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연은 요즘 유강후와 지낸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뒤섞인 다양한 사람과 사건을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미어졌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유강후와 어떻게 지내야 할지 몰라 막막함에 이런 느낌이 들 수도 있다. 현재 그들 사이에는 아이가 있고, 유강후도 주희를 구하겠다고 약속까지 했으니 전과 똑같은 태도로 그를 대하는 건 옳지 않은 행동인 게 분명하다. 적어도 더 이상 욕설을 더부으며 안된다. 온다연은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미래가 걱정되었다.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조차 버거운 상황에 신경 써야 할 일은 날로 들어가고 있으니 점점 한계치에 다다랐다. 과거도 미래도 생각하지 않는 현재만 살고 싶었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생각할수록 피곤함이 밀려왔고 약 때문인지 온다연은 천천히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영원시로 돌아갔다. 고유정이 단검을 손에 든 채 미친 듯이 달려왔고 곧바로 유강후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지켜줬다. 특수 훈련을 받아 일반인은 접근조차 못하는 날렵함을 가졌음에도 유강후는 피하거나 막기는커녕 오히려 두 손으로 온다연을 꽉 끌어안은 채 온몸으로 단검을 막았다. 그렇게 고유정의 칼부림을 몇 차례나 견뎌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온다연은 잠결에 흘린 눈물로 인해 두 눈이 팅팅 부어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녀와 유강후에게도 짧지만 달콤한 나날들이 있었다. 설레는 느낌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게 온몸에 와닿는 가슴 벅찬 감정은 진실했다.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른 온다연은 침대에서 내려와 밖으로 뛰쳐나갔다. 입구의 간호사들은 감히 막을 수가 없어 마지못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병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채혈실 입구에 도착했다. 그 시각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유강후의 양팔에는 혈액주머니가 걸려있었다. 온다연이 이곳으로 온 걸 보고 유강후는 표정이 일그러졌다.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온다연이 안으로 뛰어갔다. 그녀는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유강후의 허리를
유강후는 두 눈이 빨갛게 부어오른 온다연을 보고선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또 울었어? 눈 부은 것 좀봐.” 온다연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꿈꾸다가 울었어요.” 유강후는 감정이 요동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꿈에서 내가 또 다쳤어? 그래서 이렇게 팅팅 부어 오늘 정도로 운 거야?” 온다연은 입술을 깨물고 눈을 내리깐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아저씨라고 불러도 돼요?” 유강후는 고개를 숙여 온다연의 이마에 입맞춤했다. “당연하지. 네가 부르고 싶은 대로 맘껏 불러도 돼.” 온다연은 그의 시선을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은 듯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우린...” 이때 입구에서 쭈뼛쭈뼛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인기척에 고개를 든 유강후는 그 사람을 힐끗 쳐다보고선 담담하게 말했다. “오늘 도와줘서 고마워요.” 온다연도 입구에 선 사람에게 시선이 갔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난번 전통 한옥에서 피팅할 때 알게 된 임청하라는 모델이었다. 심지어 영원시에서 유강후에게 수혈한 적도 있다. ‘여긴 왜 왔지?’ 온다연을 발견한 임청하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선 재빨리 눈길을 돌렸다. “대표님이 없었다면 전 대학도 다니지 못했을 거예요. 대표님은 제 은인인데 이 정도는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그리고 마침 이 근처에 있었어요.” “차에서 핸드폰 하다가 우연히 기사를 보게 된 거예요. 그래서 고민도 없이 바로 달려왔죠.” 유강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죠.” 말을 이어가던 유강후는 고개를 돌려 이권을 바라봤다. “전에 제시한 금액대로 청하 씨한테 넘겨줘. 제일 먼저 도착했으니까 2억 더 보태.” 임청하는 입술을 깨물며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돈은 필요 없습니다. 염치 불고하고 대표님께 부탁 하나를 드려도 될까요?” 조명 아래 비친 그녀의 얼굴은 유난히 창백했고 얇은 옷 한 장을 걸치고 있어서 그런지 꽤나 초
유강후는 눈을 반짝이며 나지막하게 물었다.“왜?”온다연은 극도로 내성적인 사람이라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을 거의 표현하지 않는다.직설적으로 누군가가 싫다며 말하는 건 유강후도 처음 봤다.더군다나 온다연과 임청하 사이에 그 어떤 교집합도 존재하지 않는다.그러니 온다연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임청하에게 적대심을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온다연이 적대감을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유강후 때문 일 것이다.유강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태연하게 물었다.“전에 알던 사이야?”온다연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아니요. 그냥 싫어요.”“싫어하는 이유는 뭐야? 나한테 접근하려는 것 같아서?”온다연은 말없이 그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었다.방에 들아온 후, 유강후가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물어볼 게 있는데 솔직하게 대답해 줘요.”유강후는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말해봐.”사실 온다연이 어떤 질문을 할지 대충 예상이 갔다.닫혀 있는 그녀의 마음을 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거듭되는 고난 속에서 온다연의 마음에는 족쇄가 겹겹이 채워져 있었는데 그걸 풀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주한이다.이제 주한이 없으니 온다연은 또다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겹겹이 방어기제를 쌓았다.그동안에 겪었던 일만큼 하고 싶었던 말도 많았을 텐데 이제야 조금씩 솔직해지는 그녀의 모습에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었다.유강후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무도 모른다.온다연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죄책감 때문에 미안해서 이러는 거죠? 그걸 갚으려고 절 잡아두는 거예요?”말을 마친 그녀는 침대 시트를 붙잡고 차마 유강후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정적이 흘렀다.유강후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온다연이 이해되지 않았다. 진심은 물어보지도 않고 그저 죄책감이라는 단어에 꽂혀 무작정 본인의 생각을 단정 지으니 답답하기도 했다.온다연은 그가 말을 하지 않자 눈을 내리깔고 다시 말을 이었다.“정말 그 이유라면 괜찮으니까 이만 놓아줘요.”유강후는 그녀
그러니 고개를 숙이고 물어볼 수밖에 없다.“예전에...”유강후는 그녀가 나은별에 대해 물어보려는 줄 알고 재빨리 답했다.“말했듯이 나은별이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야. 좋아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온다연은 입술을 깨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과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고 싶지 않아요. 만약 죄책감 때문에 결혼하려는 거면 절대 안 할 거예요.”“만에 하나 우리가 결혼하게 되어도 회장님을 포함한 유씨 가문 그 어떤 가족도 만나지 않을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우리 아이는 온씨 성으로 짓는 게 어때? 강씨도 괜찮고.”온다연은 어두운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온씨는 안 좋아요.”어려서부터 부모에게 버림받는 것도 모자라 오랜 시간 동안 괴롭힘에 시달렸으니 이제는 온씨 성마저도 불길하게 느껴졌다.“강씨로 해요. 아이 이름은 아저씨가 지었어요?”유강후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듯 멈칫했다.“아직... 외할아버지한테 여쭤보려고. 우리 엄마가 외동딸이시거든. 그러니까 이 아이가 강씨 가문의 유일한 후손인거지. 이름 짓는 것조차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실 거야.”유강후의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질 비범한 운명이다.그러나 지금은...유강후는 심호흡하며 애써 마음을 진정했다.“아직 무균실에 몇 달은 더 있어야 하니까 나중에 아이 나오면 다시 얘기하자.”아이에 대해 말하자 온다연의 눈빛은 곧바로 부드러워졌다.“딱 한 번 보긴 했지만 정말 괜찮을까요? 너무 작아서 무서워요...”유강후는 몸을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했다.“많이 좋아졌으니까 걱정하지 마.”유강후는 그웬을 포함한 모든 의사, 간호사들과 비밀유지 계약서를 체결했다. 그들에게 평생 먹고살 수 있을 만큼의 금액으로 입막음을 했으니 만에 하나 이 비밀이 누설된다면 그들의 목숨이 날아가는 거나 다름없다.그러기에 아이의 일이 새어나갈까 봐 걱정하는 것보다 지금 더 중요한 건 비슷한 개
유강후의 반응을 보니 믿지 않는 게 분명하다. 오랜 세월을 함께 보냈고 목숨을 내어줄 정도로 소중한 사람인데 아무 관계가 아니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유강후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온다연의 부드러운 입술을 쓰다듬어며 물었다. “그 사람이랑 몇 번이나 입맞췄어?” 온다연은 그의 엄지손가락을 잡으며 말했다. “한 번도 없다고 하면 안 믿을 거죠? 아무튼 아저씨가 생각하는 것과 달라요. 주한이는 특별한 사람이거든요.” 그녀의 목소리는 가볍고 부드러우면서도 그 속에 담겨있는 무언의 슬픔이 느껴졌다. “이 세상에서 제일 깨끗하고 따뜻한 사람이에요. 목숨 걸고 저랑 주희를 지켜준 사람이기도 하고요.” 이 세상에서 주한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게 유강후라 해도 불가능하다. 유강후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뭐가 다른데?” 사진 속의 주한은 확실히 청초하고 깔끔하게 잘생겼다. 하지만 외모만으로 봤을 때 유강후는 본인이 주한을 능가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온다연이 주장하는 차이점이 뭔지 이해하지 못했다. 온다연의 눈에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무의식적으로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쥔 채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냥 달라요. 이제 그만 물어봐요... 정말 신경 쓰이는 거면 날 이렇게 붙잡아둘 필요가 없잖아요. 차라리 그냥...” 유강후는 입술로 그녀의 말을 막고선 벌을 주듯 세게 깨물었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런데 생각 없이 함부로 말하는 그 버릇 좀 고쳐.” 온다연은 겉보기에 부드럽지만 실제로는 고집이 엄청 세서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은 칼로 입을 비틀어도 절대 들을 수 없다. 하지만 유강후에게는 다른 방법이 있었다. 온다연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호소했다. “아파요. 살살해요.” 유강후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또 함부로 말하면 다음에는 이렇게 안 넘어간다?” 그 말을 끝으로 유강후는 온다연에게 입맞춤했다. 이어진 키스는 유강후처럼 격렬했고 온다연이 숨을
유강후는 그녀가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가장 좋아해서 참지 못하고 그녀를 꼭 붙들어 찐하게 입을 맞추고 나서야 말했다. “계약 세 가지 맺자고 했지? 남은 두 가지는?” 온다연은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그리고 저도 제 친구가 있는데 제가 친구들을 사귀는 걸 막지 말아 줘요.” 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그래.” 입으로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천만 가지 대책들이 떠올랐다. 각각의 계획이 그녀를 벗어날 수 없는 덫으로 가둘 생각이었다. “세 번째는 뭐지?” 온다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기가 좀 더 괜찮아지면 저도 정상적으로 일을 하거나 학교에 다니고 싶어요...” 마치 유강후가 동의하지 않을까 두려운 듯 온다연은 얼른 덧붙였다. “만약 아저씨가 허락하지 않으면 아기를 데리고 아저씨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갈 거예요.” 유강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일하거나 학교에 다니는 거 허락할게.” 그에게는 친구 사귀는 문제보다 일이든 학교든 훨씬 통제하기 쉬운 일이었다. 특히나 임혜린 같은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친구는 온다연에게서 멀리 떨어지게 할 생각이었다. 온다연은 그가 너무 쉽게 동의하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동의한다고요? 그렇게 빨리요?” 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소용이 있어? 어차피 몰래 할 거잖아.” 온다연은 가느다란 손가락을 꼬며 조용히 대답했다. “알고 있다면 됐어요.” 그때 이권이 밖에서 들어왔다. “셋째 도련님, 주희 씨의 상태가 좀 나아졌습니다. 헌혈자도 몇 명 도착해서 이제 온다연 씨도 안심하셔도 됩니다. 또한, 혈액 전문의도 국내에 도착했습니다. 앞으로 두 시간 정도면 경원시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주희 씨도 운이 참 좋네요. 이 정도로도 살아남다니!” 온다연은 그 말을 듣고 가슴에 걸려 있던 돌이 한순간에 내려앉았다. 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꽉 쥐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안심됐어?” 온다연은 침대에 무릎
이날 밤 온다연은 깊이 잠들어 있어 유강후가 언제 떠났는지도 몰랐다. 동이 트기 직전, 여러 대의 헬리콥터가 병원 옥상에 요란하게 착륙했다. 유강후는 인큐베이터를 직접 안고 급히 헬기에서 내려 미리 대기하던 그웬에게 상자를 건넸다. 그웬을 제외하고는 병원의 모든 인원이 회의에 불려간 상태였기 때문에 작은 아기가 언제 무균실에 들어왔고 언제 구조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그웬뿐이었다. 사무실에서 로운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고 유강후를 보자마자 키가 190cm에 달하는 큰 체격의 로운이 즉시 무릎을 꿇었다. “셋째 도련님, 우리 어린 주인님은 당신께 맡기겠습니다.” 유강후는 그를 일으켜 앉히고 상황을 물었다. 새벽에 유강후는 갑작스레 전화를 받았다. 양준구에게 사고가 발생하여 공항으로 사람을 맞이하러 와달라는 것이었다. 양준구는 유강후의 생사를 함께한 친구이자 동남아시아 최대 부동산 사업자이자 조직을 이끄는 인물이었다. 이 전화가 오자마자 유강후는 큰일이 생겼음을 직감하고 공항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가 공항에 도착했을 때 마주한 것은 아기 인큐베이터를 품에 안은 양준구의 측근 로운뿐이었다. 로운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저희 주인님께서 사촌 동생 양시안에게 배신당했습니다. 부인 하이연 씨는 독을 먹고 위험에 처했으며 주인님께서는 그저 어린 주인님이라도 구하기 위해 아기를 조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인님께서는 어린 주인님을 당신께 맡기고 부인 곁으로 가셨습니다...” 로운은 울음을 참지 못하고 이어 말했다. “지금 양 씨 가문은 양시안이 장악했습니다. 그 자는 원래 주인님이 키운 사람이었는데 결국 악랄한 늑대를 키운 셈이 되었습니다. 저는 구 어르신을 대신해 반드시 복수를 해야겠습니다!” 그는 열쇠 모양의 옥패를 꺼내어 두 손으로 정중히 내밀며 말했다. “이것은 구 어르신과 부인께서 어린 주인님에게 남긴 유품입니다. 이는 양 씨 가문의 삼대에 걸친 재산이 보관된 금고의 열쇠이니 어린 주인님이 성인이 되면 꼭 전해주십시오.” “구 어르신께서 말
잠시 후 소형 헬리콥터 한 대가 병원 옥상에서 빠르게 이륙해 하늘로 사라졌다. 이곳은 유강후의 개인 병원이라 헬리콥터의 이착륙이 잦았기에 이번 이륙도 특별한 주목을 끌지 않았다. 헬리콥터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이권이 말했다. “셋째 도련님, 그 조직은 십 년간 심혈을 기울여 쌓아 오신 것입니다. 그 가치는 말로 다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유강후는 먼 하늘을 보며 말했다. “양준구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준구가 이토록 나를 신뢰하며 아기를 맡겼으니 계정 하나쯤은 별것 아니야.” 이권이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유강후가 가로막았다. “다연이는 깼어?” 이권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직 아닙니다. 장 집사가 막 만든 아침 식사를 가져왔으니 조금 드시죠.” 유강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 쪽으로 향했다. 병실에 들어서자 온다연이 침대에 기대어 멍하니 앉아있는 게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유강후를 보자 약간 더 정신이 들었는지 먼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작게 속삭였다. “어디 갔었어요?” 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좀 일 있어서 회사에 갔었어. 왜? 나 보고 싶었어?” 온다연은 고개를 저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아요.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거든요.” 그녀는 유강후의 옷자락을 잡고 불안한 듯 물었다. “정말 솔직하게 말해 줘요. 아기 지금 어떻게 된 거예요?” 유강후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안심시켰다. “많이 좋아졌어. 아까 가서 그웬 박사와 얘기했는데 아기도 조금 더 자랐고 상태도 훨씬 안정됐대.” 온다연은 금세 기운을 차리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문밖에서라도 아기를 한 번 더 볼 수 있을까요?” 유강후가 대답이 없자 급해져서 말했다. “한 번이면 돼요! 딱 한 번만!” 하지만 의외로 유강후는 바로 동의했다. 온다연은 믿을 수 없었다. “진짜요?”
술이 준비된 곳으로 걸음을 옮기니, 사람이 조금 뜸했다.진시현은 유강후의 팔을 조심스럽게 놓으며 공손하게 말했다.“대표님, 우리가 이렇게 있으면 사모님께서 보시고 오해하시는 건 아닐까요?”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는 지금까지 잘 해왔어.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오늘 맡은 역할만 제대로 해.”그는 방금 전 험담을 늘어놓던 사람들 쪽을 아주 잠깐 바라보더니 차가운 말투로 덧붙였다.“아까 수군거리던 사람들 찍어서 이권에게 보내서 처리하게 해.”진시현은 즉시 대답했다.“네, 대표님.”그녀가 살짝 고개를 들며 긴장된 표정을 띠었다.“김원도가 왔습니다.”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다시 유강후의 팔을 친밀하게 잡고, 그의 몸에 기댔다.애교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강후 씨, 저 조금 추워요.”유강후는 손짓하자마자 누군가 부드러운 캐시미어 숄을 가져왔다.그는 직접 숄을 집어 들고 진시현의 어깨에 다정하게 걸쳐주었다.그리고 숄을 걸쳐주며 살짝 몸을 기울여, 마치 그녀에게 입을 맞추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조심해. 저 근처에도 몇 명이 있어.”진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대답했다.“네, 대표님.”그때 김원도가 다가왔다.그는 진시현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유 대표, 이분은 누구지?”유강후는 진시현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담담하게 말했다.“김씨 집안 사람이라면 강씨 집안의 휘장을 모를 리가 없겠지. 내 약혼녀야.”김원도는 손가락에 낀 반지를 쓰다듬으며 낮게 웃었다.“유 대표는 정말 복이 많네.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 곁에 있으니 오늘 밤에도 많은 여성분들이 마음 아파하겠어.”유강후는 김원도의 말을 무시한 채, 시선을 그에게서 돌려 방금 막 들어온 다른 남자를 바라보았다.그 남자는 김원도와 닮았지만, 그의 음험한 기운은 전혀 없었다.그는 유강후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원도에게 다가갔다.“형, 형도 여기 있었어?”김원도는 얼굴빛이 변하며 말했다.“김원혁, 네가 왜
비밀스럽게 진행되었지만, 결국 소문은 새어 나갔고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해 질 무렵, 유강후와 진시현이 뉴월드 호텔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그 자리는 단숨에 술렁거렸다.유강후는 말할 것도 없이 경원시 전체를 통틀어도 가장 빛나는 존재였다.그는 권력자들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인물로, 그의 출현은 곧바로 주목을 끌었다. 연회 주최자인 주경한은 유강후를 보자마자 반갑게 달려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유 대표님,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요즘 많이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제 연회에 참석해 주시다니,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그가 한 발짝 더 다가서며 유강후의 옆에 서 있는 진시현에게 눈길을 돌렸다.그리고 단번에 그녀의 가슴 위에 달린 블루 사파이어 브로치를 알아차렸다.조명 아래에서, 브로치 가장자리의 Y 모양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주경한은 이 바닥에서 감각이 빠르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그는 한눈에 이것이 강씨 집안의 여주인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물건임을 알아차리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 이분이 바로 사모님이시군요!”그러나 유강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단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주경한은 이미 소문으로 유강후가 요즘 한 아가씨를 매우 애지중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그녀가 강씨 집안 여주인의 물건을 사용할 정도라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혹시 유 대표님, 곧 결혼이라도 하시려는 건가요?”유강후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곧 합니다.”주경한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그럼 제가 빨리 축의금을 준비해야겠네요.”그는 진시현을 보며 말을 이었다.“온다연 씨 되시죠? 대표님께서 아주 각별히 아끼신다고 들었습니다...”진시현은 유강후를 살짝 바라보았다.그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아니요, 저는 진시현입니다.”주경한은 순간 멈칫했지만, 곧 웃음을 터뜨렸다.“아, 맞다, 진시현 씨. 제가 착각했네요. 두 분, 안으로 들어가시죠
장화연의 얼굴에는 감정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사모님, 도련님을 믿으셔야 합니다.”그 말은 온다연의 추측이 사실임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온다연의 심장은 순간적으로 꽉 조여들었고, 마치 뒤틀려버린 밧줄처럼 고통스러워 몸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그래서, 정말로 다른 여자와 함께 있다는 거네요.”장화연은 말했다.“이건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모님과 우림 도련님의 안전과도 관련이 있는 일이에요. 도련님께서는 사모님께서 걱정하실까 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하셨지만, 저는 사모님께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이 점점 더 무서워질 만큼 하얗게 질려가는 것을 본 장화연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누군가 사모님의 안전을 담보로 도련님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 며칠 동안 도련님은 밖에 나가 사모님처럼 보이는 사람을 일부러 꾸며냈어요. 그렇게라도 설명해 드리면 조금은 나아지실까요?”장화연은 유강후 곁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며 그의 모든 행적을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이었다.그렇기에 그녀의 말은 묵직한 신뢰를 주었고, 때로는 유강후를 대신해 발언하는 권위도 있었다.온다연은 그런 그녀의 말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하지만 그 전화.그녀가 그렇게 오래 들었던 그 전화가 정말 거짓일 수 있을까?온다연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강후 씨의 휴대폰을 다른 사람이 받을 수 있나요?”장화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조용히 말했다.“사모님,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모든 건 도련님께서 돌아오신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워낙 복잡하니, 타인들의 이간질에 넘어가지 마세요.”그녀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제가 우림 도련님을 데려오겠습니다. 오늘 밤은 사모님께서 아이와 함께 주무세요.”곧 예쁜 아기가 방으로 안겨 들어왔다.아이가 들어오는 순간, 온다연은 조금이나마 마음이 평온해지는 걸 느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아이의 곤히 잠든 얼굴을 쓰다듬으며, 이마에 부드럽게
그는 수년 동안 유강후의 곁에서 그의 냉혹한 수완을 지켜보며 살아왔다.하지만 이번만큼은 유난히 매섭고 강렬했다.김씨 집안은 동양국에서 가장 유명한 재벌 중 하나로 손꼽혔다. 그런데 불과 한 달 만에 몰락했고,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추락하고 말았다.이 과정에서 소요된 막대한 자금과 수단, 그리고 상업계에 불어닥친 폭풍우 같은 소란은 평범한 이들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이번 사건은 그가 유강후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인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그리고 또 한 가지 확실히 깨닫게 했다.앞으로는 정말로 의지할 대상을 찾는다면, 온다연을 선택하는 게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거라는 사실을.온다연의 방.장화연은 따뜻한 우유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온다연이 침대 모서리에 웅크린 채 몰래 눈물을 훔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방 안의 부드러운 조명 아래, 온다연의 빨갛게 부은 눈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녀는 분명 울고 있었다.장화연은 우유를 내려놓고 그녀 옆에 조용히 앉았다.“사모님, 도련님이 보고 싶으신 거예요?”온다연은 고개를 저으며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강후 씨가 왜 오늘 오지 않는 거죠? 정말 회사에서 회의 중인 걸까요?”장화연은 따뜻한 우유를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악몽을 꾸셨죠? 이거 마시면 좀 나아질 거예요.”온다연은 우유를 받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강후 씨 오늘 너무 심했어요. 저한테 한 달간 휴학하라고 했어요. 이유는 단지 염지훈이 제 선생님이라는 것뿐인데, 저랑 상의도 없이 제 수업을 멋대로 중단시켰어요.”“원래는 그 사람과 크게 싸우려고 했어요. 하지만 우리가 결혼도 했고, 아기까지 있으니 앞으로는 모든 일을 잘 상의하며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참았어요. 그런데 강후 씨는...”온다연은 침대 시트를 움켜쥐며 낮게 속삭였다.“혹시 다른 여자가 생긴 걸까요? 강후 씨는 다를 거라고 믿었는데, 결국 다른 재벌 자제들과 다를 게 없었네요
유강후는 온다연이 악몽에 시달린 줄 알고 가슴 아파하며 물었다.“다연아, 악몽 꿨어?”온다연은 가볍게 답하고선 말을 이었다.“다른 여자랑 같이 있는 꿈을 꿨어요.”하루 종일 전전긍긍하던 유강후는 온다연의 목소리를 듣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다른 여자랑 있을까 봐 걱정됐어? 꿈에서도 내 생각뿐이네?”온다연이 물었다.“어디에 있는지 왜 대답 안 해요?”“회사에서 미팅 중이었어. 아마 이틀 동안 바빠서 못 갈 거야. 아이랑 같이 잘 지낼...”“강후 씨.”온다연은 그의 말을 끊었고 곧바로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거짓말하고 있잖아요. 옆에 다른 여자 있죠?”유강후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온다연의 흐느끼는 목소리에서는 그녀의 기분이 고스란히 드러났다.“아까 전화했을 때 다 들었어요. 다른 여자랑...”온다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유강후는 그녀가 또 악몽을 꾼 줄 알고 걱정된 마음으로 장화연에게 전화를 걸었다.곧이어 핸드폰 너머로 장화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유강후는 초조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지금 당장 다연이가 있는 방으로 가봐. 방금 통화했는데 악몽을 꿨는지 울고 있었어.”장화연이 답했다.“지금 바로 가볼게요.”“일이 복잡해져서 당분간은 못갈지도 몰라. 다연이랑 우림이 잘 돌봐줘. 절대 밖에 나가게 해서는 안 돼.”“알겠습니다.”“차라리 우림이를 옆에 데려다줘. 아이랑 같이 자면 마음이 편해질 거야.”“그럴게요.”장화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어제 경호원을 통해서 들었는데 다연 씨가 나은별 씨를 만났다고 합니다. 아마 그때 안 좋은 얘기를 들었을 수도 있을 것 같네요.”“다연 씨는 힘든 일을 마음속에 담아두는 분입니다. 도련님께 대한 오해가 생겼다면 그 마음을 달래는 게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모릅니다. 두 분 어렵게 여기까지 온 만큼 서로에게 그 어떤 오해도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도련님, 나은별 씨가 무슨
부검 결과 여자는 죽기 직전에 성폭행을 당했고 체내에서 5개의 DNA가 검출되었다.대역은 온다연처럼 보이기 위해 평소 그녀가 입는 것과 똑같은 옷을 입었다.유강후는 온다연과 매우 닮은 그 얼굴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멘탈이 무너졌다.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는 내면 깊숙이 잠재되어 있던 공포과 패닉을 느꼈다.만약 죽은 사람이 정말 온다연이라면 유강후는 자신이 어떤 미친 행동을 저지를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전례 없는 살인 충동이 밀려왔고 그는 김원도와 김씨 가문의 뼈까지 가루로 만들리라 다짐했다.위험하고 불안함 밤이 시작되었다. 수십 대의 헬기와 수많은 경찰이 동시에 파견되어 한옥 주변의 모든 곳을 샅샅이 수사했다.하지만 효과는 미미했고 전문 킬러라서 그런지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유강후는 한옥에 들어온 이후로 밖에 나가지 않았다.그럼에도 여전히 누군가 그의 핸드폰으로 사진을 보내왔다.사진에 찍힌 사람은 그와 진시현인데 얼굴 정면이 아주 선명하게 찍혔다.실리콘 가면을 쓴 진시현의 얼굴은 온다연과 똑같았다.이건 과시가 아니라 경고다.말할 것도 없이 유강후는 단번에 사진을 보낸 사람이 누군지 알아챘다.김원도는 언제든지 죽일 수 있으니 사진 속의 여자를 잘 지키라고 선포하는 거나 다름없다.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른 유강후는 외투를 옆으로 던져놓고 다시 소파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이권은 진시현에게 차 한 잔 타오라고 시켰다.“도련님,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다연 씨는 안전하니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그쪽으로 이동하는 게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그는 홍차를 유강후에게 건넸다.“며칠 동안은 외출을 자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통화도 줄이시고요. 현재로서는 모두가 안전하는게 가장 중요합니다.”이권의 말이 매우 일리가 있고 사실이지만 유강후는 귀에 거슬렸다.한편으로는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기도 했다. 김원도 한 명으로도 충분히 혼란스러운데 똑같은 인간이 여러 명이 나타났다면 온다연을 지켜줄 수 있을까?걱정은 자
온다연과 매우 흡사해 보이는 여자가 그들에게 공순하게 인사하며 말을 건넸다.“대표님, 방금 전화가 여러 통 왔는데 이 비서님이랑 안에서 회의 중이셔서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유강후는 곧바로 핸드폰을 확인했고 그곳에는 온다연이 걸어온 부재중전화가 찍혀있었다.한 시간 전에 걸려 온 전화였다.유강후는 시간을 확인했고 지금은 새벽 3시 45분이다.이때 이권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다연 씨가 도련님이 보고 싶은가 봐요.”줄곧 정색하던 유강후는 그제야 표정이 조금 풀렸고 곧바로 온다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핸드폰은 꺼져있었다.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옷걸이에서 코트를 빼내더니 곧장 밖으로 걸어갔다.이때 이권이 말렸다.“도련님, 안 됩니다. 저희를 지켜보는 시선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지 않습니까. 다연 씨 쪽은 안전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장 집사도 옆을 지키고 있으니 안심하세요.”“우림 도련님도 그쪽으로 보냈습니다. 도련님이 옆에 계시니 다연 씨의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을 겁니다.”유강후는 입술을 깨물었고 눈빛에 드러난 분노와 원망은 점점 더 짙어졌다.‘김원도, 내 손으로 널 죽여버릴 거야.’금융위기가 닥쳤을 때도 유강후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고 결코 발을 빼거나 물러선 적이 없었다.그런데 이제는 김원도 때문에 피하는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아내와 아이의 목숨으로 위협하고 있으니 섣불리 행동할 수가 없었다.‘죽여버릴 거야.’물론 김원도도 좋은 날만 보낸 건 아니다.불과 한 달 만에 미래그룹은 김씨 가문의 시장 점유율 70%를 먹어 치웠고 김신 그룹은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인지도가 조금이라도 있는 기업이라면 미래 그룹과 김신 그룹이 대치 상황이라는 걸 눈치챘기에 아무도 섣불리 김신 그룹의 손을 잡지 않았다.김신 그룹의 주가는 한순간에 폭락하였고 보름도 채 안 되어 시가총액이 3분의 1로 줄어들었다.그뿐만 아니라 동양국의 다른 가문에서는 김씨 가문의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이고 있다.더불어 김원도의 아버지는 자신에게 혼외 자식이 두
두 경호원은 온다연의 신분을 알고 있었고 더욱이 그녀가 유강후의 목숨과도 다름없다는 사람인 걸 알기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사모님.”집에 돌아와 보니 장화연도 있었다.게다가 아이를 데리고 함께 이곳으로 왔다.온다연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최근에 공부하느라 바쁜 데다가 저녁에는 유강후와 함께 시간을 보냈으니 며칠 동안 아이에게 다가갈 틈이 없었다.온다연은 유강후가 왜 그녀와 아이를 이곳에 데려왔는지 이해하지 못했다.장화연은 한옥의 인테리어를 바꾸려고 하는데 페인트 냄새가 아이한테 안 좋을 것 같아 이곳에 잠깐 머무는 거라고 설명해 줬다.비록 의심이 들었지만 별생각은 하지 않았다.사실 아이가 옆에 있다면 어디에서 지내던 그녀에게는 똑같았다.온다연은 아이가 잠들 때까지 놀아줬고 늦은 시간이 되었지만 유강후는 나타나지 않았다.한편으로는 유강후가 제멋대로 휴학 신청을 한 게 너무 화가 났다.염지훈이 교수로 온 게 온다연의 잘못도 아닌데 왜 갑자기 수업을 못 듣게 하냐는 말이다.생각하면 할수록 터무니없고 불합리한 결정이다.그러다가 잠이 든 온다연은 잠결에 옆을 만졌고 텅 비어 있는 느낌에 공허함이 밀려와 괴로웠다.온다연은 핸드폰을 꺼내 유강후와의 카톡 대화창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진지하게 얘기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고민 끝에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여러 번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네 번째 시도를 했을 땐 통화가 연결됐으나 들려오는 건 여자의 목소리였다.온다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환청이 들리는 건가 싶어 귀를 의심했다.“누구세요?”그러자 전화가 바로 끊겼다.온다연은 굴하지 않고 다시 걸었지만 유강후는 받지 않았다.숨이 막혀온 온다연은 잘못 들은 거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다시 한번 걸었을 때 통화가 연결됐고 이상한 기계음이 흘렀다.그러고선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선명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희미한 남자의 목소리는 유강후가 틀림없다.그들이 나눴던 사랑처럼 핸드폰 너머로는 서로에게 엉켜있는
온다연은 나은별의 손을 뿌리치고 뒤돌아 그녀의 얼굴을 노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사랑하는 사람이 살아있다면 기뻐해야 하지 않나요? 왜 은별 씨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죠?”온다연은 유강후가 설명해 줬던 당시의 상황과 더불어 문득 이상한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평소 안전하기로 소문난 바다였는데 왜 갑자기 상어가 나타나 인간을 공격했을까?온다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나은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그 사람이 살아있는 걸 원하지 않나 봐요? 아니면 그 죽음이 은별 씨와 연관이 있는 건가?”사실 모든 건 온다연의 추측에 불과했는데 나은별은 생각지도 못한 반응을 보이더니 손을 들어 그녀를 때리려고 했다.온다연은 단번에 팔을 뻗어 나은별의 손목을 잡았고 동시에 따귀를 날렸다.뺨 때리는 소리가 울리자 룸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나은별은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된 채로 사악한 눈빛을 드러냈다.“재민이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어떻게 그 죽음이 저랑 연결됐다고 얘기할 수가 있죠? 심보가 고약하니까 이런 터무니없는 추측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거예요. 마음 좀 곱게 먹으세요.”온다연은 피식 보고선 태연하게 말했다.“사랑하는 사람?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면 그 타이밍에 강후 씨와 결혼하려고 발악했을까요?”“처음부터 은별 씨는 한재민을 좋아한 게 아니잖아요. 단지 뱃속에 있는 아이한테 그럴듯한 아빠를 찾아주고 싶었던 게 아닌가?”온다연은 말하면서 무심코 소이섭을 쳐다봤다.그런데 뜻밖에도 소이섭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온다연, 또 헛소리하면 내가 너 가만두지 않을 거야.”소이섭이 화를 내며 온다연을 향해 손을 뻗었다.다행히 경호원이 다가와 소이섭의 손목을 잡으며 경고했다.“미리 충고드리는데 그쪽은 저한테 상대가 안 됩니다. 정말 사모님을 때리실 겁니까?”유강후의 경호원은 하나같이 특전사에 버금갔기에 소이섭은 본인이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할 수 없이 그저 온다연을 째려보며 말했다.“은별이는 지금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