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역할인데?” 손보미가 눈을 감은 채 물었다. “금희.” 손보미는 머릿속으로 대본을 떠올렸다. 그녀가 연기하는 여자 주인공은 궁에 들어온 첫날, 남을 도와줘서 총관의 칭찬을 받는다. 같이 들어온 궁녀 두 명이 그녀를 질투하고 괴롭히는데 그중 한 궁녀의 이름이 금희였다. “연기할 때 적당히 하라고 해.” 손보미는 팔을 누군가가 살짝 밀자 무심하게 말했다. “오늘 몸 상태가 안 좋으니 물 뿌릴 때 따뜻한 물로 해줘.” 연기라는 건 많은 게 진짜가 아니었다.예를 들어, 채찍에 맞는 장면도 실제로는 바닥에 채찍을 휘두르며 마치 맞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또한 주삿바늘도 손가락으로 살짝만 찌르는 식으로 연출한다. 그녀는 주연배우였고, 배건후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지만 촬영장 사람들은 그녀에게 강력한 후원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무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연기라는 건 사실감이 중요하지 않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보미는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뜨자, 화장을 해주던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당황해서 작은 브러시를 그녀의 눈에 찌를 뻔했다. “죄송해요, 보미 씨...” 손보미는 화를 참지 못하고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밀쳐내며 티슈로 얼굴을 닦았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미 자리를 떠 있었다. 김지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보미의 추측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도아린이 어떻게 날 괴롭히는 궁녀 역할을 오디션 보게 된 거지? 분명 황후의 시녀 역할을 본다고 하지 않았나?’손보미는 잠시 생각한 뒤,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고 의상실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고는 안에서 답이 오기도 전에 안으로 들어갔다. “나가 있어요. 내가 옷 입는 걸 도와줄게요.” 손보미는 부드럽게 덧붙였다. “우린 친구예요.” 도아린을 데리고 온 사람은 도아린을 바라보았고, 도아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밖으로 나갔다. 사람이 나가자마자 손보미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는 도
손보미가 떠난 후,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방금 있었던 일을 SNS 블로거에게 보냈다. 거울이 산산조각 난 의상실 바닥 사진까지 첨부하면서 말이다. 그 대가로 커다란 현금 봉투를 받았다. 블로거는 즉시 상황을 상상해 300자짜리 짧은 글을 작성해 게시했다. ‘충격! 인기 여배우가 신인에게 괴롭힘을 당하다?’‘알려진 제보에 따르면 인기 여배우와 신인은 어린 시절 친구였으며 두 사람은 함께 연예계에서 노력하기로 약속했었다. 하지만 인기 여배우는 스폰서를 만나 승승장구했고 친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 수년 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사이에 생긴 차이가 결국 우정을 완전히 무너뜨렸다.’손보미의 팬들은 글을 읽고 댓글과 공유를 남겼다. ‘우정이 이익 앞에서 이렇게 무너질 줄은 몰랐다’며, 부모도 없이 자라온 손보미가 유일한 친구마저 잃은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그녀를 더 많이 응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런 댓글들 속에서 몇몇 사람들은 의구심을 표했다. [손보미는 스폰서가 있는 배우고 연기도 별로인데 어떻게 송 감독의 신작에서 주연을 맡았을까? 신인을 괴롭히지 않은 게 다행이지, 누가 감히 손보미를 괴롭히겠어? 아마 신작 홍보를 위해 꾸며낸 가짜 소문일 거야.]블로거는 예상보다 훨씬 좋은 반응을 보자,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연락해 만약 손보미가 괴롭힘당하는 장면을 찍어온다면 보상을 세 배로 올려주겠다고 제안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선금까지 받고는 화장 도구 상자를 챙겨 손보미에게 가서 메이크업을 수정해 주기 위해 서둘렀다. 현장에서는 스태프가 도아린에게 대본을 건네주었다. ‘이게 준비가 다 됐다는 뜻인가?’함예진이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 “송 감독님이 네 폭발력을 보고 싶어 하셔. 이 배역은 비중은 크지 않지만 이야기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해. 잘해봐.” 함예진은 또 작은 목소리로 송 감독에게 무언가를 말했고, 도아린을 보는 감독의 눈빛이 조금 변했다. 잠시 후, 손보미가 부축을
곧이어 무전기에서 송 감독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각 부서가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원래 장면은 두 번 정도 밀치는 후, 궁녀가 찻주전자에 남은 물을 손보미에게 뿌리는 것이었지만 감독의 재조정으로 밤에 손보미가 잠든 후 궁녀가 그녀에게 물을 끼얹는 장면으로 바뀌었다.손보미는 마음을 졸이며 누워 자는 척을 했다.감독의 ‘액션’ 소리가 들리자마자, 도아린은 차가운 물 한 바가지를 손보미의 머리 위로 쏟아부었다. “아악!” 손보미는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지만, 감독이 컷을 외치지 않자 연기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금희야, 너 지금 뭘 하는 거야?” “주제넘게 나대지 말았어야지!” 도아린은 손보미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잡아챈 뒤, 그녀를 억지로 올려다보게 만들었다. 도아린의 눈빛은 너무도 매서웠고 마치 지옥에서 기어 나온 원귀처럼 복수심에 가득 차 있었다. 손보미는 그 눈빛에 겁에 질려 머리가 하얘졌다. “컷!” 감독의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미 씨, 보미 씨는 여주잖아. 시선은 흔들림 없이 당당하게 있어야지. 다시 한번 가자!” 대본 속에서 여주인공은 두 명의 궁녀에게 괴롭힘을 당한 뒤 비록 초라한 모습이지만 전혀 겁먹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단호하게 꾸짖는다. 하지만 손보미는 도아린의 눈빛과 마주할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두려움이 솟구쳐 올라왔다. 결국 차가운 물 세 바가지를 맞고 나서, 손보미는 추위에 몸을 떨며 대사를 하기는커녕 도아린과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현장 스태프들은 고개를 저으며 답답해했다. 여주인공이 신인에게 압도당해 연기를 망치니 작업량이 늘어나면서 촬영 진행이 크게 지연되고 있었다. 하지만 손보미의 스폰서를 의식해 누구도 대놓고 불만을 표출할 수는 없었다. 손보미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만약 서서 연기를 했다면 일부러 넘어져 발목을 다시 다쳤다고 핑계를 댈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침대에 누워있는 상태였다. 여기서 기절하는 척하면 함예진의 성격상 당
“죄송해요, 오늘 제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모두를 고생시켰네요.” 손보미는 머리에서 물방울이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진심 어린 사과와 함께 고개를 숙이자, 불만을 품고 있던 스태프들도 더 이상 문제 삼을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손을 내저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그제야 손보미는 송 감독을 바라보았다. “감독님, 저는 자수를 배운 적이 없어요. 그냥 보육원에서 살 때, 옷을 직접 꿰매야 했기 때문에 조금 배우게 된 것뿐이에요.”“제가 자수 장면을 직접 연기하고 싶었던 이유는 제 자신을 성장시키고 싶었고, 이 작품에 더 많은 흥미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더 적합한 사람이 있다면 저는 기꺼이 자리를 내놓을 겁니다.”인기 있는 여배우의 비참한 과거는 극 중 운명에 굴하지 않고 성공한 여주인공과 맞아떨어져, 이 이야기가 홍보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부감독은 송 감독이 작품에 대해 완벽을 추구하는 걸 잘 알았다. 그러나 좋은 작품은 단순히 잘 찍는 것만이 아니라 배우의 인기와 함께 홍보도 잘 되어야 한다. 지금 손보미는 화제의 중심에 있었고 드라마가 막 시작했는데도 벌써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손보미의 스폰서를 건드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여주인공의 자수 장면은 많지 않았고 대역을 쓸지 말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의상과 소품에 능통한 누군가의 지도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부감독은 송 감독의 귀에 몇 마디 속삭였고 송 감독은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함예진이 몇 발짝 걸어와 도아린의 옆에 서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정말로 겨루고 싶은 거야?” 도아린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지만 손보미의 추악한 행실을 폭로하고 싶었다. 예전에 나형욱이 그녀를 추천했을 때, 손보미의 대역을 맡고 싶지 않아서 단번에 거절했었다. 그런데 배건후는 자기가 대역이라는 걸 알면서도 손보미가 모든 공을 차지하게 만들고 싶어 했다. “저는 어느 명장의 밑에서 조수로 배운
김지민이 전화를 걸어오자 손보미에게 눈짓을 보냈다. “에취!” “보미야, 감기 걸린 거 아니야? 일단 옷부터 갈아입자!” 김지민이 다가와 부축했다. 그들은 옷을 갈아입으러 가고,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방금 일어난 모든 일을 곧장 블로거에게 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보미의 연기에 대해 팬들과 일반인들 사이에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일반인은 이렇게 말했다.[연기 이 정도면 그냥 빨리 은퇴해라.]그러나 팬들은 생각이 달랐다.[보미가 여주인공을 맡았으니까 연기 문제는 없을 거야. 설마 송 감독님이 사람 보는 눈이 없을까?]댓글 창엔 많은 댓글들이 올라오고 있었다.[송 감독님이 눈이 먼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관객은 안 그렇다. 저 여자가 여주인공이면 난 이 드라마 절대 안 봐!][차라리 보지 마! 너 같은 사람의 조회 수 필요 없어! 우리 언니 연기 진짜 리얼하거든? 분명 저 신인 배우가 카메라 밖에서 방해했을 거야!][아쉽네. 그 신인 배우는 카메라에 안 잡혔으니 얼굴도 모르겠고.][악역을 맡은 거면 당연히 못된 얼굴이지. 분명히 엄청 못생겨서 우리 언니를 놀라게 했을 거야!] 손보미의 화제성은 확실히 높았다. 그녀가 보육원 이야기를 꺼내면서, 예전에 그녀를 돌봐줬던 고아원이 사람들에게 드러났다. 많은 손보미의 팬들이 그녀의 이름으로 보육원에 기부를 보냈고, 보육원 원장은 당황했지만 기쁘게 팬들과 사진을 찍으며 손보미를 응원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작은 부탁을 하나 덧붙였다. 팬클럽 관리자는 즉시 김지민에게 연락해 손보미의 의견을 물어보게 했다. “보육원에 희귀병에 걸린 아이가 있는데 네가 나서서 도와달라는 요청이야. 입양해 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고, 아니면 치료비라도 모금해달래.” 손보미는 따뜻한 생강차를 들고 냉소를 지었다. “일곱, 여덟 살짜리 아이에다가 병까지 있다니, 그런 아이를 누가 입양하겠어?” “그럼 거절할까?” “잠깐만.” 손보미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보육원을 떠난 지 오랜 시
“뭐 하는 거야?” 익숙한 목소리에 손보미는 깜짝 놀라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후 씨, 보육원에 내 팬인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가 지금 위중해. 원장님이 나한테 아이를 한 번 봐달라고 하셨어.” 배건후의 눈빛은 아주 무거웠다.“가봐야겠네.” “그런데...” 손보미는 억울한 표정으로 도아린을 바라봤다. “만약 아린 씨가 이 대역 자리를 원한다면 내가 양보할게. 율이 몸이 많이 안 좋아서 나를 꼭 보고 싶어 해. 아린 씨도 그 아이를 안타깝게 여긴다면 내 상황을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도아린은 바늘을 손수건에 고정시키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가지 말라고 한 적 있어요?” 손보미는 억울한 듯 입술을 앙다물며 말했다. “아린 씨가 날 믿지 않을까 봐.” “믿어요.” 도아린은 가볍게 비웃었다. “이렇게 딱 맞추다니... 자수 실력을 보여줘야 할 때마다 무슨 일이 생긴다는 게 정말 우연일까요?” 손보미는 뒤돌아 배건후를 애처롭게 바라봤다. “원장님이 지민이에게 전화를 했지만 결정을 못 내려서 나한테 전화가 온 거야. 사실 나는 그동안 꾸준히 자선 활동을 해왔고 내 팬들도 많이 도왔어. 그런데 매체들이 거기 있다고 해서 가지 말라는 조언도 있었어. 하지만 율이는 너무 안타까운 아이야. 희귀병에 걸렸는데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을지 모르겠어...” 배건후는 도아린을 차갑게 쳐다봤다. “넌 일이 사람 목숨보다 중요해?” 도아린은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난 정직함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송 감독의 새 드라마 제작사는 JS 픽쳐스였고, 주현정이 비록 일선에서 물러났다고는 해도 여전히 영향력이 있었다. 송 감독은 배건후의 말을 감히 거스를 수 없었다. “배 대표님, 대본 리딩 중이니까, 보미 씨와 함께 병문안을 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손보미는 속으로 기뻐했지만 겉으로는 마치 도아린의 동의를 구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함예진 또한 도아린을 바라봤다. 도아린은 여전히 무표정
함예진은 도아린의 손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미안해.” 그녀는 원래 도아린을 도와주려 했지만 오히려 도아린이 억울한 상황을 겪게 만들었다. “이건 이모 잘못이 아니에요.” 도아린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모,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요.” “너와 나 사이에 부탁이라고 할 건 없단다.” 도아린은 더 이상 격식 차리지 않고 바로 소유정의 상황을 설명했다. 함예진은 소유정에게 곡 준비를 철저히 해서 심사위원을 놀라게 하라고 조언했다. 영화 촬영장을 나서자마자 도아린은 이 기쁜 소식을 소유정에게 전했다. 소유정은 유진혁과 함께 노래 연습을 하고 있다가 둘이 얼싸안고 기쁨에 소리쳤다. 몇 초 뒤, 두 사람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소유정은 유진혁의 품에서 서둘러 몸을 떼고는 등을 돌려 걸어갔다. “알겠어, 고마워.” 유진혁도 얼굴이 빨개져서 장비를 만지는 척하며 어색함을 숨겼다. 도아린은 전화를 끊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후진을 시작하자마자 ‘쿵’ 소리가 들렸다. 지난번 긁힌 후로, 그녀는 차에 타기 전에 항상 장애물이 있는지 확인하는 습관을 들였는데, 분명 아무것도 없었다. 황급히 차에서 내려 확인해 보니 차 뒤에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쓰러져 있었다. 경찰에 신고하려던 찰나, 여자아이는 스스로 일어나 다리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더니 돌아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깐만!” 도아린은 급히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가 곧바로 손을 놓았다. 아이의 몸은 너무 말라서 뼈에 피부만 걸쳐져 있는 듯했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어. 부모님 연락처가 어떻게 돼? 병원에 오시라고 할게.” “부모님 없어요.” 여자아이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아이의 얼굴빛은 창백했고 눈두덩이는 움푹 패여 있었다. 영양 상태가 심각하게 부족해 보였다. 이 아이, 학대를 당하는 건가? 도아린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널 쳤으니 보상해 줘야겠지. 원하
도아린은 눈을 깜박였다. 손보미 같은 사람이 이런 귀여운 팬을 가지고 있다니 놀라웠다. 자신의 우상을 언급하자 여자아이는 금세 말문이 트였다. 손보미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보육원 출신이었다며, 그녀는 선하고 노력하는 사람이었고 운명에 굴복하지 않으며 온갖 고난을 헤치고 지금의 성공을 이뤘다고 했다. 힘든 날들을 버틸 때마다 여자아이는 손보미가 출연한 드라마를 보며 위로를 받았다. 그녀도 손보미처럼 되고 싶다며, 손보미에게 응원과 축복을 받고 싶다고 했다. “손보미를 모르는 거예요? 저 사진 있어요.” 여자아이는 주머니에서 잡지에서 오려낸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옷은 더러워졌지만 그 사진만은 깔끔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손보미가 그녀의 마음속에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도아린은 사진을 받아들었다. 그 사진은 손보미가 청호상 시상식에 참석했을 때의 인터뷰 장면이었다. 사진 속 손보미는 환하게 웃고 있었고 비록 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표정이었다. 배건후의 편애를 받는다는 건 세상을 가진 것과 다름없으니까. “나 이 사람 알아.” 도아린은 사진을 여자아이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근데 지금 여기에 없어.” “있어요!” 여자아이는 목소리를 높였다. “스케줄에 오늘 여기서 촬영한다고 나와 있었어요!” 도아린은 여자아이가 스케줄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차분하게 설명해 주기로 했다. “맞아, 오늘 여기서 촬영했어. 그런데 반 시간 전에 보육원에서 누가 보고 싶다고 해서 먼저 갔어.” 여자아이는 잠시 멍하니 서 있더니 갑자기 흥분하기 시작했다. “희망의 집 맞죠? 저를 빨리 희망의 집으로 데려다주세요!” 도아린은 그녀의 간절한 부탁에 못 이겨, 결국 그녀를 희망의 집 보육원으로 데려갔다. 여자아이는 연락처를 남길 새도 없이 차 문을 열고 대문 쪽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문을 지키던 경비 아저씨는 여자아이를 알아본 듯 문을 열어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