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정은 배지유를 쳐다보았다.어떻게 미운 말만 쏙쏙 골라서 하지? 뺨이라도 한 대 날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배지유 따위 안중에도 없는 도아린은 시선을 돌린 채 무덤덤하게 말했는데, 이런 모습이 더욱 화를 유발했다.“이혼하기 전까지 건후 씨는 내 거죠. 오빠 돈을 쓰면서 감히 새언니에게 대들어요?”배지유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면서 배건후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빠, 보미 언니한테 선물하고 싶은 드레스를 발견했는데 오늘 연회장에 입고 가면 만인의 주목을 받는 존재가 될 것 같아요.”그리고 일부러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스피커 모드로 바꿨다.도아린이 배건후의 돈을 쓰면 뻔뻔하다고 생각할 테지만 손보미의 드레스는 무려 선물이지 않은가?전혀 다른 두 가지 개념은 절대적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차이가 있다.도아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를 피했다.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배건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 카드 긁어.”배지유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올렸다. 역시나 그녀의 예상대로 손보미와 함께 있다고 말하자 오빠는 허락 없이 외출한 자신을 딱히 나무라지 않았다.난감한 기색이 역력한 손보미는 도아린만 보이는 각도에서 조소를 머금었다.배씨 가문 사모님이면 다 인가? 정작 남편과 시동생은 그녀의 편인데.어차피 불치병에 걸린 주현정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죽고 나면 배씨 가문의 새로운 안방마님은 본인이 될 것이다.그때가 되면...도아린은 시종일관 무심한 얼굴로 가게를 구경했고, 셋을 상대할 생각조차 없었다.전화를 끊고 나서 배지유의 목소리 톤이 한층 높아졌다.“언니, 오늘 저녁 첫 번째 댄스 타임에서 우리 오빠랑 같이 춤춰요.”이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점장이 돌아와 손보미의 앞에 멈추어 섰다.“실장님께서 이 드레스는 사모님을 위해 맞춤 제작했다고 했어요. 지금이라도 찾아와주셔서 정말 기쁘다고 하시네요. 돈 안 내도 되니까 선물로 그냥 드린대요.”손보미는 어안이 벙벙했다.그녀에게 이런 지인이 있었나?이내 팬일 지도 모른다고 여기고
유미주는 씩씩거리며 손보미를 흘겨보았다. 모르는 사람이면 모른다고 하지, 괜히 욕먹게 해서 이번 달 보너스만 날리지 않았는가?“방금 자기 것도 아닌데 억지로 붙잡는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냐고 말한 사람이 누구더라? 물론 전제는 본인이 빼앗아 갈 능력은 되어야겠지?”이미 짜증이 머리끝까지 난 소유정은 인정사정 따위 봐주지 않고 말했다.손보미는 손가락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었다.조신하고 아량이 넓은 설정만 아니었다면 소유정의 머리카락을 전부 쥐어뜯고도 남았을 것이다.인기도 없는 무명 가수 따위가 감히 그녀를 비웃다니?더욱 황당한 건 지난 3년 동안 집에서 가정부와 다름없던 여자가 직장을 다닌 경험도 전무한데 무려 일류 디자이너와 친구라는 점이었다.아직 통화 중인지라 서대은은 마지막 지시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미주 씨, 매장 입구에 ‘손보미와 배 씨는 입장 금지’라는 안내문을 적어 줘. 우리가 돈이 없어? 특히 내연녀가 소비하는 돈은 공짜로 줘도 받지 마.”혐오스러운 말투는 누가 들어도 적대시하는 느낌이다.실대표가 지시한 이상 유미주는 일개 고용직으로서 즉시 화이트보드에 경고문을 작성했다.비록 배건후는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만 실명을 거론하지 않기에 본인이 굳이 인정하고 싶다면 말릴 생각은 없었다.화가 머리끝까지 난 배지유는 도아린을 노려보며 말했다.“보미 언니가 망신당하는 꼴을 지켜보려고 시치미 떼고 있었던 거예요? 정말 악랄한 여자네요. 징그러울 정도로 뻔뻔스럽군!”배지유의 말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도아린의 심장에 박혔지만 이제는 아무런 타격도 없었다.그녀는 피식 비웃었다.“와이프가 버젓이 있는데 기어코 그 자리를 꿰차려고 할 때는 언제이고, 만약 디자이너 실장이랑 통화하지 않았더라면 염치 불고하고 드레스를 가져갔을 거잖아요? 본인이 추잡스러운 짓을 저질러 놓고 되레 남한테 바가지를 뒤집어씌워요?”싸늘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손보미는 이참에 본색을 드러낼까 싶었다.그녀가 알고 있는 도아린은
그동안 해외에 있었지만 국내의 사업을 계속 지휘하고 있었다. 육씨 가문의 상속자가 되기 위해서.그는 긴 복도를 지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손보미와 배지유가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누군가 손보미에게 축하를 보내자 그녀는 웃으면서 아니라고 했지만 쑥스러워하는 표정은 곧 좋은 일이 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오빠는 왜 아직도 안 오죠?”배지유는 도아린이 망신당하는 모습을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었다.손보미는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 배건후가 도아린과 함께 공개적인 자리에 참석하는 게 극히 드문데 오늘 이런 성대한 자리에 데리고 왔다는 건 다른 목적이 있어서일까?“도아린 씨가 다 준비하길 기다리나 보죠.”손보미가 배지유의 말에 대꾸했다. 그러자 배지유가 이를 꽉 깨물었다.“걔 얘기는 꺼내지도 말아요. 이름만 들어도 역겨우니까. 우리 오빠는 그런 여우 같은 여자를 왜 좋아하나 몰라요.”도아린이 준비를 마치고 나와 보니 배건후의 은색 마이바흐가 밖에 세워져 있었다. 오늘 운전기사 조수현이 없어서 배건후가 운전하기로 했다.그녀가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잔잔한 파도가 모래사장에 밀려왔다가 다시 밀려가는 것처럼 치맛자락이 흩날렸다. 가뜩이나 피부가 하얀데 실버 드레스까지 입으니 마치 늦은 밤에 도망쳐 나온 인어공주 같았다.배건후의 시선이 도아린의 섹시한 어깨에 닿은 순간 그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배건후와 행사에 참석할 때 이렇게 예쁘게 꾸민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생각에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라 담배를 확 부러뜨렸다.도아린은 그녀가 손보미의 드레스를 빼앗아서 배건후가 화를 낸다고 착각했고 배건후는 도아린이 다른 남자 때문에 예쁘게 꾸민 것이라고 착각했다.가는 길 내내 분위기가 무겁기 그지없었고 누구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유리창에 비친 배건후를 쳐다보았다. 어두운 정장에 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고 블루다이아몬드 넥타이핀이 옷소매와 아주 잘 어울렸다. 차갑고 귀티 나는 왕자 같았다.이 스타일
배건후가 손목에 실로 딴 붉은 팔찌를 하고 있었는데 팔찌 가운데 금색 오팔이 몇 개 있었다.도아린은 온몸이 굳어버리면서 눈빛이 급격하게 흔들렸고 호흡마저 불안정해졌다. 배건후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여전히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오늘 커프스단추 찾다가 찾았어.”도아린은 떨리는 마음을 애써 눌렀고 배건후의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화장실 다녀올게요.”배건후는 그녀의 다급한 발걸음을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육민재의 시선이 배건후의 손목에 닿았다. 아직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알아채지 못했다.“이 빨간 팔찌는 무슨 의미라도 있어?”“없어.”배건후는 담뱃재를 털면서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오늘 저녁에 손님들이 많이 왔구나. 가서 손님들 맞이해.”그러고는 도아린을 따라갔다.도아린이 손보미가 아까 있었던 자리에 갔을 때 손보미는 그곳에 없었다. 마음을 가라앉히자 빨간 팔찌가 눈에 맴돌았다. 3년 동안 보이지 않아서 배건후가 버린 줄 알았는데...그때 그 빨간 팔찌가 아니었더라면 사람을 잘못 봤을 리도 없었다.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도아린은 정자에 들어가 앉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그녀가 있는 줄 모르고 뒷담화했다.“도아린 봤어? 무슨 낯짝으로 여길 왔는지, 참. 내가 다 민망하더라고. 근데 걔는 민재 도련님이랑 배 대표님 앞에서 아주 예쁜 척하더라?”“낯가죽이 두꺼운데 뭔 짓인들 못 하겠어. 배 대표님 조건이 얼마나 좋아. 그때 당하고 아직도 트라우마에서 못 벗어났어.”“그러게 말이야. 근데 손보미가 귀국했으니까 상황이 달라졌어.”대화 소리가 갑자기 끊기더니 다급하게 지나가는 발걸음 소리만 들렸다.도아린은 마음을 완전히 가라앉히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계단을 내려가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한 남자의 품에 와락 안기고 말았다.“죄송합니다...”립스틱이 상대의 옷깃에 묻고 말았다....화이트 드레스를 입은 손보미는 마치 예쁜 꽃처럼 여리여리했다.“오빠한테 전화해볼까요?”배지유의 말이
그러다가 배건후에게 들킬까 봐 살짝 도발만 하고 휙 가버렸다....다행히 상대가 도아린의 어깨를 잡은 덕에 넘어지진 않았다. 도아린이 재빨리 거리를 넓히고 고개를 든 순간 머리가 쭈뼛 서는 것 같았다.“여긴 왜 왔어요?”배건후의 시선이 그녀의 입가에 묻은 립스틱으로 향했고 눈빛이 차갑기 그지없었다.“누구 찾아?”“길을 잃었어요.”도아린이 마음을 가라앉히긴 했지만 조금 켕기는 게 있긴 했다. 배건후는 그녀를 정자 쪽으로 밀어붙이더니 손을 내밀어 빨간 팔찌를 보여주었다.“이거 보니까 괴로워?”알고 보니 그의 계획이었다.도아린이 고개를 들고 쳐다보자 배건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왜 이렇게 긴장해? 이 팔찌 때문에? 아니면 팔찌 뒤에 숨은 일 때문에? 아니면... 그 사람 때문에?”도아린은 등골이 다 오싹했다. 배건후는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치욕을 잊지 않았다.“도아린.”배건후의 말투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비꼬는 듯한 말투에 도아린은 마치 밧줄로 목을 조른 것처럼 머리가 지끈거렸다. 뒤로 한걸음 물러나자 기둥에 부딪히고 말았다.배건후는 다시 바짝 다가가 내려다보며 말했다.“도아린, 그때 그 일 계획이었어? 아니면...”“사람 잘못 보지 않았더라면 절대 건후 씨 방에 들어가지 않았어요.”도아린이 그의 말을 잘라버렸다. 아무 의미도 없는 질문을 그는 여러 번이나 물었다. 진실이 그렇게 중요할까?배건후는 갑자기 도아린의 허리를 감싸 안고 품 안으로 잡아당겼다.“내 얼굴 봤을 때 죽이고 싶었지? 만약 민재였더라면 엄청 다정했을 텐데. 널 병원까지 가게 하지도 않았고.”“배건후 씨, 그 입 다물어요!”‘입 다물라고?’배건후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3년을 버티니까 민재가 돌아왔네? 아까 내가 잡지 않았더라면 민재 품에 안겼겠어.”그는 도아린의 드레스를 보며 싸늘하게 웃었다.“일부러 걔랑 커플룩으로 맞춰 입기까지 하고. 근데 아쉬워서 어쩌나. 그때 민재가 널 버렸는데 지금 한 번 다녀온 널 쳐다보기나 할까?”배
먼 곳의 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하도 조용해서 서로의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였다.배건후는 엄지손가락으로 도아린의 얼굴을 쓰다듬었다.“어머니 건강을 위해서 이혼하지 않기로 했어.”도아린은 조롱 가득한 그의 두 눈을 빤히 보면서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건후 씨, 어머님을 핑계로 대지 말아요. 그때 일 때문에 화가 나서 일부러 날 못살게 구는 거잖아요. 난 그렇다 쳐도 손보미 씨를 이렇게 내버려 둘 거예요?”그의 두 눈이 어찌나 깊은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아예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도아린을 밀어내고 옷을 정리하자 그녀도 재빨리 드레스를 여미고 화장을 수정했다.도아린이 수정을 마친 후 배건후는 어디로 갔었는지 연회가 시작돼서야 다시 돌아왔다.오늘 생일 연회의 주인공 나영옥은 육민재의 부축을 받으며 연설했다. 연설이 끝난 다음에 선물 증정식이 이어졌다.재벌인 그녀가 못 본 게 뭐가 있겠는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은 속물이나 마찬가지였다. 하객들이 줄을 서서 선물을 주자 나영옥은 웃으면서 옆 카트에 놓으라고 했다.배건후가 준비한 선물은 맑고 투명한 비취 목걸이였는데 평안을 뜻했다.도아린도 재빨리 선물을 꺼냈다. 사실 두 사람이 선물 하나만 준비해도 됐었다. 이런 행동은 오히려 그와 관계를 끊고 싶어 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십상이었다.배건후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영옥은 도아린을 보자마자 줄곧 차분했던 표정이 조금 환해졌다.“아린아, 네가 만든 향낭이야?”3년 전 도아린은 나영옥에게 향낭을 선물한 적이 있었다. 그 향낭을 몸에 지니고 다닌 후로 정신이 한결 맑아진 것 같았다. 나중에 그런 일이 있은 후에 향낭의 향이 옅어졌는데도 아까워서 버리질 못했다.“할머니 만수무강하세요.”도아린이 다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이 향낭을 만드느라 그녀는 밤까지 새웠다. 밖의 자수는 평소 자주 보던 그런 평범한 무늬가 아니었고 3년 전에 나영옥에게 줬던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나영옥은 기뻐하며 비취 목걸이와 향낭을 주머니에 넣었다
도아린은 연회장을 나가서 메시지를 보냈다.손보미의 차례가 됐을 때 나영옥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집사에게 그냥 카트에 담으라고 했다. 손보미는 배건후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비싼 돈을 들여 준비한 게 물거품이 되니까.그런데 나영옥은 그녀의 선물만 카트에 담은 게 아니었다. 넣었던 걸 다시 꺼내서 열어본다면 다른 사람들이 손보미를 싫어할 게 뻔했다.손보미가 망설이던 그때 배지유가 선물을 꺼냈다.“할머니, 제가 준비한 건 비취 팔찌예요. 하는 일이 뜻대로 되길 바랍니다.”나영옥이 그녀가 준비한 선물을 보지 않을까 봐 미리 꺼냈다.그런데 그때 배건후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배지유가 준비한 선물이 바로 도아린의 비취 팔찌였던 것이었다.나영옥이 힐끗 쳐다보다가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받아서 카트에 넣어.”배지유는 배건후의 옆에 앉아 나지막하게 말했다.“오빠, 도아린 단속 좀 해요. 이러다 우리 가문 망신당하겠어요.”옆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기운에 배지유는 음료수를 먹다가 멈칫하고 고개를 돌렸다.“오빠, 왜 그렇게 봐요? 보미 언니가 오자고 해서 온 거예요. 이따가 집에 들어가서 안 나오면 되잖아요.”“아린이 팔찌를 선물로 가져와?”배건후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눈빛도 매우 날카로웠다. 그러자 배지유가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망했다. 아까 열지 말았어야 했는데. 오빠가 옆에 있는 거 깜빡했어.’그의 날카로운 시선에 배지유는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오빠가 내 카드 정지해서 선물 살 돈이 없었어요.”배지유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팔찌는 오빠가 사준 거잖아요. 할머니께 드린 건 우리 가문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서예요.”배건후의 시선이 배지유의 목에 머물렀다. 그가 도아린에게 준 루비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집 비밀번호를 바꿨기에 배지유는 더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렇다면 도아린이 직접 목걸이를 줬을 가능성밖에 없었다.도아린은 이런 주얼리 같은 걸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고 배지유에게 마음대로 주었다.순간 분노
“사람들이 내가 나영옥 할머니와 관계가 좋은 걸 믿고 민재 씨한테 결혼을 강요하고 빚을 갚아달라고 강요한 줄 알아요. 해명해도 되고 부인해도 되고 심지어 모른 척해도 돼요. 근데 내가 매번 힘들게 빌린 돈을 가로막진 말았어야 했어요.”도아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그해 겨울, 도아린은 돈을 빌리려고 뭐든지 다 했었다. 상대가 겨우 돈을 빌려주겠다고 해서 이튿날에 찾아갔었는데 갑자기 태도를 바꾸면서 절대 빌려주지 않겠다고 했었다. 이유를 설명하진 않았지만 육민재가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육민재는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듣다가 안경을 닦고는 다시 꼈다.“너도 배후 조종자가 나라고 생각하는구나.”도아린은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육민재의 두 눈에 취기가 조금 사라진 듯했다. 안경 유리알에 빛이 반사되어 눈빛을 가렸다. 도아린이 자리를 떠나려던 그때 육민재가 덤덤하게 말했다.“내가 그런 거 아니야.”육민재도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고 도아린도 캐묻고 싶지 않았다.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두 사람이 아무도 말이 없자 분위기가 삽시간에 어색해졌다.“먼저 가보겠습니다.”도아린이 한마디를 던지고 자리를 비웠다....손보미가 배지유를 살짝 잡아당겼다.“건후 씨한테 약 타 먹이지 마.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사실은 약을 먹였는지 확인하는 거였다. 배지유는 오빠가 근처에 없는 걸 확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까 내가 일어나자마자 오빠가 앞에 있던 차를 바꿔버렸어요.”경계심이 정말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가족까지 경계할 줄은 몰랐다.‘이게 다 도아린 때문이야!’손보미는 몰래 이를 꽉 깨물었다. 이 결과가 그녀의 예상대로이긴 했다.“이게 다 도아린 그년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겨서 그래요.”배지유가 음료수를 들고 물었다.“언니, 음료수 마실래요?”“너 마셔. 난 다이어트 중이라.”배지유는 약을 만지던 손가락을 잊은 채 잔을 만졌다. 그녀는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인파 속에서 육하경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육하경의 외할머니한테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