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설아는 황급히 말했다. “어떤 존건이든 상관없어요. 제발 아이만 낳게 해주세요.” 유강후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 넌 이 아이가 유 씨 가문의 아이라는 말을 절대 해서는 안 돼. 이 아이는 유민준과 아무 상관도 없어.” 진설아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이 아이는 분명히...” 유강후는 그녀의 말을 끊고 냉정하게 말했다. “넌 아이만 낳고 떠나면 돼. 그리고 영원히 경원시에 다시 돌아오면 안 돼.” 진설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유강후가 무슨 뜻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유강후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원한다면 내가 너에게 큰돈을 줄게. 앞으로 충분히 잘 살 수 있을 거야.” 진설아는 얼떨떨했다. “셋째 도련님...” 유강후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100억!” 진설아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100억! 그녀는 유강후가 이렇게 후하게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유 씨 가문은 분명히 부유한 가문이지만 가장 큰 장점은 권력에 있었고 경제적으로는 최고 수준의 가문은 아니었다. 유하령과 그들이 평소에 사용하는 것들은 대부분 유강후가 관리하는 자금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진설아는 유 씨 가문에서 자라며 많은 고위 인물들을 보아왔지만 그녀는 하인의 딸일 뿐이었다. 물질적으로는 그다지 풍족하지 않았고 대개는 유하령이 쓰다 버린 물건들을 쓰곤 했다. 그런데 지금 제시한 100억이라면 남은 생애를 충분히 호화롭게 보낼 수 있는 돈이었다. 그녀는 완전히 멍해졌다. 유강후는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눈에 싫증 난 기색이 스쳤다. “200억!” 진설아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유강후를 믿기지 않는 눈으로 바라봤다. 이건 그녀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천문학적인 숫자였다. 유하령조차도 이렇게 많은 돈을 손에 쥐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유강후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아이를 낳으면 바로 경원시를 떠나. 다시는
유강후는 자리에 앉았고 눈에 피로감이 가득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다 신경 쓸 수 없어. 온다연이 아이가 없어졌다는 걸 알게 되면 견디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게 돼.” 한이준이 분노하며 말했다. “그래도 아무 아이나 데려다줄 수는 없잖아!” 유강후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담배를 하나 피웠다. 담배 한 개비가 다 탈 때까지 침묵한 후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내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어. 이건 충동적인 결정만은 아니야.” 그는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짓눌렀고 한이준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유민준은 형이 이미 망쳐 놓았어. 유민준은 유 씨 가문을 지탱할 능력이 없어. 유 씨 가문의 사업도 그 사람의 손에 맡길 수 없어.” 한이준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네가 이 아이를 키우겠다는 거야?” 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 씨 가문은 한 명의 책임자가 필요해. 아버지도 이미 60세가 넘으셨고 형은 별 능력이 없어. 유민준은 더 말할 것도 없지. 내가 유 씨 가문을 떠나려면 뭔가 책임질 수 있는 인물을 만들어야 해.”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속의 고통과 불안함을 억눌렀다. “나와 온다연이 언제 아이를 가질지 알 수 없고 설사 아이가 생긴다고 해도 우리의 아이는 유 씨 가문에서 자라지 않을 거야. 그들은 강 씨 가문에서 교육받고 자라고 나와 강 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거야. 그 사업은 매우 커서 유 씨 가문의 것 따위는 신경 쓸 필요 없어.” 한이준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 경원시를 떠나려는 거야?” “경원시는 온다연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줬어. 난 다연이를 데리고 여길 떠나려 해. 강 씨 가문으로 가서 앞으로는 자주 돌아오지 않을 거야.” 한이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쳤어?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미래 그룹은 엄청난 그룹이고 주된 사업도 아시아에 있는데 네가 북아메리카로 돌아가겠다고?” “정말 미쳤어. 완전히 미친 거야!
이틀 동안 너무 많은 일이 벌어졌다. 먼저 주한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다음으로는 온다연이 유산했고 이제 아이까지 죽고 말았다. 이 정도 일들이 보통 사람에게 일어났다면 이미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그저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유강후는 낮게 외쳤다. “넌 몰라. 꺼져! 나가! 더 이상 너를 보고 싶지 않아!” 한이준은 달려들어 그의 옷깃을 잡고 격렬하게 외쳤다. “네가 여자를 위해 무너진다면 내가 먼저 너를 부숴버릴 거야!” 유강후는 그를 강하게 밀쳐내며 말했다. “만약 임혜린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됐는데 그 사람이 네가 아니고 너희 아이가 이렇게 죽었다면 너는 나보다 더 미쳤을 거야!” 한이준은 지금 오직 유강후의 생각을 바로잡고 싶어서 말도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소리쳤다. “헛소리 마! 나는 누구 때문에 내가 이룬 것들을 포기하지 않을 거야! 누구도! 임혜린은 더더욱 아니지. 임혜린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저 장난일 뿐이야!” 그때 문밖에서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이준은 급히 뒤돌아보았다. 임혜린이 언제 문밖에 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발밑에는 깨진 유리잔이 있었다. 그녀는 한이준을 무섭게 바라보고 있었고 그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한이준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 왔어?” 임혜린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방금 왔어. 계속 이야기해.” 그 말을 마치고 그녀는 재빨리 돌아서서 떠나버렸다. 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서 빨리 설명해!” 한이준은 잠시 찡그리다가 그녀를 따라갔다. 한이준이 떠난 후 유강후는 의자에 오래도록 침묵하며 앉아 있었다.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려 하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 채 그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는 추운 날씨에도 차가운 물을 틀어놓고 얼음장 같은 물로 자신의 신경을 계속 자극했다. 유강후는 자신이 매우 위험한 상태에 놓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온다연과의 관계도 절벽 끝에
유강후는 손이 얼어붙었다.동시에 마음 깊은 곳에서 처음 느껴보는 분노가 솟아올랐다.유강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노려보며 그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았다.그녀의 마음속에 들어선 누군가가 있다.하지만 그게 본인이 아니라는 걸 유강후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어쩌면 그 사람이 가장 오랜 시간 동안 그녀의 곁을 지켜주었던 주한일지도 모른다.유강후는 미칠 것만 같았다.그녀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건 더 말할 것도 없고, 이제는 눈길만 돌려도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유강후는 순간 본인의 마음속에 악마가 살고 있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머릿속에는 온갖 피비린내 나는 생각들뿐이었고 그 생각을 곱씹어볼수록 저도 모르게 겁이 났다.유강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한동안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갔다.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유강후는 목을 졸라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이렇게 하면 적어도 그녀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들어갈 일도 없고, 평생 옆에 둘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고 생각했다.유강후는 비틀거리며 사무실로 향했다.문을 들어서자 테이블 위에는 온갖 사진이 무더기로 놓여있었다.은행 레스토랑에서 주희가 온다연에게 집어던졌던 그 사진들로 추정된다.유강후는 사진들을 한참 쳐다보다가 제일 위에 있는 사진 한 장을 집어 들었다.사진 속의 온다연은 열네다섯 살쯤 된 모습이었는데 말끔한 교복을 입고 앞머리를 내린 채 까만 눈망울로 활짝 웃고 있었다.온다연은 머리를 살짝 옆으로 기울여 옆에 있는 남자아이를 보고 있었다.그 남자는 역시나 주한이다.주희와 매우 닮아있었는데 깨끗하고 해맑은 모습은 소년미가 가득했다.그는 새끼 고양이를 품에 안고 온다연과 서로 눈을 마주 본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사진 속의 두 사람은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단어에 어울리는 분위기를 풍겼다.유강후는 손발이 시리고 가슴에 피가 솟구치는 것만 같았다.그는 죽어라 사진을 노려보다가 갑자기 손을 뻗더니 사진을 여러 조각으로 갈기갈기 찢었다.그러고선 또 다른 사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사진 두 장조차 복구시키지 못했다.날이 저물어갈 무렵에 장화연이 들어왔다.문을 열자 유강후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작업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그의 발 밑에는 갈기갈기 찢긴 사진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장화연은 허리를 굽혀 바닥에서 사진 한 조각을 주었는데 교복의 치맛자락만 조금 보였다.유강후가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을 본 장화연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녀가 유강후와 유연서를 돌보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겨우 몇 살이었다.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어릴 때부터 과묵한 유강후는 가끔 유연서가 있을 때만이 수다를 떨며 웃곤 했다.유연서가 죽고 난 이후 그의 말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감정 기복을 느끼지 못하는 듯 반응이 전혀 없었다.게다가 어린 시절 유씨 가문과 강씨 가문의 후계자로 키워져 일반인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훈련을 받았다.지식수준과 체력뿐만 아니라 스트레스를 견디는 능력과 짧은 시간에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훈련을 수없이 반복했다.모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는 매우 훌륭하고 빛나는 후계자가 되었다.결단력 있는 행동과 뛰어난 능력은 유씨 가문과 강씨 가문을 또 다른 정상으로 이끌었다.후계자 유강후는 모두의 칭찬을 받았지만 평범한 인간 유강후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그 누구도 유강후에게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알려주지 않았기에 그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법조차도 몰랐다.원하는 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어야 한다. 이것이 그들이 유강후에게 가르쳐준 인생의 철학이다.일적으로는 대체불가한 능력자가 맞지만 사랑이나 감정관련해서는 백지상태나 다름없다.현시점 가장 큰 문제는 일적으로 사용한 수법을 온다연에게 적용했다는 것이다.장화연은 자신이 어릴 적부터 키운 대단한 아이가 초라한 모습으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게 몹시 마음이 쓰라렸다.이 상황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판단이 안 섰을 수도 있다.그에게도 감정이 있다는 건 너무 기뻐할 일이지만, 그 감정으로
1층 병동. 검사를 마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진설아는 몸을 씻기 위해 다시 욕실로 향했다. 곧 손에 넣을 200억만 생각해도 기분이 좋은지 시도 때도 없이 입에 귀에 걸렸다. 목소리는 전보다 훨씬 커졌고 프런트 간호사에게 립스틱을 빌려 가볍게 화장하기도 했다. 그녀는 수소문 끝에 이 병원이 유강후 소속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애인을 위해 특별히 지은 병원이라고 한다. 처음 이 소식을 접했을 때 진설아는 충격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얼마 전 유강후에게 애인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저 루머일 뿐이라고 생각해 전혀 믿지 않았다. 그러다가 병원 간호사들이 수다 떠는 걸 우연히 듣게 되었고 비로소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유강후가 애인을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말에 실망하기도 했지만 결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왜냐하면 뱃속의 아이를 유강후가 키우는 한, 그에게 다가갈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진설아는 자신감이 생긴 듯 거울을 들여다보고는 어느 정도 외모가 회복된 것 같아 만족스럽게 병원을 돌아다녔다. 3층과 4층은 마음대로 드나드는 것이 엄격히 금기된 곳이지만 진설아는 프런트 간호사들이 한눈판 틈을 타 몰래 안으로 들어갔다. 병원이 얼마나 좋은지 구경하는 것보다 유강후의 애인이 누구인지 더 궁금했다. ‘나은별이랑 많이 닮았으려나?’ 사실 조금 겁도 났지만 뱃속의 아이가 유강후에게 선택됐다는 생각만으로 의지할 곳이 있다고 느꼈다. 위층으로 올라가서야 그곳이 아래층과 사뭇 다르다는 걸 몸소 느꼈다. 여긴 병원이라기보단 정원에 가까웠다. 고급스럽고 우아하며, 복도에는 푹신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었다. 진설아는 질투심이 불타올랐다. ‘역시 듣던 대로 사랑을 듬뿍 받고 있네?’ 이제 막 돌아다니려고 두 걸음을 떼었을 때 어디선가 나타난 간호사들을 보고 황급히 구석으로 숨었다. 간호사들은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오후 내내 자다가 이제 막 깨셨는데 왜 아무것도 안 드시지? 배 안고픈 가? 참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아랫배를 만졌고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진설아는 충격으로 인해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질투할 정도로 아름답고 눈부신 이 얼굴은 온다연이 아니면 누구겠는가. “네가 왜 여기 있어?” 온다연은 싸늘한 눈빛으로 진설아를 바라봤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불과 1초 만에 진설아는 깨달았다. 온다연과 유강후가 서로 만나고 있다는 것을. 비록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결국 유강후는 온다연의 아저씨다. “너랑 유 대표님 설마...” 온다연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뚫어져라 그녀의 배를 바라봤다. “민준 오빠 아이야?” 유민준이라는 이름을 언급한 순간 진설아의 분노 발작 버튼이 눌렸다. “그 사람이랑 상관없거든?” 진설아는 곧 손에 넣을 200억을 생각하며 의기양양했다. “이거 유...” 말하려던 순간 유강후의 명령이 떠오른 듯 재빨리 말을 거두었다. “아니야. 이건 말 못 해.”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온다연은 목소리마저 바뀌었다. “유강후 아이야?” 진설아는 대답하는 대신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온다연. 난 네가 유 대표님한테 꼬리 칠 줄은 정말 몰랐어.” 진설아는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고씨 가문의 멸망, 이씨 가문의 몰락, 유하령의 실패, 심지어 유민준이 다른 곳으로 가게 된 것도 전부 온다 연때문이었다. 진설아는 온다연이 그녀에게 선물해 준 팔찌가 떠올랐다. 그 2억짜리의 팔찌로 인해 어머니는 감옥에 들어갔고 그때부터 부잣집 사모님이 되려던 그녀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 모든 게 유강후가 온다연을 위해 한 일이다. 진설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증오심과 질투심이 불타올랐다. ‘내가 왜 미친 X 때문에 이런 꼴을 당해야 돼?’ 외모는 비슷하지만 집안 출신은 온다연보다 나았기에 본인이 유강후 같은 남자를 얻지 못한 게 너무 한스러웠다. 그녀는 억제할 수 없는 증오의 눈빛으로 온다연을 바라봤다. “유 대표가 그때 널 괴롭혔던 사람들을 모조리 처리했어. 감옥 들어간 사람도 있고
겁에 잔뜩 질린 진설아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유강후에게 애원했다.“대표님,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이런 실수 반복하지 않을게요.”유강후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돌아서고선 온다연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유심히 살펴보았다.“때리고 싶으면 다른 사람 시켜. 괜히 손이라도 다치면 어떡해.”그 시각 진설아는 유강후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부짖었다.“저랑 엄마가 유씨 가문에서 지낸 시간만 해도 십여 년인데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제발요. 이대로 끝내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유강후는 쓰레기라도 본 듯 혐오가 가득 담긴 눈길로 진설아를 힐끗 보더니 고민도 없이 발을 걷어찼다.“꺼져.”온다연은 진설아의 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감옥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 왜 여기에 나타난 거죠?”유강후의 답을 듣기 도전에 온다연은 계속하여 말을 이었다.“설마 임신해서 그래요? 누구 아이인데요?”온다연은 유강후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아저씨 아이를 임신했다고 하던데... 맞아요?”유강후는 곧바로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그의 시선은 곧이어 진설아에게 향했다.“네가 그렇게 얘기했어?”진설아는 몸을 부르르 떨며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요. 전 그런 얘기한 적이 없어요.”그러고선 손가락으로 온다연을 가리키며 호소했다.“이건 모함이에요. 절대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연이는 어릴 때부터 거짓말하는 게 버릇이었어요. 습관처럼 저한테 누명을 씌웠다니까요? 대표님, 제 뱃속에 유 씨 가문의 후손이 있다는 걸 깜빡 하신 건 아니죠? 저 미친 X 말을 믿으면 안 돼요.”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무덤덤하게 답했다.“바다에 던지기 전에 일단 그 입부터 찢어야겠네”진설아는 겁에 질린 듯 뒷걸음질 치며 피했다.“안 돼요. 난 유씨 가문의 후손을 임신했다고요. 어떻게 저한테 이래요? 아이를 낳으면 200억 준다고 약속했잖아요.”“왜 갑자기 말을 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
“다연이가 전에 겪은 고통... 똑같이... 아니 그보다 수천 배로 돌려줘야 해.”“안 돼요. 그러면 안 돼요!”유하령이 비명을 질렀다.“아빠가 죽었어요! 아빠가 모든 죄를 짊어졌잖아요. 제발... 저를 그렇게 만들지 마요!”하지만 유강후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그 사람이 죄를 씻고 싶어 했다고 해서 내가 용서해 줘야 한다는 뜻은 아니야. 그때 너희가 법을 피해 가며 사람을 괴롭혔지. 좋아. 지금 잘됐네. 정신병자들은 사람을 때리고 죽여도 법의 심판을 안 받아. 그러니까 네가 그런 벌을 받는 것도... 네 업보지.”유하령은 울부짖으며 욕을 퍼부었지만 유강후는 단 한 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데리고 가. 하지만 일단 죽이지는 마. 죽어버리면 재미가 없잖아.”“네! 대표님!”그는 더는 뒤 돌아보지 않고 다시 식사하던 곳으로 돌아갔다.온다연은 그가 돌아오자마자 미리 까둔 귤 한 조각을 그의 입가에 가져갔다.“얼른 먹어요. 입술이 다 터졌잖아요. 아무리 바빠도 물은 마셔야죠.”그녀는 다시 뜨거운 물을 따라 그의 손에 건넸다.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귤 한 조각을 조용히 입에 넣었다. 그리고 덤덤하게 말했다.“유하령... 정신병원으로 보냈어.”온다연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 정도면 오히려 관대한 거네요. 하지만 제가 더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아저씨가 알아서 하세요.”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하루 종일 나랑 같이 있었는데... 피곤하지 않아?”온다연은 그의 손바닥에 볼을 비비며 속삭였다.“아니요. 아저씨가 있으니까 하나도 안 피곤해요. 오히려 제가 좀 쉬어야 할 것 같은데요?”유강후는 그녀를 들어 올려 무릎 위에 앉히고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이 가슴 가득 퍼지며 왠지 모르게 조금은 덜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다연아... 유민준 걔는...”“전 걔랑은 끝났어요.”온다연이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유민준이
온다연은 처음부터 유하령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유씨 집안이 다 무너지든 모두가 죽든 솔직히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유강후가 저렇게 무너져 있는 걸 보니... 그녀는 가슴이 죄여들 듯 아팠다.그건 말로 다할 수 없는 통증이었다.그가 아무리 강해 보여도 결국은 사람이니 상처도 받고 아프고 지치고 힘들어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알았기에 그래서 그녀는 그를 위해 조금씩 물러서기로 했다.후회가 되고 아프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를 위해서라면 감수할 수 있었다.그 순간 유강후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다연아, 다시는 네가 상처 안 받게 할게. 여기 바람이 좀 세네. 안으로 들어가자.”얼마 지나지 않아 장 비서가 따뜻한 팥죽과 집밥 느낌의 반찬들을 함께 보냈다. 팥죽이 양이 많지 않아서 온다연은 근처 음식점에 연락해 직접 빚은 만두를 더 주문했고 따뜻한 반찬도 한 상 가득 더 보냈다. 그리고 따라온 경호원들과 비서진도 함께 둘러앉아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었다.밥을 먹던 도중 누군가 조용히 병실 안으로 들어와 유강후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유강후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그는 온다연을 향해 말했다.“잠깐 나갔다 올게. 너희끼리 먼저 먹고 있어.”온다연도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그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눌러 앉히며 말했다.“넌 여기 있어. 잠깐이면 돼. 금방 올게.”그러더니 탁자 위에 있던 귤 하나를 들고는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까놔. 돌아와서 같이 먹자.”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아버님 괜찮으실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유강후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병실 문을 나서자 이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의 상태가 좀 이상합니다. 완전히 미쳐버린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하고... 대표님, 정말 그냥 놔두실 겁니까? 설마... 진짜 용서해 줄 생각은 아니시죠?”유강후의 목
그때 유하령이 옆에서 갑자기 소리쳤다. “피... 피가 너무 많아. 아빠가 죽었어. 우리 아빠가 죽었다고요!”그 소리에 유재성이 갑자기 격하게 기침하더니 급기야 피를 토해냈다.유강후가 급히 그를 부축하며 외쳤다. “유하령 당장 끌어내. 간호사, 의사 불러요. 빨리!”유재성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네 큰형… 가서... 빨리 가서 봐...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어서...”그러자 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현장으로 향했다.그리고 그곳엔 이미 숨이 멎은 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있었다. 의료진이 마지막 조치를 하고 있었지만 이미 모든 게 늦은 상태였다.유민준은 그 곁에 무릎 꿇고 앉아 피투성이가 된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복도와 방 안 바닥엔 핏물이 고여 있었다.유강후가 다가서자 의료진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유자성 씨는 휴게실에서 스스로 목을 그었습니다. 경동맥을 절단한 상태였고 발견 당시엔 이미 호흡이 없는 상태였습니다.”유강후는 멍하니 굳은 채 그 말을 듣고만 있었다. 유강후라고 왜 마음이 아프지 않았으랴.어찌 됐든 자기 형이었고 어릴 땐 정말 서로 우애가 좋았다.진짜 틀어지기 시작한 건 유하령을 감싸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그 뒤로 천천히 멀어졌고 결국엔 남이 되어버렸다.유강후는 온다연을 해친 사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하지만 유자성이 이런 방식으로 끝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는 어떻게 그 자리에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그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의료진이 유자성의 시신 위에 흰 천을 덮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그때 유민준이 그의 옷깃을 잡고 울부짖었다.“작은아빠... 이게 진짜예요? 아빠 진짜... 진짜 죽은 거예요? 작은아빠, 아빠 아직 숨 쉬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렇죠?”...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나간 뒤에야 유강후는 고개를 돌렸고 차갑게 말했다.“민준아, 네가 아직 남자로 살고 싶다면... 아버지 장례 제대로 치러. 네가 맡은 회사 두
유재성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유자성을 보지 않았다.유자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자식의 손을 끌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하지만 병실 문 앞에 이르자 그는 유하령과 유민준을 멈춰 세우고 단호하게 말했다.“문 앞에 무릎 꿇고 있어. 절대 일어서지 마. 그래야 할아버지가 마음을 돌리실 수 있어. 이 집에서 쫓겨나면... 너희는 진짜 끝장이야. 예전에 너희가 적으로 돌린 사람들은 다 너희를 죽도록 밟고도 남을 사람들이야.”유하령이 뭔가 말하려 하자 유자성이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특히 너, 유하령. 또 사고 치면... 바로 해외로 보내버릴 거야. 다시는 돌아오지 마. 오늘 이 사단... 절반은 네가 만든 거야.”유하령은 울먹이며 애원했다.“아빠... 잘못했어요. 정말이에요. 제발... 할아버지께 잘 말씀드려 주세요. 쫓겨나는 건 싫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유자성은 그런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네 엄마가 너무 일찍 떠났지. 그게 늘 마음에 걸렸어. 그래서 내가 너희한테 너무 오냐오냐했나 봐. 무슨 짓을 해도 내가 다 감췄고... 결국 오늘 이런 꼴이 났네. 다 내 책임이니 내가 다 짊어지고 갈게. 하령아, 성질 좀 고쳐. 앞으로 사람 대할 땐 좋은 마음으로 다가가. 나쁜 생각 갖지 말고 받은 호의엔 반드시 보답해야 해. 부모 말고는 조건 없이 널 사랑해 주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유하령과 유민준은 아버지의 말에 충격과 절망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들의 눈앞에서 유자성은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말했다.“여기 그대로 있어. 할아버지가 용서 안 하신다고 해도... 일어나지 마라. 난 짐 좀 챙기고 금방 올게.”그는 마지막으로 두 자식을 깊게 바라보고는 병원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나갔다....30분쯤 지났을까.복도 저편에서 갑작스러운 비명이 터졌다.“사람이 자살했어요!”“피가... 피가 너무 많아!”“빨리 응급실로!”“늦었어요... 이미 숨이...”“유 회장님 장남이라잖아! 큰일 났어!”...유하령과 유
“제발... 제발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재산은 하나도 원하지 않아요. 단 한 푼도 바라지 않아요. 그냥... 그냥 본가에 남게 해 주세요. 아버지의 아들로 남게만 해 주세요...”하지만 유재성은 눈을 감은 채 싸늘하게 말했다.“그만 가. 네 자식들 데리고 이 집을 나가. 네 호적은 이미 본가에서 정리하라고 지시했어. 앞으로 넌 유씨 가문의 자손이 아니야. 너희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나 유재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유자성은 긴 침묵 끝에 고개를 깊이 숙여 유재성을 향해 세 번 힘껏 머리를 조아렸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 평생 아버지의 아들이라 믿어왔습니다. 그게 제 자랑이었어요... 제가 유씨 가문 사람이 아니었다니... 본가에서 쫓겨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럴 만큼 제가 큰 죄를 지은 거겠죠. 용서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겠죠. 아버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하령이랑 민준이... 애들까지 함께 쫓아내진 말아 주세요. 애들은 아직 젊고 앞길이 먼 아이들이에요. 본가에서 내쳐진다는 건 그들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낙인이 될 겁니다. 사람들 눈에 짓밟히고 손가락질당하며 살아야 해요.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건... 전부 다 제 책임이에요. 제가 잘못 키웠습니다. 전부 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하지만 유재성은 싸늘하게 대답했다.“너랑 나... 부자지간 인연은 여기까지야.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그만하고 그냥 가.”그제야 유하령의 표정이 무너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 거짓말이죠? 우리 속이시는 거죠?”유민준도 조용히 무릎을 꿇었지만 아무 말 없이 유재성을 향해 조심스럽게 머리를 숙이며 절을 올렸다.“할아버지... 전 그동안 많은 잘못을 했습니다. 벌받는 것도 당연합니다. 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제발...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앞으로는 제대로 살겠습니다.”그는 진심이었다.지난 몇 년 동안 그는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고 철도 들었으며 맡은 두 회사 역
유자성은 입술을 달달 떨며 중얼거렸다.“아버지... 이러지 마세요. 전 아버지 아들이잖아요. 영원히 아버지의 아들이에요. 저 재산 같은 거 원하지 않아요. 한 푼도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저를 본가에서 쫓아내지 말아 주세요...”그러나 유재성은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이젠 됐어. 나는 너한테 줄 것도 빚진 것도 없어. 나도 오래 못 살아. 죽기 전까진... 더 이상 너희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아.”유자성의 얼굴은 점점 잿빛으로 변해갔고 그는 입술을 떨며 되뇌었다.“아버지... 제발, 절 쫓아내지 마세요...”그의 마음 깊은 곳에선 이미 진실을 인정하고 있었다.그 친자확인서는 진짜였고 유재성의 말도 모두 사실이었다.그는 어릴 적부터 유재성 곁에서 자라났다.젓가락을 처음 쥐는 법, 글씨를 쓰는 법, 첫 출근 날의 마음가짐까지... 모든 것을 유재성이 직접 가르쳐줬다.그는 누구보다 유재성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거짓말을 할 리 없었다.그래서 그는 마침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친자확인서는 진짜였어. 아버지가 나를 본가에서 내치려는 것도 진심이네. 그렇다면 나는 진짜... 본가 사람이 아니겠네.’그가 평생 자랑스러워했던 그 성씨와 신처럼 떠받들었던 아버지... 그토록 자부심을 가졌던 본가의 명예와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모든 것과 그가 수없이 입 밖으로 칭찬했던 동생 유강후조차... 결국 단 한 번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그 모든 건 그의 친부모가 목숨으로 대신한 빚이었고 남이 던져준 은혜에 불과했다.오만하고 자존심 강했던 유자성... 태어나서 한 번도 고개 숙여본 적 없는 본가의 장남이 알고 보니 그저 남의 집에서 얹혀살던 양자에 불과했다.그 진실은 마치 뾰족한 바늘처럼 그의 모든 꿈과 자존심을 찢어버렸다.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멍해졌다. 세상이 전부 거짓처럼 느껴졌고 지금 이 순간조차 꿈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그는 손을 들어 자기 뺨을 두 번이나 사정
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호복을 가다듬은 뒤 안으로 들어가 손에 쥔 약을 유강후에게 건넸다.“아버님께 이 약을 드려요.”유강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다연아...”온다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고 싶은 말은 집에 가서 해요. 난 원래 그렇게 대인배 아닌 사람이에요. 날 해쳤던 사람은 절대 쉽게 용서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분은 당신 아버지잖아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한 번쯤은 물러서 줄 수 있어요. 아저씨, 제 마음 저버리지 마요.”그 말에 유강후는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가까지 붉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감춘 채 약 하나를 꺼내 유재성의 입에 넣어주었다.약을 삼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재성은 숨이 한결 편해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강후야, 이게 무슨 약이냐?”유강후가 답했다.“곽 박사님이 다연이 몸조리하라고 주신 거예요. 다 먹지 않고 열 알 남겨뒀는데 혹시 몰라서요. 솔직히 저도 효과가 있는지는 몰라요. 그래도 해가 되진 않으니까요.”유재성의 눈빛이 반짝였다.“곽혜진? 그 여의사 말이야?”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그때 유하령은 온다연을 노려보며 독설을 퍼부었다.“너 지금 내 할아버지한테 무슨 약 먹인 거야? 우리 할아버지 몸은 아무나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니야. 네 따위가 내놓은 천한 약 따위 함부로 먹이면 안 된다고!”온다연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친자확인서를 집어 들었다. 대충 읽어본 그녀는 눈이 동그래지더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 너... 너희 아버지가 유 회장님 친아들이 아니야?”유하령이 반박하기도 전에 온다연은 박장대소하며 말했다.“와, 오늘 진짜 운수 대통이네. 어쩜 이렇게 좋은 일만 생기지?”유하령은 절규하듯 외쳤다.“그건 거짓말이야. 전부 조작이야. 우리 아빠가 본가 사람이 아니라니 말도 안 돼! 이건 다 네 계략이야. 온다연, 왜 날 이렇게까지 망치려고 해?”온다연은 비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유하령, 넌 늘 자기보다 낮은 사람들 무
“네 아들 유민준... 그동안 무슨 사고들을 쳐왔는지 너도 잘 알겠지. 그나마 요 몇 년 좀 나아졌다 싶어서 내가 본가에서 가장 가능성 있는 두 회사를 맡긴 거야. 그 애 실력으로 그 두 회사 꾸려나가는 것도 벅찰 거야.”“그리고 네 딸 유하령은 어떤 인간인지 너 스스로 모르겠어? 예전 그 일들을 진짜 네 능력으로 덮은 줄 알아? 내가 평생 가장 미안한 사람은 현미와 강후야. 그 은혜 때문에 내 결혼을 망쳤고 내 딸을 희생시켰어. 다른 누구든 나를 원망해도 돼. 다 괜찮아.하지만 너, 유자성. 너만은 나한테 그럴 자격 없어.”유자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아버지, 아버지가 결혼생활 망친 걸 제 탓으로 돌리실 순 없죠. 그리고 제 어머니도 죄 없는 분이었어요.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강현미도 그 자리에 있었을 리 없었겠죠.”그 말에 유재성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오랫동안 침묵하던 그는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네 진심이었구나. 내가 평생 키워온 놈이 고작 이런 배은망덕한 놈이었다니...”그는 분노 섞인 시선으로 유자성, 유민준, 유하령을 차례로 훑어보며 낮고 느린 목소리로 말했다.“좋아. 그럼 지금 여기서 내가 이유를 설명해 주지.”“강후야, 책상 위에 있는 다른 서류봉투를 저놈한테 줘라.”유강후는 아무 말 없이 그 서류봉투를 유자성에게 던졌다.유자성은 그 안에 또 다른 유언장이 들어 있을 줄 알고 펼쳤지만 그 안엔 뜻밖에도 친자 확인서가 들어 있었다.그는 확인서의 이름과 결과를 보자 믿을 수 없다는 듯 절규하듯 외쳤다. “아니야.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없어!”옆에 있던 유하령도 깜짝 놀라 확인서를 낚아채더니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아니에요. 이건 조작이에요. 전부 다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려고 짠 계략이잖아요!”“분명 온다연이야! 그 여자... 분명 삼촌한테 뭔가 시킨 거야. 나를 망하게 하려고 다 내 모든 걸 빼앗으려고 한 거라고!”“닥쳐!”유강후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