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의 규모가 크니 우리를 적대시하는 사람은 적지 않아. 향수에 문제가 생겼으니 당연히 동종업계 종사자가 아닐까?”“동종업계......”“아빠, 동종업계끼리 서로 견제하려고 벌인 일이라고 하면 돼!”——대윤 그룹에 큰 사건이 터진 것 때문인지 조향 협회에서도 조사를 도우러 갔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일은 잠시 내버려 두게 되었다.원래부터 이 일이 귀찮았던 한소은은 이렇게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조향 자격증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그런 자격증이 아니다. 국내 협회가 만들어 낸 규정으로 이게 없으면 향수 제작을 할 수 없다 라는게 정말 황당한 일이다.조향사란 직업은 노력만 있어서 되는 게 아니다. 천재적인 재능도 있어야 좋은 향수를 만들 수 있다.하지만 천재적 재능이란 게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이런 쓸데없는 자격증을 논하며 자격증이 없다는 이유로 조향하지 못하게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이렇기 때문에 한소은은 그 자격증을 더욱 따고 싶지 않았다. 이론만 가득하고 실용성이 하나도 없는 교육 내용은 그저 시간만 낭비할 뿐이고 형식주의다.하지만 이 사람들이 이토록 형식주의인 이런 것에 집착할지는 꿈에도 몰랐다.정하진을 대표로 두고 서른여 명의 조향사가 그녀의 몇 가지 죄목을 나열하여 그녀가 이 업계에 더는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청문을 올렸다.업계 봉쇄 공문을 받아본 그녀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들이 무서워서 놀란 건 아니다. 그저 그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하는 게 웃길 뿐이다.청원 서류에 이름을 썼던 서른여 명의 조향사 중 대부분은 듣도 보도 못한 조향사들이었다. 심지어 그들과 안면도 없었다. 그들 중 대부분 사람은 조향 협회의 사람이다. 지금 이렇게 청원까지 하면서 그녀를 업계에서 내쫓으려 한다.‘당신들이 뭔데 날 내쫓으려 해?’아직 많은 사람이 청원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갑자기 실검 1위에 오르게 되었다. 심지 향수 금지 성분 사건마저 누르고 실검 1위를 차지한 것이다. 분명 그들이 돈을 들여
“만약 조향협회 쪽에서 환아에게 압력을 가한다면?” 소은이 반문했다.“그게…….”이연은 멍하니 소은을 바라봤다.“설마!”“대기업인 환아가 조향협회 따위를 겁내겠어?”소은이 이연을 바라보며 웃었다.“조향협회가 단순한 민간 단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조향협회에 국내 유명 조향사가 얼마나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들이 연합해서 누군가에게 압력을 가한다면, 그것이 향수 생산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 본 적 있어? 조향협회의 이사, 회장 등의 직위를 맡은 사람들은 단순한 조향사가 아니야.”“실제로 조향협회 내에는 정치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사람이 많아. 협회가 조향업의 절반쯤은 통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조향업의 권위자는 각종 업계 규정을 제정할 수 있고, 다른 기업의 제품에 대해서 지적도 할 수 있어. 심지어…… 기업이나 조향사가 협회에 밉보이면, 이후의 제품 생산이나 개인 활동에 제약을 받기도 하지.”이것이 바로 소은이 협회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였다. 본래의 취지와 의의를 잊어버리고, 길을 벗어났기 때문이었다.“이렇게 된 마당에 웃음이 나오니? 빨리 방법이나 생각해!”이연은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김서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그리 큰 어려움을 없을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소은의 말대로라면, 그것은 환아가 해낼 수 있는 일도, 더군다나 김서진이 맞설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꽃에 둘러싸인 정자 위에 누워 한가롭게 차나 마시고 있을 수는 없었다.“급할 거 뭐 있어?”소은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그들이 누군가의 조향 활동을 제재하려고 한다 해도 그건 내가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때리든 죽이든 그들 마음이지. 우리 같은 조향사가 해야 할 일은 더 좋은 향수를 만드는 일뿐이야.”실제로 소은에게 있어서 조향사로서 가장 최우선 순위는 조향이었으며,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다.“그런데…….”소은은 말을 하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맞다! 방법이 있어!”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연은 얼른 방에 들어가 쟁반을 가져왔다. 소은은 조심스럽게 새싹을 잘라 쟁반에 담았다. 몇 그루 안 되는 나무에서 나오는 새싹의 양은 적었다. 쟁반을 든 이연의 눈이 동그래졌다.“이거…… 향이 정말 특이해.”이연은 쟁반에 코를 대고 숨을 들이마셨다.“어때, 좋지?”소은은 의기양양한 얼굴이었다.“조심해. 내 소중한 아기들 망가뜨리지 말고. 이제 곧 일을 시작하게 될 거야.”소은이 요 며칠간 기다리던 것이 바로, 이 새싹들이었다. 만약, 그녀의 생각이 맞다면, 특별한 향수를 새로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었다.……조향협회 사무실은 강성에 있는 전원주택가에 있었다. 정하진은 한소은을 압박한 게시물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한 후. 조향협회 이름이 걸린 조향 활동 금지문을 살펴보았다. 금지령은 아직 발송되지 않은 상태였다. 정하진이 아직 한소은의 대답을 기다리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지금까지 한소은 쪽에서는 아무런 응답도 없었을 뿐 아니라, 조금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정하진 눈에 한소은은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고집스러운 사람이었다. 잘못을 인정하는 전화 한 통도 없었다. 정하진은 이번 일이 끝까지 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단지, 한소은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기를 바랄 뿐이었다.정하진이 보기에 한소은은 타고난 재능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국내에서 활동하려면 천재냐 아니냐의 문제보다 조향협회의 규정과 지시를 따르는 것이 더 중요했다. 한소은처럼 통제되지 않는 조향사는 활동에 제재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한소은은 정말 김서진이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다고 믿는 걸까?’정하진이 혼잣말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들어왔다.“도련님, 밖에 어떤 여성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련님을 뵙고 싶어 합니다.”“한소은인가요?”하진이 고개를 들었다. 이곳 사람들 대부분이 한소은을 알고 있었다.그가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 그분은 자신이 윤 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정하진은 만남을 거절하려다 컴퓨터를 힐
정하진은 옆으로 움직여 설아의 다리를 피했다.“솔직히 말하자면 윤설아 씨 당신의 선물이 나를 놀라게 하긴 어려울 거예요.”“일단 보고 얘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윤설아는 곧장 휴대전화를 꺼내 무언가를 찾더니 정하진 앞에 내밀었다.하진이 미간을 찌푸린 채 휴대전화 화면을 쳐다봤다. 초안이 작성된 고발장엔 한소은이 대윤 그룹 향수 사건의 주동자이며 윤소겸와 공모했다는 주장이 적혀 있었다.“단지 그것만으로 유죄가 될 거로 생각하나요?”정하진는 대수롭지 않은 듯 찌푸리고 있던 얼굴을 폈다.“물론, 이것이 다는 아니에요. 한소은은 선례가 좋지 않아요. 환아의 도움으로 그전 일을 어느 정도 해결했다고 하지만, 최근 들어 그 일이 다시 거론되고 있어요. 이번 일까지 합치면 그리 작은 일은 아닐 거예요. 게다가 조향협회에서도 한소은이 조향사가 되는 것에 반대하고 있지요, 심지어 그 여잔 조향사 자격증도 없는걸요.”윤설아는 한소은과 관련한 모든 일을 다 파악하고 있었다. 한소은에게 타격을 입히기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정하진은 아무 말 없이 윤설아를 바라보았다.솔직히 말하자면, 눈앞의 윤설아는 매우 예뻤다. 촉촉한 눈동자와 붉은 입술이 상당히 매력적인 데다 전문직 여성이 가진 강하고 당찬 분위기의 여자였다.다만…….정하진은 팔짱을 낀 채 윤설아를 바라봤다.“아무래도 한소은에 대해 깊은 원한이라도 있는 것 같은데요?”“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윤설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웃었다.“나와 한소희 사이에 교집합이 있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정하진 씨가 소희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요?”윤설아는 굳이 정하진의 대답을 듣지 않아도 한 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사실, 정하진은 한소은에게 신경이 많이 쓰였다. 한소은을 조사하면서도 곳곳에서 그녀의 체면을 세우려고 노력했다. 조향협회의 권력으로 한소은을 처리했더라면, 진작 끝났을 일이었다. 윤설아는 한소은에 대해 알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대체 왜 자신이 마음에 들어 하는 남자마다 한소은에게 관심을
윤설아는 정하진에게 몸을 기댄 채 그의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눈을 반짝이며 하진을 바라봤다.정하진은 한 손으로 윤설아의 턱을 쥐고는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만약 내가 당신의 행동에 협조한다면, 나에게 무슨 이득이 있죠?”“한소은은 당신에게 굴복하게 될 거예요.”윤설아의 턱을 쥐고 있는 정하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윤설아는 아팠지만 조금도 티 내지 않고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설마, 당신이 원한 게 이런 건가?”한소은이 굴복하기를 바라지 않았다면, 진작 힘을 써 압력을 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집이 보통이 아닌 한소은은 조향협회와 관계자로부터 활동에 제약을 받아도 뜻을 굽히지 않은 채 요지부동이었다.“한소은은 환아를 믿고 있고, 김씨 집안은 그녀의 뒤를 받쳐주고 있어요. 만약 하진 씨가 나와 손을 잡고 이중 압박을 하면 한소은 뿐 아니라, 김서진도 끌려올 거예요. 그때는, 우리가 이 시장에서 한 자리씩을 나눠 가지는 거죠. 환아가 혼자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어요? 당신네 정씨 집안과 우리 윤씨 집안이 서로 연합하면, 누가 우리의 적수가 될 수 있겠어요?”윤설아는 애교가 잔뜩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정하진이 그녀의 턱을 쥔 채 웃었다.“아이디어는 참 좋네요. 그런데, 내가 왜 당신과 손을 잡아야 하죠? 그게 내게 무슨 이익이 있는지 궁금한데요?”“우리 둘 다 현명한 사람이에요. 현명한 사람끼리 손을 잡는 것이 가장 좋은 거죠.”윤설아는 두 팔을 정하진의 목에 감고는 몸을 밀착시켰다.“나도 알아요. 당신이 한소은을 좋아하고 그녀가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요. 하지만 난 당신보다 한소은을 더 잘 알아요. 그 여자가 수많은 고비를 잘 넘길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은 걸 제외하고는 오로지 김서진 때문이 아닐까요?”“당신도 한소은이 차씨 집안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죠? 그 여잔 쉽지 않은 상대예요. 그러니 직접 상대하려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죠. 한소은과 같은 사람을 상대하려면, 먼저 뒤에서 버티고 있는 버팀
작업실에서는 며칠간 바쁜 나날을 보내던 소은은 마침내 결과물을 얻어냈다. 호박색 오리지널 에센셜 오일이 담긴 작은 병 하나를 손에 든 소은은 마치 값진 보물이라도 발견한 마냥 들뜬 얼굴이었다. 이연도 향을 맡고는 너무 기뻐 흥분한 상태였다.작업실 안은 독특한 향으로 가득 찼다.이것은 소은이 처음으로 발견한 향으로 여러 종류의 꽃향기가 어우러져 허브향처럼 마음을 상쾌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비록 작은 병 하나일 뿐이었지만, 이 정도의 양이면 시리즈 테마로 사용하기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생각과도 잘 맞아떨어진 까닭에 소은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이연아, 이건 서늘한 곳에 놓고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소은이 장갑을 벗고는 손을 깨끗이 씻었다. 실험 데이터를 확인하고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확실해지자 소은은 컴퓨터 앞에 앉아 메일을 보낸 후, 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네가 원하는 건 보름이 채 안 돼서 나올 수 있을 것 같아. 행사에 늦진 않을 거야.”“우와 잘됐다! 난 네가 해낼 줄 알았어!”리사는 제 일인 것처럼 기뻐했다.“참, 요즘 너에게 귀찮은 문제가 생겼다고 들었는데, 내가 도와줄까?”“아니야, 작은 문제야. 그럴 것 없어.”소은이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다.리사가 딱히 도움이 되는 사람은 아니었다.“그래, 알았어.”리사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참, 얼마 안 있어 임 대표가 온대. 혹시 너 시간 있어? 너에게 밥 한 끼 사고 싶다고 하던데.”“임 대표?”잠시 멍하던 소은은 불현듯 그때 그 사람이 떠올랐다.“사양할 이유는 없지. 그런데 우린 별로 공통점이 없는데.”“모두 친구잖아! 게다가, 아이리스가 널 그리워하고 있어. 네 이야기도 자주 해.”소은은 어린 소년의 얼굴을 떠올리며 빙그레 웃었다.“그래. 그럼,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응. 이번 테마 향수 건 잘 부탁해. 지금 나 바로 달려가고 싶은 걸 참는 중이야. 마치 전화기에서 향이 풍겨 나오는 것 같다니까.”한껏 과장된 말투에 소은이 웃음을 터뜨렸다.“됐어
“현재 한소은 씨는 경제 관련 범죄에 연루된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저희와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경찰관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경제 범죄 사건요?”소은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조향협회가 저를 고발했나요?”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우스운 일이었다.경찰이 고개를 저었다.“조향협회가 아닙니다. 현재 대윤 그룹 쪽에서 당신과 대윤 그룹 부장 윤소겸을 공모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사익을 위해 대윤 그룹 향수에 금지된 성분을 넣은 혐의입니다. 수사에 협조 부탁드립니다.”사실, 경찰은 나름대로 소은에게 예의를 갖춘 것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유 같은 건 설명해 주지도 않은 채 무작정 경찰서로 연행했을 수도 있었다.소은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누구라고요? 윤 누구요?”이름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었다.‘대윤 그룹 부장이요? 그게 누군데요?’“일단은 저희와 함께 가시죠. 자세한 건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협조해 주십시오.”경찰은 더는 설명하길 거부했다.“좋아요. 같이 가죠.”소은은 이것이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하고 싶었다.그때, 이연이 경찰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잠깐만요! 우리는 당신들이 말하는 대윤 그룹을 전혀 알지 못해요. 부장이라는 그 사람과 결탁하여 공모할 가능성은 더욱 없고요. 분명 이건 모함이에요.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어떻게 함부로 사람을 잡아갈 수 있죠?”“조사하면 밝혀질 겁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 공무집행 방해죄에 해당합니다.”경찰이 이연을 똑바로 바라봤다.“하지만…….”몇 마디 더 하려는 이연을 소은이 말렸다.“괜찮아. 내가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볼게. 나 역시 대윤 그룹이 어째서 나에게 이런 큰 혐의를 뒤집어씌웠는지 궁금해.”‘말도 안 돼. 내가 대윤 그룹과 공모했다고?’‘난 윤설아와 단 두 번 만났어. 요영과 노형원이라는 대윤 그룹 사람들도 인사만 하는 사이일 뿐이고. 그 외의 사람들은 아예 모르는데 대체 내가 무슨 공모를 어떻게 했다는 거지? 아무런
윤중성의 초조한 모습에 반해, 윤설아는 침착했다. 편안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그녀의 책상 위는 온갖 종류의 서류들로 가득했다. 최근 회사에서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난 데다 위기도 많았다. 윤설아는 몇 명의 부장을 제외하고 회사 내에서 가장 권력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대부분 이름만 내세운 회사의 주주일 뿐, 일상적인 경영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전에는 윤백건이 회사의 모든 걸 맡아 관리했으며, 가끔 윤설웅에게 맡기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는 그 누구의 개입도 없이 윤설아가 제일 강력한 실권자가 되었다.책상 앞에 앉은 윤설아는 더욱 과감한 화장에 강한 카리스마를 뿜어내고 있었다. 윤중성은 딸이 무언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이런 느낌은 윤중성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설아,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아빠한테 설명해 봐. 어째서 소겸까지 고발한 거냐?”윤중성이 노발대발하며 물었다.윤설아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윤중성을 힐끔 바라보더니, 보고 있던 서류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서류를 검토하던 설아는 자신이 이름에 서명하고 나서야 비로소 천천히 윤중성을 바라봤다.“아버지, 지금 저를 질책하시는 거예요?”“나는…….”매서운 설아의 말투에 윤중성이 우물쭈물했다.“이 모든 일이 누구 때문인지는 분명한 거 아닌가요? 이번 새로운 프로젝트는 저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거예요. 제가 직접 계획했을 뿐만 아니라, 전문가도 제가 불렀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기어이 이 프로젝트를 윤소겸에게 주셨죠. 윤소겸은 다른 사람의 의견 따위는 들으려 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가 모든 공을 차지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행동했어요. 그래서 지금 상황이 이 지경이 된 거고요. 그런데 지금 아버지가 저를 질책하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세요?”윤설아는 매서운 눈빛으로 윤소겸의 죄목을 조목조목 늘어놓았다.“설아, 너…….”“제가 왜요? 제 말이 틀렸나요? 이 회사에서 윤소겸의 무능력을 모르는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