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내가 누군지 몰라?”윤중성이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형님 병문안을 왔는데 이렇게 문전 박대를 당하다니. 그것도 아들 앞에서. 그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지난번에 형님 병문안을 왔을 때도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지 않았다.‘뭐 하는 사람들이지?’“죄송합니다. 누구도 들여보내지 말라는 명이 있었습니다!”두 경호원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윤중성이 아무리 크게 호통을 쳐도 경호원들은 비켜줄 마음이 없는 것 같아 보였다.“내가 내 형님 병문안 오는 걸 당신한테 허락이라도 받아야 한단 말이냐? 당신들 이러는 거 불법감금이야.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저리 비켜!”윤중성이 경호원을 위협하며 강제로 들어가려 했다.하지만 그가 병실로 발을 들이기도 전에 붙잡히고 말았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윤소겸이 틈을 타 그들을 비집고 들어가려 했지만, 그마저도 발 빠른 경호원에게 제압당했다.“아파, 아프다고!”윤소겸이 앓는 소리를 내자 윤중성이 바로 달려갔다.“겸아, 괜찮니? 당신들 감히 사람을 쳐?”“돌아가십시오!”경호원은 여전히 그들을 들여보낼 줄 생각이 없었다.“그래. 두고 보자고!”단호한 경호원들을 보며 윤중성이 씩씩거리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사실 윤백건의 핸드폰은 이미 오래전부터 꺼져있는 상태다. 그가 전화를 거는 건 그저 경호원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뜻밖에도 어디선가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게다가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소리가 전해져 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윤 부인이 핸드폰을 들고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윤 부인은 담담한 모습이었다. 다만 얼굴에 원망과 처절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 그녀가 윤중성 부자에게 다가가며 말했다.“여긴 병원이에요. 소란 그만 피워요!”“형수님!” 윤중성이 다급히 말했다.“저희가 소란을 피운 게 아니라 형님 병문안을 왔는데 못 들어 가게 막고 있지 않습니까? 이게 지금 무슨 상황입니까?”“도련님이 본 그대로예요. 백건씨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 해
윤 부인의 말은 그의 정곡을 찔렀다. 윤중성이 흠칫하더니 바로 마음을 그런 적 없다는 듯 말했다.“형수님,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형님 빨리 죽으라고 온 거라니! 전 형님 친동생이에요. 형수님이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어요?”“말 잘했어요. 친형제라는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죠? 당신 딸이 찾아온 거도 모자라 이젠 아들까지 데리고 와서 행패를 부려요?”평온했던 그녀의 얼굴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부릅뜬 눈에는 충혈이 되어 있었고 몸마저 부들부들 떨었다.윤중성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한 눈치였다.‘딸이 왔었다니?’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설아가 병문안을 다녀갔나요?”“시치미 떼지 마세요! 이틀 전에 설아가 왔었어요. 큰아버지가 아프다고 병문안 온 건 줄 알았는데 그 애가...... ”그녀가 나오는 눈물을 삼키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의사가 백건씨를 겨우 진정시켜 놓았는데 이젠 당신들까지 와서 행패를 부리니.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못 만나게 막을 거예요!”“......”윤중성 뿐만 아니라 윤소겸도 놀란 모습이다.마음속에 의심이 가득한 윤소겸이 윤 부인에게 물었다.“큰어머니,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누나가 와서 뭘 했나요? 큰아버지 병문안 온 게 아니었나요? 저와 아버지는 정말로 병문안 온 거예요. 다른 마음을 품고 온 게 아니라고요. 누나가 다녀간 건 저희도 모르는 일이에요.”윤 부인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정말?”윤중성이 연거푸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형수님, 요 며칠간 회사에 사건이 많이 터진 거 아시잖아요. 그거 때문에 바빠서 다른 일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요. 설아가 언제 다녀간 건지도 모른다고요. 그 애가 와서 무슨 말을 했나요?”윤 부인이 윤중성을 스윽 바라보았다. 그가 한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그를 한참 바라보더니 마지못해 그날 일에 대해 입을 열었다.“그날 설아가 와서 백건씨에게 회사에 일어난 일을 다 말해줬어요. 그리고 또
윤중성과 윤소겸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병원에서 나왔다. 주차장으로 가는 내내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차에 올라서야 윤소겸이 참지 못하고 침묵을 깨뜨렸다.“아버지...... ”윤소겸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윤중성이 그의 말을 끊었다.“어쩌면 겸이 네 말이 맞는 건지도 모르겠다.”주차장으로 오는 내내 윤중성은 윤소겸이 했던 말을 생각했다. 그의 마음이 복잡해졌다.윤 부인의 말은 그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윤설아가 자기보다 먼저 여기에 올 줄을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윤백건의 인감까지 가져가려 하다니.‘설아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윤설아가 회사를 대신 관리 하려고 도장을 가지러 왔다는 건 윤설아가 회사를 자기 손에 넣으려 했다는 뜻이다.하지만 그의 앞에서 분명히 동생을 잘 보좌하겠다고 다짐했던 그녀가 뒤에서 이런 일을 벌인다는 건 정말 상상조차 못 한 일이다. 자기 손에서 길러진 말 잘 듣는 딸이 자기 몰래 이런 일을 벌이다니.‘이거 외에 또 무슨 짓을 저질렀을까?’윤중성의 말을 들은 윤소겸이 흠칫하더니 말했다.“아버지, 제 말이 맞았죠? 제가 누나에게 편견이 있는 게 아니라 누나가 제게 편견이 있는 거라고요! 봐요, 누나가 지금 아버지 몰래 큰아버지의 인감도장을 달라고 했다는 건 뒤에서 무슨 짓을 더...... ”윤소겸은 지금 자기의 아버지가 윤설아에게 실망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중성의 표정이 더욱 안 좋게 변하는 걸 보았다.그가 더 말하지 않아도 아버지가 그의 뜻을 알 거라고 생각했다.윤중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두운 낯빛으로 운전에만 집중했다. 윤소겸을 집까지 데려다주고 나서야 힘겹게 입을 열었다.“넌 먼저 집에 가 있어. 이번 일은 아버지가 해결할게.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야겠으니 넌 잠자코 집에서 기다려!”“네, 아버지.”윤소겸은 마음이 홀가분 해졌다.아직 일이 모두 해결된 게 아니지만 윤설아가 이런 짓을 버렸다는 걸 윤중성이 알았으니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나
윤 부인의 말을 생각하면 할수록 윤중성은 분노에 휩싸였다.‘설아야, 윤설아! 넌 정말 대단한 아이구나.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어!”그는 곧바로 집으로 갔다. 주차하자마자 차에서 뛰어 내리고는 성큼성큼 집으로 들어갔다.“윤설아!!”그는 높은 언성으로 윤설아의 이름을 불렀다. 지금 당장 그녀에게서 설명을 들어야겠다.“무슨 일이에요?”윤중성의 목소리를 들은 요영이 걸어 나왔다. 손에는 금방 탄 레몬차를 들고 있었다.“뭣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 설아 지금 집에 없어요. 무슨 일인데요?”“무슨 일? 당신이 잘 키운 딸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요?”윤설아가 집에 없다는 말에 윤중성은 더욱 분노했다.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그가 손을 번쩍 들더니 요영의 얼굴을 힘껏 쳤다.“짝!”너무도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요영은 피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뺨을 맞아 버렸다. 얼마나 세게 쳤는지 그녀의 얼굴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컵마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세게 맞은 요영의 얼굴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그녀는 울지도 난리를 피우지도 않았다. 오히려 냉정한 모습이었다. 차갑게 윤중성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모습은 소름 돋을 만큼 섬뜩했다.“뭐 하는 짓이에요?”“난......”그녀의 뺨을 한 대 때린 후에야 윤중성이 정신을 차렸다. 높게 부어오른 그녀의 얼굴을 보자 순간 조금 후회가 되었다.결혼하고 지금까지 아무리 싸우고 다퉈도 그녀에게 손을 댄 적은 없었다. 오늘은 정말 화가 나서 미쳤나 보다.후회도 잠시 스쳐 지나가는 것뿐이었다. 그는 몸을 돌려 소파에 앉았다.“요영, 윤설아가 오늘 일을 제대로 해명하지 않는다면 우린 끝인 줄 알아요.”윤중성은 너무 화가 나 심한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윤설아가 자기 몰래 윤백건의 권력을 빼았아 가려는 건 자기 손에서 몰래 권력을 빼앗아 가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믿고 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힐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만약 이 모든 게 진짜라면 겸이 일도 윤설아가 꾸민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
“왜, 내 말이 틀렸나요?”윤중성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자기가 한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까지 그는 이게 공평한 거라고 생각했다.“허!”요영이 어이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그래요. 우리 설아를 너무 예뻐해서 그 아이가 능력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떠한 권력도 주지 않았죠. 설아가 지금 이 자리까지 온건 모두 자기 힘으로 올라간 거예요. 당신이 뭘 줬는데요? 당신은 오로지 밖에서 나은 아들만 예뻐했어요. 모든 걸 윤소겸한테만 물려주려고 생각하면서 설아 생각은 한번이라도 해봤나요?”"........."그 누구도 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윤중성은 잠시 멍해졌다.“설아는 나중에 시집갈 거잖아요! 시집가면 더 이상 우리 윤씨 가문의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그 아이에게 회사를 물려줄 수 있겠어요!”“전에도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죠. 설아는 확실히 능력 있고 일 처리도 잘해요. 만약 설아가 아들이었다면 얼마든지 회사를 물려줄 수 있어요. 그런데 설아는 딸이잖아요. 언젠가 남의 집으로 시집갈 딸! 내가 예전에 아들 하나 더 가지자고 말했는데 당신이......”요영은 윤설아를 낳은 후 몸이 많이 안 좋았다. 더 이상 임신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윤중성이 진고은과 바람을 피운 것이다. 나중에는 그녀와 아들까지 낳았다. 이럼에도 요영이 계속 참아왔던 이유는 윤중성이 그들을 단 한 번도 윤가로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그녀는 남편에게 큰소리를 낼 능력조차 없었다.하지만 지금......“내가 못나서 미안해요. 내가 아들을 못 낳으니, 당신이 우리 설아에게 이렇게 한 거였네요. 설아에게 이렇게 하는 게 정말 잘해주는 거고, 공평하다고 생각하세요?”“어느 가문이 딸을 후계자로 삼나요! 가서 물어봐요. 딸에게 회사를 물려줄 사람이 있는지!”윤중성이 화를 내며 말했다. 그는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요영의 실망 어린 눈을 보자 문득 떠올랐다.“그래서 당신 모녀가 이런 함정을 판 건가요?”
윤중성이 요영의 손을 들어 자기의 얼굴에 갖다 대었다.요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홱 빼냈다.“나이 먹고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윤중성! 오늘 할 말 다 해야겠어요. 당신이 밖에서 다른 여자와 아이를 낳은 건 내게 모욕감을 줬어요. 세상 어디를 뒤져봐도 다른 여자와 자기 남편을 나눠 가질 여자는 없어요. 하지만 나 요영은 많은 일을 겪어본 여자예요. 어떤 게 중요한 일인지 그 정도 구분은 한다고요. 내가 질투에 눈이 멀어 회사에 불이익을 가져다주는 일을 했을 거 같아요?”윤중성은 그녀의 말에 속아 넘어갔다. 그녀와 딸에 대한 의심도 모두 사라졌다. 그가 요영의 어깨를 살짝 주무르며 말했다.“그래요. 부인 말이 다 맞아요. 내가 잘못 했어요. 내가 나쁜 놈이에요. 감히 당신과 설아를 의심하다니!”“하지만 요영. 지금 형님과 형수님은 우리에게 화가 나 있는 상태에요. 회사를 순순히 내놓으려 하지 않으니, 무슨 방법이 있겠어요? 오늘 형님 병문안을 갔다 왔는데 형수님이 막는 바람에 얼굴도 보지 못하고 나왔어요. 혹시 형수님이 회사를 차지 하려는 게 아닌지 하는 의심도 들었다고요.”“당신 정말 바보예요!”요영이 어이없다는 듯 윤중성을 쓱 보았다.“형님이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몰라요? 그 여자는 그럴 마음이 있어도 힘이 없는 사람이에요. 회사를 관리할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고요.”그녀가 잠시 생각하더니 이어 말했다.“지금 형님이 회사를 놓아주지 않는 건 조건을 걸려 하는 거예요. 내 생각에 형님 쪽은 쉽게 해결할 수있을 거 같아요.”사실 요영은 따로 생각해 둔 게 있었다. 설아가 윤백건을 찾아간 일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윤 부인 그 여자가 난데없이 강하게 나오는 바람에 도장을 받기는커녕 바로 쫓겨 나왔다.오늘 윤중성도 문전박대를 당했다.자기 남편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아들마저 죽었으니 그 여자가 회사 권력을 갖고 있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회사를 관리 할 줄 모르는 건 둘째 치고 설령 안다 해도 누구 하나 그녀의 말을 들을
마지막 한 가닥의 희망을 놓지 못한 윤중성이 진고은의 향수도 감정을 맡겼다. 결과는 여전했다. 그녀의 향수에서도 금지 성분이 검출되었다.그 조향사는 아직 소식이 없다. 게다가 언론에는 그 조향사가 다른 조향사의 신분을 도용한 가짜 조향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신분을 도용했다는 것도 사실 맞지 않은 표현이다. 그 조향사의 이름은 찰릭이었고 신분 도용을 당한 진짜 유명한 조향사의 이름은 찰리였다. 엄밀히 말하면 그냥 이름 한 끗의 차이였다.이런 사기 방식은 자주 볼 수 있는 사기 방식이었다. 뉴스에서 이미 여러 번 이런 사기 수법을 폭로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국제적으로 유명한 조향사의 신분을 도용하여 사기를 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사기 수법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면 진작에 발견할 수 있는 문제였다. 당시 윤소겸은 있는 인맥 없는 인맥 다 동원하고 돈도 많이 썼다. 이 조향사를 찾았을 때 그가 금발에 파란 눈인 외국인이라는 것만으로도 그는 조향사의 신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돌아가서 검색해 보니 이 조향사가 얼마나 많은 상을 받았고 또 얼마나 천재적인지를 알려주는 자료들이 수두룩 나왔지만 정작 조향사의 사진은 단 한 장도 없었다. 윤소겸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를 철석같이 믿고 향수 개발에 들어갔다.그 조향사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조향사가 아니었지만, 향수에 대해 완전히 모르지는 않았다. 초급 실력으로 만든 향수가 사람을 해칠 정도로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슨 생각으로 금지 성분을 추가 했는지 결국 일을 크게 만들었다.대윤 그룹의 향수 프로젝트는 관련 부서에서 제작 허가를 취하하고 감독 관리 권력마저 가져갔다. 이제 이 사건은 더 이상 회사 내부의 일이 아니다. 사건이 눈덩이처럼 부풀어 오르자, 윤중성이 아들을 지키고 싶어도 더는 지킬 수 없게 됐다.“설아야, 네가 무슨 방법 좀 찾아봐. 절대 겸이를 감옥에 보낼 수 없어!”윤중성은 마음이 급했다. 이번 일은 회사에서 소식을 덮고 소비자들에게 배상만 좀 하면 해결
“회사의 규모가 크니 우리를 적대시하는 사람은 적지 않아. 향수에 문제가 생겼으니 당연히 동종업계 종사자가 아닐까?”“동종업계......”“아빠, 동종업계끼리 서로 견제하려고 벌인 일이라고 하면 돼!”——대윤 그룹에 큰 사건이 터진 것 때문인지 조향 협회에서도 조사를 도우러 갔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일은 잠시 내버려 두게 되었다.원래부터 이 일이 귀찮았던 한소은은 이렇게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조향 자격증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그런 자격증이 아니다. 국내 협회가 만들어 낸 규정으로 이게 없으면 향수 제작을 할 수 없다 라는게 정말 황당한 일이다.조향사란 직업은 노력만 있어서 되는 게 아니다. 천재적인 재능도 있어야 좋은 향수를 만들 수 있다.하지만 천재적 재능이란 게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이런 쓸데없는 자격증을 논하며 자격증이 없다는 이유로 조향하지 못하게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이렇기 때문에 한소은은 그 자격증을 더욱 따고 싶지 않았다. 이론만 가득하고 실용성이 하나도 없는 교육 내용은 그저 시간만 낭비할 뿐이고 형식주의다.하지만 이 사람들이 이토록 형식주의인 이런 것에 집착할지는 꿈에도 몰랐다.정하진을 대표로 두고 서른여 명의 조향사가 그녀의 몇 가지 죄목을 나열하여 그녀가 이 업계에 더는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청문을 올렸다.업계 봉쇄 공문을 받아본 그녀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들이 무서워서 놀란 건 아니다. 그저 그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하는 게 웃길 뿐이다.청원 서류에 이름을 썼던 서른여 명의 조향사 중 대부분은 듣도 보도 못한 조향사들이었다. 심지어 그들과 안면도 없었다. 그들 중 대부분 사람은 조향 협회의 사람이다. 지금 이렇게 청원까지 하면서 그녀를 업계에서 내쫓으려 한다.‘당신들이 뭔데 날 내쫓으려 해?’아직 많은 사람이 청원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갑자기 실검 1위에 오르게 되었다. 심지 향수 금지 성분 사건마저 누르고 실검 1위를 차지한 것이다. 분명 그들이 돈을 들여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