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하경은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지만 보안 요원의 반응을 보니 도아린이 분명 곤란한 상황에 처한 것 같았다.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반성문 작성해서 제출하세요.”“네, 네! 바로 하겠습니다!”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보안 요원은 문을 잡고 육하경과 도아린이 들어갈 수 있도록 공손히 배웅했다.그들이 탄 엘리베이터가 닫히자 바로 옆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그곳에서는 성대호와 배건후가 걸어 나왔고 성대호는 초대장을 보안 요원에게 건네며 연회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아까 먼저 기다리라고 한 말... 무슨 의미였어?”배건후는 냉정한 눈빛으로 답했다.“말 그대로의 의미.”성대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역시 다시 시작하려는 속셈이구나.’손보미가 울고불고하며 난리를 치면 배건후는 언제나 그녀에게 무한한 배려를 해왔다.‘아린 씨에게 자리 배정을 끝냈다고 말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이 자리가 다시 손보미에게 넘어갔다가 상황이 퍽 난감해졌겠어...’도아린을 위해 몇 마디 하려다 성대호는 배건후의 어두운 표정을 보고는 그만두기로 했다.대신 그는 핸드폰을 꺼내 육하경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우리 도착했어. 이제 팀장 된 거 티 좀 내는 거냐? 빨리 마중 나와.]아래층에서 육하경은 도아린에게 옷을 건네며 말했다.“문 잠그고 갈아입고 내가 오면 열어줘요.”육하경의 배려는 섬세했지만 너무 친근하진 않아 도아린은 편안함을 느꼈다.“고마워요.”육하경이 방을 나가자 옷을 가져온 사람이 도아린의 뒷모습을 보더니 참지 못하고 말했다.“팀장님, 여자친구분 몸매가 너무 좋으시네요.”“입 다물어요.”육하경의 귀가 붉어졌다.그때 핸드폰이 진동했고 그는 메시지를 받았다.하지만 육하경은 바로 확인하지 않고 보안 요원을 찾아 상황을 물어봤다.도아린이 한 여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는 말을 들은 그는 CCTV 영상을 확인했다.도아린을 괴롭힌 여자는 다름 아닌 그에게 접근하려다 실패해 온몸에 주스를 쏟아낸 여자였다.또다시 성대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여자친구도
육하경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 성격에 그럴 리가 없지.”성대호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듯 말했다.“그래도 아직 공개하지 말고 적어도 우리 둘한테 먼저 보여줘야지. 요즘 여자들 수법이 대단하다고!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치밀하게 계획한 덫일 수 있어!”“어쩌면 동시에 여러 명과 만나면서 누가 더 능력 있는지 보고 결정하는 걸지도 몰라. 여자들은 겉으로는 온순하고 착해 보여도 사실은 속에 날카로운 가시가 숨어 있거든!”여태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배건후는 그 말을 듣고 눈빛이 더 어두워졌다도아린 역시 무해한 토끼에서 손댈 수 없는 고슴도치로 변해버렸다.“맞는 말이네.”그는 동의했다.성대호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 사람은 사랑과 미움을 분명히 할 줄 아는 사람이야. 공을 다투지도, 타협하지도 않아. 이런 여자는 세상에 드물지. 이런 사람을 숨기는 건 진주를 먼지 속에 묻어두는 거랑 같아.]육하경의 말에 성대호는 놀라서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대체 어떤 여자길래 그동안 늘 신중하던 네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냐? 꼭 확인해봐야겠어. 좋은 건 다 조용히 가져가겠다는 거야?”[난 못 믿어. 직접 봐야 네 말이 맞는지 확인할 수 있지.][얼굴 안 붉어지게 조심해.]배건후는 연회장을 둘러보며 도아린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성대호도 그의 시선을 따라가며 말했다.“설마 배지유도 데리고 왔냐? 너 하경이랑 지유가 함께 하는 거 반대하지 않았어?”“지유는 도아린과 함께 왔어.”성대호는 말문이 막혔다.‘손보미랑 겨우 끝내놓고 아린 씨랑 연회에 참석하다니... 대체 이 남자 머릿속엔 뭐가 들어있는 거야?’배건후가 다시 한번 연회장을 확인했지만 도아린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하여 바로 도아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는 꺼져 있었다.표정이 차갑게 굳어지더니 배건후는 조수현에게 전화를 걸었다.“도아린도 연회에 왔어?”“사모님은 아가씨와 함께 들어가셨습니다.”조수현이 대답했다.“저는 밖에 있었지만 사모님이 나가시는 걸 보지
배건후는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말도 안 돼.”“뭐가 말도 안 돼요!”배지유의 눈가가 붉어졌다.“오자마자 새언니가 어딨냐만 물어보고... 오빤 왜 나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해요?”“또 무슨 사고 쳤냐고 물어볼까, 그럼?”“오빠 눈엔 내가 항상 사고만 치는 애로 보여요?”배지유는 발을 동동 구르며 화를 냈다.“아까 난 휴게실에서 사람도 구했다고요!”그러자 배건후는 피식 콧방귀를 뀌었다.“네가 사람을 구했다고?”“그래요! 됐어요! 난 못해요! 난 새언니 화나게 할 줄만 알지 아무것도 할 줄 몰라요. 됐어요?”배건후는 배지유의 눈을 몇 분 동안 응시하더니 몸을 돌려 걸어갔다.그가 떠나자마자 배지유는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이번엔 운이 좋았다.도아린에게 문을 열어주러 갔을 때 안에 기력이 약해 보이는 여자가 있었다.원래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그 여자가 계속해서 감사 인사를 하길래 어쩔 수 없이 좋은 일을 하는 척 받아들였다.덕분에 배지유는 다행히 배건후의 의심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그때 재벌가 여성들이 다시 다가왔다.“대표님이 칭찬해 주셨죠? 이제 갓 졸업했는데 모건 그룹의 이미지를 이렇게 긍정적으로 만들어 주셨잖아요.”“어디서 들었는데 진 대표님께서 연성에서 프로젝트를 준비한대요. 모건 그룹이랑 협력하게 될 거라고 하더라고요.”이 말에 배지유는 마음이 동했다.“진 대표님께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에요?”“그럼요. 해남의 스카이 빌딩도 진 대표님을 끌어들이려 했대요. 진 대표님께서 연성에 온 건 협력자를 찾으려는 게 틀림없어요.”“지유 씨가 진 대표님의 아내분을 구했으니 무슨 요구를 해도 지나치지 않을걸요?!”“맞아요. 게다가 하임리히법까지 할 줄 알았다니! 진짜 대단해요.”배지유는 속으로 흐뭇해졌다.‘만약 진 대표님과 협력할 수 있다면 내가 서류를 유출한 일도 오빠에게 말할 수 있을 거야. 공이 있으니 오빠가 크게 나무라지 않겠지.’“먼저 이야기 나누세요. 저 전화 한 통만 걸고 올게요.”배지유는 고개를
여자는 반응할 새도 없이 머리카락이 잡혔다.그 힘이 너무 세서 두피가 벗겨질 뻔했다.“너 한 번 더 하경 오빠 귀찮게 하면 내가 제대로 혼내줄 테니까 두고 봐!”“배지유 씨?”배지유의 눈은 질투로 붉게 물들어 더 이상 적과 아군을 구분할 수 없었다. 그녀는 여자의 얼굴을 향해 또다시 손을 휘둘렀다.“내가 누군지 알긴 알아?!”“지유 씨, 저예요!”여자는 배지유의 손을 붙잡고 얼굴을 들어 보였다.“아까 지유 씨 대신 도아린을 혼내준...”“닥쳐!”배지유는 그녀를 알아보았다.얼굴이 좀 부어 있었지만 여전히 아첨하는 표정이었다.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백 번을 도와준다 해도 육하경을 탐내는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네가 무슨 일을 했든지 상관없어. 너가 은하계를 구했더라도 하경 오빠를 귀찮게 할 수는 없어. 하경 오빠는 내 거니까!”“배지유.”육하경은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그만해.”“난 장난이 아니에요!”창백했던 얼굴이 다시 붉어지며 배지유는 화를 냈다.“하경 오빠, 내가 겨우 우리 오빠한테 부탁해서 여기 온 건데 어떻게 다른 여자랑 춤을 출 수가 있어요?”육하경은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이분이 나한테 옷을 준 건 아까 실수로 나한테 과일 주스를 쏟아서 그런 거야. 오해하지 마.”육하경의 말에 여자는 속으로 생각했다.‘지금 나 변호해주는 거야? 아니, 이건 불에 기름을 붓는 꼴이잖아!’배지유의 눈은 금세 커졌다.“이런 교활한 수작을 부릴 줄이야!”곧 배지유는 여자의 머리카락을 잡아 테이블에 박으며 외쳤다.“네가 감히 발칙하게 굴어? 제대로 혼내줄게!”“아!”테이블 위에 있던 술병이 땅에 떨어져 깨지며 요란한 소리가 났고 연회장은 엉망진창이 되었다.주변의 손님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피했고 어떤 이들은 경멸하는 표정을 지으며 어떤 이들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혼란스러워했다.“배지유!”성대호가 다급히 달려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어서 그만둬!”그는 배지유에게 눈짓을 보내며 진정하라고 했다. 그러나 배지유
“안 돼!”배지유는 미친 듯이 달려와 육하경의 명함을 빼앗아 두 동강 내며 외쳤다.“어떻게 저 여자한테 개인 번호를 줄 수 있어요?!”결국 배건후는 배지유의 손목을 붙잡고 강제로 연회장 밖으로 끌고 나갔다.“책임자.”책임자를 부르는 육하경의 눈빛에는 평소의 부드러움이 사라진 상태였다.“이분을 병원에 모셔다드리세요. 치료비는 제가 부담하겠습니다.”“육 팀장님...”“이쪽으로 가시죠...”그렇게 연회 책임자는 여자를 데리고 뒷문으로 나갔다.성대호는 육하경에게 뭔가 말하려다 배지유가 또 혼날까 봐 입을 다물고 뒤따라 나갔다.“건후야, 너 지유 너무 겁주는 거 아니야?”성대호는 배지유를 뒤로 숨기며 말했다.“지유가 잘못한 건 맞지만 제대로 타이르고 말해줘야지.”그는 한숨을 쉬며 배지유를 보고 답답한 듯 말했다.“아무리 화가 나도 사람을 때리면 안 돼. 그 사람도 연회장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면 분명 신분이 보통이 아닐 텐데 네가 공개적으로 창피를 주면 건후가 회사 관리하기 어렵잖아.”“...”하지만 배지유는 억울한 듯 여전히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그 여자가 먼저 하경 오빠를 꼬셨잖아...”“하경이는 뛰어나니까 세인트존스 호텔 총괄 팀장 자리에 오른 거야. 정말 하경이랑 함께하고 싶은 거라면 하경이의 좋은 조력자가 되어야지 발목을 잡는 사람이 되면 안 돼.”배지유는 만약 배건후가 성대호처럼 자신에게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더라면 자기 말을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배건후는 조금 전 너무 무섭게 혼내며 소리쳤다. 그래서 배지유는 더욱 반항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이다.배지유는 배건후와 대화를 시도하려 했지만 그 주위에 감도는 차가운 기운이 가까이 다가가기를 망설이게 했다.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자신에게 이렇게 화가 난 이유가 너무 큰 실수를 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도아린을 배건후에게 넘기지 않아서 화풀이를 하는 건지 말이다.그때 핸드폰이 울렸고 배지유는 화면을 보고 눈이 번쩍였다.그녀는 웃으며 전화를
“굳이 만나지 않아도 돼요.”도아린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그저 작은 도움을 드린 것뿐이에요.”“생명보다 중요한 건 없죠.”육하경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그분께도 참 안타까운 사연이 있더라고요.”진 대표의 아내라는 윤명희는 두 아들을 낳고 셋째 아이로 어렵게 딸을 얻었지만 첫돌 잔치에서 딸을 당했다고 한다.그 사건 이후로 윤명희는 우울증에 걸려 정신 상태가 오락가락했다. 진씨 가문은 막대한 돈을 들여 딸을 찾았지만 20년이 넘도록 찾지 못했다.일부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지만 윤명희는 언젠가 딸을 만날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딸이 좋아했던 사탕을 항상 가지고 다니며 딸을 찾으면 그 사탕을 주고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고 싶어 했다.도아린은 자신의 어머니도 양수 색전증으로 돌아가신 일을 떠올리며 윤명희의 슬픔이 깊이 마음에 와닿는 듯했다.그녀는 가슴이 아파져 윤명희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었다.“알겠어요. 만나러 갈게요.”...“빨리 말해봐. 어떻게 사람을 구한 거야?”차 안의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조수석에 앉은 성대호가 먼저 배지유에게 말을 걸었다.그러자 배지유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자랑스럽게 말했다.“그때 좀 다쳐서 휴게실에서 상처를 확인하려고 했는데 소파에 누군가가 있더라고. 그래서 내가 하임리히법으로 그 사람을 구했지.”성대호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어린 나이에 하임리히법도 할 줄 알아? 나도 못 하는데.”“우리 학교에서 가르쳐줬어. 게다가 TV에서도 많이 봤잖아.”배지유는 인터넷에서 배운 방법을 흉내 내며 말했다.“이렇게, 힘을 줘서 확 눌러.”성대호는 뒤를 돌아 배건후를 봤지만 배건후는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아 아무 말도 듣지 않는 듯했다.“아린 씨가 그리 쉽게 사라지겠어? 지유가 사람 목숨을 구했는데 넌 칭찬도 안 해?”성대호가 배건후에게 말했다.하지만 배건후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핸드폰을 꺼내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무슨 소식 있어?”“객실에
진범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배지유를 향해 말했다.“제 아내가 방금 깨어났으니 두 분은 이쪽에서 잠시 쉬세요. 제가 배지유 씨를 데리고 아내에게 가겠습니다.”진범준은 배지유에게 안쪽 방으로 가자는 신호를 보내고 도우미에게 손님들에게 차를 대접하라고 지시했다.배건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성대호는 다소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구해준 사람의 오빠도 병문안 못 하게 하다니... 대체 누굴 경계하는 거야?”그러자 차를 내오던 도우미가 웃으며 설명했다.“저희 대표님께서는 사모님을 매우 아끼십니다. 사모님께서 방금 깨어나셔서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이 정돈되지 않았을까 봐 두 분이 보시고 놀라실까 봐요.”즉, 아내가 집에서의 편안한 모습이 외부 남자들에게 보여지기엔 부적절하다는 의미였다. 이건 확실한 보호욕이자 소유욕이었다.배건후는 성대호를 한 번 쓱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너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지.”“아니야!”성대호는 심장이 순간적으로 철렁했다.“내내 지유를 감싸고 있었잖아. 또 무슨 사고 친 거 아니야?”성대호는 깨달았다. 배건후는 차 안에서 아무것도 듣지 않은 게 아니라 그들의 대화를 일부러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아니야. 배지유는 아린 씨가 연회에 안 간 게 자기 때문이라고 네가 오해할까 봐 걱정한 거야. 사실은...”하지만 배건후가 피식 콧방귀를 뀌었고 성대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한편 병실 안.윤명희는 멍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듯한 표정이었다.발소리가 병상 옆에서 멈추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여보, 배지유 씨가 당신 보러 왔어.”진범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윤명희의 침대 머리를 높여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그들 부부의 다정한 모습을 보며 배지유는 더욱 자부심이 느껴졌다.자신이 우연히 윤명희를 구한 덕분에 배건후의 큰 사업을 성사시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사모님.”배지유는 침대 옆으로 다가가 손을 잡으며 말했다.“배지유라고 불러주세요.”윤
“사실 저는 부족한 게 없지만 진 대표님께서 성의로 주신다면 감사히 받을 순 있을 것 같아요.”배지유의 이 말은 모건 그룹과 협력을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합리적으로 들렸다.하여 진범준은 살짝 미소 지으며 블랙 카드를 내밀었다.“이건 한도가 없는 블랙카드입니다. 배지유 씨의 은혜에 보답하는 작은 성의입니다.”그러자 눈빛이 반짝이더니 배지유는 얼른 카드를 받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그럼 사모님을 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두 사람이 방에서 나오자 성대호는 재빨리 일어섰다.배지유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것을 보고는 안심하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혹시라도 배지유가 경솔하게 말을 잘못했을까 봐 걱정했던 것이다.“사모님은 괜찮으셔?”“아주 좋았어.”배지유는 성대호에게 장난스럽게 윙크하며 말했다.“진 대표님,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조심해서 가세요. 배 대표님, 나중에 차 한잔하시죠.”“좋습니다. 또 뵙겠습니다.”그렇게 배건후는 진범준과 다시 악수를 나누며 인사를 건넸다.병실을 나선 후, 성대호가 웃으며 말했다.“칭찬받으니까 그렇게 기뻐?”“당연하지!”배지유는 배건후를 힐끔 보며 불만스럽게 말했다.“우리 오빠는 나 한번도 칭찬해준 적 없거든.”결국 성대호가 대신해 그녀의 편을 들며 말했다.“지유는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제일 신경 써. 네가 한마디 칭찬해주면 남들이 열 번 말하는 것보다 효과가 클걸.”곧 배건후의 어두운 시선이 배지유의 얼굴에 떨어졌다. 마치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배지유는 순간적으로 가방을 꽉 쥐었다.“나 피곤해. 먼저 병실로 돌아갈게.”그녀가 입원한 곳도 윤명희와 같은 병원이었다.배건후가 자신을 칭찬해주지 않으니 배지유는 주현정에게 가서 위로를 받으려고 했다.여전히 배건후는 손에 핸드폰을 꽉 쥔 채 있었다.육하경이 보낸 몇 장의 사진을 확인했지만 그들 중 누구도 도아린이 아니었다.도아린이 일부러 자신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슨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그는 한
“그럼요.”도아린은 오늘 회의를 위해 미리 준비를 해두었다.그녀는 한 비서에게 전화와 프로젝터를 연결하라고 지시했다. 곧 대형 스크린에 배건후가 장수현에게 문서를 전달하는 장면이 그대로 나타났다.변호사로서 의뢰인이 유언장 같은 문서를 작성할 때, 분명 녹화도 요구했을 것이었다.장수현에게 모든 것을 전달한 후, 배건후의 시선이 카메라로 향했다.그의 눈빛은 깊고 날카로웠으며 자세는 단정하고 위엄이 넘쳤다. 그저 영상 속 모습만으로도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압박감을 느꼈다.주현정은 주먹을 꽉 쥐며 애써 눈물을 참았다.더 이상 아들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도아린은 제 전처입니다. 나는 도아린 씨가 모건 그룹을 잘 이끌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도아린 씨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저를 의심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번 임명은 변경되지 않으니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는 사직서를 제출하세요!”일부 사람들은 도아린의 대표 승임을 저지하기 위해 회사를 협박하며 집단 사직서를 제출할 생각이었지만 배건후의 말을 들은 후, 그들은 도리어 잠시 망설였다.그의 말은 결코 농담이 아니었음을 모두가 알고 있었고 이 시점에서 사직을 한다면, 그것은 회사 명령에 불복하는 것이었다.가벼운 처벌로는 모건 그룹에서 영원히 일할 수 없을 수도 있고 심할 경우 업계에서 일자리를 찾는 것조차 어려워질 것이다!그 누구도 자신의 경력을 걸고 이런 위험을 감수할 용기가 없었다.모두가 망설이면서도 자신들의 자리를 잃는 것에 불만을 가진 채, 도아린이 자신의 머리 위로 올라설 수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도아린은 세 개의 서류를 꺼내 민철홍, 신 대표, 그리고 다른 책임자에게 각각 전달했다.“모건 그룹은 배 대표 혼자만의 회사가 아닙니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죠. 여러분은 제가 회사를 망치고 여러분이 고생해서 쌓아온 기반을 무너뜨릴까 봐 걱정하시는데, 저도 충분히 이해합니다.”그녀는 책상
민철홍은 종종걸음으로 뒤따르며 대답했다.“네, 다 준비됐습니다!”대문 앞에 있던 사람들은 자동으로 길을 터주며 주현정과 도아린이 대형 홀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회의실 안에서, 도아린은 테이블에 둘러앉은 경영진을 살펴보다가 한 사람의 부재를 눈치챘다.‘우정윤!’그는 특별 보좌관으로 새로운 경영진과의 연계를 담당했어야 했고 사직했다고 해도 대행 총괄인 신 대표가 그를 쉽게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게다가 해남에서 도아린이 장수현을 만났을 때도 우정윤은 나타나지 않았다.‘어디에 있는 걸까?’도아린은 휴대폰을 꺼내 문자를 써서 일북에게 전달했고 일북은 확인 후 바로 회의실을 나갔다.“모두 모였네요, 이제 발표하겠습니다.”주현정이 마이크를 켜고 입을 열었다.“여러분도 알다시피, 배 대표가 교통사고를 당해 일정 기간 요양 중입니다.”“이 기간 동안 외부에서 떠도는 소문은 많지만 하나하나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어제 민 사장님께서 경영진을 대표해 배 대표를 찾아갔습니다.”테이블에 앉아 있는 임원들의 시선이 모두 민철홍에게 집중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의 표시를 보였다.“회사의 정상적인 운영을 위해, 배 대표는 본인이 보유한 모든 주식과 경영권을 도아린 씨에게 이전하기로 결정했습니다.”주현정이 도아린에게 손을 내밀자, 도아린은 모두가 잘 볼 수 있도록 일어섰다.회의실은 잠시 침묵이 흘렀고 모두가 상황을 이해한 후, 눈앞의 여자가 바로 배건후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임을 깨닫자 회의실은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일부는 도아린이 이 직무를 맡을 자격이 없다고 의문을 제기했고 또 다른 이들은 이 결정 자체에 의문을 품었다.“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에게 자신의 권력을 넘겨준다고?”“아니면 강요당한 것일까? 혹시 뭔가 음모가 숨어 있는 게 아니야?”수군거리는 사람들 속에서도 도아린은 당황하지 않고 여유 있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그 모습을 본 주현정은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더욱 확신했다.‘배지유가 도아린 절반만 닮았어도...’그녀
집에 돌아온 후, 도아린은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한 뒤 피곤함에 몸을 맡기며 잠에 들었다.꿈속에서 그녀는 사고가 나던 날로 돌아갔다. 구급차에 누워 있는 자신과, 두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감싸며 귀에 대고 속삭이는 배건후의 모습이 보였다.하지만 배건후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었고 그녀는 배건후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었지만 눈을 뜰 수 없었다.갑자기 도아린은 비명처럼 낮게 소리치며 꿈에서 깨어났다.그때 옆 방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일북은 그녀의 안전을 위해 가장 가까운 방에 있었지만 방 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악몽에서 깨어난 도아린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쾅!번개가 치고 그 뒤로 낮게 울리는 천둥소리가 들렸다.도아린은 발코니로 가서 창문을 닫으려다 갑자기 아래 전봇대 근처에 서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남자는 검은 코트를 입고 야윈 체격을 감췄으며 고개를 숙인 채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다른 손에는 담배를 물고 있었다.그는 깊게 한 모금 들이킨 후,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담배꽁초를 꺼내 꾹 눌러 끄고는 다시 걸어갔다.쾅!다시 번개가 치자 그 검은 그림자는 밤의 어둠 속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도아린은 창문을 확 열고 머리를 내밀었지만 그 남자는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그는 약간 다리를 절뚝거리는 듯 보였고 크고 굵은 빗방울이 코트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남자는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괜찮으세요?”일북이 소리를 듣고 방으로 다가왔다.“혹시 돌아오는 길에, 집 아래에서 사람 본 적 있어?”도아린이 급히 물었다.일북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예, 나이 든 남자가 있었어요. 전화하면서 사투리 쓰고 있었어요.”‘나이든 남자?’배건후는 원래 연성 출신이라 가끔 그 지역 특유의 억양을 쓸 뿐 사투리는 쓰지 않았다.도아린의 눈빛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아무 일도 아니야, 아마 내가 너무 예민했나 봐. 계속 누군가가 감시하는 느낌이 들어서.”일북은 방으로 돌아갔다가 이내 다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도아린은 머릿속에서 그 마지막 말을 계속 반복하며 마치 차가운 바다 깊이 빠져든 듯한 무력감을 느꼈다.‘건후 씨가 죽었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나중에 나한테 해줄 얘기가 많다고 했잖아. 어떻게 그 약속을 어길 수 있어!’“아린아, 도아린!”주현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도아린을 몇 번이나 불렀지만 반응이 없자 그녀의 손을 잡았다.“건후 씨가 죽을 리 없어요.”도아린은 중얼거리듯 말했다.“그럴 리 없어요... 어떻게 죽을 수 있죠? 약속을 지키지 않을 사람이 아닌데, 나한테 할 얘기가 아직 많다고 했잖아요!”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감정이 격해져 주현정의 어깨를 잡고 힘껏 흔들었다.“절 속이는 거죠? 건후 씨는 살아 있어요! 혹시 얼굴을 많이 다쳐서 못 나온 건가요? 아니면 불구가 돼서? 아니면 기억상실증에 걸린 건가요? 건후 씨가 죽을 리 없잖아요!”“아린아...흑흑...”두 여자는 서로 부둥켜안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도아린은 가슴이 답답해지며 마치 무언가 꽉 막힌 듯 괴로웠다. 갑자기 그녀는 주현정을 밀쳐내고 돌아서서 헛구역질하기 시작했다.급히 온 탓에 아무것도 먹지 못한 그녀는 헛구역질만 하며 숨이 가빠졌다.주현정은 급히 생수를 건넸지만 그마저도 마신 뒤 토해냈다.주현정은 도아린의 등을 토닥이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배건후와 도아린은 결혼 이후 다른 부부들처럼 알콩달콩한 결혼 생활을 보내지 못했고, 결국 이렇게 되자 그녀는 아들이 도아린을 소홀히 대해온 것이 마음이 아팠다.도아린이 아들을 위해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서 주현정은 위로를 받았지만 도아린을 걱정하는 마음이 더 컸다.“아린아, 건후는 헛되이 죽지 않을 거야! 나는 반드시 그놈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도아린은 온몸에 힘이 빠져 겨우 일어섰다.“어머님, 할 말이 있어요.”그녀는 눈물을 닦고 감정을 추스르며 배건후가 자신에게 남긴 두 가지 서류를 꺼내 들었다.서류를 확인한 주현정은 아들이 이런 계
“대호 오빠! 내 발... 발이 부러진 것 같아...”“입 닥쳐!”성대호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꾸짖었다.“멍청한 것!”그가 다시 속도를 올리자 차 밑으로 목발이 들어가며 뒷바퀴가 갑자기 튕겨 올라갔다.“악!”배지유의 종아리가 완전히 부러졌다.차 문이 열린 채로 도로를 질주하던 차는 바로 교통경찰의 눈에 띄었다. 두 대의 경찰 오토바이가 곧바로 추격하며 외쳤다.“앞차, 멈추세요! 0731차량 소유자, 즉시 멈추세요!”백미러로 잠시 상황을 살피던 성대호는 핸들을 꽉 쥔 채 교차로를 지나면서 급히 왼쪽으로 핸들을 꺾었다.배지유는 심한 통증에 의식이 흐려져 갔지만 본능적으로 의자에 매달려 온 힘을 다해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차는 급하게 방향을 틀었고 관성에 의해 결국 차 밖으로 떨어졌다.“끼익.”뒤에서 달리던 차는 도로에 사람이 떨어지자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뒤따라오던 차들은 미처 브레이크를 밟지 못하고 추돌했다. 결국 앞차는 큰 충격을 받아 앞으로 밀렸고 배지유 다리 위로 덮쳐왔다.“아악!”성대호는 여전히 미친 듯이 도망쳤고 다음 교차로를 향하던 중 경찰차와 경호원들에 의해 마지막 도망길도 차단당했다.“차에서 내리세요! 당신을 위험 운전 혐의로 체포하겠습니다!”휴게실 안,소식을 들은 주현정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내 도아린에게도 상황을 전했다.도아린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성대호는 자신이 받은 증거가 배건후가 일부러 넘긴 것임을 알게 된 뒤 숨었어요. 건후 씨는 이미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 어머님께는 아무 얘기도 안 하던가요?”주현정은 고개를 저었다.“내가 배석준이랑 이혼한 후, 건후는 나와 일부러 거리를 두었어. 내가 그와 만난 횟수는 널 만나는 것보다 적었어! 건후도 참... 무슨 일이 있으면 가족들에게 말해서 상의하지...”도아린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가족?’‘배지유처럼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가족은 오히려 재앙을 불러오는 존재일 뿐이지.’‘
민철홍은 무표정한 얼굴로 배지유를 한 번 쳐다본 후, 다른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다들 돌아가서 자신의 자리 지키세요! 이전에 맡았던 프로젝트는 차질 없이 진행하도록 하고 잘 되면 배 대표님께서 보상이 있을 겁니다. 다만 제자리를 못 지키고 딴 궁리를 한다면 짐 싸서 나가야 할 거예요!”말을 마치고 그는 주현정에게 인사를 한 뒤 자신의 사람들과 함께 떠났다.“민 사장님!”배지유가 크게 외쳤지만 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고 남은 사람들은 서로 말없이 눈치를 봤다.‘민 사장 말 들으니 큰 문제가 없나 보네.’‘아마 얼굴의 상처가 심해서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건가 봐.’‘지금은 함부로 행동하면 안 되겠네. 나중에 책임을 물으면 어려워질 테니까.’곧, 병원 복도에는 배지유만 남았다.그녀도 더는 제 편이 없다는 걸 깨닫고 더 이상 버티지 않고 돌아가려 했다.“배지유를 지금 당장 집에 데려가!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외출하지 못하게 해!”주현정이 싸늘한 어조로 명령했다.“네! 알겠습니다!”한 경호원이 휠체어를 밀기 위해 나섰다.배지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저항했다.“집안에 감금하는 건 불법이야!”“이게 다 널 위해서야. 더는 네가 그놈들이랑 손잡고 회사를 구렁텅이에 밀어 넣고 네 오빠의 목숨을 노리게 할 수는 없어! 너 정말 남은 생을 감옥에서 보내고 싶어?”“내가 그런 게 아니에요! 엄마! 왜 도아린 말을 믿고 내 말은 안 믿는 거예요? 내가 친딸이잖아요!”배지유가 아무리 저항하고 발버둥 쳐도 경호원은 휠체어를 붙잡고 밖으로 밀고 나갔다.배지유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집에만 가만히 앉아 배건후의 처벌을 기다릴 수 없었다.그렇다고 또 성대호에게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돌아가면 그는 또 갖은 방법으로 그녀를 괴롭힐 테였다.하지만 지금은 성대호만이 그녀를 데리고 여기를 뜰 수 있었고 모욕당하는 것과 감옥에 가는 것 중에서 그래도 전자가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엘리베이터는 계속 내려가다 7층에 도달한 후 많은 환자들
주현정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다시 분노에 차 소리 질렀다.“병실 밖에서 소란 피우지 말라고 했잖아요!”간호진이 곧바로 달려오고 주현정이 민철홍을 보며 말했다.“민 사장님은 나랑 안으로 들어가요!”“알겠습니다!”민철홍은 그녀를 따라 병실로 들어갔다.배지유도 틈을 타 다른 사람들에게 들어가자고 재촉하며 말했다.“이건 위급한 상황이에요! 지금 들어가지 않으면 제 오빠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없을 거예요!”그녀는 휠체어를 밀며 병실 안으로 달려가려 했지만 도아린이 문 앞에서 막았다.“도아린! 너는 도대체 뭐냐! 왜 우리 집안일에 자꾸 끼어들어!”“배지유, 네가 왜 회사 임원들을 여기로 불렀는지 그 꿍꿍이를 모를 것 같아?”도아린이 차분하지만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하며 배지유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너는 성대호 그 사람과 손잡고 건후 씨를 모함하고 모욕했어, 대체 뇌물을 얼마를 받은 거야?”배지유가 대답하기도 전에, 도아린이 시끄러운 임원들을 향해 말을 이어갔다.“여러분, 주 대표님의 지시에 따르고 회사를 지키지는 못할망정, 배지유처럼 직책도 없는 사람이 선동하는 대로 이렇게 우르르 몰려오신 건 정말로 회사 생각해서 그런 건가요? 아니면 배지유처럼 뇌물을 받고 이러시는 건가요?”“함부로 말하지 마! 우리는 배 대표님이 걱정돼서 온 거야!”한 노인이 불만을 표하며 반박했다.“여기에 있는 임원분들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요. 배지유는 자기 어머니의 약을 바꿔치기한 패륜 자예요. 게다가 자신의 친구들에게 제 아버지를 유혹하라고 시켜서 자기 부모님의 결혼생활을 파탄 냈어요. 이런 몰상식한 사람에게 선동당한 여러분도 똑같이 천벌 받을 짓을 하고 있는 거라고요!”“...”많은 사람들이 도아린의 말에 얼굴이 뜨거워졌다.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들 중 몇 명은 배석준이 정보를 캐내기 위해 보낸 사람들이었다.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배석준은 지금 전 대표의 신분으로 그 자리를 차지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고 다시 회사의 권력을 쥐게 되면 지
“어떻게 된 거예요?”도아린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주현정을 바라봤고 주현정은 입을 가린 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병실 안에는 환자의 생명을 유지하는 각종 의료 장비가 가득했지만 정작 병상은 텅 비어 있었다.“건후 씨는 어디 있죠?”도아린은 불길한 예감이 엄습하면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주현정의 팔을 단단히 붙잡으며 물었다.“제발 말해 주세요. 건후 씨,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건후가, 건후가...”그 순간, 경호원의 전화가 주현정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녀는 급히 눈물을 닦고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말하세요.”“아가씨가 회사의 몇몇 임원분들을 데리고 와서는 배 대표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소란을 피우고 있습니다!”“곧 나갈게요.”전화를 끊은 주현정은 도아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일단 밖의 문제를 해결하고 내 사무실에서 이야기하자.”도아린이 병상을 바라보았다.“여기까지 왔다면, 완전히 단념하게 만들어야죠.”30분 후.주현정과 도아린이 병실 문을 나섰다.“배 대표님 상태가 어떤지 정확한 설명을 해 주세요!”“추천하신 임시 대표가 능력이 나쁘진 않지만 결국 우리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배 대표님께서 만약 장기간 치료가 필요하다면 우리 쪽에서 적절한 대표를 선출하는 게 맞습니다!”“엄마! 이사님들도 이렇게 다 오셨는데, 도아린 같은 외부인은 오빠를 만나게 하면서, 왜 정작 가족인 저희는 못 보게 하는 거예요?”배지유가 휠체어를 조종하며 앞으로 나섰다.주현정은 딸을 싸늘하게 노려보다 곧바로 무리의 중심에 있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민 사장님, 제가 여러분을 못 만나게 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배 대표는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무더기로 병원에 몰려와 소란을 피우는 건 환자를 위하는 행동인가요? 아니면 그의 치료를 방해하려는 건가요?”주현정의 목소리에 카리스마가 실려 있고 민철홍은 주변의 이사들을 돌아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리고 배지유를 한 번 힐끔 쳐다본 후, 입
도아린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배건후가 자신의 명의로 보유한 회사의 모든 지분을 그녀에게 이전한 것이다!이건 마치... 유언을 남기고 떠날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도아린은 애써 눈물을 참으려 했지만 결국 눈물은 서류 위로 떨어졌다.도아린이 서둘러 닦아내며 물었다.“교통사고 이후로, 장 변호사님도 배 대표를 한 번도 못 만났죠?”“네. 이건 배 대표님이 미리 준비해 둔 거였어요. 저에게 절대 먼저 도아린 씨를 찾지 말라고 했습니다. 도아린 씨가 직접 찾아오면 그때 서류를 넘기라고 했어요.”도아린이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눈물을 훔쳤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배건후가 미리 위험을 감지해서 이런 거라면 분명 대응책도 마련해 두었을 것이다.그녀에게 슬퍼할 시간이 없었다.도아린은 배건후가 맡긴 책임을 짊어져야 했고 악인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놔둘 수 없었다!그녀는 빠르게 서류 절차를 마무리한 후, 차에 올라타 청룡에 메시지를 보냈다.[누군가 모건 그룹을 노리고 있어요. 그들이 순순히 내가 회사를 접수하도록 두지 않을 거예요. LY의 인맥을 활용할 필요가 있어요.]청룡이 움직이자, 서대은도 곧 소식을 접하고 도아린에게 연락을 해왔다.[보스! 나에게 다시 한번 만회할 기회를 줘! 이번엔 절대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아버님은.][이미 다른 곳으로 옮겼어.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이용해 날 협박할 수 없을 거야!][네가 하는 것 봐서.]진씨 가문의 사람들은 배건후가 미리 준비해 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그가 혼자 결정해 도아린에게 모든 것을 넘긴 것이었지만 도아린은 손 놓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우리가 도울 일은?”“지금은 필요 없어요!”도아린이 고개를 저었다.“필요할 때가 오면 주저 없이 도움을 요청할 거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다음 날, 도아린은 곧장 연성으로 돌아가 주현정을 만났다.주현정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꼭 끌어안았고 도아린의 어깨가 눈물로 흠뻑 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