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검사 결과는 주현정이 어제의 기억을 잃었다는 것이다.아마도 기분이 몹시 상한 일이 있었기에 환자가 선택적 기억 상실증이 걸렸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차라리 이대로 잊고 지내면 다행이었다. 적어도 다시 떠올려 속상해서 건강까지 해치는 상황은 없을 테니까.의사의 말에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그냥 넘어가라고 더욱 당당하게 강요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잘 챙겨주셨는데 기어코 지유랑 싸워서 병세를 악화하게 할 거야?”도아린은 더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고, 골조차 보기 싫었다.이때, 휴대폰이 울렸고 발신자는 다름 아닌 문나연이었다.“통화 괜찮아? 중요한 할 얘기가 있는데...”그녀가 행여나 말실수라도 할까 봐 도아린은 서둘러 끼어들었다.“지금 찾으러 갈 테니까 만나서 얘기해.”이내 전화를 끊고 뒤돌아서 떠나려고 했다.찬바람을 쌩하니 일으키며 멀어져가는 고집스러운 여자의 뒷모습을 보자 배건후는 짜증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그리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모습을 감추는 순간 배지유한테서 연락이 왔다.“오빠, 엄마 괜찮아요? 얼른 경호원 치워줘요. 엄마 보러 가야 하니까.”“집에서 반성해.”비록 병원은 금연이지만 배건후는 안중에도 없는 듯 담배에 불을 붙였다.“술집에서 술을 처먹고 외박까지 해? 간덩이가 부었어?”도아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늦게까지 놀다 온 것에 화가 난 듯한 오빠의 말투를 듣자 배지유는 금세 어깨가 으쓱했다.하지만 목소리만큼은 고분고분했다.“어제 친구 생일이라서 좀 늦었어요. 나가기 전에 엄마한테 얘기했는데... 그나저나 엄마는 괜찮아요?”배건후가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엄마 앞에서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은 언급하지 마.”대신 해결해줬다는 뜻인가? 역시 그녀를 가장 아끼는 건 오빠밖에 없었다.“알았어요.”배지유는 전화를 끊고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채 침대에 마구 뒹굴었다.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아니나 다를까 오빠는 도아린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그러나 뺨 맞게 한 것만큼은 반드시 대가를 받아낼 생각이었다....
“워낙 잔꾀가 많아서 혹시 가는 길에 내 옷을 망가뜨릴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되면 나한테 돈을 더 달라고 요구하겠지, 설마 어시한테 배상시키겠어?”손보미는 옷이 들어 있는 캐리어를 덥석 붙잡았다.도아린이 니들 케이스를 열자마자 그녀의 말을 듣고 다시 닫았다.“개나 소나 아현 씨를 만나게 된다면 과연 신분을 숨길 필요가 있을까? 수선할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이만 가볼게.”그러고 나서 몸을 돌려 떠났다.하지만 손보미는 어디까지나 배짱부리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일개 어시스턴트 주제에 잘난 척하기는!“이게 얼마짜리 드레스인지 알아? 네가 배씨 가문에 3년 동안 있다고 한들 소유하기 힘든 브랜드라고!”손보미는 경멸이 담긴 시선으로 문나연을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어떻게 도아린을 보내 물건을 가져가게 할 수 있지? 아현 씨도 사람 보는 눈이 참 없군.”도아린의 뒤를 따르던 문나연이 입을 열었다.“지금 아현 씨가 눈이 멀었다고 저주한 거야? 토씨 하나 안 빼먹고 전해줄게.”결국 신발 커버를 벗고 나가려는 도아린을 보자 손보미는 이를 악물고 캐리어를 툭툭 쳤다.“농담이었으니까 확인해 봐.”그녀에게 옷을 무조건 수선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안 그래도 급이 낮다고 브랜드사에서 마지못해 대여해줬는데, 더욱이 다른 연예인이 출연 예정인 예능 프로그램 의상으로 이미 확정된 상황이었다.다시 말해서 배상만 한다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연예계는 워낙 시기와 질투가 넘치는 곳이라 설령 드레스를 실수로 망가뜨렸다고 할지언정 기자들이 한술 더 떠서 누군가를 겨냥하기 위한 의도적인 계획이라고 보도될 가능성이 컸다.물론 잘나가는 쩐주가 당사자의 뒤를 봐주고 있다면 상관없지만 아직 배건후와 결혼 약속도 받아내지 못한 시점에서 상대방의 심기를 잘못 건드렸다가 연예계 생활이 마냥 순탄치 않을지도 모른다.“글쎄, 우리가 농담할 정도로 친했더라?”도아린이 돌아왔다.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캐리어가 열렸다.손보미가 옆에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괜히 더 망가뜨리
그녀는 허리를 펴고 무미건조하게 말했다.“건후 씨 카드 긁으려고? 우리 아직 부부 사이인 건 알고 있지? 이혼 수속하기 전까지 보미 씨는 내연녀라는 타이틀을 영원히 달고 살 텐데?”손보미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더니 묵묵히 카드를 도로 집어넣었다.드디어 주위가 조용해지자 도아린은 드레스의 안감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배건후가 수선비를 낼 줄 알았더라면 좀 더 비싸게 불렀을 텐데.결국 드레스를 다시 캐리어에 집어넣고 사인할 계약서를 꺼내서 전해주었다.손보미는 종이를 넘기며 조소를 금치 못했다.“연성대학교의 간판스타 도아린, 다재다능은 물론 졸업하기도 전에 디자인 대상을 받더니 고작 가정부 신세로 인생을 마무리하는 건가? 3년 동안 갖은 고생하면서 자존심도 이미 바닥났을 테고, 역시 사람 일은 모르는 거네.”다만 타격이 1도 없는 상대방을 보자 마지못해 펜을 들고 사인했다.도아린은 캐리어를 끌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얼굴은 서글픈 기색이 역력했다.비록 문나연도 발견했으나 모른 척 외면했다.그동안 도아린은 소유정의 집에서 같이 지냈지만,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서로 방해되지 않도록 같은 동네에 방을 따로 구했다.치마 겉감의 수선을 마치고 도아린은 몸이 뻐근한 나머지 일어나서 스트레칭했다.이때, 소유정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아린아! 살려줘.”휴대폰 너머로 흐느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누군가 그녀를 허위사실 유포죄와 명예훼손죄로 고소했다고 말했다.도아린은 서둘러 경찰서로 달려갔다.소유정을 발견하는 순간 눈은 이미 빨갛게 충혈되었고 누가 봐도 화난 얼굴이었다.비록 그녀는 유명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수만 명의 팬을 거느리고 있는 연예인으로 경찰서에 들락이는 모습이 찍힌 이상 추후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무슨 일인데?”“내가 업로드한 게시물 때문에 뭐라고 하잖아!”도아린의 손을 붙잡은 소유정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그녀는 친구 대신 분풀이하려고 손보미의 흑역사
키가 무려 190cm에 육박하는 사내가 겁먹을 일이 뭐 있겠는가?심지어 그는 배건후이지 않은가?다른 사람이 그를 두려워하면 몰라도, 손가락만 까딱해도 남을 패가망신시킬 사람이 고작 여자 한 명 때문에 겁이 나다니?도아린은 경찰의 얼굴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습격범 취급을 받을지도 모르니 차마 행동에 옮기지는 못했다.“내가 건후 씨 아내가 맞아요?”도아린은 분노를 억누르고 또박또박 말했다.남자의 그윽한 눈동자는 당최 속내를 알 수 없었다.이내 대답하는 대신 되물었다.“넌 어떻게 생각하는데?”“당연하죠. 건후 씨 아내는 나뿐이라면서?”도아린은 이를 악물고 말을 마쳤다.“지금 한 말 꼭 기억해.”배건후가 손을 뻗어 그녀를 품에 끌어안자 도아린은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부딪쳤다.경찰은 왠지 모르게 이용당한 느낌에 기분이 찝찝했다.그리고 긴 시간의 해명 끝에 도아린은 비로소 수속을 마치고 소유정을 데리고 경찰서를 나섰다.소유정은 화가 나서 온몸이 떨렸다.도아린은 그녀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됐어, 이제 그만 화 풀어. 괜히 몸 상하면 본인만 손해야. 내가 대신 복수해줄게.”“나 바쁜 사람이야.”남자는 차 문 옆에 서서 재촉했다.소유정의 집에 도착하자, 도아린은 배건후와 단둘이 할 얘기가 있다고 그녀를 먼저 올려보냈다.우정윤은 눈치 빠르게 차에서 내렸고, 이내 내부에 여자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내가 삐딱하게 나왔다고 해서 친구한테 복수한 거예요?”배건후는 가슴을 두드리는 여자의 주먹을 덥석 붙잡고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자업자득이야.”“유정은 사실만 얘기했거든요?”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되레 남을 비난하는 남자를 보자 도아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소유정만 아니었으면 난 아직도 밖에서 떠돌아다녔을지도 몰라요. 불만이 있으면 나한테 풀어요. 괜히 무고한 사람 연루시키지 말고!”“증거가 있는데 계속 사실이라고 우길 거야?”배건후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 대시보드를
배건후는 흠칫 놀랐다.항상 얌전하고 조신했던 여자가 이혼 얘기가 나온 이후로 마치 송곳니를 드러낸 독사처럼 매우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다.반짝거리던 커다란 눈동자로 환심을 사려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오로지 혐오와 증오만 남아 있었다.배건후의 심장이 욱신거렸다.도아린이 차에서 내리려고 하자 문이 철컥 잠겼다.이내 고개를 돌려 배건후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거죠?!”“혹시 몰라 경고하는데.”배건후는 눈살을 찌푸리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방금 경찰서에서 한 말은 기록에 남거든? 만약 번복이라도 한다면 네 친구는 법적인 책임을 물을 거야.”이런 치사한 개자식 같으니라고!도아린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손을 부르르 떨었다.그리고 용기를 내어 뺨을 날리려는 순간 차 문이 다시 열렸다.이내 싸늘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내일 육씨 가문의 연회에 참석할 거야.”쿵!도아린은 문을 세게 닫고 집으로 쏜살같이 뛰어 올라갔다.결국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방금 무슨 연회라고 했지? 육씨 가문이라니? 설마 육민재가 돌아왔나?그럴 리가! 내일은 나영옥의 팔순 잔치이지 않은가?어쨌거나 지난 3년 동안 육민재는 단 한 번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우정윤은 아파트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도아린의 뒷모습을 보고 차에 다시 올라탔다.“왜 대표님 덕분에 손보미 에이전트에서 그냥 넘어갔다고 해명하지 않으세요?”“어차피 말해줘도 안 믿을 거야.”배건후는 담배를 힘껏 빨아들이며 눈을 가늘게 뜬 채 위층에 불이 켜진 창문을 바라보았다.그동안 우정윤은 자신이 모시는 상사의 일거수일투족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보니 단지 고집에 불과했다.시도해보지도 않고 어찌 믿을지 말지 안다는 말인가?사모님이 부잣집 여사님들 사이에서 괴롭힘당할까 봐 회의까지 미루고 도와주러 갔으면서 굳이 멍청하다는 둥, 영유아나 할 법한 낚시 놀이 장난감 같은 게임마저 진다는 둥 비웃기 바빴다.또한 손보미가 소유
배지유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우리 엄마가 그동안 손주를 얼마나 바라왔는지 알아요? 만약 언니가 아이를 갖게 된다면 절대로 배씨 가문 핏줄을 밖에서 떠돌아다니게 놔두실 분이 아니라서 무조건 언니를 며느리로 인정할 거예요.”손보미는 아직 전성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기에 임신할 계획은 없었다.반면, 배건후는 고작 잠자리를 가졌다는 이유로 도아린과 결혼할 만큼 책임감이 넘치는 남자였다.하지만 그녀는 도아린과 달리 배건후와 연결고리가 있다.거기다 관계까지 가지면 결코 자신을 내팽개치지 않으리라 믿었다.“지유야, 물론 괜찮은 방법이기는 한데 절대로 네 오빠의 마지노선을 건드리지 마. 진짜 화가 나면 아무도 감당 못 할 테니까.”“나한테 맡겨요. 언니, 걱정하지 마세요.”배지유는 전화를 끊고 누군가에게 연락해서 약을 구했다.비록 대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풋내기에 불과했지만 나쁜 짓을 한 게 결코 한두 번이 아니었다.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결제하려는 순간 그제야 카드가 정지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이게 다 빌어먹을 도아린의 탓이었다.아침에 엄마와 오빠 앞에서 심통 부리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일부러 그녀를 도발한 게 분명했다.결국 외출 금지당했을 뿐만 아니라 카드까지 정지되다니!‘나쁜 년, 앞으로 너랑 전쟁을 선포한다!’...육씨 가문의 연회에 참석한다는 소리를 듣고 소유정은 아침 댓바람부터 도아린을 끌고 연성에서 제일 유명한 드레스 숍으로 향했다.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풍기는 여자 두 명이 들어서자 점원이 잽싸게 마중 나왔다.“어서 오세요. 혹시 드레스를 찾고 계시나요? 어제 신상품이 막 도착했거든요.”내부는 화려하게 장식되었고, 다양한 드레스를 입은 마네킹들이 양쪽에 줄을 지었다. 그리고 유리장에 진열된 의상은 훨씬 더 고급져 보였다.즉, 한 마디로 아주 사치스러웠다.그중에서 도아린은 유리 진열장 안에 있는 한 드레스에 시선이 빼앗겼다.실버 머메이드 드레스는 마치 달빛 아래에서 반짝이는 물결처럼 은은한 빛을 띠었고, 한쪽 어깨가 노
소유정은 배지유를 쳐다보았다.어떻게 미운 말만 쏙쏙 골라서 하지? 뺨이라도 한 대 날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배지유 따위 안중에도 없는 도아린은 시선을 돌린 채 무덤덤하게 말했는데, 이런 모습이 더욱 화를 유발했다.“이혼하기 전까지 건후 씨는 내 거죠. 오빠 돈을 쓰면서 감히 새언니에게 대들어요?”배지유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면서 배건후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빠, 보미 언니한테 선물하고 싶은 드레스를 발견했는데 오늘 연회장에 입고 가면 만인의 주목을 받는 존재가 될 것 같아요.”그리고 일부러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스피커 모드로 바꿨다.도아린이 배건후의 돈을 쓰면 뻔뻔하다고 생각할 테지만 손보미의 드레스는 무려 선물이지 않은가?전혀 다른 두 가지 개념은 절대적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차이가 있다.도아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를 피했다.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배건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 카드 긁어.”배지유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올렸다. 역시나 그녀의 예상대로 손보미와 함께 있다고 말하자 오빠는 허락 없이 외출한 자신을 딱히 나무라지 않았다.난감한 기색이 역력한 손보미는 도아린만 보이는 각도에서 조소를 머금었다.배씨 가문 사모님이면 다 인가? 정작 남편과 시동생은 그녀의 편인데.어차피 불치병에 걸린 주현정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죽고 나면 배씨 가문의 새로운 안방마님은 본인이 될 것이다.그때가 되면...도아린은 시종일관 무심한 얼굴로 가게를 구경했고, 셋을 상대할 생각조차 없었다.전화를 끊고 나서 배지유의 목소리 톤이 한층 높아졌다.“언니, 오늘 저녁 첫 번째 댄스 타임에서 우리 오빠랑 같이 춤춰요.”이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점장이 돌아와 손보미의 앞에 멈추어 섰다.“실장님께서 이 드레스는 사모님을 위해 맞춤 제작했다고 했어요. 지금이라도 찾아와주셔서 정말 기쁘다고 하시네요. 돈 안 내도 되니까 선물로 그냥 드린대요.”손보미는 어안이 벙벙했다.그녀에게 이런 지인이 있었나?이내 팬일 지도 모른다고 여기고
유미주는 씩씩거리며 손보미를 흘겨보았다. 모르는 사람이면 모른다고 하지, 괜히 욕먹게 해서 이번 달 보너스만 날리지 않았는가?“방금 자기 것도 아닌데 억지로 붙잡는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냐고 말한 사람이 누구더라? 물론 전제는 본인이 빼앗아 갈 능력은 되어야겠지?”이미 짜증이 머리끝까지 난 소유정은 인정사정 따위 봐주지 않고 말했다.손보미는 손가락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었다.조신하고 아량이 넓은 설정만 아니었다면 소유정의 머리카락을 전부 쥐어뜯고도 남았을 것이다.인기도 없는 무명 가수 따위가 감히 그녀를 비웃다니?더욱 황당한 건 지난 3년 동안 집에서 가정부와 다름없던 여자가 직장을 다닌 경험도 전무한데 무려 일류 디자이너와 친구라는 점이었다.아직 통화 중인지라 서대은은 마지막 지시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미주 씨, 매장 입구에 ‘손보미와 배 씨는 입장 금지’라는 안내문을 적어 줘. 우리가 돈이 없어? 특히 내연녀가 소비하는 돈은 공짜로 줘도 받지 마.”혐오스러운 말투는 누가 들어도 적대시하는 느낌이다.실대표가 지시한 이상 유미주는 일개 고용직으로서 즉시 화이트보드에 경고문을 작성했다.비록 배건후는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만 실명을 거론하지 않기에 본인이 굳이 인정하고 싶다면 말릴 생각은 없었다.화가 머리끝까지 난 배지유는 도아린을 노려보며 말했다.“보미 언니가 망신당하는 꼴을 지켜보려고 시치미 떼고 있었던 거예요? 정말 악랄한 여자네요. 징그러울 정도로 뻔뻔스럽군!”배지유의 말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도아린의 심장에 박혔지만 이제는 아무런 타격도 없었다.그녀는 피식 비웃었다.“와이프가 버젓이 있는데 기어코 그 자리를 꿰차려고 할 때는 언제이고, 만약 디자이너 실장이랑 통화하지 않았더라면 염치 불고하고 드레스를 가져갔을 거잖아요? 본인이 추잡스러운 짓을 저질러 놓고 되레 남한테 바가지를 뒤집어씌워요?”싸늘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손보미는 이참에 본색을 드러낼까 싶었다.그녀가 알고 있는 도아린은
진수혁은 찻잔을 들어 살짝 한 모금 마시더니 배건후를 바라보았다. "말해 봐요." "내가 먼저 도아린과 결혼하면, 당신은 유럽 유학 기회를 나에게 넘겨요. 당신이 먼저 변슬기와 결혼하면, 당신이 필요로 하는 칩 기술을 두 손으로 받칠게요."진수혁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찻잔을 쥔 손에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갔고, 손등에는 핏줄이 돋아났다. 그는 배건후의 깊은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매력적인 눈은 도아린을 향할 때면 온통 비위를 맞추고 약한 척하는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매처럼 날카롭게, 거스를 수 없는 공격성을 띠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진수혁은 눈에 띄지 않게 눈썹을 찌푸렸다. 배건후가 그동안 도아린에게 온갖 비위를 맞추는 것을 보고 진수혁은 배건후가 이미 자존심과 투지를 잃고 오직 결혼 생활을 되돌리려고만 한다고 오해했다. 이제야 배건후는 여전히 그 배건후라는 것을 알았다. 전 부인을 되찾고 싶어 하는 것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발전시킬 기회를 포기한 적도 없었다.유럽에는 강연이 하나 있는데, 입문 조건이 주요 재벌 그룹의 실력자 또는 후계자이며, 배건후의 현재 자산으로는 강연을 들을 수 없었다. 진수혁은 그 자격이 있었지만,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유럽으로 가서 칩 기술을 연구하는 천재를 찾고 싶었다. 두 사람은 서로 필요한 것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배건후는 굳이 그와 도박을 걸려고 했다. "당신이 이길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알죠." 진수혁이 말했다. "두고 보시죠." 배건후가 말했다. 두 남자는 악수하며 조용히 내기를 정했다. 저녁 식사 때, 진수혁 부부는 주범금도 데려왔고, 내일을 위해 준비했던 몇 가지 요리가 오늘 식탁에 올랐다. 모두 즐겁게 식사했고, 주범금의 기분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그녀는 도아린에게 자신이 구매한 전리품을 자랑하기도 했고, 밤늦게서야 떠났다. 진수혁은 도아린을 데려다줄 때 그녀를 불러 세웠다. "유럽에 칩 분야 천재가 있다는 거
변환에 성공하는 순간, 동생은 깨어났고, 시스템은 남자 주인공에게 귀속되었다. 시스템은 남자 주인공에게 도아린의 진심을 얻지 못하면 죽을 것이라고 알렸다.처음에는 남자 주인공이 믿지 않았지만, 도아린과 이혼한 후 자신의 사업 제국이 날마다 무너져 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도아린의 좋았던 점들을 떠올렸다...도아린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 "비록 허구의 이야기지만, 이 남자 주인공은 정말 쓰레기네!""나도 그렇게 생각해." 배건후는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도아린의 좋은 점을 떠올린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거야."도아린은 그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눈빛에는 ‘그러니 당신도 그와 똑같은 부류겠지’라고 쓰여 있었다."나는 아니야." 배건후는 도아린의 손을 잡고 심장 부위에 가져다 댔다. “나는 줄곧 당신만을 사랑했어. 다만 임무 때문에 표현할 수 없었을 뿐이야. 나는 모든 것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당신에게 줄 수 있어."도아린은 손을 빼서 그의 옷에 쓱 닦았다."당신은 나를 소유하고 싶을 뿐이야. 나를 소유하는 것이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과 같으니까." 그녀는 일어나 테라스로 향했다.배건후는 따라가서 말했다. "우리는 공정하게 할 수 있어! 결혼 전후를 막론하고 모든 자산은 당신 거야!"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나도 당신 거고."라고 덧붙였다.도아린은 깊어가는 가을의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눈을 감고 침묵했다.배건후는 말없이 그녀 옆에 서 있었다. 마치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주인이‘놀러 가자’라고 한마디만 하면 즉시 꼬리를 흔들며 기뻐할 준비가 된 듯이.한참 후, 도아린은 그를 돌아보았다."당신 우정윤에게 후원한 적 있어?"배건후는 입술을 오므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후원한 건 독자들이 남자 주인공을 가장 심하게 욕하는 챕터였어.""……" 그리고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도아린은 웃음을 참으며 일부러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거기 나오
"내가 무슨 바람이 있다고 그래요?"예전에 그녀가 먼저 다가간 건, 배건후랑 제대로 살아보고 싶어서였다.남녀를 불문하고 아이를 낳아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당신을 내 뜻대로 움직이려고 여러 수단을 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사랑 없이는 못 산다는 건 아니에요.내가 엄청나게 목마른 사람처럼 말하네요.배건후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배건후가 잘못 말했어요. 배건후가 원해요. 당신이 나를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나를 총애해주길 기다릴게요."퉤!도아린은 씹던 멜론을 배건후의 몸에 그대로 뿜어버렸다.가슴을 치며 화도 나고 웃음도 나왔다.두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한 후에 배건후는 분명히 다른 사람에게 몸을 빼앗긴 게 분명하다.겉모습은 그대로지만, 속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예전의 배건후는 엄격하고 냉정하며 웃음기 하나 없었고,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을 하면 비웃거나 냉담하게 대하곤 했다. 지금의 배건후는 데릴사위가 되겠다는 말도 서슴없이 하고, ‘총애’를 받겠다고 자청하기까지 한다.배건후는 몸에 묻은 과일 조각을 닦지 않고 손을 들어 도아린의 등을 토닥이며 괜찮은지 확인한 후에야 휴지를 꺼내 옷을 닦았다.도아린은 바닥에 떨어진 과일 조각을 치우며 농담처럼 말했다. "배건후, 당신 몸에 다른 사람이 들어온 게 분명해요. 내가 책 속에 살고 있는 건가? 당신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알고 내가 강해져서 당신에게 복수할 거라는 걸 알고 미리 납작 엎드리는 건가?"배건후는 옷을 다 닦고 도아린을 소파로 끌어당겼다."빙의가 아니라 공략이에요.""..."남자는 그녀를 품에 안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을 공략해서 당신의 사랑을 얻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나는 죽어요.""당신 미쳤어요?" 도아린은 그의 등을 찰싹 때렸다."미쳤어요. 당신은 유일한 약이에요."도아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의 품에서 온몸을 떨며 웃었다. "그렇게 뻔한 사랑 고백은 우종이 가르쳐준 거죠
"엄마가 당신한테 준대요, 알아서 해요."도아린이 머리를 끄덕였다."그래요. 별장에서 돌아온 후 다시 해결합시다."배건후는 몸을 뒤로 돌리면서 주체 못 하고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잘 보이지 않아 그런지 어떤 부분은 더 확대되어 크게 보였다."전보다 커졌는데요."이상한 말이 도아린의 얼굴을 빨갛게 만들었다.그녀는 화가나 그를 한 눈 째리고 나가서 물건을 정리하였다.도아린은 변슬기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그녀를 끌고 단추를 찾는다는 핑계로 무슨 일인지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변슬기는 카펫에 엎드려서 핸드폰 보조등을 켜고 소파 밑을 드려다보았다."찾았어요."그녀는 손을 뻗어 단추를 쥐면서 주절주절 말했다."도 선생님, 이제 기회가 되면 제가 저희집의 메인 메뉴인 만두를 대접해 드리겠습니다."도아린은 카펫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그녀가 건네 준 단추를 만지면서 웃으며 말했다."좋아요. 제일 좋기는 가게 평생 20% 할인 카드 줘요.""작은 가게라 많이 벌지도 못해요."변슬기가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이 오시면 무조건 20% 할인 해들릴게요."진수혁은 다 썰어 놓은 과일을 가지고 밖으로 나오면서 저둘이 얘기를 나누는 것을 보았다."무슨 얘기 하세요?"변슬기가 설명해주려 하자 도아린은 손으로 그녀의 목을 감싸며 말했다."데릴 사위에 대해 얘기를 했어요. 변슬기의 어머니 아버지는 딸 하나 뿐인데, 앞으로 사위가 있다며 처가에 들어왔으면 해요."변슬기는 진수혁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 보았다. 그가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진수혁의 기분은 별로 파동이 없어 보였고 그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에 매우 동의하는 눈치였다."우리집에는 니가 하나뿐인 딸인데.""저는 데릴 사위를 할 생각이 있습니다."진수혁은 도아린한테 손을 닦으라고 뜨거운 손수건을 건네 주며 그녀를 지그시 바라 보았다.슬기는 놀라서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도아린과 진수혁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
변슬기는 재빨리 진수혁의 등 뒤로 숨었다.진수혁은 잠시 멈칫하더니 곧 상황을 파악하고 조용히 말했다.“이것 좀 부엌에 가져다줘.”“네!”변슬기는 배건후가 문 앞에 두고 간 봉투를 잽싸게 집어 들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부엌으로 사라졌다.도아린의 셔츠 단추 하나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배건후는 자신의 재킷을 벗어 그녀에게 걸쳐주며 조심스럽게 게스트룸으로 이끌었다.“기다려. 금방 다녀올게. 차에 여벌로 둔 옷 있어.”도아린은 황급히 배건후의 손을 붙잡고 재킷을 벗어 돌려주었다.“일북이 근처에 있을 거야. 전화해. 밖에 추우니까 이거 입고 나가.”그녀가 팔을 들자 셔츠는 더 크게 벌어졌고 새하얗고 부드러운 피부가 다시 배건후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눈동자에 번쩍이는 불꽃이 튀었고 그 불씨는 작지만 매섭고 뜨거웠다.도아린은 급히 몸을 옆으로 돌리고 팔로 가슴을 가렸다. “어서 가.”배건후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그녀를 끌어안았다.도아린은 반사적으로 거부하려 했지만 그는 단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번을 고요히 숨쉬더니 결국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발소리는 집 밖이 아니라 욕실로 향했다.변슬기는 부엌에서 머리를 내밀며 확인하려다 진수혁에게 팔을 붙잡혀 다시 안으로 끌려들어갔다.“생각해봤어? 회사에 남을 거야 아니면 돌아가서 가게를 이을 거야?”변슬기는 고개를 숙이고 포도를 씻었다.자신의 집은 해남에 있는 작은 분식집이었다. 일반 가정에게는 소중한 생계 수단일지 몰라도 재벌가인 진씨 가문 한테는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존재였다.부모님은 외동딸인 변슬기가 곁에 있기를 바라며 나중에는 사위를 맞이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진수혁은 진성 그룹의 황태자다. 그에겐 집안도 학벌도 모두 어울리는 배우자가 필요했고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 떠나는 순간 진수혁과는 더 이상 인연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계속 머무르면 감정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 뻔했다.한참 후 변슬기는 낮은 목소
“지금 두 분은 어느 정도까지 간 거예요?”집에 도착하자마자 도아린은 본론부터 꺼냈다.그녀는 오빠와 변슬기 사이가 눈에 띄게 가까워진 걸 단번에 눈치챘다.“아...아니에요! 아직 시작도 안 했어요...”변슬기는 난간에 양손을 올린 채 눈을 피하며 말끝을 흐렸다.“시작은 안 했어도 뭔가 있었네요?”“크흐흑!”그 말에 변슬기는 자신이 삼킨 침에 갑자기 사레가 들려 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고 얼굴은 벌게졌다.변명하려 할수록 기침은 더 거세졌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도아린은 웃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이고 물 한 잔을 건넸다.“너무 걱정 마요. 변슬기 씨 덕분에 우리 집에 큰 도움 됐잖아요. 우리 가족의 은인이에요!”“진짜 아니에요...”변슬기는 눈물까지 닦으며 손을 저었고 표정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그날 밤 나랑 같이 집에 안 갔잖아요. 여기서 잤던 거 아니에요?”“그랬었죠. 그런데요...”그녀는 작아진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아무 일도 없었어요.”도아린은 눈을 흘기며 말했다.“설마 우리 오빠가 그쪽에 문제 있어요?”‘설마 그럴 리가... 아빠는 나이 들었어도 정력이 넘치시던데 오빠도 피는 못 속일 텐데?’변슬기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그날 서로 안기도 했고 키스도 했지만 마지막 순간 진수혁이 스스로 멈췄고 그는 침실을 양보하고 자신은 거실 소파에서 잤다.다음 날 술이 깬 듯한 표정으로 전날 일을 아무렇지 않게 넘겼고 변슬기도 굳이 꺼낼 수 없었다.그 후로도 그들의 사이는 은근하게 가까워졌지만 딱히 확실한 정의는 내려지지 않았다.“나중에 내가 오빠한테 물어볼게요.”“안 돼요!”변슬기는 도아린의 팔을 움켜잡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빛으로 말했다.“도 선생님...제 신분이 황태자님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거 잘 알아요. 남자들은 술 먹으면 착각할 수도 있고...다행히 선을 넘지는 않았으니 그냥 없던 일로 해주세요.”도아린은 그녀의 손을 다독이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하지만 우리 진씨 가문은 책임감 없는
“아!”변슬기는 병아리마냥 진수혁 차로 옮겨졌다.도아린은 웃으며 문을 닫고 조수석에 올라탔다.그녀는 휴대전화로 사진 하나를 골라 일남에게 전송했다.일남은 안전벨트를 하려던 참 알림 소리에 바로 폰을 꺼내 들었다.사진을 본 그는 입꼬리를 실룩이며 말했다.“아가씨 사진 실력이 정도면 필터도 울고 갈 수준인데요.”“정말? 나도 볼래!”송 비서가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었다.“앉아. 운전해야 해”일남은 그의 머리를 눌러 다시 자리로 돌려보냈다.“시내에선 뒷좌석 안전벨트 안 해도 되는 거 아니야? 연성은 관리가 그렇게 심해? ”송 비서는 투덜대며 안전벨트를 잡아당겼다.일남은 일북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너도 보지 마. 그냥 안 본 셈 쳐.”그 사진은 일남이 일북을 힐끔 바라보는 순간을 캡처한 것이었다.일북은 정면만 똑바로 응시하는 완전 군인 양식이었고 일남은 몰래 보는 범인 양식이었다.하지만 일북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시동을 걸어 배건후 차량을 따라갔다.“왜 웃어?”배건후는 도아린이 조수석에서 혼자 피식거리는 걸 보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아무것도 아냐. 그냥 재밌는 사진 하나 건졌어.”도아린은 휴대폰을 집어넣고 밀크티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김지민네 진짜 끝도 없네. 혹시 배 회장님 유골 넘기면서 돈 요구한 거 아냐?”진옥경 고모 장례 때도 남편이 돈부터 요구했었다.다행히 진가에서 능력 있는 변호사를 구해서 사망 후에도 부부 재산을 나눠 가질 수 있었다.배석준 역시 김지민 가족한테는 그냥 은행 통장 같은 존재였고 이제 더는 못 빨아먹으니까 마지막으로 크게 한몫 뜯어내려고 하는 거였다.“2억.”배건후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티슈를 꺼내 도아린에게 건넸다.도아린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방금 마신 밀크티를 뿜을 뻔했고, 그 티슈로 입까지 닦았다.“진짜 줬어?”“아니.”배건후는 새 티슈를 또 건네며 그녀의 티슈 재활용에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눈빛엔 오히려 다정함이 가
진수혁은 변슬기의 얼굴이 붉어진 걸 못 봤거나 봤더라도 모른 척했는지 담담히 말했다.“우린 여기서 기다릴게.”도아린은 변슬기 머리 위에 달린 풍선을 가리켰다.“이렇게 눈에 띄는 표시도 있으니까 제가 금방 찾으러 갈게요. 오늘 관광객 많으니까 지금 덜 붐빌 때 구석구석 잘 봐요.”“길 잃으면 전화해.”진수혁은 풍선 끈을 가볍게 당기며 변슬기를 데리고 발걸음을 옮겼다.일북은 도아린 뒤를 바짝 따라가며 주변을 날카롭게 살폈다. 혹시나 누가 해코지할까 혹은 누가 몰래 물건을 훔쳐 갈까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반면 일남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관광에 진심이었다.관광 가이드 옆에 붙어 설명을 듣고는 돌아와서 일북에게 흥분한 얼굴로 그대로 전달했다.“아까 가이드가 그러는데 양평산 대군이 남자인데 얼굴이 여자처럼 생겨서 어떤 후궁이랑 닮았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황제가 유독 아껴줬대.”일북은 그런 일남의 말에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을 뿐 시선은 한시도 도아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둘이 가서 마음껏 구경하고 와.”“아가씨...”도아린은 손목에 찬 긴급 호출 시계를 들어 보이면서 웃었다.“무슨 일 생기면 연락할게. 오늘은 놀러 나온 거니까, 일은 잠시 내려놔.”도아린의 반복된 설득에 일북도 결국 잠깐 자유시간을 허락받았다.일남은 일북을 끌고 다니며 계속 얘기했고 도아린은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시려던 참이었다.그때 갑자기 머리 위로 그늘이 드리웠다.오늘 날씨는 참 좋은데 운동복만 입어도 괜찮지만 햇살은 은근히 따가워서 그늘 아래는 금세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도아린은 마침 마당 한가운데 서 있었다.그녀는 잠깐 고개를 들어 양산을 쳐다보고는 옆쪽에 서 있는 송 비서를 바라보았다‘아 맞다! 얘도 있었지. 애매하게 끼어 있는 애 하나 더.’그렇게 해서 도아린은 송 비서와 함께 느긋하게 궁 안을 둘러봤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가끔 변슬기를 마주치면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 지나쳤다.공왕부는 작지도 크지도 않은 곳이라 여기저기 구경하다 보면 시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집에 도착하자 일남은 결국 사실대로 털어놨다.“갈비뼈가 아직 제대로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전에 유치장에 있을 때 남궁유민 차가 폭발했잖아요? 그때 도아린 씨를 안고 같이 넘어지면서 또 다쳤거든요. 아까 강재민이랑 싸울 때 그 부위를 건드렸을 수도 있어요...”도아린은 마른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고개만 살짝 끄덕이면서 담담하게 대답했다.“응, 알겠어.”일남은 일북을 힐끔 바라봤고 일북은 눈빛으로 먼저 올라가라는 신호를 보냈다.“아가씨, 일부러 숨기려고 한 건 아닙니다.”“알아. 나 안 화났어.”도아린은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사실 아까 대충 눈치챘거든.”야밤에 신지훈이 간호사 유선미를 데리고 배건후에게 수액을 놓으러 간 걸 봤다. 그 사람 몸에는 분명히 예전부터 앓고 있던 상처가 남아 있었다.배건후는 약한 척해서 동정을 사려 하지 않았고 도아린 역시 그가 얼마나 진심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주말이 되자 모두 함께 공왕부로 향했다.입구에 도착하고 나서야 도아린은 진범준 부부가 오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다.“부모님은?”“주 대표님이랑 장비 사러 가셨어.”진수혁은 편안한 캐주얼 차림으로 변슬기 손에서 자연스럽게 배낭을 받아 메며 말했다.“출발할 때 들었는데 부모님이 주 대표님이랑 같이 자가 여행 떠나신다고 하더라고.”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고 있는 눈치였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도아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배건후는 배석준 회장님 장례 치르러 갔어.”김지민은 아직도 운전기사에게서 보상금 한 푼이라도 더 뜯어내려고 버티고 있었고 끝까지 합의서에는 사인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하지만 배건후는 김지민 동생의 약점을 찾아냈고 오늘 반드시 장례를 치르지 않으면 동생을 감옥에 보낼 거라고 통보했다. 김지민은 결국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그 집안의 욕심을 생각하면 그들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분명히 배건후에게 또 뭘 요구하려고 들 것이다.하지만 배건후는 배석준처럼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으니 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