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성이 요영의 손을 들어 자기의 얼굴에 갖다 대었다.요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홱 빼냈다.“나이 먹고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윤중성! 오늘 할 말 다 해야겠어요. 당신이 밖에서 다른 여자와 아이를 낳은 건 내게 모욕감을 줬어요. 세상 어디를 뒤져봐도 다른 여자와 자기 남편을 나눠 가질 여자는 없어요. 하지만 나 요영은 많은 일을 겪어본 여자예요. 어떤 게 중요한 일인지 그 정도 구분은 한다고요. 내가 질투에 눈이 멀어 회사에 불이익을 가져다주는 일을 했을 거 같아요?”윤중성은 그녀의 말에 속아 넘어갔다. 그녀와 딸에 대한 의심도 모두 사라졌다. 그가 요영의 어깨를 살짝 주무르며 말했다.“그래요. 부인 말이 다 맞아요. 내가 잘못 했어요. 내가 나쁜 놈이에요. 감히 당신과 설아를 의심하다니!”“하지만 요영. 지금 형님과 형수님은 우리에게 화가 나 있는 상태에요. 회사를 순순히 내놓으려 하지 않으니, 무슨 방법이 있겠어요? 오늘 형님 병문안을 갔다 왔는데 형수님이 막는 바람에 얼굴도 보지 못하고 나왔어요. 혹시 형수님이 회사를 차지 하려는 게 아닌지 하는 의심도 들었다고요.”“당신 정말 바보예요!”요영이 어이없다는 듯 윤중성을 쓱 보았다.“형님이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몰라요? 그 여자는 그럴 마음이 있어도 힘이 없는 사람이에요. 회사를 관리할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고요.”그녀가 잠시 생각하더니 이어 말했다.“지금 형님이 회사를 놓아주지 않는 건 조건을 걸려 하는 거예요. 내 생각에 형님 쪽은 쉽게 해결할 수있을 거 같아요.”사실 요영은 따로 생각해 둔 게 있었다. 설아가 윤백건을 찾아간 일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윤 부인 그 여자가 난데없이 강하게 나오는 바람에 도장을 받기는커녕 바로 쫓겨 나왔다.오늘 윤중성도 문전박대를 당했다.자기 남편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아들마저 죽었으니 그 여자가 회사 권력을 갖고 있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회사를 관리 할 줄 모르는 건 둘째 치고 설령 안다 해도 누구 하나 그녀의 말을 들을
마지막 한 가닥의 희망을 놓지 못한 윤중성이 진고은의 향수도 감정을 맡겼다. 결과는 여전했다. 그녀의 향수에서도 금지 성분이 검출되었다.그 조향사는 아직 소식이 없다. 게다가 언론에는 그 조향사가 다른 조향사의 신분을 도용한 가짜 조향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신분을 도용했다는 것도 사실 맞지 않은 표현이다. 그 조향사의 이름은 찰릭이었고 신분 도용을 당한 진짜 유명한 조향사의 이름은 찰리였다. 엄밀히 말하면 그냥 이름 한 끗의 차이였다.이런 사기 방식은 자주 볼 수 있는 사기 방식이었다. 뉴스에서 이미 여러 번 이런 사기 수법을 폭로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국제적으로 유명한 조향사의 신분을 도용하여 사기를 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사기 수법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면 진작에 발견할 수 있는 문제였다. 당시 윤소겸은 있는 인맥 없는 인맥 다 동원하고 돈도 많이 썼다. 이 조향사를 찾았을 때 그가 금발에 파란 눈인 외국인이라는 것만으로도 그는 조향사의 신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돌아가서 검색해 보니 이 조향사가 얼마나 많은 상을 받았고 또 얼마나 천재적인지를 알려주는 자료들이 수두룩 나왔지만 정작 조향사의 사진은 단 한 장도 없었다. 윤소겸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를 철석같이 믿고 향수 개발에 들어갔다.그 조향사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조향사가 아니었지만, 향수에 대해 완전히 모르지는 않았다. 초급 실력으로 만든 향수가 사람을 해칠 정도로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슨 생각으로 금지 성분을 추가 했는지 결국 일을 크게 만들었다.대윤 그룹의 향수 프로젝트는 관련 부서에서 제작 허가를 취하하고 감독 관리 권력마저 가져갔다. 이제 이 사건은 더 이상 회사 내부의 일이 아니다. 사건이 눈덩이처럼 부풀어 오르자, 윤중성이 아들을 지키고 싶어도 더는 지킬 수 없게 됐다.“설아야, 네가 무슨 방법 좀 찾아봐. 절대 겸이를 감옥에 보낼 수 없어!”윤중성은 마음이 급했다. 이번 일은 회사에서 소식을 덮고 소비자들에게 배상만 좀 하면 해결
“회사의 규모가 크니 우리를 적대시하는 사람은 적지 않아. 향수에 문제가 생겼으니 당연히 동종업계 종사자가 아닐까?”“동종업계......”“아빠, 동종업계끼리 서로 견제하려고 벌인 일이라고 하면 돼!”——대윤 그룹에 큰 사건이 터진 것 때문인지 조향 협회에서도 조사를 도우러 갔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일은 잠시 내버려 두게 되었다.원래부터 이 일이 귀찮았던 한소은은 이렇게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조향 자격증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그런 자격증이 아니다. 국내 협회가 만들어 낸 규정으로 이게 없으면 향수 제작을 할 수 없다 라는게 정말 황당한 일이다.조향사란 직업은 노력만 있어서 되는 게 아니다. 천재적인 재능도 있어야 좋은 향수를 만들 수 있다.하지만 천재적 재능이란 게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이런 쓸데없는 자격증을 논하며 자격증이 없다는 이유로 조향하지 못하게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이렇기 때문에 한소은은 그 자격증을 더욱 따고 싶지 않았다. 이론만 가득하고 실용성이 하나도 없는 교육 내용은 그저 시간만 낭비할 뿐이고 형식주의다.하지만 이 사람들이 이토록 형식주의인 이런 것에 집착할지는 꿈에도 몰랐다.정하진을 대표로 두고 서른여 명의 조향사가 그녀의 몇 가지 죄목을 나열하여 그녀가 이 업계에 더는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청문을 올렸다.업계 봉쇄 공문을 받아본 그녀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들이 무서워서 놀란 건 아니다. 그저 그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하는 게 웃길 뿐이다.청원 서류에 이름을 썼던 서른여 명의 조향사 중 대부분은 듣도 보도 못한 조향사들이었다. 심지어 그들과 안면도 없었다. 그들 중 대부분 사람은 조향 협회의 사람이다. 지금 이렇게 청원까지 하면서 그녀를 업계에서 내쫓으려 한다.‘당신들이 뭔데 날 내쫓으려 해?’아직 많은 사람이 청원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갑자기 실검 1위에 오르게 되었다. 심지 향수 금지 성분 사건마저 누르고 실검 1위를 차지한 것이다. 분명 그들이 돈을 들여
“만약 조향협회 쪽에서 환아에게 압력을 가한다면?” 소은이 반문했다.“그게…….”이연은 멍하니 소은을 바라봤다.“설마!”“대기업인 환아가 조향협회 따위를 겁내겠어?”소은이 이연을 바라보며 웃었다.“조향협회가 단순한 민간 단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조향협회에 국내 유명 조향사가 얼마나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들이 연합해서 누군가에게 압력을 가한다면, 그것이 향수 생산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 본 적 있어? 조향협회의 이사, 회장 등의 직위를 맡은 사람들은 단순한 조향사가 아니야.”“실제로 조향협회 내에는 정치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사람이 많아. 협회가 조향업의 절반쯤은 통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조향업의 권위자는 각종 업계 규정을 제정할 수 있고, 다른 기업의 제품에 대해서 지적도 할 수 있어. 심지어…… 기업이나 조향사가 협회에 밉보이면, 이후의 제품 생산이나 개인 활동에 제약을 받기도 하지.”이것이 바로 소은이 협회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였다. 본래의 취지와 의의를 잊어버리고, 길을 벗어났기 때문이었다.“이렇게 된 마당에 웃음이 나오니? 빨리 방법이나 생각해!”이연은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김서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그리 큰 어려움을 없을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소은의 말대로라면, 그것은 환아가 해낼 수 있는 일도, 더군다나 김서진이 맞설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꽃에 둘러싸인 정자 위에 누워 한가롭게 차나 마시고 있을 수는 없었다.“급할 거 뭐 있어?”소은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그들이 누군가의 조향 활동을 제재하려고 한다 해도 그건 내가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때리든 죽이든 그들 마음이지. 우리 같은 조향사가 해야 할 일은 더 좋은 향수를 만드는 일뿐이야.”실제로 소은에게 있어서 조향사로서 가장 최우선 순위는 조향이었으며,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다.“그런데…….”소은은 말을 하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맞다! 방법이 있어!”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연은 얼른 방에 들어가 쟁반을 가져왔다. 소은은 조심스럽게 새싹을 잘라 쟁반에 담았다. 몇 그루 안 되는 나무에서 나오는 새싹의 양은 적었다. 쟁반을 든 이연의 눈이 동그래졌다.“이거…… 향이 정말 특이해.”이연은 쟁반에 코를 대고 숨을 들이마셨다.“어때, 좋지?”소은은 의기양양한 얼굴이었다.“조심해. 내 소중한 아기들 망가뜨리지 말고. 이제 곧 일을 시작하게 될 거야.”소은이 요 며칠간 기다리던 것이 바로, 이 새싹들이었다. 만약, 그녀의 생각이 맞다면, 특별한 향수를 새로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었다.……조향협회 사무실은 강성에 있는 전원주택가에 있었다. 정하진은 한소은을 압박한 게시물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한 후. 조향협회 이름이 걸린 조향 활동 금지문을 살펴보았다. 금지령은 아직 발송되지 않은 상태였다. 정하진이 아직 한소은의 대답을 기다리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지금까지 한소은 쪽에서는 아무런 응답도 없었을 뿐 아니라, 조금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정하진 눈에 한소은은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고집스러운 사람이었다. 잘못을 인정하는 전화 한 통도 없었다. 정하진은 이번 일이 끝까지 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단지, 한소은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기를 바랄 뿐이었다.정하진이 보기에 한소은은 타고난 재능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국내에서 활동하려면 천재냐 아니냐의 문제보다 조향협회의 규정과 지시를 따르는 것이 더 중요했다. 한소은처럼 통제되지 않는 조향사는 활동에 제재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한소은은 정말 김서진이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다고 믿는 걸까?’정하진이 혼잣말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들어왔다.“도련님, 밖에 어떤 여성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련님을 뵙고 싶어 합니다.”“한소은인가요?”하진이 고개를 들었다. 이곳 사람들 대부분이 한소은을 알고 있었다.그가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 그분은 자신이 윤 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정하진은 만남을 거절하려다 컴퓨터를 힐
정하진은 옆으로 움직여 설아의 다리를 피했다.“솔직히 말하자면 윤설아 씨 당신의 선물이 나를 놀라게 하긴 어려울 거예요.”“일단 보고 얘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윤설아는 곧장 휴대전화를 꺼내 무언가를 찾더니 정하진 앞에 내밀었다.하진이 미간을 찌푸린 채 휴대전화 화면을 쳐다봤다. 초안이 작성된 고발장엔 한소은이 대윤 그룹 향수 사건의 주동자이며 윤소겸와 공모했다는 주장이 적혀 있었다.“단지 그것만으로 유죄가 될 거로 생각하나요?”정하진는 대수롭지 않은 듯 찌푸리고 있던 얼굴을 폈다.“물론, 이것이 다는 아니에요. 한소은은 선례가 좋지 않아요. 환아의 도움으로 그전 일을 어느 정도 해결했다고 하지만, 최근 들어 그 일이 다시 거론되고 있어요. 이번 일까지 합치면 그리 작은 일은 아닐 거예요. 게다가 조향협회에서도 한소은이 조향사가 되는 것에 반대하고 있지요, 심지어 그 여잔 조향사 자격증도 없는걸요.”윤설아는 한소은과 관련한 모든 일을 다 파악하고 있었다. 한소은에게 타격을 입히기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정하진은 아무 말 없이 윤설아를 바라보았다.솔직히 말하자면, 눈앞의 윤설아는 매우 예뻤다. 촉촉한 눈동자와 붉은 입술이 상당히 매력적인 데다 전문직 여성이 가진 강하고 당찬 분위기의 여자였다.다만…….정하진은 팔짱을 낀 채 윤설아를 바라봤다.“아무래도 한소은에 대해 깊은 원한이라도 있는 것 같은데요?”“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윤설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웃었다.“나와 한소희 사이에 교집합이 있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정하진 씨가 소희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요?”윤설아는 굳이 정하진의 대답을 듣지 않아도 한 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사실, 정하진은 한소은에게 신경이 많이 쓰였다. 한소은을 조사하면서도 곳곳에서 그녀의 체면을 세우려고 노력했다. 조향협회의 권력으로 한소은을 처리했더라면, 진작 끝났을 일이었다. 윤설아는 한소은에 대해 알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대체 왜 자신이 마음에 들어 하는 남자마다 한소은에게 관심을
윤설아는 정하진에게 몸을 기댄 채 그의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눈을 반짝이며 하진을 바라봤다.정하진은 한 손으로 윤설아의 턱을 쥐고는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만약 내가 당신의 행동에 협조한다면, 나에게 무슨 이득이 있죠?”“한소은은 당신에게 굴복하게 될 거예요.”윤설아의 턱을 쥐고 있는 정하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윤설아는 아팠지만 조금도 티 내지 않고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설마, 당신이 원한 게 이런 건가?”한소은이 굴복하기를 바라지 않았다면, 진작 힘을 써 압력을 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집이 보통이 아닌 한소은은 조향협회와 관계자로부터 활동에 제약을 받아도 뜻을 굽히지 않은 채 요지부동이었다.“한소은은 환아를 믿고 있고, 김씨 집안은 그녀의 뒤를 받쳐주고 있어요. 만약 하진 씨가 나와 손을 잡고 이중 압박을 하면 한소은 뿐 아니라, 김서진도 끌려올 거예요. 그때는, 우리가 이 시장에서 한 자리씩을 나눠 가지는 거죠. 환아가 혼자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어요? 당신네 정씨 집안과 우리 윤씨 집안이 서로 연합하면, 누가 우리의 적수가 될 수 있겠어요?”윤설아는 애교가 잔뜩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정하진이 그녀의 턱을 쥔 채 웃었다.“아이디어는 참 좋네요. 그런데, 내가 왜 당신과 손을 잡아야 하죠? 그게 내게 무슨 이익이 있는지 궁금한데요?”“우리 둘 다 현명한 사람이에요. 현명한 사람끼리 손을 잡는 것이 가장 좋은 거죠.”윤설아는 두 팔을 정하진의 목에 감고는 몸을 밀착시켰다.“나도 알아요. 당신이 한소은을 좋아하고 그녀가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요. 하지만 난 당신보다 한소은을 더 잘 알아요. 그 여자가 수많은 고비를 잘 넘길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은 걸 제외하고는 오로지 김서진 때문이 아닐까요?”“당신도 한소은이 차씨 집안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죠? 그 여잔 쉽지 않은 상대예요. 그러니 직접 상대하려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죠. 한소은과 같은 사람을 상대하려면, 먼저 뒤에서 버티고 있는 버팀
작업실에서는 며칠간 바쁜 나날을 보내던 소은은 마침내 결과물을 얻어냈다. 호박색 오리지널 에센셜 오일이 담긴 작은 병 하나를 손에 든 소은은 마치 값진 보물이라도 발견한 마냥 들뜬 얼굴이었다. 이연도 향을 맡고는 너무 기뻐 흥분한 상태였다.작업실 안은 독특한 향으로 가득 찼다.이것은 소은이 처음으로 발견한 향으로 여러 종류의 꽃향기가 어우러져 허브향처럼 마음을 상쾌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비록 작은 병 하나일 뿐이었지만, 이 정도의 양이면 시리즈 테마로 사용하기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생각과도 잘 맞아떨어진 까닭에 소은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이연아, 이건 서늘한 곳에 놓고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소은이 장갑을 벗고는 손을 깨끗이 씻었다. 실험 데이터를 확인하고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확실해지자 소은은 컴퓨터 앞에 앉아 메일을 보낸 후, 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네가 원하는 건 보름이 채 안 돼서 나올 수 있을 것 같아. 행사에 늦진 않을 거야.”“우와 잘됐다! 난 네가 해낼 줄 알았어!”리사는 제 일인 것처럼 기뻐했다.“참, 요즘 너에게 귀찮은 문제가 생겼다고 들었는데, 내가 도와줄까?”“아니야, 작은 문제야. 그럴 것 없어.”소은이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다.리사가 딱히 도움이 되는 사람은 아니었다.“그래, 알았어.”리사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참, 얼마 안 있어 임 대표가 온대. 혹시 너 시간 있어? 너에게 밥 한 끼 사고 싶다고 하던데.”“임 대표?”잠시 멍하던 소은은 불현듯 그때 그 사람이 떠올랐다.“사양할 이유는 없지. 그런데 우린 별로 공통점이 없는데.”“모두 친구잖아! 게다가, 아이리스가 널 그리워하고 있어. 네 이야기도 자주 해.”소은은 어린 소년의 얼굴을 떠올리며 빙그레 웃었다.“그래. 그럼,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응. 이번 테마 향수 건 잘 부탁해. 지금 나 바로 달려가고 싶은 걸 참는 중이야. 마치 전화기에서 향이 풍겨 나오는 것 같다니까.”한껏 과장된 말투에 소은이 웃음을 터뜨렸다.“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