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에는 저장하지 않은 번호가 나타났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 빈번하게 전화가 왔었고 그녀는 제성에서의 일에 대한 인상이 아직 남아 있는지라 자연스레 누군지 알 수 있었다.그녀는 전화를 받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대방이 먼저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상대방이 먼저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한소은 씨 맞나요?”“네.” 한소은은 담담하게 대답했다.“한소은 씨 조향 협회에서 당신의 조향사 자격을 정지하기로 했어요. 조사를 받아야 합니다!” 상대방의 말투는 겸손하지도 않았고 어조도 높았다.한소은은 입술을 깨물며 옆에 있는 김서진을 바라본 뒤 말했다. “누구한테 조사를 받죠?”“...”상대방은 한소은이 반문할 정도로 평온할 줄 몰랐다는 듯 잠시 목을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당연히 조향 협회의 조사죠! 지금 당신이 몰고 온 파장이 너무 커서 당분간 조향사 자격을 정지시키고 조사 후에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상대방은 자신이 농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혹은 한소은이 이 일의 심각성을 깨닫게 하려는 듯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제가 농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당신으로 인해 이 업계 전체가 나쁜 영향을 받았어요. 조향사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함부로 얘기를 할 수 있는거죠? 결과가 확인되면 면허도 취소되고 평생 조향업에 몸담을 수 없을 겁니다!”이 말을 다른 조향사가 들었다면 매우 긴장하고, 초조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한소은은 전혀 반응하지 않고 여전히 웃고 있었다.“여보세요, 여보세요. 듣고 있나요? 한소은 씨! 당신이 어떤 배경을 갖고 있든 간에 당신은 조향 협회의 감독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지금 협회는 당신에게 근본적인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그는 계속해서 말을 했고 한소은은 마침내 그의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전 그냥 자격증을 획득한 적이 없어서 당신들이 감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전 조향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그녀의 말에 상대방은 너무
정말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한소은은 더욱 크게 웃었다. 과연 그는 그녀를 이해하고 있다.그녀는 조향사 자격증 같은 것들이 너무 형식적이라고 생각해서 시험을 보지 않았다.예전에 조향사 등급 시험은 본 적이 있었다. 기본적으로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그녀는 조향 방면에서 다소 자신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노형원이 제안했다. 그는 당시 막 창업한 상황이었고 향수 개발을 하는 조향사의 조향사 등급 증명서는 매우 좋은 홍보 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유명하든 유명하지 않든 최소한 시험을 거쳐 인증을 받은 것이다.조향사 자격증 같은 것에 대해서는 노형원은 잘 알지 못했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게다가 한소은은 자신이 혼자 연구한 뒤 대부분이 이론 지식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조향은 유연한 사고와 천부적인 재능이 필요했다. 그녀는 일주일 동안 책을 본 뒤 책 자체에 많은 오류가 있다고 느꼈고 자신은 흥미도 없고 고지식한 사람들과 겨룰 생각도 없었기에 아예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처음에는 시원 웨이브에 있었고, 나중에는 노형원과 선을 긋고 신생으로 갔다. 아무도 그녀에게 어떠한 자격증을 달라고 한 적도 없었고 언급한 적도 없었다.만약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그녀가 이런 시험을 본 적이 없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조향 협회 측에서도 그녀가 각종 국제 대회에 참가해서 각종 상을 받을 줄도 몰랐고, 기본적인 증명서 하나 없을 줄 몰랐다.지금 했던 말들을 모두 취소한다면 꼴이 매우 우스울 것이다.“맞다, 방금 제게 물었던 질문, 사실은...” 한소은은 잠시 곰곰이 생각한 뒤 말했다. “향료에 독을 넣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소비자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할 필요 없어요.”“네?” 김서진은 놀라서 눈썹이 올라갔지만 그녀가 계속해서 말하기를 기다렸다.“외할아버지 일 때문에 제가 이틀 동안 소성에 있던 회사의 실험실 빌렸잖아요? 전 특별한 실험을 했었어요. 향료에 독성 물질을 첨가하는 것이 완전히 가능하고 원래의 향에도 거의 영향을 미치
역시 환아의 대응 속도는 엄청나게 빨랐다. 이틀 동안 모든 소비자들의 불만을 접수하고 마음을 안정시켰을 뿐만이 아니라 회사에 닥치는 모든 부정적인 영향도 바꾸어 놓았다. 기자회견은 한소은이 직접 진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자신의 사무실에서 데이터를 훑어보던 노형원은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책상을 쳤다.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환아는 일 처리가 아주 효율적인 회사였다. 위기를 수습하는 반응속도가 시원 웨이브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문이다.대기업은 역시 대기업이다. 팀원들도 모두 가장 프로페셔널한 팀원들이었다. 예전의 그의 회사 같은 상황에서 이런 위기 사태가 벌어지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나야 부정적인 영향이 사라질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지금 밖에서 관찰하고 공부하는 것이 앞으로 대윤 그룹을 이끌어 나갈 역량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환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편을 알고 상대편을 알아야 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한소은....요즘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두려운 것인가? 아니면 여론의 타격이 무서워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걸까? 하긴, 지금 다들 그녀를 살인범을 보는 눈빛과 비슷하게 보니까.다른 사람들은 차 씨 가문의 이야기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한소은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가 너무나 잘 알고 있어 환아에서는 시중에서 판매하는 향수의 안정성에 대한 검사를 진행하고 반품할 수 있어 대부분 사람들의 원망을 잠재울 수 있지만 의심이 강한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여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김서진이 한소은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려웠을 것이다.하지만 여전히 화가 가시지 않는다. 그동안 대윤 그룹에서 힘들게 일한 생각만 하면 그는 자신이 조금 더 좋은 가문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김서진의 능력이 그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니라 단지 좋은 가정에서 태어났을 뿐이라고 생각한다.이번 사건만 놓고 보아도 그는 전혀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회사의 전문 팀이 해결했을 뿐이다.
게다가 이 노형원이 윤설아와 가깝게 지내니 그의 적인 셈이다. 그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윤 씨 가문에 천천히 진입해 어머니를 빼오고 윤 씨 가문의 호적에 드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 모자가 진장한 윤 씨 가문의 주인이 된다.배다른 그의 누나 윤설아는...자신의 기분이 좋으면 그들 모녀에게 일을 주고 기분이 나쁘면 쫓아낼 것이다!자신과 어머니가 그동안 밖에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데. 어려서부터 빛을 보지 못하고 자란 그와 달리 그들 모녀는 이렇게 큰 저택에서 좋은 것만 먹고 지냈을 것이다. 윤 씨 가문의 주인은 바로 자신인데 말이다! 노형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싱긋 웃었다.“오해예요!”책상을 돌아 담배를 윤소겸에게 건넨 노형원이 문을 닫고 말했다.“이 프로젝트 책임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직원 모두가 소겸 씨가 얼마나 수고하는지 보고 있어요. 조향사도 윤소겸 씨가 데려왔으니 프로젝트도 직접 진행하고 출시일에도 직접 자리를 빛내줄 거잖아요. 윤소겸 씨가 그동안 수고한 모습을 모두가 지켜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그의 공손한 말 한마디와 “윤소겸 씨”라고 부르는 호칭이 윤소겸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예전처럼 거들먹거리는 모습이 아니었다.담배를 건네받은 윤소겸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알면 됐어! 마음속으로도 그렇게 생각하길 바라!”“물론 그렇게 생각합니다!”그의 곁에 붙어 앉은 노형원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였다.“회사에서 앞으로 대윤 그룹의 차 주인이 윤소겸 씨가 될 거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윤 회장님의 아들은 회사 업무를 돌보지 않고 회장님도 회사에 나오지 않잖아요. 프로젝트가 당장 성공을 하고 윤소겸 씨가 지금은 회장이 아니라고 해도 부 회장이잖아요! 제가 어떻게 감히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요?”윤소겸은 싱글벙글하였다. 자신의 기쁜 마음을 숨기고 싶었지만 입꼬리가 그의 마음도 모르고 올라갔다. 그가 싱글벙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만, 그만! 아직 결정되지 않은 일이야! 함부로 말하
하지만 그와 윤설아의 사이가 아직도 의심스러웠던 그가 사실대로 물었다.“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 회사 직원들이 큰아버지 아들을 밀지 않아도 우리 누나를 지지하면 어떡할 거야! 누나가 회사에서 출근하는 동안 인맥들도 있을 거 아니야. 나는 누나를 이기지 못할 것이야. 누나를 지지하는...”“잠깐!”손짓까지 하며 노형원이 그의 말을 끊었다.“저는 윤 부회장의 직원입니다. 그녀를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에요.”“아니라고?”노형원을 의심스럽게 쳐다보는 윤소겸은 그의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처음부터 누나는 이 프로젝트를 너에게 맡기겠다고 했어. 누나가 너를 그렇게 많이 생각해 주고 네가 입사한 것도 누나가 추천해서 들어왔잖아. 그런데 누나의 사람이 아니라고?”“하하...”노형원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아주 웃긴 농담을 들은 것 같은 웃음이었다. 그때 그가 문을 쳐다보았다. 마치 누군가 밖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기라도 한 듯. 곧이어 그가 윤소겸의 곁에 다가와 귓속말을 하였다.“괜찮으시면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만약 그 마음이 있다고 하면 부회장님께서 저를 매형으로 들이시겠습니까?”“.....”깜짝 놀란 얼굴로 노형원을 보던 윤소겸이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무슨 소릴 하는 거야!”주먹의 힘은 그리 세지 않았다. 그렇게 화가 난 것 같지도 않았다.가슴을 어루만진 노형원이 말했다.“그러니까 윤설아가 저를 회사에 데려온 것도 다른 생각이 있어요. 제 생각에는 회사에 자기 사람을 키우고 앞으로 회사가 어떤 방향으로 발전을 하던 그녀에게도 발언권이 생기니까요.”“무슨 말이야?”윤소겸은 눈을 깜빡거렸다.“그러니까, 윤설아는 처음부터 윤소겸 씨와 싸울 상대가 아니에요. 앞으로 회사가 윤소겸 씨의 소유가 되면 자신의 위치가 불안할까 봐 그런 거겠죠.”그의 말에 집중을 한 윤소겸은 자신의 손에 담배가 있다는 사실도 깜빡 잊었다. 담배가 거의 타들어가 하마터면 그가 데일뻔했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손을 털어 담배를 재떨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노형원은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그제야 윤소겸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사무실을 나섰다.문이 닫힌 것을 확인한 노형원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리지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윤소겸 이 멍청이가 아직도 자신을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있어!하지만, 그런 그의 행동도 자신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다.윤 씨 가문, 언젠간 그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ㅡㅡ“엄마, 집에만 있으니까 너무 갑갑하지 않아?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자. 이틀 뒤에 경매가 있으니까 나와 함께 쇼핑하면서 기분전환이라도 해.”윤설아가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쇼핑하며 말했다.요영의 안색이 유난히 어두웠다. 모든 것을 자신의 손에 쥐고 흔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최근에는 자신의 남편 마음도 제대로 쥐지 못하였다.예전에는 집만큼은 잘 들어왔지만 최근에는 집에도 자주 오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밖에 있는 다른 여자에게 꽂힌 것이다. 사생아가 집에서 매일 자신의 눈에 띄는 꼴을 보면서도 어찌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녀는 더욱 짜증이 났다.“사면 어떻고 안 사면 어떻니. 결국 내 것이 아닌걸.”요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손의 점점 힘이 풀렸다. 아무런 의욕도 없었다.“엄마, 자꾸 그런 말 하지 마!”윤설아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엄마는 자신감이 넘치고 매력도 넘치는 사람이었어! 왜 자신의 것이 아니야? 엄마 유명한 배우였어! 지금도 이렇게 예쁜데!”요영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예쁘긴, 이젠 나도 아줌마야.”“안녕....”곁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안녕하세요, 혹시 요... 요영 여사님 맞으세요? 진짜 배우 요영이에요?”백화점 유니폼을 입은 직원의 손에는 연필과 공책이 쥐어져 있었다. 직원은 얼어붙은 표정과 신난 표정으로 기대를 하는 눈치였다.요영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녀는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진짜 진짜 요영 님이세요! 아아아! 저 진짜 팬이에요!”“죄송합니다. 제가 실례했네요. 하지만 저 진짜 팬이에요! 진짜 광팬이에요. 은퇴
윤설아는 잠시 멈칫하다 바로 부인했다.“아니야! 진짜 팬이야! 어떻게 내가 준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그리고....”“아직도 연기하는 거야?”요영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내가 진짜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우리가 백화점에 들어왔을 때부터 저 여자가 우리를 뚫어지게 쳐다봤어. 네가 눈치 주니까 달려온 거잖아.”“그리고 내 팬이라고 해도 이렇게 공개된 장소에서 사인을 하러 온다고? 업무와 전혀 상관없는 일로 손님을 방해하면 어떤 결과인지 모를 것 같이? 너의 지시가 아니었다면 저 직원은 완전 신입인거지나! 아직 교육을 덜 받은.”한참 후 그녀가 말했다.“근데, 사원증을 보니 신입은 아니야. 설아야, 너의 마음은 알겠어. 하지만 이러지 않아도 돼! 늙으면 늙은 대로 살면 되니까!”“진짜 미치겠네!”윤설아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여사님의 눈을 속이지 못하겠어! 하지만, 이렇게 똑똑한데 왜 그렇게 고집불통이야. 아무 명분도 신분도 없는 여자는 무시하면 되잖아. 진짜 경쟁 대상이라고 생각해?”요영은 고개를 저었다. “경쟁상대라고 생각하지 않아. 아버지 마음속에 그들 모자가 제일 중요하니까. 너도 아빠가 예전부터 남자아이만 좋아했다는 걸 알잖아. 밖에서 아들을 낳아온 것도 그의 명이야. 언젠가 그는 우리 모녀를 버릴 거야.”“우리를 버리게 전에 우리가 먼저 버리면 되지.”윤설아가 말을 하며 그녀의 몸을 돌리자 그녀의 눈앞에 거울이 비쳤다.“엄마, 잘 봐. 엄마는 아직도 너무 예뻐! 엄마가 지금 다시 연기를 한다면 다시 대상을 손에 쥘 거야! 아무것도 없는 여자를 무서워하면 어떡해!”“엄마 기분 나쁘다고 했지? 내가 기분 좋게 만들어 줄게!”요영은 거울에 비친 윤설아의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을 보고 물었다.“설아야, 뭐 하려는 거야?”“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재밌는 연극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래!”윤설아가 웃으며 요영의 팔에 팔짱을 꼈다.“여기 진짜 예쁜 옷이 없네. 우리 저쪽으로 가보자”두 사람은 얼마
”엄마, 지금 화가 나서 사리분별이 안 되는 거야! 저 여자가 아빠 카드를 긁고 싶어도 엄마가 긁게 해야 긁을 수 있지! 엄마, 핸드폰 어디 있어?”윤설아는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고 요영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보면서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핸드폰을 건넸다.“핸드폰은 왜?”핸드폰을 받은 윤설아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안녕하세요, 은행이죠? 전 윤중성 씨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 네, 맞아요. 다른 게 아니라, 제가 실수로 신용 카드 몇 장을 잃어버렸는데,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주워서 긁기라도 할까 봐 걱정되서요. 그래서 말인데, 은행에서 잠시 제 남편 명의로 되어 있는 모든 카드를 정지시켜줄 수 있나요?”요영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윤설아를 바라보며 멍하니 서있었다.화가 너무 나서 그런 건가, 그녀는 왜 이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지? 그럼 전에 내연녀를 상대하려고 했던 연기들과 수단들은 다 뭐였지?이내 기분이 좋아진 요영은 여유로운 얼굴로 유리창 쪽을 쳐다보았고 그 안에 있는 여자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전혀 모른 채 실실 웃으며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네, 주민 등록증 번호는… 핸드폰 번호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전화를 끊은 윤설아는 핸드폰을 엄마에게 돌려주며 말을 이어갔다.“엄마, 이제 좋은 구경만 남았어!”두 사람은 근처에 자리 잡고 앉아 여유롭게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곁에 커다란 식물 몇 개가 놓여있었기에 그녀들은 맞은편을 볼 수 있지만 맞은편 각도에서는 식물에 막혀 두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물건을 잔뜩 고른 진고은은 손가락 두 개에 카드 한 장을 끼고 뽐내듯이 결제하려고 했다. 물론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지만 요영은 진고은이 남편 카드를 꺼내든 순간,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쥔 채 화가 나서 이를 갈았다!판매원이 공손하게 카드를 받아 뒤돌아서 결제를 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진고은에게 뭐라고 얘기를 전했고 진고은은 다른 카드를 꺼내 판매원에게 건넸다.예상했듯이 몇 번의 시도 끝에 판매원의 태도는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