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허리를 펴고 무미건조하게 말했다.“건후 씨 카드 긁으려고? 우리 아직 부부 사이인 건 알고 있지? 이혼 수속하기 전까지 보미 씨는 내연녀라는 타이틀을 영원히 달고 살 텐데?”손보미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더니 묵묵히 카드를 도로 집어넣었다.드디어 주위가 조용해지자 도아린은 드레스의 안감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배건후가 수선비를 낼 줄 알았더라면 좀 더 비싸게 불렀을 텐데.결국 드레스를 다시 캐리어에 집어넣고 사인할 계약서를 꺼내서 전해주었다.손보미는 종이를 넘기며 조소를 금치 못했다.“연성대학교의 간판스타 도아린, 다재다능은 물론 졸업하기도 전에 디자인 대상을 받더니 고작 가정부 신세로 인생을 마무리하는 건가? 3년 동안 갖은 고생하면서 자존심도 이미 바닥났을 테고, 역시 사람 일은 모르는 거네.”다만 타격이 1도 없는 상대방을 보자 마지못해 펜을 들고 사인했다.도아린은 캐리어를 끌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얼굴은 서글픈 기색이 역력했다.비록 문나연도 발견했으나 모른 척 외면했다.그동안 도아린은 소유정의 집에서 같이 지냈지만,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서로 방해되지 않도록 같은 동네에 방을 따로 구했다.치마 겉감의 수선을 마치고 도아린은 몸이 뻐근한 나머지 일어나서 스트레칭했다.이때, 소유정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아린아! 살려줘.”휴대폰 너머로 흐느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누군가 그녀를 허위사실 유포죄와 명예훼손죄로 고소했다고 말했다.도아린은 서둘러 경찰서로 달려갔다.소유정을 발견하는 순간 눈은 이미 빨갛게 충혈되었고 누가 봐도 화난 얼굴이었다.비록 그녀는 유명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수만 명의 팬을 거느리고 있는 연예인으로 경찰서에 들락이는 모습이 찍힌 이상 추후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무슨 일인데?”“내가 업로드한 게시물 때문에 뭐라고 하잖아!”도아린의 손을 붙잡은 소유정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그녀는 친구 대신 분풀이하려고 손보미의 흑역사
키가 무려 190cm에 육박하는 사내가 겁먹을 일이 뭐 있겠는가?심지어 그는 배건후이지 않은가?다른 사람이 그를 두려워하면 몰라도, 손가락만 까딱해도 남을 패가망신시킬 사람이 고작 여자 한 명 때문에 겁이 나다니?도아린은 경찰의 얼굴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습격범 취급을 받을지도 모르니 차마 행동에 옮기지는 못했다.“내가 건후 씨 아내가 맞아요?”도아린은 분노를 억누르고 또박또박 말했다.남자의 그윽한 눈동자는 당최 속내를 알 수 없었다.이내 대답하는 대신 되물었다.“넌 어떻게 생각하는데?”“당연하죠. 건후 씨 아내는 나뿐이라면서?”도아린은 이를 악물고 말을 마쳤다.“지금 한 말 꼭 기억해.”배건후가 손을 뻗어 그녀를 품에 끌어안자 도아린은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부딪쳤다.경찰은 왠지 모르게 이용당한 느낌에 기분이 찝찝했다.그리고 긴 시간의 해명 끝에 도아린은 비로소 수속을 마치고 소유정을 데리고 경찰서를 나섰다.소유정은 화가 나서 온몸이 떨렸다.도아린은 그녀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됐어, 이제 그만 화 풀어. 괜히 몸 상하면 본인만 손해야. 내가 대신 복수해줄게.”“나 바쁜 사람이야.”남자는 차 문 옆에 서서 재촉했다.소유정의 집에 도착하자, 도아린은 배건후와 단둘이 할 얘기가 있다고 그녀를 먼저 올려보냈다.우정윤은 눈치 빠르게 차에서 내렸고, 이내 내부에 여자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내가 삐딱하게 나왔다고 해서 친구한테 복수한 거예요?”배건후는 가슴을 두드리는 여자의 주먹을 덥석 붙잡고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자업자득이야.”“유정은 사실만 얘기했거든요?”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되레 남을 비난하는 남자를 보자 도아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소유정만 아니었으면 난 아직도 밖에서 떠돌아다녔을지도 몰라요. 불만이 있으면 나한테 풀어요. 괜히 무고한 사람 연루시키지 말고!”“증거가 있는데 계속 사실이라고 우길 거야?”배건후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 대시보드를
배건후는 흠칫 놀랐다.항상 얌전하고 조신했던 여자가 이혼 얘기가 나온 이후로 마치 송곳니를 드러낸 독사처럼 매우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다.반짝거리던 커다란 눈동자로 환심을 사려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오로지 혐오와 증오만 남아 있었다.배건후의 심장이 욱신거렸다.도아린이 차에서 내리려고 하자 문이 철컥 잠겼다.이내 고개를 돌려 배건후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거죠?!”“혹시 몰라 경고하는데.”배건후는 눈살을 찌푸리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방금 경찰서에서 한 말은 기록에 남거든? 만약 번복이라도 한다면 네 친구는 법적인 책임을 물을 거야.”이런 치사한 개자식 같으니라고!도아린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손을 부르르 떨었다.그리고 용기를 내어 뺨을 날리려는 순간 차 문이 다시 열렸다.이내 싸늘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내일 육씨 가문의 연회에 참석할 거야.”쿵!도아린은 문을 세게 닫고 집으로 쏜살같이 뛰어 올라갔다.결국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방금 무슨 연회라고 했지? 육씨 가문이라니? 설마 육민재가 돌아왔나?그럴 리가! 내일은 나영옥의 팔순 잔치이지 않은가?어쨌거나 지난 3년 동안 육민재는 단 한 번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우정윤은 아파트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도아린의 뒷모습을 보고 차에 다시 올라탔다.“왜 대표님 덕분에 손보미 에이전트에서 그냥 넘어갔다고 해명하지 않으세요?”“어차피 말해줘도 안 믿을 거야.”배건후는 담배를 힘껏 빨아들이며 눈을 가늘게 뜬 채 위층에 불이 켜진 창문을 바라보았다.그동안 우정윤은 자신이 모시는 상사의 일거수일투족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보니 단지 고집에 불과했다.시도해보지도 않고 어찌 믿을지 말지 안다는 말인가?사모님이 부잣집 여사님들 사이에서 괴롭힘당할까 봐 회의까지 미루고 도와주러 갔으면서 굳이 멍청하다는 둥, 영유아나 할 법한 낚시 놀이 장난감 같은 게임마저 진다는 둥 비웃기 바빴다.또한 손보미가 소유
배지유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우리 엄마가 그동안 손주를 얼마나 바라왔는지 알아요? 만약 언니가 아이를 갖게 된다면 절대로 배씨 가문 핏줄을 밖에서 떠돌아다니게 놔두실 분이 아니라서 무조건 언니를 며느리로 인정할 거예요.”손보미는 아직 전성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기에 임신할 계획은 없었다.반면, 배건후는 고작 잠자리를 가졌다는 이유로 도아린과 결혼할 만큼 책임감이 넘치는 남자였다.하지만 그녀는 도아린과 달리 배건후와 연결고리가 있다.거기다 관계까지 가지면 결코 자신을 내팽개치지 않으리라 믿었다.“지유야, 물론 괜찮은 방법이기는 한데 절대로 네 오빠의 마지노선을 건드리지 마. 진짜 화가 나면 아무도 감당 못 할 테니까.”“나한테 맡겨요. 언니, 걱정하지 마세요.”배지유는 전화를 끊고 누군가에게 연락해서 약을 구했다.비록 대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풋내기에 불과했지만 나쁜 짓을 한 게 결코 한두 번이 아니었다.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결제하려는 순간 그제야 카드가 정지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이게 다 빌어먹을 도아린의 탓이었다.아침에 엄마와 오빠 앞에서 심통 부리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일부러 그녀를 도발한 게 분명했다.결국 외출 금지당했을 뿐만 아니라 카드까지 정지되다니!‘나쁜 년, 앞으로 너랑 전쟁을 선포한다!’...육씨 가문의 연회에 참석한다는 소리를 듣고 소유정은 아침 댓바람부터 도아린을 끌고 연성에서 제일 유명한 드레스 숍으로 향했다.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풍기는 여자 두 명이 들어서자 점원이 잽싸게 마중 나왔다.“어서 오세요. 혹시 드레스를 찾고 계시나요? 어제 신상품이 막 도착했거든요.”내부는 화려하게 장식되었고, 다양한 드레스를 입은 마네킹들이 양쪽에 줄을 지었다. 그리고 유리장에 진열된 의상은 훨씬 더 고급져 보였다.즉, 한 마디로 아주 사치스러웠다.그중에서 도아린은 유리 진열장 안에 있는 한 드레스에 시선이 빼앗겼다.실버 머메이드 드레스는 마치 달빛 아래에서 반짝이는 물결처럼 은은한 빛을 띠었고, 한쪽 어깨가 노
소유정은 배지유를 쳐다보았다.어떻게 미운 말만 쏙쏙 골라서 하지? 뺨이라도 한 대 날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배지유 따위 안중에도 없는 도아린은 시선을 돌린 채 무덤덤하게 말했는데, 이런 모습이 더욱 화를 유발했다.“이혼하기 전까지 건후 씨는 내 거죠. 오빠 돈을 쓰면서 감히 새언니에게 대들어요?”배지유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면서 배건후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빠, 보미 언니한테 선물하고 싶은 드레스를 발견했는데 오늘 연회장에 입고 가면 만인의 주목을 받는 존재가 될 것 같아요.”그리고 일부러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스피커 모드로 바꿨다.도아린이 배건후의 돈을 쓰면 뻔뻔하다고 생각할 테지만 손보미의 드레스는 무려 선물이지 않은가?전혀 다른 두 가지 개념은 절대적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차이가 있다.도아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를 피했다.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배건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 카드 긁어.”배지유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올렸다. 역시나 그녀의 예상대로 손보미와 함께 있다고 말하자 오빠는 허락 없이 외출한 자신을 딱히 나무라지 않았다.난감한 기색이 역력한 손보미는 도아린만 보이는 각도에서 조소를 머금었다.배씨 가문 사모님이면 다 인가? 정작 남편과 시동생은 그녀의 편인데.어차피 불치병에 걸린 주현정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죽고 나면 배씨 가문의 새로운 안방마님은 본인이 될 것이다.그때가 되면...도아린은 시종일관 무심한 얼굴로 가게를 구경했고, 셋을 상대할 생각조차 없었다.전화를 끊고 나서 배지유의 목소리 톤이 한층 높아졌다.“언니, 오늘 저녁 첫 번째 댄스 타임에서 우리 오빠랑 같이 춤춰요.”이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점장이 돌아와 손보미의 앞에 멈추어 섰다.“실장님께서 이 드레스는 사모님을 위해 맞춤 제작했다고 했어요. 지금이라도 찾아와주셔서 정말 기쁘다고 하시네요. 돈 안 내도 되니까 선물로 그냥 드린대요.”손보미는 어안이 벙벙했다.그녀에게 이런 지인이 있었나?이내 팬일 지도 모른다고 여기고
유미주는 씩씩거리며 손보미를 흘겨보았다. 모르는 사람이면 모른다고 하지, 괜히 욕먹게 해서 이번 달 보너스만 날리지 않았는가?“방금 자기 것도 아닌데 억지로 붙잡는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냐고 말한 사람이 누구더라? 물론 전제는 본인이 빼앗아 갈 능력은 되어야겠지?”이미 짜증이 머리끝까지 난 소유정은 인정사정 따위 봐주지 않고 말했다.손보미는 손가락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었다.조신하고 아량이 넓은 설정만 아니었다면 소유정의 머리카락을 전부 쥐어뜯고도 남았을 것이다.인기도 없는 무명 가수 따위가 감히 그녀를 비웃다니?더욱 황당한 건 지난 3년 동안 집에서 가정부와 다름없던 여자가 직장을 다닌 경험도 전무한데 무려 일류 디자이너와 친구라는 점이었다.아직 통화 중인지라 서대은은 마지막 지시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미주 씨, 매장 입구에 ‘손보미와 배 씨는 입장 금지’라는 안내문을 적어 줘. 우리가 돈이 없어? 특히 내연녀가 소비하는 돈은 공짜로 줘도 받지 마.”혐오스러운 말투는 누가 들어도 적대시하는 느낌이다.실대표가 지시한 이상 유미주는 일개 고용직으로서 즉시 화이트보드에 경고문을 작성했다.비록 배건후는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만 실명을 거론하지 않기에 본인이 굳이 인정하고 싶다면 말릴 생각은 없었다.화가 머리끝까지 난 배지유는 도아린을 노려보며 말했다.“보미 언니가 망신당하는 꼴을 지켜보려고 시치미 떼고 있었던 거예요? 정말 악랄한 여자네요. 징그러울 정도로 뻔뻔스럽군!”배지유의 말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도아린의 심장에 박혔지만 이제는 아무런 타격도 없었다.그녀는 피식 비웃었다.“와이프가 버젓이 있는데 기어코 그 자리를 꿰차려고 할 때는 언제이고, 만약 디자이너 실장이랑 통화하지 않았더라면 염치 불고하고 드레스를 가져갔을 거잖아요? 본인이 추잡스러운 짓을 저질러 놓고 되레 남한테 바가지를 뒤집어씌워요?”싸늘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손보미는 이참에 본색을 드러낼까 싶었다.그녀가 알고 있는 도아린은
그동안 해외에 있었지만 국내의 사업을 계속 지휘하고 있었다. 육씨 가문의 상속자가 되기 위해서.그는 긴 복도를 지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손보미와 배지유가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누군가 손보미에게 축하를 보내자 그녀는 웃으면서 아니라고 했지만 쑥스러워하는 표정은 곧 좋은 일이 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오빠는 왜 아직도 안 오죠?”배지유는 도아린이 망신당하는 모습을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었다.손보미는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 배건후가 도아린과 함께 공개적인 자리에 참석하는 게 극히 드문데 오늘 이런 성대한 자리에 데리고 왔다는 건 다른 목적이 있어서일까?“도아린 씨가 다 준비하길 기다리나 보죠.”손보미가 배지유의 말에 대꾸했다. 그러자 배지유가 이를 꽉 깨물었다.“걔 얘기는 꺼내지도 말아요. 이름만 들어도 역겨우니까. 우리 오빠는 그런 여우 같은 여자를 왜 좋아하나 몰라요.”도아린이 준비를 마치고 나와 보니 배건후의 은색 마이바흐가 밖에 세워져 있었다. 오늘 운전기사 조수현이 없어서 배건후가 운전하기로 했다.그녀가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잔잔한 파도가 모래사장에 밀려왔다가 다시 밀려가는 것처럼 치맛자락이 흩날렸다. 가뜩이나 피부가 하얀데 실버 드레스까지 입으니 마치 늦은 밤에 도망쳐 나온 인어공주 같았다.배건후의 시선이 도아린의 섹시한 어깨에 닿은 순간 그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배건후와 행사에 참석할 때 이렇게 예쁘게 꾸민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생각에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라 담배를 확 부러뜨렸다.도아린은 그녀가 손보미의 드레스를 빼앗아서 배건후가 화를 낸다고 착각했고 배건후는 도아린이 다른 남자 때문에 예쁘게 꾸민 것이라고 착각했다.가는 길 내내 분위기가 무겁기 그지없었고 누구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유리창에 비친 배건후를 쳐다보았다. 어두운 정장에 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고 블루다이아몬드 넥타이핀이 옷소매와 아주 잘 어울렸다. 차갑고 귀티 나는 왕자 같았다.이 스타일
배건후가 손목에 실로 딴 붉은 팔찌를 하고 있었는데 팔찌 가운데 금색 오팔이 몇 개 있었다.도아린은 온몸이 굳어버리면서 눈빛이 급격하게 흔들렸고 호흡마저 불안정해졌다. 배건후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여전히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오늘 커프스단추 찾다가 찾았어.”도아린은 떨리는 마음을 애써 눌렀고 배건후의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화장실 다녀올게요.”배건후는 그녀의 다급한 발걸음을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육민재의 시선이 배건후의 손목에 닿았다. 아직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알아채지 못했다.“이 빨간 팔찌는 무슨 의미라도 있어?”“없어.”배건후는 담뱃재를 털면서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오늘 저녁에 손님들이 많이 왔구나. 가서 손님들 맞이해.”그러고는 도아린을 따라갔다.도아린이 손보미가 아까 있었던 자리에 갔을 때 손보미는 그곳에 없었다. 마음을 가라앉히자 빨간 팔찌가 눈에 맴돌았다. 3년 동안 보이지 않아서 배건후가 버린 줄 알았는데...그때 그 빨간 팔찌가 아니었더라면 사람을 잘못 봤을 리도 없었다.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도아린은 정자에 들어가 앉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그녀가 있는 줄 모르고 뒷담화했다.“도아린 봤어? 무슨 낯짝으로 여길 왔는지, 참. 내가 다 민망하더라고. 근데 걔는 민재 도련님이랑 배 대표님 앞에서 아주 예쁜 척하더라?”“낯가죽이 두꺼운데 뭔 짓인들 못 하겠어. 배 대표님 조건이 얼마나 좋아. 그때 당하고 아직도 트라우마에서 못 벗어났어.”“그러게 말이야. 근데 손보미가 귀국했으니까 상황이 달라졌어.”대화 소리가 갑자기 끊기더니 다급하게 지나가는 발걸음 소리만 들렸다.도아린은 마음을 완전히 가라앉히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계단을 내려가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한 남자의 품에 와락 안기고 말았다.“죄송합니다...”립스틱이 상대의 옷깃에 묻고 말았다....화이트 드레스를 입은 손보미는 마치 예쁜 꽃처럼 여리여리했다.“오빠한테 전화해볼까요?”배지유의 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