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나랑 커플 목욕이라도 하고 싶은 거야?” 배건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아린은 이를 드러내며 웃더니 작게 말했다. “꿈 깨요.” 배건후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가워지더니 그는 냉정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도아린은 갑자기 그의 팔을 꽉 붙잡고는 뒤에서 보고 있던 도정국에게 들키지 않으려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지금 이 순간 배건후가 협조해 주지 않으면 도정국은 저 여자를 데려와 결혼할 것이 분명했다. 도아린의 복수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그녀의 친정 모든 것이 타인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도아린은 배건후의 눈에서 간절히 부탁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배건후의 입가에 얕게 그려진 비웃음의 곡선을 발견했다. 도아린은 발끝을 살짝 들어 올려 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집에 가서 같이 씻어요.” 배건후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꿈 깨.” “...” 도아린이 그 말에 당황한 순간, 배건후는 그녀의 턱을 살며시 들어 올려 입술을 스치듯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저 잠깐의 입맞춤이었다. 배건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차갑게 도정국을 바라보았다. “장인어른께서 상황의 이점을 이미 아신 것 같으니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도아린의 허리를 감싸안고 차로 돌아갔다. 도정국과 두 사람은 그 자리에 남아 당황한 표정으로 바람 속에 서 있었다. 도유준은 분노로 몸을 떨며 말했다. “아버지, 누나가 매형 앞에서 아버지의 체면을 조금도 세워 드리지 않네요. 배씨 집안이 우리 집안을 우습게 보잖아요!” 강홍련도 옆에서 부추기듯 말했다. “저야 도씨 집안에 들어가지 못해도 상관없어요. 이렇게 오래 참고 살았으니까요. 하지만 아린이는 벌써부터 당신을 이렇게 우습게 보다니... 나중에 병원에 입원해서 딸의 서명이 필요할 때 어떻게 당신을 괴롭힐지 모르겠어요.” 도정국은 두 사람의 말에 부추김을 받아 마음속에 분노가 치솟았다. 배건후가 없었더라면 그
“어느 역할인데?” 손보미가 눈을 감은 채 물었다. “금희.” 손보미는 머릿속으로 대본을 떠올렸다. 그녀가 연기하는 여자 주인공은 궁에 들어온 첫날, 남을 도와줘서 총관의 칭찬을 받는다. 같이 들어온 궁녀 두 명이 그녀를 질투하고 괴롭히는데 그중 한 궁녀의 이름이 금희였다. “연기할 때 적당히 하라고 해.” 손보미는 팔을 누군가가 살짝 밀자 무심하게 말했다. “오늘 몸 상태가 안 좋으니 물 뿌릴 때 따뜻한 물로 해줘.” 연기라는 건 많은 게 진짜가 아니었다.예를 들어, 채찍에 맞는 장면도 실제로는 바닥에 채찍을 휘두르며 마치 맞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또한 주삿바늘도 손가락으로 살짝만 찌르는 식으로 연출한다. 그녀는 주연배우였고, 배건후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지만 촬영장 사람들은 그녀에게 강력한 후원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무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연기라는 건 사실감이 중요하지 않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보미는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뜨자, 화장을 해주던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당황해서 작은 브러시를 그녀의 눈에 찌를 뻔했다. “죄송해요, 보미 씨...” 손보미는 화를 참지 못하고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밀쳐내며 티슈로 얼굴을 닦았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미 자리를 떠 있었다. 김지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보미의 추측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도아린이 어떻게 날 괴롭히는 궁녀 역할을 오디션 보게 된 거지? 분명 황후의 시녀 역할을 본다고 하지 않았나?’손보미는 잠시 생각한 뒤,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고 의상실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고는 안에서 답이 오기도 전에 안으로 들어갔다. “나가 있어요. 내가 옷 입는 걸 도와줄게요.” 손보미는 부드럽게 덧붙였다. “우린 친구예요.” 도아린을 데리고 온 사람은 도아린을 바라보았고, 도아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밖으로 나갔다. 사람이 나가자마자 손보미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는 도
손보미가 떠난 후,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방금 있었던 일을 SNS 블로거에게 보냈다. 거울이 산산조각 난 의상실 바닥 사진까지 첨부하면서 말이다. 그 대가로 커다란 현금 봉투를 받았다. 블로거는 즉시 상황을 상상해 300자짜리 짧은 글을 작성해 게시했다. ‘충격! 인기 여배우가 신인에게 괴롭힘을 당하다?’‘알려진 제보에 따르면 인기 여배우와 신인은 어린 시절 친구였으며 두 사람은 함께 연예계에서 노력하기로 약속했었다. 하지만 인기 여배우는 스폰서를 만나 승승장구했고 친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 수년 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사이에 생긴 차이가 결국 우정을 완전히 무너뜨렸다.’손보미의 팬들은 글을 읽고 댓글과 공유를 남겼다. ‘우정이 이익 앞에서 이렇게 무너질 줄은 몰랐다’며, 부모도 없이 자라온 손보미가 유일한 친구마저 잃은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그녀를 더 많이 응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런 댓글들 속에서 몇몇 사람들은 의구심을 표했다. [손보미는 스폰서가 있는 배우고 연기도 별로인데 어떻게 송 감독의 신작에서 주연을 맡았을까? 신인을 괴롭히지 않은 게 다행이지, 누가 감히 손보미를 괴롭히겠어? 아마 신작 홍보를 위해 꾸며낸 가짜 소문일 거야.]블로거는 예상보다 훨씬 좋은 반응을 보자,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연락해 만약 손보미가 괴롭힘당하는 장면을 찍어온다면 보상을 세 배로 올려주겠다고 제안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선금까지 받고는 화장 도구 상자를 챙겨 손보미에게 가서 메이크업을 수정해 주기 위해 서둘렀다. 현장에서는 스태프가 도아린에게 대본을 건네주었다. ‘이게 준비가 다 됐다는 뜻인가?’함예진이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 “송 감독님이 네 폭발력을 보고 싶어 하셔. 이 배역은 비중은 크지 않지만 이야기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해. 잘해봐.” 함예진은 또 작은 목소리로 송 감독에게 무언가를 말했고, 도아린을 보는 감독의 눈빛이 조금 변했다. 잠시 후, 손보미가 부축을
곧이어 무전기에서 송 감독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각 부서가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원래 장면은 두 번 정도 밀치는 후, 궁녀가 찻주전자에 남은 물을 손보미에게 뿌리는 것이었지만 감독의 재조정으로 밤에 손보미가 잠든 후 궁녀가 그녀에게 물을 끼얹는 장면으로 바뀌었다.손보미는 마음을 졸이며 누워 자는 척을 했다.감독의 ‘액션’ 소리가 들리자마자, 도아린은 차가운 물 한 바가지를 손보미의 머리 위로 쏟아부었다. “아악!” 손보미는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지만, 감독이 컷을 외치지 않자 연기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금희야, 너 지금 뭘 하는 거야?” “주제넘게 나대지 말았어야지!” 도아린은 손보미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잡아챈 뒤, 그녀를 억지로 올려다보게 만들었다. 도아린의 눈빛은 너무도 매서웠고 마치 지옥에서 기어 나온 원귀처럼 복수심에 가득 차 있었다. 손보미는 그 눈빛에 겁에 질려 머리가 하얘졌다. “컷!” 감독의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미 씨, 보미 씨는 여주잖아. 시선은 흔들림 없이 당당하게 있어야지. 다시 한번 가자!” 대본 속에서 여주인공은 두 명의 궁녀에게 괴롭힘을 당한 뒤 비록 초라한 모습이지만 전혀 겁먹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단호하게 꾸짖는다. 하지만 손보미는 도아린의 눈빛과 마주할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두려움이 솟구쳐 올라왔다. 결국 차가운 물 세 바가지를 맞고 나서, 손보미는 추위에 몸을 떨며 대사를 하기는커녕 도아린과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현장 스태프들은 고개를 저으며 답답해했다. 여주인공이 신인에게 압도당해 연기를 망치니 작업량이 늘어나면서 촬영 진행이 크게 지연되고 있었다. 하지만 손보미의 스폰서를 의식해 누구도 대놓고 불만을 표출할 수는 없었다. 손보미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만약 서서 연기를 했다면 일부러 넘어져 발목을 다시 다쳤다고 핑계를 댈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침대에 누워있는 상태였다. 여기서 기절하는 척하면 함예진의 성격상 당
“죄송해요, 오늘 제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모두를 고생시켰네요.” 손보미는 머리에서 물방울이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진심 어린 사과와 함께 고개를 숙이자, 불만을 품고 있던 스태프들도 더 이상 문제 삼을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손을 내저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그제야 손보미는 송 감독을 바라보았다. “감독님, 저는 자수를 배운 적이 없어요. 그냥 보육원에서 살 때, 옷을 직접 꿰매야 했기 때문에 조금 배우게 된 것뿐이에요.”“제가 자수 장면을 직접 연기하고 싶었던 이유는 제 자신을 성장시키고 싶었고, 이 작품에 더 많은 흥미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더 적합한 사람이 있다면 저는 기꺼이 자리를 내놓을 겁니다.”인기 있는 여배우의 비참한 과거는 극 중 운명에 굴하지 않고 성공한 여주인공과 맞아떨어져, 이 이야기가 홍보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부감독은 송 감독이 작품에 대해 완벽을 추구하는 걸 잘 알았다. 그러나 좋은 작품은 단순히 잘 찍는 것만이 아니라 배우의 인기와 함께 홍보도 잘 되어야 한다. 지금 손보미는 화제의 중심에 있었고 드라마가 막 시작했는데도 벌써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손보미의 스폰서를 건드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여주인공의 자수 장면은 많지 않았고 대역을 쓸지 말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의상과 소품에 능통한 누군가의 지도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부감독은 송 감독의 귀에 몇 마디 속삭였고 송 감독은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함예진이 몇 발짝 걸어와 도아린의 옆에 서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정말로 겨루고 싶은 거야?” 도아린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지만 손보미의 추악한 행실을 폭로하고 싶었다. 예전에 나형욱이 그녀를 추천했을 때, 손보미의 대역을 맡고 싶지 않아서 단번에 거절했었다. 그런데 배건후는 자기가 대역이라는 걸 알면서도 손보미가 모든 공을 차지하게 만들고 싶어 했다. “저는 어느 명장의 밑에서 조수로 배운
김지민이 전화를 걸어오자 손보미에게 눈짓을 보냈다. “에취!” “보미야, 감기 걸린 거 아니야? 일단 옷부터 갈아입자!” 김지민이 다가와 부축했다. 그들은 옷을 갈아입으러 가고,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방금 일어난 모든 일을 곧장 블로거에게 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보미의 연기에 대해 팬들과 일반인들 사이에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일반인은 이렇게 말했다.[연기 이 정도면 그냥 빨리 은퇴해라.]그러나 팬들은 생각이 달랐다.[보미가 여주인공을 맡았으니까 연기 문제는 없을 거야. 설마 송 감독님이 사람 보는 눈이 없을까?]댓글 창엔 많은 댓글들이 올라오고 있었다.[송 감독님이 눈이 먼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관객은 안 그렇다. 저 여자가 여주인공이면 난 이 드라마 절대 안 봐!][차라리 보지 마! 너 같은 사람의 조회 수 필요 없어! 우리 언니 연기 진짜 리얼하거든? 분명 저 신인 배우가 카메라 밖에서 방해했을 거야!][아쉽네. 그 신인 배우는 카메라에 안 잡혔으니 얼굴도 모르겠고.][악역을 맡은 거면 당연히 못된 얼굴이지. 분명히 엄청 못생겨서 우리 언니를 놀라게 했을 거야!] 손보미의 화제성은 확실히 높았다. 그녀가 보육원 이야기를 꺼내면서, 예전에 그녀를 돌봐줬던 고아원이 사람들에게 드러났다. 많은 손보미의 팬들이 그녀의 이름으로 보육원에 기부를 보냈고, 보육원 원장은 당황했지만 기쁘게 팬들과 사진을 찍으며 손보미를 응원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작은 부탁을 하나 덧붙였다. 팬클럽 관리자는 즉시 김지민에게 연락해 손보미의 의견을 물어보게 했다. “보육원에 희귀병에 걸린 아이가 있는데 네가 나서서 도와달라는 요청이야. 입양해 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고, 아니면 치료비라도 모금해달래.” 손보미는 따뜻한 생강차를 들고 냉소를 지었다. “일곱, 여덟 살짜리 아이에다가 병까지 있다니, 그런 아이를 누가 입양하겠어?” “그럼 거절할까?” “잠깐만.” 손보미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보육원을 떠난 지 오랜 시
“뭐 하는 거야?” 익숙한 목소리에 손보미는 깜짝 놀라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후 씨, 보육원에 내 팬인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가 지금 위중해. 원장님이 나한테 아이를 한 번 봐달라고 하셨어.” 배건후의 눈빛은 아주 무거웠다.“가봐야겠네.” “그런데...” 손보미는 억울한 표정으로 도아린을 바라봤다. “만약 아린 씨가 이 대역 자리를 원한다면 내가 양보할게. 율이 몸이 많이 안 좋아서 나를 꼭 보고 싶어 해. 아린 씨도 그 아이를 안타깝게 여긴다면 내 상황을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도아린은 바늘을 손수건에 고정시키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가지 말라고 한 적 있어요?” 손보미는 억울한 듯 입술을 앙다물며 말했다. “아린 씨가 날 믿지 않을까 봐.” “믿어요.” 도아린은 가볍게 비웃었다. “이렇게 딱 맞추다니... 자수 실력을 보여줘야 할 때마다 무슨 일이 생긴다는 게 정말 우연일까요?” 손보미는 뒤돌아 배건후를 애처롭게 바라봤다. “원장님이 지민이에게 전화를 했지만 결정을 못 내려서 나한테 전화가 온 거야. 사실 나는 그동안 꾸준히 자선 활동을 해왔고 내 팬들도 많이 도왔어. 그런데 매체들이 거기 있다고 해서 가지 말라는 조언도 있었어. 하지만 율이는 너무 안타까운 아이야. 희귀병에 걸렸는데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을지 모르겠어...” 배건후는 도아린을 차갑게 쳐다봤다. “넌 일이 사람 목숨보다 중요해?” 도아린은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난 정직함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송 감독의 새 드라마 제작사는 JS 픽쳐스였고, 주현정이 비록 일선에서 물러났다고는 해도 여전히 영향력이 있었다. 송 감독은 배건후의 말을 감히 거스를 수 없었다. “배 대표님, 대본 리딩 중이니까, 보미 씨와 함께 병문안을 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손보미는 속으로 기뻐했지만 겉으로는 마치 도아린의 동의를 구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함예진 또한 도아린을 바라봤다. 도아린은 여전히 무표정
함예진은 도아린의 손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미안해.” 그녀는 원래 도아린을 도와주려 했지만 오히려 도아린이 억울한 상황을 겪게 만들었다. “이건 이모 잘못이 아니에요.” 도아린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모,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요.” “너와 나 사이에 부탁이라고 할 건 없단다.” 도아린은 더 이상 격식 차리지 않고 바로 소유정의 상황을 설명했다. 함예진은 소유정에게 곡 준비를 철저히 해서 심사위원을 놀라게 하라고 조언했다. 영화 촬영장을 나서자마자 도아린은 이 기쁜 소식을 소유정에게 전했다. 소유정은 유진혁과 함께 노래 연습을 하고 있다가 둘이 얼싸안고 기쁨에 소리쳤다. 몇 초 뒤, 두 사람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소유정은 유진혁의 품에서 서둘러 몸을 떼고는 등을 돌려 걸어갔다. “알겠어, 고마워.” 유진혁도 얼굴이 빨개져서 장비를 만지는 척하며 어색함을 숨겼다. 도아린은 전화를 끊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후진을 시작하자마자 ‘쿵’ 소리가 들렸다. 지난번 긁힌 후로, 그녀는 차에 타기 전에 항상 장애물이 있는지 확인하는 습관을 들였는데, 분명 아무것도 없었다. 황급히 차에서 내려 확인해 보니 차 뒤에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쓰러져 있었다. 경찰에 신고하려던 찰나, 여자아이는 스스로 일어나 다리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더니 돌아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깐만!” 도아린은 급히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가 곧바로 손을 놓았다. 아이의 몸은 너무 말라서 뼈에 피부만 걸쳐져 있는 듯했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어. 부모님 연락처가 어떻게 돼? 병원에 오시라고 할게.” “부모님 없어요.” 여자아이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아이의 얼굴빛은 창백했고 눈두덩이는 움푹 패여 있었다. 영양 상태가 심각하게 부족해 보였다. 이 아이, 학대를 당하는 건가? 도아린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널 쳤으니 보상해 줘야겠지. 원하
도아린은 변슬기를 데리고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배지유가 자신을 일부러 모욕하려고 그런 말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이곳에 유명 스타들이 모여 있다는 걸 알게 됐다.스크린에서만 보던 유명인들을 실제로 보니 변슬기는 입을 다물지 못했고 두 눈으로는 전부 다 담을 수 없을 정도였다.그녀는 다소 어색하게 셔츠를 만지작거렸다.아버지가 친구를 만나러 가니 단정하게 차려입으라고 당부했지만, 변슬기는 또 소개팅 자리일 거로 생각하며 일부러 평소 입던 옷을 입고 왔다.그녀는 상대가 아버지의 돈이 아니라 자신의 평범한 모습을 좋아하길 바랐다.그러나 여기에서 음료를 나르는 여직원들조차 자신보다 더 격식 있게 차려입은 것을 보고 당황했다.“도 선생님, 저 이러고 있으니까 너무 볼품없는 거 아니에요?”도아린은 그녀의 셔츠 뒷면에 약간의 땀 자국이 있는 것을 보고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제가 여분의 드레스를 준비해 놨어요. 갈아입어도 좋아요.”변슬기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일단 아빠 친구를 만나고 나서 생각할게요.”멀리서 변우빈이 그녀를 보고 약간의 타박 섞인 눈빛을 보였지만, 곧 미안하다는 듯 설명했다.“우리 딸은 성격이 참 고집스러워.”그는 변슬기에게 손짓했고 딸이 곁에 앉자 말했다.“내가 단정하게 입고 오라고 했잖아. 그런데 일하는 옷을 입고 오면 어떡하니.”변슬기는 당황스러워 목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들었는데, 그 순간 주현정이 보이자 긴장한 표정으로 도아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다.‘큰일 났다!’문 앞에서 배지유와 다툰 것도 모자라 이번엔 배지유의 엄마까지 만나게 됐다.지난번처럼 자신에게 온화하게 대해줄 리가 없을 것이다.“...네 딸이구나?”주현정은 마치 이해했다는 듯 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지난번에 봤을 때 어쩐지 낯이 익다 했어.”변슬기는 몰래 아버지의 옷자락을 꽉 잡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분 배지유 엄마예요.”변우빈은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웃으며 소개했다.“이분은 주현정
배지유가 휠체어를 돌리자마자 누군가와 부딪힐 뻔했다.“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저... 배지유?”“변슬기?” 배지유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너 여기서 아르바이트하는 거야? 이 시간에 오다니, 연회가 거의 끝나가잖아.”변슬기는 공유 자전거를 타고 와서 온몸에 땀범벅이었고 앞머리가 하얀 이마에 붙어 있었다.그녀는 손으로 머리를 정리하며 숨을 고르면서도 자신감 있게 말했다.“아니야, 난 사람을 찾으러 온 거야.”이어지는 장면이 바로 도아린이 목격한 것이다.배지유는 휠체어를 움직여 변슬기의 주위를 맴돌면서 눈에 비웃음이 가득했다.“너희 집은 이번 생은 물론이고, 전생에도 이런 호화로운 사람들을 본 적 없을걸? 여기를 시장으로 착각한 거야? 아무나 데려와서 ‘내 삼촌, 내 이모’라고 하면 통할 것 같아? 여기는 모두 톱스타들이야! 너 콘서트 한 번이라도 가본 적 있어?”배지유는 입을 가리며 더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다.“생활비 벌려고 아르바이트까지 해야 하는 주제에 무슨 돈으로 콘서트를 본다는 거야! 연예인을 만나고 싶어? 기숙사로 돌아가서 기다려. 누굴 보고 싶은지 댓글 남기면 내가 대신 사진 찍어줄게. 미리 말해두는데, 나는 돈을 안 받아. 대신 너는 우리 기숙사의 1년 치 청소를 맡고 내 빨래도 다 해야 해. 속옷과 양말도 손빨래로!”변슬기는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난 연예인 보러 온 게 아니야.”“올해 최고의 억지상은 바로 너네!” 배지유는 엄지를 세우며 비웃었다.“여긴 다 연예인들뿐이야. 네가 누굴 찾는다고 하면, 내가 직원한테 말해서 불러줄게.”변슬기는 그녀를 무시하고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그러자 배지유의 눈빛이 갑자기 험악해지며 휠체어를 몰아 변슬기에게 돌진했다.거의 부딪힐 뻔한 순간, 휠체어가 갑자기 멈췄다.화가 난 배지유가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가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할 정도로 매혹적인 도아린의 아름다운 얼굴이 보였다.“네가 왜...” 도아린은 왜 자신과 똑같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건가?
주현정은 이혼 얘기를 꺼내지 않았기에 그저 화났다는 의미일 것이다.그러니 그녀의 기분만 풀어주면 도아린이 그 자리를 넘보는 건 불가능해질 것이다.“현정아, 사람은 성인이 아니니 누군들 실수하지 않겠어?” 배석준은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내가 증명해 보일게. 나와 지유야말로 네 뒤를 든든히 지켜줄 사람이라는 걸 말이야!”그는 배지유를 찾아 그녀를 데리고 주현정을 만나러 가려고 했다.세 식구가 언론 앞에 함께 나타나기만 하면 이혼 소문은 사라지게 될 것이고 도아린 같은 외부인은 배씨 가문의 재산에 끼어들 수 없게 될 것이다.하지만 그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배지유가 사라진 후였다.“엄마, 화내지 마세요.” 도아린이 다정하게 위로했다.“배 대표님은 함부로 결단을 내리지 못할 거예요.”“차라리 저 사람이 결단을 내렸으면 좋겠네.”주현정은 도아린과 함께 인파를 지나갔다.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는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그는 다소 어색하게 무릎을 문지르며 이따금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주현정을 본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내가 방해되지는 않았어?”“그 말은 내가 해야 할 말인 것 같은데.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내 연회에 와줘서 고마워.”주현정은 도아린의 손을 잡고 다가갔다. 세 사람은 원형 소파에 앉았다.“이쪽은 내 딸 도아린이야. 이분은 변우빈이라고 하고 내 가장 친한 친구야. 아저씨라고 불러.”“아저씨, 안녕하세요.” 도아린은 무심코 상대방을 살펴봤다.변우빈은 이목구비가 단정하고 배석준와 비슷한 체격이었지만 조금 말랐다. 그의 얼굴과 손에는 노동으로 살아온 사람이 가진 강인함이 배어 있었다.두 사람이 대화하는 동안 변우빈은 계속 주현정의 눈을 바라봤고 주현정의 미소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진심이 담겨있었다.“네 딸도 데리고 온다고 하지 않았어?”주현정이 뒤를 돌아보며 묻
석 대표는 멈칫하더니 그제야 앞에 휠체어 하나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거기에 요란하게 치장한 여자가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이분은...”그는 주현정이 이혼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 첫 반응은 배석준이 다른 여자를 찾았다는 것이었다. 배석준의 새로운 연인은 주현정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석 대표님, 짓궂으십니다. 방금까지도 저희 딸을 카메오로 요청한다고 하셨으면서...”배석준은 말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발견했다.그들은 이상한 눈빛으로 배지유를 보고 있었고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비교하는 사람도 있었다.배지유는 엄청 민감해서 의식적으로 치마를 잡았는데 그들이 자신의 얼굴만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제야 천천히 손을 떼었다.“배 대표님 따님이 몇 명이세요?”석 대표가 물었다.“... 한 명입니다.”석 대표는 웃어 보이고는 볼 일이 있다면서 자리를 떴고 그가 떠나자 다른 사람들도 흩어졌다.“아빠! 저 사람들 무슨 뜻이에요?”“...”배석준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영문을 알게 되었다.배지유는 휠체어에 앉아있어 시선이 막혔지만, 배석준은 멀지 않은 곳에서 도아린을 데리고 인사를 나누는 주현정을 보았다.그들이 칭찬하는 사람은 배지유가 아니라 도아린이었다.“지유야, 여기서 아빠를 기대려. 아빠가 가서 엄마를 찾아볼게.”그는 배지유가 충격을 받을까 봐 그 자리에서 자신을 기다리라고 하고는 빠르게 걸어갔다.“주현정! 당신 지금 지유는 병원에 내버려 두고 도아린을 데리고 연회에 참가하고 있어? 당신 같은 엄마가 어디 있어?”손님들은 배석준의 표정이 안 좋은 것을 보고 자리를 피했고 주현정의 얼굴에 있던 웃음도 점차 사라졌다.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고 대답했다.“지유는 당신 같은 아빠만 있으면 돼요.”배석준은 목소리를 깔고 물었다.“앞서 당신은 외부인 하나 때문에 나랑 이혼하려고 했고 이제는 이혼 얘기를 하지 않으니 각종 방법으로 우리를 치욕스럽게 하고 있어. 당신이 다시 JS 픽처스를 운영하게 되었는데도 나한테 얘기
JS 픽처스의 고위인사는 배석준을 알고 있었기에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앞으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배 대표님, 또 해외로 가신 줄 알았습니다.”“현정이의 몸이 나아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좀 더 머물다가 가려고 합니다.”배석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평소에 연회에 거의 참가하지 않는 연예인들이 참석한 것을 보고 주현정이 JS 픽처스에서 지위가 여전히 굳건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들은 각종 이유를 찾아 함께 공식 석상에 나타나기를 거부했지만, 약속이나 한 듯 카메라 앞에서는 활짝 웃었다. 그들은 모두 주현정 덕분에 잘 되었기에 체면은 반드시 살려주어야 했다.“크흠.”배지유는 배석준에게 자신을 소개하라고 헛기침을 했다.“아, 우리 딸이 마침 해남대학교에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어서 데리고 왔습니다.”배석준을 둘러싼 고위인사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주현정은 배지유가 연예계의 나쁜 물을 먹을까 봐 현역일 적에 절대 배지유를 데리고 활동에 참석하지 않았다. 고위인사들도 그저 주현정에게 딸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본 적은 없었다.반응이 빠른 누군가가 술잔을 들며 공손하게 말했다.“따님은 주 대표님과 배 대표님의 우수한 점을 다 닮으셔서 단정하고 청초하십니다. 우리가 올해 새로 영입한 신인보다 예쁘신 것 같습니다.”“맞아요. 해남대학교의 대학원을 다닌다고 하시니 예쁘시고 학식도 많으시네요. 지금 업계에서는 이렇게 완벽한 인재를 제일 좋아합니다!”배지유는 칭찬을 듣고 얼굴이 발그레해졌고 그녀는 두 손으로 팔걸이를 잡고 살짝 몸을 앞으로 했다.“죄송합니다. 제가 발을 삐끗해서 일어서서 인사를 올리지 못하겠네요.”“별말씀을요. 발을 삐끗하면 잘 치료해야 해요. 젊고 예쁘신데 후유증을 남기면 안 되죠.”좋은 마음으로 한 말이지만 배지유의 마음속에서는 저주로 들렸다.그녀는 발 한쪽을 다친 게 아니라 다리 하나를 잃었다. 나머지 생은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다.배석준은 배지유의 성격을 알기에 그녀가 난리를 피울까 봐 얼른 다른 곳으로
주현정은 말투가 가라앉았고 표정이 엄숙했다.“남자의 내연녀로 이십몇 년을 있다가 아이까지 낳았는데도 결혼을 하지 못했으니 어른이 화병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가 있나. 도아린의 양아버지는 양어머니의 혼수를 가로챈 것도 모자라 목숨까지 위협했어.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은 딸의 효도를 받을 자격 없어!”현장에는 여자 연예인들도 많았다.같은 딸의 마음으로 이렇게 심란한 일들이 있었는데 어떻게 효도를 할 수 있겠는가?그들은 도아린이 매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도아린이 양어머니를 위해 복수를 했다고 여겼다.강홍련은 주위 사람들이 모두 도아린의 편을 드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은 견딜 수 있지만 방금 자신의 말이 강씨 가문에게 영향을 줄까 봐 두려웠다.그녀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도아린은 단호한 눈빛으로 목소리를 높였다.“강씨 어르신은 사적인 감정으로 공적인 자리에서 복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강씨 어르신께서 좋은 마음으로 당신을 받아주었는데 당신은 밖에서 어르신의 명성이나 흐리고 다니면 안 되죠. 농부와 뱀의 이야기를 재희 씨도 들어봤을 거로 생각해요.”도아린은 강씨 어르신의 편에 섰는데 강재희는 반박할 수 없었다.여론에서 아버지의 대회에 흑막이 있다는 일로 들끓던 것이 금방 사그라들었는데 강홍련 저 멍청이 때문에 다시 수면으로 올라왔다.주현정은 도아린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조금도 용납할 수 없었다.“도아린은 제 딸이고 JS 픽처스의 후계자예요. 강씨 가문에서 이렇게 제 딸을 치욕스럽게 하다니, 저희 협력은 앞으로 계속하지 않을 생각입니까?”강재희는 눈썹을 꿈틀했다. 그녀는 도아린이 연회에 참가한 것은 단지 주현정과 예전에 시어머니와 며느리 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주현정이 도아린을 딸로 삼고 JS 픽처스의 후계자로 생각한다는 것은 예상치 못했다.만약 도아린과 모순이 격화된다면 앞으로의 협력에는 장애가 생길 것이다.“강홍련 씨, 사과해요!”강홍련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강재희는 지금 자신을
도아린의 표정은 아주 평온했다.진열대에 있는 다이아몬드의 빛이 꺾이어 그녀의 눈동자를 비춰 유독 눈부셨다.강홍련은 그녀의 앞으로 가서 섰다.강홍련은 도아린보다 머리 하나쯤 작아서 고개를 들어 도아린을 바라보았는데 도도한 척하는 모습이 광대 같았다.“네가 JS 픽처스에게 ‘봉황의 시대’를 광고하도록 넘겼는데 강씨 가문의 고급 주얼리들은 모두 JS 픽처스의 연예인들이 광고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했어. ‘봉황의 시대’와 JS 픽처스의 연예인이 동시에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당연하게 ‘봉황의 시대’가 강씨 가문의 것으로 생각하게 될 테지.”이게 바로 연예인을 찾아 광고하는 이유였다.예를 들어 어떤 톱스타가 운동화의 모델이 되었다면 그가 나타났을 때 팬들은 어떤 브랜드의 신발을 신었는지 알게 된다. 따로 브랜드를 찾아볼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도아린은 도덕과 재능을 겸비한다는 말로 강씨 가문에게 치욕을 안겨주었지만 결국은 강씨 가문이 이득을 보게 되는 것이다.“강씨 가문에서 이득을 보는 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죠?”도아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나는 강씨 가문의 사촌이야!”강홍련은 불쑥 얘기했다.“강씨 가문에서 손보미를 밀어준다면 배건후와 결혼할 수 있어. 강씨 가문에서 안씨 가문을 지지한다면 내 아들은 안씨 가문의 딸과 결혼할 수 있는 거야!”“그래서요.”강홍련은 도아린이 모른 척할 줄 몰랐고 그녀의 코에 대고 얘기했다.“그래서 나한테 잘하라고. 그러면 강씨 가문에서는 네가 해남에서 살아나갈 기회라도 줄 수 있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너의 대회 성적을 조작하는 것은 물론 너를 디자인 업계에서 쫓아내는 것도 일이 아니지. 내 삼촌 강태식은 이 바닥을 꽉 잡고 있어. 내 삼촌이 뭐라고 하면 그대로 따라야 하는 거야. 너의 ‘봉황의 시대’도 잘난 척할 거 없어. 언론에서 만들어준 것뿐이야. 만약 삼촌의 학생들이 다 그게 별로라고 얘기한다면 너를 따르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질 거야!”많은 손님이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다가 강홍련의 지나친 말에 시선을 두
“아빠가 방법을 대서 가볼게. 너는 오지 마.”배석준은 배지유가 걱정되었다. 지난번에 배지유가 밖으로 나갔다 왔을 때도 돌아와서 다리가 아파 잠이 들지 못했다.배지유는 붉어진 눈으로 애원했다.“제 친구들은 제가 아직 안에 갇혀있는 줄 알아요! 아빠랑 제가 함께 엄마의 연회에 간다면 매체에서는 저희 세 식구의 화목한 모습을 찍게 될 것이고 소문들은 자연스레 사그라질 거예요!”배석준은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딸의 명성은 도아린 때문에 엉망이 되었다.돌이킬 방법을 계속 찾지 않는다면 배지유가 해남대학교로 돌아갔을 때 반드시 동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조롱당할 것이다.“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메이크업과 코디를 해줄게.”배석준이 데리고 온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김지민이었다.김지민은 연예계를 잘 아는 사람이라 참석하는 연예인들이 무슨 브랜드를 입었는지 알아냈다. 배지유는 똑같은 옷을 입으면 안 됐고 다리의 흉터를 가릴 수 있으면서 예쁘고 매력적이어야 했다.이 부분에서 김지민은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배지유는 만족스럽게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다.그녀의 치마를 들지 않는 이상 그녀가 다리 하나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물어보면 발을 삐끗해서 휠체어를 탔다고 하면 될 것이다.이런 장소에 김지민은 절대 나타나서는 안 되므로 부녀가 떠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연회장의 중심에는 도아린이 검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고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는 현장에 있는 연예인들의 시선을 끌었다.이 여자의 아름다움이 너무 지나쳤다.연예계의 스타들은 자주 레드카펫을 밟고 시상식에 참가하므로 어떻게 분위기를 휘어잡는지를 잘 알고 자신이 어느 각도에서 가장 예쁘게 찍히는지도 알고 있었다.도아린은 처음 보는 얼굴이고 업계에 대해 영향력이 큰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다 자신감이 넘쳤다.그녀가 스크린 앞으로 가서 사인할 때 스크린에는 ‘봉황의 시대’의
도아린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그녀의 덤덤한 눈빛은 ‘라윤주’의 이름을 듣고 초점을 잃었다.“뭐라고요?”“...”육하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두 사람은 잠시 침묵하다가 육하경이 말을 이었다.“향 주머니로 화를 면한 것은 우연이에요. 정말 저를 도왔던 것은 세인트존스 호텔의 책임자가 되게 만들었던 것이죠.”육하경은 입꼬리를 올려 조롱하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어르신들을 3일이나 괴롭혀서야 알아냈어요. LY에서 저를 후임자로 추천했다고 하더라고요.”육하경의 학업은 각 부분에서 다 뛰어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고 육씨 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실력이 좋을 뿐만 아니라 빽빽이 필요했다.육민재를 예로 들어보면 능력은 가장 뛰어나지 않을지는 몰라도 맏아들의 장손 혈통을 이어받아 어렸을 때부터 최고로 좋은 자원과 경험을 쌓을 기회들을 누리고 있었다. 이변이 없다면 그는 육씨 가문의 후계자일 것이다.다른 사람들이 두각을 나타내려면 모든 게 알맞게 부합되어야 한다.육하경은 모든 것을 통찰하고 있었고 육씨 가문의 산업에 기대를 두지 않아 오랜 시간 밖에서 떠돌며 공부를 했고 자신의 사업을 하고 싶었다.세인트존스 호텔의 관리 권한이 그의 손에 들어갔을 때, 그는 기쁘기도 놀랍기도 했다.놀란 마음으로 육하경은 전임자를 찾아갔고 온갖 방법을 다 써서야 LY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육씨 가문 뿐만 아니라 많은 명문가가 LY와 관계가 있었고 그들은 인재를 추천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을 도와주었기에 자연스레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육하경은 그때 손에 향 주머니를 들고 있었는데 전임자가 이상해하며 무늬를 찍어서 물어보았는데 그것은 ‘추천서’라고 하는 것이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하경 씨가 말하는 그 이야기에도 관심 없습니다.”도아린은 책을 육하경에게 돌려주고는 차 문을 열었다.“도아린 씨!”육하경은 그녀를 잡고 싶었지만, 손을 허공에 멈추고 결국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육하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