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에 잔뜩 질린 진설아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유강후에게 애원했다.“대표님,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이런 실수 반복하지 않을게요.”유강후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돌아서고선 온다연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유심히 살펴보았다.“때리고 싶으면 다른 사람 시켜. 괜히 손이라도 다치면 어떡해.”그 시각 진설아는 유강후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부짖었다.“저랑 엄마가 유씨 가문에서 지낸 시간만 해도 십여 년인데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제발요. 이대로 끝내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유강후는 쓰레기라도 본 듯 혐오가 가득 담긴 눈길로 진설아를 힐끗 보더니 고민도 없이 발을 걷어찼다.“꺼져.”온다연은 진설아의 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감옥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 왜 여기에 나타난 거죠?”유강후의 답을 듣기 도전에 온다연은 계속하여 말을 이었다.“설마 임신해서 그래요? 누구 아이인데요?”온다연은 유강후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아저씨 아이를 임신했다고 하던데... 맞아요?”유강후는 곧바로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그의 시선은 곧이어 진설아에게 향했다.“네가 그렇게 얘기했어?”진설아는 몸을 부르르 떨며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요. 전 그런 얘기한 적이 없어요.”그러고선 손가락으로 온다연을 가리키며 호소했다.“이건 모함이에요. 절대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연이는 어릴 때부터 거짓말하는 게 버릇이었어요. 습관처럼 저한테 누명을 씌웠다니까요? 대표님, 제 뱃속에 유 씨 가문의 후손이 있다는 걸 깜빡 하신 건 아니죠? 저 미친 X 말을 믿으면 안 돼요.”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무덤덤하게 답했다.“바다에 던지기 전에 일단 그 입부터 찢어야겠네”진설아는 겁에 질린 듯 뒷걸음질 치며 피했다.“안 돼요. 난 유씨 가문의 후손을 임신했다고요. 어떻게 저한테 이래요? 아이를 낳으면 200억 준다고 약속했잖아요.”“왜 갑자기 말을 바
온다연이 원하는 건 돈도 아니고 유강후도 아니다.그저 아이가 괜찮아지면 하루라도 빨리 아이와 함께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이다.유씨 가문의 환경에서 좋은 아이를 키우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에 무조건 아이와 함께 떠나는 게 답이다.유강후는 진지하게 말했다.“넌 평생 내 곁에만 있어야 돼. 그러니까 비현실적인 이상한 생각 따윈 하지 마.”그러더니 허리를 굽혀 밖으로 드러난 그녀가 발을 담요 안으로 밀어 넣었다.“아무리 여기가 따뜻해도 신발은 신어야지. 그러다가 몸 상해.”온다연은 고민도 없이 유강후를 밀어냈다.“신경 쓰지 마요.”유강후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고선 소파에 고정시켰다.“내가 아니면 누가 신경 써?”온다연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반응에 유강후는 또다시 주한이 떠올랐다.그녀는 자신이 어떤 벌을 받게 될지조차 몰랐지만 한편으로는 유강후가 주희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궁금했다.“주희는 어떻게 했어요?”말이 끝나자마자 경호원이 급히 들어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대표님, 진설아 씨가 문을 열고 뛰쳐나가다가 주행 중인 다른 차에 부딪혀서 병원 입구에 쓰러졌습니다. 피를 많이 흘린 거로 보아 아이를 지키는 건 불가능해 보입니다.”“어떻게 할까요?”유강후는 침묵했다.그런데 이때 이권이 들어왔다.“도련님, 만약 진설아 씨가 다른 곳에서 다쳤다면 살릴지 말지 신경 쓰는 사람이 없을 텐데 병원 입구에 임산부가 쓰러져있는 걸 그냥 지나친다면 여론이 안 좋게 움직일게 분명합니다. 그걸 감당할 수가...”유강후는 온다연을 힐끗 바라보았으나 그녀의 처진 눈매와 냉랭함만이 얼굴에 가득했다.“다른 병원으로 옮겨. 살릴 수 있으면 살리고, 못 살리면 그냥 원래 목숨이 거기까지인 거야.”“그리고 유민준한테 연락해. 아이가 죽든 살든 아빠라는 사람이 처리해야지. 진설아가 운 좋게 살게 된다면 걔네 엄마랑 같이 살게 감옥 들어갈만한 이유 만들어서 처리해.”이권과 경호원이 떠난 후 유강후는 차분한 목소리
유강후가 키스를 하든 말든 온다연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예전이라면 유강후가 지금처럼 키스를 할 때 아프다고 말하던지 아니면 다른 리액션이 있었다. 비록 반응은 미비했지만 유강후는 그것마저도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눈을 감은채 꼼짝하지 않았고 마치 감정 없는 목각인형이나 다름없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 유강후는 그녀의 턱을 잡고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온다연. 왜 아무 반응이 없는 거야.” 온다연은 아픈 듯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지만 그럼에도 눈을 뜨지 않았다. 유강후는 자신에게 물려 빨갛게 부어오른 그녀의 입술을 노려보며 주한과도 이렇게 키스를 했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점점 이성을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유강후는 한 손으로 온다연의 부드러운 허리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감싼 채 품 안에 꽉 껴안으며 숨 막힐 정도로 키스를 퍼부었다. 그러나 온다연은 소파 시트를 움켜쥘 뿐 그 어떤 리액션도 없었다. 그녀가 이런 행동을 할수록 유강후의 마음에는 더 큰 분노가 밀려왔고 저도 모르게 점점 힘을 주게 되었다. 곧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이런 느낌은 유강후로 하여금 더욱 온다연에게 집착하게 만들었다. 그의 손은 습관처럼 천천히 온다연의 아랫배 쪽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불룩하던 튀어나온 부분은 이제 사라졌고 남은 건 평평한 아랫배와 부드러운 살결뿐이었다. 순간 가슴이 욱신거리는 고통에 정신을 번쩍 차린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서 풀어주었다. 눈은 빨갛게 충혈되었고 호흡마저 불안정해졌다. 유강후는 그녀의 입술에 묻은 피를 닦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온다연, 기억해. 넌 영원히 내 거야. 몸이든 마음이든 모두 내 거야.” “넌 평생 내 곁에만 있어야 돼. 아무 데도 갈 수 없을 거야.” 온다연은 눈을 내리깔고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유강후의 시선에는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속눈썹만 보일뿐 그녀의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유강후는 더 이상 이런 걸 신
주희는 주한의 친남동생이다. 두 사람은 지난 몇 년간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왔다.그리고 온다연은 하마터면 아이를 잃을 뻔했다.고의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이걸 용서할 만큼 마음이 너그럽지는 못했다.“주희야,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으니까 이만 나가줘.”주희는 눈빛이 흐려지더니 목소리 톤마저 바뀌었다.“누나,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는 얘기예요?”온다연의 침묵에 주희는 뜬끔없이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형이랑 안 닮아서 그런 거예요? 그래서 보고 싶지 않은 거예요?”“형은 누나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우리 형은 더러운 인간이라고요.”“닥쳐.”온다연은 손을 들어 뺨 한대를 날리고선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어렸을 때부터 널 키워준 게 형이야. 어떻게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어?”주희는 맞은 얼굴을 가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온다연을 바라봤다.“누나 지금 나 때렸어요?”“지금껏 때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잖아요. 왜 이제는...”사실 온다연도 자신이 왜 때렸는지 몰랐다.동생인 주희는 이 세상에 남은 주한의 유일한 흔적이나 다름없다.온다연은 마음을 가다듬은 후 진지하게 말했다.“나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으니까.”주희는 집착하는 눈빛으로 온다연을 바라봤다.“형이 누나한테 잘해준 건 누나가 목숨을 구해줘서 그런 거예요. 형의 죽음이...”주희는 말끝을 흐리더니 슬픔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온다연을 쳐다봤다.“누나, 제가 형이랑 두 살 차이밖에 안 나요. 저도 이제 컸고, 충분히 누나를 지켜줄 수 있어요.”주희는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증오의 눈으로 유강후를 바라봤다.“이 사람은 누나의 감정을 가지고 노는 것뿐이에요. 평생 이 사람 옆에 있을 거예요? 우리 형보다도 더 못한 인간이라고요.”“솔직히 우리 형도 누나랑 만날 자격이 없어요.”“입 닥쳐.”온다연은 참다못해 폭발했다.“정말 미쳤구나? 네가 무슨 자격으로 주한이를 평가해. 걔는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사람이었어. 내 앞에서
왜 온다연의 운명은 이렇게 잔인할까?똑같은 장면이 또다시 그녀의 눈앞에서 반복되었다.온다연은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서 똑바로 서 있지도 못했다.이때 유강후에 방에서 뛰쳐나와 재빨리 그녀를 품에 안았다.그는 아래층을 힐끗 보고선 온다연의 눈을 가렸다.“눈 감고 보지 마.”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움켜쥐고 흐느껴 울었다.“제발 살려줘요. 주한이 좀 살려줘요.”아래층을 보니 어느덧 의료진이 튀어나와 주희를 들것으로 옮기고 있었다.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피를 본 유강후는 나지막하게 말했다.“다연아, 아마 살아남지 못할 거야.”“내가 신도 아니고 무슨 수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겠어. 그건 나도 못해.”그 말에 다리에 힘이 풀린 온다연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그럼에도 유강후는 품에서 온다연을 놓지 않았다.“다연아...”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잡고 울먹였다.“싫어하는 거 알아요... 하지만 주한이 동생이잖아요... 제발...”그녀는 유강후의 눈을 바라보며 간절하게 빌었다.“이렇게 빌게요. 제발 살려줘요. 살리기만 한다면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줄게요.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도와줘요...”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에 빠진 온다연은 어느새 눈물범벅이 되었다.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주희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하나뿐이었다.주희는 주한이가 가장 사랑하는 동생이고 어려서부터 그들과 함께 자란 가족이나 다름없다.그러니 온다연은 주한이가 남긴 유일한 혈육을 못 지켰다는 죄책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유강후도 온다연이 이렇게까지 우는 건 처음이었다.갈비뼈가 몇 개 부러질 정도로 큰 부상을 입어도 눈물조차 흘리지 않던 강한 사람이 다른 사람 때문에, 그것도 주한의 동생 때문에 이렇게 슬퍼하니 유강후도 기분이 착잡했다.한편으로는 그녀의 인생에 주한이라는 비중이 꽤 크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온다연이 흘리는 눈물 매 한 방울이 강한 염산처럼 그의 심장을 부식시켜고 있었다.화가 나고 충격적인 건 둘째라치고 너무나 상처였다.“주한 때문에 나한테
유강후는 고개를 숙여 온다연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했다.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러고선 몸을 돌려 이권에게 명령했다. “미래 그룹이랑 내 명의로 된 기타 그룹에 지금 당장 긴급 요청을 보내고 일단 희귀 혈액형을 가진 직원들이 몇 명 있는지 알아봐. 헌혈할 의향이 있다면 무조건 병원으로 데려와. 승진이랑 급여 인상이라는 조건도 걸어두고.” “워낙 희귀한 혈액형이라 우리 그룹에도 해당되는 사람이 별로 없을 거야. 그러니까 언론사에 연락해서 기사로 퍼뜨려. 30분 내에 병원에 도착하면 1ml에 2천만 원, 한 시간 내에 도착하면 1ml에 천만 원.” “그리고 이준이랑 현수 씨한테도 연락해. 두 사람 수중에 있는 그룹도 똑같이 할 거야.” “다른 건 다 가능하지만 언론사에 연락하는 건 안됩니다. 사회적 여론이 커져서 분명히 문제가 생길 겁니다.” 유강후는 극도로 냉랭한 모습을 되찾았다. “신경 쓰지 말고 시키는 것부터 처리해.” “기사가 나간다고 해도 30분 만에 도착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주희 씨는 과다 출혈로 이미 위급한 상황입니다.” 유강후는 매우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희귀 혈액형인걸 잊었어? 나부터 뽑으면 돼.” 이권은 화들짝 놀랐다. “안됩니다. 엄청난 양이 필요한데 고작 대표님 혼자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병원에 혈액 재고가 있다며? 그걸 나한테 수혈하고 다시 내 피를 뽑으면 되잖아. 잔소리 그만하고 얼른 가자.” 이권은 곧바로 답했다. “그래도 이건 안됩니다.” 유강후는 참다못해 버럭 화를 냈다. “왜 내 말에 이렇게 토를 달지?” 이권은 울며 겨자 먹기로 참을 수밖에 없었고 떠나기 전 온다연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그 시각 온다연은 혼란스러운 마음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녀 역시 유강후가 곧 주희에게 수혈하러 간다는 걸 들었다. 줄곧 범접할 수 없는 싸늘함과 도도함을 풍기던 남자가 자신을 위해 이렇게 희생하니 온다연은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미묘한 감정이 솟아오른 그녀는 유강후의 손목을
온다연은 요즘 유강후와 지낸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뒤섞인 다양한 사람과 사건을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미어졌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유강후와 어떻게 지내야 할지 몰라 막막함에 이런 느낌이 들 수도 있다. 현재 그들 사이에는 아이가 있고, 유강후도 주희를 구하겠다고 약속까지 했으니 전과 똑같은 태도로 그를 대하는 건 옳지 않은 행동인 게 분명하다. 적어도 더 이상 욕설을 더부으며 안된다. 온다연은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미래가 걱정되었다.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조차 버거운 상황에 신경 써야 할 일은 날로 들어가고 있으니 점점 한계치에 다다랐다. 과거도 미래도 생각하지 않는 현재만 살고 싶었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생각할수록 피곤함이 밀려왔고 약 때문인지 온다연은 천천히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영원시로 돌아갔다. 고유정이 단검을 손에 든 채 미친 듯이 달려왔고 곧바로 유강후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지켜줬다. 특수 훈련을 받아 일반인은 접근조차 못하는 날렵함을 가졌음에도 유강후는 피하거나 막기는커녕 오히려 두 손으로 온다연을 꽉 끌어안은 채 온몸으로 단검을 막았다. 그렇게 고유정의 칼부림을 몇 차례나 견뎌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온다연은 잠결에 흘린 눈물로 인해 두 눈이 팅팅 부어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녀와 유강후에게도 짧지만 달콤한 나날들이 있었다. 설레는 느낌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게 온몸에 와닿는 가슴 벅찬 감정은 진실했다.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른 온다연은 침대에서 내려와 밖으로 뛰쳐나갔다. 입구의 간호사들은 감히 막을 수가 없어 마지못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병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채혈실 입구에 도착했다. 그 시각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유강후의 양팔에는 혈액주머니가 걸려있었다. 온다연이 이곳으로 온 걸 보고 유강후는 표정이 일그러졌다.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온다연이 안으로 뛰어갔다. 그녀는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유강후의 허리를
유강후는 두 눈이 빨갛게 부어오른 온다연을 보고선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또 울었어? 눈 부은 것 좀봐.” 온다연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꿈꾸다가 울었어요.” 유강후는 감정이 요동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꿈에서 내가 또 다쳤어? 그래서 이렇게 팅팅 부어 오늘 정도로 운 거야?” 온다연은 입술을 깨물고 눈을 내리깐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아저씨라고 불러도 돼요?” 유강후는 고개를 숙여 온다연의 이마에 입맞춤했다. “당연하지. 네가 부르고 싶은 대로 맘껏 불러도 돼.” 온다연은 그의 시선을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은 듯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우린...” 이때 입구에서 쭈뼛쭈뼛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인기척에 고개를 든 유강후는 그 사람을 힐끗 쳐다보고선 담담하게 말했다. “오늘 도와줘서 고마워요.” 온다연도 입구에 선 사람에게 시선이 갔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난번 전통 한옥에서 피팅할 때 알게 된 임청하라는 모델이었다. 심지어 영원시에서 유강후에게 수혈한 적도 있다. ‘여긴 왜 왔지?’ 온다연을 발견한 임청하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선 재빨리 눈길을 돌렸다. “대표님이 없었다면 전 대학도 다니지 못했을 거예요. 대표님은 제 은인인데 이 정도는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그리고 마침 이 근처에 있었어요.” “차에서 핸드폰 하다가 우연히 기사를 보게 된 거예요. 그래서 고민도 없이 바로 달려왔죠.” 유강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죠.” 말을 이어가던 유강후는 고개를 돌려 이권을 바라봤다. “전에 제시한 금액대로 청하 씨한테 넘겨줘. 제일 먼저 도착했으니까 2억 더 보태.” 임청하는 입술을 깨물며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돈은 필요 없습니다. 염치 불고하고 대표님께 부탁 하나를 드려도 될까요?” 조명 아래 비친 그녀의 얼굴은 유난히 창백했고 얇은 옷 한 장을 걸치고 있어서 그런지 꽤나 초
하지만 이번엔 이미 늦었다. 유강후가 너무 강력한 나머지 온다연이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어떤 수를 써도 먹히지 않았다.그러나 온다연은 절대 그를 아저씨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단지 부끄러운 것뿐만이 아니라 촌수도 망가뜨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온다연의 대답을 듣지 못한 안심은 다시 한번 물었다.“다연아?”온다연은 허겁지겁 대답했다.“금방 나가요!”말을 마친 온다연은 유강후의 손을 꽉 깨물며 낮게 말했다.“비켜요, 나가야 하니까. 엄마가 진짜 들어와서 강 대표님이 여기 있는 걸 보기라도 한다면 그땐 강 대표님이 저희 아빠한테 맞아 죽을 거예요!”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강후는 또 한 번 입맞춤으로 온다연의 입을 막았다.휘몰아치는 폭풍 같은 키스는 온다연의 속이 뒤틀리게 했고 그 소름 끼치는 감각은 몸으로 전해져 덜덜 떨기까지 했다.온다연은 쉴 새 없이 반항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고 유강후의 속박만이 더 심해질 뿐이었다.온다연이 대답이 없자 문밖에서는 안심이 다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다연아, 문 열어! 안 열면 사람 불러서 문 딸 거니까 그렇게 알아!”온다연은 너무 급해 난 나머지 땀까지 삐질삐질 새 나왔으나 유강후는 여전히 놓아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온다연은 그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밖에서 문손잡이를 돌리는 것을 발견한 온다연은 타오를 것 같은 얼굴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는 새끼 고양이의 울음소리처럼 가냘픈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아저씨.”유강후는 그제야 온다연을 놓아주었다.온다연은 얼른 세면대에서 내려와 머리를 정리하고는 문을 열었다.문밖에 있던 안심은 한눈에 온다연이 어딘가 다름을 알아챘고 막 입을 열려던 찰나에 에어컨 아래에 걸려 있는 남자 셔츠와 정장 바지를 발견했다.그 순간, 안심은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안심의 눈빛은 딸의 묘하게 흐트러진 머리와 살짝 부은듯한 입술에 몇 초간 머물렀다. 그리고는 작게 한숨을 내뱉고 나긋나긋하게 말했다.“별일 없으면 됐어. 어서 가서 씻어, 엄마는
하지만 유강후를 화장실 안으로 밀어 넣기 전에 온다연은 그의 품속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유강후는 자신의 품으로 넘어진 온다연과 함께 화장실로 들어갔다.그때,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고 안심이 도착한 게 틀림없었다.온다연은 급한 마음에 짜증을 내며 말했다.“이거 놔요!”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온다연의 손을 잡고는 화장실 문을 발로 차 닫아버렸다.그리고는 온다연을 벽에 세우고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온다연은 먹혀들어 가는 소리를 내며 유강후에게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쳐 보았지만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이거 놔요, 읍...”유강후는 숨이 딸린 듯 온다연을 놓아주고는 잔뜩 불퉁해진 말투로 물었다.“아까 말하던 거 계속 말해봐요, 저번에 염 뭐라고요? 염지훈이 유나 씨 방에 왔다 갔나요?”온다연은 온 신경이 문밖에 쏠린 채 작게 말했다.“놔요, 엄마가 왔다니까요!”하지만 쉽게 놔줄 유강후가 아니었다. 유강후는 온다연은 번쩍 들어 올려 세면대 위에 앉히고는 망설임 없이 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그때, 이미 병실 안으로 들어온 안심은 딸이 보이지 않자 화장실로 향했다.“다연아?”온다연은 급해 나서 훌쩍이며 애를 써보았지만 손과 허리가 모두 유강후에 꽉 잡힌 상태라 움직이려야 움직일 수 없었다.안심은 걱정되어 다가와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다연아?”유강후는 그제야 온다연을 놓아주었다.온다연은 안심이 당장이라도 들어올까 봐 겁에 질려 얼굴이 빨개진 채로 작게 속삭이기 바빴다.“엄마, 저 안에 있어요.”안심은 걱정된다는 듯이 물었다.“다연아 어디가 불편한 거니?”온다연은 황급히 둘러댔다.“아니요, 저 괜찮아요.”안심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원래 비가 금방 내리기 시작할 때 오려고 했는데 네 사촌 언니한테 일이 좀 생겨서 지금에야 왔어. 아까 천둥소리에 놀랐지?”온다연은 말이 끝나기 바쁘게 대답했다.“아니요... 읍...”유강후가 이번에는 더 격렬하게 입을 맞춰왔다.온다연은 숨이 딸려 기를 쓰고 유강후를 밀어
비바람이 열린 창문으로 불어 들어왔고 온다연은 갑자기 들이닥친 비바람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진짜 가려고요?”유강후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작게 대답했다.“저더러 가라면서요?”온다연은 말문이 막혔다.유강후 더러 가라고 한 건 맞지만 아직은 비바람이 거센 데다가 저기로 나갔다가 미끄러져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온다연은 다시 중얼거렸다.“안 가도 되고요...”유강후의 입꼬리가 매끈하게 휘어졌고 애써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아까는 저보고 가라더니, 자금은 또 가지 말라고 그러네요? 그래서 저 가요, 가지 말아요?”온다연은 귀가 빨개진 채 이를 깨물고는 말했다.“선 넘지 마세요. 전 이미 강 대표님을 가지 말라고 말렸어요. 그래도 가고 싶으면 가도 되고요.”말을 끝낸 온다연은 침대에 돌아누운 채 다시는 유강후를 보지 않았다.유강후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는 일부러 창문을 굳게 잠갔다.그 소리를 들은 온다연은 유강후가 정말 가버린 줄 알고 섬찟해서 얼른 몸을 돌려 정말 그가 가버렸는지 확인했다.하지만 유강후는 창가에 서서 온다연을 바라보고 있었다.온다연은 순간 유강후에 놀아난 것 같은 기분에 화가 나 고개를 홱 돌려 다시 누워버렸다.유강후는 그런 온다연에게 다가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유나 씨가 가지 말라고 한 거예요. 나중에 또 절 쫓아내면 그땐 유나 씨 말을 듣지 않고 혼낼 거예요!”온다연은 유강후의 젖은 옷이 떠올라 볼멘소리로 말했다.“젖은 옷이나 갈아입어요!”유강후는 작게 대답했다.“하지만 전 수건 말고는 다른 옷이 없는걸요. 나중에 또 제 행색 보고 뭐라고 하려고요?”온다연은 이를 꽉 깨물고는 귀까지 홧홧하게 달아오른 채로 말했다.“일단 갈아입어요. 젖은 옷을 어떻게 입고 있어요?”유강후는 재빠르게 아까의 차림으로 돌아왔다.고작 수건 하나를 걸친 채로 아무렇지 않게 온다연의 침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온다연은 눈썹을 꿈틀하고는 뭐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본인이 가지 말라고 잡은 것이니 더 옆으로 가서 앉으라고
온다연은 너무 머쓱한 나머지 유강후를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럼 사람을 시켜서 옷을 한 벌 가져오라고 하세요!”유강후는 창밖을 한번 보고는 말했다.“비가 이렇게나 많이 오는데 누구한테 부탁할까요? 문 앞으로 가져오라고 할까요?’온다연은 말문이 막혔다.문 앞에는 온통 아버지가 보낸 경호원들이었고 유강후가 창문을 통해 들어온 걸 알기라도 하면 유강후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온다연은 유강후의 옷을 가져올 방법만 생각했을 뿐, 유강후를 당장 방에서 내보낼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고민하는 온다연의 모습을 본 유강후가 말했다.“그만 해요. 전 단지 유나 씨와 함께 있어 주려고 온 것뿐이에요. 비가 그치면 바로 나갈게요. 그러니까 더 고민하지 않아도 돼요.”온다연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갈 때도 그런 꼴로 갈 수는 없잖아요. 옷을 에어컨 밑에 놔두는 건 어때요. 그럼 갈 때쯤이면 마를지도 모르잖아요.”유강후는 온다연의 말을 따랐다.온다연은 옷을 걸어두는 유강후를 보며 작게 말했다.“방금 엄청 이상한 꿈을 꿨어요. 꿈에서 강 대표님을 아저씨라고 불렀어요...”유강후는 순간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 같았고 가슴 한편이 시려왔다.아저씨...온다연이 그렇게 자신을 부르는 것을 들은 지도 너무 오래전 일이었다.“꿈에서 절 아저씨라고 불렀다고요?”“네, 꿈은 정말 이상한 곳 같아요. 온갖 일들이 다 일어나서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에요...”온다연은 얼굴을 붉히고는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전통 한옥이 있었는데 중간에 엄청나게 큰 나무 한 그루가 있었어요. 한옥을 거의 다 가릴 정도로 엄청나게 큰 나무였어요. 그리고 집사 한 명이 있었는데 늘 얼굴을 찡그리고...”유강후는 온다연의 말에 몸을 돌렸다.“옛날 일이 생각난 거예요?”“옛날 일이요?”온다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썹을 찌푸렸다.“그곳이 제가 살던 곳인가요? 그럴 리가 없어요, 제 양부모님께서는 모두 평범한 분들이세요. 경원시의 전통 한옥을 찾아봤었는데 엄청 비싸던데요? 얼핏
“제, 제 침대에 오지 마세요...”온다연은 유강후가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겁에 질려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유강후는 온다연이 이불로 자신을 꽁꽁 싸맨 모습이 애벌레 같아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질 뻔했다.그 순간, 유강후는 그해 병원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온다연은 유강후를 무서워했고 그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놀라서 밤새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했었다.유강후는 지나간 날을 떠올리고는 씁쓸해졌다.비로소 시간이 흘렀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유강후는 턱 끝까지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운 얼굴로 조심스레 이불을 잡아당겼다.“이러고 있으면 숨 막히니까 이불 좀 걷어봐요.”온다연은 여전히 이불을 꽉 움켜쥔 채 볼멘소리를 하였다.“제 침대에 있지 말고 옆으로 가주세요!”유강후가 온다연의 이불을 걷으려고 이불에 손을 갖다 댄 순간 온다연이 말했다.“강 대표님, 계속 이러시면 앞으로는 강 대표님 안 볼 거에요!”유강후는 작게 웃고 침대에서 일어나 의자를 당겨다 온다연의 침대 옆에 앉았다.그가 침대에서 일어난 것을 느낀 온다연은 그제야 천천히 앉았다.하지만 이불을 걷은 순간, 온다연은 후회와 함께 재빨리 두 눈을 가려버렸다.“왜, 왜 옷을 안 입고 계세요?” 눈앞의 남자가 걸친 거라곤 허리에 두른 수건 하나가 전부였다. 탄탄하게 잘 빠진 역삼각형 몸매와 길게 쭉 뻗은 다리를 보고 있으려니 정말 가면 갈수록 가관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평소에 봐왔던 절제적이고 냉철한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지금의 모습은 누가 봐도 온다연을 유혹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온다연은 얼굴을 붉혔지만 역시나 참지 못하고 손가락 틈새로 유강후를 훔쳐보았다.아름다운 역삼각형 몸매와 자기주장이 강한 근육들은 정말이지 장관이었다.특히나 쩍쩍 갈라진 복근은 만지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할 정도였다.수건을 묶어 고정한 부분에는 조각해낸 듯한 장골과 잔뜩 성난 핏줄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채 마르지 않은 물방울이 이따금 수건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때면 온다연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녀는 무려 임산부였다.게다가 그 남자의 품에 안겨 가냘픈 목소리로 아저씨를 찾기도 했다.남자는 그녀가 숨이 딸릴 정도로 입을 맞춘 것도 모자라 그녀에게 손을 쓰라고 강요하기까지 했다...그 꿈은 꽤 오랫동안 지속하였다. 바람이 사납게 불고 엄청난 천둥소리와 함께 내린 폭우가 쉼 없이 창문을 거세게 두드릴 때야 온다연은 몽롱한 상태로 잠에서 깨어났다.하지만 눈을 뜨자마자 본 광경은 키 큰 남자가 창가에서 내려오고 있는 모습이었다.온다연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고 사람을 부르려던 찰나 그 남자가 다급히 제지했다.“부르지 말아요, 저예요!”낮은 목소리는 익숙했다.온다연은 잠시 멈칫한 끝에 남자가 누구인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그는 다름 아닌 꿈속의 그 남자였다!창문을 통해 들어온 것인지 의문이 가득하던 찰나 온다연의 인기척을 느낀 경호원이 밖에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아가씨, 무슨 일이라도 생기신 겁니까?”온다연은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아무 일도 아니에요!”경호원들은 여전히 걱정되어 물었다.“아가씨, 천둥소리에 놀라셨습니까? 같이 있어 줄 사람이라도 필요하십니까?”“필요 없다니까요!”“아가씨, 비도 많이 오고 바람도 거셉니다. 문을 열어주시면 창문에 문제가 생기진 않았는지 저희가 검사해드리겠습니다!”온다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필요 없다고 말했잖아요. 귀찮으니까 더 말 시키지 말아요!”온다연이 언성을 높이자 그제야 경호원들도 잠잠해졌다.유강후의 옷과 바지는 모두 반쯤 젖어있었고 머리카락에서도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유강후의 기세만큼은 가려지지 않았다.게다가 옷이 젖은 탓에 거의 보일락 말락 한 그의 탄탄한 몸매에 온다연은 얼굴이 붉어졌다.“강 대표님이 왜 창문으로 들어오는 거죠?”유강후는 창문을 닫고 몸을 돌려 온다연을 바라보며 물었다.“깼어요?”온다연은 여전히 유강후가 창문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다는 듯 말했다.“여긴 2층이라고요!”유강후는 여
남자는 안윤희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잡아채며 그녀의 뺨을 세게 때렸다.“평범한 사람이라고?”“안 아가씨, 10년 전 금우역에서 불을 지른 일을 기억하나? 내 얼굴 좀 봐. 이 흉터, 네놈들이 지른 불 때문에 생긴 거야!”남자의 눈에는 증오가 가득했다.“우리 부모님은 그저 평범한 농민이었어. 그들의 가장 큰 소원은 나를 잘 키워 공부를 시켜 성공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그분들은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부모였어. 아무 잘못도 없었는데, 너희는 지나가다가 웃는 얼굴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그분들을 악의 화신이라 규정했지! 그러고는 우리를 집 안에 가둔 채 불을 질러 집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어. 우리 부모님은 필사적으로 날 품에 안으셨고, 덕분에 나는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어. 하지만 부모님은 그만 온몸이 새까맣게 타버리고 말았지.”“그분들이 무슨 죄가 있었지? 단지 못생겼다는 이유로, 살아갈 자격조차 없었다는 거야? 몇 년 동안 너희를 찾아 헤맸어. 그렇게 한 명씩 제거했지. 너희가 세상을 정화한다고? 난 너희 같은 악마들을 정화할 거다!”남자는 안윤희의 목을 세게 움켜쥐었고 두려움으로 일그러진 안윤희의 얼굴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너희들 정말 잘 숨어 있더구나. 한 놈을 찾는 데 꼬박 반년에서 일 년이 걸렸어. 그런데 오늘은 누가 너를 직접 내게 데려다주고 돈까지 준 거야. 세상에 이렇게 좋은 일이 있을 줄이야!”그는 안윤희를 거칠게 바닥에 내던지며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짓했다.“형님들, 배 위에서 고기 구경 못한 지 오래됐지? 오늘 마음껏 즐겨보자!”“저기요, 이 아가씨는 신국 안씨 가문의 큰 아가씨입니다.”“걱정하지 마. 방금 뉴스에서 이 아가씨가 이미 죽었다고 나왔어. 심지어 시신도 확인됐다고 하더라고. 그러니 이 여자는 그저 안씨 가문의 아가씨를 닮은 여자일 뿐이야.”사람들이 크게 웃으며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다.안윤희는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안 돼! 나는 안씨 가문의 큰딸이야! 너희가 날 건드리면 우리 이모부가
유강후는 진시현의 볼록하게 나온 배를 한 번 바라보며 웃음을 띠고 말했다.“얼마나 됐어?”진시현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거의 다섯 달 됐어요.”그러면서 무의식적으로 배를 쓰다듬으며 덧붙였다.“움직이기도 해요.”유강후의 눈에 잠시 어두운 빛이 스쳤다. 예전에 자신의 아이도 딱 이 정도였을 때...유강후는 곧 미소를 짓고 로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로운, 대단하네. 이제 아빠가 됐구나. 결혼식 때 참석 못한 게 많이 아쉬웠는데 나중에 네 아들 태어나면 큰 선물로 보답할게.”항상 무표정하던 로운의 얼굴에 드물게 미소가 번졌다.“괜찮습니다. 이미 충분히 많은 걸 받았습니다.”유강후는 말했다.“전에 준 건 모두 준구 것이었지. 지난 몇 년 동안 잘 관리해서 자산을 두 배로 늘렸더라. 하지만 이제 아내도 있고 아이도 생겼으니 너 자신을 위해 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지 않겠어?”“그걸 나눠서 20% 지분을 네가 가져. 내가 네 아들에게 주는 첫 번째 선물이라고 생각하고.”로운은 잠시 망설이다가 뒤돌아 진시현의 볼록한 배를 몇 초간 바라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받아들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유 대표님.”“며칠 동안 도련님을 데리고 가서 함께 지내고 싶습니다. 조상님께 향도 한 번 올리고요.”유강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똑똑한 아이이니 지금처럼 잘 키우면 성년이 되기 전에 양씨 가문으로 돌아가 일을 맡길 수 있을 거다. 데려가는 건 좋지만 아직은 신분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해.”로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물론입니다.”유강후는 다시 물었다.“내가 찾으라고 한 자료는 확인했어?”로운은 묶어둔 자료를 꺼내 유강후에게 건넸다.“이것은 성염 조직에 대한 정보입니다. 인원은 많지 않지만 굉장히 단결되어 있습니다. 한 번 목표로 삼으면 끈적한 반창고처럼 달라붙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 조직은 크게 두려워할 것은 없지만 상대하기엔 매우 불쾌한 존재입니다.”유강후는 자료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안윤희는 여기서
유강후는 마치 죽은 사람을 보듯 차갑고 무심한 시선으로 안윤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성염 조직, 너랑 무슨 관계야?”안윤희는 고개를 확 들어 올리며 눈빛에 불안함을 담고 대답했다.“무, 무슨 성염이요?”성염 조직은 국제적인 테러 집단으로 극단주의자들로만 이루어진 조직이었다. 그들은 불이 모든 것을 정화한다고 믿으며 자신들이 악으로 간주한 대상은 무엇이든 태워 세계를 정화하려 했다.그들의 활동은 선과 악을 가리지 않았고 그들의 눈에 악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정화의 대상이 되었다.이로 인해 암흑가뿐만 아니라 정계에서도 성염 조직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했다.유강후는 안윤희를 똑바로 응시하며 한 글자 한 글자 분명히 말했다.“네가 어떤 조직에서 왔든 상관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아둬. 만약 네가 온다연에게 손이라도 대려 한다면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거야. 너희 안씨 가문과 성염 조직 모두 비참하게 끝날 테니까.”안윤희는 고개를 숙이며 두 손을 꽉 쥐고 말했다.“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요.”유강후는 더는 대꾸하지 않고 뒤돌아 걸어 나갔다.안윤희는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천천히 일어섰다.방금 발에 차여 바닥에 나가떨어진 그녀는 무릎이 긁혀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통증을 느끼는 기색은 없었다.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사라져가는 유강후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난 분명히 널 선택했어. 그런데 날 거부하고 그 재수 없는 여자만 원한 대가가 뭔지 제대로 보게 될 거야. 다연이가 그렇게 좋다면 두 사람 다 함께 끝장내주지.”“이모, 이모부. 저는 다연이를 해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 애가 먼저 제 선택을 빼앗았어요. 뻔뻔한 사람은 다연이지 제가 아니에요. 그러니 저를 탓하지 마세요.”안윤희의 낮은 혼잣말은 복도를 스치는 바람 속에 흩어졌다. 그러나 그중 일부가 안심의 귀에 닿았다.안심은 다친 채 서 있는 안윤희를 보며 물었다.“어떻게 된 거니? 왜 이렇게 엉망이야?”안윤희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제가 실수로 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