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 옆에 서 있던 남자는 깜짝 놀라며 도아린을 바라봤다. 그는 흰 셔츠를 입고 있었고 바지는 손에 들고 있었다.“아... 아현 씨?”육하경은 당황한 듯 발가락으로 바닥을 움켜쥐려 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도아린은 재빨리 등을 돌리며 말했다.“죄송해요. 옆방에 있던 한 여성분께서 사탕에 목이 막혀서 제가 응급처치를 했어요. 병원으로 좀 데려가 달라고 해 주세요.”“알겠습니다.”육하경은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바지를 입었다.방금 한 여성이 자신에게 접근하려고 일부러 주스를 엎질렀기에 이 방에서 옷을 갈아입으려고 들어왔던 터였다.그런데 이런 당황스러운 상황을 도아린에게 들킬 줄은 몰랐다.곧 돌아온 육하경은 도아린이 아직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상황을 잘 이해해준 듯 침착하게 행동하고 있었다.“가봤는데 이미 병원으로 옮겨졌더라고요.”“다행이네요.”도아린은 귀걸이를 뺐다.금속 알레르기가 있었던 그녀는 귀가 가렵고 뜨거운 것은 물론 이미 염증까지 생긴 상태였다.“귀가 알레르기가 돋은 것 같네요.”육하경은 상냥하게 말했다.“제가 약 발라줄까요?”방금 만난 사람조차 이를 눈치챘는데 배건후는 3년 동안 도아린에게 금속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도아린은 스스로를 비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별거 아니에요. 같은 층에 의무실이 있으니 금방 다녀올게요.”육하경은 그녀에게 앉으라고 권했다.“그럼 감사합니다.”도아린이 자리에 앉자마자 조금 전의 문은 또다시 자동으로 닫혔다. 이 디자인이 꽤 흥미롭다고 생각한 그녀는 잠시 방을 둘러봤다.육하경은 곧 약을 가져와 면봉에 약을 묻힌 후 그녀에게 다가왔다.“제가 발라줄게요.”“제가 할게요.”도아린은 그와 친구가 되는 것은 괜찮았지만 과도한 신체 접촉은 사양했다.육하경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도아린을 바라보았다.그녀가 착용한 비취 팔찌와 다이아몬드 팔찌 그리고 이 고급스러운 드레스는 모두 값비싼 것들이었다.이런 재정 상태라면 저질 귀걸이를 착용하고 연
육하경은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지만 보안 요원의 반응을 보니 도아린이 분명 곤란한 상황에 처한 것 같았다.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반성문 작성해서 제출하세요.”“네, 네! 바로 하겠습니다!”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보안 요원은 문을 잡고 육하경과 도아린이 들어갈 수 있도록 공손히 배웅했다.그들이 탄 엘리베이터가 닫히자 바로 옆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그곳에서는 성대호와 배건후가 걸어 나왔고 성대호는 초대장을 보안 요원에게 건네며 연회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아까 먼저 기다리라고 한 말... 무슨 의미였어?”배건후는 냉정한 눈빛으로 답했다.“말 그대로의 의미.”성대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역시 다시 시작하려는 속셈이구나.’손보미가 울고불고하며 난리를 치면 배건후는 언제나 그녀에게 무한한 배려를 해왔다.‘아린 씨에게 자리 배정을 끝냈다고 말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이 자리가 다시 손보미에게 넘어갔다가 상황이 퍽 난감해졌겠어...’도아린을 위해 몇 마디 하려다 성대호는 배건후의 어두운 표정을 보고는 그만두기로 했다.대신 그는 핸드폰을 꺼내 육하경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우리 도착했어. 이제 팀장 된 거 티 좀 내는 거냐? 빨리 마중 나와.]아래층에서 육하경은 도아린에게 옷을 건네며 말했다.“문 잠그고 갈아입고 내가 오면 열어줘요.”육하경의 배려는 섬세했지만 너무 친근하진 않아 도아린은 편안함을 느꼈다.“고마워요.”육하경이 방을 나가자 옷을 가져온 사람이 도아린의 뒷모습을 보더니 참지 못하고 말했다.“팀장님, 여자친구분 몸매가 너무 좋으시네요.”“입 다물어요.”육하경의 귀가 붉어졌다.그때 핸드폰이 진동했고 그는 메시지를 받았다.하지만 육하경은 바로 확인하지 않고 보안 요원을 찾아 상황을 물어봤다.도아린이 한 여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는 말을 들은 그는 CCTV 영상을 확인했다.도아린을 괴롭힌 여자는 다름 아닌 그에게 접근하려다 실패해 온몸에 주스를 쏟아낸 여자였다.또다시 성대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여자친구도
육하경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 성격에 그럴 리가 없지.”성대호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듯 말했다.“그래도 아직 공개하지 말고 적어도 우리 둘한테 먼저 보여줘야지. 요즘 여자들 수법이 대단하다고!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치밀하게 계획한 덫일 수 있어!”“어쩌면 동시에 여러 명과 만나면서 누가 더 능력 있는지 보고 결정하는 걸지도 몰라. 여자들은 겉으로는 온순하고 착해 보여도 사실은 속에 날카로운 가시가 숨어 있거든!”여태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배건후는 그 말을 듣고 눈빛이 더 어두워졌다도아린 역시 무해한 토끼에서 손댈 수 없는 고슴도치로 변해버렸다.“맞는 말이네.”그는 동의했다.성대호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 사람은 사랑과 미움을 분명히 할 줄 아는 사람이야. 공을 다투지도, 타협하지도 않아. 이런 여자는 세상에 드물지. 이런 사람을 숨기는 건 진주를 먼지 속에 묻어두는 거랑 같아.]육하경의 말에 성대호는 놀라서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대체 어떤 여자길래 그동안 늘 신중하던 네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냐? 꼭 확인해봐야겠어. 좋은 건 다 조용히 가져가겠다는 거야?”[난 못 믿어. 직접 봐야 네 말이 맞는지 확인할 수 있지.][얼굴 안 붉어지게 조심해.]배건후는 연회장을 둘러보며 도아린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성대호도 그의 시선을 따라가며 말했다.“설마 배지유도 데리고 왔냐? 너 하경이랑 지유가 함께 하는 거 반대하지 않았어?”“지유는 도아린과 함께 왔어.”성대호는 말문이 막혔다.‘손보미랑 겨우 끝내놓고 아린 씨랑 연회에 참석하다니... 대체 이 남자 머릿속엔 뭐가 들어있는 거야?’배건후가 다시 한번 연회장을 확인했지만 도아린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하여 바로 도아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는 꺼져 있었다.표정이 차갑게 굳어지더니 배건후는 조수현에게 전화를 걸었다.“도아린도 연회에 왔어?”“사모님은 아가씨와 함께 들어가셨습니다.”조수현이 대답했다.“저는 밖에 있었지만 사모님이 나가시는 걸 보지
배건후는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말도 안 돼.”“뭐가 말도 안 돼요!”배지유의 눈가가 붉어졌다.“오자마자 새언니가 어딨냐만 물어보고... 오빤 왜 나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해요?”“또 무슨 사고 쳤냐고 물어볼까, 그럼?”“오빠 눈엔 내가 항상 사고만 치는 애로 보여요?”배지유는 발을 동동 구르며 화를 냈다.“아까 난 휴게실에서 사람도 구했다고요!”그러자 배건후는 피식 콧방귀를 뀌었다.“네가 사람을 구했다고?”“그래요! 됐어요! 난 못해요! 난 새언니 화나게 할 줄만 알지 아무것도 할 줄 몰라요. 됐어요?”배건후는 배지유의 눈을 몇 분 동안 응시하더니 몸을 돌려 걸어갔다.그가 떠나자마자 배지유는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이번엔 운이 좋았다.도아린에게 문을 열어주러 갔을 때 안에 기력이 약해 보이는 여자가 있었다.원래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그 여자가 계속해서 감사 인사를 하길래 어쩔 수 없이 좋은 일을 하는 척 받아들였다.덕분에 배지유는 다행히 배건후의 의심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그때 재벌가 여성들이 다시 다가왔다.“대표님이 칭찬해 주셨죠? 이제 갓 졸업했는데 모건 그룹의 이미지를 이렇게 긍정적으로 만들어 주셨잖아요.”“어디서 들었는데 진 대표님께서 연성에서 프로젝트를 준비한대요. 모건 그룹이랑 협력하게 될 거라고 하더라고요.”이 말에 배지유는 마음이 동했다.“진 대표님께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에요?”“그럼요. 해남의 스카이 빌딩도 진 대표님을 끌어들이려 했대요. 진 대표님께서 연성에 온 건 협력자를 찾으려는 게 틀림없어요.”“지유 씨가 진 대표님의 아내분을 구했으니 무슨 요구를 해도 지나치지 않을걸요?!”“맞아요. 게다가 하임리히법까지 할 줄 알았다니! 진짜 대단해요.”배지유는 속으로 흐뭇해졌다.‘만약 진 대표님과 협력할 수 있다면 내가 서류를 유출한 일도 오빠에게 말할 수 있을 거야. 공이 있으니 오빠가 크게 나무라지 않겠지.’“먼저 이야기 나누세요. 저 전화 한 통만 걸고 올게요.”배지유는 고개를
여자는 반응할 새도 없이 머리카락이 잡혔다.그 힘이 너무 세서 두피가 벗겨질 뻔했다.“너 한 번 더 하경 오빠 귀찮게 하면 내가 제대로 혼내줄 테니까 두고 봐!”“배지유 씨?”배지유의 눈은 질투로 붉게 물들어 더 이상 적과 아군을 구분할 수 없었다. 그녀는 여자의 얼굴을 향해 또다시 손을 휘둘렀다.“내가 누군지 알긴 알아?!”“지유 씨, 저예요!”여자는 배지유의 손을 붙잡고 얼굴을 들어 보였다.“아까 지유 씨 대신 도아린을 혼내준...”“닥쳐!”배지유는 그녀를 알아보았다.얼굴이 좀 부어 있었지만 여전히 아첨하는 표정이었다.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백 번을 도와준다 해도 육하경을 탐내는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네가 무슨 일을 했든지 상관없어. 너가 은하계를 구했더라도 하경 오빠를 귀찮게 할 수는 없어. 하경 오빠는 내 거니까!”“배지유.”육하경은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그만해.”“난 장난이 아니에요!”창백했던 얼굴이 다시 붉어지며 배지유는 화를 냈다.“하경 오빠, 내가 겨우 우리 오빠한테 부탁해서 여기 온 건데 어떻게 다른 여자랑 춤을 출 수가 있어요?”육하경은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이분이 나한테 옷을 준 건 아까 실수로 나한테 과일 주스를 쏟아서 그런 거야. 오해하지 마.”육하경의 말에 여자는 속으로 생각했다.‘지금 나 변호해주는 거야? 아니, 이건 불에 기름을 붓는 꼴이잖아!’배지유의 눈은 금세 커졌다.“이런 교활한 수작을 부릴 줄이야!”곧 배지유는 여자의 머리카락을 잡아 테이블에 박으며 외쳤다.“네가 감히 발칙하게 굴어? 제대로 혼내줄게!”“아!”테이블 위에 있던 술병이 땅에 떨어져 깨지며 요란한 소리가 났고 연회장은 엉망진창이 되었다.주변의 손님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피했고 어떤 이들은 경멸하는 표정을 지으며 어떤 이들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혼란스러워했다.“배지유!”성대호가 다급히 달려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어서 그만둬!”그는 배지유에게 눈짓을 보내며 진정하라고 했다. 그러나 배지유
“안 돼!”배지유는 미친 듯이 달려와 육하경의 명함을 빼앗아 두 동강 내며 외쳤다.“어떻게 저 여자한테 개인 번호를 줄 수 있어요?!”결국 배건후는 배지유의 손목을 붙잡고 강제로 연회장 밖으로 끌고 나갔다.“책임자.”책임자를 부르는 육하경의 눈빛에는 평소의 부드러움이 사라진 상태였다.“이분을 병원에 모셔다드리세요. 치료비는 제가 부담하겠습니다.”“육 팀장님...”“이쪽으로 가시죠...”그렇게 연회 책임자는 여자를 데리고 뒷문으로 나갔다.성대호는 육하경에게 뭔가 말하려다 배지유가 또 혼날까 봐 입을 다물고 뒤따라 나갔다.“건후야, 너 지유 너무 겁주는 거 아니야?”성대호는 배지유를 뒤로 숨기며 말했다.“지유가 잘못한 건 맞지만 제대로 타이르고 말해줘야지.”그는 한숨을 쉬며 배지유를 보고 답답한 듯 말했다.“아무리 화가 나도 사람을 때리면 안 돼. 그 사람도 연회장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면 분명 신분이 보통이 아닐 텐데 네가 공개적으로 창피를 주면 건후가 회사 관리하기 어렵잖아.”“...”하지만 배지유는 억울한 듯 여전히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그 여자가 먼저 하경 오빠를 꼬셨잖아...”“하경이는 뛰어나니까 세인트존스 호텔 총괄 팀장 자리에 오른 거야. 정말 하경이랑 함께하고 싶은 거라면 하경이의 좋은 조력자가 되어야지 발목을 잡는 사람이 되면 안 돼.”배지유는 만약 배건후가 성대호처럼 자신에게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더라면 자기 말을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배건후는 조금 전 너무 무섭게 혼내며 소리쳤다. 그래서 배지유는 더욱 반항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이다.배지유는 배건후와 대화를 시도하려 했지만 그 주위에 감도는 차가운 기운이 가까이 다가가기를 망설이게 했다.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자신에게 이렇게 화가 난 이유가 너무 큰 실수를 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도아린을 배건후에게 넘기지 않아서 화풀이를 하는 건지 말이다.그때 핸드폰이 울렸고 배지유는 화면을 보고 눈이 번쩍였다.그녀는 웃으며 전화를
“굳이 만나지 않아도 돼요.”도아린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그저 작은 도움을 드린 것뿐이에요.”“생명보다 중요한 건 없죠.”육하경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그분께도 참 안타까운 사연이 있더라고요.”진 대표의 아내라는 윤명희는 두 아들을 낳고 셋째 아이로 어렵게 딸을 얻었지만 첫돌 잔치에서 딸을 당했다고 한다.그 사건 이후로 윤명희는 우울증에 걸려 정신 상태가 오락가락했다. 진씨 가문은 막대한 돈을 들여 딸을 찾았지만 20년이 넘도록 찾지 못했다.일부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지만 윤명희는 언젠가 딸을 만날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딸이 좋아했던 사탕을 항상 가지고 다니며 딸을 찾으면 그 사탕을 주고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고 싶어 했다.도아린은 자신의 어머니도 양수 색전증으로 돌아가신 일을 떠올리며 윤명희의 슬픔이 깊이 마음에 와닿는 듯했다.그녀는 가슴이 아파져 윤명희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었다.“알겠어요. 만나러 갈게요.”...“빨리 말해봐. 어떻게 사람을 구한 거야?”차 안의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조수석에 앉은 성대호가 먼저 배지유에게 말을 걸었다.그러자 배지유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자랑스럽게 말했다.“그때 좀 다쳐서 휴게실에서 상처를 확인하려고 했는데 소파에 누군가가 있더라고. 그래서 내가 하임리히법으로 그 사람을 구했지.”성대호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어린 나이에 하임리히법도 할 줄 알아? 나도 못 하는데.”“우리 학교에서 가르쳐줬어. 게다가 TV에서도 많이 봤잖아.”배지유는 인터넷에서 배운 방법을 흉내 내며 말했다.“이렇게, 힘을 줘서 확 눌러.”성대호는 뒤를 돌아 배건후를 봤지만 배건후는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아 아무 말도 듣지 않는 듯했다.“아린 씨가 그리 쉽게 사라지겠어? 지유가 사람 목숨을 구했는데 넌 칭찬도 안 해?”성대호가 배건후에게 말했다.하지만 배건후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핸드폰을 꺼내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무슨 소식 있어?”“객실에
진범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배지유를 향해 말했다.“제 아내가 방금 깨어났으니 두 분은 이쪽에서 잠시 쉬세요. 제가 배지유 씨를 데리고 아내에게 가겠습니다.”진범준은 배지유에게 안쪽 방으로 가자는 신호를 보내고 도우미에게 손님들에게 차를 대접하라고 지시했다.배건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성대호는 다소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구해준 사람의 오빠도 병문안 못 하게 하다니... 대체 누굴 경계하는 거야?”그러자 차를 내오던 도우미가 웃으며 설명했다.“저희 대표님께서는 사모님을 매우 아끼십니다. 사모님께서 방금 깨어나셔서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이 정돈되지 않았을까 봐 두 분이 보시고 놀라실까 봐요.”즉, 아내가 집에서의 편안한 모습이 외부 남자들에게 보여지기엔 부적절하다는 의미였다. 이건 확실한 보호욕이자 소유욕이었다.배건후는 성대호를 한 번 쓱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너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지.”“아니야!”성대호는 심장이 순간적으로 철렁했다.“내내 지유를 감싸고 있었잖아. 또 무슨 사고 친 거 아니야?”성대호는 깨달았다. 배건후는 차 안에서 아무것도 듣지 않은 게 아니라 그들의 대화를 일부러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아니야. 배지유는 아린 씨가 연회에 안 간 게 자기 때문이라고 네가 오해할까 봐 걱정한 거야. 사실은...”하지만 배건후가 피식 콧방귀를 뀌었고 성대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한편 병실 안.윤명희는 멍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듯한 표정이었다.발소리가 병상 옆에서 멈추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여보, 배지유 씨가 당신 보러 왔어.”진범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윤명희의 침대 머리를 높여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그들 부부의 다정한 모습을 보며 배지유는 더욱 자부심이 느껴졌다.자신이 우연히 윤명희를 구한 덕분에 배건후의 큰 사업을 성사시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사모님.”배지유는 침대 옆으로 다가가 손을 잡으며 말했다.“배지유라고 불러주세요.”윤
진수혁은 찻잔을 들어 살짝 한 모금 마시더니 배건후를 바라보았다. "말해 봐요." "내가 먼저 도아린과 결혼하면, 당신은 유럽 유학 기회를 나에게 넘겨요. 당신이 먼저 변슬기와 결혼하면, 당신이 필요로 하는 칩 기술을 두 손으로 받칠게요."진수혁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찻잔을 쥔 손에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갔고, 손등에는 핏줄이 돋아났다. 그는 배건후의 깊은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매력적인 눈은 도아린을 향할 때면 온통 비위를 맞추고 약한 척하는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매처럼 날카롭게, 거스를 수 없는 공격성을 띠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진수혁은 눈에 띄지 않게 눈썹을 찌푸렸다. 배건후가 그동안 도아린에게 온갖 비위를 맞추는 것을 보고 진수혁은 배건후가 이미 자존심과 투지를 잃고 오직 결혼 생활을 되돌리려고만 한다고 오해했다. 이제야 배건후는 여전히 그 배건후라는 것을 알았다. 전 부인을 되찾고 싶어 하는 것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발전시킬 기회를 포기한 적도 없었다.유럽에는 강연이 하나 있는데, 입문 조건이 주요 재벌 그룹의 실력자 또는 후계자이며, 배건후의 현재 자산으로는 강연을 들을 수 없었다. 진수혁은 그 자격이 있었지만,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유럽으로 가서 칩 기술을 연구하는 천재를 찾고 싶었다. 두 사람은 서로 필요한 것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배건후는 굳이 그와 도박을 걸려고 했다. "당신이 이길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알죠." 진수혁이 말했다. "두고 보시죠." 배건후가 말했다. 두 남자는 악수하며 조용히 내기를 정했다. 저녁 식사 때, 진수혁 부부는 주범금도 데려왔고, 내일을 위해 준비했던 몇 가지 요리가 오늘 식탁에 올랐다. 모두 즐겁게 식사했고, 주범금의 기분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그녀는 도아린에게 자신이 구매한 전리품을 자랑하기도 했고, 밤늦게서야 떠났다. 진수혁은 도아린을 데려다줄 때 그녀를 불러 세웠다. "유럽에 칩 분야 천재가 있다는 거
변환에 성공하는 순간, 동생은 깨어났고, 시스템은 남자 주인공에게 귀속되었다. 시스템은 남자 주인공에게 도아린의 진심을 얻지 못하면 죽을 것이라고 알렸다.처음에는 남자 주인공이 믿지 않았지만, 도아린과 이혼한 후 자신의 사업 제국이 날마다 무너져 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도아린의 좋았던 점들을 떠올렸다...도아린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 "비록 허구의 이야기지만, 이 남자 주인공은 정말 쓰레기네!""나도 그렇게 생각해." 배건후는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도아린의 좋은 점을 떠올린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거야."도아린은 그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눈빛에는 ‘그러니 당신도 그와 똑같은 부류겠지’라고 쓰여 있었다."나는 아니야." 배건후는 도아린의 손을 잡고 심장 부위에 가져다 댔다. “나는 줄곧 당신만을 사랑했어. 다만 임무 때문에 표현할 수 없었을 뿐이야. 나는 모든 것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당신에게 줄 수 있어."도아린은 손을 빼서 그의 옷에 쓱 닦았다."당신은 나를 소유하고 싶을 뿐이야. 나를 소유하는 것이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과 같으니까." 그녀는 일어나 테라스로 향했다.배건후는 따라가서 말했다. "우리는 공정하게 할 수 있어! 결혼 전후를 막론하고 모든 자산은 당신 거야!"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나도 당신 거고."라고 덧붙였다.도아린은 깊어가는 가을의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눈을 감고 침묵했다.배건후는 말없이 그녀 옆에 서 있었다. 마치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주인이‘놀러 가자’라고 한마디만 하면 즉시 꼬리를 흔들며 기뻐할 준비가 된 듯이.한참 후, 도아린은 그를 돌아보았다."당신 우정윤에게 후원한 적 있어?"배건후는 입술을 오므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후원한 건 독자들이 남자 주인공을 가장 심하게 욕하는 챕터였어.""……" 그리고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도아린은 웃음을 참으며 일부러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거기 나오
"내가 무슨 바람이 있다고 그래요?"예전에 그녀가 먼저 다가간 건, 배건후랑 제대로 살아보고 싶어서였다.남녀를 불문하고 아이를 낳아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당신을 내 뜻대로 움직이려고 여러 수단을 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사랑 없이는 못 산다는 건 아니에요.내가 엄청나게 목마른 사람처럼 말하네요.배건후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배건후가 잘못 말했어요. 배건후가 원해요. 당신이 나를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나를 총애해주길 기다릴게요."퉤!도아린은 씹던 멜론을 배건후의 몸에 그대로 뿜어버렸다.가슴을 치며 화도 나고 웃음도 나왔다.두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한 후에 배건후는 분명히 다른 사람에게 몸을 빼앗긴 게 분명하다.겉모습은 그대로지만, 속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예전의 배건후는 엄격하고 냉정하며 웃음기 하나 없었고,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을 하면 비웃거나 냉담하게 대하곤 했다. 지금의 배건후는 데릴사위가 되겠다는 말도 서슴없이 하고, ‘총애’를 받겠다고 자청하기까지 한다.배건후는 몸에 묻은 과일 조각을 닦지 않고 손을 들어 도아린의 등을 토닥이며 괜찮은지 확인한 후에야 휴지를 꺼내 옷을 닦았다.도아린은 바닥에 떨어진 과일 조각을 치우며 농담처럼 말했다. "배건후, 당신 몸에 다른 사람이 들어온 게 분명해요. 내가 책 속에 살고 있는 건가? 당신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알고 내가 강해져서 당신에게 복수할 거라는 걸 알고 미리 납작 엎드리는 건가?"배건후는 옷을 다 닦고 도아린을 소파로 끌어당겼다."빙의가 아니라 공략이에요.""..."남자는 그녀를 품에 안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을 공략해서 당신의 사랑을 얻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나는 죽어요.""당신 미쳤어요?" 도아린은 그의 등을 찰싹 때렸다."미쳤어요. 당신은 유일한 약이에요."도아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의 품에서 온몸을 떨며 웃었다. "그렇게 뻔한 사랑 고백은 우종이 가르쳐준 거죠
"엄마가 당신한테 준대요, 알아서 해요."도아린이 머리를 끄덕였다."그래요. 별장에서 돌아온 후 다시 해결합시다."배건후는 몸을 뒤로 돌리면서 주체 못 하고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잘 보이지 않아 그런지 어떤 부분은 더 확대되어 크게 보였다."전보다 커졌는데요."이상한 말이 도아린의 얼굴을 빨갛게 만들었다.그녀는 화가나 그를 한 눈 째리고 나가서 물건을 정리하였다.도아린은 변슬기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그녀를 끌고 단추를 찾는다는 핑계로 무슨 일인지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변슬기는 카펫에 엎드려서 핸드폰 보조등을 켜고 소파 밑을 드려다보았다."찾았어요."그녀는 손을 뻗어 단추를 쥐면서 주절주절 말했다."도 선생님, 이제 기회가 되면 제가 저희집의 메인 메뉴인 만두를 대접해 드리겠습니다."도아린은 카펫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그녀가 건네 준 단추를 만지면서 웃으며 말했다."좋아요. 제일 좋기는 가게 평생 20% 할인 카드 줘요.""작은 가게라 많이 벌지도 못해요."변슬기가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이 오시면 무조건 20% 할인 해들릴게요."진수혁은 다 썰어 놓은 과일을 가지고 밖으로 나오면서 저둘이 얘기를 나누는 것을 보았다."무슨 얘기 하세요?"변슬기가 설명해주려 하자 도아린은 손으로 그녀의 목을 감싸며 말했다."데릴 사위에 대해 얘기를 했어요. 변슬기의 어머니 아버지는 딸 하나 뿐인데, 앞으로 사위가 있다며 처가에 들어왔으면 해요."변슬기는 진수혁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 보았다. 그가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진수혁의 기분은 별로 파동이 없어 보였고 그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에 매우 동의하는 눈치였다."우리집에는 니가 하나뿐인 딸인데.""저는 데릴 사위를 할 생각이 있습니다."진수혁은 도아린한테 손을 닦으라고 뜨거운 손수건을 건네 주며 그녀를 지그시 바라 보았다.슬기는 놀라서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도아린과 진수혁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
변슬기는 재빨리 진수혁의 등 뒤로 숨었다.진수혁은 잠시 멈칫하더니 곧 상황을 파악하고 조용히 말했다.“이것 좀 부엌에 가져다줘.”“네!”변슬기는 배건후가 문 앞에 두고 간 봉투를 잽싸게 집어 들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부엌으로 사라졌다.도아린의 셔츠 단추 하나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배건후는 자신의 재킷을 벗어 그녀에게 걸쳐주며 조심스럽게 게스트룸으로 이끌었다.“기다려. 금방 다녀올게. 차에 여벌로 둔 옷 있어.”도아린은 황급히 배건후의 손을 붙잡고 재킷을 벗어 돌려주었다.“일북이 근처에 있을 거야. 전화해. 밖에 추우니까 이거 입고 나가.”그녀가 팔을 들자 셔츠는 더 크게 벌어졌고 새하얗고 부드러운 피부가 다시 배건후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눈동자에 번쩍이는 불꽃이 튀었고 그 불씨는 작지만 매섭고 뜨거웠다.도아린은 급히 몸을 옆으로 돌리고 팔로 가슴을 가렸다. “어서 가.”배건후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그녀를 끌어안았다.도아린은 반사적으로 거부하려 했지만 그는 단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번을 고요히 숨쉬더니 결국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발소리는 집 밖이 아니라 욕실로 향했다.변슬기는 부엌에서 머리를 내밀며 확인하려다 진수혁에게 팔을 붙잡혀 다시 안으로 끌려들어갔다.“생각해봤어? 회사에 남을 거야 아니면 돌아가서 가게를 이을 거야?”변슬기는 고개를 숙이고 포도를 씻었다.자신의 집은 해남에 있는 작은 분식집이었다. 일반 가정에게는 소중한 생계 수단일지 몰라도 재벌가인 진씨 가문 한테는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존재였다.부모님은 외동딸인 변슬기가 곁에 있기를 바라며 나중에는 사위를 맞이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진수혁은 진성 그룹의 황태자다. 그에겐 집안도 학벌도 모두 어울리는 배우자가 필요했고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 떠나는 순간 진수혁과는 더 이상 인연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계속 머무르면 감정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 뻔했다.한참 후 변슬기는 낮은 목소
“지금 두 분은 어느 정도까지 간 거예요?”집에 도착하자마자 도아린은 본론부터 꺼냈다.그녀는 오빠와 변슬기 사이가 눈에 띄게 가까워진 걸 단번에 눈치챘다.“아...아니에요! 아직 시작도 안 했어요...”변슬기는 난간에 양손을 올린 채 눈을 피하며 말끝을 흐렸다.“시작은 안 했어도 뭔가 있었네요?”“크흐흑!”그 말에 변슬기는 자신이 삼킨 침에 갑자기 사레가 들려 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고 얼굴은 벌게졌다.변명하려 할수록 기침은 더 거세졌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도아린은 웃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이고 물 한 잔을 건넸다.“너무 걱정 마요. 변슬기 씨 덕분에 우리 집에 큰 도움 됐잖아요. 우리 가족의 은인이에요!”“진짜 아니에요...”변슬기는 눈물까지 닦으며 손을 저었고 표정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그날 밤 나랑 같이 집에 안 갔잖아요. 여기서 잤던 거 아니에요?”“그랬었죠. 그런데요...”그녀는 작아진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아무 일도 없었어요.”도아린은 눈을 흘기며 말했다.“설마 우리 오빠가 그쪽에 문제 있어요?”‘설마 그럴 리가... 아빠는 나이 들었어도 정력이 넘치시던데 오빠도 피는 못 속일 텐데?’변슬기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그날 서로 안기도 했고 키스도 했지만 마지막 순간 진수혁이 스스로 멈췄고 그는 침실을 양보하고 자신은 거실 소파에서 잤다.다음 날 술이 깬 듯한 표정으로 전날 일을 아무렇지 않게 넘겼고 변슬기도 굳이 꺼낼 수 없었다.그 후로도 그들의 사이는 은근하게 가까워졌지만 딱히 확실한 정의는 내려지지 않았다.“나중에 내가 오빠한테 물어볼게요.”“안 돼요!”변슬기는 도아린의 팔을 움켜잡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빛으로 말했다.“도 선생님...제 신분이 황태자님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거 잘 알아요. 남자들은 술 먹으면 착각할 수도 있고...다행히 선을 넘지는 않았으니 그냥 없던 일로 해주세요.”도아린은 그녀의 손을 다독이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하지만 우리 진씨 가문은 책임감 없는
“아!”변슬기는 병아리마냥 진수혁 차로 옮겨졌다.도아린은 웃으며 문을 닫고 조수석에 올라탔다.그녀는 휴대전화로 사진 하나를 골라 일남에게 전송했다.일남은 안전벨트를 하려던 참 알림 소리에 바로 폰을 꺼내 들었다.사진을 본 그는 입꼬리를 실룩이며 말했다.“아가씨 사진 실력이 정도면 필터도 울고 갈 수준인데요.”“정말? 나도 볼래!”송 비서가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었다.“앉아. 운전해야 해”일남은 그의 머리를 눌러 다시 자리로 돌려보냈다.“시내에선 뒷좌석 안전벨트 안 해도 되는 거 아니야? 연성은 관리가 그렇게 심해? ”송 비서는 투덜대며 안전벨트를 잡아당겼다.일남은 일북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너도 보지 마. 그냥 안 본 셈 쳐.”그 사진은 일남이 일북을 힐끔 바라보는 순간을 캡처한 것이었다.일북은 정면만 똑바로 응시하는 완전 군인 양식이었고 일남은 몰래 보는 범인 양식이었다.하지만 일북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시동을 걸어 배건후 차량을 따라갔다.“왜 웃어?”배건후는 도아린이 조수석에서 혼자 피식거리는 걸 보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아무것도 아냐. 그냥 재밌는 사진 하나 건졌어.”도아린은 휴대폰을 집어넣고 밀크티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김지민네 진짜 끝도 없네. 혹시 배 회장님 유골 넘기면서 돈 요구한 거 아냐?”진옥경 고모 장례 때도 남편이 돈부터 요구했었다.다행히 진가에서 능력 있는 변호사를 구해서 사망 후에도 부부 재산을 나눠 가질 수 있었다.배석준 역시 김지민 가족한테는 그냥 은행 통장 같은 존재였고 이제 더는 못 빨아먹으니까 마지막으로 크게 한몫 뜯어내려고 하는 거였다.“2억.”배건후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티슈를 꺼내 도아린에게 건넸다.도아린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방금 마신 밀크티를 뿜을 뻔했고, 그 티슈로 입까지 닦았다.“진짜 줬어?”“아니.”배건후는 새 티슈를 또 건네며 그녀의 티슈 재활용에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눈빛엔 오히려 다정함이 가
진수혁은 변슬기의 얼굴이 붉어진 걸 못 봤거나 봤더라도 모른 척했는지 담담히 말했다.“우린 여기서 기다릴게.”도아린은 변슬기 머리 위에 달린 풍선을 가리켰다.“이렇게 눈에 띄는 표시도 있으니까 제가 금방 찾으러 갈게요. 오늘 관광객 많으니까 지금 덜 붐빌 때 구석구석 잘 봐요.”“길 잃으면 전화해.”진수혁은 풍선 끈을 가볍게 당기며 변슬기를 데리고 발걸음을 옮겼다.일북은 도아린 뒤를 바짝 따라가며 주변을 날카롭게 살폈다. 혹시나 누가 해코지할까 혹은 누가 몰래 물건을 훔쳐 갈까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반면 일남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관광에 진심이었다.관광 가이드 옆에 붙어 설명을 듣고는 돌아와서 일북에게 흥분한 얼굴로 그대로 전달했다.“아까 가이드가 그러는데 양평산 대군이 남자인데 얼굴이 여자처럼 생겨서 어떤 후궁이랑 닮았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황제가 유독 아껴줬대.”일북은 그런 일남의 말에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을 뿐 시선은 한시도 도아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둘이 가서 마음껏 구경하고 와.”“아가씨...”도아린은 손목에 찬 긴급 호출 시계를 들어 보이면서 웃었다.“무슨 일 생기면 연락할게. 오늘은 놀러 나온 거니까, 일은 잠시 내려놔.”도아린의 반복된 설득에 일북도 결국 잠깐 자유시간을 허락받았다.일남은 일북을 끌고 다니며 계속 얘기했고 도아린은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시려던 참이었다.그때 갑자기 머리 위로 그늘이 드리웠다.오늘 날씨는 참 좋은데 운동복만 입어도 괜찮지만 햇살은 은근히 따가워서 그늘 아래는 금세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도아린은 마침 마당 한가운데 서 있었다.그녀는 잠깐 고개를 들어 양산을 쳐다보고는 옆쪽에 서 있는 송 비서를 바라보았다‘아 맞다! 얘도 있었지. 애매하게 끼어 있는 애 하나 더.’그렇게 해서 도아린은 송 비서와 함께 느긋하게 궁 안을 둘러봤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가끔 변슬기를 마주치면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 지나쳤다.공왕부는 작지도 크지도 않은 곳이라 여기저기 구경하다 보면 시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집에 도착하자 일남은 결국 사실대로 털어놨다.“갈비뼈가 아직 제대로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전에 유치장에 있을 때 남궁유민 차가 폭발했잖아요? 그때 도아린 씨를 안고 같이 넘어지면서 또 다쳤거든요. 아까 강재민이랑 싸울 때 그 부위를 건드렸을 수도 있어요...”도아린은 마른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고개만 살짝 끄덕이면서 담담하게 대답했다.“응, 알겠어.”일남은 일북을 힐끔 바라봤고 일북은 눈빛으로 먼저 올라가라는 신호를 보냈다.“아가씨, 일부러 숨기려고 한 건 아닙니다.”“알아. 나 안 화났어.”도아린은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사실 아까 대충 눈치챘거든.”야밤에 신지훈이 간호사 유선미를 데리고 배건후에게 수액을 놓으러 간 걸 봤다. 그 사람 몸에는 분명히 예전부터 앓고 있던 상처가 남아 있었다.배건후는 약한 척해서 동정을 사려 하지 않았고 도아린 역시 그가 얼마나 진심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주말이 되자 모두 함께 공왕부로 향했다.입구에 도착하고 나서야 도아린은 진범준 부부가 오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다.“부모님은?”“주 대표님이랑 장비 사러 가셨어.”진수혁은 편안한 캐주얼 차림으로 변슬기 손에서 자연스럽게 배낭을 받아 메며 말했다.“출발할 때 들었는데 부모님이 주 대표님이랑 같이 자가 여행 떠나신다고 하더라고.”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고 있는 눈치였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도아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배건후는 배석준 회장님 장례 치르러 갔어.”김지민은 아직도 운전기사에게서 보상금 한 푼이라도 더 뜯어내려고 버티고 있었고 끝까지 합의서에는 사인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하지만 배건후는 김지민 동생의 약점을 찾아냈고 오늘 반드시 장례를 치르지 않으면 동생을 감옥에 보낼 거라고 통보했다. 김지민은 결국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그 집안의 욕심을 생각하면 그들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분명히 배건후에게 또 뭘 요구하려고 들 것이다.하지만 배건후는 배석준처럼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으니 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