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역할인데?” 손보미가 눈을 감은 채 물었다. “금희.” 손보미는 머릿속으로 대본을 떠올렸다. 그녀가 연기하는 여자 주인공은 궁에 들어온 첫날, 남을 도와줘서 총관의 칭찬을 받는다. 같이 들어온 궁녀 두 명이 그녀를 질투하고 괴롭히는데 그중 한 궁녀의 이름이 금희였다. “연기할 때 적당히 하라고 해.” 손보미는 팔을 누군가가 살짝 밀자 무심하게 말했다. “오늘 몸 상태가 안 좋으니 물 뿌릴 때 따뜻한 물로 해줘.” 연기라는 건 많은 게 진짜가 아니었다.예를 들어, 채찍에 맞는 장면도 실제로는 바닥에 채찍을 휘두르며 마치 맞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또한 주삿바늘도 손가락으로 살짝만 찌르는 식으로 연출한다. 그녀는 주연배우였고, 배건후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지만 촬영장 사람들은 그녀에게 강력한 후원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무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연기라는 건 사실감이 중요하지 않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보미는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뜨자, 화장을 해주던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당황해서 작은 브러시를 그녀의 눈에 찌를 뻔했다. “죄송해요, 보미 씨...” 손보미는 화를 참지 못하고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밀쳐내며 티슈로 얼굴을 닦았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미 자리를 떠 있었다. 김지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보미의 추측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도아린이 어떻게 날 괴롭히는 궁녀 역할을 오디션 보게 된 거지? 분명 황후의 시녀 역할을 본다고 하지 않았나?’손보미는 잠시 생각한 뒤,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고 의상실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고는 안에서 답이 오기도 전에 안으로 들어갔다. “나가 있어요. 내가 옷 입는 걸 도와줄게요.” 손보미는 부드럽게 덧붙였다. “우린 친구예요.” 도아린을 데리고 온 사람은 도아린을 바라보았고, 도아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밖으로 나갔다. 사람이 나가자마자 손보미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는 도
손보미가 떠난 후,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방금 있었던 일을 SNS 블로거에게 보냈다. 거울이 산산조각 난 의상실 바닥 사진까지 첨부하면서 말이다. 그 대가로 커다란 현금 봉투를 받았다. 블로거는 즉시 상황을 상상해 300자짜리 짧은 글을 작성해 게시했다. ‘충격! 인기 여배우가 신인에게 괴롭힘을 당하다?’‘알려진 제보에 따르면 인기 여배우와 신인은 어린 시절 친구였으며 두 사람은 함께 연예계에서 노력하기로 약속했었다. 하지만 인기 여배우는 스폰서를 만나 승승장구했고 친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 수년 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사이에 생긴 차이가 결국 우정을 완전히 무너뜨렸다.’손보미의 팬들은 글을 읽고 댓글과 공유를 남겼다. ‘우정이 이익 앞에서 이렇게 무너질 줄은 몰랐다’며, 부모도 없이 자라온 손보미가 유일한 친구마저 잃은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그녀를 더 많이 응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런 댓글들 속에서 몇몇 사람들은 의구심을 표했다. [손보미는 스폰서가 있는 배우고 연기도 별로인데 어떻게 송 감독의 신작에서 주연을 맡았을까? 신인을 괴롭히지 않은 게 다행이지, 누가 감히 손보미를 괴롭히겠어? 아마 신작 홍보를 위해 꾸며낸 가짜 소문일 거야.]블로거는 예상보다 훨씬 좋은 반응을 보자,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연락해 만약 손보미가 괴롭힘당하는 장면을 찍어온다면 보상을 세 배로 올려주겠다고 제안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선금까지 받고는 화장 도구 상자를 챙겨 손보미에게 가서 메이크업을 수정해 주기 위해 서둘렀다. 현장에서는 스태프가 도아린에게 대본을 건네주었다. ‘이게 준비가 다 됐다는 뜻인가?’함예진이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 “송 감독님이 네 폭발력을 보고 싶어 하셔. 이 배역은 비중은 크지 않지만 이야기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해. 잘해봐.” 함예진은 또 작은 목소리로 송 감독에게 무언가를 말했고, 도아린을 보는 감독의 눈빛이 조금 변했다. 잠시 후, 손보미가 부축을
곧이어 무전기에서 송 감독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각 부서가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원래 장면은 두 번 정도 밀치는 후, 궁녀가 찻주전자에 남은 물을 손보미에게 뿌리는 것이었지만 감독의 재조정으로 밤에 손보미가 잠든 후 궁녀가 그녀에게 물을 끼얹는 장면으로 바뀌었다.손보미는 마음을 졸이며 누워 자는 척을 했다.감독의 ‘액션’ 소리가 들리자마자, 도아린은 차가운 물 한 바가지를 손보미의 머리 위로 쏟아부었다. “아악!” 손보미는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지만, 감독이 컷을 외치지 않자 연기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금희야, 너 지금 뭘 하는 거야?” “주제넘게 나대지 말았어야지!” 도아린은 손보미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잡아챈 뒤, 그녀를 억지로 올려다보게 만들었다. 도아린의 눈빛은 너무도 매서웠고 마치 지옥에서 기어 나온 원귀처럼 복수심에 가득 차 있었다. 손보미는 그 눈빛에 겁에 질려 머리가 하얘졌다. “컷!” 감독의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미 씨, 보미 씨는 여주잖아. 시선은 흔들림 없이 당당하게 있어야지. 다시 한번 가자!” 대본 속에서 여주인공은 두 명의 궁녀에게 괴롭힘을 당한 뒤 비록 초라한 모습이지만 전혀 겁먹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단호하게 꾸짖는다. 하지만 손보미는 도아린의 눈빛과 마주할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두려움이 솟구쳐 올라왔다. 결국 차가운 물 세 바가지를 맞고 나서, 손보미는 추위에 몸을 떨며 대사를 하기는커녕 도아린과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현장 스태프들은 고개를 저으며 답답해했다. 여주인공이 신인에게 압도당해 연기를 망치니 작업량이 늘어나면서 촬영 진행이 크게 지연되고 있었다. 하지만 손보미의 스폰서를 의식해 누구도 대놓고 불만을 표출할 수는 없었다. 손보미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만약 서서 연기를 했다면 일부러 넘어져 발목을 다시 다쳤다고 핑계를 댈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침대에 누워있는 상태였다. 여기서 기절하는 척하면 함예진의 성격상 당
“죄송해요, 오늘 제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모두를 고생시켰네요.” 손보미는 머리에서 물방울이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진심 어린 사과와 함께 고개를 숙이자, 불만을 품고 있던 스태프들도 더 이상 문제 삼을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손을 내저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그제야 손보미는 송 감독을 바라보았다. “감독님, 저는 자수를 배운 적이 없어요. 그냥 보육원에서 살 때, 옷을 직접 꿰매야 했기 때문에 조금 배우게 된 것뿐이에요.”“제가 자수 장면을 직접 연기하고 싶었던 이유는 제 자신을 성장시키고 싶었고, 이 작품에 더 많은 흥미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더 적합한 사람이 있다면 저는 기꺼이 자리를 내놓을 겁니다.”인기 있는 여배우의 비참한 과거는 극 중 운명에 굴하지 않고 성공한 여주인공과 맞아떨어져, 이 이야기가 홍보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부감독은 송 감독이 작품에 대해 완벽을 추구하는 걸 잘 알았다. 그러나 좋은 작품은 단순히 잘 찍는 것만이 아니라 배우의 인기와 함께 홍보도 잘 되어야 한다. 지금 손보미는 화제의 중심에 있었고 드라마가 막 시작했는데도 벌써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손보미의 스폰서를 건드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여주인공의 자수 장면은 많지 않았고 대역을 쓸지 말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의상과 소품에 능통한 누군가의 지도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부감독은 송 감독의 귀에 몇 마디 속삭였고 송 감독은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함예진이 몇 발짝 걸어와 도아린의 옆에 서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정말로 겨루고 싶은 거야?” 도아린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지만 손보미의 추악한 행실을 폭로하고 싶었다. 예전에 나형욱이 그녀를 추천했을 때, 손보미의 대역을 맡고 싶지 않아서 단번에 거절했었다. 그런데 배건후는 자기가 대역이라는 걸 알면서도 손보미가 모든 공을 차지하게 만들고 싶어 했다. “저는 어느 명장의 밑에서 조수로 배운
김지민이 전화를 걸어오자 손보미에게 눈짓을 보냈다. “에취!” “보미야, 감기 걸린 거 아니야? 일단 옷부터 갈아입자!” 김지민이 다가와 부축했다. 그들은 옷을 갈아입으러 가고,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방금 일어난 모든 일을 곧장 블로거에게 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보미의 연기에 대해 팬들과 일반인들 사이에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일반인은 이렇게 말했다.[연기 이 정도면 그냥 빨리 은퇴해라.]그러나 팬들은 생각이 달랐다.[보미가 여주인공을 맡았으니까 연기 문제는 없을 거야. 설마 송 감독님이 사람 보는 눈이 없을까?]댓글 창엔 많은 댓글들이 올라오고 있었다.[송 감독님이 눈이 먼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관객은 안 그렇다. 저 여자가 여주인공이면 난 이 드라마 절대 안 봐!][차라리 보지 마! 너 같은 사람의 조회 수 필요 없어! 우리 언니 연기 진짜 리얼하거든? 분명 저 신인 배우가 카메라 밖에서 방해했을 거야!][아쉽네. 그 신인 배우는 카메라에 안 잡혔으니 얼굴도 모르겠고.][악역을 맡은 거면 당연히 못된 얼굴이지. 분명히 엄청 못생겨서 우리 언니를 놀라게 했을 거야!] 손보미의 화제성은 확실히 높았다. 그녀가 보육원 이야기를 꺼내면서, 예전에 그녀를 돌봐줬던 고아원이 사람들에게 드러났다. 많은 손보미의 팬들이 그녀의 이름으로 보육원에 기부를 보냈고, 보육원 원장은 당황했지만 기쁘게 팬들과 사진을 찍으며 손보미를 응원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작은 부탁을 하나 덧붙였다. 팬클럽 관리자는 즉시 김지민에게 연락해 손보미의 의견을 물어보게 했다. “보육원에 희귀병에 걸린 아이가 있는데 네가 나서서 도와달라는 요청이야. 입양해 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고, 아니면 치료비라도 모금해달래.” 손보미는 따뜻한 생강차를 들고 냉소를 지었다. “일곱, 여덟 살짜리 아이에다가 병까지 있다니, 그런 아이를 누가 입양하겠어?” “그럼 거절할까?” “잠깐만.” 손보미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보육원을 떠난 지 오랜 시
“뭐 하는 거야?” 익숙한 목소리에 손보미는 깜짝 놀라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후 씨, 보육원에 내 팬인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가 지금 위중해. 원장님이 나한테 아이를 한 번 봐달라고 하셨어.” 배건후의 눈빛은 아주 무거웠다.“가봐야겠네.” “그런데...” 손보미는 억울한 표정으로 도아린을 바라봤다. “만약 아린 씨가 이 대역 자리를 원한다면 내가 양보할게. 율이 몸이 많이 안 좋아서 나를 꼭 보고 싶어 해. 아린 씨도 그 아이를 안타깝게 여긴다면 내 상황을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도아린은 바늘을 손수건에 고정시키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가지 말라고 한 적 있어요?” 손보미는 억울한 듯 입술을 앙다물며 말했다. “아린 씨가 날 믿지 않을까 봐.” “믿어요.” 도아린은 가볍게 비웃었다. “이렇게 딱 맞추다니... 자수 실력을 보여줘야 할 때마다 무슨 일이 생긴다는 게 정말 우연일까요?” 손보미는 뒤돌아 배건후를 애처롭게 바라봤다. “원장님이 지민이에게 전화를 했지만 결정을 못 내려서 나한테 전화가 온 거야. 사실 나는 그동안 꾸준히 자선 활동을 해왔고 내 팬들도 많이 도왔어. 그런데 매체들이 거기 있다고 해서 가지 말라는 조언도 있었어. 하지만 율이는 너무 안타까운 아이야. 희귀병에 걸렸는데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을지 모르겠어...” 배건후는 도아린을 차갑게 쳐다봤다. “넌 일이 사람 목숨보다 중요해?” 도아린은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난 정직함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송 감독의 새 드라마 제작사는 JS 픽쳐스였고, 주현정이 비록 일선에서 물러났다고는 해도 여전히 영향력이 있었다. 송 감독은 배건후의 말을 감히 거스를 수 없었다. “배 대표님, 대본 리딩 중이니까, 보미 씨와 함께 병문안을 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손보미는 속으로 기뻐했지만 겉으로는 마치 도아린의 동의를 구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함예진 또한 도아린을 바라봤다. 도아린은 여전히 무표정
함예진은 도아린의 손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미안해.” 그녀는 원래 도아린을 도와주려 했지만 오히려 도아린이 억울한 상황을 겪게 만들었다. “이건 이모 잘못이 아니에요.” 도아린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모,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요.” “너와 나 사이에 부탁이라고 할 건 없단다.” 도아린은 더 이상 격식 차리지 않고 바로 소유정의 상황을 설명했다. 함예진은 소유정에게 곡 준비를 철저히 해서 심사위원을 놀라게 하라고 조언했다. 영화 촬영장을 나서자마자 도아린은 이 기쁜 소식을 소유정에게 전했다. 소유정은 유진혁과 함께 노래 연습을 하고 있다가 둘이 얼싸안고 기쁨에 소리쳤다. 몇 초 뒤, 두 사람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소유정은 유진혁의 품에서 서둘러 몸을 떼고는 등을 돌려 걸어갔다. “알겠어, 고마워.” 유진혁도 얼굴이 빨개져서 장비를 만지는 척하며 어색함을 숨겼다. 도아린은 전화를 끊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후진을 시작하자마자 ‘쿵’ 소리가 들렸다. 지난번 긁힌 후로, 그녀는 차에 타기 전에 항상 장애물이 있는지 확인하는 습관을 들였는데, 분명 아무것도 없었다. 황급히 차에서 내려 확인해 보니 차 뒤에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쓰러져 있었다. 경찰에 신고하려던 찰나, 여자아이는 스스로 일어나 다리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더니 돌아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깐만!” 도아린은 급히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가 곧바로 손을 놓았다. 아이의 몸은 너무 말라서 뼈에 피부만 걸쳐져 있는 듯했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어. 부모님 연락처가 어떻게 돼? 병원에 오시라고 할게.” “부모님 없어요.” 여자아이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아이의 얼굴빛은 창백했고 눈두덩이는 움푹 패여 있었다. 영양 상태가 심각하게 부족해 보였다. 이 아이, 학대를 당하는 건가? 도아린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널 쳤으니 보상해 줘야겠지. 원하
도아린은 눈을 깜박였다. 손보미 같은 사람이 이런 귀여운 팬을 가지고 있다니 놀라웠다. 자신의 우상을 언급하자 여자아이는 금세 말문이 트였다. 손보미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보육원 출신이었다며, 그녀는 선하고 노력하는 사람이었고 운명에 굴복하지 않으며 온갖 고난을 헤치고 지금의 성공을 이뤘다고 했다. 힘든 날들을 버틸 때마다 여자아이는 손보미가 출연한 드라마를 보며 위로를 받았다. 그녀도 손보미처럼 되고 싶다며, 손보미에게 응원과 축복을 받고 싶다고 했다. “손보미를 모르는 거예요? 저 사진 있어요.” 여자아이는 주머니에서 잡지에서 오려낸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옷은 더러워졌지만 그 사진만은 깔끔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손보미가 그녀의 마음속에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도아린은 사진을 받아들었다. 그 사진은 손보미가 청호상 시상식에 참석했을 때의 인터뷰 장면이었다. 사진 속 손보미는 환하게 웃고 있었고 비록 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표정이었다. 배건후의 편애를 받는다는 건 세상을 가진 것과 다름없으니까. “나 이 사람 알아.” 도아린은 사진을 여자아이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근데 지금 여기에 없어.” “있어요!” 여자아이는 목소리를 높였다. “스케줄에 오늘 여기서 촬영한다고 나와 있었어요!” 도아린은 여자아이가 스케줄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차분하게 설명해 주기로 했다. “맞아, 오늘 여기서 촬영했어. 그런데 반 시간 전에 보육원에서 누가 보고 싶다고 해서 먼저 갔어.” 여자아이는 잠시 멍하니 서 있더니 갑자기 흥분하기 시작했다. “희망의 집 맞죠? 저를 빨리 희망의 집으로 데려다주세요!” 도아린은 그녀의 간절한 부탁에 못 이겨, 결국 그녀를 희망의 집 보육원으로 데려갔다. 여자아이는 연락처를 남길 새도 없이 차 문을 열고 대문 쪽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문을 지키던 경비 아저씨는 여자아이를 알아본 듯 문을 열어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뭐라도 먹고 가자.”배건후는 구운 닭 날개는 도아린에게 건네주고 주현정에게는 구운 식빵을 건네주었다.주현정은 빵을 받아 들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렴. 나는 물 좀 마시러 들어갈게.”도아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서 멈췄다.두 사람은 강가의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엄마는 진짜 다 내려놓으신 걸까요?”“적어도 시작은 하신 거지. 앞으로 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와 함께 여행 다니면 점차 나아질 거야.”배건후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방금 구 경관이 보내온 사진을 열었다.“남궁유민, 즉 고성만이야. 경찰이 고성만의 집을 수색할 때 이걸 발견했어.”도아린은 마지막 닭 날개를 입에 넣고 꼬챙이를 배건후에게 건네며 핸드폰을 받아서들었다.화면 속 사진에는 루비 목걸이가 찍혀 있었다.배건후가 큰돈을 들여 샀던 화려한 디자인의 목걸이지만 전에 잃어버렸던 목걸이였다.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하려 했지만 입안은 닭 날개로 가득 차있어 눈만 깜빡였다.“내가 전에 너한테 줬던 그 목걸이야. 배지유가 몰래 차다가 잃어버렸던 거.”도아린의 입은 마치 발골 기계 같았다. 닭 날개가 입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뼈만 남았다.도아린은 손바닥에 뼈를 뱉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배지유가 어떤 남자와 잤고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녀를 영상으로 협박했어요. 그 장본인이 바로 고성만이라구요!”“...”이번에는 배건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성만이 배지유를 협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걸이를 철저히 숨겨놓고 분해해서 이미 팔아버렸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걸 집에 보관해 놓았을 줄은 몰랐어.”그것은 고성만이 자신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보험이었다.궁지에 몰리게 되면 목걸이를 분해해 팔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 삶을 살 계획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다음 날, 도아린은 연성으로 돌아갔다. 배건후가 신청한 챔피언십 대회 접대 임무가 승인되었기 때문이다.진수혁 역시 변
그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고충이 하나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앞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야.”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다면 그 고통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될 것이다.도아린은 배건후의 머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배건후는 그녀의 품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어서 너에게 혼수로 바칠게. 네가 나를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평생 지켜줄 거야.”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빛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돌아가자.”배건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고 다리를 움직이며 불편했던 자세를 바꿨다.“이 근처에 야생 동물은 없지만 해가 지면 안전하지 않아.”도아린은 처음에는 감정에 휩싸여 배건후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는 즉시 이상함을 느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돌아갈 때 건후 씨 몸이 불편하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리고 내리막길이라 힘도 덜 들 거예요.”“알았어. 네 말 들을게.”자전거 핸들이 비뚤어져 있었지만 배건후는 두 다리로 바퀴를 단단히 고정한 후 힘껏 돌려 단숨에 바로 고쳤다.도아린이 자전거 앞좌석에 타고 배건후는 그녀 뒤에 앉았다.그는 얼굴을 그녀의 등에 기댄 채 내리막에서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긴 다리를 쭉 뻗어 마찰력을 늘리며 조절했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수혁과 변슬기도 막 돌아오고 있었다.변슬기는 도아린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들이 뭔가 진전이 있을 줄 알고 가서 물어보려 했지만 배건후가 붙잡았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 머리 위에서 붉은 잎 하나를 떼어냈다.“...”변슬기와 진수혁이 설마 자신과 배건후가 야외에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배건후는 오직 도아린에게만 부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도아린은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붉게 물든 단풍잎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마음속 깊이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깊고 그윽한 눈이 가늘게 감기며 그 속에는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그래, 이거지!’그녀는 올해 겨우 25살이었다.어린 시절 양부모 곁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장애를 겪은 후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돌보며 결혼 생활에서는 남편의 감정적 학대 속에서 버텨야 했다.그녀는 너무도 많은 행복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이게 맞는 일이다.그녀는 웃어야 한다. 크게 소리 내어 마음껏 웃어야 한다.고작 25살에 불과한 그녀가 이토록 많고 무거운 책임과 압박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눈앞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배건후의 심장도 저릿해 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친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쳤고 천천히 그녀의 눈꼬리를 눌렀다.“웃어. 앞으로 나쁜 감정들은 전부 나한테 넘겨. 내 앞에서는 일부러 강한 척 버틸 필요도 없어. 속상하면 때리고 욕해도 돼. 대신에 절대 자신을 괴롭히지 마.”도아린은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 뒤돌아 눈물을 닦으려 했다.그 순간 힘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특유의 나무 향기가 그녀를 감쌌고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여태까지 내가 나쁜 놈이었어. 미안해. 앞으로는 모든 일을 너와 상의할게.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고 네가 속상해할 일도 만들지 않을 거야.”도아린은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입만 살아서!”배건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도아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지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저도 아직...”이후의 말은 더 이상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상자를 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청혼의 반지가 아니었다.작고 빨간 벌레가 들어 있었는데 다리가 없고 온몸이 부드러웠으며
변슬기는 바쁜 듯 뒤돌아보며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진수혁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미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배건후는 세 사람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빌라에는 자전거가 두 대 있었는데, 도아린과 함께 드라이브를 나가기 위해 일부러 다른 자전거의 페달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도아린은 자전거를 보고 그에게 너 정말 얄밉다'는 눈빛을 보내며 빨리 고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자전거를 고치고 네 사람은 문밖으로 나갔다. "꽉 잡아."배건후는 도아린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자 힘껏 페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비탈길을 미끄러져 작은 길로 향했다.변슬기는 진수혁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자전거 뒤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수혁은 자전거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저, 제가 밀어드릴까요...거의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 저를 밀어주세요."라고 제안했다. 진 대표님의 속도로는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할지 내기는커녕,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황급히 남자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전거는 갑자기 비틀거리지 않았고, 속도도 빨라졌다. 변슬기: "..."배건후는 도아린을 태우고 산길을 누볐고, 도아린은 뒤쪽 페달을 밟으며 일어섰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산속 공기가 도시보다 훨씬 좋네요. 매연 냄새도 없고, 에어컨 냄새도 안 나고." 배건후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어제 비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신도 비 온 뒤 흙냄새 좋아해요?"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요! 비 온 뒤 흙과 풀이 섞인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배건후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깨달았다. 배건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환한 미
진수혁은 찻잔을 들어 살짝 한 모금 마시더니 배건후를 바라보았다. "말해 봐요." "내가 먼저 도아린과 결혼하면, 당신은 유럽 유학 기회를 나에게 넘겨요. 당신이 먼저 변슬기와 결혼하면, 당신이 필요로 하는 칩 기술을 두 손으로 받칠게요."진수혁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찻잔을 쥔 손에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갔고, 손등에는 핏줄이 돋아났다. 그는 배건후의 깊은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매력적인 눈은 도아린을 향할 때면 온통 비위를 맞추고 약한 척하는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매처럼 날카롭게, 거스를 수 없는 공격성을 띠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진수혁은 눈에 띄지 않게 눈썹을 찌푸렸다. 배건후가 그동안 도아린에게 온갖 비위를 맞추는 것을 보고 진수혁은 배건후가 이미 자존심과 투지를 잃고 오직 결혼 생활을 되돌리려고만 한다고 오해했다. 이제야 배건후는 여전히 그 배건후라는 것을 알았다. 전 부인을 되찾고 싶어 하는 것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발전시킬 기회를 포기한 적도 없었다.유럽에는 강연이 하나 있는데, 입문 조건이 주요 재벌 그룹의 실력자 또는 후계자이며, 배건후의 현재 자산으로는 강연을 들을 수 없었다. 진수혁은 그 자격이 있었지만,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유럽으로 가서 칩 기술을 연구하는 천재를 찾고 싶었다. 두 사람은 서로 필요한 것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배건후는 굳이 그와 도박을 걸려고 했다. "당신이 이길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알죠." 진수혁이 말했다. "두고 보시죠." 배건후가 말했다. 두 남자는 악수하며 조용히 내기를 정했다. 저녁 식사 때, 진수혁 부부는 주범금도 데려왔고, 내일을 위해 준비했던 몇 가지 요리가 오늘 식탁에 올랐다. 모두 즐겁게 식사했고, 주범금의 기분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그녀는 도아린에게 자신이 구매한 전리품을 자랑하기도 했고, 밤늦게서야 떠났다. 진수혁은 도아린을 데려다줄 때 그녀를 불러 세웠다. "유럽에 칩 분야 천재가 있다는 거
변환에 성공하는 순간, 동생은 깨어났고, 시스템은 남자 주인공에게 귀속되었다. 시스템은 남자 주인공에게 도아린의 진심을 얻지 못하면 죽을 것이라고 알렸다.처음에는 남자 주인공이 믿지 않았지만, 도아린과 이혼한 후 자신의 사업 제국이 날마다 무너져 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도아린의 좋았던 점들을 떠올렸다...도아린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 "비록 허구의 이야기지만, 이 남자 주인공은 정말 쓰레기네!""나도 그렇게 생각해." 배건후는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도아린의 좋은 점을 떠올린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거야."도아린은 그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눈빛에는 ‘그러니 당신도 그와 똑같은 부류겠지’라고 쓰여 있었다."나는 아니야." 배건후는 도아린의 손을 잡고 심장 부위에 가져다 댔다. “나는 줄곧 당신만을 사랑했어. 다만 임무 때문에 표현할 수 없었을 뿐이야. 나는 모든 것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당신에게 줄 수 있어."도아린은 손을 빼서 그의 옷에 쓱 닦았다."당신은 나를 소유하고 싶을 뿐이야. 나를 소유하는 것이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과 같으니까." 그녀는 일어나 테라스로 향했다.배건후는 따라가서 말했다. "우리는 공정하게 할 수 있어! 결혼 전후를 막론하고 모든 자산은 당신 거야!"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나도 당신 거고."라고 덧붙였다.도아린은 깊어가는 가을의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눈을 감고 침묵했다.배건후는 말없이 그녀 옆에 서 있었다. 마치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주인이‘놀러 가자’라고 한마디만 하면 즉시 꼬리를 흔들며 기뻐할 준비가 된 듯이.한참 후, 도아린은 그를 돌아보았다."당신 우정윤에게 후원한 적 있어?"배건후는 입술을 오므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후원한 건 독자들이 남자 주인공을 가장 심하게 욕하는 챕터였어.""……" 그리고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도아린은 웃음을 참으며 일부러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거기 나오
"내가 무슨 바람이 있다고 그래요?"예전에 그녀가 먼저 다가간 건, 배건후랑 제대로 살아보고 싶어서였다.남녀를 불문하고 아이를 낳아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당신을 내 뜻대로 움직이려고 여러 수단을 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사랑 없이는 못 산다는 건 아니에요.내가 엄청나게 목마른 사람처럼 말하네요.배건후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배건후가 잘못 말했어요. 배건후가 원해요. 당신이 나를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나를 총애해주길 기다릴게요."퉤!도아린은 씹던 멜론을 배건후의 몸에 그대로 뿜어버렸다.가슴을 치며 화도 나고 웃음도 나왔다.두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한 후에 배건후는 분명히 다른 사람에게 몸을 빼앗긴 게 분명하다.겉모습은 그대로지만, 속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예전의 배건후는 엄격하고 냉정하며 웃음기 하나 없었고,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을 하면 비웃거나 냉담하게 대하곤 했다. 지금의 배건후는 데릴사위가 되겠다는 말도 서슴없이 하고, ‘총애’를 받겠다고 자청하기까지 한다.배건후는 몸에 묻은 과일 조각을 닦지 않고 손을 들어 도아린의 등을 토닥이며 괜찮은지 확인한 후에야 휴지를 꺼내 옷을 닦았다.도아린은 바닥에 떨어진 과일 조각을 치우며 농담처럼 말했다. "배건후, 당신 몸에 다른 사람이 들어온 게 분명해요. 내가 책 속에 살고 있는 건가? 당신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알고 내가 강해져서 당신에게 복수할 거라는 걸 알고 미리 납작 엎드리는 건가?"배건후는 옷을 다 닦고 도아린을 소파로 끌어당겼다."빙의가 아니라 공략이에요.""..."남자는 그녀를 품에 안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을 공략해서 당신의 사랑을 얻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나는 죽어요.""당신 미쳤어요?" 도아린은 그의 등을 찰싹 때렸다."미쳤어요. 당신은 유일한 약이에요."도아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의 품에서 온몸을 떨며 웃었다. "그렇게 뻔한 사랑 고백은 우종이 가르쳐준 거죠
"엄마가 당신한테 준대요, 알아서 해요."도아린이 머리를 끄덕였다."그래요. 별장에서 돌아온 후 다시 해결합시다."배건후는 몸을 뒤로 돌리면서 주체 못 하고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잘 보이지 않아 그런지 어떤 부분은 더 확대되어 크게 보였다."전보다 커졌는데요."이상한 말이 도아린의 얼굴을 빨갛게 만들었다.그녀는 화가나 그를 한 눈 째리고 나가서 물건을 정리하였다.도아린은 변슬기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그녀를 끌고 단추를 찾는다는 핑계로 무슨 일인지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변슬기는 카펫에 엎드려서 핸드폰 보조등을 켜고 소파 밑을 드려다보았다."찾았어요."그녀는 손을 뻗어 단추를 쥐면서 주절주절 말했다."도 선생님, 이제 기회가 되면 제가 저희집의 메인 메뉴인 만두를 대접해 드리겠습니다."도아린은 카펫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그녀가 건네 준 단추를 만지면서 웃으며 말했다."좋아요. 제일 좋기는 가게 평생 20% 할인 카드 줘요.""작은 가게라 많이 벌지도 못해요."변슬기가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이 오시면 무조건 20% 할인 해들릴게요."진수혁은 다 썰어 놓은 과일을 가지고 밖으로 나오면서 저둘이 얘기를 나누는 것을 보았다."무슨 얘기 하세요?"변슬기가 설명해주려 하자 도아린은 손으로 그녀의 목을 감싸며 말했다."데릴 사위에 대해 얘기를 했어요. 변슬기의 어머니 아버지는 딸 하나 뿐인데, 앞으로 사위가 있다며 처가에 들어왔으면 해요."변슬기는 진수혁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 보았다. 그가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진수혁의 기분은 별로 파동이 없어 보였고 그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에 매우 동의하는 눈치였다."우리집에는 니가 하나뿐인 딸인데.""저는 데릴 사위를 할 생각이 있습니다."진수혁은 도아린한테 손을 닦으라고 뜨거운 손수건을 건네 주며 그녀를 지그시 바라 보았다.슬기는 놀라서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도아린과 진수혁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
변슬기는 재빨리 진수혁의 등 뒤로 숨었다.진수혁은 잠시 멈칫하더니 곧 상황을 파악하고 조용히 말했다.“이것 좀 부엌에 가져다줘.”“네!”변슬기는 배건후가 문 앞에 두고 간 봉투를 잽싸게 집어 들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부엌으로 사라졌다.도아린의 셔츠 단추 하나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배건후는 자신의 재킷을 벗어 그녀에게 걸쳐주며 조심스럽게 게스트룸으로 이끌었다.“기다려. 금방 다녀올게. 차에 여벌로 둔 옷 있어.”도아린은 황급히 배건후의 손을 붙잡고 재킷을 벗어 돌려주었다.“일북이 근처에 있을 거야. 전화해. 밖에 추우니까 이거 입고 나가.”그녀가 팔을 들자 셔츠는 더 크게 벌어졌고 새하얗고 부드러운 피부가 다시 배건후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눈동자에 번쩍이는 불꽃이 튀었고 그 불씨는 작지만 매섭고 뜨거웠다.도아린은 급히 몸을 옆으로 돌리고 팔로 가슴을 가렸다. “어서 가.”배건후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그녀를 끌어안았다.도아린은 반사적으로 거부하려 했지만 그는 단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번을 고요히 숨쉬더니 결국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발소리는 집 밖이 아니라 욕실로 향했다.변슬기는 부엌에서 머리를 내밀며 확인하려다 진수혁에게 팔을 붙잡혀 다시 안으로 끌려들어갔다.“생각해봤어? 회사에 남을 거야 아니면 돌아가서 가게를 이을 거야?”변슬기는 고개를 숙이고 포도를 씻었다.자신의 집은 해남에 있는 작은 분식집이었다. 일반 가정에게는 소중한 생계 수단일지 몰라도 재벌가인 진씨 가문 한테는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존재였다.부모님은 외동딸인 변슬기가 곁에 있기를 바라며 나중에는 사위를 맞이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진수혁은 진성 그룹의 황태자다. 그에겐 집안도 학벌도 모두 어울리는 배우자가 필요했고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 떠나는 순간 진수혁과는 더 이상 인연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계속 머무르면 감정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 뻔했다.한참 후 변슬기는 낮은 목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