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말을 들은 윤 부인이 잠시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어릴 적의 설웅은 정말 다른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엄친아였다. 부모님의 말씀도 곧잘 들었고 공부도 열심히 했던 그는 어린 나이에 사업 쪽에도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생각해 낸 아이디어가 모두 좋은 건 아니었지만 자기만의 생각과 이해가 있었다.그 시절, 윤 가네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화목한 가정이었다. 백건은 이런 아들을 매우 자랑스러워했고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설웅이 열서너 살 때였다. 누구나 다 겪는다는 사춘기가 설웅에게도 찾아왔다. 하필이면 그 무렵이 회사를 확장하고 있었을 때였다 회사 업무가 바빠지기 시작하자 백건이 집에 들어오는 날은 두 손으로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적어졌다. 원래부터 몸이 좋지 않았던 그녀는 자기 자식을 단속할 힘이 없었다. 때마침 요영이 집에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다. 요영은 항상 그녀더러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몸 회복에 집중하라 했고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도맡아 처리했다. 심지어 윤 가네 친인척에 관한 일도 모두 요영이 나서서 대신 처리해 주었다. 그 때문인지 설웅도 점차 요영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이렇게 평온할 것만 같았던 나날이 조금씩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설웅이 어디서 목조를 접하게 되었는지 어느 날부터 목조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봐도 그녀는 짚이는 게 없었다.아마 그때부터 설웅이 공부와 담을 쌓게 되었고 눈만 뜨면 나무에 정신이 팔려 하루 종일 나무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처음에 그녀는 이게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가 이런 것에 열중하는 게 어디 나가서 사고 치는 것보다 훨씬 좋은 거라고 생각했었다. 이 일이 생각보다 심각한 일이라는걸 그녀는 나중에야 알아차렸다. 설웅은 날이 갈수록 목조에 빠져들었고 심지어는 밤까지 새 가며 나무에 집착했다.한동안은 집안 여기저기에 나무 부스러기가 널려져 있었다. 설웅은 점점 자기관리에 소홀했고 수업을 들으러 가려 하지 않았다. 그
사실 이런 사달이 난 것은 윤백건의 잘못도 있었다. 아버지로서 회사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자기 아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한 것은 명백히 그의 실책이다. 윤 부인은 온몸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힘든 시기 옆에서 많이 도와준 요영을 가족 그 이상으로 생각하고 가까이 지냈는데 그런 그녀가 자기의 아들을 빗나간 길로 인도하고 있었다니!"그럼 우리 이제......""이제 조용히 기다리기만 하면 돼요! 이 연극도 곧 막을 내릴 거니까!" 가볍게 한숨을 쉬며 곧 질 석양을 바라보던 그가 작은 소리로 읊조렸다.——윤설아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버지가 거실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건 정말 보기 드문 광경이다.그녀는 입을 삐죽거리며 이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아빠, 왜 여기 앉아 있어!""퇴근 했으면 당연히 집에 와야지. 넌 아빠가 그렇게 많이 전화했는데 전화도 받지 않고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거야!"윤중성은 화가 난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기자들이 미친 듯이 네 동생만 쫓아다니는 거 알기나 해? 누나 되는 사람이 문제를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여태 어디 있다 오는 거야?""해결할 방법을 생각하느라 이제야 온 거잖아!" 그녀는 외투를 벗어 집사에게 건네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빠, 지금 기자들이 겸이뿐만 아니라 병원에 있는 양미나 쪽도 지켜보고 있어. 이번 사건은 처리하기 쉽지 않을 거 같아. 만약 처음부터 말을 바꾸도록 했으면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이었어. 그런데 겸이가 병원에까지 찾아가서 한바탕 소란을 피웠잖아. 지금 회사가 나서서 그 여자와 접촉하면 말을 바꾸더라도 사람들은 우리가 그 여자를 위협한 것으로 생각할 거야. 우리에겐 아무런 이익도 없을 거라고."침묵하던 윤중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윤설아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그럼 지금 어떻게 해야 해?""지금 가장 중요한 건 우리 회사의 향수가 분명히 문제가 없다는 걸 증명하는 거야. 아빠, 내가 방금 공장에 남은 향수를 모두 감정 부서에 보냈어. 방금 생산한
이때 요영이 주방에서 나오며 투덜거렸다."그만 해요. 회사에선 그렇다 치고 집에 돌아와서도 일 얘기만 하다니. 밥 먹을 땐 업무 예기 금지에요."윤중성도 허기가 졌다. 지금껏 그 사건을 처리하느라 그는 몹시 피곤하고 배고팠다. 식탁 앞에 앉은 그는 젓가락을 들더니 옆에 앉은 아내를 힐긋 흘겼다. 왠지 모르게 진고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말없이 반찬만 집어 먹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윤설아도 손을 씻고 와서 식탁 앞에 앉았다. 이렇게 세 식구가 조용히 밥을 먹은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대놓고 요영에게 묻지 않았지만, 이 일은 마음속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윤중성을 괴롭혔다. 그가 그녀를 몇 번 더 쳐다보았다.요영도 윤중성의 시선을 느꼈다. 그가 묻지 않자, 그녀도 모른 채 입을 꾹 닫았다.원래도 조금만 먹던 요영이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려 하자 윤중성이 더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불러세웠다."요영.""네." 요영이 우아하게 국물을 한번 떠 마시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잘 먹었어요.""가지 말고 앉아요.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윤중성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설까 봐 바쁘게 말했다."뉴스에서 봤었죠. 그 양미나......"잠시 멈칫하더니 그가 이어 말했다."최근에 우리 회사와 문제가 좀 있었던 그 향수 모델 말이에요.""네." 요영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그를 바라보았다."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내 말은, 당신도 전에 모델 일을 했었잖아요. 그 여자 이름 들어본 적 있어요? 혹시 아는 사람일까 해서."윤중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요영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했다."들어본 적 없어요. 모르는 사람이에요.""정말 몰라요? 나이가 어리지만 일찍부터 모델 일을 했다던데. 모델로 활동했던 시간을 보면 당신이 아직 모델 일을 그만두지 않았을 때잖아요. 정말 본 적 없어요?"사실 궁금함을 참지 못했던 그가 몰래 뒷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말은 그렇게 안 했어도 그런 생각 하고 있었잖아요!”요영은 화가 나서 가까이에 있던 그릇을 던져 버렸다.“어쩐지 집으로 돌아와서 날 보던 당신 눈빛이 이상하다 했어. 수십 년을 당신 아내로 살아왔는데 당신이 날 그런 사람으로 생각할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내가 윤씨 가문을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는데. 당신이 밖에서 바람피워 나은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준다고 했을 때 내가 뭐라고 한적이나 있어요? 고작 몇 마디 투덜댄 거 가지고 날 의심하는 거예요?”그녀가 울부짖으며 손에 들고 있던 접시와 그릇을 몽땅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왜, 나보고 당신의 그 귀한 아들 대신 감옥에 가라고요? 그래요! 그 모델 내가 잘 아는 사람이에요. 그 여자와 내가 짜고 친 거고 당신 아들 모함하라고 내가 시켰어요. 당신 망하게 하려고, 대윤 그룹 망하게 하려고, 우리 가족 모두 죽게 만들려고 내가 그랬어요!”그녀가 울분을 토해내듯 말했다. 분노가 가득한 그녀의 말을 윤중성이 믿을 리가 없었다.그저 그녀가 홧김에 이렇게 말하는 거라고 여겨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그래요. 내가 잘못했어요. 당신을 의심해서 미안해요. 그러니까 당신도 그만 해요. 딸 앞에서 이게 뭐예요.”"딸 앞인 게 왜요. 설아도 다 아는 얘기에요. 당신이 먼저 딸 앞에서 내게 따져 묻고 날 의심했잖아요. 근데 내가 몇 마디 반박한 게 창피해요? 정말 내가 그랬다고 생각한다면 경찰에 신고해서 날 잡아가라고 해요. 여기서 이런 억울함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감옥에 가는 게 낫겠어요!"요영이 일어서며 수갑을 채우라는 듯 두 손을 윤중성 앞으로 쭉 뻗었다."경찰에 신고해요. 경찰에 신고하란 말이에요!""아이고...." 그녀가 막무가내로 나오자, 윤중성은 연거푸 뒷걸음질 쳤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한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그만 해요!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내가 미안했어요. 무릎이라도 꿇어야 그만할래요?”윤중성이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으려는 듯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그냥 아는
윤씨 가문이 향수 사건에 휘말려 초조해하고 있을 때 한소은은 오히려 한가해 보였다.그녀가 시리즈 프로젝트 의뢰를 받겠다고 결정한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사실 이 프로젝트는 작업실 오픈 후 처음으로 의뢰받은 프로젝트다. 이것 말고 다른 한 가지 이유에는 조금 웃픈 에피소드가 있었다. 임신 소동을 겪고나서 그녀는 많은 생각을 했었다. 아이를 가지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조금 더 많이 해두고 싶었다. 나중에 정말 아이를 가지게 되면 지금 하고 있던 일들을 모두 내려놓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그녀가 매일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김서진도 같이 바빠지는 느낌이 들었다."조향 협회 일은 전혀 걱정되지 않나 봐요."자기가 있는 한 그 누구도 소은을 건드릴 수 없다. 지금 그녀는 마치 이 일이 자기와 상관없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하진이 이런 모습을 보게 되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다.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말했다. "걱정할 게 뭐가 있어요."그녀는 정원에 쪼그리고 앉아 화초를 다듬고 있다. 향긋한 화초 사이에는 두 토막의 나무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잎이 하나도 없어 마치 말라죽은 것처럼 보였다.그녀는 이 두 토막의 나무에 유난히 신경을 썼다. 사흘에 한 번 물도 주고 비료도 아낌없이 주었다. 그녀는 이 두 토막의 나무에 잎이 생기는 걸 기대하고 있었다.“업계에서 조향 협회가 어떤 권위를 가지고 있는지 당신이 누구보다 잘 알잖아요.”마당의 정원에서 유유히 차를 마시던 김서진은 문득 이 정원을 정말 잘 샀다고 생각했다.이 정원은 그녀의 작업실로 쓰였다. 지금처럼 그가 농땡이를 피우기에도 참 좋은 곳이다."조향 협회라면 다들 인정하죠."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삽으로 천천히 흙을 뒤지고 있다.“그게 나하고 상관있는 일은 아니잖아요! 난 협회 사람도 아니고 그들에게 빌붙어 먹고 살 생각도 없어요.”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김서진이 있는 곳으로 돌리며 이어 말했다.“사실 이미 조사해 봤어요. 개업 자격증이라는 건 우
‘쯧, 비밀스럽긴.’김서진은 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에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앉아서 차 좀 마시면서 쉬어요.""네." 한소은은 땀을 쓱 닦고 화랑 아래로 걸어갔다. 긴 화랑이 햇빛을 가리고 있어 더위를 식히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다. 앉아서 차를 몇 모금 마시고는 그제야 살 것 같았는지 가볍게 웃었다."주말에..."김서진이 잠시 머뭇거렸다. "네?" 한소은이 호기심에 찬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이번 주말에 나랑 같이 갈 데가 있어요.”이 말을 하는 한서진의 표정에는 눈에 띄게 혐오의 감정이 서려 있었다. 가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 곳, 그녀가 떠오르는 건 딱 한 곳뿐이었다."당신 본가로 같이 가자는 말인가요?""어떻게 알았어요?" 그녀의 말에 한서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눈치를 챘으니 오히려 말을 꺼내기가 편해졌다."맞아요. 오래 걸리진 않겠지만 한번 다녀와야 해요."한소은이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당신 작은 삼촌 약혼식 때문에 가야 하는 거죠?""흥!" 김서진은 그 사람을 작은삼촌이라고 부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냥 얼굴만 비추는 자리지만 마음의 준비는 해둬요. 김 씨네 본가가 그리 좋은 곳은 아니니.”그의 안색이 굳어졌다. 누가 보면 무슨 지옥에라도 가는 줄 알겠다.한소은은 무척이나 궁금했다. 본가는 그가 어릴 때부터 자란 집이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혐오하고 배척하는 걸까? 김서진은 그녀에게 어릴 적 본가에서 생활했던 기억이 그리 좋은 기억이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본가에서 살 동안은 누구 하나 믿을 사람이 없었고 모두 자기를 모함하려 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외의 일은 그녀에게 말해주지 않았다.지금 그의 모습을 보니 저번에 다이아몬드 가게에서 그의 할머니와 작은고모를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김 씨 본가의 상황은 차 씨네 보다 더욱 심각한 것 같았다."난 괜찮아요. 그보다 더 한 사람들도 많이 봐왔는걸요" 그녀는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내가 차 씨 가문의
감정 결과를 기다리는 과정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겨우 하루였지만 윤소겸은 한 세기가 지나가는 것 같았다.초조하기는 윤중성도 마찬가지다. 회사로 출근했지만 조바심이 나 안절부절못했다. 틈만 나면 일어나 밖을 내다보고 감정 부문에서 검사보고서를 보내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윤소겸이 절대 문제가 없을 거라고 말했어도 그의 마음은 여전히 놓이지 않았다.윤중성은 진작에 사람을 시켜 그 조향사를 찾아오게 했다. 어떻든 간에 우선 그 조향사를 옆에 두어야 했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결과가 나오면 한시름 놓을 수 있다. 다만 향수에 문제가 있다는 결과가 나온다면 그 조향사는 가장 큰 주범이다.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윤설아가 서류 봉투를 들고 문을 두드렸다."아빠.""어떻게 됐어?" 윤중성이 바로 일어나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윤설아의 복잡한 눈빛으로 사무실의 문을 닫고 커튼마저 내려버렸다.그녀를 보던 윤중성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설아야, 무슨 일인데 그래?""아빠, 놀라지 말고 들어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서류 봉투를 그에게 건네주었다."결과가 나왔는데......"윤중성이 떨리는 손으로 서류 봉투를 받았다. 보고서를 확인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성분 검사 결과가 빼곡히 적혀있는 보고서를 쓱 보더니 세상이 무너지는 표정을 지었다."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나도 진짜가 아니길 바라. 이런 결과가 아니었으면 좋겠어. 그런데 아빠, 정말 우리 향수에 문제가 있었던 거야.”그녀가 축 처진 얼굴로 이어 말했다.“감정 보고서에 금지 성분이 들어가 있다고 똑똑히 적혀 있어. 향수에 독특한 향을 내는 향료 첨가제가 들어가 있대. 이런 첨가제는 향을 맡은 사람이 중독되게 만들어 향수 판매량을 높일 수 있어. 하지만 피부가 예민한 사람이 사용하게 되면 알레르기 반응이 난다고 해.”그렇다는 건 양미나가 그들을 모함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정말 향수에 문제가 있었던 거다."향료 첨가제?!"
"설아야, 이 보고서...... 정말 믿을 수 있는 거니? 혹시......"그가 머뭇거리다 마음속에 있던 의심을 제기했다."내 말은, 혹시 누가 향수 샘플을 바꿔치기하거나, 검사를 맡겼던 샘플에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공장에서 실험실까지 가는 동안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쳤을 텐데 거기에서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해서.”윤설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아빠! 지금 아빠가 생각한 거 나도 다 생각했던 문제야. 실험실까지 가는 길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으려고 내가 직접 공장에서 향수를 받아 간 거라고. 만약 아빠가 나조차 믿지 못한다면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솔직히 그녀는 윤중성이 자기를 의심했다고 인정할 리가 없다란걸 잘 알고 있다."설아야, 아빠가 어떻게 널 의심하겠어. 아빤 단지...... 이런 중요한 시기에 누가 우리를 해치려 한다면 어떻게든 손을 썼겠다는 생각에 하는 말이야.”"사실 한 가지 의심 가는 일이 있는데 아빠한테 말 해야 할지 모르겠어."그녀가 잠시 머뭇거리며 말했다."아이고, 지금 할 말 못 할 말 가릴 상황이 아니잖아!" 윤중성이 다급히 말했다.“사실 나도 중간에 누가 손을 쓸까 봐 걱정돼서 집에 있던 향수 두 병도 함께 감정 의뢰를 했어. 향수가 출시 되었을 때 겸이를 응원하려고 내가 두 병 샀었잖아.”"어, 그래, 맞아!" 윤설아의 말에 그가 생각이 났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그래서 어떻게 됐어?"“사실 그 두 병에도 금지 성분이 검출되었어. 그렇다는 건 누군가가 중간에서 손을 쓴 게 아니라 향수 조향 단계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거야.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걸 엄마에게 알려줄 수도 없었어. 아빠도 잘 알잖아. 엄마는 알레르기를 잘 일으키는 체질이라는 거. 다행히도 아직 그 향수를 뿌린 적 없대.”‘이 말은 요영이 그 향수를 뿌렸다면 알레르기 반응이 있었을 거라는 말인가?’이렇게 생각하던 윤중성의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 이제 이 사건은 더 이상 모함이나 돈을 뜯어 내려는 사기 문제가 아니다. 향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