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맥과 원료에요. 좋은 인맥과 원료도 없고 추천받을 만한 전문가도 없이 당신 혼자 얼마나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최근에 신제품 개발에 성공했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근데 그렇다고 무명 조향사가 대회에서 상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그래서요?” 한소은은 그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알고 싶었다. 그가 계속 헛소리를 하는 이유가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것인지.“그래서 당신은 조금 더 똑똑해져야 해요.” 로젠은 계속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는 지금 억지로 짜낸 웃음이 얼마나 보기 흉한지 알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자신의 ‘매력’을 어필하고 있었다. “똑똑한 여자는 기회를 잡을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최고의 기회가 당신 앞에 찾아왔습니다.”한소은은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그래요? 그 기회라는 것이 어딨죠? 저는 왜 안 보이는 거죠?”“에이~.”로젠은 그녀에게 아주 가까이 접근했다. “사람은 때때로 먼 곳만 보지 말고 눈앞에 있는 것을 봐야 합니다. 지금, 기회는 당신 앞에 있습니다. 이해하셨나... 아! 아! 아아아!!!”그가 손을 뻗는 순간 한소은이 그의 손을 정확하게 잡았다. 이번엔 그의 손을 정확하게 쥐고 흔들었다.이번엔 골절이 아니라 팔 전체가 탈골됐다.“아! 아! 아아아악! 이 망할 년!” 로젠은 아파서 소리를 질렀다. 그는 매번 쓰던 수법이 통하지 않자 돌변하여 그녀에게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당신은 당신 스스로가 뭐라도 되는 줄 알죠? 두고 보세요. 당신 이 조향사 세계에서 살아남지 못하게 해줄게요. 내가 영원히 고개도 못 들고 다니게 할 겁니다!”“그래요?” 한소은이 앞으로 다가오자 로젠은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뭐 하는 거예요, 오지 마세요!”그는 한소은의 눈빛을 보고 계속해서 하려던 욕을 억지로 삼켰지만 이렇게 물러설 수는 없어서 그녀를 협박했다. “이번 향수 대회에 참가 자격 또한 박탈하겠어!”한소은은 개의치 않고 웃기만 했다. 그녀는 다른 한쪽 손도 똑같이 꺾은 뒤
로젠은 부리나케 도망갔고 가까운 병원을 찾아 손을 치료했다.강시유가 도착했을 때 그의 탈구됐던 팔은 이미 제자리를 찾았고 부러진 손목도 모두 깁스를 한 상태였다.그는 노형원과도 싸워서 얼굴에 상처가 나 있는 상태였는데 두 팔마저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괜찮아요?” 강시유는 한눈에 봐도 별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가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 그녀를 불렀기 때문에 그를 위로해 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가 스스로 병원비를 수납하고 퇴원하는 것을 도와주었더니 그의 안색이 그제야 괜찮아졌다.“어떻게 싸웠길래 이렇게 된 거예요. 싸울 때 아주 용감하게 싸웠나봐요.” 그녀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그를 부축하여 차에 태웠다.차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매라는 신호를 보내고 운전석에 앉은 강시유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안전벨트 매는 것을 도와주었다. 안전벨트를 채운 뒤 그녀가 물었다. “호텔로 갈까요?”“아니면 당신 집으로 가려고요?” 그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강시유는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그녀도 지금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말을 걸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부러진 손으로 담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병원 갔다 왔어요?” 그가 물었다. 강시유는 운전을 하면서 말했다. “당신 데리러 왔잖아요!”“내 말이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거 알잖아요.” 그는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안 죽었죠?”“...”강시유는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 “갈비뼈 몇 개가 부러졌지만 생명엔 지장 없어요, 쉬면 나을 거래요.”“그럼 괜찮은 거네요.”그의 얼굴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감히 나를 건드리다니.”“당신이 때린 거 아니예요? 그리고 당신이 우세했던 것 같은데!” 그녀는 잠시 멈춘 뒤 말했다. “게다가 어찌됐든 저는 그의 약혼녀예요.”그 말의 뜻은 그는 로젠에게 손을 댈 수 있지만 로젠은 그에게 손대면 안된다는 의미였다.하지만 로젠은 원래부터 그런 도리를 따지는 사람이 아니다. “그게 뭐가 어때서요? 내가 뭐
두 명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각자 마음속에 하고 싶은 말을 담아두었다.잠시 말을 하지 않던 로젠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분노가 가라앉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급기야 나중에는 아예 창문을 열고 담배꽁초를 던지기까지 했다.강시유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지만 말을 꺼내진 못하고 계속 운전에 집중했다.“그 여자 태권도 할 줄 알던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요?!” 로젠은 사나운 눈빛을 쏘아대며 강시유에게 화를 냈다.강시유는 의아해하다가 그의 사나운 눈빛을 보고 깜짝 놀랐다. “누구요? 누가 태권도를 할 줄 알아요?”밑도 끝도 없는 한마디에 그녀는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한소은!” 만약 그가 전에는 이 이름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면 오늘부터는 이 이름에 대해 명확하게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지금까지 그는 단 한 명의 여자로 인해 수모를 겪은 적이 없었다. 정말 수치스러웠다.그는 지금까지 여자들을 갖고 놀았다고 자부하며 살아왔다. 조금만 유혹하면 순순히 넘어오고 넘어오지 않는다면 그녀들이 얻는 이익은 없었다. 이번에도 그녀에게 향수 대회 우승을 선사할 수 있었고 인맥과 원료도 소개해 줄 수 있었지만 그녀는 모두 거절하고 그의 손을 부러뜨렸다.강시유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누구요? 한소은이요?!”그녀는 여전히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소은이 태권도를 할 줄 안다고요? 무슨 태권도?”“어떤 태권도를 배웠는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 당신 대학 친구 아니예요? 몇 년 동안 함께 했으면서 그녀가 뭐 했는지도 몰라요?!” 로젠이 씩씩대며 말했다.머릿속이 충격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강시유는 지금 자신이 생각하는 태권도가 사람을 때리는 태권도가 맞나 싶었다.그런데 한소은이 태권도를 한다고? 그럴 리가!그녀를 안지 오래됐지만 그녀가 사람을 때리는 것도 본 적이 없었고 심지어 싸우고 욕하는 것조차 본 적이 없었다.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 다시 말했다. “그래서 내가 아는 그 한소은이, 예전 우리 회사에서 일했던
“그럴 리 없어요!”로젠은 단호하게 말했다.그가 격해진 것을 보자 강시유는 잠시 숨을 돌렸다. “잠시만 기다려봐요.”그녀는 호텔에 차를 세운 다음 사이드 브레이크를 채우고 핸드폰을 꺼내 한소은의 사진을 꺼내 그에게 보여주었다. “이 사람 맞아요? 확실해요?”이전에 진해에서 본 적 있다고 했지만 그녀는 로젠의 기억이 확실하지 않은가 의심했다.“그래 맞아요, 그 사람이예요!” 로젠이 말했다. “정말 모르는 거 확실해요?”두 사람은 서로 당황해하고 있었다.“...한소은을 다시 보게 되네.” 강시유가 나지막이 말했다. ——한소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먼저 두 개의 목상을 꺼내 거실 캐비닛에 놓은 다음 종이로 싼 후에 샤워를 하러 갔다.원래 돌아오면 샤워를 하긴 했지만 그 더러운 쓰레기가 손에 닿았다고 생각하니 역겨워서 씻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그 당시 그녀는 그와 말씨름하기 싫어서 자세히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의 말에는 매우 깊은 뜻이 있었다.그는 자신이 이번 대회의 심사위원이고 그녀가 상을 못 받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녀도 그의 말이 절대 말로만 그녀를 겁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확실히 그런 권한이 있거나 능력 또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대회 명단은 이미 대회 심사위원들에게 공지되어 있으니 그가 아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지난 대회에서 그는 특별 게스트로 초대된 적 있으니 이 업계에서 어느 정도 지위가 있을 것이다.단지 그런 신분의 사람이 이런 역겨운 행동을 할 줄은 몰랐다.목욕을 마치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조금의 간식을 꺼냈다.김서진은 그녀가 부엌에 들어가는 거를 허락하지 않았지만 때때로 그녀가 집에 혼자 있거나 일찍 돌아오는 것을 고려하여 간식 캐비닛을 장만해서 여러 가지 간식들을 넣어놓았다.안에는 대부분 그녀가 좋아하는 간식들이었고 심지어 그녀조차도 그가 어떻게 자신의 취향을 잘 알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를 생각하면 입꼬리가 올라가고 행복하다.몇 가지의 간식과
너무 집중해서 김서진이 돌아왔는데도 눈치채지 못했다.김서진은 들어와서 그의 아내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것을 보았다. 한 손엔 간식을 쥐고 있고 그녀의 다리는 햇볕을 쬐고 있었다. 텔레비전은 켜져 있었지만 그녀는 분명 보고 있지 않은 듯했고 간식을 입에 넣고 있지만 입은 열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정신이 나간 듯한 모습이었다.김서진은 걸어가 허리를 굽히고 입을 벌렸다.그가 걸어오자 한소은의 정신이 번쩍 들었고 그가 자신의 간식을 먹으려고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을 보자 빠른 속도로 간식을 자신의 입에 넣었다.“하하, 못 먹었네...”그녀는 그가 그녀의 입에 직접 입맞춤을 할 줄 예상하지 못했다. 아직 밖에 있던 절반가량의 간식을 자신의 입에 모두 넣었다. 그는 그녀 입 주위에 있는 부스러기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맛있다!” 한소은은 멍 때리며 가만히 있었다.그가 직접 오니 그녀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김서진은 입술에 키스를 한 뒤 그녀를 안아 올려 자신의 몸 위에 앉혔다. “뭐 하고 있어요, 내 생각 하느라 정신이 없는 거예요?”그는 정말 자기애가 넘친다!“만약 아니라고 해도 절 바닥에 던지시면 안 돼요?” 그녀는 마치 그가 땅에 내동댕이 칠까 봐 두려워서 양손으로 그의 목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그럴 리가요.” 김서진은 웃으며 이마에 뽀뽀를 했다. “전 반성해야 할 것 같아요. 왜 매일 우리 아내는 날 생각하고 있지 않은 거지? 난 매일 그녀를 생각하고 있는데!” 한소은: “...”정말 백 점짜리 말투다!“저도 당신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할 일이 너무 많은 걸요. 오늘 점심에 팀장님과 밥 먹었어요. 저희 해변으로 놀러 가기로 했어요. 아마 곧 갈 것 같아요. 더 추워지기 전에 가야 해요.”“네. 갔다 오세요.” 그는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의견을 내비치지 않았다.“현아 언니가 말하기를 대회 출품작에 대해 보고받았대요. 예선 결과도 기다려야 하니 안심하고 신제품 개발을 이어나갈 수
“저 화장실 갈래요.”그녀는 소변을 보고 싶었지만 김서진은 그녀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꼭 껴안았다. “안돼! 말하고 가!”“아, 급해요!” 그녀에게 그 오글거리는 단어를 다시 말하라니 그녀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급하면 빨리 말해요. 어차피 한마디면 되는데.” 김서진은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착하지, 한 번만 더 말해줘요.”“저...” 한소은의 볼이 뜨거워졌다. 심장도 빨리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를 밀치고 똑바로 앉아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말했다. “역시 내 남편이야!”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마치 붉은 노을 같아 보였다.“네.” 김서진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당신에게 이런 남편이어서 기뻐요.” 한소은: “...”두 발이 땅에 닿자 그녀는 곧게 섰다. “저 화장실 갈 거예요!”재빨리 몇 결음 나아가다 문득 한 가지 일이 떠올라서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맞다!”“응?”“로젠에 대해 좀 알아요?” 그녀는 김서진의 인맥이 넓었기에 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니요, 잘 몰라요.” 김서진은 생각을 좀 한 뒤 고개를 저었다. “왜요? 그 사람이 누군데요?”그가 모를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한소은도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물어봤어요. 조향사인데 저희랑은 거리가 멀어요. 모르는 게 당연한 거예요.”그녀가 화장실 가는 것을 본 뒤 김서진은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우리랑 거리가 멀다는 게 무슨 뜻이지? 뭔가 소외된 기분이 들었다.그는 옆 선반에 두 개의 목각인형이 더 놓여있는 것을 보고 일어나서 하나를 집어 들자 은은한 나무의 향기가 코 안으로 들어왔다.한소은은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김서진이 목각인형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는 말했다. “어때요? 제 안목 괜찮죠?”“좋아요, 남 녀 한 쌍.”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이 인형의 얼굴 표정도 세세하고 목재도 매우 정교해요. 이 집의 나무 향이 독특하면서도 따로 향수를 쓰는 것 같지는 않은데, 전
......!!!한소은은 멍하니 몇 초 동안 그를 바라보다 말뜻을 이해하고 나서야 반응했다. 그녀는 그의 어깨를 연신 두드렸다. “당신, 미쳤어요?!”“아!”김서진이 짧게 탄성을 질렀다. “이런 일을 당신 스스로 얘기하게 한 것은 제 부주의로 인해 일어난 일이지만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돼요.”“제가 언제! 제가 언제!!” 한소은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제가 언제 아이를 낳겠다고 했어요! 뭘 제가 스스로 얘기했다는 거예요!”그녀는 어떻게 자신이 한 말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그는 갑자기 말의 뜻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그녀를 감싼 손을 풀고 김서진은 다시 두 개의 목각인형을 집어 들었다. “이거 1명의 아들과 1명의 딸 원한다는 뜻 아니었어요?”한소은: “...”어째서 그의 생각은 항상 그쪽으로 향하는 것인가?!그녀는 그의 생각에 정말로 감탄했다.“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냥 목조 가게를 지나다가 이 인형이 귀여워서 사 온 거예요. 적어도 당신이 말한 그 뜻은 절대 아니에요!”그녀는 이번 일로 인해 단단히 결심했다. 다시는 이런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행동하기로!김서진도 말의 뜻을 이해했는지 실망한 눈빛으로 바뀌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요!”그의 실망한 눈빛을 보자 한소은은 순간 죄책감을 느꼈고 자신의 말이 너무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는 아이를 기대하고 있지만 그녀는 정말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김서진이 다시 말을 했다. “괜찮아요! 그 뜻이 아니어도 지금부터라도 천천히 생각해 보면 되죠! 우리... 이제부터라도 고민해 보는 건 어때요?”“김! 서! 진! 저리 가!”방금 2초 동안 죄책감을 느낀게 부끄러울 정도로 그녀의 생각이 빠르게 바뀌었다.그이 혼자 스스로 생각해 보라고 해야겠다! ——인적 없는 깊은 밤병원은 조용했고 이미 면회 시간은 끝났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지만 항상 특별한 경우가 존재했다.노형원은 교통사고를 당한 후 1
그는 들리지도 않는 듯 여전히 그녀와 얘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요영 여사는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얘기 안 할 거면 나 그냥 갈게.”“아들이 교통사고로 갈비뼈가 부러졌는데 어떻게 가만히 계시고만 있을 수 있죠.”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지만 비아냥거리는 어투로 말했다.“그래서 너 보러 온 거 아니니!”“그렇죠, 이제 와주시다니 정말 감사하네요.” 그는 평소에는 어머님께 이렇게 말하지 않지만 지금은 너무 화가 나 있는 상태이다.사람이 가장 약할 땐 의지할 사람을 찾기 마련이지만 그에게는 그럴 사람조차 없었다.“형원아! 너 누구랑 얘기하고 있는 거야?” 그녀의 말투는 매우 진지했다. “내가 아무리 어려워도 도와줄 수 있는 한 도와줄 거야. 나도 수소문하고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미안하지만 넌 아직 나한테 그런 말 할 자격 없어!”훈계를 듣고 난 후 노형원이 정신이 좀 맑아졌다.그는 얼굴을 돌려 앞에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귀하고 우아했다. 설령 50살이 넘었다 하더라도 그녀의 얼굴엔 세월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의 재혼 선택은 옳은 듯했다.“엄마, 죄송해요. 이렇게 말하면 안됐는데.” 그는 예전과 같이 목소리를 낮추었다.“됐어!”요영 여사는 한숨을 쉬었다. “네가 다쳐서 마음이 복잡한 건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대략적인 소식만 들었을 뿐이다. 당시 차도 별로 없었는데 어떻게 갑자기 사고가 난 거야?노원형은 대답 대신 다시 물었다. “엄마 로젠 그 사람이랑 어떤 관계에요?”요영 여사는 어리둥절했다. “왜 그런 걸 묻는 거야?”“아니에요. 그냥 소개해 주신 사람인데 누군지 잘 몰라서.”“전에 우연히 만났는데 나도 그를 한번 도와주고 나도 그에게 신세 한번 졌었다. 그가 조향사들 사이에서 그렇게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마침 너한테 그런 일이 생겨서 내가 도와달라 그랬어. 왜 뭐 무슨 문제 있니?”그가 이렇게 묻자 요영 여사는 바로 두 가지 일에 대해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노형원은 여전히 대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