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사건은 그녀가 범인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없다. 윤씨 가문에서 압력을 가했지만, 환아 그룹 또한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존재다. 김서진이 빠르게 보석 수속을 밟고 그녀를 경찰서에서 데리고 나왔다.집으로 가는 내내 김서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낯빛이 어두웠다.‘화가 많이 났구나.’한소은은 단번에 그가 화났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것도 화가 많이 나 보였다. 차라리 말로 화가 났다는 걸 표현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침묵만 하니 후폭풍이 얼마나 클지 내심 걱정되었다.한소은이 그의 손을 살짝 잡으며 말했다.“전 괜찮아요.”김서진은 그녀를 한번 바라보고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저 진짜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잖아요? 그저 조사 차원에서 불려 온 것뿐이에요. 경찰 쪽에는 확실한 증거도 없었고 모두 추측성의 질문들이었어요.”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확실히 판을 크게 짠 거 같아 보였어요. 아쉬운 게 있다면 진작에 저와 윤소겸이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어야 했어요. 그래야 윤소겸과 접촉했었다는 증거를 확보할 텐데.”한소은이 장난스런 말투로 이 사건을 얼버무렸다. 사실 경찰서에 불려 가서도 딱히 긴장되지는 않았다. 법정까지 가려면 증거가 필요했다. 한 적도 없는 일에 증거가 있을 리가 없다.그녀가 걱정되는 건 따로 있었다. 이번 일로 경찰서로 불려 온 거 때문에 리사와 약속했던 향수 컨셉을 정하는데 차질이 생겼다.“지금 웃음이 나와요?”김서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를 한번 슥 보았다. 웃는 그녀의 모습은 그의 마음속에 있던 화를 절반쯤 가라앉혔다.김서진은 확실히 화가 많이 났었다. 자기 여자에게까지 손을 뻗은 그 사람들을 당장이라도 처리하고 싶었다.‘감히 내 여자에게 손대다니. 내가 쉬워 보인다는 거야?’“그 사람들이 이렇게 빈틈이 많은 판을 짰는데 당신은 안 웃긴가요?”그의 화가 잦아든 걸 느낀 한소은이 살포시 그에게 기대었다.“윤소겸이 실종되었다는데 그것도 그들이 한 짓인지 모르겠
한편 병원에서는 또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다시 병원에 찾아온 윤설아를 본 윤 부인은 하나도 놀란 기색이 없었다. 그녀가 한숨을 푹 쉬고는 입을 열었다.“설아야,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니?”“큰어머니, 그게 무슨 말이세요.”윤설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큰아버지, 지금 상태론 며칠 버티시지도 못할 거야. 며칠도 기다릴 수 없는 거니?”“제가 기다릴 수 없는 게 아니라 회사가 기다릴 수 없는 거예요. 지금 회사에 처리할 일이 산더미인데 아무런 명목도 없이 제가 손을 댈 수가 없어요.”그녀가 살짝 웃으며 이어서 말했다.“큰어머니와 큰아버지가 가지고 계시는 지분을 합치면 55퍼센트의 지분을 가지고 계세요. 이렇게 많은 지분을 가지고 계셔도 쓸모가 없을 테니 저에게 넘겨주시는 건 어때요? 제가 잘 이용해서 회사를 꼭 지켜 낼게요.”“회사 경영권뿐만 아니라 우리 손에 있는 지분까지 달라고? 설아야, 언제부터 이렇게 욕심이 많았니?”“큰어머니, 말씀이 너무 심하세요. 우린 한 가족이잖아요. 욕심이라뇨? 만약 설웅오빠가 살아있다면 당연히 제 몫은 없었겠죠! 하지만 지금 설웅오빠가 없잖아요. 큰어머니께서 그 많은 지분을 가지고 계셔봤자 쓸모가 없어요. 차라리 제게 주시면 큰어머니와 큰아버지의 노후는 책임져 드리죠!”지금 이 상황까지 온 이상 윤설아는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었다. 아무도 그녀의 발목을 잡을 수 없다. 그 누구도 그녀를 막을 수 없다! 윤씨 가문뿐만 아니라 정씨 가문, 심지어는 강성과 해성의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존재가 되고 싶어 했다.“너 정말......”아들 얘기가 나오자, 윤 부인이 숨이 막혀 가슴을 부여잡았다.원래도 몸이 안 좋았는데 그동안 윤백건을 간호하느라 윤 부인은 더욱 초췌해졌다. 윤설아가 지금 윤설웅이 잘못됐다는 얘기를 꺼내는 건 정말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가려는 것이다.“큰어머니, 진정하세요. 몸 생각하셔야죠.”이렇게 말하며 윤설아가 서류를 들고 그녀를 지나쳐 병실로 들어갔다.“큰아버지, 병문안......”
두 명의 대주주가 병실에서 버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윤설아는 강제적으로 화사 경영권을 달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다 소문이 나빠지게 되면 자기에게 이득 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평소에 조용조용하던 큰어머니가 이렇게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어쩌면 큰아버지가 이렇게 하라고 지시한 것일 수도.그녀는 병상에 누워있는 윤백건을 한번 슥 보았다. 겨우 목숨만 붙어 있는 듯한 사람이 이런 방법을 생각했을 리가 없다.“설아 아가씨, 오늘은 이만 가보세요. 변호사가 도착하면 우리가 공증인으로서 잘 진행하겠습니다.”정 이사가 입을 열었다.“우리를 못 믿는 건 아니겠지요?”이 이사도 뒤를 이어 말했다.“그럴 리가요. 두 분 모두 회사 원로신데 두 분을 못 믿으면 믿을 사람이 있겠어요? 그저 큰아버지가 지금 몸이 안 좋으셔서 정신이 들 때가 적다 보니 아무리 유서를 공증한다 해도 제정신인 상태에서 했다는 보장이......”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 이사가 말을 가로챘다.“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의사를 불러 자세히 검사한 후 진행할 예정입니다. 게다가 유서 공증은 만일을 대비해서 먼저 해두는 거지 확정된 게 아니에요. 회장님께서 쾌차하시면 그보다 기쁠 일이 없지요.”“그래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윤설아가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어설프게 웃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건 잘 알겠다.“그럼, 큰어머니 수고하세요!”그녀가 의미심장하게 말하자, 윤 부인이 차가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를 배웅하는 척도 하기 싫었다.병원을 떠나던 윤설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났다. 이제 곧 모든 게 손안에 들어올 줄 알았는데 이렇게 중요한 때에 문제가 생기다니. 오랫동안 회사 일에 관심도 없었던 이 두 영감탱이가 왜 하필이면 지금, 이 흙탕물을 밟으려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지금 와서 그 두 사람을 회유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회사에 사건들이 연달아 터짐에 따라 대중들의 시선도 대윤 그룹에 집중되었다. 이런 때에 문제가 생기는 건 절대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눈빛 하나에 사람을 홀릴 수 있는 요염한 모습이었다.엘리베이터가 멈추자, 손에 들었던 립스틱을 거두고 정하진이 묵고 있는 방으로 걸어갔다.초인종을 몇 번 더 누르고서야 방문이 열렸다. 금방 샤워를 했는지 가운을 걸치고 머리카락에 물방울이 맺힌 정하진이 문을 열었다.자욱한 습기가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검은 눈동자는 마치 먹이를 쫓는 표범의 눈동자 같았다. 윤설아는 조금 긴장이 되었다.사실 윤설아는 계략을 꾀하는 건 능숙했다. 마음속에 여러 가지 계략을 짜고 모든 준비가 다 끝났지만 실제로 겪어 본 적 없는 일이었기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당신이 왜 여기에?”정하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윤설아가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것도 이런 상황에.“그래요. 저에요!”윤설아가 눈웃음을 지으며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다 손을 뻗어 정하진을 방으로 밀며 따라 들어갔다.“왜요, 제가 반갑지 않나요?”그녀는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았다. 고개를 들어 멀뚱히 서 있는 정하진을 보다가 다리 라인이 도드라져 보이도록 다리를 꼬았다.“실망이네요. 난 당신이 놀랄 줄 알았거든요.”정하진이 웃으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고는 탁자 위에 있던 담배를 들어 입에 물고는 불을 지폈다.“설마, 날 유혹하려고 온 건가요?”“내 신분으로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나요?”윤설아의 목소리는 듣기 좋게 나긋나긋했다.“그리고, 정말로 당신을 유혹하러 온 거라 해도 충분히 가능할 거 같은데요?”정하진은 후 하고 담배 연기를 내뿜더니 허리를 굽히며 윤설아에게 다가갔다. 윤설아는 자기의 목선이 더욱 아름다워 보이도록 힘을 주었다. 이윽고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하지만 정하진의 이어진 행동은 그녀의 예상을 벗어났다.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턱을 쥐고 들어 올렸다. 그의 눈빛은 마치 잘 만들어진 상품을 보는 듯 했다. 자세히 훑어보더니 얇은 입술을 달싹였다.“당신은 정말 이뻐요!
“당신이 주문한 건가요?”룸서비스를 받아 든 정하진이 걸어들어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렇게 좋은 날, 술 없이는 아쉽잖아요?”윤설아가 그의 손에서 와인을 받아 들고는 와인잔을 두 개 들고 와 잔에 가득 따랐다.“우리가 손을 잡은 것을 축하하기 위하여!”정하진이 와인잔을 들어 그녀의 잔을 톡 치고는 입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그녀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내가 당신과 손을 잡겠다고 했었나요?”“장난해요? 전에 나하고 약속했잖아요! 잘 생각해 봐요. 내가 당신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막대한 이익을 생각해 보라고요.”윤설아가 잠시 멈칫하다 와인 한 모금을 마시고 이어서 말했다.“내가 알기론 당신은 정씨 가문에서 태어나 남부러운 것 없이 살았어도 가장 귀염받는 아들이 아니었죠? 게다가 조향 사업을 하겠다고 집안사람들과 많이 싸웠다고 들었어요. 정말 정씨 가문의 조력을 잃고 버려진 자식이 되길 바라요?”그녀를 바라보던 정하진의 눈빛이 더욱 짙어졌다.“솔직히 말해서 난 오래전부터 버려진 자식이었어요. 그래서 그 느낌이 어떤 건지 잘 알아요. 내가 아무리 올라가려고 노력해도 아무도 봐주지 않아요. 내가 여자란 이유로 모든 가능성을 짓밟아 버렸어요. 웃기지 않나요?”윤설아는 잔에 담긴 와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붉은색을 띠는 와인도 결국엔 누군가의 뱃속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하지만 당신은 다르잖아요. 당신은 기회가 있고 능력도 있어요. 원래 자기 것 이어야 했던 거를 불평 없이 남에게 내주어야 한다는 건 억울하지 않나요? 내 것이어야 하는 건데 왜 양보해야 하죠?”그녀가 애써 담담한 듯 말한다. 어느새 와인 반병이 그녀의 입속으로 들어갔다.취기가 올라왔는지 그녀는 점점 두서없는 말들을 내뱉었다.정하진은 와인에 입을 대지 않고 그녀가 하는 말만 듣고 있었다. 오늘 본 그녀의 모습이 이전과 많이 달라 보였다.‘충격이 컸나?’윤씨 가문의 일은 소문으로 들었다. 사람을 시켜 윤설아라는 사람을 조사해 본 적도 있었다.
“정하진 씨......”윤설아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비틀비틀 그의 품 안으로 넘어졌다.“더 이상 고민하지 말아요. 나보다 더 좋은 신붓감은 없어요! 당신에게 제일 어울리는 신부가 당신 품에 안겨 있다고요!”그녀가 손을 뻗어 정하진의 코를 톡 쳤다. 취기가 많이 올랐는지 배시시 웃고 있다.정하진은 그녀가 넘어지지 않을 만큼 느슨하게 부축하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숙여 윤설아를 자세히 바라보았다.물론 그녀는 정말 아름답다. 하지만 이런 마음이 독한 여자를 집에 둔다면 하루도 안심할 날이 없을 것이다.장미처럼 붉은 입술이 그에게 다가온다. 곧 닿으려고 할 때 정하진이 고개를 획 돌려 피했다.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윤설아는 그대로 멍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피할 남자가 정말 존재 한다고?’“당신 취했어요. 그만 돌아가요!”그가 입을 열었다.“왜요?”윤설아는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순간 정하진은 그녀가 귀엽기도 하고 가여워 보이기도 했다. 그가 한숨을 푹 쉬더니 잔을 들어 와인을 몇 모금 들이켰다.“당신은 나와 안 어울려요.”“왜요?”윤설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설마...... 당신도 한소은을 좋아하는 거예요?”김서진은 윤설아가 가지지 못한 남자다. 한때는 정말 그를 좋아했고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한 사람이다.그렇게 멋진 남자를 두고 마음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꼼수를 써서 그를 얻으려 했지만, 그에게 들통나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부터 윤설아는 더 이상 나대지 않고 동일한 조건을 가진 다른 남자를 물색하기 바빴다.지금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그녀가 고르고 또 골라서 찾아낸 상대였다. 그런데 그마저도 자기를 밀어낸다. 윤설아는 뺨을 맞은 거처럼 얼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분노에 겨워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내가 한소은보다 못한 게 뭐가 있어? 왜 다들 그 여자만 못 가져서 안달인 거야? 왜 다들 그 여자만 좋아하는 거냐고!”정하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자기가 한소은을 좋아하는 건지
“윤설아 씨, 지금 저를 가르치려는 겁니까?”정하진은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듯 그녀를 한번 보더니 입을 열었다.“아니요. 그저 알려주는 것뿐이에요.”정하진이 묵고 있던 호텔에서 나온 윤설아는 더욱 불안해졌다. 모든 게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며칠 사이에 일이 많이 틀어졌다.마치 큰 그물을 짜고 물고기가 걸리길 기다리다 문득 자기 자신도 사실은 다른 사람이 짜둔 그물에 걸린 먹잇감이 된 느낌이다.‘아니, 이럴 수 없어. 분명 어디에 문제가 생긴거야!’——며칠간 한소은은 확실히 운이 좋지 않았다. 대윤 그룹 쪽에서 그녀가 회사 내부 인원이 짜고 쳐 새 프로젝트로 내놓은 향수에 금지 성분을 추가 했다고 고소했다. 하필이면 이때 조향 협회에서도 그녀가 자격증 없이 불법 영업을 하고 있다고 지목했다.양쪽에서 난리를 피우니 원래 그녀를 지지하던 팬들도 점점 의심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대중 앞에 섰던 그녀가 가면을 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네티즌들의 반응은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 그녀를 믿는다는 사람도 많았다. 매번 고비를 잘 넘기던 그녀였기에 이번에도 반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인격과 조향 실력을 믿는다는 반응이다.그녀를 믿는 사람이 있다면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국내에서 인정받는 최고의 협회가 왜 하필 그녀만 콕 집어서 말하는지, 자격증에 대해 단 한 번도 해명하지 않은 그녀가 정말로 조향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닌지 등등 여러 가지 의심을 제기했다. 대윤 그룹에서 처음으로 출시 한 향수에서 금지 성분이 검출된 거에 대해서는 얼마 전 그녀가 기자회견에서 다른 성분을 얼마든지 첨가할 수 있다는 말을 갖다 대며 그녀가 했다는 가능성도 있다고 제기했다.이렇게 많은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한소은은 그 어느 것도 해명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틀간 매우 바빴다. 작업실을 드나들며 전화도 수도 없이 받았다.이날, 그녀의 작업실에 불청객이 찾아왔다.한소은의 작업실 문이 활짝 열린 것을 보고 정하진은 문도 두드리지 않고 안으로 걸어 들
인터넷에 떠도는 말들을 그녀가 모를 리가 없다. 다만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이고 결론도 나지 않았으니 지금 나서서 뭐라 해명해 봤자 물의만 일으키는 것 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당장 그녀가 해야 하는 건 조용히 몸을 사리며 자기 할 일을 하는 것이다.“당신이 웃음거리가 된 건 알고 있나 보네요.”정하진은 탁자에 놓인 자사 찻잔을 슥 보았다. 한가하게 차를 마실 기분이 있는 걸 보니 그녀가 태연한 척하는 건 아닌가 보다.“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어요. 누가 웃음거리가 될지는 두고 볼 일이에요.”한소은은 마지막 한 줄기의 잡초를 뽑아 버리고는 도구들을 바구니로 모두 정리해 넣었다. 그제야 몸을 일으켜 방안 쪽으로 향했다.그녀가 시선에서 사라지자, 정하진도 급히 일어나 따라 들어갔다.방 안은 생각보다 시원했다. 한소은은 바구니를 내려놓고 느릿느릿한 움직임으로 화초를 정리하고 깨끗이 물로 씻어냈다.정하진은 이런 그녀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조향사로서 이런 일은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다.자질구레한 거 같아 보이지만 모든 걸 직접 해야 했다. 각종 재료의 재질의 차이를 직접 느껴야 더 잘 사용할 수 있고 더 좋은 향을 추출할 수 있다. 그가 조향 협회로 들어간 몇 년 동안 이런 일들은 모두 조수들이 대신 해 주었다. 그저 조향하는 그 단계만 그가 직접 했다.“지금 대윤 그룹에서 당신이 그들의 새 향수에 금지 성분을 추가했다고 고소하고 있어요. 게다가 조향 자격증이 없다는 죄목까지 추가되면 감옥을 피해 갈 수 없을 거예요.”그녀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정하진이 입을 열었다.“정말 하나도 걱정되지 않는 거예요? 아니면 환아의 김서진 대표를 온전히 믿고 그가 당신을 지켜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그가 날 지켜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몰라요. 하지만 분명 최선을 다할 거예요.”손을 깨끗이 씻은 후에야 한소은이 뒤로 돌아 정하진을 바라보았다.“감옥에 가건 말건 정하진 씨가 걱정할 일은 아닌 거 같은데요. 여기에 정하진 씨도 한몫했다는 건 꼭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