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후는 손으로 온다연을 부축하고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다연아, 네가 앞으로 어떻게 죽을지 알아?”온다연은 입술을 움직였지만 더듬거리며 말을 내뱉지 못하고 낮은 목소리로 삼촌이라고 불렀다. 비록 완전히 취했지만 그녀는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눈앞의 이 남자는 유강후이다. 그녀는 매우 잘 알고 있고 또 두려웠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자신의 몸을 전혀 통제할 수 없었다.술에 취한 느낌은 정말 괴롭고 위는 타들어 가는 것 같았고 손발은 차갑고 힘이 없었다.온다연은 유강후 몸 위에 엎드려 있었고 무의식적으로 그의 옷을 잡아당기며 미끄러지지 않도록 했다.그녀는 마치 바다에 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부목을 잡은 듯 유강후를 꽉 붙잡았다.유강후는 그녀한테서 나는 술 냄새 때문에 미간을 찌푸렸고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혼자 갈 수 있겠어?”그의 목소리는 그의 몸 온도만큼이나 차가웠다. 몸에 열이 나는 것만 같던 온다연은 왠지 모르게 그에게 더 달라붙고 싶었다.하지만 온다연은 또 유강후가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될수록 멀리하려고 애를 썼다.그녀는 유강후의 옷깃을 쥐어뜯으면서 말끝을 흐렸다.“어쩌면...”하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미끄러져 떨어지기 시작했다.유강후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직도 거짓말을 한다고?유강후가 팔을 굽히자 온다연은 마치 뼈가 없는 생물체처럼 그의 팔에 반쯤 걸려있었고 발도 땅에서 떨어졌다. 마치 코알라가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귀여웠다.이때 문밖에는 따라오던 학교 지도자 몇 명이 서 있었다. 유강후의 품 안에 자기 학교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있는 것을 보고 선생님들은 깜짝 놀랐다.“강후 씨, 이분은?”유강후는 핏기가 하나 없이 하얗게 질린 온다연을 힐끔 바라보더니 그녀의 얼굴을 자기 품속으로 묻었다. 그리고 담담하게 말했다.“유씨 가문 조카예요.”그러자 학교 지도자들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학교에 뜻밖에도 유씨 집안 사람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한참 후, 유강후는 다시 염지훈을 쳐다봤다. 그의 매서운 눈빛은 염지훈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염지훈은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혹시 제가 도련님 집 아이를 훔쳤다고 의심하는 건 아니죠?”유강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차갑게 쳐다보기만 했다. 두 사람은 키가 비슷하고 모두 카리스마가 넘쳤지만 유강후는 염지훈보다 몇 살 연상이고 비즈니스와 정치계에서 몇 년 있다 보니 남다른 기세가 있었다.순간 염지훈은 기 싸움에서 뒤처진 느낌이 들었다. 그는 유강후의 눈빛만 봐도 숨이 막혀왔다.비록 두 가문의 재력은 비슷했지만 유씨 가문은 정치계에서 더 잘나갔다. 그 때문에 염지훈은 유강후와 적이 되기 싫었다.이때 염지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강후 도련님, 제가 같이 찾아드릴까요?”유강후는 염지훈의 뒤에 있는 캄캄한 반사 유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 담담하게 말했다.“필요 없어.”그리고 그는 자리를 떠났다.잠시 후, 유강후의 차는 주차장을 떠났다. 그제야 염지훈은 문을 열며 말했다.“나와.”문에 웅크리고 앉아 엿듣던 온다연은 문이 열리자마자 차에서 떨어지면서 이상한 자세로 착지했다. 그러자 염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그녀를 부축했다.온다연은 머리가 아까보다 더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팔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차 문에 기대어 염지훈을 멍하니 쳐다봤다.염지훈은 차 문에 기대어 담배에 불을 붙이고 초라한 모습에 술 냄새까지 풍기는 온다연을 자세히 훑어보았다.온다연은 예쁘게 생겼고 피부도 하얗고 눈도 초롱초롱했다. 나이가 많지 않았지만 배짱이 좋은 것 같았다.염지훈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온다연은 사정없이 훑어보았다.“유강후랑 무슨 사이야? 왜 피해 다녀?”온다연은 염지훈을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난 그쪽을 모르는데요.”그녀는 술에 많이 취해서 염지훈의 생김새를 잘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날카로운 눈빛과 더운 날에 두꺼운 옷차림을 한 것을 보니 좋은 사람 같지 않았다.게다가 그는 유강후처럼 키가 크
온다연은 고개를 번쩍 들어 유강후를 쳐다봤다. 서늘한 눈동자는 미동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분위기는 얼음처럼 차가웠다.그녀는 깜짝 놀라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서며 당황한 눈빛을 보였다.“삼... 삼촌...”유강후는 왜 아직 떠나지 않았을까? 왜 아직도 여기 있을까?유강후는 뼈마디가 분명한 손가락으로 핸들을 튕기면서 말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에는 경고하는 어투가 담겨있었다.“다연아, 나는 인내심이 별로 없어 같은 말을 세 번 이상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차에 타라고.”온다연은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유강후가 주는 스트레스 때문에 그녀의 위는 더 아파졌다.그녀는 하는 수 없이 뒷문을 열고 유강후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았다.에어컨 바람 때문에 차 안은 냉기가 가득했고 온다연은 냉기 때문에 오들오들 떨었다. 그리고 그녀의 위는 찬바람을 맞아 더 아파졌다.유강후는 조수석 자리에서 어떤 물건을 집어 들고 온다연에게 건넸다.“마셔.”온다연은 받아보니 숙취해소제였다.그리고 유강후는 또 물 한 병을 건네며 말했다.“입가심해.”온다연은 위가 아파서 허리를 거의 펼 수 없었지만 유강후의 강한 압박감 때문에 시킨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약을 먹고도 속쓰림은 가라앉지 않았고 오히려 통증이 심해졌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뒷좌석에 웅크리고 앉아 식은땀을 흘렸다.그녀는 유강후가 자기를 어디로 데려갈지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심한 통증 때문에 그녀는 사색조차 할 힘이 없었다.그녀는 머리를 숙였고 그녀의 반들반들한 이마에는 식은땀이 촘촘히 맺혔다.유강후는 한 손에 핸들을 잡고 가끔 백미러로 온다연을 쳐다봤다.희미한 불빛 때문에 그는 온다연이 조그맣게 웅크리고 차 문에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어린 나이에 고집스러운 모습이 성격이 얄궂은 고양이와 같았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었고 차 안은 답답한 분위기였다.마침내 가로수길에 접어들었을 때, 유강후는 차를 길가에 세웠다.이 길에는 차들이 엄청 적었다. 길 양측
온다연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유강후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이때 그녀는 진정으로 남녀의 체형과 힘의 차이를 느꼈다.유강후는 덩치가 큰 몸매는 아니다. 188의 키에 날렵하고 늘씬한 몸매를 가졌고 셔츠와 양복을 입을 때 세련되고 도도했다. 전혀 공격적으로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온다연은 유강후가 옷을 벗으면 얼마나 튼튼하고 섹시한 몸매를 가졌는지 알고 있다. 3년 전 그날 오후, 유강후는 한 손으로 온다연을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가두었다.하지만 온다연이 더 두려워하는 것은 그날 오후 그의 눈빛이었다. 붉게 달아오르고 이성을 잃은 그 눈은 짐승처럼 보였고 가끔 그녀의 꿈에도 나타났다. 그 눈빛만 떠올리면 온다연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그래서 유강후에 대한 두려움은 신체적과 정신적에세 모두 비롯됐다.“저, 저 도망치지 않았어요...”온다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유강후는 허리를 굽혀 두 손을 침대에 짚고 온다연을 침대와 자기 몸 사이에 가두었다. 그리고 또박또박 천천히 말했다.“다연아, 어떤 일은 말이야. 네가 피할수록 더 엉망진창이 될 거야.”온다연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몸은 가볍게 떨렸고 겁에 질려 입술을 깨물었지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유강후는 그런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내가 왜 일찍 돌아왔는지 알아?”온다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녀는 감히 유강후를 쳐다보지도 못했고 입술만 꽉 깨물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 옆에 작은 점을 하얗게 될 정도로 깨물었고 마치 구해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유강후는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꽉 움켜쥐고 입술을 그만 깨물도록 하였다.“대답해.”온다연은 침대보를 움켜쥐고 고개를 돌렸다.“몰라요...”그녀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유강후는 그런 그녀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싸늘하게 말했다.“알고 싶지 않은 건 아니고?”그러자 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그녀의 턱을 꽉 잡고 있던 유강후의 손에 힘이 더
온다연은 꼼짝도 못 하고 눈을 감고 못 들은 척했다. 유강후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갑자기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아 올렸다.온다연은 놀라서 심장이 멎을 것 같았고 그녀가 막 눈을 뜨려고 하자 유강후는 다시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그는 온다연을 침대 안쪽으로 조금 옮긴 후 신발을 벗고 그녀 옆에 누웠다. 병원의 침대는 매우 작았다. 두 사람은 불편하게 누워 있었다. 특히 온다연은 유강후를 매우 두려워했다.유강후의 카리스마와 그의 체향이 공기 속을 가득 채웠다. 온다연이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그의 냄새로 가득했다. 유강후의 몸은 그녀의 등에 달라붙었고 온다연은 그 열기로 인해 화상을 입을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는 움직일 수 없었고 나무처럼 굳어있었다. 온다연은 유강후가 그녀의 침대에 누울 거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게다가 이런 작은 병원 침대에 말이다. 유강후는 결벽증이 있지 않았던가?온다연은 긴장해서 울고 싶었고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했다.하지만 유강후는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뉴스를 보기 시작했고 문자도 몇 개 보냈다.시간은 그렇게 1분 1초 지났고 온다연은 자신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다가 약의 작용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긴장이 풀리면서 몸이 나른해지자 그녀의 손은 자기도 모르게 유강후의 무릎 위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가늘고 작고 부드러웠다. 그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손을 유심히 쳐다보았다.손톱은 짧았고 매니큐어 같은 것을 바르지 않아 깨끗해 보였다. 손가락은 통통했고 귀여웠다.이때 온다연이 갑자기 손을 빼갔고 몸을 뒤척이며 유강후에게 얼굴을 대고 돌아누웠다. 그리고 손과 발도 그의 몸에 걸치면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하니야, 기다려...”그녀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젖은 상태로 얼굴에 붙어있었다. 머리카락이 검었기 때문에 얼굴이 유난히 하얘 보였다.온다연의 이목구비는 유난히 예뻤고 피부도 하얗고 입술 옆에 보일락 말락 하는 점마저도 매력적이었다.그런데 두 눈은 수줍게 생겼고
온다연은 더 긴장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 말까지 더듬었다.“아니에요. 거짓말 아닌데요.”그녀가 한 말은 사실이다. 온다연이 13살 때부터 심미진은 그녀를 거의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프다는 일을 언급하지 말든지 결과는 마찬가지이다.사실 유하령이 온다연의 배를 찰 때 심미진은 아마 내장을 다쳤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심미진은 온다연에게 4만 원을 주면서 스스로 진료소를 찾아가 보라고 했다. 그리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그 후, 온다연은 유씨 저택에 거의 돌아가지 않았고 심미진에게 자기가 괴롭힘을 당한 일도 말하지 않았다.게다가 3년 전 유강후와 그 일이 있고 난 뒤 유하령은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온다연을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유하령은 그녀의 머리채를 뽑고 뺨을 때리고 밥에 압정을 넣고 침대에 작은 동물까지 던졌다. 게다가 몇 번은 깡패들을 찾아 그녀를 골목에 틀어박고 죽을 때까지 때렸다. 그러면서 온다연의 내장은 더 심하게 다치게 되었다.지금 생각해 보니 그녀가 이렇게 된 것은 유강후와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그런 생각에 온다연의 눈은 더 아래로 처졌고 도시락을 쥔 손도 가볍게 떨리기 시작했다.갑자기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던 유강후는 잡고 있는 그녀의 턱을 놨다. 그러자 온다연의 얼굴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생겼다.피부가 이렇게 부드럽다고?유강후의 안색이 어두워지면서 그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나는 누가 나한테 거짓말을 하는 게 제일 싫어.”그러자 온다연이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삼촌, 저 거짓말 안 했어요.”그렇게 말하며 온다연은 손을 앞으로 옮기면서 도시락으로 유강후의 손목을 스쳤다.그러자 도시락의 뜨거운 온도에 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온다연의 손바닥을 보자 이미 빨갛게 덴 것을 발견했다.화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도시락이 이렇게 뜨거우니 분명 엄청 아팠을 것이다.유강후의 눈빛은 더 차가워졌고 턱선은 더 날렵해졌다.“다연아, 안 아파? 아니면 아픈 걸 잘 참는다고 생각해?”그러면서 유강후
온다연은 이런 생각에 참지 못하고 냄새를 맡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옷에서 유강후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만약 그의 냄새가 났다면 그녀는 정말 입을 수 없었을 것이다.속옷은 딱 그녀의 사이즈였다. 온다연은 키가 161cm이고 90근에 불과한 마른 체격이었지만 브래지어는 C컵을 입어야 했다.허리가 가늘고 다르가 길며 애플 힙라인 때문에 윗옷과 바지의 사이즈가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옷을 살 때마다 다른 사이즈로 조합해야 한다.그 때문에 그녀는 자기 몸에 꼭 맞는 사이즈의 속옷을 보았을 때 조금 놀랐다. 그리고 두 치마의 가격을 보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두 치마도 하나는 흰색 하나는 하늘색이었는데 한 벌은 1,700만 한 벌은 2,500만이었다.온다연은 두 치마의 가격을 보자 안색이 어두워졌다. 유강후는 이 치마를 어디에서 샀을까? 환불할 수 있을까?하지만 이 원단은 정말 부드럽고 편안했다. 온다연은 이렇게 좋은 원단의 옷을 입어본 적이 없다.이때 집사가 그녀를 불렀다.“다연 아가씨, 어떠세요?”온다연은 할 수 없이 대답했다.“괜찮아요.”그리고 흰색 치마를 입었다.치마는 심플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디자인으로 잘록한 허리라인이 완벽히 드러나고 다리가 길어 보이는 포인트를 모두 살렸다.옷을 다 입고 나서 그녀는 다시 쇼핑백을 봤더니 작은 선물 상자가 하나 더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열어보니 그 안에는 머리띠가 있었다.머리띠에는 새하얀 진주가 있었고 양쪽에는 반짝이는 다이아몬드가 있었다. 정교한 공예 기술 때문에 한눈에 봐도 비싼 제품임을 알 수 있었다.온다연은 가격표를 보고 싶었지만 찾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머리를 어깨에 풀어 헤치고 머리띠로 묶었다. 화장실을 나서자 집사의 무뚝뚝한 표정 때문에 그녀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집사의 말투는 한결같았다.“다연 아가씨, 도련님이 며칠 동안 저한테 아가씨를 돌보라고 하셨어요.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저에게 말씀하세요.”온다연은 이
온다연은 두려워서 몸이 경직되었다. 유강후는 차가운 손등으로 그녀의 이마를 만졌다가 거두어들였다.“집사님이 네가 오후부터 열이 나서 잠을 못 잤다고 하더라고. 지금은 열이 내렸네. 의사를 부를 필요가 없을 것 같아.”온다연은 그제야 자신이 오후에 열이 났고 반나절이나 잤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오래 잤는데 왜 머리가 아직도 무거울까?온다연은 그 원인을 유강후가 너무 가까이 다가온 탓으로 돌렸다.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삼촌, 불 좀 켜주시면 안 돼요?”유강후는 그러자 문 쪽으로 가서 불을 켰다. 조명이 켜지자 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유강후를 쳐다봤다. 양복을 입은 그의 모습은 유난히 늘씬해 보였고 매력적이었다.그는 넥타이도 맸고 조명 아래 다이아몬드 옷깃이 화려하게 빛났다. 무심코 들어낸 손목시계도 비싼 명품 같았다.온다연은 양복을 입은 남자는 많이 봤지만 유강후 같은 분위기를 내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차갑고 섹시하고 고급스러웠다.온다연은 잠시 멍하니 있더니 아까보다 더 긴장되어 절로 눈을 내리깔았다. 유강후는 더웠는지 넥타이를 벗어 의자에 털썩 걸치고 양복을 벗더니 가늘고 흰 줄무늬 셔츠를 드러냈다.외투를 벗은 유강후는 카리스마가 줄었지만 도도함이 더 돋보였다. 온다연은 감히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그는 외투를 놓고 나갔다가 2분도 안 되어 다시 돌아왔는데 이때 그의 손에는 커다란 쇼핑백 하나가 더 늘어났다.유강후는 쇼핑백에서 도시락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온다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일어나서 뭐 좀 먹어.”온다연은 확실히 배가 고팠기에 힘겹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손에는 무의식적으로 그 하얀 진주 머리띠를 쥐고 있었다.유강후는 그녀를 한번 훑어보더니 그윽한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말했다.“잘 어울리네.”깔끔한 디자인의 이 드레스는 우아하고 세련되어 보였으며 전에 입었던 치마보다 훨씬 소녀답고 예뻤다.온다연은 치마를 잡아당기며 속옷 생각이 나서 얼굴이 화끈거렸다.“감사합니다.”그리고
유강후는 그녀를 안아 무릎 위에 앉힌 후, 잔뜩 성이 나서 뾰로통한 그녀의 얼굴에 입 맞추고 속삭이듯 말했다.“바보야, 난 정상적인 남자야. 좋아하는 사람이 나긋나긋한 모습으로 앞에 있는데 반응이 없을 수 있겠어?"“너에게 충동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게 더 문제야!”그는 그녀의 하얀 귓불을 살짝 깨물며 속삭였다.“다연아, 넌 내 거야. 넌 나의 모든 환상을 책임져야 해.”문득 유강후가 아까 꺼내준 옷들이 생각난 그녀는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졌다.“그 옷들은 어디서 구한 거예요?”3년 전 임혜린한테서 특별히 맞춤 제작한 옷들을 말하는 것이다.“강후 씨는 왜 옷을 찢는 걸 그렇게 좋아해요?”게다가 그 옷들은 수치스러울 정도로 옷감을 적게 사용해 몸을 가리기 어려웠다.하지만 핵심은 그게 아니다. 핵심은 매번 그녀가 옷을 입은 지 2분도 안 되어 다 찢겨나가고 유강후가 평소보다 더 통제 불능 상태가 된다는 점이다.유강후의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를 스치자 그녀는 몸을 움츠렸다.“오늘은 정말 안 돼요. 벌써 옷을 세 벌이나 찢었잖아요. 옷 사는 것도 돈이 드는데...”유강후는 호흡이 거칠어지며 그녀의 가냘픈 허리를 끌어당겼다.“다 이전에 맞춘 거야. 아직 수백 벌 남았어. 하나씩 다 입어줘.”“수백 벌이요?”온다연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미쳤네요!”“그래, 미쳤어. 네 몸에서 나는 향기만 맡아도 이성을 잃어. 네가 성인이 되자마자 먹어버릴걸, 이렇게 오랫동안 참으며 많은 일을 겪고... 진짜 후회돼.”유강후는 그녀의 귀를 가볍게 깨물더니 목에 가볍게 키스했다.그의 입술이 목선을 타고 내려가자, 온다연은 온몸에 전율을 느끼며 신음소리를 냈다.“안 돼요. 오늘은 정말 안 돼요...”유강후가 유혹하듯 속삭였다.“내가 살살 할게. 말 들어. 나랑...”구름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이 다시 밀려오면서 온다연은 그의 품에서 녹아내렸다.하지만 막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온다연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안 돼요!”유강후는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유강후는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며 걱정했다.체온은 정상이었지만 여전히 불안했다.사실 재회한 후 온다연은 건강이 많이 좋아졌고, 예전처럼 툭하면 열이 나는 일도 없었다.특히나 곽혜진이 준 약을 먹고 몇 달 만에 건강이 정상인 수준으로 회복됐다.하지만 온다연이 이전에 반복된 고열과 심각한 후유증으로 고생했던 탓에, 유강후는 그녀가 조금이라도 불편해하면 즉각 열이 난다고 여기는 습관이 있었다.“의사를 불러줘!”온다연이 막아 나섰다.“부르지 말아요.”그녀는 팔에 생긴 붉은 자국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늦은 시간에 그럴 필요 없어요. 그냥 좀 입맛이 없을 뿐이에요. 게를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 것 같아요.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예요.”온몸에 그가 남긴 흔적이 가득한데, 의사가 본다면 내일쯤 강씨 가문 전체에 소문이 퍼질 것이다.그녀는 자신의 사생활이 모든 사람에게 공개돼도 신경 쓰지 않을 만큼 대범한 성격이 아니다.유강후도 그녀의 목에 남아있는 자줏빛 흔적을 발견했다. 몇 군데는 절제를 못 한 탓에 피부가 벗겨진 상태였다.그는 절제하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며 그녀의 목에 입을 맞추었다.“아파?”온다연이 나지막이 대답했다.“괜찮아요. 그다지 아프진 않은데 흔적이 너무 뚜렷해요. 며칠 뒤에 저녁 만찬이 있는데, 그때까지 없어지지 않으면 드레스를 입을 수 없어요.”유강후는 집사가 들고 온 약상자에서 연고를 꺼냈다.“이건 곽혜진 선생님이 내 흉터를 치료하라고 준 건데, 키스 흔적을 없애는 데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어.”그는 노출된 부위의 붉은 자국에 연고를 조금씩 발라주었다.처음엔 단순히 약만 발랐지만, 점점 그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온다연은 피부가 유난히 하얗고 야들야들해서 가볍게 약을 발라주는 것만으로도 하얗던 피부가 연분홍으로 물들었다.게다가 손끝에 전해지는 부드럽고 매끄러운 촉감에 유강후는 저도 모르게 조금 전의 장면을 떠올렸다.그의 호흡이 가빠진 것을 감지한 온다연은 서둘러 옷깃을 여미며 경계했다.“더는 안 돼요.
“화풀이하고 사람을 해고하는 것이 당신의 취미라면 저도 해고하세요.”“저는 성인이에요. 무엇을 얼마나 먹을지는 제가 알아서 결정해요. 다른 사람이 통제하거나 간섭하는 것이 싫고 필요하지도 않아요.”유강후는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온다연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일어나 계단 쪽으로 향했다.“그렇게 화풀이하고 싶으면 저한테도 하세요. 저도 떠나면 되겠네요. 뭐든 당신의 말대로 해야 하고, 심지어 식사량까지 통제해서 밥도 편히 못 먹게 하니 불편해서 어디 살겠어요?”유강후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어딜 가려고?”온다연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제가 데리고 온 사람들을 아버지 몰래 여행 보냈잖아요. 저를 쉽게 통제하려고 그런 게 아니에요?”유강후가 눈살을 찌푸렸다.“무슨 헛소리하는 거야?”온다연이 그의 손을 뿌리쳤다.“그럼 왜 식사량까지 통제해요? 조금 더 먹거나 덜 먹는 건 아주 정상적인 일이 아닌가요?”“게를 조금 많이 먹어서 속이 안 좋아졌다고 이 방에 있는 모든 사람을 해고하겠다는 건 너무 지나치지 않아요?”유강후가 급히 설명했다.“위가 안 좋은 네가 많이 먹고 배탈 날까 봐 제한한 거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온다연은 콧방귀를 뀌었다.“강씨 가문의 일은 제가 어찌할 수 없지만, 제 일은 제가 결정할 수 있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녀가 진짜 화났음을 확인한 유강후도 그 뒤를 따랐다.오진숙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급히 물었다.“도련님, 야식을 준비할까요?”유강후는 고개를 돌려 하인들을 쏘아보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이 토하는 걸 못 봤어? 얼른 야식을 준비하지 않고 뭐 해? 정말 해고되고 싶어?”하인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각자 위치로 돌아갔다.침실에서 유강후는 그녀를 품에 안고 온갖 달콤한 말로 달랬다. 온다연은 언제 그랬냐는 듯 토라진 마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둘의 몸은 다시 한데 엉켰다.요 며칠 유강후가 고열로 앓아누웠던 탓에
유강후는 게 껍데기를 까다가 손에 상처가 생긴 온다연을 보며 가슴이 찢어졌다.“제가 할게요. 게 먹다가 손이 다 망가지겠네.”온다연의 작고 하얀 손은 아주 작은 상처가 생겨도 눈에 띄었다.유강후는 온다연의 손을 너무 좋아했기에 상처가 생긴 걸 본 순간 기분이 몹시 나빠졌다.그는 물티슈를 가져와 손을 천천히 닦아주며 아픈 건 아닌지 물었다.도우미들이 옆에서 웃음을 참자 괜히 무안해진 온다연은 재빨리 손을 거두었다.“안 아파요. 뭘 이런 상처로 오바를...”“하지 마요. 사람들이 보잖아요.”유강후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명령했다.“나가. 밥 먹는 거 방해하지 말고.”그러자 도우미들은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유강후는 게 껍데기를 까면서 안에 있는 살들을 온다연의 앞접시에 놓았다.그제야 유강후는 온다연의 앞에 식초가 담긴 작은 접시가 놓여있는 걸 알아챘다.유강후는 식초에 찍어 먹는 걸 좋아하지만 온다연은 신맛이 나는 음식을 선호하는 편이 아니다.그래서 식초를 온다연의 앞에 놓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신맛이 나는 요리도 거의 하지 않았다.정말 이상하게도 온다연은 그가 까준 게살을 식초에 찍어서 맛있게 먹고 있었다.“신맛 별로 안 좋아하잖아요. 갑자기 왜 식초를 찍어 먹어요?”온다연은 최근 며칠 사이에 자신의 입맛이 바뀌었다는 걸 느꼈지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갑자기 신맛 나는 음식이 땡겨서요. 잘됐다. 그럼 우리 이제 입맛까지 똑같네요? 앞으로 음식은 하나씩만 해도 되겠어요.”말하던 온다연은 갑자기 속이 메스꺼운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구토하는 그녀의 모습에 유강후는 마음이 조급해져 집사와 도우미들을 집합시켰다.유강후가 온다연을 얼마나 아끼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에 순식간에 온 집안 사람들이 긴장하며 당황하기 시작했다.불과 얼마 전에 물이 뜨거웠다는 이유로 강씨 가문에서 20년 동안 일하던 도우미가 해고 되었고 강현미의 주변 집사들도 그때 함께 정리되었다.특히 임청하라는 집사는 강씨 가문에서 나름 발언권이 있
나은별은 비웃었다.“설마 나이 먹었다고 나 싫어하는 거예요?”나은별은 이미 서른이 되었다. 철저하게 관리한 덕분에 겉모습은 소녀처럼 보이지만 눈꼬리에는 어느새 미세한 주름이 많았다.어느 날 아침 소이섭은 나은별에게서 흰머리를 발견했고 그때부터 눈빛이 돌변했고 나은별은 두 사람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왜 좋은 남자들은 나한테 눈길조차 안 주고 매번 소이섭 같은 쓰레기만 엮이는 거지?’소이섭같은 바람둥이는 이용하고 버리기에 최적화된 사람이다. 전에는 말이라도 잘 들었는데 이제 슬슬 기어오르는 것 같으니 조만간 처리해 버릴 생각이었다.소이섭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나이가 들다니. 그런 생각 하지 마. 예전에 네가 학교 다닐 때 모습이랑 닮아있어서 조금 더 챙겨줬을 뿐이야. 추억 회상이랄까? 정말 다른 마음은 없어. 믿어줘.”나은별은 속으로 흐뭇해하며 입꼬리를 올렸다.“아무튼 난 싫으니까 처리해요.”그러자 소이섭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알았어. 다른 부서로 옮길게.”“부서 이동이 아니라 당장 해고하라고요.”“알았어. 네가 시키는 대로 할게.”“아참, 널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누군데요?”“너랑 아는 사이라던데? 예전에 강씨 가문에서 3, 4년 정도 집사로 일했다고 얘기하면 기억할 거래.”나은별은 의아해했다.“임청하?”“마침 찾아보려고 했는데 먼저 연락이 올 줄은 몰랐네요. 아마 온다연 그X이 돌아오고 나서 쫓겨났을걸요?”소이섭은 구급상자를 꺼내더니 나은별에게 약을 발라주며 말했다.“그래? 한번 만나볼래?”“당연히 만나야죠. 알고 있는 게 저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에요.”강씨 가문 별장.유강후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서재로 들어갔고 온다연이 씻고 나올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막 서재로 들어가려는데 집사 오진숙이 다가왔다.“사모님,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전부 사모님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준비했어요. 지금 바로 차릴까요?”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준비해 주세요. 강후 씨랑 같
‘아니야. 내가 잘못 본 게 틀림없어.’나은별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강후 씨, 왜 나한테 이렇게 잔인해?”유강후는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죽고 싶다며? 그럼 빨리 죽어.”“동정표를 얻으려고 이제 죽는 쇼까지 하네? 그게 먹힐 것 같아?”“나은별, 경고하는데 한재민을 건드리는 순간 나씨 가문은 영원히 경원에서 사라질 거야.”나은별은 유강후가 그녀에게 이런 독한 말을 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듯 그대로 얼어붙었다.‘또 온다연 그 X이네.’‘뭘 기억하고 뒷담화를 한 게 틀림없어. 그러니까 나한테 이러는 거지.’나은별은 울먹였다.“강후 씨, 왜 나한테 이렇게 독하게 굴어? 난 그냥 나씨 가문을 도와달라고 한 것뿐이잖아. 싫으면 싫다고 해. 이렇게 날 벼랑 끝까지 몰아세우는 이유가 뭐야?”유강후는 치가 떨린다는 표정으로 나은별을 쳐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나은별.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내가 정말 모를 것 같아?”나은별은 몸을 떨며 한걸음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내가... 뭘 했는데?”살기를 드러낸 유강후는 목소리마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더 이상 너랑 엮이고 싶지 않아. 아참, 그리고 그 더러운 수법을 한재민한테 쓰는 순간 너랑 나씨 가문은 끝장이니까 잘 생각해.”말 섞는 것조차 불쾌했던 유강후는 곧바로 차에 탄 후 기사에게 말했다.“차 한 대 대기시키서 누가 데리러 오는지 영상 찍고 한재민한테 바로 보내.”“알겠습니다. 대표님.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아니나 다를까 유강후가 떠나자마자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된 차에서 누군가 내렸다.소이섭은 아주 자연스럽게 다가가 나은별을 부축했다.“괜찮아? 차에 구급상자 있으니까 저쪽으로 가자.”나은별은 유강후의 차가 떠난 방향을 주시하더니 차갑게 말했다.“온다연이랑 한재민 둘 다 살아있어요. 진짜 예상도 못 했는데...”소이섭은 그녀를 부축해서 차까지 걸어가며 말했다.“온다연이 살아있는 건 이상할 게 없는데 한재민이 살아있을 줄은 나도 몰랐네. 우리가 그 바다에 상어
충격을 받은 한재민이 정신을 차렸을 때 나은별은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져있었다.그가 머뭇거리며 앞으로 다가가려고 하자 유강후는 재빨리 잡아당기며 차갑게 말했다.“죽지 않으니까 그냥 냅둬. 괜히 손 더럽히지 말고.”한재민은 미간을 찌푸린 채 나은별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강후야, 우리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사이야. 은별이가 됐든 네가 됐든 내 눈앞에서 죽어가는 걸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어.”유강후는 여전히 싸늘했다.“조금이라도 엮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희망을 준 순간 껌딱지처럼 달라붙는다고. 그걸 떼어내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더 이상 예전의 나은별이 아니야. 제발 정신 차려.”유강후마저도 속은 적이 있다.함께 자란 옛정과 한재민의 부탁을 생각해서 유강후는 줄곧 나씨 가문에 관대했고 나은별이 문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용서했다.그런데 김원도와 손을 잡고 온다연을 다치게하고 오해하게 만드는 건 백번 천번 죽어도 싸다.하지만 이대로 죽인다면 나은별에게는 좋은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천천히 피를 말릴 생각이었다.“형수님이랑 저녁 식사하기로 했다며? 가족들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나은별한테 갈 거야? 형수님이 오해하기를 원해?”유강후는 싸늘했다.“두고 봐. 10분만 있으면 누군가가 와서 데려갈 거야.”이때 나은별은 기둥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이마는 온통 피투성이고 흰 치마에도 핏자국이 많아 매우 안쓰러워 보였다.나은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불쌍한 눈빛으로 한재민을 바라봤고 마치 마지막 연민을 얻으려는 것 같았다.그러나 한재민은 유강후에게 꽉 잡혀 있었다.“강후야. 무슨 뜻인지 알겠는데, 병원에 데려다 줄 사람을 보내는 건 괜찮잖아.”유강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신의 경호원에게 손짓했다.“한 대표님을 집까지 모셔다드려.”한재민은 표정이 어두워졌다.“그게 무슨 뜻이야?”유강후는 매우 단호하게 말했다.“이해 못 하겠지만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어. 더 이상 우리가 알던 예전의 나은별이 아니야
“오빠, 변했어. 예전에는 나한테 이러지 않았는데...”한재민은 인내심이 조금씩 닳아가는 걸 느끼며 차갑게 말했다.“지난 3년 동안 정말 내가 보고 싶었어? 그동안 무슨 짓을 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 옛정을 생각해서 충고하는 건데 더 이상 문제 일으키지 말고 조용한 곳에서 얌전히 살아. 그러면 남은 인생 안전하게 보낼 거야.”나은별은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아 눈시울을 붉히며 한재민을 바라봤다.“그게 무슨 뜻이야?”한재민은 더 이상 그녀와 엮이고 싶지 않은 듯 차 문을 열더니 그 안에서 수표 한 장을 꺼냈다.“금액은 네가 원하는 대로 적어. 그때의 일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정말 도움이 필요하면 내 비서한테 연락해. 그게 아니라면 다시는 연락하지 마.”때마침 유강후와 온다연이 천천히 걸어왔다.나은별은 온다연을 본 순간 마음속에 억눌렀던 악의가 다시 들끓었다.‘이 X은 왜 아직도 살아있는 거지?’‘너 때문에 유강후가 3년 동안 날 무시했잖아. 돈도 조금씩 주니까 내가 투자를 못 한단 말이야.’미래 그룹의 뒷받침이 없으니 지난 3년 동안 나은별은 무슨 일을 하든 재수가 없었고 마치 저주에 걸린 것처럼 하는 일마다 본전을 찾지 못했다.그렇게 나씨 가문의 모든 자산이 바닥을 보였다.설상가상 올해 초 아버지마저 직장에서 해고되어 나씨 가문은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게다가 예전에 굽신거리던 사람들도 나은별을 무시하기 시작했다.천국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게 어떤 기분인지 몸소 느끼게 되었고 지금 살고 있는 매 순간이 지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아버지의 복직을 돕기 위해 유강후의 별장 밖에서 3일 동안 무릎을 꿇었지만 유강후는 얼굴조차 드러내지 않았다.그때 나은별은 깨달았다. 그녀와 유강후의 관계는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유강후가 모든 진실을 알았다고 의심도 해봤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만약 온다연 납치 사건의 전말을 알았다면 지금껏 그녀를 살려뒀을까?비록 지난 3년 동안 유강후를 만나지 못했지만 주기적으로 돈을
“나 책임진다며. 나랑 결혼한다고 약속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다른 여자랑 결혼할 수 있어? 난 오빠를 3년이나 기다렸어. 계속 안 나타나면 평생 기다릴 생각이었다고.”“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았다고? 그럼 나는? 나는 어떡하라고?”한재민은 표정이 일그러졌다.“정말 미안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되돌릴 방법은 없어.”“은별아, 임신하게 만든 건 내가 너한테 빚진 게 맞아. 어떻게서든 보상할게. 앞으로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해도 돼.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야.”“아니야.”나은별은 울부짖었다.“안돼. 이러면 안 되잖아. 나한테 평생 미안해해야지.”나은별은 대뜸 그의 팔을 잡더니 눈물을 흘리며 바라봤다.“오빠, 솔직하게 얘기해줘. 그 여자가 오빠를 구한 거야? 맞지?”한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날 구해준 게 맞아.”그러자 나은별은 갑자기 웃음을 지었다.“오빠, 이혼해. 내가 다 이해할 테니까 이혼하고 나한테 와. 절대 탓하지 않을게.”“단지 은혜를 갚기 위해서 그 여자랑 결혼한 거잖아. 목숨을 구해줬으니 그럴 수도 있어. 오빠는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아. 오빠가 사랑하는 사람은 여전히 나잖아.”“그냥 이혼하고 위자료 주면 되잖아. 아이는 내가 키울게. 나는 안 낳아도 돼. 정말 내 자식처럼 키울 자신 있으니까 믿어줘.”“내가 이렇게 빌게. 제발 이혼해. 은혜에 눈이 멀어서는 안 되잖아. 오빠는 사랑이 아니라 고마운 감정 때문에 결혼했다니까? 오빠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야.”한재민의 잘생긴 얼굴에는 짜증이 드러났고 나은별을 밀어내더니 싸늘하게 말했다.“미안해. 그건 안 될 것 같아. 누굴 사랑하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아. 이혼 안할거야.”나은별은 오열했다.“아니야. 그게 아니잖아. 그럼 나는? 나는 어떡하라고.”한재민이 말했다.“과거에 머무른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차라리 나를 원망하고 미워해. 내가 잘못한 부분은 반드시 보상할게.”나은별의 머릿속에 수천 가지의 사악한 생각이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