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에 잔뜩 질린 진설아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유강후에게 애원했다.“대표님,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이런 실수 반복하지 않을게요.”유강후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돌아서고선 온다연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유심히 살펴보았다.“때리고 싶으면 다른 사람 시켜. 괜히 손이라도 다치면 어떡해.”그 시각 진설아는 유강후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부짖었다.“저랑 엄마가 유씨 가문에서 지낸 시간만 해도 십여 년인데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제발요. 이대로 끝내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유강후는 쓰레기라도 본 듯 혐오가 가득 담긴 눈길로 진설아를 힐끗 보더니 고민도 없이 발을 걷어찼다.“꺼져.”온다연은 진설아의 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감옥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 왜 여기에 나타난 거죠?”유강후의 답을 듣기 도전에 온다연은 계속하여 말을 이었다.“설마 임신해서 그래요? 누구 아이인데요?”온다연은 유강후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아저씨 아이를 임신했다고 하던데... 맞아요?”유강후는 곧바로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그의 시선은 곧이어 진설아에게 향했다.“네가 그렇게 얘기했어?”진설아는 몸을 부르르 떨며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요. 전 그런 얘기한 적이 없어요.”그러고선 손가락으로 온다연을 가리키며 호소했다.“이건 모함이에요. 절대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연이는 어릴 때부터 거짓말하는 게 버릇이었어요. 습관처럼 저한테 누명을 씌웠다니까요? 대표님, 제 뱃속에 유 씨 가문의 후손이 있다는 걸 깜빡 하신 건 아니죠? 저 미친 X 말을 믿으면 안 돼요.”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무덤덤하게 답했다.“바다에 던지기 전에 일단 그 입부터 찢어야겠네”진설아는 겁에 질린 듯 뒷걸음질 치며 피했다.“안 돼요. 난 유씨 가문의 후손을 임신했다고요. 어떻게 저한테 이래요? 아이를 낳으면 200억 준다고 약속했잖아요.”“왜 갑자기 말을 바
온다연이 원하는 건 돈도 아니고 유강후도 아니다.그저 아이가 괜찮아지면 하루라도 빨리 아이와 함께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이다.유씨 가문의 환경에서 좋은 아이를 키우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에 무조건 아이와 함께 떠나는 게 답이다.유강후는 진지하게 말했다.“넌 평생 내 곁에만 있어야 돼. 그러니까 비현실적인 이상한 생각 따윈 하지 마.”그러더니 허리를 굽혀 밖으로 드러난 그녀가 발을 담요 안으로 밀어 넣었다.“아무리 여기가 따뜻해도 신발은 신어야지. 그러다가 몸 상해.”온다연은 고민도 없이 유강후를 밀어냈다.“신경 쓰지 마요.”유강후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고선 소파에 고정시켰다.“내가 아니면 누가 신경 써?”온다연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반응에 유강후는 또다시 주한이 떠올랐다.그녀는 자신이 어떤 벌을 받게 될지조차 몰랐지만 한편으로는 유강후가 주희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궁금했다.“주희는 어떻게 했어요?”말이 끝나자마자 경호원이 급히 들어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대표님, 진설아 씨가 문을 열고 뛰쳐나가다가 주행 중인 다른 차에 부딪혀서 병원 입구에 쓰러졌습니다. 피를 많이 흘린 거로 보아 아이를 지키는 건 불가능해 보입니다.”“어떻게 할까요?”유강후는 침묵했다.그런데 이때 이권이 들어왔다.“도련님, 만약 진설아 씨가 다른 곳에서 다쳤다면 살릴지 말지 신경 쓰는 사람이 없을 텐데 병원 입구에 임산부가 쓰러져있는 걸 그냥 지나친다면 여론이 안 좋게 움직일게 분명합니다. 그걸 감당할 수가...”유강후는 온다연을 힐끗 바라보았으나 그녀의 처진 눈매와 냉랭함만이 얼굴에 가득했다.“다른 병원으로 옮겨. 살릴 수 있으면 살리고, 못 살리면 그냥 원래 목숨이 거기까지인 거야.”“그리고 유민준한테 연락해. 아이가 죽든 살든 아빠라는 사람이 처리해야지. 진설아가 운 좋게 살게 된다면 걔네 엄마랑 같이 살게 감옥 들어갈만한 이유 만들어서 처리해.”이권과 경호원이 떠난 후 유강후는 차분한 목소리
유강후가 키스를 하든 말든 온다연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예전이라면 유강후가 지금처럼 키스를 할 때 아프다고 말하던지 아니면 다른 리액션이 있었다. 비록 반응은 미비했지만 유강후는 그것마저도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눈을 감은채 꼼짝하지 않았고 마치 감정 없는 목각인형이나 다름없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 유강후는 그녀의 턱을 잡고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온다연. 왜 아무 반응이 없는 거야.” 온다연은 아픈 듯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지만 그럼에도 눈을 뜨지 않았다. 유강후는 자신에게 물려 빨갛게 부어오른 그녀의 입술을 노려보며 주한과도 이렇게 키스를 했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점점 이성을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유강후는 한 손으로 온다연의 부드러운 허리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감싼 채 품 안에 꽉 껴안으며 숨 막힐 정도로 키스를 퍼부었다. 그러나 온다연은 소파 시트를 움켜쥘 뿐 그 어떤 리액션도 없었다. 그녀가 이런 행동을 할수록 유강후의 마음에는 더 큰 분노가 밀려왔고 저도 모르게 점점 힘을 주게 되었다. 곧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이런 느낌은 유강후로 하여금 더욱 온다연에게 집착하게 만들었다. 그의 손은 습관처럼 천천히 온다연의 아랫배 쪽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불룩하던 튀어나온 부분은 이제 사라졌고 남은 건 평평한 아랫배와 부드러운 살결뿐이었다. 순간 가슴이 욱신거리는 고통에 정신을 번쩍 차린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서 풀어주었다. 눈은 빨갛게 충혈되었고 호흡마저 불안정해졌다. 유강후는 그녀의 입술에 묻은 피를 닦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온다연, 기억해. 넌 영원히 내 거야. 몸이든 마음이든 모두 내 거야.” “넌 평생 내 곁에만 있어야 돼. 아무 데도 갈 수 없을 거야.” 온다연은 눈을 내리깔고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유강후의 시선에는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속눈썹만 보일뿐 그녀의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유강후는 더 이상 이런 걸 신
주희는 주한의 친남동생이다. 두 사람은 지난 몇 년간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왔다.그리고 온다연은 하마터면 아이를 잃을 뻔했다.고의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이걸 용서할 만큼 마음이 너그럽지는 못했다.“주희야,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으니까 이만 나가줘.”주희는 눈빛이 흐려지더니 목소리 톤마저 바뀌었다.“누나,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는 얘기예요?”온다연의 침묵에 주희는 뜬끔없이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형이랑 안 닮아서 그런 거예요? 그래서 보고 싶지 않은 거예요?”“형은 누나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우리 형은 더러운 인간이라고요.”“닥쳐.”온다연은 손을 들어 뺨 한대를 날리고선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어렸을 때부터 널 키워준 게 형이야. 어떻게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어?”주희는 맞은 얼굴을 가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온다연을 바라봤다.“누나 지금 나 때렸어요?”“지금껏 때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잖아요. 왜 이제는...”사실 온다연도 자신이 왜 때렸는지 몰랐다.동생인 주희는 이 세상에 남은 주한의 유일한 흔적이나 다름없다.온다연은 마음을 가다듬은 후 진지하게 말했다.“나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으니까.”주희는 집착하는 눈빛으로 온다연을 바라봤다.“형이 누나한테 잘해준 건 누나가 목숨을 구해줘서 그런 거예요. 형의 죽음이...”주희는 말끝을 흐리더니 슬픔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온다연을 쳐다봤다.“누나, 제가 형이랑 두 살 차이밖에 안 나요. 저도 이제 컸고, 충분히 누나를 지켜줄 수 있어요.”주희는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증오의 눈으로 유강후를 바라봤다.“이 사람은 누나의 감정을 가지고 노는 것뿐이에요. 평생 이 사람 옆에 있을 거예요? 우리 형보다도 더 못한 인간이라고요.”“솔직히 우리 형도 누나랑 만날 자격이 없어요.”“입 닥쳐.”온다연은 참다못해 폭발했다.“정말 미쳤구나? 네가 무슨 자격으로 주한이를 평가해. 걔는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사람이었어. 내 앞에서
왜 온다연의 운명은 이렇게 잔인할까?똑같은 장면이 또다시 그녀의 눈앞에서 반복되었다.온다연은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서 똑바로 서 있지도 못했다.이때 유강후에 방에서 뛰쳐나와 재빨리 그녀를 품에 안았다.그는 아래층을 힐끗 보고선 온다연의 눈을 가렸다.“눈 감고 보지 마.”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움켜쥐고 흐느껴 울었다.“제발 살려줘요. 주한이 좀 살려줘요.”아래층을 보니 어느덧 의료진이 튀어나와 주희를 들것으로 옮기고 있었다.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피를 본 유강후는 나지막하게 말했다.“다연아, 아마 살아남지 못할 거야.”“내가 신도 아니고 무슨 수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겠어. 그건 나도 못해.”그 말에 다리에 힘이 풀린 온다연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그럼에도 유강후는 품에서 온다연을 놓지 않았다.“다연아...”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잡고 울먹였다.“싫어하는 거 알아요... 하지만 주한이 동생이잖아요... 제발...”그녀는 유강후의 눈을 바라보며 간절하게 빌었다.“이렇게 빌게요. 제발 살려줘요. 살리기만 한다면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줄게요.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도와줘요...”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에 빠진 온다연은 어느새 눈물범벅이 되었다.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주희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하나뿐이었다.주희는 주한이가 가장 사랑하는 동생이고 어려서부터 그들과 함께 자란 가족이나 다름없다.그러니 온다연은 주한이가 남긴 유일한 혈육을 못 지켰다는 죄책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유강후도 온다연이 이렇게까지 우는 건 처음이었다.갈비뼈가 몇 개 부러질 정도로 큰 부상을 입어도 눈물조차 흘리지 않던 강한 사람이 다른 사람 때문에, 그것도 주한의 동생 때문에 이렇게 슬퍼하니 유강후도 기분이 착잡했다.한편으로는 그녀의 인생에 주한이라는 비중이 꽤 크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온다연이 흘리는 눈물 매 한 방울이 강한 염산처럼 그의 심장을 부식시켜고 있었다.화가 나고 충격적인 건 둘째라치고 너무나 상처였다.“주한 때문에 나한테
유강후는 고개를 숙여 온다연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했다.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러고선 몸을 돌려 이권에게 명령했다. “미래 그룹이랑 내 명의로 된 기타 그룹에 지금 당장 긴급 요청을 보내고 일단 희귀 혈액형을 가진 직원들이 몇 명 있는지 알아봐. 헌혈할 의향이 있다면 무조건 병원으로 데려와. 승진이랑 급여 인상이라는 조건도 걸어두고.” “워낙 희귀한 혈액형이라 우리 그룹에도 해당되는 사람이 별로 없을 거야. 그러니까 언론사에 연락해서 기사로 퍼뜨려. 30분 내에 병원에 도착하면 1ml에 2천만 원, 한 시간 내에 도착하면 1ml에 천만 원.” “그리고 이준이랑 현수 씨한테도 연락해. 두 사람 수중에 있는 그룹도 똑같이 할 거야.” “다른 건 다 가능하지만 언론사에 연락하는 건 안됩니다. 사회적 여론이 커져서 분명히 문제가 생길 겁니다.” 유강후는 극도로 냉랭한 모습을 되찾았다. “신경 쓰지 말고 시키는 것부터 처리해.” “기사가 나간다고 해도 30분 만에 도착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주희 씨는 과다 출혈로 이미 위급한 상황입니다.” 유강후는 매우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희귀 혈액형인걸 잊었어? 나부터 뽑으면 돼.” 이권은 화들짝 놀랐다. “안됩니다. 엄청난 양이 필요한데 고작 대표님 혼자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병원에 혈액 재고가 있다며? 그걸 나한테 수혈하고 다시 내 피를 뽑으면 되잖아. 잔소리 그만하고 얼른 가자.” 이권은 곧바로 답했다. “그래도 이건 안됩니다.” 유강후는 참다못해 버럭 화를 냈다. “왜 내 말에 이렇게 토를 달지?” 이권은 울며 겨자 먹기로 참을 수밖에 없었고 떠나기 전 온다연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그 시각 온다연은 혼란스러운 마음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녀 역시 유강후가 곧 주희에게 수혈하러 간다는 걸 들었다. 줄곧 범접할 수 없는 싸늘함과 도도함을 풍기던 남자가 자신을 위해 이렇게 희생하니 온다연은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미묘한 감정이 솟아오른 그녀는 유강후의 손목을
온다연은 요즘 유강후와 지낸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뒤섞인 다양한 사람과 사건을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미어졌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유강후와 어떻게 지내야 할지 몰라 막막함에 이런 느낌이 들 수도 있다. 현재 그들 사이에는 아이가 있고, 유강후도 주희를 구하겠다고 약속까지 했으니 전과 똑같은 태도로 그를 대하는 건 옳지 않은 행동인 게 분명하다. 적어도 더 이상 욕설을 더부으며 안된다. 온다연은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미래가 걱정되었다.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조차 버거운 상황에 신경 써야 할 일은 날로 들어가고 있으니 점점 한계치에 다다랐다. 과거도 미래도 생각하지 않는 현재만 살고 싶었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생각할수록 피곤함이 밀려왔고 약 때문인지 온다연은 천천히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영원시로 돌아갔다. 고유정이 단검을 손에 든 채 미친 듯이 달려왔고 곧바로 유강후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지켜줬다. 특수 훈련을 받아 일반인은 접근조차 못하는 날렵함을 가졌음에도 유강후는 피하거나 막기는커녕 오히려 두 손으로 온다연을 꽉 끌어안은 채 온몸으로 단검을 막았다. 그렇게 고유정의 칼부림을 몇 차례나 견뎌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온다연은 잠결에 흘린 눈물로 인해 두 눈이 팅팅 부어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녀와 유강후에게도 짧지만 달콤한 나날들이 있었다. 설레는 느낌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게 온몸에 와닿는 가슴 벅찬 감정은 진실했다.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른 온다연은 침대에서 내려와 밖으로 뛰쳐나갔다. 입구의 간호사들은 감히 막을 수가 없어 마지못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병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채혈실 입구에 도착했다. 그 시각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유강후의 양팔에는 혈액주머니가 걸려있었다. 온다연이 이곳으로 온 걸 보고 유강후는 표정이 일그러졌다.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온다연이 안으로 뛰어갔다. 그녀는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유강후의 허리를
유강후는 두 눈이 빨갛게 부어오른 온다연을 보고선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또 울었어? 눈 부은 것 좀봐.” 온다연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꿈꾸다가 울었어요.” 유강후는 감정이 요동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꿈에서 내가 또 다쳤어? 그래서 이렇게 팅팅 부어 오늘 정도로 운 거야?” 온다연은 입술을 깨물고 눈을 내리깐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아저씨라고 불러도 돼요?” 유강후는 고개를 숙여 온다연의 이마에 입맞춤했다. “당연하지. 네가 부르고 싶은 대로 맘껏 불러도 돼.” 온다연은 그의 시선을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은 듯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우린...” 이때 입구에서 쭈뼛쭈뼛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인기척에 고개를 든 유강후는 그 사람을 힐끗 쳐다보고선 담담하게 말했다. “오늘 도와줘서 고마워요.” 온다연도 입구에 선 사람에게 시선이 갔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난번 전통 한옥에서 피팅할 때 알게 된 임청하라는 모델이었다. 심지어 영원시에서 유강후에게 수혈한 적도 있다. ‘여긴 왜 왔지?’ 온다연을 발견한 임청하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선 재빨리 눈길을 돌렸다. “대표님이 없었다면 전 대학도 다니지 못했을 거예요. 대표님은 제 은인인데 이 정도는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그리고 마침 이 근처에 있었어요.” “차에서 핸드폰 하다가 우연히 기사를 보게 된 거예요. 그래서 고민도 없이 바로 달려왔죠.” 유강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죠.” 말을 이어가던 유강후는 고개를 돌려 이권을 바라봤다. “전에 제시한 금액대로 청하 씨한테 넘겨줘. 제일 먼저 도착했으니까 2억 더 보태.” 임청하는 입술을 깨물며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돈은 필요 없습니다. 염치 불고하고 대표님께 부탁 하나를 드려도 될까요?” 조명 아래 비친 그녀의 얼굴은 유난히 창백했고 얇은 옷 한 장을 걸치고 있어서 그런지 꽤나 초
술이 준비된 곳으로 걸음을 옮기니, 사람이 조금 뜸했다.진시현은 유강후의 팔을 조심스럽게 놓으며 공손하게 말했다.“대표님, 우리가 이렇게 있으면 사모님께서 보시고 오해하시는 건 아닐까요?”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는 지금까지 잘 해왔어.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오늘 맡은 역할만 제대로 해.”그는 방금 전 험담을 늘어놓던 사람들 쪽을 아주 잠깐 바라보더니 차가운 말투로 덧붙였다.“아까 수군거리던 사람들 찍어서 이권에게 보내서 처리하게 해.”진시현은 즉시 대답했다.“네, 대표님.”그녀가 살짝 고개를 들며 긴장된 표정을 띠었다.“김원도가 왔습니다.”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다시 유강후의 팔을 친밀하게 잡고, 그의 몸에 기댔다.애교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강후 씨, 저 조금 추워요.”유강후는 손짓하자마자 누군가 부드러운 캐시미어 숄을 가져왔다.그는 직접 숄을 집어 들고 진시현의 어깨에 다정하게 걸쳐주었다.그리고 숄을 걸쳐주며 살짝 몸을 기울여, 마치 그녀에게 입을 맞추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조심해. 저 근처에도 몇 명이 있어.”진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대답했다.“네, 대표님.”그때 김원도가 다가왔다.그는 진시현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유 대표, 이분은 누구지?”유강후는 진시현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담담하게 말했다.“김씨 집안 사람이라면 강씨 집안의 휘장을 모를 리가 없겠지. 내 약혼녀야.”김원도는 손가락에 낀 반지를 쓰다듬으며 낮게 웃었다.“유 대표는 정말 복이 많네.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 곁에 있으니 오늘 밤에도 많은 여성분들이 마음 아파하겠어.”유강후는 김원도의 말을 무시한 채, 시선을 그에게서 돌려 방금 막 들어온 다른 남자를 바라보았다.그 남자는 김원도와 닮았지만, 그의 음험한 기운은 전혀 없었다.그는 유강후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원도에게 다가갔다.“형, 형도 여기 있었어?”김원도는 얼굴빛이 변하며 말했다.“김원혁, 네가 왜
비밀스럽게 진행되었지만, 결국 소문은 새어 나갔고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해 질 무렵, 유강후와 진시현이 뉴월드 호텔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그 자리는 단숨에 술렁거렸다.유강후는 말할 것도 없이 경원시 전체를 통틀어도 가장 빛나는 존재였다.그는 권력자들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인물로, 그의 출현은 곧바로 주목을 끌었다. 연회 주최자인 주경한은 유강후를 보자마자 반갑게 달려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유 대표님,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요즘 많이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제 연회에 참석해 주시다니,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그가 한 발짝 더 다가서며 유강후의 옆에 서 있는 진시현에게 눈길을 돌렸다.그리고 단번에 그녀의 가슴 위에 달린 블루 사파이어 브로치를 알아차렸다.조명 아래에서, 브로치 가장자리의 Y 모양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주경한은 이 바닥에서 감각이 빠르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그는 한눈에 이것이 강씨 집안의 여주인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물건임을 알아차리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 이분이 바로 사모님이시군요!”그러나 유강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단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주경한은 이미 소문으로 유강후가 요즘 한 아가씨를 매우 애지중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그녀가 강씨 집안 여주인의 물건을 사용할 정도라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혹시 유 대표님, 곧 결혼이라도 하시려는 건가요?”유강후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곧 합니다.”주경한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그럼 제가 빨리 축의금을 준비해야겠네요.”그는 진시현을 보며 말을 이었다.“온다연 씨 되시죠? 대표님께서 아주 각별히 아끼신다고 들었습니다...”진시현은 유강후를 살짝 바라보았다.그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아니요, 저는 진시현입니다.”주경한은 순간 멈칫했지만, 곧 웃음을 터뜨렸다.“아, 맞다, 진시현 씨. 제가 착각했네요. 두 분, 안으로 들어가시죠
장화연의 얼굴에는 감정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사모님, 도련님을 믿으셔야 합니다.”그 말은 온다연의 추측이 사실임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온다연의 심장은 순간적으로 꽉 조여들었고, 마치 뒤틀려버린 밧줄처럼 고통스러워 몸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그래서, 정말로 다른 여자와 함께 있다는 거네요.”장화연은 말했다.“이건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모님과 우림 도련님의 안전과도 관련이 있는 일이에요. 도련님께서는 사모님께서 걱정하실까 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하셨지만, 저는 사모님께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이 점점 더 무서워질 만큼 하얗게 질려가는 것을 본 장화연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누군가 사모님의 안전을 담보로 도련님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 며칠 동안 도련님은 밖에 나가 사모님처럼 보이는 사람을 일부러 꾸며냈어요. 그렇게라도 설명해 드리면 조금은 나아지실까요?”장화연은 유강후 곁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며 그의 모든 행적을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이었다.그렇기에 그녀의 말은 묵직한 신뢰를 주었고, 때로는 유강후를 대신해 발언하는 권위도 있었다.온다연은 그런 그녀의 말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하지만 그 전화.그녀가 그렇게 오래 들었던 그 전화가 정말 거짓일 수 있을까?온다연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강후 씨의 휴대폰을 다른 사람이 받을 수 있나요?”장화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조용히 말했다.“사모님,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모든 건 도련님께서 돌아오신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워낙 복잡하니, 타인들의 이간질에 넘어가지 마세요.”그녀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제가 우림 도련님을 데려오겠습니다. 오늘 밤은 사모님께서 아이와 함께 주무세요.”곧 예쁜 아기가 방으로 안겨 들어왔다.아이가 들어오는 순간, 온다연은 조금이나마 마음이 평온해지는 걸 느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아이의 곤히 잠든 얼굴을 쓰다듬으며, 이마에 부드럽게
그는 수년 동안 유강후의 곁에서 그의 냉혹한 수완을 지켜보며 살아왔다.하지만 이번만큼은 유난히 매섭고 강렬했다.김씨 집안은 동양국에서 가장 유명한 재벌 중 하나로 손꼽혔다. 그런데 불과 한 달 만에 몰락했고,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추락하고 말았다.이 과정에서 소요된 막대한 자금과 수단, 그리고 상업계에 불어닥친 폭풍우 같은 소란은 평범한 이들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이번 사건은 그가 유강후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인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그리고 또 한 가지 확실히 깨닫게 했다.앞으로는 정말로 의지할 대상을 찾는다면, 온다연을 선택하는 게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거라는 사실을.온다연의 방.장화연은 따뜻한 우유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온다연이 침대 모서리에 웅크린 채 몰래 눈물을 훔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방 안의 부드러운 조명 아래, 온다연의 빨갛게 부은 눈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녀는 분명 울고 있었다.장화연은 우유를 내려놓고 그녀 옆에 조용히 앉았다.“사모님, 도련님이 보고 싶으신 거예요?”온다연은 고개를 저으며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강후 씨가 왜 오늘 오지 않는 거죠? 정말 회사에서 회의 중인 걸까요?”장화연은 따뜻한 우유를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악몽을 꾸셨죠? 이거 마시면 좀 나아질 거예요.”온다연은 우유를 받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강후 씨 오늘 너무 심했어요. 저한테 한 달간 휴학하라고 했어요. 이유는 단지 염지훈이 제 선생님이라는 것뿐인데, 저랑 상의도 없이 제 수업을 멋대로 중단시켰어요.”“원래는 그 사람과 크게 싸우려고 했어요. 하지만 우리가 결혼도 했고, 아기까지 있으니 앞으로는 모든 일을 잘 상의하며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참았어요. 그런데 강후 씨는...”온다연은 침대 시트를 움켜쥐며 낮게 속삭였다.“혹시 다른 여자가 생긴 걸까요? 강후 씨는 다를 거라고 믿었는데, 결국 다른 재벌 자제들과 다를 게 없었네요
유강후는 온다연이 악몽에 시달린 줄 알고 가슴 아파하며 물었다.“다연아, 악몽 꿨어?”온다연은 가볍게 답하고선 말을 이었다.“다른 여자랑 같이 있는 꿈을 꿨어요.”하루 종일 전전긍긍하던 유강후는 온다연의 목소리를 듣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다른 여자랑 있을까 봐 걱정됐어? 꿈에서도 내 생각뿐이네?”온다연이 물었다.“어디에 있는지 왜 대답 안 해요?”“회사에서 미팅 중이었어. 아마 이틀 동안 바빠서 못 갈 거야. 아이랑 같이 잘 지낼...”“강후 씨.”온다연은 그의 말을 끊었고 곧바로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거짓말하고 있잖아요. 옆에 다른 여자 있죠?”유강후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온다연의 흐느끼는 목소리에서는 그녀의 기분이 고스란히 드러났다.“아까 전화했을 때 다 들었어요. 다른 여자랑...”온다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유강후는 그녀가 또 악몽을 꾼 줄 알고 걱정된 마음으로 장화연에게 전화를 걸었다.곧이어 핸드폰 너머로 장화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유강후는 초조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지금 당장 다연이가 있는 방으로 가봐. 방금 통화했는데 악몽을 꿨는지 울고 있었어.”장화연이 답했다.“지금 바로 가볼게요.”“일이 복잡해져서 당분간은 못갈지도 몰라. 다연이랑 우림이 잘 돌봐줘. 절대 밖에 나가게 해서는 안 돼.”“알겠습니다.”“차라리 우림이를 옆에 데려다줘. 아이랑 같이 자면 마음이 편해질 거야.”“그럴게요.”장화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어제 경호원을 통해서 들었는데 다연 씨가 나은별 씨를 만났다고 합니다. 아마 그때 안 좋은 얘기를 들었을 수도 있을 것 같네요.”“다연 씨는 힘든 일을 마음속에 담아두는 분입니다. 도련님께 대한 오해가 생겼다면 그 마음을 달래는 게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모릅니다. 두 분 어렵게 여기까지 온 만큼 서로에게 그 어떤 오해도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도련님, 나은별 씨가 무슨
부검 결과 여자는 죽기 직전에 성폭행을 당했고 체내에서 5개의 DNA가 검출되었다.대역은 온다연처럼 보이기 위해 평소 그녀가 입는 것과 똑같은 옷을 입었다.유강후는 온다연과 매우 닮은 그 얼굴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멘탈이 무너졌다.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는 내면 깊숙이 잠재되어 있던 공포과 패닉을 느꼈다.만약 죽은 사람이 정말 온다연이라면 유강후는 자신이 어떤 미친 행동을 저지를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전례 없는 살인 충동이 밀려왔고 그는 김원도와 김씨 가문의 뼈까지 가루로 만들리라 다짐했다.위험하고 불안함 밤이 시작되었다. 수십 대의 헬기와 수많은 경찰이 동시에 파견되어 한옥 주변의 모든 곳을 샅샅이 수사했다.하지만 효과는 미미했고 전문 킬러라서 그런지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유강후는 한옥에 들어온 이후로 밖에 나가지 않았다.그럼에도 여전히 누군가 그의 핸드폰으로 사진을 보내왔다.사진에 찍힌 사람은 그와 진시현인데 얼굴 정면이 아주 선명하게 찍혔다.실리콘 가면을 쓴 진시현의 얼굴은 온다연과 똑같았다.이건 과시가 아니라 경고다.말할 것도 없이 유강후는 단번에 사진을 보낸 사람이 누군지 알아챘다.김원도는 언제든지 죽일 수 있으니 사진 속의 여자를 잘 지키라고 선포하는 거나 다름없다.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른 유강후는 외투를 옆으로 던져놓고 다시 소파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이권은 진시현에게 차 한 잔 타오라고 시켰다.“도련님,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다연 씨는 안전하니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그쪽으로 이동하는 게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그는 홍차를 유강후에게 건넸다.“며칠 동안은 외출을 자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통화도 줄이시고요. 현재로서는 모두가 안전하는게 가장 중요합니다.”이권의 말이 매우 일리가 있고 사실이지만 유강후는 귀에 거슬렸다.한편으로는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기도 했다. 김원도 한 명으로도 충분히 혼란스러운데 똑같은 인간이 여러 명이 나타났다면 온다연을 지켜줄 수 있을까?걱정은 자
온다연과 매우 흡사해 보이는 여자가 그들에게 공순하게 인사하며 말을 건넸다.“대표님, 방금 전화가 여러 통 왔는데 이 비서님이랑 안에서 회의 중이셔서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유강후는 곧바로 핸드폰을 확인했고 그곳에는 온다연이 걸어온 부재중전화가 찍혀있었다.한 시간 전에 걸려 온 전화였다.유강후는 시간을 확인했고 지금은 새벽 3시 45분이다.이때 이권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다연 씨가 도련님이 보고 싶은가 봐요.”줄곧 정색하던 유강후는 그제야 표정이 조금 풀렸고 곧바로 온다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핸드폰은 꺼져있었다.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옷걸이에서 코트를 빼내더니 곧장 밖으로 걸어갔다.이때 이권이 말렸다.“도련님, 안 됩니다. 저희를 지켜보는 시선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지 않습니까. 다연 씨 쪽은 안전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장 집사도 옆을 지키고 있으니 안심하세요.”“우림 도련님도 그쪽으로 보냈습니다. 도련님이 옆에 계시니 다연 씨의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을 겁니다.”유강후는 입술을 깨물었고 눈빛에 드러난 분노와 원망은 점점 더 짙어졌다.‘김원도, 내 손으로 널 죽여버릴 거야.’금융위기가 닥쳤을 때도 유강후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고 결코 발을 빼거나 물러선 적이 없었다.그런데 이제는 김원도 때문에 피하는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아내와 아이의 목숨으로 위협하고 있으니 섣불리 행동할 수가 없었다.‘죽여버릴 거야.’물론 김원도도 좋은 날만 보낸 건 아니다.불과 한 달 만에 미래그룹은 김씨 가문의 시장 점유율 70%를 먹어 치웠고 김신 그룹은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인지도가 조금이라도 있는 기업이라면 미래 그룹과 김신 그룹이 대치 상황이라는 걸 눈치챘기에 아무도 섣불리 김신 그룹의 손을 잡지 않았다.김신 그룹의 주가는 한순간에 폭락하였고 보름도 채 안 되어 시가총액이 3분의 1로 줄어들었다.그뿐만 아니라 동양국의 다른 가문에서는 김씨 가문의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이고 있다.더불어 김원도의 아버지는 자신에게 혼외 자식이 두
두 경호원은 온다연의 신분을 알고 있었고 더욱이 그녀가 유강후의 목숨과도 다름없다는 사람인 걸 알기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사모님.”집에 돌아와 보니 장화연도 있었다.게다가 아이를 데리고 함께 이곳으로 왔다.온다연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최근에 공부하느라 바쁜 데다가 저녁에는 유강후와 함께 시간을 보냈으니 며칠 동안 아이에게 다가갈 틈이 없었다.온다연은 유강후가 왜 그녀와 아이를 이곳에 데려왔는지 이해하지 못했다.장화연은 한옥의 인테리어를 바꾸려고 하는데 페인트 냄새가 아이한테 안 좋을 것 같아 이곳에 잠깐 머무는 거라고 설명해 줬다.비록 의심이 들었지만 별생각은 하지 않았다.사실 아이가 옆에 있다면 어디에서 지내던 그녀에게는 똑같았다.온다연은 아이가 잠들 때까지 놀아줬고 늦은 시간이 되었지만 유강후는 나타나지 않았다.한편으로는 유강후가 제멋대로 휴학 신청을 한 게 너무 화가 났다.염지훈이 교수로 온 게 온다연의 잘못도 아닌데 왜 갑자기 수업을 못 듣게 하냐는 말이다.생각하면 할수록 터무니없고 불합리한 결정이다.그러다가 잠이 든 온다연은 잠결에 옆을 만졌고 텅 비어 있는 느낌에 공허함이 밀려와 괴로웠다.온다연은 핸드폰을 꺼내 유강후와의 카톡 대화창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진지하게 얘기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고민 끝에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여러 번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네 번째 시도를 했을 땐 통화가 연결됐으나 들려오는 건 여자의 목소리였다.온다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환청이 들리는 건가 싶어 귀를 의심했다.“누구세요?”그러자 전화가 바로 끊겼다.온다연은 굴하지 않고 다시 걸었지만 유강후는 받지 않았다.숨이 막혀온 온다연은 잘못 들은 거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다시 한번 걸었을 때 통화가 연결됐고 이상한 기계음이 흘렀다.그러고선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선명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희미한 남자의 목소리는 유강후가 틀림없다.그들이 나눴던 사랑처럼 핸드폰 너머로는 서로에게 엉켜있는
온다연은 나은별의 손을 뿌리치고 뒤돌아 그녀의 얼굴을 노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사랑하는 사람이 살아있다면 기뻐해야 하지 않나요? 왜 은별 씨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죠?”온다연은 유강후가 설명해 줬던 당시의 상황과 더불어 문득 이상한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평소 안전하기로 소문난 바다였는데 왜 갑자기 상어가 나타나 인간을 공격했을까?온다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나은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그 사람이 살아있는 걸 원하지 않나 봐요? 아니면 그 죽음이 은별 씨와 연관이 있는 건가?”사실 모든 건 온다연의 추측에 불과했는데 나은별은 생각지도 못한 반응을 보이더니 손을 들어 그녀를 때리려고 했다.온다연은 단번에 팔을 뻗어 나은별의 손목을 잡았고 동시에 따귀를 날렸다.뺨 때리는 소리가 울리자 룸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나은별은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된 채로 사악한 눈빛을 드러냈다.“재민이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어떻게 그 죽음이 저랑 연결됐다고 얘기할 수가 있죠? 심보가 고약하니까 이런 터무니없는 추측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거예요. 마음 좀 곱게 먹으세요.”온다연은 피식 보고선 태연하게 말했다.“사랑하는 사람?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면 그 타이밍에 강후 씨와 결혼하려고 발악했을까요?”“처음부터 은별 씨는 한재민을 좋아한 게 아니잖아요. 단지 뱃속에 있는 아이한테 그럴듯한 아빠를 찾아주고 싶었던 게 아닌가?”온다연은 말하면서 무심코 소이섭을 쳐다봤다.그런데 뜻밖에도 소이섭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온다연, 또 헛소리하면 내가 너 가만두지 않을 거야.”소이섭이 화를 내며 온다연을 향해 손을 뻗었다.다행히 경호원이 다가와 소이섭의 손목을 잡으며 경고했다.“미리 충고드리는데 그쪽은 저한테 상대가 안 됩니다. 정말 사모님을 때리실 겁니까?”유강후의 경호원은 하나같이 특전사에 버금갔기에 소이섭은 본인이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할 수 없이 그저 온다연을 째려보며 말했다.“은별이는 지금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