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정의 병실에 들어선 도아린은 흠칫 놀랐다.그녀는 오늘 컨디션이 좋은 듯 침대에 누워 있지 않고 밝은 색상의 명품 스타일 투피스를 입고 거실에서 친구를 접대했다.“아린아, 이리 와. 소개해줄게.”주현정이 도아린을 향해 손을 뻗으며 미소를 지었다.“이분은 내 절친이자 최고의 여배우인 함예진이야. 여긴 내 며느리 도아린이고.”함예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도아린을 위아래로 훑었고, 의아한 기색이 역력했다.비록 생얼이지만 외모가 출중했고, 몸에 별다른 사치품을 지니지 않았으나 결코 눈길을 사로잡는 아우라를 풍겼다.이런 부류의 사람은 액세서리 따위 안중에 없거나 보석보다 더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지거나 둘 중 하나였다.“이모라고 부르면 돼.”“안녕하세요, 이모.”함예진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낀 반지를 빼서 건네주었다.“급하게 오느라 선물도 준비 못 했네. 귀한 건 아니라서 편하게 하고 다녀.”귀한 게 아니라니?영화계 거물은 몇십 억이 넘는 액세서리도 우습게 보는 건가?도아린은 반지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3개의 깃털이 뿔 모양을 이룬 반지는 일명 유니콘 링이라고도 불렸다. 당시 함예진이 칸 영화제 레드카펫에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핸드메이드 자수 드레스와 매치한 클래식 아이템이었다.“저한테 너무 과분한 선물이라서 받을 수가 없어요.”“줄 때 가져.”주현정이 반지를 건네받아 도아린의 손에 끼워주었다.“워낙 공사다망한 사람이라 특별 게스트로 출연해달라고 하는 작품만 아니었다면 연성에 오지도 않았을 거야.”백옥처럼 하얀 피부에 오색찬란한 반지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이모랑 같이 밥 먹으러 가자.”식사 자리에서 도아린은 함예진이 연성을 찾은 진짜 목적에 대해 전해 들었다. 바로 이번 송민혁 감독의 새 작품에서 유능한 왕후 역할을 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녀는 정상급에 속했지만 조연이라고 해서 출연 제의를 거절하지 않았고, 캐릭터의 매력을 우선순위로 두고 대본을 선택했다.“아린아, 가서 이모랑 내가 마실 주스
함예진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아무렇지 않게 젓가락으로 주현정의 접시에 반찬을 덜어주는 도아린을 바라보았다.“어머님, 생선 드세요. 이 부분은 가시가 없거든요. 이모도 많이 드세요.”“역시 날 챙겨주는 건 며느리뿐이네.”함예진도 웃으면서 접시를 건넸다.“고마워.”아무도 입구에 있는 손보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자 그녀는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서더니 다시 배건후의 이름을 불렀다.배건후는 무표정한 얼굴로 도아린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외식하면 가장 먼저 냅킨을 깔고 필요 없는 식기를 치워주곤 했는데 오늘은 마치 공기 취급했다.머릿속으로 어젯밤 그녀의 행세를 되뇌며 오늘 아침 결판을 내기도 전에 잽싸게 도망친 일이 떠올라 속에서 열불이 나는 것 같았다.“이리 와서 앉아.”배건후가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당기자 손보미는 활짝 웃으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안녕하세요, 어머님, 선생님. 아린 씨, 오랜만이야.”진심 어린 미소를 지으며 나긋한 말투로 인사하는 여자의 모습은 아까와 사뭇 달랐다.“방금 화장실에서 보지 않았나?”도아린은 반찬을 한 입 집어 먹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손보미의 안색이 돌변하더니 표정이 어찌나 억울한지 금세 눈물이라도 흘릴 듯싶었다.함예진은 온갖 대상을 휩쓴 배우답게 진심인지 연기인지 한눈에 간파했다.이내 배건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소개 안 해줘?”“저는 손보미라고 하고, 이번 송민혁 감독님의 새 작품에서 ‘예원’ 역을 맡았어요. 왕후 역할이 다름 아닌 함예진 선생님이라고 들었는데 이번 기회에 연기를 제대로 배우고 싶어서 건후 씨한테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죠.”손보미는 자리에서 서둘러 일어섰다.함예진은 못 들은 척 배건후만 쳐다보았다.이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손보미라고 합니다.”“아, 연예인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경미한 교통사고에도 구급차를 부르는 바람에 결국 임산부를 유산하게 한 그 무명 배우?”생글생글 웃는 얼굴과 달리 인정사정없는 말을 내뱉을 줄이야.손보미의 얼굴이
뭐지?뒤에서 몰래 수작 부리는 게 성에 안 차서 이제는 대놓고 유혹하는 건가?정작 남편이라는 사람은 어제 그렇게 위험천만한 순간에 무심한 얼굴로 지켜보기만 하더니 도와주기는커녕 설상가상으로 그녀를 데리고 가서 자기 사리사욕을 챙기기 바 빴다.순간, 억울함과 분노가 물밀듯이 밀려왔다.역시 남자 따위는 필요 없었고, 솔로가 최고였다.“이모가 보기에 괜찮을 것 같아요?”“물론이지. 넌 얼굴도 예쁘고 머리도 똑똑하고 이해력도 뛰어나잖아.”함예진은 팔꿈치로 주현정을 슬쩍 찌르며 말했다.“아직 하녀 역할이 남았는데 아린을 추천해볼까?”주현정은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자신을 흘겨보는 배건후 때문에 손보미는 허공에 뻗은 손을 다시 내려놓았다.아까만 해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도아린의 말을 듣고 나서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바보 같은 년, 주현정의 시중을 3년이나 들었는데 연예계에 종사하는 며느리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도 눈치 못 챘단 말인가? 아니면 그녀가 일찌감치 배씨 가문 사모님의 자리를 꿰찼을 것이다.주현정은 시종일관 미소를 지었지만 눈빛이 점차 싸늘하게 변했다.이때, 손보미가 끼어들었다.“하긴, 이번 기회에 도전해 봐. 나도 같은 제작팀이거든? 함예진 선생님께서 잘 이끌어주실 테니까 열심히 배우면 앞으로 연기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거야.”도아린이 합류하게 된다면 제 발로 찾아와 괴롭힘을 자처하는 꼴인데 이렇게 좋은 기회를 어찌 놓치겠는가?주현정에게 바짝 다가간 도아린은 넌지시 물었다.“어머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주현정이 착잡한 눈빛으로 나지막이 말했다.“연기해보고 싶어?”“어머님의 의견에 따를게요.”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그럼 해 봐.”이내 함예진을 바라보았다.“우리 며느리를 믿고 맡기는 거니까 혹시라도 괴롭히는 사람이 생긴다면 너한테 책임을 물을 거야.”“당연하지.”주현정, 함예진, 도아린은 주스로 건배했다.배건후는 꿈쩍도 안 했고, 손보미는 잔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너한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끼얹었다고?”남자가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손보미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난 뒤끝이 있는 사람이 아니야. 게다가 불꽃놀이도 해주기로 약속했잖아? 도아린이 손찌검만 하지 않는 이상 욕한다고 한들 참을 수 있어.”배건후는 무표정으로 일관했고 검은 눈동자는 깊이를 가늠하기 힘들었다.손보미가 위를 살살 문지르며 말했다.“저녁에 뭐 먹지도 못한 것 같은데 나도 마침 배가 고프네. 근처에 비건 레스토랑이 있는데 같이 갈래?”배건후는 담뱃재를 툭툭 털면서 조수현 앞으로 걸어갔다.“집까지 데려다줘.”손보미는 마지못해 차에 탔고, 문이 닫히자마자 못마땅한 듯 눈빛이 험악하게 번뜩였다.이내 고개를 숙여 재빨리 문자를 보냈다.[사장님, 혹시 대역은 찾으셨나요?]...주현정을 부축해서 걸어가던 도아린의 등 뒤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재수 없는 사람을 만나면 운수가 사납기 마련이네.”소매를 붙잡고 있는 함예진의 얼굴은 분노로 가득했다.문에 삐쭉 튀어나온 못 때문에 소매가 걸려서 찢어졌는데 몇백만 원이 넘는 옷을 버리게 생겼다.도아린이 다가가 힐긋 쳐다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들어가서 쉬고 계시면 제가 수선해드릴게요.”“옷 수선도 할 줄 알아?”놀라움이 담긴 말투와 달리 그녀의 눈빛은 무덤덤하기만 했다.병실로 돌아간 다음 주현정은 함예진이 갈아입을 만한 옷을 찾아주었고, 이내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한편, 도아린은 휴게실에서 옷을 수선하고 있었다.30분 뒤, 그녀는 옷을 들고나와서 말했다.“제가 손재주가 별로 없어서 혹시 이 정도면 괜찮을까요?”함예진이 건네받는 순간 두 눈이 반짝 빛났다. 찢어진 부분에는 같은 색상의 실로 장미꽃이 수 놓여 있었는데 마치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게다가 티가 전혀 나지 않을뿐더러 화룡점정의 효과까지 추가되었다.이내 주현정의 앞에 내밀며 말했다.“요즘 바느질할 줄 아는 젊은이가 어디 있어? 이런 보물 같은 며느리를 얻다니.”주현
소유정은 도아린을 소파에 앉히고 과일 차를 건넸다.“너 대신 분풀이나 해주려고 했는데 사회가 이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줄이야!”대역은 십중팔구 정해진 일이었지만 손보미 그년 때문에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따라서 그녀는 송민혁에게 조연이라도 좋으니 도아린을 추천하려고 했다.만약 자수 놓는 신만 있다면 손보미가 찾은 ‘대역’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거로 확신했다.그러나 남한테 어렵게 부탁해서 끼워 넣은 프로필이 단지 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1차에서 탈락할 줄은 몰랐다.“만약 내가 톱 가수였다면 조연 정도 추천해주는 건 식은 죽 먹기일 텐데... 이게 다 무능한 내 잘못이야.”“아니야.”도아린은 소유정을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감독님께서 오디션 받아보라고 하셨어.”“정말?!”소유정이 벌떡 일어나 소파에 서서 도아린을 내려다보았다.“너한테 연락이 왔어? 어떤 역할이래?”“오디션 하러 가봐야 알 것 같아.”다음 날.주현정은 도아린에게 전화를 걸어 오디션은 며칠 더 기다려야 하니까 우선 킹캐슬부터 다녀오라고 말했다.이제 곧 그녀의 명의가 될 예정이라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라는 의도였다.만일의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해 도착하면 사진까지 찍어서 보내라고 당부까지 했다.킹캐슬은 산을 등지고 호수를 마주하고 있어 많은 사람의 인생샷 명소로 유명했다.특히 신혼부부나 커플들이 오래된 성을 연상케 하는 별장을 배경으로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다.첫 번째로 풍경이 아름다워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었고, 두 번째로 이는 사랑의 증표와 같은 건물로서 자신도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갈 수 있기를 기원했다.별장에 정기적으로 청소하러 오는 사람이 있었기에 먼지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안에서 생활한다고 하면 대청소를 한 번 해야만 했다.도아린이 도착했을 때 이미 오후가 되었고, 남향 방 하나를 깨끗하게 정리한 다음 근처에서 장을 보고 저녁에 소유정과 맛있는 음식을 해 먹기로 했다.주현정의 말에 의하면 지하실에 자전거가 있지만
그녀는 바로 손보미였다.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고 있는 여자는 두 눈에서 빛이 반짝반짝 났다.이때, 댓글 창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내용이 떴다.[네가 나오는 드라마는 안 볼 거야. 연기도 못하는 게!]상대방은 곧바로 강퇴당했다.[포토샵 전문 여배우 주제에 눈꼴 사납게 하지 말고 얼른 은퇴해.]또 한 사람이 감쪽같이 사라졌다.축하 메시지를 제외하고 나머지 부정적인 내용은 전부 차단되었다.도아린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연예계는 역시나 복잡했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칭찬과 욕이 섞여 있기 마련이다.손보미는 카메라를 바라보며 자신을 비하하는 댓글 창은 애써 무시하고 김지민이 사전에 준비한 멘트를 달달 외워서 읊어댔다.공유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몰라도 라이브를 시청하는 인원수는 천 명대에서 금세 만 명을 넘어섰다.그러나 부정적인 내용도 갈수록 많아졌다.[뻔뻔스럽게 공공 자원이나 무단 점용하고!][길 걸을 때 잘 보고 다녀. 고작 발목 삐끗했다고 구급차 부르지 말고. 아리산은 안 그래도 진입하기 힘든데 구급차가 도착했을 때 이미 다 나았을지도 모르니까.]도아린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아리산? 그녀가 현재 있는 곳이지 않은가?곧이어 테라스로 나가자 저 멀리 모닥불과 촬영 중인 스태프들이 보였다.“부정적인 댓글이 너무 많아. 얼른 배 대표님한테 연락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돌려.”김지민은 이어폰을 통해 손보미에게 알렸다.“시간이 거의 다 됐네요. 미스터리 게스트에게 전화해서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해볼게요.”손보미는 휴대폰을 꺼내면서 말했다.그리고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꿀이 뚝뚝 떨어지는 말투로 물었다.“일 끝났어?”“왜?”그녀는 남자의 쌀쌀맞은 말투는 가뿐히 무시한 채 말을 이어갔다.“지금 생일 축하해주는 팬들이 엄청 많아서 너무 행복해. 항상 잘 챙겨줘서 감사하다는 말 꼭 전하고 싶었어.”배건후는 볼펜을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카메라에 못마땅한 표정이 잡히지 않도록 손보미는 미소를 지은 채 뒤를 돌아섰다.
손보미는 댓글 알바를 고용했을뿐더러 마케팅 계정도 새로 팠다.그동안 배건후와 스캔들은 생일 축하 라방 이후로 대중의 마음속에 기정사실로 자리 잡았다.게다가 인스타에 올린 게시물의 댓글은 전부 축하하는 내용으로 도배되었다.배건후가 받은 메시지는 바로 불꽃이 터지는 순간 촉촉한 눈망울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여자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었다.우정윤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이내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쾅 하고 내려놓는 상사를 보자 즉시 진상을 파악하러 자리를 떴다.10분 뒤, 그는 마지못해 다시 들어와서 보고했다.“불꽃놀이 판매사에서 김지민이 생일 축하 문구를 백년해로로 바꿔 달라고 했다네요. 그리고 검색어에 관해서는...”비록 손보미는 그다지 유명한 편이 아니지만 배건후는 연성에서 명성이 자자한 황태자이지 않은가?그의 인기에 힘입어 손보미의 팔로워는 금세 10만 명에 육박했다.라이브 방송을 지켜본 사람 중에서 누군가 클립으로 편집해서 인터넷에 업로드했는데 댓글로 손보미를 축하해주는 팬들이 있는가 하면 남자에게 빌붙는 그녀를 무시하는 배건후 추종자들도 있었다.두 세력이 서로 팽팽하게 맞서면서 곧바로 실검 1위를 장악했다....다음 날.유민정의 연락을 받은 도아린은 주현정의 주치의가 가족들을 호출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우연의 일치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는 배건후와 거의 동시에 진료실에 도착했다.어두운 안색의 남자는 의자에 앉자마자 강한 위압감을 뿜어냈고, 의사는 저도 모르게 몸을 틀어 그나마 상냥한 태도의 도아린을 마주 보았다.“사실...”주현정의 병은 콕 집어 정의하기 어려웠다. 기준치에 부합되지 않은 항목이 하나도 없지만 그렇다고 또 치명적인 건 아니었다.현재로서 의사의 소견은 아이를 낳고 면역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면역력을 가볍게 여겼다가 큰코다칠지 몰라요. 유행성 바이러스에 한 번 걸리면 장기 부전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죠.”듣는 내내 조마조마하던 도아린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퇴원하고 나서 주의
이내 엘리베이터 층수가 빠르게 변했다.도아린이 버럭 외쳤다.“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면 그냥 집에서 썩게 놔둬요. 어쩌면 백 년 뒤에 문화재 답사할 때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배건후가 담배를 두 동강 냈다.“다시 한번 얘기해 봐.”말하라고 해서 고분고분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꿈도 참 야무지군.도아린은 지금처럼 마음이 확고한 적이 없었다. 즉,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남자한테서 도망치는 것이다.그리고 배건후가 엘리베이터에 발을 들이는 순간 잽싸게 비상구로 뛰어가 택시를 타고 집까지 갔다.주얼리를 직접 처분하는 것쯤이야! 물건을 정리하고 나서 다시 이혼을 언급했을 때 무슨 핑계를 댈지 두고 볼 작정이었다.그러나 집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비밀번호를 바꾼 사실이 떠올라 밖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다행히 가정부 아주머니가 계셨고, 안미자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얼른 문을 열어주었다.“사모님, 오셨어요? 정말 다행이에요. 그동안 사장님 음식을 준비해주다가 계속 꾸중만 들어서 월급이 곧 바닥날 것 같아요.”도아린이 까탈스럽지 않고 성격도 착한 편이라 가정부도 그녀를 편하게 대했다.“부부는 항상 티격태격하기 마련이죠. 사실 사장님께서도 속으로는 사모님 생각을 많이 하세요...”이때, 뒤에서 자동차 엔진음이 들려왔고 배건후가 집에 도착했다.도아린은 신발을 갈아신으며 너스레를 떨었다.“아줌마는 자녀가 두 명이라고 했죠? 아들 하나 딸 하나?”안미자는 어리둥절하더니 활짝 웃었다.“맞아요. 첫째는 딸, 둘째는 아들인데 장난기가 어찌나 많은지. 아빠를 제일 무서워하죠.”“이제 일하신 지도 3년이 다 되어 가는데 제가 왜 아이가 없는지 알아요? 왜냐하면 남편이 내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기 때문이죠.”입구에 서 있는 남자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고,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갔다.정작 도아린은 당황한 표정의 안미자를 뒤로 하고 유유히 2층으로 올라갔다.그녀가 집에 있는 날이면 배건후는 늘 외박했고, 혹시라도 집을
배석준은 잠시 멈칫하더니 목에 무언가 걸린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김지민이 찾아온 것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것과 다름없었다.주현정은 피식하더니 새우 딤섬을 밀어내고 옆에 있는 곡물 전병을 집어 들었다.“마침 지민 씨도 왔으니 같이 이야기하죠.”“지민 씨는 내 비서일 뿐이야.”배석준은 어두운 표정으로 나가더니 김지민을 한쪽으로 불렀다.싸늘하게 식어버린 눈으로 바라보는 그한테서 오랜 권력자의 위엄이 저절로 뿜어져 나왔다.“여기까지 왜 온 거야?”김지민은 그의 기에 눌린 채 조심스레 가방에서 물건을 꺼내 건넸다.“시계를 저희 집에 놓고 가셔서요. 사모님께서 오해하실까 봐 얼른 가져다드리려고요.”그녀가 이렇게 찾아오는 게 주현정에게는 더 큰 오해의 빌미가 될 터였다.“중요한 일이 아니면 저택에 찾아오지 마.” 배석준은 시계를 건네받고 돌아서려 했다.김지민은 그의 팔을 급히 붙잡았다.“저랑 보미가 지유를 보러 가고 싶은데 가족이 아니라서 어려워요. 도와주실 수 있나요?”“곧 나올 거라는 걸 알면 지유도 마음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서요.”배석준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곳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내고 있을 텐데 대회가 끝나면 도아린이 합의서를 제출할 것이라고 알려주면 배지유도 기대를 할 수 있었다.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주현정을 달래는 일이라 손보미가 소식을 전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배석준은 전화를 걸려다가 또다시 김지민에게 팔이 붙잡혔다.“옆에서 하세요. 사모님께서 지유가 보미랑 어울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세요.”배석준은 그녀의 말을 듣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전화를 걸었다. 김지민은 그런 배석준을 숭배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모든 일이 정리된 후, 김지민은 배석준과 함께 돌아가다가 발을 헛디디며 그의 품에 안기며 쓰러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순간 김지민은 그를 밀쳐내며 말했다.“사모님, 오해하지 마세요. 그냥 발을 헛디뎠을 뿐이에요.” 그녀는
고개를 돌리자 배건후는 무표정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배건후가 배씨 그룹을 맡고 나서부터 둘은 몇 번이고 의견이 엇갈렸지만 매번 배건후의 판단이 옳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배석준은 때론 아들이 소름 돋기도 했다.“왜 그렇게 보는 거니? 이게 다 널 위해서야. 만약 지유가 자기 대신 도아린이 대회에 나간 걸 알게 되면 널 얼마나 미워하겠어?”배건후가 말했다. “지유는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어요.”배석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전공과 취미는 별개야.”“아버지, 많이 늙으셨네요.” 배건후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눈빛에 차가운 비웃음을 번뜩이며 아버지를 내려다보았다. “당하는 줄도 모르고.”배석준은 문을 쾅 닫고 나가버리는 아들을 보며 분노가 치밀어 오르다 못해 주먹까지 떨려왔다. “이 망나니 녀석이 감히 아버지한테!”고개를 돌리자 주현정은 계단에 서서 똑같이 비웃음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당신도 내가 노망났다고 생각해?”주현정은 차갑게 말했다. “당신은 돌아오지 말아야 했어요.”배석준은 빠르게 계단을 올라가려 했지만 주현정은 그를 들여놓지 않았다. 그는 화가 잔뜩 나서 말했다. “당신은 이미 지유한테 깊은 상처를 주었어. 지금 내가 하는 모든 게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야. 아들은 도아린에게 홀려있는데 당신도 도아린을 따라다니며 헛소리나 하고 말이야.”주현정은 그의 셔츠에 묻은 립스틱 자국을 가리키며 비웃음을 흘렸다. “지민 씨가 당신을 제대로 홀린 것 같네요.”“지민 씨는 무려 8억 원을 손해 보고도 당신한테 원망 한마디 안 했는데, 어떻게 되레 당신이 지민 씨를 원망할 수 있어?” 배석준은는 억울해하는 김지민의 모습을 떠올리며 불쾌해졌다.주현정은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 이혼해요.”“뭐라고?” 배석준은 언성을 높여 말했다. 이미 쉬고 있던 유민정은 옷을 걸치고 나와 상황을 살폈다.배석준은 그녀에게 돌아가라고 한 뒤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주현정을 바라보았다.“이것도 도아린
육하경은 주먹을 날리려는 배건후를 말리며 성대호를 쏘아밨다.“입 닥쳐.”성대호는 고개를 들고 눈에 비웃음을 띄웠다.“건후야, 제대로 설명할 수 있겠어? 네 아버지, 그리고 네 스캔들 상대에 네 절친까지 전부 지유를 구하기 위해 아린 씨를 해치고 있잖아. 그런데도 네가 이 일과 관계없다고 할 수 있겠어?”그의 눈동자에는 깊고 검은 파도가 일었다. 금방이라도 잠식될 듯 넘실거렸다.성대호는 입술에 묻은 피를 닦더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육하경은 긴장된 분위기를 완화하려 애썼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배건후는 전화를 받고 급히 자리를 떠났다....바 VIP룸.손보미는 술잔을 높게 들어 올리며 말했다.“우리 잘해 봅시다!”김지민은 배석준의 품에 기댄 채 그의 가슴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걱정 마세요. 대회가 끝나면 지유도 풀려날 거예요.”배석준은 비꼬듯 술잔을 들었다.“대회에 나간다 한들 수상하겠어?”“사실 지유는 전부터 스타 대회에 참가하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도아린이 지유를 이렇게 만든 걸 생각하면 차마 도아린이 대회에 나가도록 둘 수 없었어요.”손보미는 배석준과 잔을 부딪치며 눈물을 글썽였다. “설령 건후가 절 미워하게 되더라도 지유를 위해서라면 참가자 명액을 반드시 빼앗아야 했어요.”배석준은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는 배건후가 손보미와 사귄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반대했었다. 아무래도 배경도 능력도 없는 그녀는 배씨 가문의 며느리 자격이 없었다. 그녀가 자진해서 해외로 떠나는 바람에 배씨 가문의 보복을 피할 수 있었다.도아린이 그 틈을 타서 배씨 가문으로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배석준은 차라리 손보미를 며느리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어쨌든 손보미는 배지유를 위해서라면 진심을 다했기에 배씨 가문을 망가뜨리려는 도아린과 달랐다.“너와 건후 사이 문제는 내가 끼어들 수 없단다.”배석준은 술을 한 모금 마시며 말을 꺼냈다. “어릴 때부터 자기 주장이 강한 아이였다.”“전 대표님 마음속에 우리 보미가 어느
이 남자는 바로 어제 열린 경매에서 배건후와 토지를 두고 경쟁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경제적인 조건뿐만 아니라 입찰서까지 완벽하게 갖춘 강력한 경쟁자였다. 배건후의 사업을 빼앗고 심지어 지금 그의 사람까지 빼앗으려 하니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참가자는 반드시 회사의 직원이어야 하는데 도아린이 지금 티파니 주얼리에 입사하기엔 늦었어요.”배건후가 냉정하게 말했다.진경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배 대표님 말이 맞아요.”배건후가 긴장한 마음을 조금 풀려는 순간 그는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아린이는 진씨 가문의 사람이자 티파니 주얼리의 주주에요. 굳이 입사할 필요가 없죠.” 진경수는 배씨 그룹의 신청서를 병상에 던져버리더니 새로운 신청서를 꺼내 펜과 함께 도아린에게 건넸다.도아린은 손을 뻗어 신청서를 건네받았다.배건후는 그녀의 손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도아린, 지금 외부인과 손을 잡기라도 하겠다는 거야?”“진 대표님은 아린이의 둘째 오빠예요. 진정한 외부인은 당신이죠.” 소유정은 펜 뚜껑을 열고 도아린에게 건넸다.도아린은 오른손으로 펜을 제대로 잡지도 못했지만 천천히 자신의 이름을 적어 내려갔다.배건후가 갑자기 앞으로 다가가려 하자 진경수가 그를 막아섰다.“배 대표님, 지금 제 여동생에게 손이라도 대려는 겁니까?”“...”배건후는 동공이 흔들리더니 잠시 멍해졌다.‘여동생?’진씨 가문과 혈연관계도 없는 도아린을 이렇게까지 아끼다니, 보기엔 은혜를 갚으려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그녀를 이용해 배씨 가문을 무너뜨리려는 계획이었다.배건후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진씨 가문이 연성에서 한몫 챙기고 싶다면 정정당당하게 경쟁하세요. 그럼 상대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경쟁자라고 생각할게요. 근데 지금 부부 사이를 이간질하는 건 너무 비겁한 거 아닌가요?”진경수는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자신만만한 미소를 띤 채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제가 둘의 관계에 이간질한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배 대표님은 보미 씨와 스캔들이 그렇게
성대호가 도아린의 손을 잡는 순간 그녀는 살을 파고드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병원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배건후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는 당근처럼 부어오른 도아린의 중지를 보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여기서 가식 떨지 마세요.” 소유정이 그를 세게 밀쳤다.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그의 살벌한 눈빛조차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당신이 아린이보고 배씨 그룹을 대표해서 대회에 나가라고 했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 했어요.”“대회 참가 자격을 손보미에게 주고 싶었으면 당당하게 주면 되잖아요. 왜 비겁하게 아린이를 다치게 하는 거죠? 당신도 아린이한테 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잖아요.”배건후는 사늘한 눈빛으로 도아린을 바라보며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도아린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건후 씨, 배씨 그룹의 대표로 대회에 참가하지 않을 테니 참가 자격은 건후 씨가 원하는 사람한테 넘기세요. 다만 디자인은 넘길 수 없어요.”배건후는 소유정을 병실 밖으로 내쫓더니 그녀가 밖에서 아무리 울고불고 난시를 쳐도 가볍게 무시했다. 그는 도아린 앞에 서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몇 번 반복하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손보미한테 널 찾아가라고 시킨 적 없어.”그 당시 배건후는 화가 나다 못해 별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지만 회의가 끝난 뒤 뭔가 수상함을 느꼈다. 만약 도아린이 참가하기를 거부했다면 직접 그에게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비서를 통해 전했을 리가 없었다.그는 아까 전화를 받은 비서를 사무실에 부르더니 통화 기록을 책상에 던지며 솔직하게 말하라고 했다.그녀는 사실 회장님께서 시키신 것이라며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고 했다.배건후는 아버지를 찾아가 물어보려던 중 성대호가 목숨을 갖고 협박하다가 도아린의 손을 다치게 했다는 소식에 곧장 방향을 틀어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는 머리가 아파왔다.갑자기 나타난 경쟁자들이 배씨 그룹의 프로젝트를 하나씩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 게다가
“도아린, 엠파이어 빌딩 상가의 서류야. 지금 돌려줄게.”도아린은 서류를 건네받고 문을 닫으려는 순간 손보미는 손으로 급히 막았다.“아직 할 말 남았어. 상가를 돌려줄 테니 보증금은 주지 않아도 돼. 대신 네가 가진 대회 참가 자격을 나한테 팔아.”“뭐라고?” 도아린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며 가슴이 쿡쿡 쑤셔오는 듯 아파왔다.손보미는 마치 모르는 척하지 말라는 듯 비웃음을 흘렸다.“스타 대회의 참가 자격을 건후가 나한테 넘겼어. 내가 네 동생을 위해 유명한 교수님을 찾아준 공도 있으니 나한테 양보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도아린은 피식하더니 말했다.“남자? 그런 거면 네가 가져.”그리고 이내 단호한 표정으로 한마디 한마디 내뱉었다. “그러나 참가 자격은 안 돼.”“안 되든 말든 이미 내 손에 있어. 게다가 참가 자격만이 아니라...”손보미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건후가 그러던데 네가 작업한 디자인도 나한테 넘기라고.”도아린은 반응할 새도 없이 그녀를 발로 차버렸다.손보미는 예상치 못한 공격에 옅은 신음을 흘렸다.“그만 나갈래 아니면 또 맞을래?” 일풍은 어느새 문밖에 서서 손보미를 지켜보고 있었다.그녀는 코웃음을 치더니 다리를 절며 엘리베이터에 탔다.그리고 곧장 배건후에게 전화를 걸었다.“건후야, 아린이를 설득해서 대회에 참가하게 하려 했는데 글쎄 나를 발로 차버렸어. 괜히 좋은 마음으로 일을 망쳤나 봐... 흑흑...”도아린은 문을 닫고 옷을 갈아입은 뒤 즉시 엠파이어 빌딩 운영부로 가서 명의를 변경했다. 단 자신의 명의가 아닌 도지현의 명의로 옮겼다.사무실을 나서자마자 성대호가 그녀를 불러세웠다.“아린 씨, 부탁이에요. 지유를 용서해 줘요.”성대호는 수염이 덥수룩했고 눈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일남은 상황을 보고 재빠르게 그녀 앞을 막아섰다.“지유는 잠시 실수한 것뿐이에요. 진심으로 아린 씨를 해치려던 게 아니에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그럼 방우진 때문
김지민은 도아린의 언급에 그제야 9억 원이 생각났다.배석준이 떠나고 뒤따르던 직원들이 뒤에 서 있었지만 김지민은 9억 원이라는 거액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손보미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지만 예상대로 모욕만 당하고 말았다. 결국 손보미는 돈을 빌려주기로 했고 앞으로 모든 건 자신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배씨 그룹 사장실.손보미는 눈썹을 찌푸린 채 난처해하며 입을 열었다.“난 지유가 걱정되는 마음에 지민이를 시켜 아저씨한테서 상황을 알아보라고 부탁한 건데, 아린이가 오해할 줄은 몰랐어.”“아린이는 워낙 모든 걸 민감하게 받아들이잖아. 분명 아주머니께 말씀드릴 거야. 아주머니의 건강도 좋지 않은데 네가 곁에서 잘 설명해 줘.”그녀는 한편으로 가만히 배건후의 표정을 살폈다. 배건후는 얼음장마냥 차가운 표정을 한 채 새까만 눈동자로 테이블을 응시했다.“할 말 끝났으면 그만 나가.”“...”손보미는 가까이 다가가서 말했다. “건후야, 그러지 마...”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목이 메어서 훌쩍거렸다.“아린이가 날 싫어하는 것도 알고 네가 날 챙겨주는 걸 질투하는 것도 알아. 불만이 있다면 나한테 풀어도 돼. 근데 지민이는 이제 내 비서도 아닌데 괜히 미움받으면 안 되잖아.”“이제 네 비서가 아닌데 왜 계속해서 네 일을 도와주는 거야?” 그는 손에 잡고 있던 펜을 내려놓더니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손보미는 멍하니 서 있다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친구니까.”“널 배신한 사람과 친구 할 수 있어?”“...”손보미는 손톱자국이 날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그의 말에 왜 가시가 돋아 있는지 알 수 없었다.“지유는 네 여동생이야. 배씨 가문에서 아무도 지유를 챙기지 않아서 아저씨께 물어볼 수밖에 없었어... 내가 지유를 걱정하는 게 잘못이야? 건후야, 너 예전에 나한테 이렇게 대하지 않았잖아...”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배건후의 얼굴에서 동정의 기색을 찾으려 애썼지만 그의 깊고 날카로운 눈빛은 오히려 더 차갑게
배석준은 보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용패는 직원의 실수로 600만 원으로 표기된 거야.”주현정은 여전히 담담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전 당신이 지민 씨에 대해 설명할 줄 알았는데.”배석준은 다시 한번 도아린을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주현정이 오랫동안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다가 갑자기 나타난 게 어쩌면 도아린이 뒤에서 조종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주현정이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속으로 안도했다. 만약 사람들 앞에서 난리를 쳤다면 그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도아린, 지민 씨는 내 임시 비서일 뿐이야. 사실을 왜곡하지 말렴.”“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배씨 그룹에 들어가려고 애를 쓰나 봐요. 회장님께서 비서를 위해 드레스와 액세서리까지 챙겨주시다니 놀랍네요.”도아린은 담담하게 말했다. “아버님 비서가 가격을 표기하지 않아서 직원이 우리에게 와서 도움을 요청했고 우리가 수정해 준 거예요.”배석준은 안색이 굳어진 채 주현정을 향해 말을 꺼냈다. “지민 씨는 단지 내 비서일 뿐이야. 못 믿겠다면 당장 불러올게.”전화를 걸려는 순간 김지민이 눈앞에 찾아왔다. 직원들은 그녀가 도망갈까 봐 딱 따라붙어 있었다.“회장님, 전 그분이 쉽게 포기할 줄 몰랐어요. 더 높은 가격을 유도하려다...”김지민은 도아린을 보자마자 반감을 드러냈다, 자세히 보니 앞에 서 있는 주현정이 바로 높은 가격을 부르던 사람이었다.“아린 씨가 사모님에게 입찰을 못 하게 한 거죠? 나한테 복수하려고.”주현정은 오랜만에 밖에서 얼굴을 드러낸 데다 평범한 차림을 하고 있었기에 김지민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주현정에 대한 인상은 전에 뉴스 인터뷰에서 봤던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사모님, 아린 씨 말을 믿지 마세요. 보아하니 사모님께서도 비취 용패를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은데 제가 8억 원에 넘기겠습니다.”이렇게 하면 손해는 1억 원에 그칠 수 있었다.김지민은 꽤 영리한 편이었다. 그녀는 배석준이 여기까지 따라 나온 걸
도아린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채 주현정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살짝 줬다. 주현정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직원이 건네준 등록부를 받아들었다.“미안해요. 또 번거롭게 했네요.” 그녀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종이에 600만 원을 적었다.생각지 못한 금액에 직원도 살짝 놀란 눈치였다. “사모님... 확실하신가요?”‘6억 원이 아니라 600만 원이라고?’구하기 힘든 비취라 6,000만 원도 모자랄 텐데 사모님은 300만 원을 시작가로 하다니 놀라웠다.“만약 인연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30억 원이라도 그 값어치를 하겠지요.” 주현정은 펜을 다시 직원에게 건네며 조용히 도아린을 바라보았다. “결국 누가 이 비취의 주인이 될지 엄마랑 함께 보고 나서 다시 공부하러 돌아가도 되겠어?”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도아린도 피할 이유가 없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행사장에 들어가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앉았다.도아린은 주현정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어머님, 건강이 제일 중요해요. 힘드시면 언제든지 저한테 말하세요.”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김지민이 그들 옆을 빠르게 지나갔다. 주현정은 눈을 내리깔며 그녀의 뜻을 이해한 듯 미소를 지었다.경매는 곧 시작되었고 누군가 자신의 딸이 그린 그림을 자선 행사에 내놓았는데 솔직히 말해 초등학생의 그림보다 못했다. 하지만 위상이 높은 가문이라 인맥을 얻고 싶은 사람은 당연히 거액을 지불하며 사 갔다.곧이어 비취 용패가 나오고 사회자가 600만 원이라는 시작가를 내놓자 여기저기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초등학생의 수준보다도 못한 그림을 1억 2천만 원에 내놓았는데 이렇게 좋은 비취 용패의 시작가가 600만 원이라니. 게다가 올해는 마침 용의 해임에도 불구하고 시작가가 너무 낮았다.사회자도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지 재차 확인한 뒤 기증자의 이름을 천천히 읽었다.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배석준에게 쏠리더니 호기심과 의심 그리고 비웃음이 섞인 표정이 드러났다.배석준은 얼굴이 굳어진 채 옆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