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정의 병실에 들어선 도아린은 흠칫 놀랐다.그녀는 오늘 컨디션이 좋은 듯 침대에 누워 있지 않고 밝은 색상의 명품 스타일 투피스를 입고 거실에서 친구를 접대했다.“아린아, 이리 와. 소개해줄게.”주현정이 도아린을 향해 손을 뻗으며 미소를 지었다.“이분은 내 절친이자 최고의 여배우인 함예진이야. 여긴 내 며느리 도아린이고.”함예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도아린을 위아래로 훑었고, 의아한 기색이 역력했다.비록 생얼이지만 외모가 출중했고, 몸에 별다른 사치품을 지니지 않았으나 결코 눈길을 사로잡는 아우라를 풍겼다.이런 부류의 사람은 액세서리 따위 안중에 없거나 보석보다 더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지거나 둘 중 하나였다.“이모라고 부르면 돼.”“안녕하세요, 이모.”함예진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낀 반지를 빼서 건네주었다.“급하게 오느라 선물도 준비 못 했네. 귀한 건 아니라서 편하게 하고 다녀.”귀한 게 아니라니?영화계 거물은 몇십 억이 넘는 액세서리도 우습게 보는 건가?도아린은 반지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3개의 깃털이 뿔 모양을 이룬 반지는 일명 유니콘 링이라고도 불렸다. 당시 함예진이 칸 영화제 레드카펫에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핸드메이드 자수 드레스와 매치한 클래식 아이템이었다.“저한테 너무 과분한 선물이라서 받을 수가 없어요.”“줄 때 가져.”주현정이 반지를 건네받아 도아린의 손에 끼워주었다.“워낙 공사다망한 사람이라 특별 게스트로 출연해달라고 하는 작품만 아니었다면 연성에 오지도 않았을 거야.”백옥처럼 하얀 피부에 오색찬란한 반지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이모랑 같이 밥 먹으러 가자.”식사 자리에서 도아린은 함예진이 연성을 찾은 진짜 목적에 대해 전해 들었다. 바로 이번 송민혁 감독의 새 작품에서 유능한 왕후 역할을 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녀는 정상급에 속했지만 조연이라고 해서 출연 제의를 거절하지 않았고, 캐릭터의 매력을 우선순위로 두고 대본을 선택했다.“아린아, 가서 이모랑 내가 마실 주스
함예진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아무렇지 않게 젓가락으로 주현정의 접시에 반찬을 덜어주는 도아린을 바라보았다.“어머님, 생선 드세요. 이 부분은 가시가 없거든요. 이모도 많이 드세요.”“역시 날 챙겨주는 건 며느리뿐이네.”함예진도 웃으면서 접시를 건넸다.“고마워.”아무도 입구에 있는 손보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자 그녀는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서더니 다시 배건후의 이름을 불렀다.배건후는 무표정한 얼굴로 도아린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외식하면 가장 먼저 냅킨을 깔고 필요 없는 식기를 치워주곤 했는데 오늘은 마치 공기 취급했다.머릿속으로 어젯밤 그녀의 행세를 되뇌며 오늘 아침 결판을 내기도 전에 잽싸게 도망친 일이 떠올라 속에서 열불이 나는 것 같았다.“이리 와서 앉아.”배건후가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당기자 손보미는 활짝 웃으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안녕하세요, 어머님, 선생님. 아린 씨, 오랜만이야.”진심 어린 미소를 지으며 나긋한 말투로 인사하는 여자의 모습은 아까와 사뭇 달랐다.“방금 화장실에서 보지 않았나?”도아린은 반찬을 한 입 집어 먹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손보미의 안색이 돌변하더니 표정이 어찌나 억울한지 금세 눈물이라도 흘릴 듯싶었다.함예진은 온갖 대상을 휩쓴 배우답게 진심인지 연기인지 한눈에 간파했다.이내 배건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소개 안 해줘?”“저는 손보미라고 하고, 이번 송민혁 감독님의 새 작품에서 ‘예원’ 역을 맡았어요. 왕후 역할이 다름 아닌 함예진 선생님이라고 들었는데 이번 기회에 연기를 제대로 배우고 싶어서 건후 씨한테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죠.”손보미는 자리에서 서둘러 일어섰다.함예진은 못 들은 척 배건후만 쳐다보았다.이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손보미라고 합니다.”“아, 연예인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경미한 교통사고에도 구급차를 부르는 바람에 결국 임산부를 유산하게 한 그 무명 배우?”생글생글 웃는 얼굴과 달리 인정사정없는 말을 내뱉을 줄이야.손보미의 얼굴이
뭐지?뒤에서 몰래 수작 부리는 게 성에 안 차서 이제는 대놓고 유혹하는 건가?정작 남편이라는 사람은 어제 그렇게 위험천만한 순간에 무심한 얼굴로 지켜보기만 하더니 도와주기는커녕 설상가상으로 그녀를 데리고 가서 자기 사리사욕을 챙기기 바 빴다.순간, 억울함과 분노가 물밀듯이 밀려왔다.역시 남자 따위는 필요 없었고, 솔로가 최고였다.“이모가 보기에 괜찮을 것 같아요?”“물론이지. 넌 얼굴도 예쁘고 머리도 똑똑하고 이해력도 뛰어나잖아.”함예진은 팔꿈치로 주현정을 슬쩍 찌르며 말했다.“아직 하녀 역할이 남았는데 아린을 추천해볼까?”주현정은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자신을 흘겨보는 배건후 때문에 손보미는 허공에 뻗은 손을 다시 내려놓았다.아까만 해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도아린의 말을 듣고 나서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바보 같은 년, 주현정의 시중을 3년이나 들었는데 연예계에 종사하는 며느리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도 눈치 못 챘단 말인가? 아니면 그녀가 일찌감치 배씨 가문 사모님의 자리를 꿰찼을 것이다.주현정은 시종일관 미소를 지었지만 눈빛이 점차 싸늘하게 변했다.이때, 손보미가 끼어들었다.“하긴, 이번 기회에 도전해 봐. 나도 같은 제작팀이거든? 함예진 선생님께서 잘 이끌어주실 테니까 열심히 배우면 앞으로 연기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거야.”도아린이 합류하게 된다면 제 발로 찾아와 괴롭힘을 자처하는 꼴인데 이렇게 좋은 기회를 어찌 놓치겠는가?주현정에게 바짝 다가간 도아린은 넌지시 물었다.“어머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주현정이 착잡한 눈빛으로 나지막이 말했다.“연기해보고 싶어?”“어머님의 의견에 따를게요.”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그럼 해 봐.”이내 함예진을 바라보았다.“우리 며느리를 믿고 맡기는 거니까 혹시라도 괴롭히는 사람이 생긴다면 너한테 책임을 물을 거야.”“당연하지.”주현정, 함예진, 도아린은 주스로 건배했다.배건후는 꿈쩍도 안 했고, 손보미는 잔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너한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끼얹었다고?”남자가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손보미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난 뒤끝이 있는 사람이 아니야. 게다가 불꽃놀이도 해주기로 약속했잖아? 도아린이 손찌검만 하지 않는 이상 욕한다고 한들 참을 수 있어.”배건후는 무표정으로 일관했고 검은 눈동자는 깊이를 가늠하기 힘들었다.손보미가 위를 살살 문지르며 말했다.“저녁에 뭐 먹지도 못한 것 같은데 나도 마침 배가 고프네. 근처에 비건 레스토랑이 있는데 같이 갈래?”배건후는 담뱃재를 툭툭 털면서 조수현 앞으로 걸어갔다.“집까지 데려다줘.”손보미는 마지못해 차에 탔고, 문이 닫히자마자 못마땅한 듯 눈빛이 험악하게 번뜩였다.이내 고개를 숙여 재빨리 문자를 보냈다.[사장님, 혹시 대역은 찾으셨나요?]...주현정을 부축해서 걸어가던 도아린의 등 뒤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재수 없는 사람을 만나면 운수가 사납기 마련이네.”소매를 붙잡고 있는 함예진의 얼굴은 분노로 가득했다.문에 삐쭉 튀어나온 못 때문에 소매가 걸려서 찢어졌는데 몇백만 원이 넘는 옷을 버리게 생겼다.도아린이 다가가 힐긋 쳐다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들어가서 쉬고 계시면 제가 수선해드릴게요.”“옷 수선도 할 줄 알아?”놀라움이 담긴 말투와 달리 그녀의 눈빛은 무덤덤하기만 했다.병실로 돌아간 다음 주현정은 함예진이 갈아입을 만한 옷을 찾아주었고, 이내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한편, 도아린은 휴게실에서 옷을 수선하고 있었다.30분 뒤, 그녀는 옷을 들고나와서 말했다.“제가 손재주가 별로 없어서 혹시 이 정도면 괜찮을까요?”함예진이 건네받는 순간 두 눈이 반짝 빛났다. 찢어진 부분에는 같은 색상의 실로 장미꽃이 수 놓여 있었는데 마치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게다가 티가 전혀 나지 않을뿐더러 화룡점정의 효과까지 추가되었다.이내 주현정의 앞에 내밀며 말했다.“요즘 바느질할 줄 아는 젊은이가 어디 있어? 이런 보물 같은 며느리를 얻다니.”주현
소유정은 도아린을 소파에 앉히고 과일 차를 건넸다.“너 대신 분풀이나 해주려고 했는데 사회가 이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줄이야!”대역은 십중팔구 정해진 일이었지만 손보미 그년 때문에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따라서 그녀는 송민혁에게 조연이라도 좋으니 도아린을 추천하려고 했다.만약 자수 놓는 신만 있다면 손보미가 찾은 ‘대역’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거로 확신했다.그러나 남한테 어렵게 부탁해서 끼워 넣은 프로필이 단지 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1차에서 탈락할 줄은 몰랐다.“만약 내가 톱 가수였다면 조연 정도 추천해주는 건 식은 죽 먹기일 텐데... 이게 다 무능한 내 잘못이야.”“아니야.”도아린은 소유정을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감독님께서 오디션 받아보라고 하셨어.”“정말?!”소유정이 벌떡 일어나 소파에 서서 도아린을 내려다보았다.“너한테 연락이 왔어? 어떤 역할이래?”“오디션 하러 가봐야 알 것 같아.”다음 날.주현정은 도아린에게 전화를 걸어 오디션은 며칠 더 기다려야 하니까 우선 킹캐슬부터 다녀오라고 말했다.이제 곧 그녀의 명의가 될 예정이라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라는 의도였다.만일의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해 도착하면 사진까지 찍어서 보내라고 당부까지 했다.킹캐슬은 산을 등지고 호수를 마주하고 있어 많은 사람의 인생샷 명소로 유명했다.특히 신혼부부나 커플들이 오래된 성을 연상케 하는 별장을 배경으로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다.첫 번째로 풍경이 아름다워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었고, 두 번째로 이는 사랑의 증표와 같은 건물로서 자신도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갈 수 있기를 기원했다.별장에 정기적으로 청소하러 오는 사람이 있었기에 먼지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안에서 생활한다고 하면 대청소를 한 번 해야만 했다.도아린이 도착했을 때 이미 오후가 되었고, 남향 방 하나를 깨끗하게 정리한 다음 근처에서 장을 보고 저녁에 소유정과 맛있는 음식을 해 먹기로 했다.주현정의 말에 의하면 지하실에 자전거가 있지만
그녀는 바로 손보미였다.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고 있는 여자는 두 눈에서 빛이 반짝반짝 났다.이때, 댓글 창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내용이 떴다.[네가 나오는 드라마는 안 볼 거야. 연기도 못하는 게!]상대방은 곧바로 강퇴당했다.[포토샵 전문 여배우 주제에 눈꼴 사납게 하지 말고 얼른 은퇴해.]또 한 사람이 감쪽같이 사라졌다.축하 메시지를 제외하고 나머지 부정적인 내용은 전부 차단되었다.도아린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연예계는 역시나 복잡했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칭찬과 욕이 섞여 있기 마련이다.손보미는 카메라를 바라보며 자신을 비하하는 댓글 창은 애써 무시하고 김지민이 사전에 준비한 멘트를 달달 외워서 읊어댔다.공유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몰라도 라이브를 시청하는 인원수는 천 명대에서 금세 만 명을 넘어섰다.그러나 부정적인 내용도 갈수록 많아졌다.[뻔뻔스럽게 공공 자원이나 무단 점용하고!][길 걸을 때 잘 보고 다녀. 고작 발목 삐끗했다고 구급차 부르지 말고. 아리산은 안 그래도 진입하기 힘든데 구급차가 도착했을 때 이미 다 나았을지도 모르니까.]도아린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아리산? 그녀가 현재 있는 곳이지 않은가?곧이어 테라스로 나가자 저 멀리 모닥불과 촬영 중인 스태프들이 보였다.“부정적인 댓글이 너무 많아. 얼른 배 대표님한테 연락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돌려.”김지민은 이어폰을 통해 손보미에게 알렸다.“시간이 거의 다 됐네요. 미스터리 게스트에게 전화해서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해볼게요.”손보미는 휴대폰을 꺼내면서 말했다.그리고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꿀이 뚝뚝 떨어지는 말투로 물었다.“일 끝났어?”“왜?”그녀는 남자의 쌀쌀맞은 말투는 가뿐히 무시한 채 말을 이어갔다.“지금 생일 축하해주는 팬들이 엄청 많아서 너무 행복해. 항상 잘 챙겨줘서 감사하다는 말 꼭 전하고 싶었어.”배건후는 볼펜을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카메라에 못마땅한 표정이 잡히지 않도록 손보미는 미소를 지은 채 뒤를 돌아섰다.
손보미는 댓글 알바를 고용했을뿐더러 마케팅 계정도 새로 팠다.그동안 배건후와 스캔들은 생일 축하 라방 이후로 대중의 마음속에 기정사실로 자리 잡았다.게다가 인스타에 올린 게시물의 댓글은 전부 축하하는 내용으로 도배되었다.배건후가 받은 메시지는 바로 불꽃이 터지는 순간 촉촉한 눈망울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여자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었다.우정윤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이내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쾅 하고 내려놓는 상사를 보자 즉시 진상을 파악하러 자리를 떴다.10분 뒤, 그는 마지못해 다시 들어와서 보고했다.“불꽃놀이 판매사에서 김지민이 생일 축하 문구를 백년해로로 바꿔 달라고 했다네요. 그리고 검색어에 관해서는...”비록 손보미는 그다지 유명한 편이 아니지만 배건후는 연성에서 명성이 자자한 황태자이지 않은가?그의 인기에 힘입어 손보미의 팔로워는 금세 10만 명에 육박했다.라이브 방송을 지켜본 사람 중에서 누군가 클립으로 편집해서 인터넷에 업로드했는데 댓글로 손보미를 축하해주는 팬들이 있는가 하면 남자에게 빌붙는 그녀를 무시하는 배건후 추종자들도 있었다.두 세력이 서로 팽팽하게 맞서면서 곧바로 실검 1위를 장악했다....다음 날.유민정의 연락을 받은 도아린은 주현정의 주치의가 가족들을 호출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우연의 일치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는 배건후와 거의 동시에 진료실에 도착했다.어두운 안색의 남자는 의자에 앉자마자 강한 위압감을 뿜어냈고, 의사는 저도 모르게 몸을 틀어 그나마 상냥한 태도의 도아린을 마주 보았다.“사실...”주현정의 병은 콕 집어 정의하기 어려웠다. 기준치에 부합되지 않은 항목이 하나도 없지만 그렇다고 또 치명적인 건 아니었다.현재로서 의사의 소견은 아이를 낳고 면역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면역력을 가볍게 여겼다가 큰코다칠지 몰라요. 유행성 바이러스에 한 번 걸리면 장기 부전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죠.”듣는 내내 조마조마하던 도아린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퇴원하고 나서 주의
이내 엘리베이터 층수가 빠르게 변했다.도아린이 버럭 외쳤다.“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면 그냥 집에서 썩게 놔둬요. 어쩌면 백 년 뒤에 문화재 답사할 때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배건후가 담배를 두 동강 냈다.“다시 한번 얘기해 봐.”말하라고 해서 고분고분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꿈도 참 야무지군.도아린은 지금처럼 마음이 확고한 적이 없었다. 즉,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남자한테서 도망치는 것이다.그리고 배건후가 엘리베이터에 발을 들이는 순간 잽싸게 비상구로 뛰어가 택시를 타고 집까지 갔다.주얼리를 직접 처분하는 것쯤이야! 물건을 정리하고 나서 다시 이혼을 언급했을 때 무슨 핑계를 댈지 두고 볼 작정이었다.그러나 집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비밀번호를 바꾼 사실이 떠올라 밖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다행히 가정부 아주머니가 계셨고, 안미자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얼른 문을 열어주었다.“사모님, 오셨어요? 정말 다행이에요. 그동안 사장님 음식을 준비해주다가 계속 꾸중만 들어서 월급이 곧 바닥날 것 같아요.”도아린이 까탈스럽지 않고 성격도 착한 편이라 가정부도 그녀를 편하게 대했다.“부부는 항상 티격태격하기 마련이죠. 사실 사장님께서도 속으로는 사모님 생각을 많이 하세요...”이때, 뒤에서 자동차 엔진음이 들려왔고 배건후가 집에 도착했다.도아린은 신발을 갈아신으며 너스레를 떨었다.“아줌마는 자녀가 두 명이라고 했죠? 아들 하나 딸 하나?”안미자는 어리둥절하더니 활짝 웃었다.“맞아요. 첫째는 딸, 둘째는 아들인데 장난기가 어찌나 많은지. 아빠를 제일 무서워하죠.”“이제 일하신 지도 3년이 다 되어 가는데 제가 왜 아이가 없는지 알아요? 왜냐하면 남편이 내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기 때문이죠.”입구에 서 있는 남자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고,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갔다.정작 도아린은 당황한 표정의 안미자를 뒤로 하고 유유히 2층으로 올라갔다.그녀가 집에 있는 날이면 배건후는 늘 외박했고, 혹시라도 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