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후가 키스를 하든 말든 온다연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예전이라면 유강후가 지금처럼 키스를 할 때 아프다고 말하던지 아니면 다른 리액션이 있었다. 비록 반응은 미비했지만 유강후는 그것마저도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눈을 감은채 꼼짝하지 않았고 마치 감정 없는 목각인형이나 다름없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 유강후는 그녀의 턱을 잡고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온다연. 왜 아무 반응이 없는 거야.” 온다연은 아픈 듯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지만 그럼에도 눈을 뜨지 않았다. 유강후는 자신에게 물려 빨갛게 부어오른 그녀의 입술을 노려보며 주한과도 이렇게 키스를 했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점점 이성을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유강후는 한 손으로 온다연의 부드러운 허리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감싼 채 품 안에 꽉 껴안으며 숨 막힐 정도로 키스를 퍼부었다. 그러나 온다연은 소파 시트를 움켜쥘 뿐 그 어떤 리액션도 없었다. 그녀가 이런 행동을 할수록 유강후의 마음에는 더 큰 분노가 밀려왔고 저도 모르게 점점 힘을 주게 되었다. 곧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이런 느낌은 유강후로 하여금 더욱 온다연에게 집착하게 만들었다. 그의 손은 습관처럼 천천히 온다연의 아랫배 쪽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불룩하던 튀어나온 부분은 이제 사라졌고 남은 건 평평한 아랫배와 부드러운 살결뿐이었다. 순간 가슴이 욱신거리는 고통에 정신을 번쩍 차린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서 풀어주었다. 눈은 빨갛게 충혈되었고 호흡마저 불안정해졌다. 유강후는 그녀의 입술에 묻은 피를 닦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온다연, 기억해. 넌 영원히 내 거야. 몸이든 마음이든 모두 내 거야.” “넌 평생 내 곁에만 있어야 돼. 아무 데도 갈 수 없을 거야.” 온다연은 눈을 내리깔고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유강후의 시선에는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속눈썹만 보일뿐 그녀의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유강후는 더 이상 이런 걸 신
주희는 주한의 친남동생이다. 두 사람은 지난 몇 년간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왔다.그리고 온다연은 하마터면 아이를 잃을 뻔했다.고의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이걸 용서할 만큼 마음이 너그럽지는 못했다.“주희야,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으니까 이만 나가줘.”주희는 눈빛이 흐려지더니 목소리 톤마저 바뀌었다.“누나,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는 얘기예요?”온다연의 침묵에 주희는 뜬끔없이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형이랑 안 닮아서 그런 거예요? 그래서 보고 싶지 않은 거예요?”“형은 누나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우리 형은 더러운 인간이라고요.”“닥쳐.”온다연은 손을 들어 뺨 한대를 날리고선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어렸을 때부터 널 키워준 게 형이야. 어떻게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어?”주희는 맞은 얼굴을 가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온다연을 바라봤다.“누나 지금 나 때렸어요?”“지금껏 때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잖아요. 왜 이제는...”사실 온다연도 자신이 왜 때렸는지 몰랐다.동생인 주희는 이 세상에 남은 주한의 유일한 흔적이나 다름없다.온다연은 마음을 가다듬은 후 진지하게 말했다.“나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으니까.”주희는 집착하는 눈빛으로 온다연을 바라봤다.“형이 누나한테 잘해준 건 누나가 목숨을 구해줘서 그런 거예요. 형의 죽음이...”주희는 말끝을 흐리더니 슬픔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온다연을 쳐다봤다.“누나, 제가 형이랑 두 살 차이밖에 안 나요. 저도 이제 컸고, 충분히 누나를 지켜줄 수 있어요.”주희는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증오의 눈으로 유강후를 바라봤다.“이 사람은 누나의 감정을 가지고 노는 것뿐이에요. 평생 이 사람 옆에 있을 거예요? 우리 형보다도 더 못한 인간이라고요.”“솔직히 우리 형도 누나랑 만날 자격이 없어요.”“입 닥쳐.”온다연은 참다못해 폭발했다.“정말 미쳤구나? 네가 무슨 자격으로 주한이를 평가해. 걔는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사람이었어. 내 앞에서
왜 온다연의 운명은 이렇게 잔인할까?똑같은 장면이 또다시 그녀의 눈앞에서 반복되었다.온다연은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서 똑바로 서 있지도 못했다.이때 유강후에 방에서 뛰쳐나와 재빨리 그녀를 품에 안았다.그는 아래층을 힐끗 보고선 온다연의 눈을 가렸다.“눈 감고 보지 마.”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움켜쥐고 흐느껴 울었다.“제발 살려줘요. 주한이 좀 살려줘요.”아래층을 보니 어느덧 의료진이 튀어나와 주희를 들것으로 옮기고 있었다.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피를 본 유강후는 나지막하게 말했다.“다연아, 아마 살아남지 못할 거야.”“내가 신도 아니고 무슨 수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겠어. 그건 나도 못해.”그 말에 다리에 힘이 풀린 온다연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그럼에도 유강후는 품에서 온다연을 놓지 않았다.“다연아...”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잡고 울먹였다.“싫어하는 거 알아요... 하지만 주한이 동생이잖아요... 제발...”그녀는 유강후의 눈을 바라보며 간절하게 빌었다.“이렇게 빌게요. 제발 살려줘요. 살리기만 한다면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줄게요.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도와줘요...”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에 빠진 온다연은 어느새 눈물범벅이 되었다.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주희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하나뿐이었다.주희는 주한이가 가장 사랑하는 동생이고 어려서부터 그들과 함께 자란 가족이나 다름없다.그러니 온다연은 주한이가 남긴 유일한 혈육을 못 지켰다는 죄책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유강후도 온다연이 이렇게까지 우는 건 처음이었다.갈비뼈가 몇 개 부러질 정도로 큰 부상을 입어도 눈물조차 흘리지 않던 강한 사람이 다른 사람 때문에, 그것도 주한의 동생 때문에 이렇게 슬퍼하니 유강후도 기분이 착잡했다.한편으로는 그녀의 인생에 주한이라는 비중이 꽤 크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온다연이 흘리는 눈물 매 한 방울이 강한 염산처럼 그의 심장을 부식시켜고 있었다.화가 나고 충격적인 건 둘째라치고 너무나 상처였다.“주한 때문에 나한테
유강후는 고개를 숙여 온다연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했다.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러고선 몸을 돌려 이권에게 명령했다. “미래 그룹이랑 내 명의로 된 기타 그룹에 지금 당장 긴급 요청을 보내고 일단 희귀 혈액형을 가진 직원들이 몇 명 있는지 알아봐. 헌혈할 의향이 있다면 무조건 병원으로 데려와. 승진이랑 급여 인상이라는 조건도 걸어두고.” “워낙 희귀한 혈액형이라 우리 그룹에도 해당되는 사람이 별로 없을 거야. 그러니까 언론사에 연락해서 기사로 퍼뜨려. 30분 내에 병원에 도착하면 1ml에 2천만 원, 한 시간 내에 도착하면 1ml에 천만 원.” “그리고 이준이랑 현수 씨한테도 연락해. 두 사람 수중에 있는 그룹도 똑같이 할 거야.” “다른 건 다 가능하지만 언론사에 연락하는 건 안됩니다. 사회적 여론이 커져서 분명히 문제가 생길 겁니다.” 유강후는 극도로 냉랭한 모습을 되찾았다. “신경 쓰지 말고 시키는 것부터 처리해.” “기사가 나간다고 해도 30분 만에 도착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주희 씨는 과다 출혈로 이미 위급한 상황입니다.” 유강후는 매우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희귀 혈액형인걸 잊었어? 나부터 뽑으면 돼.” 이권은 화들짝 놀랐다. “안됩니다. 엄청난 양이 필요한데 고작 대표님 혼자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병원에 혈액 재고가 있다며? 그걸 나한테 수혈하고 다시 내 피를 뽑으면 되잖아. 잔소리 그만하고 얼른 가자.” 이권은 곧바로 답했다. “그래도 이건 안됩니다.” 유강후는 참다못해 버럭 화를 냈다. “왜 내 말에 이렇게 토를 달지?” 이권은 울며 겨자 먹기로 참을 수밖에 없었고 떠나기 전 온다연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그 시각 온다연은 혼란스러운 마음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녀 역시 유강후가 곧 주희에게 수혈하러 간다는 걸 들었다. 줄곧 범접할 수 없는 싸늘함과 도도함을 풍기던 남자가 자신을 위해 이렇게 희생하니 온다연은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미묘한 감정이 솟아오른 그녀는 유강후의 손목을
온다연은 요즘 유강후와 지낸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뒤섞인 다양한 사람과 사건을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미어졌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유강후와 어떻게 지내야 할지 몰라 막막함에 이런 느낌이 들 수도 있다. 현재 그들 사이에는 아이가 있고, 유강후도 주희를 구하겠다고 약속까지 했으니 전과 똑같은 태도로 그를 대하는 건 옳지 않은 행동인 게 분명하다. 적어도 더 이상 욕설을 더부으며 안된다. 온다연은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미래가 걱정되었다.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조차 버거운 상황에 신경 써야 할 일은 날로 들어가고 있으니 점점 한계치에 다다랐다. 과거도 미래도 생각하지 않는 현재만 살고 싶었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생각할수록 피곤함이 밀려왔고 약 때문인지 온다연은 천천히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영원시로 돌아갔다. 고유정이 단검을 손에 든 채 미친 듯이 달려왔고 곧바로 유강후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지켜줬다. 특수 훈련을 받아 일반인은 접근조차 못하는 날렵함을 가졌음에도 유강후는 피하거나 막기는커녕 오히려 두 손으로 온다연을 꽉 끌어안은 채 온몸으로 단검을 막았다. 그렇게 고유정의 칼부림을 몇 차례나 견뎌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온다연은 잠결에 흘린 눈물로 인해 두 눈이 팅팅 부어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녀와 유강후에게도 짧지만 달콤한 나날들이 있었다. 설레는 느낌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게 온몸에 와닿는 가슴 벅찬 감정은 진실했다.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른 온다연은 침대에서 내려와 밖으로 뛰쳐나갔다. 입구의 간호사들은 감히 막을 수가 없어 마지못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병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채혈실 입구에 도착했다. 그 시각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유강후의 양팔에는 혈액주머니가 걸려있었다. 온다연이 이곳으로 온 걸 보고 유강후는 표정이 일그러졌다.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온다연이 안으로 뛰어갔다. 그녀는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유강후의 허리를
유강후는 두 눈이 빨갛게 부어오른 온다연을 보고선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또 울었어? 눈 부은 것 좀봐.” 온다연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꿈꾸다가 울었어요.” 유강후는 감정이 요동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꿈에서 내가 또 다쳤어? 그래서 이렇게 팅팅 부어 오늘 정도로 운 거야?” 온다연은 입술을 깨물고 눈을 내리깐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아저씨라고 불러도 돼요?” 유강후는 고개를 숙여 온다연의 이마에 입맞춤했다. “당연하지. 네가 부르고 싶은 대로 맘껏 불러도 돼.” 온다연은 그의 시선을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은 듯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우린...” 이때 입구에서 쭈뼛쭈뼛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인기척에 고개를 든 유강후는 그 사람을 힐끗 쳐다보고선 담담하게 말했다. “오늘 도와줘서 고마워요.” 온다연도 입구에 선 사람에게 시선이 갔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난번 전통 한옥에서 피팅할 때 알게 된 임청하라는 모델이었다. 심지어 영원시에서 유강후에게 수혈한 적도 있다. ‘여긴 왜 왔지?’ 온다연을 발견한 임청하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선 재빨리 눈길을 돌렸다. “대표님이 없었다면 전 대학도 다니지 못했을 거예요. 대표님은 제 은인인데 이 정도는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그리고 마침 이 근처에 있었어요.” “차에서 핸드폰 하다가 우연히 기사를 보게 된 거예요. 그래서 고민도 없이 바로 달려왔죠.” 유강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죠.” 말을 이어가던 유강후는 고개를 돌려 이권을 바라봤다. “전에 제시한 금액대로 청하 씨한테 넘겨줘. 제일 먼저 도착했으니까 2억 더 보태.” 임청하는 입술을 깨물며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돈은 필요 없습니다. 염치 불고하고 대표님께 부탁 하나를 드려도 될까요?” 조명 아래 비친 그녀의 얼굴은 유난히 창백했고 얇은 옷 한 장을 걸치고 있어서 그런지 꽤나 초
유강후는 눈을 반짝이며 나지막하게 물었다.“왜?”온다연은 극도로 내성적인 사람이라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을 거의 표현하지 않는다.직설적으로 누군가가 싫다며 말하는 건 유강후도 처음 봤다.더군다나 온다연과 임청하 사이에 그 어떤 교집합도 존재하지 않는다.그러니 온다연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임청하에게 적대심을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온다연이 적대감을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유강후 때문 일 것이다.유강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태연하게 물었다.“전에 알던 사이야?”온다연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아니요. 그냥 싫어요.”“싫어하는 이유는 뭐야? 나한테 접근하려는 것 같아서?”온다연은 말없이 그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었다.방에 들아온 후, 유강후가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물어볼 게 있는데 솔직하게 대답해 줘요.”유강후는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말해봐.”사실 온다연이 어떤 질문을 할지 대충 예상이 갔다.닫혀 있는 그녀의 마음을 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거듭되는 고난 속에서 온다연의 마음에는 족쇄가 겹겹이 채워져 있었는데 그걸 풀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주한이다.이제 주한이 없으니 온다연은 또다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겹겹이 방어기제를 쌓았다.그동안에 겪었던 일만큼 하고 싶었던 말도 많았을 텐데 이제야 조금씩 솔직해지는 그녀의 모습에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었다.유강후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무도 모른다.온다연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죄책감 때문에 미안해서 이러는 거죠? 그걸 갚으려고 절 잡아두는 거예요?”말을 마친 그녀는 침대 시트를 붙잡고 차마 유강후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정적이 흘렀다.유강후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온다연이 이해되지 않았다. 진심은 물어보지도 않고 그저 죄책감이라는 단어에 꽂혀 무작정 본인의 생각을 단정 지으니 답답하기도 했다.온다연은 그가 말을 하지 않자 눈을 내리깔고 다시 말을 이었다.“정말 그 이유라면 괜찮으니까 이만 놓아줘요.”유강후는 그녀
그러니 고개를 숙이고 물어볼 수밖에 없다.“예전에...”유강후는 그녀가 나은별에 대해 물어보려는 줄 알고 재빨리 답했다.“말했듯이 나은별이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야. 좋아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온다연은 입술을 깨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과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고 싶지 않아요. 만약 죄책감 때문에 결혼하려는 거면 절대 안 할 거예요.”“만에 하나 우리가 결혼하게 되어도 회장님을 포함한 유씨 가문 그 어떤 가족도 만나지 않을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우리 아이는 온씨 성으로 짓는 게 어때? 강씨도 괜찮고.”온다연은 어두운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온씨는 안 좋아요.”어려서부터 부모에게 버림받는 것도 모자라 오랜 시간 동안 괴롭힘에 시달렸으니 이제는 온씨 성마저도 불길하게 느껴졌다.“강씨로 해요. 아이 이름은 아저씨가 지었어요?”유강후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듯 멈칫했다.“아직... 외할아버지한테 여쭤보려고. 우리 엄마가 외동딸이시거든. 그러니까 이 아이가 강씨 가문의 유일한 후손인거지. 이름 짓는 것조차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실 거야.”유강후의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질 비범한 운명이다.그러나 지금은...유강후는 심호흡하며 애써 마음을 진정했다.“아직 무균실에 몇 달은 더 있어야 하니까 나중에 아이 나오면 다시 얘기하자.”아이에 대해 말하자 온다연의 눈빛은 곧바로 부드러워졌다.“딱 한 번 보긴 했지만 정말 괜찮을까요? 너무 작아서 무서워요...”유강후는 몸을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했다.“많이 좋아졌으니까 걱정하지 마.”유강후는 그웬을 포함한 모든 의사, 간호사들과 비밀유지 계약서를 체결했다. 그들에게 평생 먹고살 수 있을 만큼의 금액으로 입막음을 했으니 만에 하나 이 비밀이 누설된다면 그들의 목숨이 날아가는 거나 다름없다.그러기에 아이의 일이 새어나갈까 봐 걱정하는 것보다 지금 더 중요한 건 비슷한 개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
“다연이가 전에 겪은 고통... 똑같이... 아니 그보다 수천 배로 돌려줘야 해.”“안 돼요. 그러면 안 돼요!”유하령이 비명을 질렀다.“아빠가 죽었어요! 아빠가 모든 죄를 짊어졌잖아요. 제발... 저를 그렇게 만들지 마요!”하지만 유강후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그 사람이 죄를 씻고 싶어 했다고 해서 내가 용서해 줘야 한다는 뜻은 아니야. 그때 너희가 법을 피해 가며 사람을 괴롭혔지. 좋아. 지금 잘됐네. 정신병자들은 사람을 때리고 죽여도 법의 심판을 안 받아. 그러니까 네가 그런 벌을 받는 것도... 네 업보지.”유하령은 울부짖으며 욕을 퍼부었지만 유강후는 단 한 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데리고 가. 하지만 일단 죽이지는 마. 죽어버리면 재미가 없잖아.”“네! 대표님!”그는 더는 뒤 돌아보지 않고 다시 식사하던 곳으로 돌아갔다.온다연은 그가 돌아오자마자 미리 까둔 귤 한 조각을 그의 입가에 가져갔다.“얼른 먹어요. 입술이 다 터졌잖아요. 아무리 바빠도 물은 마셔야죠.”그녀는 다시 뜨거운 물을 따라 그의 손에 건넸다.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귤 한 조각을 조용히 입에 넣었다. 그리고 덤덤하게 말했다.“유하령... 정신병원으로 보냈어.”온다연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 정도면 오히려 관대한 거네요. 하지만 제가 더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아저씨가 알아서 하세요.”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하루 종일 나랑 같이 있었는데... 피곤하지 않아?”온다연은 그의 손바닥에 볼을 비비며 속삭였다.“아니요. 아저씨가 있으니까 하나도 안 피곤해요. 오히려 제가 좀 쉬어야 할 것 같은데요?”유강후는 그녀를 들어 올려 무릎 위에 앉히고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이 가슴 가득 퍼지며 왠지 모르게 조금은 덜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다연아... 유민준 걔는...”“전 걔랑은 끝났어요.”온다연이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유민준이
온다연은 처음부터 유하령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유씨 집안이 다 무너지든 모두가 죽든 솔직히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유강후가 저렇게 무너져 있는 걸 보니... 그녀는 가슴이 죄여들 듯 아팠다.그건 말로 다할 수 없는 통증이었다.그가 아무리 강해 보여도 결국은 사람이니 상처도 받고 아프고 지치고 힘들어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알았기에 그래서 그녀는 그를 위해 조금씩 물러서기로 했다.후회가 되고 아프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를 위해서라면 감수할 수 있었다.그 순간 유강후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다연아, 다시는 네가 상처 안 받게 할게. 여기 바람이 좀 세네. 안으로 들어가자.”얼마 지나지 않아 장 비서가 따뜻한 팥죽과 집밥 느낌의 반찬들을 함께 보냈다. 팥죽이 양이 많지 않아서 온다연은 근처 음식점에 연락해 직접 빚은 만두를 더 주문했고 따뜻한 반찬도 한 상 가득 더 보냈다. 그리고 따라온 경호원들과 비서진도 함께 둘러앉아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었다.밥을 먹던 도중 누군가 조용히 병실 안으로 들어와 유강후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유강후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그는 온다연을 향해 말했다.“잠깐 나갔다 올게. 너희끼리 먼저 먹고 있어.”온다연도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그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눌러 앉히며 말했다.“넌 여기 있어. 잠깐이면 돼. 금방 올게.”그러더니 탁자 위에 있던 귤 하나를 들고는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까놔. 돌아와서 같이 먹자.”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아버님 괜찮으실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유강후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병실 문을 나서자 이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의 상태가 좀 이상합니다. 완전히 미쳐버린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하고... 대표님, 정말 그냥 놔두실 겁니까? 설마... 진짜 용서해 줄 생각은 아니시죠?”유강후의 목
그때 유하령이 옆에서 갑자기 소리쳤다. “피... 피가 너무 많아. 아빠가 죽었어. 우리 아빠가 죽었다고요!”그 소리에 유재성이 갑자기 격하게 기침하더니 급기야 피를 토해냈다.유강후가 급히 그를 부축하며 외쳤다. “유하령 당장 끌어내. 간호사, 의사 불러요. 빨리!”유재성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네 큰형… 가서... 빨리 가서 봐...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어서...”그러자 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현장으로 향했다.그리고 그곳엔 이미 숨이 멎은 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있었다. 의료진이 마지막 조치를 하고 있었지만 이미 모든 게 늦은 상태였다.유민준은 그 곁에 무릎 꿇고 앉아 피투성이가 된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복도와 방 안 바닥엔 핏물이 고여 있었다.유강후가 다가서자 의료진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유자성 씨는 휴게실에서 스스로 목을 그었습니다. 경동맥을 절단한 상태였고 발견 당시엔 이미 호흡이 없는 상태였습니다.”유강후는 멍하니 굳은 채 그 말을 듣고만 있었다. 유강후라고 왜 마음이 아프지 않았으랴.어찌 됐든 자기 형이었고 어릴 땐 정말 서로 우애가 좋았다.진짜 틀어지기 시작한 건 유하령을 감싸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그 뒤로 천천히 멀어졌고 결국엔 남이 되어버렸다.유강후는 온다연을 해친 사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하지만 유자성이 이런 방식으로 끝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는 어떻게 그 자리에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그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의료진이 유자성의 시신 위에 흰 천을 덮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그때 유민준이 그의 옷깃을 잡고 울부짖었다.“작은아빠... 이게 진짜예요? 아빠 진짜... 진짜 죽은 거예요? 작은아빠, 아빠 아직 숨 쉬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렇죠?”...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나간 뒤에야 유강후는 고개를 돌렸고 차갑게 말했다.“민준아, 네가 아직 남자로 살고 싶다면... 아버지 장례 제대로 치러. 네가 맡은 회사 두
유재성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유자성을 보지 않았다.유자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자식의 손을 끌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하지만 병실 문 앞에 이르자 그는 유하령과 유민준을 멈춰 세우고 단호하게 말했다.“문 앞에 무릎 꿇고 있어. 절대 일어서지 마. 그래야 할아버지가 마음을 돌리실 수 있어. 이 집에서 쫓겨나면... 너희는 진짜 끝장이야. 예전에 너희가 적으로 돌린 사람들은 다 너희를 죽도록 밟고도 남을 사람들이야.”유하령이 뭔가 말하려 하자 유자성이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특히 너, 유하령. 또 사고 치면... 바로 해외로 보내버릴 거야. 다시는 돌아오지 마. 오늘 이 사단... 절반은 네가 만든 거야.”유하령은 울먹이며 애원했다.“아빠... 잘못했어요. 정말이에요. 제발... 할아버지께 잘 말씀드려 주세요. 쫓겨나는 건 싫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유자성은 그런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네 엄마가 너무 일찍 떠났지. 그게 늘 마음에 걸렸어. 그래서 내가 너희한테 너무 오냐오냐했나 봐. 무슨 짓을 해도 내가 다 감췄고... 결국 오늘 이런 꼴이 났네. 다 내 책임이니 내가 다 짊어지고 갈게. 하령아, 성질 좀 고쳐. 앞으로 사람 대할 땐 좋은 마음으로 다가가. 나쁜 생각 갖지 말고 받은 호의엔 반드시 보답해야 해. 부모 말고는 조건 없이 널 사랑해 주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유하령과 유민준은 아버지의 말에 충격과 절망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들의 눈앞에서 유자성은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말했다.“여기 그대로 있어. 할아버지가 용서 안 하신다고 해도... 일어나지 마라. 난 짐 좀 챙기고 금방 올게.”그는 마지막으로 두 자식을 깊게 바라보고는 병원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나갔다....30분쯤 지났을까.복도 저편에서 갑작스러운 비명이 터졌다.“사람이 자살했어요!”“피가... 피가 너무 많아!”“빨리 응급실로!”“늦었어요... 이미 숨이...”“유 회장님 장남이라잖아! 큰일 났어!”...유하령과 유
“제발... 제발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재산은 하나도 원하지 않아요. 단 한 푼도 바라지 않아요. 그냥... 그냥 본가에 남게 해 주세요. 아버지의 아들로 남게만 해 주세요...”하지만 유재성은 눈을 감은 채 싸늘하게 말했다.“그만 가. 네 자식들 데리고 이 집을 나가. 네 호적은 이미 본가에서 정리하라고 지시했어. 앞으로 넌 유씨 가문의 자손이 아니야. 너희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나 유재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유자성은 긴 침묵 끝에 고개를 깊이 숙여 유재성을 향해 세 번 힘껏 머리를 조아렸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 평생 아버지의 아들이라 믿어왔습니다. 그게 제 자랑이었어요... 제가 유씨 가문 사람이 아니었다니... 본가에서 쫓겨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럴 만큼 제가 큰 죄를 지은 거겠죠. 용서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겠죠. 아버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하령이랑 민준이... 애들까지 함께 쫓아내진 말아 주세요. 애들은 아직 젊고 앞길이 먼 아이들이에요. 본가에서 내쳐진다는 건 그들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낙인이 될 겁니다. 사람들 눈에 짓밟히고 손가락질당하며 살아야 해요.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건... 전부 다 제 책임이에요. 제가 잘못 키웠습니다. 전부 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하지만 유재성은 싸늘하게 대답했다.“너랑 나... 부자지간 인연은 여기까지야.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그만하고 그냥 가.”그제야 유하령의 표정이 무너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 거짓말이죠? 우리 속이시는 거죠?”유민준도 조용히 무릎을 꿇었지만 아무 말 없이 유재성을 향해 조심스럽게 머리를 숙이며 절을 올렸다.“할아버지... 전 그동안 많은 잘못을 했습니다. 벌받는 것도 당연합니다. 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제발...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앞으로는 제대로 살겠습니다.”그는 진심이었다.지난 몇 년 동안 그는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고 철도 들었으며 맡은 두 회사 역
유자성은 입술을 달달 떨며 중얼거렸다.“아버지... 이러지 마세요. 전 아버지 아들이잖아요. 영원히 아버지의 아들이에요. 저 재산 같은 거 원하지 않아요. 한 푼도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저를 본가에서 쫓아내지 말아 주세요...”그러나 유재성은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이젠 됐어. 나는 너한테 줄 것도 빚진 것도 없어. 나도 오래 못 살아. 죽기 전까진... 더 이상 너희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아.”유자성의 얼굴은 점점 잿빛으로 변해갔고 그는 입술을 떨며 되뇌었다.“아버지... 제발, 절 쫓아내지 마세요...”그의 마음 깊은 곳에선 이미 진실을 인정하고 있었다.그 친자확인서는 진짜였고 유재성의 말도 모두 사실이었다.그는 어릴 적부터 유재성 곁에서 자라났다.젓가락을 처음 쥐는 법, 글씨를 쓰는 법, 첫 출근 날의 마음가짐까지... 모든 것을 유재성이 직접 가르쳐줬다.그는 누구보다 유재성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거짓말을 할 리 없었다.그래서 그는 마침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친자확인서는 진짜였어. 아버지가 나를 본가에서 내치려는 것도 진심이네. 그렇다면 나는 진짜... 본가 사람이 아니겠네.’그가 평생 자랑스러워했던 그 성씨와 신처럼 떠받들었던 아버지... 그토록 자부심을 가졌던 본가의 명예와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모든 것과 그가 수없이 입 밖으로 칭찬했던 동생 유강후조차... 결국 단 한 번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그 모든 건 그의 친부모가 목숨으로 대신한 빚이었고 남이 던져준 은혜에 불과했다.오만하고 자존심 강했던 유자성... 태어나서 한 번도 고개 숙여본 적 없는 본가의 장남이 알고 보니 그저 남의 집에서 얹혀살던 양자에 불과했다.그 진실은 마치 뾰족한 바늘처럼 그의 모든 꿈과 자존심을 찢어버렸다.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멍해졌다. 세상이 전부 거짓처럼 느껴졌고 지금 이 순간조차 꿈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그는 손을 들어 자기 뺨을 두 번이나 사정
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호복을 가다듬은 뒤 안으로 들어가 손에 쥔 약을 유강후에게 건넸다.“아버님께 이 약을 드려요.”유강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다연아...”온다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고 싶은 말은 집에 가서 해요. 난 원래 그렇게 대인배 아닌 사람이에요. 날 해쳤던 사람은 절대 쉽게 용서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분은 당신 아버지잖아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한 번쯤은 물러서 줄 수 있어요. 아저씨, 제 마음 저버리지 마요.”그 말에 유강후는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가까지 붉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감춘 채 약 하나를 꺼내 유재성의 입에 넣어주었다.약을 삼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재성은 숨이 한결 편해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강후야, 이게 무슨 약이냐?”유강후가 답했다.“곽 박사님이 다연이 몸조리하라고 주신 거예요. 다 먹지 않고 열 알 남겨뒀는데 혹시 몰라서요. 솔직히 저도 효과가 있는지는 몰라요. 그래도 해가 되진 않으니까요.”유재성의 눈빛이 반짝였다.“곽혜진? 그 여의사 말이야?”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그때 유하령은 온다연을 노려보며 독설을 퍼부었다.“너 지금 내 할아버지한테 무슨 약 먹인 거야? 우리 할아버지 몸은 아무나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니야. 네 따위가 내놓은 천한 약 따위 함부로 먹이면 안 된다고!”온다연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친자확인서를 집어 들었다. 대충 읽어본 그녀는 눈이 동그래지더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 너... 너희 아버지가 유 회장님 친아들이 아니야?”유하령이 반박하기도 전에 온다연은 박장대소하며 말했다.“와, 오늘 진짜 운수 대통이네. 어쩜 이렇게 좋은 일만 생기지?”유하령은 절규하듯 외쳤다.“그건 거짓말이야. 전부 조작이야. 우리 아빠가 본가 사람이 아니라니 말도 안 돼! 이건 다 네 계략이야. 온다연, 왜 날 이렇게까지 망치려고 해?”온다연은 비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유하령, 넌 늘 자기보다 낮은 사람들 무
“네 아들 유민준... 그동안 무슨 사고들을 쳐왔는지 너도 잘 알겠지. 그나마 요 몇 년 좀 나아졌다 싶어서 내가 본가에서 가장 가능성 있는 두 회사를 맡긴 거야. 그 애 실력으로 그 두 회사 꾸려나가는 것도 벅찰 거야.”“그리고 네 딸 유하령은 어떤 인간인지 너 스스로 모르겠어? 예전 그 일들을 진짜 네 능력으로 덮은 줄 알아? 내가 평생 가장 미안한 사람은 현미와 강후야. 그 은혜 때문에 내 결혼을 망쳤고 내 딸을 희생시켰어. 다른 누구든 나를 원망해도 돼. 다 괜찮아.하지만 너, 유자성. 너만은 나한테 그럴 자격 없어.”유자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아버지, 아버지가 결혼생활 망친 걸 제 탓으로 돌리실 순 없죠. 그리고 제 어머니도 죄 없는 분이었어요.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강현미도 그 자리에 있었을 리 없었겠죠.”그 말에 유재성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오랫동안 침묵하던 그는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네 진심이었구나. 내가 평생 키워온 놈이 고작 이런 배은망덕한 놈이었다니...”그는 분노 섞인 시선으로 유자성, 유민준, 유하령을 차례로 훑어보며 낮고 느린 목소리로 말했다.“좋아. 그럼 지금 여기서 내가 이유를 설명해 주지.”“강후야, 책상 위에 있는 다른 서류봉투를 저놈한테 줘라.”유강후는 아무 말 없이 그 서류봉투를 유자성에게 던졌다.유자성은 그 안에 또 다른 유언장이 들어 있을 줄 알고 펼쳤지만 그 안엔 뜻밖에도 친자 확인서가 들어 있었다.그는 확인서의 이름과 결과를 보자 믿을 수 없다는 듯 절규하듯 외쳤다. “아니야.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없어!”옆에 있던 유하령도 깜짝 놀라 확인서를 낚아채더니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아니에요. 이건 조작이에요. 전부 다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려고 짠 계략이잖아요!”“분명 온다연이야! 그 여자... 분명 삼촌한테 뭔가 시킨 거야. 나를 망하게 하려고 다 내 모든 걸 빼앗으려고 한 거라고!”“닥쳐!”유강후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