서요? 뺨 한 대는 가벼운 거죠. 다음에 또 그랬다간... 우웁!”배건후가 갑자기 그녀의 입술을 막아버렸다.짙은 술 냄새가 풍겨왔고 그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배건후가 그녀의 허리 지퍼를 내리려 하자 도아린이 소리를 질렀다.“배건후 씨! 날 건드렸다간 성폭행으로 고소할 겁니다.”도아린은 그를 확 밀어내더니 입을 닦고는 차에서 내리려 했다. 그런데 배건후가 그
남자의 눈이 싸늘해지더니 바로 배지유에게 전화를 걸었다.배지유는 휴대전화를 내팽개친 채 한 남자와 침대 위에서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배건후와 함께 호텔을 나왔을 때 왠지 모르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도아린에게 맞아서 화가 난 게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 같았다. 경험이 많은 그녀는 배건후에게서 바로 벗어났다.“오빠, 뭐 좀 두고 나왔어. 먼저 보미 언니 병원에 데려다줘. 난 알아서 집에 갈게.”그러고는 바로 도망쳤다. 온몸의 열이 점점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마침 위층에 술집이 있었고 안에 호스트도 있다는 걸 배지유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카운터에 돈을 꺼냈을 때 이미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한 남자가 나른해진 배지유의 몸을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룸 들어가요.”술집 사장이 호스트를 데리고 왔을 때 배지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그냥 주는 돈이야?’배건후가 전화를 끊자마자 우정윤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손보미가 검사를 마치고 배건후를 만나겠다면서 울며 집에 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그가 손보미의 집에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나서야 손보미는 집으로 향했다.그녀는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고 눈물을 계속 뚝뚝 흘렸다.“건후 씨, 아린 씨를 계속 그렇게 내버려 두면 언젠가는 큰일 나...”손보미는 왼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의사가 가슴에 결절이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고 했었다. 가뜩이나 작은 가슴에 문제라도 생기면 큰일이었다.배건후는 담배에 불을 붙인 후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도아린이 밀었어?”손보미가 화들짝 놀랐다.‘지금 날 의심하는 거야? 전에는 내가 뭐라 하든 다 믿었었는데. 도아린이 민 게 아니더라도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나한테 돌을 던진 건 사실이잖아. 날 먼저 위로해야 하는 거 아니야?’손보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얼굴이 하도 말라서 웃지 않을 때면 더 속상해 보였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면서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귀국한 다음에 송 감독님의 작품을 하기로 했어. 관심도 많이 끌고 팬
담배가 아직 3분의 1이 남았는데도 배건후는 재떨이에 비벼껐다. 끓어오른 분노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손보미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화제를 돌렸다.“건후 씨, 만약 아린 씨가 여전히 민재 씨와 함께하겠다고 하면 두 사람 축복해줄 거야?”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는 데는 참으로 선수였다.‘여전히’라는 단어로 도아린이 처음부터 지금까지도 육민재와 결혼하고 싶어 한다는 뜻을 표현했다.3년 전에는 어쩔 수 없었지만 이젠 버텨냈고 육민재도 귀국했다. 모든 게 도아린의 뜻대로 되었으니 이젠 함께할 때도 됐다.그 한마디는 배건후의 분노를 제대로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밀었는지 여부의 대답도 손쉽게 피해버렸다.배건후는 손보미의 휴대전화를 들고 사진을 자기 휴대전화에 전송한 후 돌려주었다.“만약이라는 건 없어.”“...”손보미의 표정이 확 굳어졌고 들은 게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이혼하는 거 아니었어? 왜 만약이 없다고 하는 거야? 도아린이 후회해서 이혼을 번복한 거야, 아니면 건후 씨가 이혼을 거절한 거야?’손보미의 머릿속에 무서운 생각이 떠오르면서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자신이 생각하는 게 아니길 간절히 바랐다.그녀가 나긋하게 말했다.“나영옥 어르신이 아린 씨를 엄청 좋아하더라고. 마치 아린 씨가 손주며느리인 것처럼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니셨어.”손보미는 배건후가 듣기 싫어하는 말만 골라서 했다. 배건후가 점점 더 싸늘한 기운을 내뿜었지만 과격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이 일이 그냥 이렇게 넘어가나 싶던 그때 배건후가 갑자기 말했다.“아린이한테 사과해.”손보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뭐... 뭐라고?”휴대전화를 어찌나 꽉 쥐었는지 뼈마디가 다 하얗게 됐다.‘내가 왜 도아린한테 사과해야 해? 피해자는 난데!’배건후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쳤다.“네가 먼저 사과하면 도아린더러 사과하라고 할게.”손보미더러 사과하라고 한 건 사람들이 도아린을 의심하게 만들어서였고 도아린더러 사과하라고 한 건 손보미를 때려서였
배건후가 아무 말이 없자 손보미는 자신이 없었다. 더 완벽한 거짓말을 위해 바로 김지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어떻게 이렇게 덤벙거릴 수 있어? 다른 영수증을 나영옥 어르신의 생신 선물에 떨어뜨리면 어떡해? 선물은 성의가 있어야 하는 거 몰라? 선물이랑 영수증이 맞지 않아서 하마터면 망신당할 뻔했다고.”손보미가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한 김지민이 변명하려는데 손보미가 계속하여 말했다.“건후 씨가 날 데리고 생신 연회에 갔어. 이러면 배씨 가문의 체면도 깎인다고. 알아? 그동안 널 믿고 다 맡겼더니 보답을 이런 식으로 해? 변명 듣고 싶지 않으니까 내일 알아서 사직서 제출해!”그녀는 전화를 끊고는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 김지민이 다시 전화를 걸어올까 봐 꺼버렸다.“건후 씨, 오늘 일은 다 내 탓이야. 내가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어.”손보미가 화제를 돌렸다.“오늘 술 많이 마셨지? 내가 가서 해장국 끓여줄게.”“괜찮아.”배건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일찍 쉬어.”그의 단호한 뒷모습을 보며 손보미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잠시 후, 손보미가 남자 친구와 데이트하는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왔다....주현정은 그 기사를 보고는 아들을 호되게 꾸짖었다. 설명하기 귀찮았던 배건후는 전화를 끊고 계속 서류를 처리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주현정이 문자를 보냈다. 식당을 예약했으니 배건후더러 도아린과 함께 밥 먹으러 가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사진도 찍어 보내라고 했다.도아린은 옷을 수선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어젯밤 일 때문에 너무도 화가 나 꿈에서도 배건후와 싸우고 있었다. 그러니 상냥하게 전화를 받을 리가 없었다. 전화가 연결된 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도아린... 도아린?”배건후는 신호가 좋지 않은 줄 알고 끊은 후 다시 걸어왔다. 그 모습에 도아린이 코웃음을 쳤다.‘처음으로 이렇게 끈질기게 전화하네? 전에는 내 전화를 그렇게 잘 끊더니.’배건후가 세 번을 걸어서야 도아린의 싸늘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말해요.”“내 목
도아린은 허리를 곧게 펴고 이마의 잔머리를 귀 뒤로 넘기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앞을 쳐다보았다.배건후의 어두운 시선이 도아린에게서 대시보드 위의 휴대전화로 향했다.영상통화를 켜고 있었는데 화면에 두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펜을 잡고 부들부들 떨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장수현과 태연한 모습의 남궁유민이었다.도아린이 시작해도 된다는 소리에 장수현은 다급하게 원고지를 들었고 휴대전화에 남궁유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배건후 씨, 도아린 씨와 이혼 및 4천억에 관한 부속 합의서를 작성하실 의향 있으십니까?”배건후는 대답하지 않고 도아린을 보며 싸늘하게 말했다.“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지난번에 내 뜻대로 해주겠다고 하더니 약속 지키지 않아서 믿음이 안 가서요.”도아린이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래서 이번에는 양측 변호사가 보는 앞에서 하려고요. 모건 그룹의 대표인데 설마 약속을 어기진 않겠죠?”배건후의 시선이 다시 휴대전화로 향했다.“의향 있어요.”도아린이 계속하라는 제스처를 보냈다.차에 타기 전 그녀는 두 변호사에게 상황을 알려줬다. 남궁유민이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말했다.“도아린 씨는 잠시 이혼을 꺼내지 않고 배건후 씨와 주현정 여사의 앞에서 사랑하는 부부인 척 연기를 한다. 주현정 여사가 두 사람의 이혼을 받아들이거나 배건후 씨가 먼저 이혼을 요구할 경우 도아린 씨는 900억 원의 빚을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배건후 씨는 도아린 씨에게 보상으로 현금 4천억 원을 준다.”배건후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핸들을 어찌나 꽉 쥐었는지 손등의 핏줄이 다 튀어나왔다.차 안이 하도 조용해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았다.장수현은 화면만 봐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져 테이블 밑의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다. 속으로는 정의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사회의 쓴맛을 본 후에는 권력 앞에 허리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도아린의 변호사가 되는 건 엄청난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소송에서 지면 고객에게 미안하고 이기면 배건후가 절대 그를
JS 픽처스의 고위인사는 배석준을 알고 있었기에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앞으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배 대표님, 또 해외로 가신 줄 알았습니다.”“현정이의 몸이 나아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좀 더 머물다가 가려고 합니다.”배석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평소에 연회에 거의 참가하지 않는 연예인들이 참석한 것을 보고 주현정이 JS 픽처스에서 지위가 여전히 굳건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들은 각종 이유를 찾아 함께 공식 석상에 나타나기를 거부했지만, 약속이나 한 듯 카메라 앞에서는 활짝 웃었다. 그들은 모두 주현정 덕분에 잘 되었기에 체면은 반드시 살려주어야 했다.“크흠.”배지유는 배석준에게 자신을 소개하라고 헛기침을 했다.“아, 우리 딸이 마침 해남대학교에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어서 데리고 왔습니다.”배석준을 둘러싼 고위인사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주현정은 배지유가 연예계의 나쁜 물을 먹을까 봐 현역일 적에 절대 배지유를 데리고 활동에 참석하지 않았다. 고위인사들도 그저 주현정에게 딸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본 적은 없었다.반응이 빠른 누군가가 술잔을 들며 공손하게 말했다.“따님은 주 대표님과 배 대표님의 우수한 점을 다 닮으셔서 단정하고 청초하십니다. 우리가 올해 새로 영입한 신인보다 예쁘신 것 같습니다.”“맞아요. 해남대학교의 대학원을 다닌다고 하시니 예쁘시고 학식도 많으시네요. 지금 업계에서는 이렇게 완벽한 인재를 제일 좋아합니다!”배지유는 칭찬을 듣고 얼굴이 발그레해졌고 그녀는 두 손으로 팔걸이를 잡고 살짝 몸을 앞으로 했다.“죄송합니다. 제가 발을 삐끗해서 일어서서 인사를 올리지 못하겠네요.”“별말씀을요. 발을 삐끗하면 잘 치료해야 해요. 젊고 예쁘신데 후유증을 남기면 안 되죠.”좋은 마음으로 한 말이지만 배지유의 마음속에서는 저주로 들렸다.그녀는 발 한쪽을 다친 게 아니라 다리 하나를 잃었다. 나머지 생은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다.배석준은 배지유의 성격을 알기에 그녀가 난리를 피울까 봐 얼른 다른 곳으로
주현정은 말투가 가라앉았고 표정이 엄숙했다.“남자의 내연녀로 이십몇 년을 있다가 아이까지 낳았는데도 결혼을 하지 못했으니 어른이 화병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가 있나. 도아린의 양아버지는 양어머니의 혼수를 가로챈 것도 모자라 목숨까지 위협했어.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은 딸의 효도를 받을 자격 없어!”현장에는 여자 연예인들도 많았다.같은 딸의 마음으로 이렇게 심란한 일들이 있었는데 어떻게 효도를 할 수 있겠는가?그들은 도아린이 매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도아린이 양어머니를 위해 복수를 했다고 여겼다.강홍련은 주위 사람들이 모두 도아린의 편을 드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은 견딜 수 있지만 방금 자신의 말이 강씨 가문에게 영향을 줄까 봐 두려웠다.그녀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도아린은 단호한 눈빛으로 목소리를 높였다.“강씨 어르신은 사적인 감정으로 공적인 자리에서 복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강씨 어르신께서 좋은 마음으로 당신을 받아주었는데 당신은 밖에서 어르신의 명성이나 흐리고 다니면 안 되죠. 농부와 뱀의 이야기를 재희 씨도 들어봤을 거로 생각해요.”도아린은 강씨 어르신의 편에 섰는데 강재희는 반박할 수 없었다.여론에서 아버지의 대회에 흑막이 있다는 일로 들끓던 것이 금방 사그라들었는데 강홍련 저 멍청이 때문에 다시 수면으로 올라왔다.주현정은 도아린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조금도 용납할 수 없었다.“도아린은 제 딸이고 JS 픽처스의 후계자예요. 강씨 가문에서 이렇게 제 딸을 치욕스럽게 하다니, 저희 협력은 앞으로 계속하지 않을 생각입니까?”강재희는 눈썹을 꿈틀했다. 그녀는 도아린이 연회에 참가한 것은 단지 주현정과 예전에 시어머니와 며느리 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주현정이 도아린을 딸로 삼고 JS 픽처스의 후계자로 생각한다는 것은 예상치 못했다.만약 도아린과 모순이 격화된다면 앞으로의 협력에는 장애가 생길 것이다.“강홍련 씨, 사과해요!”강홍련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강재희는 지금 자신을
도아린의 표정은 아주 평온했다.진열대에 있는 다이아몬드의 빛이 꺾이어 그녀의 눈동자를 비춰 유독 눈부셨다.강홍련은 그녀의 앞으로 가서 섰다.강홍련은 도아린보다 머리 하나쯤 작아서 고개를 들어 도아린을 바라보았는데 도도한 척하는 모습이 광대 같았다.“네가 JS 픽처스에게 ‘봉황의 시대’를 광고하도록 넘겼는데 강씨 가문의 고급 주얼리들은 모두 JS 픽처스의 연예인들이 광고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했어. ‘봉황의 시대’와 JS 픽처스의 연예인이 동시에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당연하게 ‘봉황의 시대’가 강씨 가문의 것으로 생각하게 될 테지.”이게 바로 연예인을 찾아 광고하는 이유였다.예를 들어 어떤 톱스타가 운동화의 모델이 되었다면 그가 나타났을 때 팬들은 어떤 브랜드의 신발을 신었는지 알게 된다. 따로 브랜드를 찾아볼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도아린은 도덕과 재능을 겸비한다는 말로 강씨 가문에게 치욕을 안겨주었지만 결국은 강씨 가문이 이득을 보게 되는 것이다.“강씨 가문에서 이득을 보는 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죠?”도아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나는 강씨 가문의 사촌이야!”강홍련은 불쑥 얘기했다.“강씨 가문에서 손보미를 밀어준다면 배건후와 결혼할 수 있어. 강씨 가문에서 안씨 가문을 지지한다면 내 아들은 안씨 가문의 딸과 결혼할 수 있는 거야!”“그래서요.”강홍련은 도아린이 모른 척할 줄 몰랐고 그녀의 코에 대고 얘기했다.“그래서 나한테 잘하라고. 그러면 강씨 가문에서는 네가 해남에서 살아나갈 기회라도 줄 수 있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너의 대회 성적을 조작하는 것은 물론 너를 디자인 업계에서 쫓아내는 것도 일이 아니지. 내 삼촌 강태식은 이 바닥을 꽉 잡고 있어. 내 삼촌이 뭐라고 하면 그대로 따라야 하는 거야. 너의 ‘봉황의 시대’도 잘난 척할 거 없어. 언론에서 만들어준 것뿐이야. 만약 삼촌의 학생들이 다 그게 별로라고 얘기한다면 너를 따르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질 거야!”많은 손님이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다가 강홍련의 지나친 말에 시선을 두
“아빠가 방법을 대서 가볼게. 너는 오지 마.”배석준은 배지유가 걱정되었다. 지난번에 배지유가 밖으로 나갔다 왔을 때도 돌아와서 다리가 아파 잠이 들지 못했다.배지유는 붉어진 눈으로 애원했다.“제 친구들은 제가 아직 안에 갇혀있는 줄 알아요! 아빠랑 제가 함께 엄마의 연회에 간다면 매체에서는 저희 세 식구의 화목한 모습을 찍게 될 것이고 소문들은 자연스레 사그라질 거예요!”배석준은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딸의 명성은 도아린 때문에 엉망이 되었다.돌이킬 방법을 계속 찾지 않는다면 배지유가 해남대학교로 돌아갔을 때 반드시 동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조롱당할 것이다.“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메이크업과 코디를 해줄게.”배석준이 데리고 온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김지민이었다.김지민은 연예계를 잘 아는 사람이라 참석하는 연예인들이 무슨 브랜드를 입었는지 알아냈다. 배지유는 똑같은 옷을 입으면 안 됐고 다리의 흉터를 가릴 수 있으면서 예쁘고 매력적이어야 했다.이 부분에서 김지민은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배지유는 만족스럽게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다.그녀의 치마를 들지 않는 이상 그녀가 다리 하나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물어보면 발을 삐끗해서 휠체어를 탔다고 하면 될 것이다.이런 장소에 김지민은 절대 나타나서는 안 되므로 부녀가 떠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연회장의 중심에는 도아린이 검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고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는 현장에 있는 연예인들의 시선을 끌었다.이 여자의 아름다움이 너무 지나쳤다.연예계의 스타들은 자주 레드카펫을 밟고 시상식에 참가하므로 어떻게 분위기를 휘어잡는지를 잘 알고 자신이 어느 각도에서 가장 예쁘게 찍히는지도 알고 있었다.도아린은 처음 보는 얼굴이고 업계에 대해 영향력이 큰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다 자신감이 넘쳤다.그녀가 스크린 앞으로 가서 사인할 때 스크린에는 ‘봉황의 시대’의
도아린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그녀의 덤덤한 눈빛은 ‘라윤주’의 이름을 듣고 초점을 잃었다.“뭐라고요?”“...”육하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두 사람은 잠시 침묵하다가 육하경이 말을 이었다.“향 주머니로 화를 면한 것은 우연이에요. 정말 저를 도왔던 것은 세인트존스 호텔의 책임자가 되게 만들었던 것이죠.”육하경은 입꼬리를 올려 조롱하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어르신들을 3일이나 괴롭혀서야 알아냈어요. LY에서 저를 후임자로 추천했다고 하더라고요.”육하경의 학업은 각 부분에서 다 뛰어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고 육씨 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실력이 좋을 뿐만 아니라 빽빽이 필요했다.육민재를 예로 들어보면 능력은 가장 뛰어나지 않을지는 몰라도 맏아들의 장손 혈통을 이어받아 어렸을 때부터 최고로 좋은 자원과 경험을 쌓을 기회들을 누리고 있었다. 이변이 없다면 그는 육씨 가문의 후계자일 것이다.다른 사람들이 두각을 나타내려면 모든 게 알맞게 부합되어야 한다.육하경은 모든 것을 통찰하고 있었고 육씨 가문의 산업에 기대를 두지 않아 오랜 시간 밖에서 떠돌며 공부를 했고 자신의 사업을 하고 싶었다.세인트존스 호텔의 관리 권한이 그의 손에 들어갔을 때, 그는 기쁘기도 놀랍기도 했다.놀란 마음으로 육하경은 전임자를 찾아갔고 온갖 방법을 다 써서야 LY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육씨 가문 뿐만 아니라 많은 명문가가 LY와 관계가 있었고 그들은 인재를 추천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을 도와주었기에 자연스레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육하경은 그때 손에 향 주머니를 들고 있었는데 전임자가 이상해하며 무늬를 찍어서 물어보았는데 그것은 ‘추천서’라고 하는 것이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하경 씨가 말하는 그 이야기에도 관심 없습니다.”도아린은 책을 육하경에게 돌려주고는 차 문을 열었다.“도아린 씨!”육하경은 그녀를 잡고 싶었지만, 손을 허공에 멈추고 결국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육하경
하지만 아쉽게도 그가 보게 된 것은 싫증뿐이었다.도아린은 힘을 주어 방심하고 있던 배건후를 밀어냈고 뒤돌아 걸어갔다.배건후는 빠르게 따라가서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도아린, 나한테 시간을 줘.”배건후가 잡은 손목의 위치가 마침 도아린이 떨어질 뻔했을 때 배건후에게 잡힌 위치였다. 도아린은 느껴지는 고통에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배건후의 손을 때렸다.“이거 놔!”“친구 사귀지 마.”배건후의 목소리가 떨렸다.“서둘러 친구 사귈 생각하지 말고... 나한테 시간을 줘.”도아린은 배건후에게 발길질을 했고 배건후는 피하지 않았다. 바지에는 발자국이 하나 생겼지만, 여전히 그녀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이거 안 놓으면 사람 부를 거예요. 육씨 가문에서는 당신이 함부로 하게 놔두지 않을 거예요!”배건후의 힘이 조금 빠진 틈을 타서 도아린은 빠르게 손을 빼내고 자리를 떴다.나영옥은 도아린이 손목이 빨갛게 된 채로 한참이 지나 돌아온 것을 보고 묻지 않았고 가정부에게 도아린한테 식사를 올려달라고 했다.배건후가 돌아왔을 때, 육하경이 작은 숟가락으로 게살을 발라서 도아린의 앞에 놓아주는 것을 보았다.“내일 하경 오빠가 아린 씨와 함께 봉사활동을 간다고 하는데 저희도 함께 가요.”육청아은 갈비를 하나 집어 배건후의 접시에 놓았다.배건후는 가정부를 불러 접시를 바꿔 달라고 했다.“...”식사를 마친 후, 육하경은 도아린을 자신의 차에 태우려고 했다.배건후는 펑 하고 소리를 내며 차 문을 닫았다.“아린이 지금 사는 곳은 외부인에게 발설하기 불편해.”도아린은 자신의 주소를 많은 사람이 알기를 바라지 않는 게 맞지만, 배건후와 단둘이 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배건후가 미쳐서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이다.”“하경 씨는 외부인이 아니에요.”도아린은 차를 빙 돌아가더니 반대편으로 올랐다.육하경은 바로 얼굴에 웃음을 띠었고 배건후의 어깨를 툭툭치고는 운전석에 올랐다.육씨 가문을 떠나 시 중심에 들어서자 도아린이 갑자기 말했다.“앞에
“아!”육청아가 비명을 지르며 일어섰다. 그녀의 앞에 있는 테이블보는 다 젖었고 찻물이 그녀의 치마를 적셨다.“죄송해요.”배건후는 주전자를 놓고 자신의 냅킨으로 그녀의 앞에 있는 테이블보를 닦았다.육청아는 도아린을 흘겨보고는 치마를 정리하러 갔다.작은 소란이 일었어도 맞은 편에 앉은 두 사람은 얘기를 나누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나영옥이 잔소리를 했다.“나이가 얼마인데 아직도 저렇게 칠칠치 못한 거야. 단정하지 못해.”도아린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고 웃음을 짓던 두 눈은 어리둥절했다.“천사 보육원이 압류당했는데 세인트존스 호텔의 수선 계획은 계속할 거야?”배건후는 육하경과 도아린의 대회를 끊었다.그는 소매를 말아 올렸고 손목에는 빨간 끈이 드러났다. 그의 행동이 나른하고 관능적이었다. 도아린은 그게 눈에 거슬렸다. 이혼한 마당에 이런 물건으로 그녀를 치욕스럽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가서 손을 씻고 올게요.”도아린은 일어서서 자리를 떴다.육하경의 시선은 그녀를 따라가며 배건후의 말에 대답했다.“수선 계획은 변하지 않아. 우리는 책임감이 있는 사람을 찾아 전적으로 책임지게 할 거야...”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건후도 일어서서 자리를 떴다.객실의 화장실은 세면대가 밖에 있었는데 도아린이 수도꼭지를 틀려고 할 때 여자 화장실 안에서 누군가가 전화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상대방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는데 도아린은 ‘배건후’와 ‘네티즌을 산다’라는 얘기를 어렴풋하게 듣게 되었다.도아린이 화장실의 문을 열자 육청아은 빠르게 핸드폰을 막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칸막이가 있는 쪽으로 들어갔다.밖에서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고 도아린은 변기에 앉았다가 일어서서 물을 내렸다.문을 열자마자 역시 육청아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도아린 씨.”육청아은 계속 웃는 표정이었지만 기분 좋은 웃음이 아니라 도발의 의미를 담고 있는 웃음이었다.“당신이 배지유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그녀는 입으로는 미안하다고 하지만 비아냥거리는 눈빛이었다.도아린은 그녀가 배건후한테 정말 진심인지 아닌지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육청아가 이상하게 그녀를 경계하는 느낌을 받았다.나영옥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너희들은 다 나가 있어. 아린이랑 할 얘기가 있어.”육청아는 육민재와 함께 문 앞까지 갔다가 뒤돌아 도아린을 한번 보더니 핑계를 대서 육민재와 갈라졌다.나영옥은 도아린에게 어쩔 예정인지 물었다. 요즘 모건 그룹에 불미스러운 일들이 있지만, 연성에서의 지위는 쉽게 흔들리는 게 아니었다.만약 도아린이 도움이 필요하다면 배씨 가문에서는 도울 수 있지만, 배건후의 반대편에 서는 것은 절대 안 될 일이다.재벌의 관계는 오래된 나무의 뿌리처럼 가닥이 많고 복잡해서 하나를 건드리면 모든 게 흔들리게 된다.“진씨 가문의 부모님은 너한테 잘해줘?”나영옥은 도아린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물었다.“저한테 엄청 잘해주세요. 두 오빠도 잘해줘요.”“그럼 다행이야. 청아의 말은 마음에 담아두지 마. 그 녀석은 어렸을 때부터 경솔하게 행동하는 면이 있었어. 기어코 바위에 부딪히려 하거든 가라고 해. 손해를 봐야 정신을 차리지.”도아린은 담담하게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영옥은 또 그녀와 친한 친구를 언급하였는데 해남에 사는 여씨 어르신이었다.“시간이 나면 나 대신에 가서 만나서 안부를 전해줘.”나영옥은 편지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주었고 전해달라고 했다.도아린은 조심스레 편지를 넣어두고 꼭 찾아뵙겠다고 얘기했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중에 밖에서는 말소리가 들렸고 육청아의 발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나영옥의 표정에서는 불쾌한 기색이 보였지만 꾸짖지 않았고 도아린을 배웅하기 위해 가정부에게 식사를 준비하라고 했다.도아린이 나영옥을 부축하고 나왔을 때 정자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배건후의 잘생긴 얼굴은 차가웠고 넥타이를 매지 않고 셔츠는 살짝 열고 있었다. 꾸민 듯 안 꾸민듯한 모습이 매력적이었다.육청아는 그의 곁에 서서 고개를 들
도아린은 SNS에 새가 새장 밖으로 날아가는 사진을 올렸다. 자신이 마침내 자유를 얻은 것을 축하하는 뜻에서였다. 잠시 후, 음식을 배달시켜려고 하는데 문득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집안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주방에 들어가 냉장고를 열었고 그 안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신선한 재료와 과일들로 가득했다. 큰오빠의 배려에 감동했다. 가뜩이나 바쁜 사람인데 연성으로 돌아온 그녀가 걱정돼서 이리 모든 것을 준비해 주다니...진수혁에게 감사의 문자를 보내려는 그때, 육민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연성에 돌아온 거야?”“네.”“할머니가 아린 씨 많이 보고 싶어 하셔. 잠깐 들렀다 갈래?”“위치 보내줘. 내가 데리러 갈게.”이번에 연성을 떠나면 중요한 일이 없는 이상 다시는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한테 작별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았다. “혼자 갈 수 있어요.”전화를 끊은 그녀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대표님, 사모님... 아니 아린 씨가 집을 나섰습니다.”그에게 물병을 건네던 유정윤은 길가에 서서 차를 기다리는 도아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그가 물병을 건네받으며 약을 입에 넣었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입술이 파래졌다. 잠시 후, 통증이 조금 누그러지자 그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따라가.”“네.”고개를 끄덕이던 우정윤은 이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사실 오늘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이사회 사람들에게 붙잡혀 회사로 끌려가 회의에 참석했다. 사람들은 모건 그룹의 다음 계획에 대해 대책을 세우라고 그를 닦달했다. 그러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깨닫고 그는 재빨리 구청으로 달려갔고 마침 배석준이 도아린에게 손을 대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하루 종일 밥도 먹지 못한 탓에 위가 또 말썽인 듯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진 후, 위병은 점점 더 심해졌고 진통제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그녀가 탄 택시가 익숙한 길로 접어들자 그의 눈빛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