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검사 결과는 주현정이 어제의 기억을 잃었다는 것이다.아마도 기분이 몹시 상한 일이 있었기에 환자가 선택적 기억 상실증이 걸렸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차라리 이대로 잊고 지내면 다행이었다. 적어도 다시 떠올려 속상해서 건강까지 해치는 상황은 없을 테니까.의사의 말에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그냥 넘어가라고 더욱 당당하게 강요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잘 챙겨주셨는데 기어코 지유랑 싸워서 병세를 악화하게 할 거야?”도아린은 더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고, 골조차 보기 싫었다.이때, 휴대폰이 울렸고 발신자는 다름 아닌 문나연이었다.“통화 괜찮아? 중요한 할 얘기가 있는데...”그녀가 행여나 말실수라도 할까 봐 도아린은 서둘러 끼어들었다.“지금 찾으러 갈 테니까 만나서 얘기해.”이내 전화를 끊고 뒤돌아서 떠나려고 했다.찬바람을 쌩하니 일으키며 멀어져가는 고집스러운 여자의 뒷모습을 보자 배건후는 짜증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그리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모습을 감추는 순간 배지유한테서 연락이 왔다.“오빠, 엄마 괜찮아요? 얼른 경호원 치워줘요. 엄마 보러 가야 하니까.”“집에서 반성해.”비록 병원은 금연이지만 배건후는 안중에도 없는 듯 담배에 불을 붙였다.“술집에서 술을 처먹고 외박까지 해? 간덩이가 부었어?”도아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늦게까지 놀다 온 것에 화가 난 듯한 오빠의 말투를 듣자 배지유는 금세 어깨가 으쓱했다.하지만 목소리만큼은 고분고분했다.“어제 친구 생일이라서 좀 늦었어요. 나가기 전에 엄마한테 얘기했는데... 그나저나 엄마는 괜찮아요?”배건후가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엄마 앞에서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은 언급하지 마.”대신 해결해줬다는 뜻인가? 역시 그녀를 가장 아끼는 건 오빠밖에 없었다.“알았어요.”배지유는 전화를 끊고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채 침대에 마구 뒹굴었다.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아니나 다를까 오빠는 도아린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그러나 뺨 맞게 한 것만큼은 반드시 대가를 받아낼 생각이었다....
“워낙 잔꾀가 많아서 혹시 가는 길에 내 옷을 망가뜨릴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되면 나한테 돈을 더 달라고 요구하겠지, 설마 어시한테 배상시키겠어?”손보미는 옷이 들어 있는 캐리어를 덥석 붙잡았다.도아린이 니들 케이스를 열자마자 그녀의 말을 듣고 다시 닫았다.“개나 소나 아현 씨를 만나게 된다면 과연 신분을 숨길 필요가 있을까? 수선할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이만 가볼게.”그러고 나서 몸을 돌려 떠났다.하지만 손보미는 어디까지나 배짱부리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일개 어시스턴트 주제에 잘난 척하기는!“이게 얼마짜리 드레스인지 알아? 네가 배씨 가문에 3년 동안 있다고 한들 소유하기 힘든 브랜드라고!”손보미는 경멸이 담긴 시선으로 문나연을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어떻게 도아린을 보내 물건을 가져가게 할 수 있지? 아현 씨도 사람 보는 눈이 참 없군.”도아린의 뒤를 따르던 문나연이 입을 열었다.“지금 아현 씨가 눈이 멀었다고 저주한 거야? 토씨 하나 안 빼먹고 전해줄게.”결국 신발 커버를 벗고 나가려는 도아린을 보자 손보미는 이를 악물고 캐리어를 툭툭 쳤다.“농담이었으니까 확인해 봐.”그녀에게 옷을 무조건 수선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안 그래도 급이 낮다고 브랜드사에서 마지못해 대여해줬는데, 더욱이 다른 연예인이 출연 예정인 예능 프로그램 의상으로 이미 확정된 상황이었다.다시 말해서 배상만 한다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연예계는 워낙 시기와 질투가 넘치는 곳이라 설령 드레스를 실수로 망가뜨렸다고 할지언정 기자들이 한술 더 떠서 누군가를 겨냥하기 위한 의도적인 계획이라고 보도될 가능성이 컸다.물론 잘나가는 쩐주가 당사자의 뒤를 봐주고 있다면 상관없지만 아직 배건후와 결혼 약속도 받아내지 못한 시점에서 상대방의 심기를 잘못 건드렸다가 연예계 생활이 마냥 순탄치 않을지도 모른다.“글쎄, 우리가 농담할 정도로 친했더라?”도아린이 돌아왔다.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캐리어가 열렸다.손보미가 옆에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괜히 더 망가뜨리
그녀는 허리를 펴고 무미건조하게 말했다.“건후 씨 카드 긁으려고? 우리 아직 부부 사이인 건 알고 있지? 이혼 수속하기 전까지 보미 씨는 내연녀라는 타이틀을 영원히 달고 살 텐데?”손보미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더니 묵묵히 카드를 도로 집어넣었다.드디어 주위가 조용해지자 도아린은 드레스의 안감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배건후가 수선비를 낼 줄 알았더라면 좀 더 비싸게 불렀을 텐데.결국 드레스를 다시 캐리어에 집어넣고 사인할 계약서를 꺼내서 전해주었다.손보미는 종이를 넘기며 조소를 금치 못했다.“연성대학교의 간판스타 도아린, 다재다능은 물론 졸업하기도 전에 디자인 대상을 받더니 고작 가정부 신세로 인생을 마무리하는 건가? 3년 동안 갖은 고생하면서 자존심도 이미 바닥났을 테고, 역시 사람 일은 모르는 거네.”다만 타격이 1도 없는 상대방을 보자 마지못해 펜을 들고 사인했다.도아린은 캐리어를 끌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얼굴은 서글픈 기색이 역력했다.비록 문나연도 발견했으나 모른 척 외면했다.그동안 도아린은 소유정의 집에서 같이 지냈지만,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서로 방해되지 않도록 같은 동네에 방을 따로 구했다.치마 겉감의 수선을 마치고 도아린은 몸이 뻐근한 나머지 일어나서 스트레칭했다.이때, 소유정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아린아! 살려줘.”휴대폰 너머로 흐느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누군가 그녀를 허위사실 유포죄와 명예훼손죄로 고소했다고 말했다.도아린은 서둘러 경찰서로 달려갔다.소유정을 발견하는 순간 눈은 이미 빨갛게 충혈되었고 누가 봐도 화난 얼굴이었다.비록 그녀는 유명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수만 명의 팬을 거느리고 있는 연예인으로 경찰서에 들락이는 모습이 찍힌 이상 추후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무슨 일인데?”“내가 업로드한 게시물 때문에 뭐라고 하잖아!”도아린의 손을 붙잡은 소유정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그녀는 친구 대신 분풀이하려고 손보미의 흑역사
키가 무려 190cm에 육박하는 사내가 겁먹을 일이 뭐 있겠는가?심지어 그는 배건후이지 않은가?다른 사람이 그를 두려워하면 몰라도, 손가락만 까딱해도 남을 패가망신시킬 사람이 고작 여자 한 명 때문에 겁이 나다니?도아린은 경찰의 얼굴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습격범 취급을 받을지도 모르니 차마 행동에 옮기지는 못했다.“내가 건후 씨 아내가 맞아요?”도아린은 분노를 억누르고 또박또박 말했다.남자의 그윽한 눈동자는 당최 속내를 알 수 없었다.이내 대답하는 대신 되물었다.“넌 어떻게 생각하는데?”“당연하죠. 건후 씨 아내는 나뿐이라면서?”도아린은 이를 악물고 말을 마쳤다.“지금 한 말 꼭 기억해.”배건후가 손을 뻗어 그녀를 품에 끌어안자 도아린은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부딪쳤다.경찰은 왠지 모르게 이용당한 느낌에 기분이 찝찝했다.그리고 긴 시간의 해명 끝에 도아린은 비로소 수속을 마치고 소유정을 데리고 경찰서를 나섰다.소유정은 화가 나서 온몸이 떨렸다.도아린은 그녀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됐어, 이제 그만 화 풀어. 괜히 몸 상하면 본인만 손해야. 내가 대신 복수해줄게.”“나 바쁜 사람이야.”남자는 차 문 옆에 서서 재촉했다.소유정의 집에 도착하자, 도아린은 배건후와 단둘이 할 얘기가 있다고 그녀를 먼저 올려보냈다.우정윤은 눈치 빠르게 차에서 내렸고, 이내 내부에 여자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내가 삐딱하게 나왔다고 해서 친구한테 복수한 거예요?”배건후는 가슴을 두드리는 여자의 주먹을 덥석 붙잡고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자업자득이야.”“유정은 사실만 얘기했거든요?”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되레 남을 비난하는 남자를 보자 도아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소유정만 아니었으면 난 아직도 밖에서 떠돌아다녔을지도 몰라요. 불만이 있으면 나한테 풀어요. 괜히 무고한 사람 연루시키지 말고!”“증거가 있는데 계속 사실이라고 우길 거야?”배건후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 대시보드를
배건후는 흠칫 놀랐다.항상 얌전하고 조신했던 여자가 이혼 얘기가 나온 이후로 마치 송곳니를 드러낸 독사처럼 매우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다.반짝거리던 커다란 눈동자로 환심을 사려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오로지 혐오와 증오만 남아 있었다.배건후의 심장이 욱신거렸다.도아린이 차에서 내리려고 하자 문이 철컥 잠겼다.이내 고개를 돌려 배건후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거죠?!”“혹시 몰라 경고하는데.”배건후는 눈살을 찌푸리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방금 경찰서에서 한 말은 기록에 남거든? 만약 번복이라도 한다면 네 친구는 법적인 책임을 물을 거야.”이런 치사한 개자식 같으니라고!도아린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손을 부르르 떨었다.그리고 용기를 내어 뺨을 날리려는 순간 차 문이 다시 열렸다.이내 싸늘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내일 육씨 가문의 연회에 참석할 거야.”쿵!도아린은 문을 세게 닫고 집으로 쏜살같이 뛰어 올라갔다.결국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방금 무슨 연회라고 했지? 육씨 가문이라니? 설마 육민재가 돌아왔나?그럴 리가! 내일은 나영옥의 팔순 잔치이지 않은가?어쨌거나 지난 3년 동안 육민재는 단 한 번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우정윤은 아파트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도아린의 뒷모습을 보고 차에 다시 올라탔다.“왜 대표님 덕분에 손보미 에이전트에서 그냥 넘어갔다고 해명하지 않으세요?”“어차피 말해줘도 안 믿을 거야.”배건후는 담배를 힘껏 빨아들이며 눈을 가늘게 뜬 채 위층에 불이 켜진 창문을 바라보았다.그동안 우정윤은 자신이 모시는 상사의 일거수일투족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보니 단지 고집에 불과했다.시도해보지도 않고 어찌 믿을지 말지 안다는 말인가?사모님이 부잣집 여사님들 사이에서 괴롭힘당할까 봐 회의까지 미루고 도와주러 갔으면서 굳이 멍청하다는 둥, 영유아나 할 법한 낚시 놀이 장난감 같은 게임마저 진다는 둥 비웃기 바빴다.또한 손보미가 소유
배지유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우리 엄마가 그동안 손주를 얼마나 바라왔는지 알아요? 만약 언니가 아이를 갖게 된다면 절대로 배씨 가문 핏줄을 밖에서 떠돌아다니게 놔두실 분이 아니라서 무조건 언니를 며느리로 인정할 거예요.”손보미는 아직 전성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기에 임신할 계획은 없었다.반면, 배건후는 고작 잠자리를 가졌다는 이유로 도아린과 결혼할 만큼 책임감이 넘치는 남자였다.하지만 그녀는 도아린과 달리 배건후와 연결고리가 있다.거기다 관계까지 가지면 결코 자신을 내팽개치지 않으리라 믿었다.“지유야, 물론 괜찮은 방법이기는 한데 절대로 네 오빠의 마지노선을 건드리지 마. 진짜 화가 나면 아무도 감당 못 할 테니까.”“나한테 맡겨요. 언니, 걱정하지 마세요.”배지유는 전화를 끊고 누군가에게 연락해서 약을 구했다.비록 대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풋내기에 불과했지만 나쁜 짓을 한 게 결코 한두 번이 아니었다.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결제하려는 순간 그제야 카드가 정지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이게 다 빌어먹을 도아린의 탓이었다.아침에 엄마와 오빠 앞에서 심통 부리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일부러 그녀를 도발한 게 분명했다.결국 외출 금지당했을 뿐만 아니라 카드까지 정지되다니!‘나쁜 년, 앞으로 너랑 전쟁을 선포한다!’...육씨 가문의 연회에 참석한다는 소리를 듣고 소유정은 아침 댓바람부터 도아린을 끌고 연성에서 제일 유명한 드레스 숍으로 향했다.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풍기는 여자 두 명이 들어서자 점원이 잽싸게 마중 나왔다.“어서 오세요. 혹시 드레스를 찾고 계시나요? 어제 신상품이 막 도착했거든요.”내부는 화려하게 장식되었고, 다양한 드레스를 입은 마네킹들이 양쪽에 줄을 지었다. 그리고 유리장에 진열된 의상은 훨씬 더 고급져 보였다.즉, 한 마디로 아주 사치스러웠다.그중에서 도아린은 유리 진열장 안에 있는 한 드레스에 시선이 빼앗겼다.실버 머메이드 드레스는 마치 달빛 아래에서 반짝이는 물결처럼 은은한 빛을 띠었고, 한쪽 어깨가 노
소유정은 배지유를 쳐다보았다.어떻게 미운 말만 쏙쏙 골라서 하지? 뺨이라도 한 대 날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배지유 따위 안중에도 없는 도아린은 시선을 돌린 채 무덤덤하게 말했는데, 이런 모습이 더욱 화를 유발했다.“이혼하기 전까지 건후 씨는 내 거죠. 오빠 돈을 쓰면서 감히 새언니에게 대들어요?”배지유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면서 배건후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빠, 보미 언니한테 선물하고 싶은 드레스를 발견했는데 오늘 연회장에 입고 가면 만인의 주목을 받는 존재가 될 것 같아요.”그리고 일부러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스피커 모드로 바꿨다.도아린이 배건후의 돈을 쓰면 뻔뻔하다고 생각할 테지만 손보미의 드레스는 무려 선물이지 않은가?전혀 다른 두 가지 개념은 절대적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차이가 있다.도아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를 피했다.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배건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 카드 긁어.”배지유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올렸다. 역시나 그녀의 예상대로 손보미와 함께 있다고 말하자 오빠는 허락 없이 외출한 자신을 딱히 나무라지 않았다.난감한 기색이 역력한 손보미는 도아린만 보이는 각도에서 조소를 머금었다.배씨 가문 사모님이면 다 인가? 정작 남편과 시동생은 그녀의 편인데.어차피 불치병에 걸린 주현정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죽고 나면 배씨 가문의 새로운 안방마님은 본인이 될 것이다.그때가 되면...도아린은 시종일관 무심한 얼굴로 가게를 구경했고, 셋을 상대할 생각조차 없었다.전화를 끊고 나서 배지유의 목소리 톤이 한층 높아졌다.“언니, 오늘 저녁 첫 번째 댄스 타임에서 우리 오빠랑 같이 춤춰요.”이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점장이 돌아와 손보미의 앞에 멈추어 섰다.“실장님께서 이 드레스는 사모님을 위해 맞춤 제작했다고 했어요. 지금이라도 찾아와주셔서 정말 기쁘다고 하시네요. 돈 안 내도 되니까 선물로 그냥 드린대요.”손보미는 어안이 벙벙했다.그녀에게 이런 지인이 있었나?이내 팬일 지도 모른다고 여기고
유미주는 씩씩거리며 손보미를 흘겨보았다. 모르는 사람이면 모른다고 하지, 괜히 욕먹게 해서 이번 달 보너스만 날리지 않았는가?“방금 자기 것도 아닌데 억지로 붙잡는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냐고 말한 사람이 누구더라? 물론 전제는 본인이 빼앗아 갈 능력은 되어야겠지?”이미 짜증이 머리끝까지 난 소유정은 인정사정 따위 봐주지 않고 말했다.손보미는 손가락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었다.조신하고 아량이 넓은 설정만 아니었다면 소유정의 머리카락을 전부 쥐어뜯고도 남았을 것이다.인기도 없는 무명 가수 따위가 감히 그녀를 비웃다니?더욱 황당한 건 지난 3년 동안 집에서 가정부와 다름없던 여자가 직장을 다닌 경험도 전무한데 무려 일류 디자이너와 친구라는 점이었다.아직 통화 중인지라 서대은은 마지막 지시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미주 씨, 매장 입구에 ‘손보미와 배 씨는 입장 금지’라는 안내문을 적어 줘. 우리가 돈이 없어? 특히 내연녀가 소비하는 돈은 공짜로 줘도 받지 마.”혐오스러운 말투는 누가 들어도 적대시하는 느낌이다.실대표가 지시한 이상 유미주는 일개 고용직으로서 즉시 화이트보드에 경고문을 작성했다.비록 배건후는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만 실명을 거론하지 않기에 본인이 굳이 인정하고 싶다면 말릴 생각은 없었다.화가 머리끝까지 난 배지유는 도아린을 노려보며 말했다.“보미 언니가 망신당하는 꼴을 지켜보려고 시치미 떼고 있었던 거예요? 정말 악랄한 여자네요. 징그러울 정도로 뻔뻔스럽군!”배지유의 말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도아린의 심장에 박혔지만 이제는 아무런 타격도 없었다.그녀는 피식 비웃었다.“와이프가 버젓이 있는데 기어코 그 자리를 꿰차려고 할 때는 언제이고, 만약 디자이너 실장이랑 통화하지 않았더라면 염치 불고하고 드레스를 가져갔을 거잖아요? 본인이 추잡스러운 짓을 저질러 놓고 되레 남한테 바가지를 뒤집어씌워요?”싸늘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손보미는 이참에 본색을 드러낼까 싶었다.그녀가 알고 있는 도아린은
표절 논란이 다시 불거진 건 분명히 도아린과 관련이 있었고 아버지가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 이상 도아린을 달래서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강재민은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하지만 막 1층에 도착하자 머리 위에서 강재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도아린이 사고를 당했을 때 넌 바로 달려가지 않았어. 이미 기회를 놓친 거야. 지금 표절 논란이 다시 불거진 참인데,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우리 주얼리 매장에 심각한 타격을 줄 거라고.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칠 생각이야?”강재민의 눈빛이 흔들렸다.그는 순간적으로 욕지거리가 나갔지만 결국 방향을 바꿔 다시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강재희를 지나칠 때, 차갑게 말했다.“누나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를 줄 알아? 내 사람한테 그럴 생각은 접어.”강재희가 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정말 여자를 모르네!’한편, 도아린이 장수현을 찾아갔을 때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드디어 절 찾아왔군요!”두 사람이 악수할 때 심지어 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그가 유자차를 한 잔 내밀었지만 도아린은 차를 바라보며 손을 대지 않았다.“배 대표님이 알려주신 거예요. 아린 씨가 오면 유자차를 타 드리라고 하셨죠.”장수현은 배건후의 말을 떠올리며 덧붙였다.“따뜻한 물로 우려내고 레몬즙 두 방울 추가했어요. 한 번 맛보세요.”도아린이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머그컵을 집어 들었다.작은 컵이었지만 그녀는 손이 떨려 쉽게 들지 못했고 장수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손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나요?”“그런게 아니라...”말을 마친 후 도아린이 유자차를 한 모금 마셨다. 분명 그녀가 좋아하는 맛이었지만 갑자기 코끝이 시큰했다.“배 대표의 사건은요?”“그 사건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우리가 가진 증거만으로도 배 대표님의 결백을 입증할 수 있어요.”장수현은 서랍에서 두 개의 서류봉투를 꺼냈다.“이 두 개의 문서는 도아린 씨의 협조가 필요합니다.”“저요?”도아린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찻잔
다음 날, 배지유는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사정을 해도 경호원은 그녀를 병실에 들여보내지 않았다.결국 그녀는 의사를 이용할 방법을 생각했다.“아이고!”의사가 병실에서 나오자 그녀는 일부러 다리를 움켜잡으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제 다리가 너무 아파요! 다시 감염된 거 아닐까요? 유 쌤,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유승호가 다가가려 하자 경호원이 막아섰다.“저희 대표님 돌보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아가씨는 저희가 병원에 모셔가겠습니다.”“유 쌤! 제발요! 오래 걸리지 않아요!”배지유가 손을 뻗어 유승호의 가운을 붙잡으려 했지만 유승호는 경호원과 함께 그녀를 지나쳐 가버렸고 더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문 앞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이 말했다.“아가씨, 저희가 병원으로 모시겠습니다.”배지유는 악에 받쳐 어금니를 꽉 물었다.“필요 없어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경호원은 그녀가 엘리베이터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바로 주현정에게 보고했다.주현정이 비웃으며 말했다.“이제 그놈들도 슬슬 초조해지는군. 조급하면 조급할수록 약점을 드러내기 마련이지.”“어디 나갈 거야?”진경수가 단정하게 차려입고 계단을 내려오는 도아린을 보고 급히 다가갔다.“지우 씨의 촬영이 거의 끝나가요. 가서 봐야겠어요.”“일남이 하고 일북이 보호하고 있으니 별일 없을 거야. 그러니 너도...”진경수가 그녀의 가방을 잡으며 말렸지만 도아린이 피했다.“오빠, 이렇게 날 집에 가둬놓는 건 보호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적들에게 숨 돌릴 기회를 주는 거야.”“가둬놓다니...”진경수가 눈을 피하며 머뭇거리다 결국 입을 열었다.“그놈들은 인간성이 없어! 위험한 일은 우리가 할 테니, 너는 그냥 부모님 곁에서 안전하게 있어 주면 안 되겠어?”“오빠, 솔직히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진씨 가문의 사업에는 영향이 별로 없잖아요. 하지만 오빠나 큰오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게 더 심각한 문제예요.”도아린이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배 대표가 사
주현정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무표정한 얼굴로 딸의 연기를 지켜보았다.배지유는 몇 번 울먹이다가 말문을 열었다. 그녀는 모든 책임을 남궁유민에게 떠넘기려고 했고 사실 그가 자신을 강요한 것이었기에 정당하다고 생각했다.“오빠가 남궁 변호사한테 내 교통사고 소송을 도와달라고 했는데 그 변호사가, 글쎄, 나한테 오히려 오빠를 모함하라고 했어요.”“나는 오빠가 얼마나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인지 잘 알거든요. 오빠가 절대 회사 자금을 횡령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겉으로는 남궁유민의 협박에 따르는 척했지만, 사실은 오빠가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보길 바랐어요! 오빠를 해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주현정은 기가 막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딸이 이렇게 교활하고 악독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나쁜 행동을 이렇게 고상한 이유로 정당화하려는 모습에 실망감이 몰려왔다.배지유는 눈물이 나지 않자 점점 더 통곡하며 눈물 연기를 했지만 애쓴 보람도 없이 눈에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내가 처음에 약을 바꾼 것도 엄마랑 아빠가 이혼하지 않게 하려고 그랬던 거예요. 엄마 목숨을 위협하려던 게 아니라 엄마가 좀 더 쉬었으면 하는 마음에 그랬다고요!”“게다가 내가 왜 오빠를 해치려 하겠어요? 난 미끼로 자처해서 남궁유민 그 배신자를 까발리려고 그랬던 거예요!”“엄마! 잘 생각해 보세요. 만약 두 분이 이혼하지 않았다면 우리 가족은 계속 같이 살았을 거고 아빠도 그렇게 되지 않았을 거예요. 나도 남궁유민에게 협박당하지 않았을 거고, 오빠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회사 일을 아빠가 처리할 수 있었을 거란 말이에요! 내 말이 틀렸어요?”주현정은 점점 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는 딸에게 짜증이 나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남궁유민이 널 협박했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무슨 수로 널 협박할 수 있겠어?”“그게...”배지유는 급하게 머리를 굴리며 고개를 숙였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아픈 줄 몰랐다.잠시 고민하던 배지유는 사실대로 말
“누구...?”“너무 팬이에요! 저 ‘화성의 별빛’이에요!”“아, 안녕하세요!”도지현은 그녀를 바로 기억해 냈다.이 팬은 그가 방송을 시작한 날부터 채팅방에 있었고 팬 단톡방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는 사람이었다.도지현의 스태프가 그녀에게 팬카페 관리자가 되어달라고 제안했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하며 대신, 팬으로 남아 계속 응원하겠다고 했다.두 사람은 예의상 가볍게 악수를 나눴고 전미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저기... 부탁드릴 게 있는데, 저분한테 잘 좀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요? 제가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보험사 직원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요. 수리비는 제가 전액 부담할게요.”도지현은 강재민을 바라보며 말했다.“형...”강재민은 낮게 한숨을 내쉬더니 손을 휙 저으며 말했다.“그냥 가세요. 괜찮습니다. 너도 얼른 차 타.”“정말 고맙습니다!”전미나는 연신 인사를 하며 빠르게 자신의 차로 돌아갔고 강재민은 명함을 휙 차 안으로 던지고 시동을 걸었다.명함이 미끄러져 내려가 도지현의 발밑에 떨어졌다.“전미나?”‘티파니 주얼리의 수석 디자이너... 거긴 진씨 가문에서 운영하는 보석 브랜드잖아?’도지현은 누나가 자신에게 보낸 메시지를 떠올리며 강재민에게 물었다.“형, 이 명함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 저 팬분인데, 팬카페 관리자로 모시고 싶어서요.”“가져가.”강재민은 애초에 전미나에게 차 수리비를 받을 생각이 없었고 단지 티파니 주얼리의 꼬투리를 잡고 싶었을 뿐이였다.그는 도지현을 집 앞에 내려준 후, 바로 차를 수리하러 갔다.도지현은 도아린의 부탁대로 그날 사고 이후 모건 그룹의 동향과 배건후의 근황을 검색하기 시작했다.그러나 결과는 뜻밖이었다.그날 사고 이후, 주현정은 모건 그룹의 고위 부사장을 지명해 그룹 운영을 대리하게 했다.한편, 배건후가 입원한 사립 병원은 철저한 경비 속에 통제되고 있었고 경호원들이 출입을 관리하고 있어 의료진 외에는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었다.뿐만 아니라, 그의
“누나, 어디 불편한 데 없어?”“손이 아직 불편하고 가끔 머리가 어지러운 것 빼고는 괜찮아.”도아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동생이 이렇게 강한데 누나가 이런 일로 무너지면 창피하지 않겠어?”“그래도 상황 봐가면서 해야지! 누나가 다치면 나는 더 이상 의지할 사람도 없다고!”“이번엔 지현이 말이 맞아요.”강재민이 두 사람에게 물을 따라주며 도아린의 맞은편에 앉았다.“그런 일이 있었으면 왜 나한테 연락 안 했어요? 만약에...”그는 말을 삼키며 씁쓸하게 웃었다.만약 그녀가 먼저 연락했더라면 그는 최대한 그녀가 그 사람들과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도록 도와줄 수 있었을 것이고 아마 그 차 사고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도아린이 사고를 당한 후, 진씨 가문은 외부인의 병문안을 철저히 차단하며 그녀를 완벽하게 보호했다.강재민은 진수혁과의 친분 덕분에 그가 있을 때 잠깐 들어와 도아린의 얼굴이라도 볼 수 있었다.혼수 상태였던 도아린은 계속 배건후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배건후가 그녀를 구한 일만으로 그의 모든 잘못이 사라질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녀의 마음속에서 쉽게 지울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원래부터 미묘하고 어색했던 강재민과 도아린의 관계는 이제 배건후까지 다시 끼어들면서 더욱 복잡해졌다.“지현아, 네 핸드폰 좀 써도 될까?”도아린이 손을 내밀자, 도지현은 별생각 없이 핸드폰을 꺼내 건넸다.“누나, 내가 새 핸드폰 사줄까? 이제 방송해서 돈도 버는데!”“누나도 핸드폰은 있어.”도아린은 단지 남동생의 핸드폰도 집에서 신호가 잘 잡히지 않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진수혁이 새 핸드폰을 사주긴 했지이 그녀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도록 사용 시간을 제한해 놓았다.밤중에 몰래 핸드폰을 켜봤지만 항상 인터넷 연결이 되지 않았다.반면, 도지현의 핸드폰은 인터넷 속도가 느리긴 했지만 사용은 가능했다.이는 집 인터넷의 제한 속도 때문일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차단기를 작동시켰을 가능성도 있었다.“계정이 뭐야? 나중에 방송 챙겨볼게.”도아린이
“그리고 나서...”윤명희는 말하다가 진범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말하는 걸 허락했다.“그리고 나서 건후는 수술실로 들어갔어.”윤명희는 이런 말을 전하기가 어려운 듯했다.그녀와 도아린은 재회한 지 반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엄마로서 그녀는 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겉으로는 차분해 보여도 마음은 분명 요동치고 있을 것이었다.“아린아...”윤명희는 딸의 차가운 손을 꼭 잡고 그녀의 반응을 세심히 살폈다.도아린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맑고 투명한 눈에는 눈물이 어려 있었지만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그럼 아직 중환자실에 있는 거예요? 아직 위험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거예요?”“아니, 상태가 안정되자마자 다른 병원으로 옮겨졌어. 현정 씨가 건후를 연성에 있는 병원으로 옮겼거든.”윤명희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좀 더 회복되면 엄마랑 같이 건후 보러 가자.”도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지만 윤명희의 말이 전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배건후가 정말 그녀보다 심하게 다쳤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국내 최고 의료 시설을 갖춘 해남 병원을 두고 굳이 그를 연성시에 있는 병원으로 옮긴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하지만 계속 추궁해 봤자 거짓말만 늘어날 뿐이었으니 도아린은 일찍 퇴원 해서 본인이 직접 알아보는 것이 나을 거라 생각했다.그런데 예상과 달리, 집에 돌아온 후에도 가족들은 계속 번갈아 가며 그녀 곁을 지켰다.겉으로는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사실상 그녀가 외부와 연락하는 걸 차단하기 위해서였다.그렇게 집에 돌아온 지 사흘째 되는 날, 도지현이 찾아왔다.그동안의 훈련과 적응 끝에 그는 드디어 의족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도지현은 라이브 방송 계정을 개설해 자신의 신체적 결함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고 팬들에게 자신의 의족을 보여주었다.그러면서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들한테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
“오빠, 제 휴대폰 어디갔는지 알아요?”“너 휴대폰 고장 났더라고. 내일 새로 바꿔 줄게.”진수혁은 다시 소파로 돌아가 업무를 이어갔다.도아린은 심심해서 소파 옆에 놓인 가방을 뒤적였다. 그 안에는 세탁된 옷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진수혁은 도아린의 병실에 머물며 그녀 곁만 지키고 있었다.“오빠, 저 이제 괜찮으니까 돌아가서 쉬어요.”도아린이 말했다.“이제 와서 그 사람들이 다시 저를 건드리진 않을 거니까요.”“그럴 가능성이 작긴 해도 전혀 없는 건 아니야.”진수혁의 시선은 여전히 노트북 화면에 고정되었는데 손가락은 능숙하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네가 해야 할 일은 휴식뿐이야. 몸을 회복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사흘 후, 도아린은 바닥에 발을 딛고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오빠, 저 건후 씨 보러 가고 싶어요. 과거 일은 제쳐둔다고 해도 이번에는 건후 씨가 절 구해준 거잖아요.”“건후 씨는 이 병원에 없어.”진수혁은 도시락을 열고는 그녀에게 숟가락을 건넸다.도아린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제 기억엔 건후 씨도 손과 다리가 골절됐고 이마에도 상처가 있었던 걸로 알아요. 그리고 사람들이 말하기로 교통 사고는 겉으로 보면 얼마 안 다친 것 같지만 심하게 다친 경우가 많다고 하잖아요.”진수혁은 부주의로 숟가락을 바닥에 떨구고 몸을 숙여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이거 씻고 올게.”병실 안에도 세면대가 있었지만 진수혁은 굳이 숟가락을 들고 방을 나가버렸다.도아린은 뭔가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설마, 내 말이 맞았던 걸까? 나보다 더 심하게 다친 걸까?’그녀는 당시 배건후의 상태를 떠올려 보려 애썼지만 사고 이후의 기억은 조각조각 흩어져 있어 알 수 없었다.‘더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면 혹시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한 건가?’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윤명희와 진범준이 들어왔다.“퇴원 준비 끝냈어. 밥을 다 먹으면 바로 퇴원하자.”윤명희는 남편을 힐끗 본 후 도아린에게 말했다.“아린
“너 쉬어야 해.”역시 진수혁은 도아린이 다른 사람과 단둘이 이야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지금은 잠이 오지 않아요.”도아린은 변슬기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전에 말한 건 어떻게 됐어요?”그러자 변슬기의 귀가 순식간에 빨개졌다.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빠, 슬기 씨랑 여자끼리 할 얘기가 좀 있어요.”진수혁은 변슬기의 수줍은 얼굴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그를 힐끗 쳐다봤다.“도 선생님을 오래 방해하지는 않을게요.”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오래 방해하지 않는다’는 말은 도아린에게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는 말로 들렸다.그녀는 아무 말 없이 진수혁의 반응을 살폈다.“그럼 잠깐만 허락해줄게.”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병실을 나갔다.“도 선생님, 정말 죄송해요. 다 저 때문에 다친 거잖아요.”변슬기는 진심 어린 사과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도아린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그녀는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꿈을 꿀 때마다 자신이 더러운 수술대에 눕혀져 있는 장면이 떠올랐고 깨어 있는 상태인데도 장기를 이식하겠다고 날카로운 수술칼을 들이대는 장면도 아주 소름 끼쳤다.그런 꿈을 꿀 때마다 도아린이 하늘에서 내려와 천사처럼 그녀를 구해 주었다.‘빨리 도망쳐요! 뒤돌아보지 말고요!’그렇게 매번 변슬기는 도아린의 도움으로 도망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면 정작 도아린은 도망치지 못하고 그들에게 잡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변슬기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혹시라도 그 꿈이 현실로 될까 봐 그녀는 너무 무서웠다.자기를 구해준 대가로 도아린이 나쁜 놈들에게 희생될까 봐 말이다.“울지 마요.”도아린이 천천히 손을 뻗어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변슬기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울먹였다.“도 선생님, 제가 너무 멍청했어요. 안민아의 꼬임에 넘어가지만 않았다면 도 선생님을 이런 일에 끌어들이지도 않았을 텐데...”“피해자를 탓할 필요는 없어요. 안민아가
진수혁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수술 때문에 다 잘라 버렸어. 금방 자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아니면 비서한테 가발이라도 사 오라고 할까?”‘그래서 지금 내가 대머리라고?’손을 들어 가까스로 머리를 만져보자 얇은 망 같은 게 씌워져 있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혼수상태였던 걸 보면 부상이 꽤 심했던 게 분명했다.후유증만 남지 않는다면 머리카락 정도야 대수롭지 않았다.“건후 씨는... 괜찮아요?”그녀는 배건후가 차에서 굴러떨어지고도 절뚝이며 달려오던 모습으로부터 위험을 무릅쓰고 도로 한가운데에 차를 세워 도움을 요청하던 것까지, 그리고 구급차 안에서 했던 말마저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병원에 도착한 후로부터는 의식이 흐릿했지만 눈을 뜰 때마다 그가 곁에 있는 걸 볼 수 있었다.배건후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버텨야 한다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해주었다.진수혁은 그녀의 질문을 못 들은 척하며 휴대폰을 들고 병실을 나갔다.“일 끝나면 가발 하나 사 와.”그는 병실 문을 닫고 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말다툼 소리가 들려왔다.누군가 벽에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병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한 번만 보고 바로 나갈게!”강재민이 진수혁의 제지를 뿌리치고 병실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는 도아린이 깨어나 있는 걸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아린 씨, 깨어났어요?”그를 막지 못한 진수혁이 한 마디 덧붙였다.“아린이는 휴식이 필요해. 그러니까 용건만 말해.”“나도 알아.”강재민은 성큼성큼 다가와서 몸을 숙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디 아픈 데는 없어요?”도아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절... 알아볼 수 있겠어요?”강재민은 순간 긴장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누구냐고 묻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다.“당연히 알죠.”도아린이 담담하게 말했다.강재민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병실 문가에 서 있는 진수혁을 바라보았다.“나 아린 씨랑 단둘이 몇 마디만 하면 안 돼?”“안 돼.”진수혁이 단호하게 거절했다.“방금 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