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돼요.” 유강후의 목소리에는 온통 분노가 가득했다. “왜? 내 아이는 그냥 그렇게 헛되이 없어져야 한다는 거야?” 장화연은 그의 등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온 아가씨는 매우 보수적인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들은 마음을 열지 않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너무 깊이 사랑에 빠지죠. 도련님이 온 아가씨가 보호하고 싶은 사람을 다치게 하면 도련님은 아마 온 아가씨의 원수가 될 거예요.” “주희 씨를 처리하려 해도 지금은 아니에요.” 유강후는 주먹을 꽉 쥐었고 뼈의 마찰음이 들렸다. 그는 천천히 밖으로 나가서 곧바로 주희가 입원해 있는 방으로 걸어갔다. 주희는 심하게 맞아 갈비뼈가 약간 부러져 침대에 기대어 링거를 맞고 있었다. 유강후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주희는 미소를 띠며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 유강후는 그런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사진 속의 사람과 어느 정도 닮아 있었다. 그에게는 소년 특유의 밝고 깨끗한 분위기가 있었다. 온다연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정말 잘 어울릴 만했다. 온다연과 그 주한이라는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들을 생각할 때마다 유강후는 겨우 억누르고 있던 분노가 다시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유강후는 주희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주한이 당신 형입니까?” 주희는 비웃듯 낮게 웃으며 말했다. “전지전능한 유 대표님이 그것조차 알아내지 못했나 보네.” 그는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짓고 천천히 말했다. “내 형과 누나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알던 사이야. 10년이 넘었지. 그런데 유 대표님은 그 사실을 전혀 몰랐군. 누가 이 정보를 숨긴 건지 알아보는 게 좋겠어.” 유강후는 질투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몇 살 안되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니! 어릴 때부터 함께 있었다니! 온다연의 기억 속에는 온통 그 주한이라는 소년뿐이었다! 그럼 자신은 뭐지? 그의 손은 천천히 주먹을 쥐었고 위로 솟아오른 핏줄과 함께 그의 눈은
그때의 일이 떠올리자 유강후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주희는 그를 주시하며 계속 말했다. “사실 유 씨 가문에서는 당시에 체면을 위해 우리에게 보상금을 줬어. 6억! 내 형의 목숨 값이 6억이야!”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우린 그 돈을 받지 못했어. 그 6억조차 유하령이 사람을 시켜 한 푼도 남김없이 전부 가져갔지!” “유강후, 우리 가족이 얼마나 증오하는지 알아? 우리가 그때 어떻게 버텼는지 알아?” “우린 거의 살아남지 못할 뻔했어. 그런데도 유하령의 친구들은 온다연을 놔주지 않고 학교에서 온갖 방법으로 괴롭히고 음해까지 했어!” 그때를 떠올리자 주희는 주먹을 꽉 쥐었고 눈에는 피에 굶주린 듯한 광기가 스쳤다. “난 너무 증오해! 나 자신이 강하지 않은걸, 나 자신이 병에 걸린 걸 증오해! 그때 나는 병이 도졌고 약 값을 벌기 위해 누나는 하루에 서너 가지 일을 했어. 누나는 몇 년 동안 같은 패딩을 입고 다녔고 그 옷은 헐어서 솜도 빠져나갔지!” “우린 생활비와 약 값을 위해 필사적으로 버텼는데 유하령과 너 같은 살인자는 내 형의 목숨 값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했지!” “당신도 말해봐. 누나가 당신을 용서할 것 같아? 너는 유하령과 공범이야. 유하령의 친 삼촌이잖아!” 주희가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유강후의 마음은 점점 더 얼어붙었다. 그때 그는 온다연을 데려오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 온다연은 아직 성인이 아니었고 그는 온다연에 대한 통제 욕망을 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손을 쓰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온다연의 상황을 더 알아보는 것도 두려워했다. 그는 심미진이 온다연의 친 이모니까 최소한 굶어 죽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의 이기적인 마음은 온다연이 본가에서 최대한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고 나중에 온다연을 데려가 새로운 신분으로 함께할 수 있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는 예상하지 못했다. 자신이 손을 놓은 그 세월 동안 온다연은 계속 괴롭힘을 당했고 그의
‘쾅!’순식간에 주희는 유강후에게 옷깃을 붙잡힌 채 쓰레기처럼 침대 아래로 내던져졌다. 주희는 이미 부상을 입은 상태였기에 바닥에 내팽개쳐지자마자 입에서 피를 한가득 쏟아냈다. 유강후는 천천히 앞으로 다가와 위에서 아래로 주희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죽어가는 벌레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주희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 입가의 피를 닦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유강후, 너 온다연을 좋아하지? 하지만 누나는 널 좋아하지 않아. 그래서 괴로운 거지?” “하지만 넌 겁쟁이야. 누나를 좋아할 자격조차 없어!” “너는 이렇게 많은 권력을 가지고도 네가 좋아하는 사람조차 지키지 못해. 내 형처럼 누나를 목숨 걸고 지킨 것도 아니잖아. 넌 평생 내 형을 이기지 못해. 뭘로 이길 건데? 유 씨 가문의 사람이라는 신분으로? 아니면 유하령의 친 삼촌이라는 신분으로?” “하하하. 너는 누나가 그 아이를 정말로 좋아한다고 생각해? 유 씨 가문의 피를 이은 그 저주받은 아이를? 확실히 누나가 그 아이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 “어쩌면 누나는 그 아이를 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어. 복수를 끝내고 떠날 생각이었을지도 모르지!” “너 역시 마찬가지야. 너도 누나에게는 복수의 도구일 뿐이야. 그저 도구일 뿐!” 주희가 하는 말 하나하나가 유강후의 가슴에 깊게 박혔다. 비록 주희가 미쳤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가 하는 말이 모두 사실은 아니라는 것도 알았지만 그 단어들은 유강후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는 주희의 입을 꿰매고 싶었다. 그 입에서 더 이상 그 어떤 추한 말도 나오지 않게 하고 싶었다. 주희가 다시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 유강후는 발을 들어 그의 가슴을 짓밟았다. 거칠게 짓밟았다! 주희는 또다시 피를 쏟아냈다. 하지만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도 유강후를 자극했다. “내 형과 누나의 사진이 아주 많아. 이메일에 보관되어 있어. 수천 통의 메일 속에는 그들이 함께 자라며 겪은 일들이 담겨 있지. 질투 나지? 거의 미칠 지경이지?” 유강후는 수많
남하윤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 있었지만 그녀는 이를 억지로 참으며 떨어뜨리지 않았다. “주희야, 나한테 말해 줘...” ‘나한테 말해 줘. 혹시 계속 날 이용하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그 말은 결국 그녀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말을 내뱉는 순간 그녀와 주희는 완전히 끝날 것이다. 이 사랑에서 그녀는 언제나 스스로를 낮추며 사랑한 쪽이었다. 처음부터 그녀는 주희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기꺼이 그를 사랑했다. 그녀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날 밤 술에 만취한 소년이 그녀를 껴안고 누나라고 부르며 한 번 또 한 번 애절하게 속삭이던 그 순간을. 그 속에 담긴 깊고 무거운 감정은 그녀가 평생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소년의 눈에는 그 빛과 집착이 깃들어 있었고 그것은 그녀를 놀라게 하고 감동시켰다. 그 한 번의 눈 맞춤만으로도 그녀는 완전히 빠져들었다. 물론 그녀는 그가 부르는 누나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녀가 충분히 잘해주면 그도 언젠가는 마음을 열어주리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원래 깨끗하고 순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누나처럼 보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성숙한 모습을 연출했고 진한 화장도 했다. 그녀는 주희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맞추어주며 순응했다. 그가 조기 졸업을 원하자 그녀는 바로 조기 졸업을 처리해 주었고 경원시의 유명 대학에도 연락을 취해 주었다. 그가 연예인이 되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수단과 인맥을 동원해 그를 띄웠다. 그녀는 주희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언젠가는 주희의 눈에 자신만이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을 떠올리며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조용히 말했다. “나랑 같이 돌아가. 며칠 전의 상처도 아직 낫지 않았잖아. 지금 또 이렇게 다치면 버틸 수 없어. 가서 같이 치료하고 모든
주희는 맞은 곳을 만졌고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저는 누나의 유일한 가족이에요. 누나는 다른 가족이 필요 없어요!” 임혜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막 욕을 하려던 찰나 한이준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만해. 이런 인간에게 말해봤자 시간 낭비야. 주희는 아무것도 들을 생각이 없어.” “그리고 때리지 마. 네 손만 다칠 테니까.” 그때 밖에서 간호사가 급히 달려와 말했다. “유 대표님, 온 아가씨가 꼭 침대에서 내려가겠다고 하십니다. 강하게 고집하셔서 저희가 막을 수가 없습니다. 어서 가서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유강후는 이 말을 듣자마자 바로 온다연의 병실로 향했다. 주희도 따라가려 했지만 문 앞에서 경호원들이 막아섰다. 그는 화가 나 욕설을 퍼부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유강후는 금세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온다연의 병실에 다다르기 전에 안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켜! 너희가 무슨 권리로 날 막는 거야!” “놔! 잡지 마!” “온 아가씨, 지금은 침대에서 내려가시면 안 됩니다. 아직 회복할 시간이 필요해요. 걷는 건 무리입니다!” “비켜! 놔! 잡지 말라고!” 그리고 다시 한 번 무언가 쓸려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병실 앞에는 몇 명의 간호사와 의사들이 서 있었고 그들은 모두 난처한 표정으로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강후가 오자 그들은 마치 구세주를 본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군요!” “어서 온 아가씨를 말려 주세요!” 유강후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는 깨진 유리 조각과 도자기 파편이 바닥에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몇 명의 의사와 간호사들이 온다연을 침대에서 못 내려가게 붙잡고 있었다. 온다연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얼굴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유강후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한쪽으로 물러섰다. 온다연은 곧바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그녀가 막 침대에서 내리자마자 유강후는 그녀를 번쩍 들어 다시 침
온다연은 여전히 그 꿈에 사로잡혀 울며 말했다. “안 믿어요. 아저씨는 저를 속이고 있어요. 제가 직접 봐야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은 유강후는 의료진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의료진은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즉시 병실 밖으로 나갔다. 유강후는 손가락으로 온다연의 눈물을 닦아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널 속이지 않았어. 아기는 무균실에 있어. 아직 너무 작아서 발육이 덜 되었기 때문에 인큐베이터에 있어야 해. 나도 들어갈 수 없어.” 온다연은 울며 말했다. “그냥 밖에서 한 번만 보면 돼요. 딱 한 번만요.” 유강후는 마음이 아팠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달래며 말했다. “안 돼. 아기는 아직 너무 작아서 장기가 발달하지 않았어. 문을 열면 세균이 들어갈 수 있어. 그건 위험한 일이야.” 온다연은 눈물을 닦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정말 딱 한 번만 문을 살짝만 열어서 1초만 보고 바로 닫으면 안 될까요?” 유강후는 오늘 아기를 안 보여주면 그녀가 계속해서 불안해할 것을 알았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너는 지금 울고 있잖아. 아기가 네 울음소리를 들으면 그도 불안해할 거야. 그러니 네가 울음을 그치면 생각해 보자.” 그는 문 앞에 서 있던 간호사에게 말했다. “그웬 박사에게 가서 무균실의 문을 살짝만 열게 해 달라고 말해 줘요. 우리가 한 번만 보러 갈 거라고요.” 간호사는 온다연의 처지를 보고 마음이 아팠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가서 말씀드릴게요.” 온다연은 서둘러 눈물을 닦고 조용히 말했다. “문을 너무 오래 열면 안 돼요. 우리가 가면 그때 열고 2초 3초 정도만 열어야 해요. 감염될까 봐 걱정돼요.” 온다연은 울어서 얼굴이 약간 번졌고 머리카락도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 코끝은 빨갛게 변해 그녀는 더욱더 순진하고 가련해 보였다. 유강후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며 앞으로 마주해야 할 일들이 떠올라 마음이 몹시 아팠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따뜻한 물수건으로 천
그웬은 안에서 유강후가 다가오자 문을 조금 열고 서투른 한국어로 말했다. “여기 멀리서 한 번만 보세요.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됩니다.” 그 작은 틈새를 통해 온다연은 안에 있는 인큐베이터를 보았다. 인큐베이터 안에는 온몸에 여러 관이 연결된 아주 작은 생명체가 있었다.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손바닥보다도 작은, 아주 작은 아이인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아이의 몸은 아직도 붉었고 살짝 움직이는 듯했다. 온다연은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감정에 휩싸였다. 더 보고 싶어 문을 잡으려는 순간 그웬은 문을 닫았다. “죄송합니다. 시간이 다 됐습니다. 문을 너무 오래 열어 두면 세균이 들어가 태아가 감염될 위험이 있습니다.” 온다연은 그저 눈앞에서 문이 닫히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간절한 눈빛으로 문을 바라보는 것을 보고 유강후는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 “몇 달만 지나면 아이가 건강해져서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온다연은 시선을 거두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저씨, 저한테 거짓말하고 있는 거죠? 이렇게 작은 아이는 살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 전 세계에서 가장 일찍 태어난 아이는 5개월 2주 만에 태어난 아이였어요...” 유강후는 그녀를 꼭 안아주며 어두운 눈빛으로 말했다. “너도 봤잖아, 어떻게 거짓말이겠어? 아기는 아직 너무 작아서 인큐베이터에 있어야 해. 마치 자궁 안과 비슷한 환경을 만들어줘야 해서 지금은 그 안에 있어야만 해.” 그는 잠시 멈춘 뒤 다시 말했다. “다연아, 너도 알잖아. 이 아이는 너무 작아서 최소 몇 달은 여기 있어야 해. 그동안은 안으로 들어가서 볼 수 없을 거야...” “알아요!” 온다연은 그의 말을 끊었다. 아까까지 절망으로 가득 찼던 그녀의 눈에는 다시 한 가닥 희망의 빛이 피어올랐다. 얼굴에도 조금의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 꿈이 떠오르며 그녀는 잃었던 것을 되찾은 듯한 충격과 희망을 느꼈다. 온다연은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아저씨, 아까 꿈에서 아기를 봤
임혜린은 자신이 온다연과 친하다고 생각했고 온다연의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온다연이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최근에 한이준에게서 유강후가 온다연 때문에 유 씨 가문과 거의 인연을 끊을 지경까지 이르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녀는 비로소 온다연이 지난 10년간 얼마나 끔찍한 괴롭힘을 당해왔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임혜린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온다연이 그토록 긴 세월을 어떻게 버텨왔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 게다가 온다연이 매번 저항한 후에는 더 무서운 벌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들었다. 그래서 온다연은 오랜 세월 동안 극도로 참을성과 절제를 키우게 되었다. 아무리 죽을 듯이 아파도 소리 한 번 지르지 않고 참을 수 있었다. 임혜린은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너무 화가 나서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악랄할 수 있단 말인가! 온다연은 임혜린의 이런 생각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병실 문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분명 아무 문제 없을 거야.” 임혜린은 앞으로 나아가 온다연의 손을 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바람이 불어. 우리 방으로 들어가자. 네 몸이 너무 약해.” 그러면서 그녀는 유강후를 노려보며 말했다. “여기 바람이 부는 걸 못 느꼈어요? 왜 여기서 멍하니 서 있는 거예요? 방으로 돌아가요.” 처음으로 유강후는 임혜린이 그렇게 성가시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몸을 돌려 온다연을 안고 병실로 들어갔다. 온다연이 임혜린과 함께 있을 때 정신 상태가 조금 나아 보이는 것을 보고 유강후는 밖으로 나갔다. 임시로 마련된 사무실에는 이미 이권과 한이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강후의 피곤한 눈빛을 본 한이준은 한숨을 쉬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어. 앞으로 더 나아지기를 바라. 앞으로도 아이는 있을 테니까.” 유강후는 말없이 책상 위의 담배를 집어 들었다. 온다연이 임신한 후로 그는 담배를 끊었지만 지금은
유강후는 그녀를 안아 무릎 위에 앉힌 후, 잔뜩 성이 나서 뾰로통한 그녀의 얼굴에 입 맞추고 속삭이듯 말했다.“바보야, 난 정상적인 남자야. 좋아하는 사람이 나긋나긋한 모습으로 앞에 있는데 반응이 없을 수 있겠어?"“너에게 충동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게 더 문제야!”그는 그녀의 하얀 귓불을 살짝 깨물며 속삭였다.“다연아, 넌 내 거야. 넌 나의 모든 환상을 책임져야 해.”문득 유강후가 아까 꺼내준 옷들이 생각난 그녀는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졌다.“그 옷들은 어디서 구한 거예요?”3년 전 임혜린한테서 특별히 맞춤 제작한 옷들을 말하는 것이다.“강후 씨는 왜 옷을 찢는 걸 그렇게 좋아해요?”게다가 그 옷들은 수치스러울 정도로 옷감을 적게 사용해 몸을 가리기 어려웠다.하지만 핵심은 그게 아니다. 핵심은 매번 그녀가 옷을 입은 지 2분도 안 되어 다 찢겨나가고 유강후가 평소보다 더 통제 불능 상태가 된다는 점이다.유강후의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를 스치자 그녀는 몸을 움츠렸다.“오늘은 정말 안 돼요. 벌써 옷을 세 벌이나 찢었잖아요. 옷 사는 것도 돈이 드는데...”유강후는 호흡이 거칠어지며 그녀의 가냘픈 허리를 끌어당겼다.“다 이전에 맞춘 거야. 아직 수백 벌 남았어. 하나씩 다 입어줘.”“수백 벌이요?”온다연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미쳤네요!”“그래, 미쳤어. 네 몸에서 나는 향기만 맡아도 이성을 잃어. 네가 성인이 되자마자 먹어버릴걸, 이렇게 오랫동안 참으며 많은 일을 겪고... 진짜 후회돼.”유강후는 그녀의 귀를 가볍게 깨물더니 목에 가볍게 키스했다.그의 입술이 목선을 타고 내려가자, 온다연은 온몸에 전율을 느끼며 신음소리를 냈다.“안 돼요. 오늘은 정말 안 돼요...”유강후가 유혹하듯 속삭였다.“내가 살살 할게. 말 들어. 나랑...”구름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이 다시 밀려오면서 온다연은 그의 품에서 녹아내렸다.하지만 막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온다연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안 돼요!”유강후는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유강후는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며 걱정했다.체온은 정상이었지만 여전히 불안했다.사실 재회한 후 온다연은 건강이 많이 좋아졌고, 예전처럼 툭하면 열이 나는 일도 없었다.특히나 곽혜진이 준 약을 먹고 몇 달 만에 건강이 정상인 수준으로 회복됐다.하지만 온다연이 이전에 반복된 고열과 심각한 후유증으로 고생했던 탓에, 유강후는 그녀가 조금이라도 불편해하면 즉각 열이 난다고 여기는 습관이 있었다.“의사를 불러줘!”온다연이 막아 나섰다.“부르지 말아요.”그녀는 팔에 생긴 붉은 자국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늦은 시간에 그럴 필요 없어요. 그냥 좀 입맛이 없을 뿐이에요. 게를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 것 같아요.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예요.”온몸에 그가 남긴 흔적이 가득한데, 의사가 본다면 내일쯤 강씨 가문 전체에 소문이 퍼질 것이다.그녀는 자신의 사생활이 모든 사람에게 공개돼도 신경 쓰지 않을 만큼 대범한 성격이 아니다.유강후도 그녀의 목에 남아있는 자줏빛 흔적을 발견했다. 몇 군데는 절제를 못 한 탓에 피부가 벗겨진 상태였다.그는 절제하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며 그녀의 목에 입을 맞추었다.“아파?”온다연이 나지막이 대답했다.“괜찮아요. 그다지 아프진 않은데 흔적이 너무 뚜렷해요. 며칠 뒤에 저녁 만찬이 있는데, 그때까지 없어지지 않으면 드레스를 입을 수 없어요.”유강후는 집사가 들고 온 약상자에서 연고를 꺼냈다.“이건 곽혜진 선생님이 내 흉터를 치료하라고 준 건데, 키스 흔적을 없애는 데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어.”그는 노출된 부위의 붉은 자국에 연고를 조금씩 발라주었다.처음엔 단순히 약만 발랐지만, 점점 그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온다연은 피부가 유난히 하얗고 야들야들해서 가볍게 약을 발라주는 것만으로도 하얗던 피부가 연분홍으로 물들었다.게다가 손끝에 전해지는 부드럽고 매끄러운 촉감에 유강후는 저도 모르게 조금 전의 장면을 떠올렸다.그의 호흡이 가빠진 것을 감지한 온다연은 서둘러 옷깃을 여미며 경계했다.“더는 안 돼요.
“화풀이하고 사람을 해고하는 것이 당신의 취미라면 저도 해고하세요.”“저는 성인이에요. 무엇을 얼마나 먹을지는 제가 알아서 결정해요. 다른 사람이 통제하거나 간섭하는 것이 싫고 필요하지도 않아요.”유강후는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온다연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일어나 계단 쪽으로 향했다.“그렇게 화풀이하고 싶으면 저한테도 하세요. 저도 떠나면 되겠네요. 뭐든 당신의 말대로 해야 하고, 심지어 식사량까지 통제해서 밥도 편히 못 먹게 하니 불편해서 어디 살겠어요?”유강후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어딜 가려고?”온다연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제가 데리고 온 사람들을 아버지 몰래 여행 보냈잖아요. 저를 쉽게 통제하려고 그런 게 아니에요?”유강후가 눈살을 찌푸렸다.“무슨 헛소리하는 거야?”온다연이 그의 손을 뿌리쳤다.“그럼 왜 식사량까지 통제해요? 조금 더 먹거나 덜 먹는 건 아주 정상적인 일이 아닌가요?”“게를 조금 많이 먹어서 속이 안 좋아졌다고 이 방에 있는 모든 사람을 해고하겠다는 건 너무 지나치지 않아요?”유강후가 급히 설명했다.“위가 안 좋은 네가 많이 먹고 배탈 날까 봐 제한한 거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온다연은 콧방귀를 뀌었다.“강씨 가문의 일은 제가 어찌할 수 없지만, 제 일은 제가 결정할 수 있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녀가 진짜 화났음을 확인한 유강후도 그 뒤를 따랐다.오진숙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급히 물었다.“도련님, 야식을 준비할까요?”유강후는 고개를 돌려 하인들을 쏘아보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이 토하는 걸 못 봤어? 얼른 야식을 준비하지 않고 뭐 해? 정말 해고되고 싶어?”하인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각자 위치로 돌아갔다.침실에서 유강후는 그녀를 품에 안고 온갖 달콤한 말로 달랬다. 온다연은 언제 그랬냐는 듯 토라진 마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둘의 몸은 다시 한데 엉켰다.요 며칠 유강후가 고열로 앓아누웠던 탓에
유강후는 게 껍데기를 까다가 손에 상처가 생긴 온다연을 보며 가슴이 찢어졌다.“제가 할게요. 게 먹다가 손이 다 망가지겠네.”온다연의 작고 하얀 손은 아주 작은 상처가 생겨도 눈에 띄었다.유강후는 온다연의 손을 너무 좋아했기에 상처가 생긴 걸 본 순간 기분이 몹시 나빠졌다.그는 물티슈를 가져와 손을 천천히 닦아주며 아픈 건 아닌지 물었다.도우미들이 옆에서 웃음을 참자 괜히 무안해진 온다연은 재빨리 손을 거두었다.“안 아파요. 뭘 이런 상처로 오바를...”“하지 마요. 사람들이 보잖아요.”유강후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명령했다.“나가. 밥 먹는 거 방해하지 말고.”그러자 도우미들은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유강후는 게 껍데기를 까면서 안에 있는 살들을 온다연의 앞접시에 놓았다.그제야 유강후는 온다연의 앞에 식초가 담긴 작은 접시가 놓여있는 걸 알아챘다.유강후는 식초에 찍어 먹는 걸 좋아하지만 온다연은 신맛이 나는 음식을 선호하는 편이 아니다.그래서 식초를 온다연의 앞에 놓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신맛이 나는 요리도 거의 하지 않았다.정말 이상하게도 온다연은 그가 까준 게살을 식초에 찍어서 맛있게 먹고 있었다.“신맛 별로 안 좋아하잖아요. 갑자기 왜 식초를 찍어 먹어요?”온다연은 최근 며칠 사이에 자신의 입맛이 바뀌었다는 걸 느꼈지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갑자기 신맛 나는 음식이 땡겨서요. 잘됐다. 그럼 우리 이제 입맛까지 똑같네요? 앞으로 음식은 하나씩만 해도 되겠어요.”말하던 온다연은 갑자기 속이 메스꺼운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구토하는 그녀의 모습에 유강후는 마음이 조급해져 집사와 도우미들을 집합시켰다.유강후가 온다연을 얼마나 아끼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에 순식간에 온 집안 사람들이 긴장하며 당황하기 시작했다.불과 얼마 전에 물이 뜨거웠다는 이유로 강씨 가문에서 20년 동안 일하던 도우미가 해고 되었고 강현미의 주변 집사들도 그때 함께 정리되었다.특히 임청하라는 집사는 강씨 가문에서 나름 발언권이 있
나은별은 비웃었다.“설마 나이 먹었다고 나 싫어하는 거예요?”나은별은 이미 서른이 되었다. 철저하게 관리한 덕분에 겉모습은 소녀처럼 보이지만 눈꼬리에는 어느새 미세한 주름이 많았다.어느 날 아침 소이섭은 나은별에게서 흰머리를 발견했고 그때부터 눈빛이 돌변했고 나은별은 두 사람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왜 좋은 남자들은 나한테 눈길조차 안 주고 매번 소이섭 같은 쓰레기만 엮이는 거지?’소이섭같은 바람둥이는 이용하고 버리기에 최적화된 사람이다. 전에는 말이라도 잘 들었는데 이제 슬슬 기어오르는 것 같으니 조만간 처리해 버릴 생각이었다.소이섭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나이가 들다니. 그런 생각 하지 마. 예전에 네가 학교 다닐 때 모습이랑 닮아있어서 조금 더 챙겨줬을 뿐이야. 추억 회상이랄까? 정말 다른 마음은 없어. 믿어줘.”나은별은 속으로 흐뭇해하며 입꼬리를 올렸다.“아무튼 난 싫으니까 처리해요.”그러자 소이섭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알았어. 다른 부서로 옮길게.”“부서 이동이 아니라 당장 해고하라고요.”“알았어. 네가 시키는 대로 할게.”“아참, 널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누군데요?”“너랑 아는 사이라던데? 예전에 강씨 가문에서 3, 4년 정도 집사로 일했다고 얘기하면 기억할 거래.”나은별은 의아해했다.“임청하?”“마침 찾아보려고 했는데 먼저 연락이 올 줄은 몰랐네요. 아마 온다연 그X이 돌아오고 나서 쫓겨났을걸요?”소이섭은 구급상자를 꺼내더니 나은별에게 약을 발라주며 말했다.“그래? 한번 만나볼래?”“당연히 만나야죠. 알고 있는 게 저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에요.”강씨 가문 별장.유강후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서재로 들어갔고 온다연이 씻고 나올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막 서재로 들어가려는데 집사 오진숙이 다가왔다.“사모님,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전부 사모님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준비했어요. 지금 바로 차릴까요?”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준비해 주세요. 강후 씨랑 같
‘아니야. 내가 잘못 본 게 틀림없어.’나은별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강후 씨, 왜 나한테 이렇게 잔인해?”유강후는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죽고 싶다며? 그럼 빨리 죽어.”“동정표를 얻으려고 이제 죽는 쇼까지 하네? 그게 먹힐 것 같아?”“나은별, 경고하는데 한재민을 건드리는 순간 나씨 가문은 영원히 경원에서 사라질 거야.”나은별은 유강후가 그녀에게 이런 독한 말을 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듯 그대로 얼어붙었다.‘또 온다연 그 X이네.’‘뭘 기억하고 뒷담화를 한 게 틀림없어. 그러니까 나한테 이러는 거지.’나은별은 울먹였다.“강후 씨, 왜 나한테 이렇게 독하게 굴어? 난 그냥 나씨 가문을 도와달라고 한 것뿐이잖아. 싫으면 싫다고 해. 이렇게 날 벼랑 끝까지 몰아세우는 이유가 뭐야?”유강후는 치가 떨린다는 표정으로 나은별을 쳐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나은별.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내가 정말 모를 것 같아?”나은별은 몸을 떨며 한걸음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내가... 뭘 했는데?”살기를 드러낸 유강후는 목소리마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더 이상 너랑 엮이고 싶지 않아. 아참, 그리고 그 더러운 수법을 한재민한테 쓰는 순간 너랑 나씨 가문은 끝장이니까 잘 생각해.”말 섞는 것조차 불쾌했던 유강후는 곧바로 차에 탄 후 기사에게 말했다.“차 한 대 대기시키서 누가 데리러 오는지 영상 찍고 한재민한테 바로 보내.”“알겠습니다. 대표님.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아니나 다를까 유강후가 떠나자마자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된 차에서 누군가 내렸다.소이섭은 아주 자연스럽게 다가가 나은별을 부축했다.“괜찮아? 차에 구급상자 있으니까 저쪽으로 가자.”나은별은 유강후의 차가 떠난 방향을 주시하더니 차갑게 말했다.“온다연이랑 한재민 둘 다 살아있어요. 진짜 예상도 못 했는데...”소이섭은 그녀를 부축해서 차까지 걸어가며 말했다.“온다연이 살아있는 건 이상할 게 없는데 한재민이 살아있을 줄은 나도 몰랐네. 우리가 그 바다에 상어
충격을 받은 한재민이 정신을 차렸을 때 나은별은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져있었다.그가 머뭇거리며 앞으로 다가가려고 하자 유강후는 재빨리 잡아당기며 차갑게 말했다.“죽지 않으니까 그냥 냅둬. 괜히 손 더럽히지 말고.”한재민은 미간을 찌푸린 채 나은별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강후야, 우리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사이야. 은별이가 됐든 네가 됐든 내 눈앞에서 죽어가는 걸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어.”유강후는 여전히 싸늘했다.“조금이라도 엮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희망을 준 순간 껌딱지처럼 달라붙는다고. 그걸 떼어내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더 이상 예전의 나은별이 아니야. 제발 정신 차려.”유강후마저도 속은 적이 있다.함께 자란 옛정과 한재민의 부탁을 생각해서 유강후는 줄곧 나씨 가문에 관대했고 나은별이 문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용서했다.그런데 김원도와 손을 잡고 온다연을 다치게하고 오해하게 만드는 건 백번 천번 죽어도 싸다.하지만 이대로 죽인다면 나은별에게는 좋은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천천히 피를 말릴 생각이었다.“형수님이랑 저녁 식사하기로 했다며? 가족들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나은별한테 갈 거야? 형수님이 오해하기를 원해?”유강후는 싸늘했다.“두고 봐. 10분만 있으면 누군가가 와서 데려갈 거야.”이때 나은별은 기둥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이마는 온통 피투성이고 흰 치마에도 핏자국이 많아 매우 안쓰러워 보였다.나은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불쌍한 눈빛으로 한재민을 바라봤고 마치 마지막 연민을 얻으려는 것 같았다.그러나 한재민은 유강후에게 꽉 잡혀 있었다.“강후야. 무슨 뜻인지 알겠는데, 병원에 데려다 줄 사람을 보내는 건 괜찮잖아.”유강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신의 경호원에게 손짓했다.“한 대표님을 집까지 모셔다드려.”한재민은 표정이 어두워졌다.“그게 무슨 뜻이야?”유강후는 매우 단호하게 말했다.“이해 못 하겠지만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어. 더 이상 우리가 알던 예전의 나은별이 아니야
“오빠, 변했어. 예전에는 나한테 이러지 않았는데...”한재민은 인내심이 조금씩 닳아가는 걸 느끼며 차갑게 말했다.“지난 3년 동안 정말 내가 보고 싶었어? 그동안 무슨 짓을 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 옛정을 생각해서 충고하는 건데 더 이상 문제 일으키지 말고 조용한 곳에서 얌전히 살아. 그러면 남은 인생 안전하게 보낼 거야.”나은별은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아 눈시울을 붉히며 한재민을 바라봤다.“그게 무슨 뜻이야?”한재민은 더 이상 그녀와 엮이고 싶지 않은 듯 차 문을 열더니 그 안에서 수표 한 장을 꺼냈다.“금액은 네가 원하는 대로 적어. 그때의 일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정말 도움이 필요하면 내 비서한테 연락해. 그게 아니라면 다시는 연락하지 마.”때마침 유강후와 온다연이 천천히 걸어왔다.나은별은 온다연을 본 순간 마음속에 억눌렀던 악의가 다시 들끓었다.‘이 X은 왜 아직도 살아있는 거지?’‘너 때문에 유강후가 3년 동안 날 무시했잖아. 돈도 조금씩 주니까 내가 투자를 못 한단 말이야.’미래 그룹의 뒷받침이 없으니 지난 3년 동안 나은별은 무슨 일을 하든 재수가 없었고 마치 저주에 걸린 것처럼 하는 일마다 본전을 찾지 못했다.그렇게 나씨 가문의 모든 자산이 바닥을 보였다.설상가상 올해 초 아버지마저 직장에서 해고되어 나씨 가문은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게다가 예전에 굽신거리던 사람들도 나은별을 무시하기 시작했다.천국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게 어떤 기분인지 몸소 느끼게 되었고 지금 살고 있는 매 순간이 지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아버지의 복직을 돕기 위해 유강후의 별장 밖에서 3일 동안 무릎을 꿇었지만 유강후는 얼굴조차 드러내지 않았다.그때 나은별은 깨달았다. 그녀와 유강후의 관계는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유강후가 모든 진실을 알았다고 의심도 해봤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만약 온다연 납치 사건의 전말을 알았다면 지금껏 그녀를 살려뒀을까?비록 지난 3년 동안 유강후를 만나지 못했지만 주기적으로 돈을
“나 책임진다며. 나랑 결혼한다고 약속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다른 여자랑 결혼할 수 있어? 난 오빠를 3년이나 기다렸어. 계속 안 나타나면 평생 기다릴 생각이었다고.”“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았다고? 그럼 나는? 나는 어떡하라고?”한재민은 표정이 일그러졌다.“정말 미안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되돌릴 방법은 없어.”“은별아, 임신하게 만든 건 내가 너한테 빚진 게 맞아. 어떻게서든 보상할게. 앞으로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해도 돼.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야.”“아니야.”나은별은 울부짖었다.“안돼. 이러면 안 되잖아. 나한테 평생 미안해해야지.”나은별은 대뜸 그의 팔을 잡더니 눈물을 흘리며 바라봤다.“오빠, 솔직하게 얘기해줘. 그 여자가 오빠를 구한 거야? 맞지?”한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날 구해준 게 맞아.”그러자 나은별은 갑자기 웃음을 지었다.“오빠, 이혼해. 내가 다 이해할 테니까 이혼하고 나한테 와. 절대 탓하지 않을게.”“단지 은혜를 갚기 위해서 그 여자랑 결혼한 거잖아. 목숨을 구해줬으니 그럴 수도 있어. 오빠는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아. 오빠가 사랑하는 사람은 여전히 나잖아.”“그냥 이혼하고 위자료 주면 되잖아. 아이는 내가 키울게. 나는 안 낳아도 돼. 정말 내 자식처럼 키울 자신 있으니까 믿어줘.”“내가 이렇게 빌게. 제발 이혼해. 은혜에 눈이 멀어서는 안 되잖아. 오빠는 사랑이 아니라 고마운 감정 때문에 결혼했다니까? 오빠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야.”한재민의 잘생긴 얼굴에는 짜증이 드러났고 나은별을 밀어내더니 싸늘하게 말했다.“미안해. 그건 안 될 것 같아. 누굴 사랑하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아. 이혼 안할거야.”나은별은 오열했다.“아니야. 그게 아니잖아. 그럼 나는? 나는 어떡하라고.”한재민이 말했다.“과거에 머무른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차라리 나를 원망하고 미워해. 내가 잘못한 부분은 반드시 보상할게.”나은별의 머릿속에 수천 가지의 사악한 생각이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