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나은별이 조금 철이 없을 수 있지만 지나치게 잘못한 건 없어. 날 봐서라도 은별이랑 다투지 않을 수 있어?”온다연은 가슴 속에서 실망이 솟구치며 공허함과 아픔을 느꼈다.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그렇게 나은별을 믿어요? 나은별이 나쁜 짓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유강후의 목소리는 가라앉은 채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들렸다. “너무 지나치지 않는다면...”“아저씨!” 온다연은 그의 말을 가로챘다.“만약 나은별이 날 다치게 했다면?”유강후는 몸이 뻣뻣해지더니 자세를 바로잡고 온다연을 바라보았다. “나은별이 너한테 무슨 짓 했어?”온다연은 잔뜩 긴장한 유강후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그래, 믿지 않겠지.’그는 나은별과 함께 자란 어린 시절의 친구로 서로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게다가 지독히도 얽혀있을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구해준 은혜도 있었다.나은별을 믿지 않고 그녀를 믿을 리 없었다.마치 그녀가 주한만 믿는 것처럼.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손을 내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손가락, 나은별이 밟아서 부러졌어요.”그녀는 반쯤 감긴 눈으로 무심하게 말했다. 보기엔 거짓말하는 듯한 기색이 없었다.하지만 유강후는 되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새끼손가락에 가볍게 입을 맞추더니 말했다. “내가 그런 거잖아. 다연아, 귀여운 농담하지 마.”온다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유강후를 조용히 바라보았다.그는 천천히 길게 내려온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꽤나 진지하게 말했다. “앞으로 나은별이 네 앞에 나타나지 않도록 할게, 그럼 되겠어?”온다연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그녀의 눈에서 차오르는 실망감에 유강후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온다연의 손을 꼭 잡은 채 말했다. “지난번에 나은별이 호텔에서 구월이를 다치게 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오늘 너도 복수했잖아. 은별이도 얼굴이 긁혔으니 이
강해숙은 밖을 바라보며 안색이 변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후야, 나랑 나가자꾸나.”두 사람이 나가자 제네시스 차 문이 열리더니 훤칠한 기럭지에 위엄 있는 남자가 내렸다.유재성이었다.비록 그는 이미 예순쯤 되었지만 겉모습은 마치 쉰을 갓 넘긴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생활한복을 입고 위엄 있어 보였다.유재성은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꽃방 쪽으로 쳐다보았다.온다연은 이내 옆으로 물러나며 시선을 피했다.유재성은 그녀에게 비교적 예의 있게 대해주었고 한 번도 그녀를 질책한 적이 없었다. 다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너무 압도적인 데다 유씨 가문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온다연은 별로 마음이 가지 않았다.유재성은 곧 홀로 향했다.집에 들어서자마자 복도 끝에 서 있는 강해숙이 보였다.강해숙은 은은한 기품을 풍기며 새하얀 한복을 입고 있었다.그녀는 비록 나이가 오십을 넘었지만 관리를 잘한 덕분에 마치 사십 대 초반처럼 보였다.하지만 그 우아한 얼굴은 어딘가 약간 초췌해 보였다.유재성은 그녀를 보자마자 격양된 채 말했다. “해숙아...”강해숙은 서늘한 표정으로 서재를 향했다. “유재성,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30분 줄게. 다 말했으면 당장 나가.”유재성은 유강후를 한 번 흘겨보더니 말했다. “너도 들어와.”서재 안, 유재성은 강해숙에게 온갖 아양을 떨었지만 강해숙은 여전했다.유재성은 지쳤는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해숙아, 어떻게 해야 나를 용서하겠어?”강해숙은 담담하게 말했다. “연서가 세상을 떠난 그날 밤부터 우리는 이미 끝났어. 유재성, 이렇게 많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니?”남 보기에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사업가로 보이는 이 남자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쉬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연서도 내 딸이야. 나도 너무 힘들었어. 근데 왜 날 이렇게 미워하는 거야...”강해숙은 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아니, 연서는 네 딸이 아니야. 연서가 네 딸이었다면 그날 밤 넌 네 어머니가 유일한 약을
그녀는 갑자기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너, 집사가 나한테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 모든 사람이 유민준을 돌보고 있었어. 근데 우리 연서 곁엔 아무도 없었어. 집사가 몰래 연서에게 물을 가져다주었을 땐 이미 의식이 거의 없는 상태였어. 계속 엄마 아빠가 자기를 버렸냐고 중얼거리고 있었대...”그녀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얼굴을 감싸 쥐며 눈물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유재성 역시 눈시울이 붉어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방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한참 지나서야 강해숙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네가 연서를 한 번이라도 보러 갔더라면 연서는 죽지 않았을 거야. 누군가 물 한 모금만 줬더라도 버틸 수 있었어. 근데 넌? 넌 일해야 했고 많은 사람을 재난에서 구제하려 했지만 정작 네 딸은 모른 체 했잖아!”“집사 말로는 네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와 약이 한 알밖에 남지 않아서 유민준한테만 줄 수 있다고 했다며. 근데 넌 회의에 들어가야 한다면서 전화를 급히 끊었지. 유재성, 네 어머니가 늘 남아선호 사상인 걸 알았으면서도, 연서가 많이 아프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넌 그냥 방관했어.”“네가 연서를 포기하는 순간 나도 포기한 거야. 우리 사이는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어.”그녀는 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나가. 다시는 찾아오지 마. 여긴 연서가 살던 곳이야. 더 이상 우리 연서를 역겹게 만들지 마!”유재성은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소파에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유강후는 부드럽게 강해숙의 등을 두드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이제 그만해요.”강해숙은 고통에 휩싸인 채 낮게 말했다. “강후야, 왜 그때 너희를 데리고 가지 않았을까. 왜 너만 데리고 갔을까. 그때 연서도 데리고 갔더라면 우리 연서는 지금도 내 곁에 있었을 텐데.”유강후는 마음속의 고통을 애써 억누르며 어머니를 위로했다. “그때 누나는 안정을 취해야 하는 상황이었잖아요. 우리도 원래 3일만 떠나기로 했었고, 그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어
다락방은 항상 잠겨 있었다.이 집에서 꽤 오래 살았지만 온다연은 처음으로 다락방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처음 이 집에 왔을 때 유강후는 잠겨있는 곳 빼고는 어디든 갈 수 있다고 했다.아마도 이 다락방이 유강후가 말했던 갈 수 없는 곳인 듯 했다.반쯤 열린 문 사이로 온다연은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방은 별로 크지 않았지만 엄청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바닥과 가구에는 먼지 한 점 없었다.누군가 자주 청소하는 게 확실했다.다만 이 방에 있는 모든 물건은 다소 오래되어 보였다. 왠지 어린 소녀가 좋아할 만한 것들이었다.혹시 유연서가 남긴 물건일까?온다연은 다락방 중앙에 서서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에 등골이 서늘해졌다.그녀는 하얀 천으로 덮여있는 이젤 앞으로 다가갔다.천천히 천을 벗기자 안에는 채 완성되지 않은 유화였다.끝없는 해바라기 꽃밭에 두 명의 소년 소녀가 앉아 있었다.그 소년은 유강후와 많이 닮았고 소녀는 그날 사진 속 인물과 닮아 있었다.두 사람은 손을 잡고 매우 다정한 모습이었다.온다연은 손을 뻗더니 한쪽 모서리를 만졌다.거기에는 강후와 연서는 영원히 함께라고 쓰여 있었다.지금의 필체처럼 강렬하진 않지만 나름 풍모가 엿보였다.아마도 유강후가 어렸을 때 쓴 것 같았다.그녀는 글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천을 다시 덮고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책상 위에는 오래되어 보이는 사진첩 몇 개가 놓여 있었다.온다연은 가장 위쪽의 사진첩을 펼쳤다.잘 보관된 사진들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변함없었다.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는 작은 소년의 등에 업힌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사진을 찍을 때 바람이 불었는지 두 사람의 옷자락은 바람에 휘날리며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을 자아냈다.온다연은 멍하니 그 사진을 바라봤다.어쩌면 이게 바로 그들의 정일까.사진을 펼쳐보며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아파졌다.오른쪽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유일한 사랑 연서라고 적혀 있었다.유일한 사랑 연서.유일하게 사랑하는 연서.유강후 같은 사람이 이런
그녀는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쉰 뒤 천천히 상자를 닫았다.아랫배에 손을 얹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아무도 우리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잘 살 수 있어.”“아가, 걱정하지 마. 엄마는 언제나 널 사랑해. 잘 자랄 수 있을 거야.”그녀는 숨 막히는 공간을 나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집안은 난방이 충분히 들어오고 있었는데도 그녀는 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마지막 계단을 내려갈 때쯤 갑자기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온다연은 이내 몸을 돌려 마치 다시 다락방으로 올라가려는 척했다.이때, 유강후의 훤칠한 기럭지가 문 앞에 나타났다.다락방으로 올라가려는 것 같은 온다연의 모습에 유강후는 얼굴이 굳어지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올라가라고 했어?”온다연은 눈을 내리깐 채 담담하게 대답했다. “문이 열려 있어서 닫으려고 했어요.”유강후는 미간을 찡그리며 차갑게 말했다. “장 집사가 알아서 할 거야. 넌 올라가지 마. 공기도 안 좋고 난방도 안 돼.”온다연은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거기에 뭐가 있어요? 항상 문이 닫혀 있어서 궁금했거든요. 중요한 물건이라도 있나요?”유강후는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옛날 물건들이야. 중요한 것들도 있지만 너랑 아무 상관 없으니까 올라가지 마.”확실히 옛날 물건이었고 중요하기도 했다.온다연은 심장이 조여오며 막심한 고통을 느꼈다.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몸이 안 좋아서 먼저 가서 쉴게요.”유강후는 그제야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그는 바짝 다가가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대며 물었다. “왜 이렇게 차가워?”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으려는 순간 온다연은 바로 피했다.“괜찮아요, 창문이 제대로 안 닫혀서 그런 것 같아요.”그녀는 그를 피해 앞으로 걸어갔다.유강후의 눈빛은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아직도 나은별 때문에 화 난 거야?”온다연은 그의 손을 가볍게 뿌리치며 말했다. “아니에요. 신경
온다연은 갑작스런 그녀의 말에 잠시 멈칫하더니 문 쪽을 바라보았다.유강후는 아직 밖에서 통화 중이었다.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시선을 돌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왜 그렇게 말씀하시죠?”그녀의 모든 행동은 강해숙의 눈에 포착되었다.강해숙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말했다.“사실 난 이런 일에 별로 관여하지 않지만 강후 곁에서 오래 지켜줄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 아무래도 내 아들이니까 잘 살길 바라는 마음이지.”“강후는 태어날 때부터 많은 기대를 받고 자랐어. 강씨 가문이든 유씨 가문이든 모두 강후를 후계자로 키웠고 강후도 역시 우리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어. 되레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잘해주었지. 그 점에선 매우 기쁘지만 한편으론 안타깝기도 해.”“모두가 강후한테 의지하려고 하지만 정작 강후는 의지할 사람이 없거든.”강해숙은 온다연을 조용히 바라보며 말했다.“하지만 네 옆에선 다른 것 같아. 강후는 너랑 있는 것 자체로 어쩌면 위안을 받는 것 같아. 다연아, 강후 곁에 남아줄 수 있을까?”온다연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과연 다를까?그래, 다를 수 있겠지. 어쩌면 그녀의 어린 시절 모습은 연서라는 여자아이와 너무 닮았으니까.아마 유강후가 그녀를 곁에 두고 싶은 이유였다.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강해숙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솔직히 나도 좋은 어머니는 아니야. 어렸을 때부터 강후에게 훌륭한 경영자가 되는 법만 가르쳤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는 가르치지 못했어. 내가 깨달았을 때 강후는 이미 고집스러운 사람이 되어 있었지. 사랑을 대할 때도 사업에서나 쓰는 강압적인 수단을 쓰더라고.”강해숙의 목소리는 어딘가 쓸쓸함이 담겨있었다.“다연아, 지금 어머니로서 네게 부탁하는 거야. 강후를 떠나지 말아줘. 강후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잃었거든. 너까지 떠나면 강후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를 수도 있어.”이 한마디는 온다연에게 착각을 불렀다.마치 강해숙이 유언을 남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러나 온다연은 강해숙
온다연은 황급히 문을 잠그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얼마인지 빨리 말해요.” 임정아는 전화 너머에서 느긋하게 대답했다. “세 배가 넘었어요. 거의 2억 원이에요. 유강후 씨는 진짜 주식에 재능이 있어요. 저도 유강후 씨와 함께 투자했는데 하나도 틀리지 않았잖아요. 저는 대박 친 거죠. 온다연 씨한테도 좀 후원해 줄까요?” 온다연은 임정아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물었다. “2억 원이나 됐어요? 그렇게 많아요?” “네, 2억 원이에요. 그런데 온다연 씨는 2억 원이 많다고 생각해요? 유강후가 얼마나 부자인지 알아요? 저는 몰래 조금만 따라 샀을 뿐인데 정말 대박이에요. 유강후 씨의 돈 버는 능력과 속도를 보니, 아마 경원시의 반을 살 수 있을걸요. 그런데 다연 씨는 이렇게 작은 걸로 만족해요?” 온다연은 전화를 쥐고 긴장하며 문쪽을 살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보낸 남성시의 집 좀 살펴봐줘요. 그 집을 사고 싶어요. 계산해 봤는데 1억 2천만 원이면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온다연 씨!” 임정아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미쳤어요? 이렇게 몰래 나가려고요? 게다가 돈 한 푼 안 받고 혼자 아이를 키우려고요? 너무 한심한 거 아니에요? 기다려요. 제가 반드시 유강후 씨에게서 큰돈을 끌어낼 거예요!” 그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온다연은 급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가 왔어요. 끊어야 해요. 그 집 좀 봐주고, 괜찮으면 사줘요!” 말을 마친 후, 빠르게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침대 틈에 집어넣었다. 문을 열자, 유강후가 차가운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왜 문을 잠갔어?” 온다연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서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별거 아니에요. 혜린이랑 채팅하고 있었어요.” 말하면서 손도 본능적으로 뒤로 숨겼다. 유강후는 그녀의 이러한 본능적인 행동을 지켜보며 눈빛이 점점 차가워졌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는 입술을 꽉 다물고, 침대
유강후는 그녀가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파졌다. 오늘 일어난 일이 너무 많아 그에게는 피곤함이 몰려왔고, 화도 조금 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방금 그녀가 또 다른 생각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에 불과했다. 최근의 여러 일들로 인해 그는 불안한 상태였고, 만약 그녀가 다시 다른 생각을 한다면, 그는 어떤 통제 불능의 행동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녀와 관련된 일만 생기면 그의 자제력이 마치 망가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그녀를 안아 창턱에 앉혔고, 하나씩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울지 마. 내 성격이 나빴고, 내 잘못이야.” 그는 그녀의 작은 어깨에 머리를 묻으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약간 지쳐 있었다. “내 어머니가 아프셔. 만약 네가 또 여기저기 돌아다니면,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다연아, 조용히 내 곁에 있어줄래?” 그의 목소리는 매우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강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만약 네가 나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한다면, 널 묶어버릴 거야. 다연아, 진짜야.” 이 말에 온다연은 냉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떠난다면, 아저씨는 어떻게 할 건데요?” 유강후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때 방 안은 밝고 따뜻했지만, 온다연은 그의 차가운 눈빛에 손발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천천히 만지다가, 그녀의 발목을 잡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다연이의 이 발은 필요 없게 될 거야. 그러면 도망칠 수 없잖아.” 그는 온다연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그녀의 눈 속에서 차가운 어둠이 그녀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다연아, 너는 떠나고 싶어?” “남성으로 가고 싶어?” 온다연은 등골에 찬 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이런 고압적인 시선 아래에서, 그녀는 그에게 들킨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의 마음은 떨리고 있었
장화연은 표진아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더니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마 그냥 지나가는 말일 겁니다. 적어도 사모님 뒷말은 하지 마세요.”“잠시 후에 한 대표님과 봉 대표님이 오셔서 결혼식 장소에 대해 논의할 거예요. 차와 간식을 준비하세요. 한 대표님의 새로운 파트너분은 커피와 서양 과자를 좋아한다고 하니 그것도 준비하시고 나머지는 평소대로 하시면 됩니다.”“네, 장 집사님.”하인이 돌아서려는 순간, 장화연이 다시 말했다.“준비해 두세요. 결혼식이 끝난 뒤, 당신은 영운산 별장으로 가서 일하게 될 겁니다. 모든 일에 좀 더 신경 쓰세요. 셋째 도련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별장으로 가는 사람은 대우가 더 나아질 거라고 하셨습니다.”하인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알겠습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저녁 식사 전, 한이준과 봉현수가 정말로 도착했다.다만 한이준 옆에 선 사람은 낯선 얼굴이었다.봉현수 옆에는 여전히 지예솔이 함께였다.온다연의 시선이 한이준의 파트너에게 스치듯 지나갔다.단정하고 청순한 외모로 임혜린과 몇 분 닮은 느낌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무표정하게 시선을 돌렸다.그런데도 그 여자는 무척 친근한 척하며 달콤한 미소로 말했다.“유 대표님, 저 기억하시나요? 저는 이진이의 어릴 적 친구 곽혜영이에요. 예전에 모임에서 뵌 적 있는데.”유강후는 별다른 표정 없이 예의상 고개를 끄덕였다.곽혜영은 전혀 어색해하지 않고 여전히 밝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감 있게 행동했다.저녁 식사가 무척 풍성하게 준비되었지만 어떤 사람들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곽혜영은 식사 중 활발하게 대화를 이끌며 마치 유씨 가문과 봉씨 가문에 아주 익숙한 사람처럼 굴었다.그러나 두 남자는 마치 포커페이스를 하듯 냉담한 표정을 유지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곽혜영은 전혀 개의치 않고 국제 정세와 금융 이야기를 꺼내며 온다연과 지예솔을 가끔씩 흘끔거렸다.그 눈빛 속에는 미묘한 경멸이 담겨 있었다.곽혜영은 사전에 조사를 했었다.온다연과 지예솔은 얼굴로 자리를 차지한
말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감탄했다.보기에는 여리여리하지만 옷감 아래 숨겨진 몸매는 정말 볼륨감이 있었다. 허리는 너무나 가늘어 아찔할 정도였고 가슴은 부드럽고 풍만해 전혀 작지 않았다.외부 사람이 있는 것을 본 온다연은 유강후의 팔에서 벗어나려 했다.눈가에는 아직도 약간의 붉은 기운이 남아 있는 채로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난 고르고 싶지 않아요. 아저씨가 결정한 일이니까 아저씨가 직접 골라요.”말을 마치자마자 돌아서 나가려 했다.하지만 유강후는 그녀를 다시 끌어안으며 성급함을 억누르고 달래듯 말했다.“결혼식이 이제 보름 남았어. 고르지 않으면 그날 입을 게 없잖아.”온다연은 피곤한 듯한 표정으로 유강후의 품에 갇혀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빠져나갈 수 없었다. 결국 아무 말 없이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표진아의 조수가 몇 벌의 웨딩드레스를 가져왔다. 모두 엄선된 고급 맞춤 드레스였는데 화려하면서도 신선하고 우아한 매력을 잃지 않은 디자인이었다.하지만 20벌이 넘는 드레스를 계속 보여줬음에도 온다연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너무 피곤한 듯 보였다.지쳐 보이는 온다연의 모습에 유강후는 안쓰러워하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많이 힘들지? 내일 다시 골라볼까?”그러나 온다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드레스들 위에 머물러 있었지만 눈빛에는 생기가 없었다.며칠 동안 그녀는 계속 이런 상태였다.깨어 있는 시간보다 잠들어 있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아이를 잃었다는 소식은 그녀의 마음을 철저히 무너뜨렸다.오늘도 유강후가 계속 달래고 유도하며 울고 말하게 하지 않았다면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녀의 기운 없는 모습을 보자 유강후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곧 허리를 숙여 그녀를 안아 들고 나가려는 찰나, 표진아가 급히 말했다.“사모님께서 만족하지 못하신다면 제가 다른 시리즈를 준비해왔습니다. 트렌디한 전통 스타일인데 사모님의 기품에 딱 맞을 겁니다. 애프터 드레스로도 사용할 수 있어요.”이런 큰 거래를
표진아가 뚫어져라 온다연을 쳐다보자 옆에 있던 집사가 입을 열었다.“저희 사모님입니다.”표진아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나이가 어려 보이는데 설마 미성년자를 만나는 건가?’부유한 집안의 아가씨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유강후라는 온실속에서 곱게 자란 화초처럼 보였다.‘이런 외모를 가졌으면 유 대표님 같은 분을 만나는 게 맞지. 안 그러면 이상한 사람이 얼마나 꼬이겠어.’표진아는 궁금함을 참지 못했다.“사모님이 생각보다 어리시네요. 미성년자는 아니겠죠?”집사는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눈살을 찌푸렸다.“진아 씨, 도련님이 화낼지도 모르니 안에 들어가서는 절대 이런 얘기를 꺼내시면 안 됩니다. 사모님은 혼인신고까지 마친 성인이에요.”“그리고 사모님이 요즘 도련님과 갈등이 생겨 기분이 안 좋으시니 언행을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표진아가 막 답하려던 찰나 커다란 문이 열리며 제네시스 한 대가 안으로 들어왔다.집사는 그녀의 옆에서 급히 속삭였다.“도련님이 오셨네요. 진아 씨는 저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시죠.”표진아는 집사의 뒤를 따르며 걸음을 옮겼다.고풍스러운 분위기의 다실에는 넓은 유리창이 설치되어 있었고 창문을 열면 바깥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표진아는 천하의 미래 그룹 대표가 차에서 커다란 상자 몇 개를 옮기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그런 다음 부하들을 시켜 상자에 들어있는 물건을 꺼내 조립했고 순식간에 2,3m 높이에 달하는 고양이 집이 완성되었다.표진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유 대표님이 이런 일도 직접 한다고?’곧이어 목격한 장면에 그녀는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평소 위엄있고 카리스마 넘치는 유강후가 허리를 숙여 조심스럽게 온다연을 달래주고 있었다.그러나 온다연은 가볍게 무시한 채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유강후가 옆에서 한참을 달래도 입조차 벙끗하지 않았다.곧이어 유강후는 비서에게 뭔가를 지시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우미가 고양이 한 마리를 안고 나왔다.고양이를 보고서야 온다연의 얼굴에는 미세한 표정 변화가 일어났다.그러나
“하는 짓을 봐서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 게 뻔합니다.”유강후는 섬뜩한 눈빛으로 사진을 바라봤다.“로운 불러와.”곧이어 로운이 들어왔다.유강후는 단호하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부터 본격적으로 공격해. 경원으로 들어온 암살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죽여버려.”“시간은 딱 한 달이야. 난 한 달 안에 김씨 가문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으면 좋겠어.”로운은 눈살을 찌푸렸다.“대표님, 열흘 정도만 더 기다리면 분명히 성공할 거라 확신합니다만 지금 바로 공격하기에는 미흡한 부분이 있습니다.”“로운.”유강후는 단호하게 그의 말을 잘랐다.“이미 내가 참을 수 있는 최대 인내심에 도달했어. 한 달 후에 임무를 완수한다면 돈, 사람, 물건 네가 원하는 건 전부 다 줄 수 있으니까 넌 여기에만 집중해.”“계정에 나온 모든 암살자를 너한테 맡길 거야. 난 대답만 원하니까 넌 반드시 성공해.”로운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맡겨주신 일은 반드시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로운이 나가자 이권이 입을 열었다.“도련님, 열흘이면 되는데 조금만 더 기다리는 건...”“안돼.”유강후의 표정은 한없이 어두웠다.“화창한 봄날에 꽃 피는 언덕에서 가장 로맨틱한 결혼식을 올려주겠다고 다연이랑 약속했어.”“안 그래도 빚진 게 많은데 이런 약속조차 지키지 못하면 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이권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벙끗했으나 끝내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유강후는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 굉장히 침착하고 이성적인 성향이기에 지금처럼 큰 위험을 감수할 때가 많지 않다. 남자로서 유강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이건 리스크가 너무 큰 모험이다.온다연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미래 그룹의 앞날을 걸고 있는 격이다.유강후는 정말 뼛속까지 온다연을 사랑하고 있었다.봄은 갈수록 날이 길어졌고 햇볕은 점점 더 따뜻해졌다.그러나 생기가 넘쳐야 할 봄날과 달리 한옥은 조용하기 그지없다.듣기로 여주인은 정원 중앙의 나무 밑에 의자를 두어 그
온다연이 너무 안쓰러워 덩달아 괴로움이 밀려온 유강후는 끊임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아니야. 다연이는 최고의 엄마야.”“우리 아이는 다연이를 엄청 좋아해. 그러니까 계속 꿈에 나타나잖아.”“울고 싶으면 울어. 참지 않아도 돼.”온다연은 울먹였다.“꼭 돌아오겠죠? 강후 씨, 아이는 다시 절 찾아올 거예요. 맞죠?”“그런데 꿈속에는 신발 한 켤레도 없이 맨발이었어요. 너무 불쌍해요.”꿈속의 장면이 떠오른 온다연은 가슴이 터질 듯 울부짖었다.“그곳이 너무 춥대요. 왜 데리러 안 오냐고 원망하는데...”“강후 씨, 아이가 추워하나 봐요.”“나 너무 힘들어요.”“괴로워요.”...극심한 괴로움과 고통은 몸의 경련을 일으켰다.이마에는 식은땀이 가득했고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은 어느새 유강후의 옷자락을 적셨다.그는 온다연의 피와 살에 녹아들듯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돌아올 거야. 무조건 돌아오니까 걱정하지 마. 다연아, 이제 그만 아파해.”...한참 동안 울다가 지쳐버린 온다연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흐느꼈다.유강후는 온다연을 안고 집으로 들어갔다.안방 문을 열려 있었는데 침대는 깨끗이 치워졌고 도우미 몇 명이 바닥에 엎드려 뭔가를 찾고 있었다.그에게 안겨있던 온다연은 발버둥 치다가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처음 팔찌가 부러진 곳에 무릎을 꿇더니 나무판자 틈을 따라 조금씩 이동하며 찾았다.온다연이 움직이는 방향 따라 눈물 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마침내 호박석은 바닥과 벽이 맞닿은 틈새에서 발견됐다.온다연은 그것을 손에 쥔 채 미친 사람처럼 울고 웃었다.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아예 몰랐던 도우미들은 고개를 들 엄두조차 나지 않아 푹 숙인 채 입을 닫았다.유강후는 그녀 앞에 무릎을 반쯤 꿇고 품에 안았다.“다연아, 이제 찾았으니까 좀 쉴래?”온다연은 호박석에 담긴 아이의 체온이라도 느끼려는듯 손에 꽉 쥔채 놓지 않았다.“강후 씨, 아이가 잠든 곳에 가고 싶어요.”온다연은 몸이 너무
‘호박석에 들어있는 게 정말 아이의 머리카락이라고?’온다연이 차고 있던 팔찌는 엊그제 영문도 모른 채 끊어졌고 그때 호박석을 잃어버렸다.그걸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온다연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아이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유일한 증거를 잃어버렸으니 죄책감이 밀려왔고 반드시 다시 찾으리라 다짐했다.‘찾아야 돼. 아직 그 방에 있을 거야.’온다연은 허둥지둥 침대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밖으로 뛰어갔다.이를 본 장화연도 얼른 뒤따라가며 그녀를 말렸다.“다연 씨, 건강이 회복되면 언제든지 아이를 만날 수 있어요. 지금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있잖아요. 이대로 나가면 다칠 겁니다.”온다연은 주저 없이 장화연을 밀어냈다.“비켜요. 장 집사님이 참견할 일이 아니잖아요.”장화연은 경호원에게 눈치를 주고선 여전히 온다연을 부축했다.“그럼 뭐라도 좀 먹고 가세요. 엄마가 힘없는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아이도 속상해할 겁니다.”그 말을 듣고 멈칫한 온다연은 곧바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내가 초라한 모습을 보이면 아이도 싫어하겠지?’‘하긴 이런 엄마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온다연은 다급하게 몸을 돌렸다.“죽 먹을게요. 줘요.”장화연은 그녀를 작은 식탁으로 부축해 갔다.“아직 뜨거우니까 천천히 드세요.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온다연은 죽을 필사적으로 입에 밀어 넣었다.너무 급하게 먹은 탓에 속이 안 좋은지 곧바로 심한 기침을 이어갔다.장화연을 다급하게 죽그릇을 옆으로 치웠다.“이렇게 드시면 안 됩니다.”때마침 병실로 돌아온 유강후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기침하고 있는 온다연을 발견했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그는 다급하게 달려오며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유강후는 병실에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고는 단호하게 호통쳤다.“사람이 몇인데 이런 일도 똑바로 못하면 어쩌자는 거야. 한 명을 케어하는 게 어려워?”병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입을 꾹 다문 채 감히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이때 온다연이 유강후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그러고선 팔찌를 뚫어져라 쳐
장화연은 한숨을 내쉬며 진지하게 답했다.“다연 씨는 가족이 없잖아요. 아이가 유일한 희망인데 지금은...”“앞으로 무슨 일이 생겨도 도련님은 무조건 다연 씨의 편을 들어야 합니다. 망설임 없는 확고한 모습을 보여줘야 다연 씨는 안정감을 느낄 겁니다.”“잠드신 것 같은데 침대로 옮기시죠.”유강후는 신생아를 안은 듯 조심스럽게 온다연을 침대로 옮겼다.온다연의 연약함은 깃털과도 같아서 그가 조금만 힘을 줘도 금방 찢어질 게 틀림없다.하지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소리 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유강후는 침대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마치 이렇게 하면 온다연이 그에게 잡혀 영원히 도망칠 수 없을 것처럼 말이다.어느새 유강후도 잠이 들었다.꿈속에는 그는 온다연과 두 아이를 낳았다.아들은 유강후를 닮고 딸은 온다연을 닮았는데 두 아이가 유강후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안아달라고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그들은 평범한 부부처럼 밤에는 격렬한 사랑을 나누고 아침에는 달콤한 입맞춤으로 하루를 시작했다.유강후는 매일 그녀에게 해바라기 한 송이를 선물했고, 온다연은 늘 밝은 미소와 부드러운 포옹으로 그에게 보답했다.그러던 어느 날 온다연이 선물이라며 그림을 주었다. 그림에는 해바라기로 가득한 꽃밭에서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걷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담겨있었다.온다연은 이 그림의 이름은 ‘영원한 사랑’이라고 얘기했다.심장이 터질듯한 행복감이 밀려온 유강후는 이대로 떠나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다.자존심만 세우던 그는 비로소 자신의 고귀함을 벗어던지고 사랑하는 여자에게 남은 여생을 함께 해달라고 부탁할 용기가 생겼다.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모두 그렇듯이 가질 수 없는 게 제일 비참하다.그 시각 온다연도 꿈을 꾸고 있었다.꿈속의 온다연은 어두운 방에 갇혀 있었고 누군가에게 손을 밟혔다.유강후는 싸늘하게 말했다.“그러게 내 말을 들었어야지. 이건 벌이야.”나은별은 그의 곁에 기대어 애교를 부리며 웃었다.“강후 씨, 벌이 너무 가벼운데? 말 잘
하지만 이제 온다연에게 아이는 없다.아니, 어쩌면 오래전부터 이미 없었을 수도 있다.온다연은 더 이상 유강후가 본인을 속이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았고 그와 따지려는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이미 모든 것에 실망했으니 다시 누군가는 사랑할 능력과 용기조차 없었다.따스한 햇볕과 달리 그녀의 마음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이 세상은 온다연에게 너무 각박했고 살고픈 희망을 가질때 쯤 잔인하게 짓밟아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었다.유강후는 차가운 온다연의 손을 어루만지더니 담요를 가져다 덮어주며 말했다.“아침 바람은 쌀쌀하니까 여기에 앉아 있지 마.”그가 움직일 때마다 은은한 향기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온다연은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나은별을 만나고 왔겠지?’‘이 향기는... 나은별에게서 나는 건가?’‘역시나 나보다는 나은별이 더 중요하구나. 전화 한 통에 밤새도록 자리를 비운 걸 보면...’‘됐다. 누굴 좋아하든 마음대로 해.’온다연은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이때 장화연이 죽과 함께 아침밥을 챙겨왔다.“도련님, 이쪽에서 드세요. 제가 다연 씨를 돌볼게요.”“내가 할게. 죽 이리 줘.”유강후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올려 소파 등받이에 기대게 한 후 푹신한 쿠션을 그녀의 허리 뒤에 놓아 최대한 편안한 자세를 만들어줬다.그럼에도 온다연은 힘이 없는 듯 똑바로 앉아 있지 못했다.그러자 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쿠션 두 개를 더 가져와 그녀를 지탱했고 모든 걸 마친 후 그는 죽을 가지러 걸음을 옮겼다.마침 장화연은 죽을 그릇에 옮겨 닮고 있었다.유강후는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위가 안 좋으니까 앞으로 이것보다 좀 더 부드럽게 만들어줘.”“알겠습니다. 이것도 2시간이나 고아서 만든 죽입니다.”“다연이 언제 깨어났어?”장화연은 온다연을 힐끗 쳐다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깨어난 지 여섯시간쯤 되었습니다. 눈을 뜨고도 지금껏 계속 말이 없었고 아침부터 저쪽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합니다.”그녀는
한바탕 난리 후 의사도 진땀을 뺐다.다행히 검사 결과 큰 문제는 없었다.보름이 넘도록 쉬지 못한 데다가 온다연이 걱정되어 줄곧 긴장한 상태였으니 몸이 지쳐 쓰러진 게 틀림없다.이런 상황에서도 온다연의 곁을 지키려고 하자 의사는 안된다며 강제로 수면제 한 알을 먹였다.곧이어 이권과 장화연도 들어왔다.장화연은 초췌한 모습의 유강후를 보며 가슴이 미어졌지만 표정만은 담담했다.“오늘은 푹 쉬세요. 다연 씨의 곁은 제가 지키고 있을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유강후는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눈뜨면 바로 불러.”이권이 걱정스럽게 말했다.“도련님, 아무 생각 말고 얼른 주무세요. 이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전 어르신의 손에 죽을지도 모릅니다.”유강후는 여전히 온다연이 걱정되어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수면제를 먹은 탓에 잠이 쏟아졌다.곧이어 깊은 잠에 빠졌다.그러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약병 하나를 들고 밖으로 나가는 간호사가 시야가 들어왔다.간호사는 잠에서 깬 유강후를 보더니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방금 누가 에센스 하나를 깨뜨려서 제 몸에 향이 배었습니다.”유강후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으니까 나가봐.”그렇게 말하고 그는 일어나 침대에서 나왔다.그래도 억지로라도 깊은 잠을 자고 나니 몸이 한결 개운해졌다.유강후는 시간을 보려고 핸드폰을 확인하고서야 자신이 아홉시간 정도 잤다는 걸 알아챘다.바깥은 이미 해가 뜨고 날이 밝았다.기분이 언짢아진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이권, 들어와.”서둘러 안으로 들어온 이권은 안색이 많이 좋아진 유강후를 보며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컨디션 좋아 보이네요. 어제는 정말 표정이 않았는데...”“왜 안 깨웠어?”유강후의 말투에서는 언짢음이 담겨있었다.“깊이 자고 계시길래 일부러 안 깨웠습니다. 도련님, 거의 1년 넘게 맘 편히 잠을 못 주무셨잖아요. 다연 씨는 장 집사님이 지키고 있으니...”“이권!”유강후는 싸늘했다.“이제 제멋대로 행동하는구나? 이번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