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후가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이들은 금방 크니깐 명품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네가 직접 골랐다는 거야. 엄마의 사랑이야말로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거니까.”“내가 보니까 옷들 다 품질 좋고 디자인도 예쁘던데? 당신 안목이 틀릴 리 없지.”온다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말은 참 예쁘게도 한다니까.”그녀는 알지 못했다. 비록 마트는 완전히 통제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오기 전에 마트는 모든 안전 검사를 마쳤고, 진열된 상품들도 전부 점검을 마쳤으며, 생활용품과 유아용품 코너의 제품들은 전부 최고급 브랜드의 상품으로 교체되었다는 것을.온다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강후 씨, 미리 말해두지만, 아이들은 무조건 제 곁에서 키울 거예요. 우리 아이들을 우림이를 훈련하듯이 키우는 건 절대 용납 못 해요.”유강후는 아무렇지 않은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알겠어.”하지만 훗날 강씨 가문의 후계자가 될 텐데 훈련을 시키지 않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아들이라면 우림이 못지않은 강도 높은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이 말은 지금 해서는 안 된다. 괜히 말을 꺼냈다간 온다연이 출산할 때까지 그와 끝없는 싸움을 벌일 게 뻔하니까.온다연은 단호하게 말했다.“강후 씨는 어릴 때 어머니 곁에서 크지 못해서 지금 어머니와의 관계가 그렇게 서먹한 거잖아요. 우리 아이들은 그렇게 키울 수 없어요. 무조건 사랑이 가득한 환경에서 자라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커서 강후 씨처럼 성격이 까칠해질 게 뻔해요!”유강후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내 성격이 까칠하다고?”온다연이 코웃음을 쳤다.“아닌가요?”유강후는 그녀가 볼이 잔뜩 부풀어 오른 채 화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귀여워서 다시 한번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그래, 나 성격 까칠해. 고칠게.”온다연이 보상이라도 하듯 그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잘못을 인정하고 고칠 줄 아는 사람은 무조건 좋은 아빠가 될 수 있
온다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둘 사이 정말로 아무런 가능성도 없는 거예요?”지예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의 눈에는 냉담한 기색이 가득했다.“현수 씨 어머니가 저희 어머니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저희 둘 사이에는 그 어떤 가능성도 사라졌어요. 그는 단지 저에게 복수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제가 비참할수록 그는 더 기쁘겠죠.”“이 몇 년 동안, 그는 제 모든 디자인 도면을 자신의 소꿉친구에게 넘겨줬고 그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주얼리 디자이너가 되었어요. 하지만 저는 여전히 지씨 가문의 가정부일 뿐이에요. 그는 제 영광과 미래를 모조리 빼앗아 갔어요. 7년 동안이면 목숨 하나에 대한 대가로 충분하지 않나요.”이 말을 하는 동안 그녀의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마치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온다연은 그녀의 테이블 아래에 숨겨져 있는 두 손이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게 보였다.“지난달, 현수 씨가 제가 동생이랑 다시 연락을 주고받는 걸 알게 된 후부터 다시 저를 감금하기 시작했어요. 어디를 가든 저를 무조건 데리고 다니면서 제가 어디로 도망칠까 봐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더라고요. 제가 없으면 장난감도, 화풀이할 대상도 없어지니까요. 그래서 오늘도 절 데리고 나온 거예요. 저는 한 달 동안 그 방을 벗어난 적이 없었어요.”온다연의 표정이 심하게 찡그러졌다.“아직도 쇠사슬로 예솔 씨를 묶어놔요?”그녀는 지예솔의 몸에 남아 있던 끔찍한 상처들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지예솔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 아이가 죽은 후로는 더 이상 쇠사슬을 쓰지 않았어요. 조금이나마 자유를 얻은 게 제 아이의 목숨과 맞바꾼 거라니, 믿기지 않네요.”그녀는 말을 마치고 일어나 창밖을 살폈다.밖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지예솔은 갑자기 온다연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다연씨, 저 좀 도와주세요. 저 경원시를 떠나고 싶고 봉현수 씨 곁에서도 떠나고 싶어요. 다연씨라면 절 도와주
온다연은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이틀만 시간을 줘요. 그동안 예솔 씨는 일단 계속해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모든 일을 그의 뜻에 따르면서 경계를 풀게 만들어요. 저는 예솔 씨가 여기서 나갈 방법을 다시 생각해 볼게요.”그때 봉현수의 부하가 들어왔다.“예솔 씨, 약 먹을 시간입니다.”그는 미리 준비한 약을 지예솔 앞에 내밀었다.지예솔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말했다.“먹을 테니까 먼저 나가주세요. 친구와 잠시 이야기하고 싶어요.”그 사람이 대꾸했다.“주인님께서 예솔 씨가 약 드시는 걸 직접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 버린다고 하더라고요.”온다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나가세요. 제가 예솔 씨 약 먹는 걸 볼 테니. 여기서 저희 두 사람 방해하지 마세요.”온다연이 나서자 그는 마지못해 문가로 물러났다.“예솔 씨, 모두 다 예솔 씨 좋아지라고 준비해 둔 약이에요. 버리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주인님께서 화를 내실 겁니다.”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집사가 다가와 다실의 문을 닫았다.지예솔은 약을 혐오스럽다는 듯 쳐다보고는 전부 쓰레기통에 던졌다.온다연이 물었다.“무슨 약이에요?”지예솔의 표정이 싸늘해졌다.“우울증 치료제와 수면제예요. 3년째 먹고 있어요. 이제는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아요.”온다연이 말했다.“그래도 약은 먹어야죠. 아프면 치료도 하고. 예솔 씨에겐 동생도 있잖아요. 쉽게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죠.”지예솔은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다연이 다시 물었다.“여길 나가면 무슨 계획이에요?”지예솔은 담담하게 말했다.“다 생각해 놓았어요. 일단 이곳을 벗어나기만 하면 다른 사람의 주민등록증을 빌려서 온라인에서 일감을 받을 거예요. 제 디자인 스타일이면 먹고사는 건 문제없을 거예요.”온다연이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계획이 있다니 참 다행이네요. 저는 예솔 씨가 여길 벗어나는 것 까지만 도와줄 수 있지, 그 뒤에 일은 예솔 씨가 알아서 해야
사실 눈치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알 것이다. 지예솔과 그 남자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을. 하지만 봉현수는 그 일을 철석같이 믿었고, 그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지예솔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했고 여러 가지 감정이 겹치면서 그가 지예솔한테의 태도는 점점 더 무서워졌다.유강후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그들의 일에 우리가 끼어드는 건 좋지 않아. 두 사람이 모두 마음을 열고 과거를 내려놓지 않는 한, 이 일은 쉽게 끝나지 않을 거야.”온다연은 차갑게 말했다.“아무리 큰 원한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예솔 씨를 괴롭히는 건 옳지 않아요. 그러다가 예솔 씨 잘못되기라고 하면 어쩔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예솔 씨를 도와주고 싶은 거야? 다연아, 제발 이 일에 끼어들지 마. 현수 씨가 그녀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너무 복잡해서 우리가 끼어들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온다연은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말했다.“도와주려는 건 아니고 그냥 물어본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역시 우리 다연이가 제일 말 잘 듣지. 정말 예솔 씨가 좋다면 둘이서 약속이라도 자주 잡아서 얘기를 나누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내 체면을 봐서라도 현수 씨가 거절하진 않을 거야.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이야.”온다연은 인츰 말을 돌리었다.“맞다, 로운 씨는 어디 있어요? 진 씨 가문 쪽에 일이 좀 있어 그러는데 그에게 맡기려고요.”유강후가 대답했다.“무슨 일이든 나한테 말하면 돼.”온다연은 입을 삐쭉 내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결할 거예요. 무능한 건 싫거든요?”유강후는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알겠어, 알겠어. 화내지 마. 로운이더러 당신한테 연락하라고 할 테니까, 무슨 일이든 편하게 지시하면 돼.”봉현수는 차에 오르자마자 지예솔의 손목을 거칠게 붙잡았다. 그의 얼굴은 심하게 굳어 있었다.“내가 너한테 덜어준 반찬, 왜 안 먹었어?”지예솔은 조용히
소년의 사랑은 뜨겁고도 아름다웠다.그들의 눈에는 오직 서로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너무나도 어렸기에 감히 공개하지 못했다. 공개하는 순간, 신분 차이가 극명한 그들의 사랑은 절대로 부모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그러나 그들은 서로에게 지나치게 탐닉했고 상대의 숨결마저도 헤어 나올 수 없을 만큼 깊이 빠져들었다.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구석에서, 어두운 작은 방에서, 깊은 밤 적막한 후원에서, 그들은 주저하면서도 격정적으로 입을 맞추고 서로를 껴안았다.하지만 그 일이 있고 난 후,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졌다.그녀가 그에게 다가간 것은 목적이 있어서였다.그녀가 원했던 것은 오직 그의 신분과 봉씨 가문의 젊은 안주인으로서 누릴 영광과 부귀. 더 치욕적인 것은, 그녀가 감히 그를 배신하고 다른 남자와 몸을 섞었다는 것!그녀가 다른 남자와 한 침대에 누워 있던 모습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일은 꿈속에서조차 목을 조이는 밧줄이 되어 그를 숨 막히게 했고 죽을 만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그가 불행하다면, 그녀 또한 벌을 받아야 했다. 그녀를 지옥 끝까지 끌고 가야만 했다.그런데 지금 그녀가 다시 예전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그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망할. 대체 또 무슨 속임수를 쓰려는 거지?’봉현수는 몸이 몇초간 굳어있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닥쳐. 네가 그렇게 부를 자격이나 있어? 다시 한번만 더 지껄여봐. 내가 가만두나 봐.”지예솔은 창백한 얼굴로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저 좀 놔주세요. 저 이러다 정말 죽을 것 같아서 그래요.”“요즘 계속 옛날 꿈을 꿔요. 그때의 우린 참 좋았죠. 하지만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네요.”봉현수는 그녀의 목을 움켜쥐고 붉게 충혈된 눈으로 노려보았다.“네가 감히 ‘옛날’이라는 말을 입에 올려? 지예솔, 또 도망칠 속셈이냐? 다시 가두어 놓아야 정신 차리겠어?”지예솔은 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눈에는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그런데 예상치 못한 것은 오늘 지예솔이 직접 봉현수에게 그 사건의 진실을 말해줬다.그는 믿을 수 없었고, 믿어서도 안 됐었다.“지예솔,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야? 이렇게까지 빨리 내 곁에서 도망치고 싶어?잘 들어, 내가 죽기 전까지 넌 절대 봉씨 가문을 떠날 수 없어!”“하지만 내가 죽는다면 너도 나와 함께 죽어야 해. 내가 죽기 전에 반드시 널 내 손으로 먼저 죽일 거니까!”지예솔은 그의 손을 꼭 잡았다.그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살며시 걸었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현수야, 나 이젠 너무 지쳤어. 계속 이 상태로 있다간 나 미쳐버릴 것 같아. 네가 믿든 말든 상관없어. 난 절대 거짓말하지 않았다는 거 너한테 증명해 보일 거야. 내 마음속엔 언제나 너 하나밖에 없었어.”봉현수의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이 작은 행동은 예전에 두 사람이 행복했던 시절, 그녀가 자주 하던 행동이었다. 그가 화가 났을 때, 그녀는 언제나 이렇게 새끼손가락을 걸며 그를 달래곤 했다. 그렇게 그는 금세 마음이 풀어졌다.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많은 일들이 벌어짐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이 작은 행동 하나에 또다시 마음이 약해질 줄이야.그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네 말이 사실이라고 쳐. 그런데 넌 왜 자꾸 내 곁에서 도망치려고만 하는 거야?”지예솔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우리 아이를 죽였으니까. 그때 난 널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어.”그 아이를 떠올리는 순간, 봉현수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졌다.그때 그는 생각했었다. 아이가 생겼으니 두 사람의 관계가 조금은 나아지겠지. 하지만 지예솔은 그 아이를 원하지 않았고, 몰래 병원에 가서 낙태를 시도했다.화를 참지 못한 그는 그녀와 격렬하게 다퉜고, 그 과정에서 지예솔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렇게 그 아이는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그날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더욱 악화되었다.그녀에게 벌을 주기 위해 그는 그녀가 소
차 안에서는 다시 한번 정적이 흘렀다.두 사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일로 인해 서로에게 남긴 상처는 몇 마디 사과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오해가 있었다는 걸 안다 해도 마음속에 생긴 상처는 너무 깊었다. 설사 그 오해가 풀린다고 해도 두 사람의 관계가 크게 나아질 것 같지는 않았다.특히 지예솔은 마치 저승사자가 목을 조르는 듯한 절망감에 휩싸여 있었다.그녀는 지쳤다. 모든 것이 버거웠다. 이제는 다 내려놓고 싶었다.어차피 오래 살지도 못할 거 그냥 조용한 곳을 찾아 아무도 모르게 이 세상을 떠나고 싶었다.이번이 그녀가 스스로를 위해 쟁취하는 마지막 기회였다. 만약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남은 힘을 다해 동생 지현우를 이곳에서 떠나게 할 것이다. 설령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해도 그것만은 반드시 해낼 작정이었다.지예솔은 운이 좋으면 동생과 함께 떠날 것이고, 운이 나쁘다면 봉씨 가문과는 무관한 곳에서 깨끗이 사라질 것이다.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조용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봉현수의 새끼손가락을 살며시 걸었다.“이제 서로를 그만 괴롭히자, 응?”봉현수의 눈이 붉어졌다. 순간 목이 꽉 막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랜 침묵 끝에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제 나를 미워하지 않는 거야? 예전엔 그토록 내가 죽길 바랐잖아.”지예솔은 고개를 저었다.“이제 지쳤어. 미워하는 것도 힘들어. 현수야 우리 그냥 며칠 만이라도 조용히 지내면 안 될까?”봉현수의 몸은 한참이나 굳어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지예솔에게 물었다.“예솔아, 내가 너한테 얼마나 많이 속았는데. 이제는 네가 하는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구분조차 안가.”지예솔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나는 한 번도 널 속인 적 없어. 날 믿지 않는 건 항상 너였어.”봉현수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말을 의심했다. 그녀에게 당한 게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난 못 믿어. 예솔아, 나한테 맹세해. 네가 정말 이번만큼은 도망치려는 수작이 아니라 진심으로 나와 잘 지내고 싶다
그러자 갑자기 서른쯤 되어 보이는 한 남자가 그들을 불러세웠다.“혹시 봉현수랑 지예솔?”그들이 대답하기도 전에 남자는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맞네! 나 아직도 너희들 기억하고 있어. 너희 그때 ‘경원시 10대 캠퍼스 커플’ 1위를 차지했잖아. 당시 학교 온라인 커뮤니티에 너희들 사진과 게시글이 엄청 많았어.”“나중에 두 사람이 헤어졌다고 들었을 때 모두 안타까워했어. 그런데 그 소문이 거짓이었네! 아직도 함께 있다니!”“혹시 결혼은 했어? 아이는 몇 살이야?”두 사람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다.그때 봉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드물게 부드러운 어조였다.“우리 결혼했어. 아이는...”봉현수는 남자 옆에 서 있는 아이를 흘깃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대략 네 살 정도?”남자도 웃으며 말했다.“정말 뜻밖이야. 여기서 옛 동창을 만나다니. 그런데 나는 너희랑 같은 반이 아니어서 날 모를 수도 있겠다. 너희들 수업도 자주 안 나와서 같은 반 친구들도 잘 모르겠지?”봉현수는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우리 여기를 좀 돌아보려고. 혹시 우리랑 같이 갈래?”남자는 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아니야, 나 애 데리고 도서관에 가려고. 두 사람 즐거운 시간 보내! 그리고 행복하길 바란다!”말을 마친 남자는 아이를 안고 후문 쪽으로 향해 걸어갔다.봉현수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분식점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너 저 가게에 있는 만둣국 엄청나게 좋아했었잖아. 다시 한번 먹고 갈래?”지예솔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이것은 그녀가 오랜만에 하는 외출하는 것이었고 화양대에 온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이곳을 떠나기 전 예전에 가고 싶었던 곳을 한 번씩 들러보는 것도 그녀의 계획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실현될 줄은 몰랐다.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주인은 그들을 알아보았다.“어? 너희들!”지예솔이 웃으며 말했다.“저희를 기억하시네요.”주인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그야 당연하
집에 도착한 후, 유강후는 바로 서재로 들어가 이권에게 전화를 걸었다.“10분 전 화양대 정문 앞의 감시 카메라 영상을 확인해 봐. 검은색 페라리 한 대가 있었는데, 이 차의 소유주와 그 사람의 모든 배경을 조사해.”“그 사람이 누구든 상관없어. 문제를 하나 만들어서라도 몇 년간 감옥에 보내. 제대로 된 교훈을 줘야 해!”“그리고 내가 사는 곳 109번지 가족의 모든 정보를 조사해. 가능한 자세하게 말이야.”“화양대 관리층과 협의해서 정문에 지하 통로를 만들 수 있는지 확인해 봐. 엘리베이터까지 포함된 형태로. 비용은 전부 미래 그룹에서 부담할 거야.”전화를 끊고 거실로 나오자, 창가 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온다연과 장화연이 따뜻한 버블티를 손에 들고 창밖의 눈을 감상하고 있었다.두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지 온다연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고 장화연도 간만에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유강후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뭐가 그렇게 즐거워?”장화연은 유강후가 자기 쪽으로 오는 것을 보자 버블티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내일 아침 식사에 필요한 재료를 준비하러 가볼게요.”유강후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장 집사는 나만 보면 피한다니깐.”온다연이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강후 씨는 제발 그 험악한 얼굴부터 좀 풀어봐요. 나 장 집사님한테 아이 좀 맡기려고 했는데 당신이 괜히 화나게 하다가 나도 상대 안 해주면 어쩌냐고요.”유강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침실로 향했다.“자, 이제 자야지!”온다연은 경원시에 돌아온 후부터 한층 여유롭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이곳은 그녀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었다. 물론 좋지 않은 기억도 있었지만 어쨌든 경원시 토박이인 그녀에게 이곳의 음식과 기후는 익숙하고 편안했다.그녀는 돌아온 지 겨우 닷새 남짓이었지만 눈에 띄게 살이 올랐다.작고 정교한 얼굴이 조금은 통통해졌고 체중도 46.5kg에서 48.5kg으로 증가했다.아침에 체중계에 올라선 그
온다연이 물었다.“여기 근처에 사세요?”아기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바로 앞 골목 109호에 살고 있어요.”온다연은 놀라며 말했다.“저희는 106호에 살아요.”그녀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기뻐했다.“저도 쌍둥이를 임신했어요. 나중에 아이들이 태어나면 그쪽 아이들하고 같이 놀 수 있을까요?”온다연은 속으로 너무 기뻐했다.‘너무 잘됐다. 아이와 같은 또래 친구가 없을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바로 두 명이나 눈앞에 나타나다니! 게다가 똑같이 쌍둥이 남매라니!’아기 엄마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좋아요. 저도 아이들이 함께 놀 친구가 없을까 봐 걱정이었어요. 그런데 106호가...”그곳은 꽤 유명한 사람의 집으로 알고 있었다. 그 사합원 앞에는 특수한 번호판을 단 차량과 보기 힘든 고급 차들이 자주 주차되어 있었다.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남편을 바라보았다.그 남자는 예의가 바르고 누가 봐도 지식인인 얼굴상이었다. 그 남자는 유강후를 관찰하고 있었다.아기 엄마는 그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기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여보, 저분들이 106호에 산대요.”남자는 고개를 돌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106호 사람들이라도 우리랑 다를 건 없지. 게다가 우리도 부족한 건 없어. 아이들에게 같은 또래 친구가 있는 건 좋은 일이야. 연락처 하나 정도 주고받는 건 어때? 앞으로 육아에 대해 같이 이야기 나눌 수도 있고.”아기 엄마는 그제야 안심했고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온다연이 먼저 가로챘다.“연락처 추가해도 될까요? 저도 곧 출산을 앞두고 있어서 육아 관련해서 궁금한 게 있으면 여쭤보고 싶어요.”두 사람은 서로 카카오톡 아이디를 교환했다.마침 신호등이 바뀌었다.길을 건너려는 순간, 갑자기 한 스포츠카가 신호를 무시하고 돌진해 왔다. 눈이 녹아 도로에는 진흙으로 가득했다.속도가 너무 빠른 나머지 타이어에 묻은 진흙이 그들의 옷에 튀었다.그러나 더 위험했던 건 스프츠카가 하마터면 유모차를 칠 뻔했다. 다행히 유강후가 손이
유강후의 얼굴이 그제야 조금 풀렸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그나마 낫군. 그래도 나는 남들이 우리를 찍는 게 싫어.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음에 또 찍으면, 흥!”온다연이 그의 볼을 꼬집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쫀쫀하기는!”그때 멀리서 또 탄성이 들려왔다.“와! 그녀가 유강후의 볼을 꼬집었어! 냉혹한 대표가 아내한테 이렇게 다정할 줄이야!”“너무 설렌다! 나 이제부터 이 커플 팬이야!”“나도 가입할래! 너무 사랑스럽잖아. 혹시 그들 SNS 계정 없을까? 저들 부부의 일상을 자주 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유강후 대표가 그렇게나 냉혹한 사람이라더니, 알고 보니 사랑꾼이었네! 미쳤다, 진짜!”“헉, 빨리 봐! 학교 게시판 완전 난리 났어! 전설의 CC 커플이 모교를 방문하러 왔대. 그리고 후문 주차장에서 키스했다는데!”“세상에! 저 여자 누구야? 너무 예뻐!”“지예솔 선배님이잖아. 그녀가 다니던 해부터 계속해서 학교 여신 랭킹 1위를 차지했잖아. 10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그녀의 자리를 넘보지 못했어. 심지어 온다연 선배도 2, 3위에서만 맴돌았지, 한 번도 1위를 못 했어.”“뭐래? 나는 다연 선배가 더 예쁘다고 생각하는데. 얼굴이 마치 AI로 만든 것처럼 완벽해!”“맞아, 나도 다연 선배가 더 예쁘다고 생각해. 이 순위 다시 정해야 하는 거 아니야?”“지예솔 선배는 완전 표준적인 여신이고, 온다연 선배는 보는 사람 마음을 더 설레게 하는 여신이잖아. 난 온다연 선배 쪽이 더 좋아. 게다가 남편이 누구야? 바로 유강후 대표잖아! 그는 앞으로 내 사장님이 될 거라고!”“웃기지 마. 너 미래그룹 인턴 자격도 못 받았잖아!”“그건 몰라! 나는 저 커플 팬이니까 가능성 있어!”“어? 그들이 우리 쪽을 쳐다보는 것 같은데?”“와, 유강후 대표 완전 잘생겼다! 온다연 선배도 너무 아름다워! 둘이 정말 천생연분이야! 빨리 찍어!”이번에는 유강후의 표정이 그다지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온다연을 안고 뒤로 돌아섰다.온다연은 유강후에게
“나 학교 게시판에 가서 한번 봐야겠어!”“와, 진짜네! 세상에, 전설적인 인물들이 오늘 몇 명이나 나타난 거야? 나 오늘 운 진짜 미쳤는데!”“저 옆에 남자는 지예솔의 남자친구 봉현수야. 그때 당시 경원시에서 아주 유명한 CC 커플이었어.”온다연은 따뜻한 보리 향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다. 한 잔은 그녀가 마시고, 다른 한 잔은 유강후에게 건네주며 손을 따뜻하게 하라고 했다.두 사람은 몸을 돌려 후문 쪽으로 가려던 순간 온다연이 갑자기 멈춰 섰다.“강후 씨, 저기 봐요. 저 두 사람, 봉현수 씨랑 지예솔 씨 맞죠?”유강후는 유심히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맞아.”“근데 그들이 여기는 왜 온 거죠?”유강후는 대답했다.“현수 씨와 예솔 씨가 여기서 1년 동안 학교를 다녔어. 그러니까 동창인 셈이지.”온다연이 물었다.“가서 인사라도 해야 할까요?”그러자 유강후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는 후문이 아닌 다른 문 쪽으로 걸어갔다.“그럴 필요 없어. 아마 그들도 방금 우리를 봤을 거야. 게다가 난 그들이 우리를 방해하는 게 싫어.”그의 걸음은 너무 빨라서 온다연은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좀 천천히 가요. 배가 너무 무거워서 걷기가 힘들어요.”그녀는 자신의 몸에 걸쳐있는 커다란 패딩을 잡아당기며 투덜거렸다.“이 옷 너무 크고 못생겼어요. 내가 꼭 입어야 한다고 우기더니, 나 지금 완전 펭귄 같잖아요.”유강후는 그녀를 끌어안고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더니 모자까지 덮어씌웠다.“이렇게 추운 날씨에 나왔으면 당연히 두껍게 입어야지. 감기라도 걸리면 우리 아기는 어떡해?”그때 주변에서 연신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온다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저 사람들 우리 얘기하는 것 같은데요? 이상하네. 그냥 밀크티 사러 나왔을 뿐인데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죠. 게다가 계속 우리를 쳐다보면서 사진을 찍는 거 있죠?”그러던 와중 옆에 서는 또 탄성이 들려왔다.“와, 그녀가 이쪽을 봤어!”“진짜 귀엽다. 얼굴이 완전
음식점에서 나오자마자 입구에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것이 보였다. 버블티 가게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이 음식점 입구까지 이어져 있었다.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너도 구경하러 온 거야? 나도야! 누가 미래그룹 대표 유강후가 여기서 아내한테 버블티를 사주려고 줄 서 있는 걸 봤대. 학교 게시판에서 완전 난리 났어!”“진짜야! 봐봐, 저기 앞에 세번째에 있는 사람! 곧 유강후 차례가 올 거야!”“키가 엄청 크네. 아쉽게도 등을 돌리고 있어서 얼굴은 안 보여.”“와! 혹시 그 옆에 검은색 롱패딩 입은 사람, 저 사람이 부인이야?”“맞아. 내가 듣기론 우리 학교 학생이었다가 몇 년 전에 휴학했다고 하더라. 그런데 오늘 여기서 다시 보게 된다니! 화양대 역사상 10대 여신 중 한 명이라고 하던데, 진짜 예쁘다. 그냥 학교 한 바퀴 돌았을 뿐인데도 난리 난 거 봐!”“저 사람 유강후 옆에 서 있으니까 엄청 작아 보여! 키가 겨우 그의 턱선 정도밖에 안 닿네. 근데 진짜 잘 어울린다. 보기만 해도 달달해.”“헐, 빨리 봐봐! 그녀가 그의 손가락을 살짝 건드렸다고 유강후가 바로 꽉 잡는 거 있지! 신이시여... 저 또다시 사랑을 믿고 싶어졌어요. 안 돼, 안 돼! 연애 바보로 변하지 않으려면 오늘 밤 아내 살해 사건 다큐를 두 편은 봐야겠어!”“잠깐, 나 방금 저 여자가 몸을 살짝 돌리는 걸 봤는데 배가 좀 나온 것 같더라. 임신한 것 같아! 근데 패딩이 너무 커서 확실하진 않아.”“뭔 상관이야. 우리는 그냥 이 커플 덕질만 하면 돼! 너 그거 들었어? 작년에 미래그룹에 입사 지원한 사람이 유강후와 그의 부인 팬이라고 하면서, 몇 년 전 두 사람이 같이 버블티 사는 걸 몰래 찍은 사진을 보여줬대.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채용됐대!”“헐, 나도 사진 좀 많이 찍어둬야겠어. 혹시 몰라? 나한테 그런 행운이 올지?”“아 맞다. 유강후가 이 근처에 사합원 몇 채를 샀대. 아내가 학교 다니기 편하라고.”“몇 채나? 거짓말 아냐? 여기가 어디인데? 사합원
그러자 갑자기 서른쯤 되어 보이는 한 남자가 그들을 불러세웠다.“혹시 봉현수랑 지예솔?”그들이 대답하기도 전에 남자는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맞네! 나 아직도 너희들 기억하고 있어. 너희 그때 ‘경원시 10대 캠퍼스 커플’ 1위를 차지했잖아. 당시 학교 온라인 커뮤니티에 너희들 사진과 게시글이 엄청 많았어.”“나중에 두 사람이 헤어졌다고 들었을 때 모두 안타까워했어. 그런데 그 소문이 거짓이었네! 아직도 함께 있다니!”“혹시 결혼은 했어? 아이는 몇 살이야?”두 사람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다.그때 봉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드물게 부드러운 어조였다.“우리 결혼했어. 아이는...”봉현수는 남자 옆에 서 있는 아이를 흘깃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대략 네 살 정도?”남자도 웃으며 말했다.“정말 뜻밖이야. 여기서 옛 동창을 만나다니. 그런데 나는 너희랑 같은 반이 아니어서 날 모를 수도 있겠다. 너희들 수업도 자주 안 나와서 같은 반 친구들도 잘 모르겠지?”봉현수는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우리 여기를 좀 돌아보려고. 혹시 우리랑 같이 갈래?”남자는 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아니야, 나 애 데리고 도서관에 가려고. 두 사람 즐거운 시간 보내! 그리고 행복하길 바란다!”말을 마친 남자는 아이를 안고 후문 쪽으로 향해 걸어갔다.봉현수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분식점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너 저 가게에 있는 만둣국 엄청나게 좋아했었잖아. 다시 한번 먹고 갈래?”지예솔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이것은 그녀가 오랜만에 하는 외출하는 것이었고 화양대에 온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이곳을 떠나기 전 예전에 가고 싶었던 곳을 한 번씩 들러보는 것도 그녀의 계획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실현될 줄은 몰랐다.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주인은 그들을 알아보았다.“어? 너희들!”지예솔이 웃으며 말했다.“저희를 기억하시네요.”주인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그야 당연하
차 안에서는 다시 한번 정적이 흘렀다.두 사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일로 인해 서로에게 남긴 상처는 몇 마디 사과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오해가 있었다는 걸 안다 해도 마음속에 생긴 상처는 너무 깊었다. 설사 그 오해가 풀린다고 해도 두 사람의 관계가 크게 나아질 것 같지는 않았다.특히 지예솔은 마치 저승사자가 목을 조르는 듯한 절망감에 휩싸여 있었다.그녀는 지쳤다. 모든 것이 버거웠다. 이제는 다 내려놓고 싶었다.어차피 오래 살지도 못할 거 그냥 조용한 곳을 찾아 아무도 모르게 이 세상을 떠나고 싶었다.이번이 그녀가 스스로를 위해 쟁취하는 마지막 기회였다. 만약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남은 힘을 다해 동생 지현우를 이곳에서 떠나게 할 것이다. 설령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해도 그것만은 반드시 해낼 작정이었다.지예솔은 운이 좋으면 동생과 함께 떠날 것이고, 운이 나쁘다면 봉씨 가문과는 무관한 곳에서 깨끗이 사라질 것이다.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조용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봉현수의 새끼손가락을 살며시 걸었다.“이제 서로를 그만 괴롭히자, 응?”봉현수의 눈이 붉어졌다. 순간 목이 꽉 막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랜 침묵 끝에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제 나를 미워하지 않는 거야? 예전엔 그토록 내가 죽길 바랐잖아.”지예솔은 고개를 저었다.“이제 지쳤어. 미워하는 것도 힘들어. 현수야 우리 그냥 며칠 만이라도 조용히 지내면 안 될까?”봉현수의 몸은 한참이나 굳어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지예솔에게 물었다.“예솔아, 내가 너한테 얼마나 많이 속았는데. 이제는 네가 하는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구분조차 안가.”지예솔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나는 한 번도 널 속인 적 없어. 날 믿지 않는 건 항상 너였어.”봉현수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말을 의심했다. 그녀에게 당한 게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난 못 믿어. 예솔아, 나한테 맹세해. 네가 정말 이번만큼은 도망치려는 수작이 아니라 진심으로 나와 잘 지내고 싶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것은 오늘 지예솔이 직접 봉현수에게 그 사건의 진실을 말해줬다.그는 믿을 수 없었고, 믿어서도 안 됐었다.“지예솔,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야? 이렇게까지 빨리 내 곁에서 도망치고 싶어?잘 들어, 내가 죽기 전까지 넌 절대 봉씨 가문을 떠날 수 없어!”“하지만 내가 죽는다면 너도 나와 함께 죽어야 해. 내가 죽기 전에 반드시 널 내 손으로 먼저 죽일 거니까!”지예솔은 그의 손을 꼭 잡았다.그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살며시 걸었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현수야, 나 이젠 너무 지쳤어. 계속 이 상태로 있다간 나 미쳐버릴 것 같아. 네가 믿든 말든 상관없어. 난 절대 거짓말하지 않았다는 거 너한테 증명해 보일 거야. 내 마음속엔 언제나 너 하나밖에 없었어.”봉현수의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이 작은 행동은 예전에 두 사람이 행복했던 시절, 그녀가 자주 하던 행동이었다. 그가 화가 났을 때, 그녀는 언제나 이렇게 새끼손가락을 걸며 그를 달래곤 했다. 그렇게 그는 금세 마음이 풀어졌다.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많은 일들이 벌어짐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이 작은 행동 하나에 또다시 마음이 약해질 줄이야.그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네 말이 사실이라고 쳐. 그런데 넌 왜 자꾸 내 곁에서 도망치려고만 하는 거야?”지예솔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우리 아이를 죽였으니까. 그때 난 널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어.”그 아이를 떠올리는 순간, 봉현수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졌다.그때 그는 생각했었다. 아이가 생겼으니 두 사람의 관계가 조금은 나아지겠지. 하지만 지예솔은 그 아이를 원하지 않았고, 몰래 병원에 가서 낙태를 시도했다.화를 참지 못한 그는 그녀와 격렬하게 다퉜고, 그 과정에서 지예솔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렇게 그 아이는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그날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더욱 악화되었다.그녀에게 벌을 주기 위해 그는 그녀가 소
소년의 사랑은 뜨겁고도 아름다웠다.그들의 눈에는 오직 서로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너무나도 어렸기에 감히 공개하지 못했다. 공개하는 순간, 신분 차이가 극명한 그들의 사랑은 절대로 부모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그러나 그들은 서로에게 지나치게 탐닉했고 상대의 숨결마저도 헤어 나올 수 없을 만큼 깊이 빠져들었다.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구석에서, 어두운 작은 방에서, 깊은 밤 적막한 후원에서, 그들은 주저하면서도 격정적으로 입을 맞추고 서로를 껴안았다.하지만 그 일이 있고 난 후,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졌다.그녀가 그에게 다가간 것은 목적이 있어서였다.그녀가 원했던 것은 오직 그의 신분과 봉씨 가문의 젊은 안주인으로서 누릴 영광과 부귀. 더 치욕적인 것은, 그녀가 감히 그를 배신하고 다른 남자와 몸을 섞었다는 것!그녀가 다른 남자와 한 침대에 누워 있던 모습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일은 꿈속에서조차 목을 조이는 밧줄이 되어 그를 숨 막히게 했고 죽을 만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그가 불행하다면, 그녀 또한 벌을 받아야 했다. 그녀를 지옥 끝까지 끌고 가야만 했다.그런데 지금 그녀가 다시 예전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그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망할. 대체 또 무슨 속임수를 쓰려는 거지?’봉현수는 몸이 몇초간 굳어있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닥쳐. 네가 그렇게 부를 자격이나 있어? 다시 한번만 더 지껄여봐. 내가 가만두나 봐.”지예솔은 창백한 얼굴로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저 좀 놔주세요. 저 이러다 정말 죽을 것 같아서 그래요.”“요즘 계속 옛날 꿈을 꿔요. 그때의 우린 참 좋았죠. 하지만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네요.”봉현수는 그녀의 목을 움켜쥐고 붉게 충혈된 눈으로 노려보았다.“네가 감히 ‘옛날’이라는 말을 입에 올려? 지예솔, 또 도망칠 속셈이냐? 다시 가두어 놓아야 정신 차리겠어?”지예솔은 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눈에는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